치료!! 치유!!! 신유!!!

[스크랩] 정신질환과 기독교 치유

하나님아들 2014. 1. 22. 14:24


정신질환과 기독교 치유




‘심령 대 부흥회, 신유은사, 각종 난치병에 고생하는 사람들은 와서 보라!’ 대체적으로 이런 내용의 포스터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병 고치기 위해 금식 기도원에 간다거나 안수기도 전문목사를 찾는 것은 극히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혀가고 있는 것도 같다.

다음은 ‘신경정신의학’에 게재된 논문 가운데 기록된 00장로교회와 000금식기도원에서 있었던 안수기도 장면들 이다1).

00장로교회 기도실 - 두 평 남짓한 온돌방에 열 댓명의 사람들이 중앙을 향하여 긴장된 표정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목사는 방의 한 쪽 벽에 기대앉아 환자들을 한 명씩 가운데로 불러내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대부분 만성적인 병색에 찌든 모습이었고 불안하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목사는 간단하게 환자의 병명 또는 증상과 구체적 신앙생활에 대하여 묻고 아픈 부위나 환자가 말하는 병명에 무관하게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안수기도를 진행하게 된다. 우선 환자에게 벽을 바라보고 서서 눈을 감게 한 다음 ‘이제부터 마귀를 쫓겠다’고 선언을 한다. 큰 소리로 ‘이놈아, 뭐 하는 놈이냐? 언제부터 들어온 놈이냐?’ 등의 질문을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빠르게 한다. 또한 몸을 흔들어 보라고도 하고 손가락으로 마귀가 몸 속에 들어온 날짜를 세어보라는 등의 명령을 마귀에게 직접 이야기하듯 환자에게 한다. 대부분의 환자는 마치 자동반응을 보이듯 목사의 명령에 따르게 된다. 환자의 대답은 때로 강요에 의해 엉뚱하게 튀어나오는 적도 있는 것 같았다. 이후 ‘이제부터 성령에 사로잡힌 몸이다’ 라는 목사의 말에 환자는 벽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뒤로 살며시 쓰러지게 된다. 이때부터 ‘마귀야 물러가라’는 소위 축사(逐邪)의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 동안 조금 떨어져서 명령만 하던 목사가 환자에게 가까이 가서 어디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라고 한 후 그곳을 어루만지거나 대개 가슴, 배, 옆구리 등 세 군데를 집게손가락 끝으로 깊숙이 찌르며 아프냐고 묻는다.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아직도 마귀가 그대로 있는 거라고 말하며 아프지 않다고 하면 마귀가 물러갔다며 목사 자신이 나은 만큼 두 팔을 흔들어 보라고 말하면 환자들은 가만히 있기도 하고 각양각색으로 두 팔을 흔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스가와 샤오레바 에르사베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게 된다. 환자가 일어나 눈을 뜨면 ‘자, 이제 괜찮을 꺼야. 아프지 않지? 아무래도 좀 다르지?’ 등으로 환자가 목사의 말에 수긍하기를 촉구하는 말을 반복한다.

000금식기도원 - 어두컴컴한 예배실에는 2백여 명 정도의 신자들이 강단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빽빽이 앉아있다. 최00목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회중은 전도사의 인도에 따라 몇 가지 찬송가를 부르면서 실내는 점점 흥분의 도가니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찬송가의 박자가 점점 빨라졌고 박수소리도 이에 따라 빠르고 요란스러워 졌으며 어떤 사람은 손바닥을 치다 못해 자신의 무릎을 때리거나 두 주먹으로 마룻바닥을 세차게 두드리기도 하였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자 여기 저기서 울부짖으며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온 몸을 떨고 사방으로 몸을 흔들거나 일어나 두 발을 구르며 점프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고 스스로의 흥분에 못 이겨 거의 망아상태(忘我狀態)에 이르른 지경이었다. 이 터질 듯 한 분위기는 목사가 나타나자 극도에 달하여 온몸을 뒤흔들다가 그 자리에 꼬꾸라져 실신상태에 이른 환자도 있었다. 목사는 가운데로 난 통로를 한 번 지나가면서 그 주변의 사람들 머리 위에만 잠시 성경책을 얹었다 떼는 것으로 안수를 대신하였다.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머리를 조아려 목사 앞에 드리우려 했고 예배실 구석에 위치하여 가운데로 올 수 없는 사람들은 더욱 미칠 듯이 온몸을 흔들어 댔다. 목사가 퇴실한 후에도 실내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단위에 선 전도사는 ‘이제 기적이 일어났다. 모두 병이 나았다. 마귀가 이 속에서 깨끗이 물러갔다’고 외쳤다. 한 시간이 지난 후 폐회가 되었어도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땀과 열기에 찬 분위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음은 Henri F. Ellenberger가 쓴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책에 수록된 예이다.2)

1775년 1월, 부자와 가난한 자, 신사들과 야만인들 할 것 없이, 그 가운데는 물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치료자 중의 하나인 요한 요셉 가스너(Johann Joseph Gassner) 신부를 보고싶은 마음에서 뷔템베르그의 소도시 엘방겐에 운집해 있었다. 그는 카토릭과 개신교 권위자들과 의사들, 여러 계층의 신사들, 중산층들, 그리고 신자들과 비신자들 앞에서 환자들로부터의 축사(逐邪) 행위를 시행하였다. 그의 모든 언행과 환자들의 언행들을 공증인이 기록하였고, 분별력을 갖춘 목격자들이 그 공식적인 기록에 서명하였다. 가스너 자신은 겸손한 시골 사제였다. 그러나 그가 예복을 입고 자리에 앉아 그의 앞에 무릎꿇고 있는 환자를 맞이하기만 하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목격자들의 증언만큼 그의 공식적인 기록들도 무수히 많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 중하나인 Abbe Bourgeois의 증언을 들어본다.




첫 번째 환자들은 간질발작 때문에 수도회에서 쫏겨난 두 명의 수녀들이었다. 가스너는 그들 중 하나에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꿀라고 하면서, 간략하게 그녀의 이름, 병, 그리고 그가 명령하는 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동의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녀는 동의했고 그때 가스너는 라틴말로 장엄하게, “이 병에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내재되어 있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지금 즉시 나오라”라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그 환자는 곧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가스너는 이 발작이 자연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마귀로 인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는 그가 마귀를 이길 능력이 있어서, 그 환자의 몸 여러 곳에서 그 마귀가 발작을 일으키게끔 라틴말로 명령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슬픔, 어리석음, 꼼꼼함, 분노 등등과 심지어는 죽음의 표상까지 차례로 밖으로 표출되도록 끄집어내었다. 그의 모든 명령은 엄격하게 실행되었다. 그때 마귀는 그 힘을 상실하여 쉽게 제거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가스너는 그렇게 하였다. 곧 이어 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두 번째 수녀를 다루었다. 집회가 끝이 난 후에, 아베 Bourgeois는 큰 통증은 없었는지를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이 희미하며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가스너는 과거에 이미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었던 귀부인을 세 번째 환자로 치료하고 있었다. 그는 그 우울증을 밖으로 축출하였고 다시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그녀에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위의 예들을 보면서, 현재 우리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독교치유가 200년 전 유럽에서 행해졌던 축사행위와 너무도 많이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다른 점은 그들은 200동안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축사현장에서 일어났던 기적과 같은 일들로부터 인간내면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학문(정신의학과 심리학)으로까지 승계발전 시켜왔는데, 우리는 18세기 유럽에서처럼 아직도 악마가 판을 치는 마성적 세계 속에 우리의 의식을 잠재우고 있는 점이다. 한국에서 기독교 치유는 이미 치료의 한 방법으로 선택되고 권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정신과를 찾아오는 환자 중 상당수가 이미 신앙치료를 받은바 있다는 보고들이 있다3). 현재 이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독교 치유의 모델은 신약 속의 예수라는 데에는 물론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치유는 그 동기, 과정 및 결과들 속에 과연 예수의 정신을 옳게 살려내고 있는 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치유사역은 얼마나 성서적인가?’ ‘예수의 치유사역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한국에서의 기독교 치유에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한 문제는 예수의 정신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인가?’ 라는 것들을 한번쯤 생각해 봄으로써 현재 성행하고 있는 기독교 치유의 참 모습을 돌이켜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 이유란 우선 혼란스러운 기독교 치유가 과학적 치료의 시기를 놓치게 함으로 병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기독교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켜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는 해악을 야기 시키고 있음이 두 번째 이유이다.




1. 히브리전통의 병과 치유의 개념




히브리 전통의 대전제는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 분은 공의로운 자 완전한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까지도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며 그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다4). 신명기 32:39에 보면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 찌르는 것도 나요 고쳐주는 것도 나다. 내 손에 잡은 것을 빼 낼 자 없다’ 라고 야훼가 얘기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이사야 45:7에서도 나타난다. 야훼 스스로가 ‘빛을 만든 것도 나요, 어둠을 지은 것도 나다. 행복을 주는 것도 나요, 불행을 주는 것도 나다. 이 모든 일을 나 야훼가 하였다’고 선언한다5). 이들에게 있어서 신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들과 모든 종류의 질병을 비롯한 불행과 고통을 주는 이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이들의 미약한 내세관 때문에도 더욱 강화되었다. 유대교 역사의 아주 후기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내세에 대한 개념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개인이 받는 상이나 벌은 현세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조금이라도 알려지려면 그것이 현세에서 보여져야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세와 그리고 현세의 즉각적인 상과 벌을 지나치게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건강과 부(富)는 하나님의 상이고, 질병과 불행은 하나님의 벌이되는 것이었다6).

이와 같이 병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방법으로는 그 병을 물리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에 대한 치료는 엄밀히 말해서 치료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7). 즉 치료는 하나님에 대한 용서의 기도나 예언자의 간구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히브리 전통의 치유행위는 ‘마귀야 물러가라’하는 식의 축사(逐邪)의 행위는 성립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주변국가들 즉 애급, 바벨론, 페르시아 등에는 질병과 해악의 원인이 악령에게 있다는 견해가 지배했다. 특히 이원론이 잘 발달되어 있었던 페르시아에서는 질병을 어둠의 세력들의 활동 중 하나로 보았다8). 그래서 이들 나라의 치유행위는 귀신 쫓는 일이 핵심이 되었고, 축사는 기도, 주문 그리고 종교적 의식수행의 방법을 통하여 행해졌다9).

히브리 전통에도 포로기 이후에 가서는 야훼와는 독립하여 활동하는 영적 세력들에 대한 견해가 어떤 형태로든 생겨나게 되었지만, 이것은 다만 페르시아, 바벨론, 애급 사람들의 견해가 그들 신들의 마귀적 힘을 인정받게 하기 위해 히브리 사상에 대해 침략을 감행했던 결과로 보여진다10).




2. 예수의 치유사역의 모습




한편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은 그리이스와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의학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병에 대한 개념은 변함이 없었다. 예수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종교적 치유가 행해지긴 했어도 랍비들은 그런 류의 사건들을 큰 의혹을 품고서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라도 덜기를 구했기 때문에 치유자는 출애급기 15:26을 각색한 말을 속삭이는 치료법을 암암리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급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 이러한 치료법을 당시 유대교의 주요 학파들은 마법이나 마술로 여겨서 금지시켰다고 한다11).

이렇게 모든 병은 신의 노여움의 징표라는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던 그 당시에, 예수의 병에 대한 태도는 유대교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의 병에 대한 태도는 차라리 새로운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병에 대한 태도는 어디서부터 유래된 것일까?

히브리 전통 속에 치유에 관한 또 다른 맥락의 체험과 견해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법전의 일부가 되지는 못했지만 마찬가지로 소중히 보존되었다고 한다. 이 맥락이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의 근거가 되었던 것들이다.

첫째, 그것은 어떠한 죄도 병든 자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 치유였다. 예를 들어 엘리야와 엘리사가 어린아이를 치료해 준 것과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준 사건에서 나타나는 정신이다. 둘째, 이러한 치료행위들은 야훼의 능력에 의한 동정행위라는 견해가 내포되어 있었다(왕상 17:17-23, 왕하 4:18-37). 그러니까 질병은 죄의 대가라거나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시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욥기 또한 죄의 대가로서의 질병관에 격렬하게 항변했던 좋은 본보기이다. 셋째, 악의 세력에 관한 언급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호세아는 야훼가 악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을 가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악하기 때문에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호세아 6:1-11, 13:12-15)12).

예수는 이와 같이 유대사상 안에 일반적으로 용인되지 못했던 구약의 또 다른 사상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맥락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병자를 고쳐줄 때마다 거의 그의 행위를 용서와 결부시켰고 효과적인 치유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환자의 믿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면에서 예수의 치유는 또 다른 깊은 뜻을 독특하게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행위로서의 치유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치유형태가 귀신을 쫓아내는 모양이었거나,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는 것이었거나 간에, 그 병 자체를 고쳐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병을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천벌이라고 규정짓지 않으면서 용서와 믿음을 연결시키려고 했던 예수의 치유행위에서 우리는 또 한편 구원과 치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함13)과 동시에 징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의 사역에서는 방법이 아니라 구속적인 관심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관심은 전인(全人)을 포괄하는 것이었으며 전인을 완전하게 하는데 있었다.

인간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야말로 예수 치유의 독특성이고, 이러한 사랑이 기적의 중심에 있음으로 해서 그 기적은 위대해지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진정한 치유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잭 프로본샤(Jack W. Provonsha)14)는 주장하면서 ‘의학의 영적인 아버지’는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조정약을 가져다 준 나사렛 마을의 예수였다고 말한다.




3. 예수 이후에서부터 한국까지




예수의 치유행위 형태는 초대교회 시대에까지 활발히 행해지다가 A.D. 4세기경 이교도의 침입으로 기독교 문명이 파괴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념보다 ‘하나님의 보복’에 대한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고, 이교신앙의 영향으로 질병이란 신(神)에 의한 징벌이라는 관념이 다시 대두됨으로 해서 점차 사랑의 행위로서의 치유행위는 의심을 받게되고 시험의 대상이 되었다. 긴긴 암흑기를 지나는 동안 정통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치유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종교개혁 이후 서구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마침내 포기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의 전통은 기독교사상사에 있어서 대부분 이단으로 취급되었던15) 일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 왔고, 우리가 이미 고찰해 보았던 것처럼 중세의 마녀사냥이라는 끔찍한 역사가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근대에까지 흘렀던 것이다. 여기에서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정신의학이 발전해 나왔고, 종교적 맥락으로는 1800년대에 심령갱생운동과 크리스챤 사이언스 그리고 1900년에 찰스 파램(Charles F. Parham)에 의해 벧엘 성경학교가 문을 열면서 소위 방언파라는 이름으로 오순절 성령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이러한 운동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국제적인 대 교단으로 급성장 하게 되었다16).

한국에서는 6.25사변의 아픔을 인내하고 살던 50년대 중반부터 이 종교적 운동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파급되기 시작하여 교회가 급성장 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 치유는 오늘날에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4. 기독교 치유의 문제점들




오늘날 기독교 치유가들이,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이해 가능하고 치료 가능하다는 것을 서구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예수의 치유사역을 통한 전인간(全人間)구원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모티브로 기독교 치유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오순절운동 및 은사주의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피터 와그너의 책이 ‘제 3의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책의 본래 제목은 ‘당신의 교회를 병들게 하지 않고 치유사역을 할 수 있는 방법 (How to have a healing ministry without making your church sick!)'이다. 오순절운동을 긍정적으로 보고있는 사람까지도 위와 같은 제목을 통하여 현대 기독교 치유에 문제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다는 것이 다소 흥미롭기까지 하다.

기독교치유가 어떻게 이해되고 또 어떻게 행해지길래 그러한 치유를 통해 교회가 더욱 더 건강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병이 더 드는 것일까?

메릴 F 운거는 교회가 잘못과 그 잘못으로 인한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형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7).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존경하기 위해 신앙고백을 하는 크리스챤을 잘 못 가르쳤다. 그와 같은 크리스챤은 성서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순진하게도 하나님은 병을 고칠 수 있고 기적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병 고침과 기적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그릇된 생각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 병을 고치거나 고침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크리스챤들은 귀신들의 마술적인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형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 있다.




미국연합루터교회의 보고서는 1960년대 당시 미국 내에서 기독교 치유가 어떤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었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1962년 미국연합루터교회는 회의를 통해 250만 교인들에게 종교적 치유와 관계하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일부 신앙 치유가들이 행하는 것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발표하였다18). ① 신앙치유가들은 인간의 곤경을 이용하여 돈과 개인적 권력을 획득하려는 욕망을 종종 갖고 있다. ② 그들은 입증된 과학적인 방법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③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의 실패를 병자의 신앙의 부족 탓이라고 전가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생활을 위험스럽게 만든다.

기독교 치유가 교회를 오히려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독교 치유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모든 병은 마귀의 역사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생기는 것’이라는 전근대적인 믿음이다. 귀신들림이 병의 원인이 아님은 우리가 이미 역동 정신의학의 역사 속에서 명백히 증명해 보인 바 있으며, 게다가 기독교적 측면에서 본다 하더라도 사랑으로서의 예수 치유사역의 정신마저 말살시켜 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예수의 정신은 없어지고 인간의 이기심들만이 기독교 치유를 통해 야합하고 있다.

악의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의 이기주의가 맞물려 들어갈 때 기독교 치유의 왜곡은 급격히 상승되며, 그로 인해 동반될 수 있는 신비적인 감정은 종교적 체험으로 채색되어서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마저 볼 수 없게 만든다. ‘마귀의 역사 때문’이라는 이교도적인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구약(히브리 전통)의 사고 방식을 예수의 축사(逐邪)행위의 껍데기가 감싸고 있는 것이 현대 기독교 치유의 진정한 모습인 듯 하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과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또한 치유기도를 받고 나서 그 동안 받고 있었던 병원치료를 중단해야 하는지, 만일 계속 약을 복용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 아닌지 하는 것들을 문제 삼게 된다.

그러면 한국에서의 기독교 치유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우리주변에서 흔히, ‘병이 있으면 우리교회에 와서 100일 기도하고 안수기도 받으면 완쾌된다’ 또는 ‘이것도 저것도 효험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라는 표현들을 들을 수 있다. 어느 목사의 고백이다.19)



필자가 지나치게 일하다가 그만 감기몸살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좀 쉴 겸 입원을 했던 것이다. 입원한 지 두 시간도 못되어서 장로님 한 분이 헐레벌떡거리면서 오셨다. 병 문안을 오셨다고 생각하고 기뻐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장로님 말씀이 ‘목사님, 빨리 퇴원을 하셔야 합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이 병난 것은 숨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퇴원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테니스를 쳐서 건강을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달 동안 테니스를 쳤다. 퍽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권사님 한 분이 오셔서, ‘목사님,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목사님이 건강이 나쁘시면 기도해서 건강해져야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인본주의적으로 건강해지려고 하면 우리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하고 심각하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마음속으로 ‘에이 더러워, 내가 이놈의 목회 집어치워야지’하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30대 가정주부가 가슴이 답답하고 목에 무엇이 걸려 있는 것 같고, 쉬 피로하여 생활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런 것을 지켜보고 있던 옆집에 사는 기독교 신자가, ‘그건 시댁 식구 중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있을 텐데, 그 귀신이 붙어서 목이 막히고 아픈 거니까 교회에 다녀라’고 충고해 주어서 지금은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한국 교인들이 기독교 치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은 서양 사람들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치유신앙의 뿌리는 이교도적이거나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전래의 무속신앙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겉모습은 서양의 성령운동을 닮은 것 처럼 보이지만 그 알맹이는 무속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5. 한국의 기독교 치유의 문제


1) 무속신앙과의 관계

그러면 현대 한국 기독교 안에 있는 무속 신앙적인 모습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먼저 무(巫) 즉 샤만(shaman)은 신들린 사람을 일컬으며, 샤마니즘의 특징이란 인간의 형태로 신령을 대신하여 악마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샤만이라는 말은 만주어로서 원래의 뜻은 흥분하는 사람, 자극하는 사람, 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 식으로 하면 곧 무당을 일컫는 것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무당은 의식(제사)을 집행하고 앞날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며 질병을 고치는 역할을 행한다20). 한국 교인들이 목사에게 갖는 감정이나 태도가 마치 무당에게 갖는 그것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여지는데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아플 때 목사의 심방을 우선 요청하는 일이라든지, 집안에 어떤 일이 있다거나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거나 이사를 했다거나 할 때 그들은 목사의 축복기도를 얼마나 갈망하는가 말이다.

또한 샤마니즘은 원시종교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서 선한 귀신(또는 신령)과 악한 귀신을 섬기는 이원론(二元論)을 바탕으로 삼는다. 인간과 자연을 보호하여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선한 귀신이고, 파괴적이어서 손해를 가져다주는 것은 악한 귀신이다21). 이러한 사고방식 또한 우리의 무의식 속에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병이 들었다는 것은 악한 귀신의 농간이고,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부분 기독교적인 언어로 채색되어 있다) 따라서 목사의 기도가 우선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악신(惡神)을 몰아내는 힘을 가진 목사(곧 무당)가 병원에 입원한다는 것이 어디 용납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샤마니즘을 지탱해주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과연 무엇일까? 첫째, 그것은 길흉화복의 문제와 질병치료에 있어서 현실생활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이다. ‘개똥이라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라는 우리의 속담을 보더라도 이 사고방식은 우리의 삶의 태도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현실이 중요시되다 보니까 이런 사고방식 속에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마련이다. 둘째, 주로 특정집단의 종족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사고방식이다. 즉 한 가문이거나 한 가족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편파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22).

다시 말해서 샤마니즘을 지탱하고 있는 제일의 기둥은 현세 기복적인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영적, 미래적 비전이 결여되어 있게 되고, 현세에서의 부귀영화, 장수, 즐겁게 지내는 것이 무속신앙의 제일 목표이다. 제이의 기둥은, 이기주의이다. 이것은 특정 집단의 종족 즉 가문이나 동향인 또는 직계 가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직도 중요시하는 ‘효도’를 볼 때,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혈연 혹은 유사혈연체제가 특수한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일에 뒷받침이 되도록 만들어진 가치이다. 선조를 높이기 위해서 또한 선조의 혼백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라는 구실 아래서 보편 타당한 진리를 부분적인 진리로 전락시키는 일을 사람들은 예사로 할 수 있게 된다23).

샤마니즘의 두 기둥은 현실주의와 이기주의임을 알았고,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은 한국인의 생각에 중요한 일부분으로 남아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무속적인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는 어떻게 해왔는가? 한국 교회는 무속적 사고방식의 병폐를 비판하거나, 더 나아가 그런 사고방식이 갖는 긍정적인 면을 재평가하는 등의 노력을 해왔다기보다는, 성령운동이나 기독교 치유, 현실에서의 물질축복 등의 가르침을 통하여 현실주의와 이기주의의 속성을 그야말로 ‘현실적’으로 충족시켜오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교회는 점점 더 대형화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든가, 병을 고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는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헌금도 많이 나오고 아멘! 아멘! 하는 소리도 높다’고 하는 어느 원로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교회는 예수의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것에는 무관심한 채 무속적 현실주의와 이기주의에 야합하여 교회성장이라는 또 다른 집단이기주의의 표상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서광선24)은 ‘한국문화가 가지고 있는 종교성(무속적 신앙형태)이라는 것은 현실주의적이며 이기주의적인 기본사상, 즉 부귀다남하고 장수하고 입신출세하는 현세적 향락에 그치거나 마술적 요행과 막연한 종교적 희망에 그치는 것이다’라고 정리해 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이 실천되지 않는 기독교 문화는 이미 기독교적 본질을 상실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적 본질을 상실한 기독교와 그 속에서 행해지는 기독교 치유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2) 유교사상과의 관계

무속신앙이 기층 민중들과 아낙네들에 의해 지속되어 온 한국민의 뿌리 중 하나라면 유교사상은 지배계급의 삶의 원리로서 한국민의 의식구조를 공식적으로 지탱해 왔던 막강한 힘이었다. 유교는 무속신앙과 더불어 현대 한국민의 의식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 치유현상들을 고찰할 때 유교사상 또한 꼭 집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고시대부터 한반도에 전래되었던 유교사상은 고려말이 되기까지 지도이념의 위치에까지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불교이념의 국가였던 고려가 썩을 대로 썩어감에 따라 이색과 정몽주와 같은 유학자들이 신유교(新儒敎)를 가지고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기 시작하면서 유교사상은 서서히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건되면서 불교는 탄압되고 신유교사상이 통치이념으로 대두되었다. 조선초기 유교(주자학)의 정신은 철저한 사회개혁으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복지정책을 시행하고, 토지개혁으로 귀족계급을 몰락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봉건제도는 붕괴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부가 출현하였다25). 그후 유교사상은 한국민의 삶의 일부분으로 깊숙이 자리잡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이 신유교사상에는 그 자체 안에 본질적으로 치명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들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것들 중 첫째가 의고주의(擬古主義)의 원리였다. 그것은 마치 유태교의 바리사이주의와 견줄만한 요소였다. 즉 이 원리는 이상화된 전통에 입각한 엄격한 형식주의를 강조함과 더불어, 사회의 이상(理想)을 죽은 과거로 후퇴시켰다. 결국 그것은 극단적 보수주의가 한국의 신유교 사회에서 지배적 원리가 되게 하고 말았다. 둘째, 이 사상은 성격에 있어서 독단적이었다. 율법주의적 윤리의 원칙뿐만 아니라 우주론적-존재론적 교리가 표준화되고 성문화되었다. 즉 이성이 아닌 권위가 곧 진리의 범주였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을 실제 적용하려 할 때 이성적인 합리성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 권위는 오직 주희학설의 정설에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자존심이 강한 자와 자부심이 강한 사회가 그 사상의 이상하는 바였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은 바로 신유교 사회의 자기 우상화 내지 자기기만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것은 군자인체 하는 가식을 사회전반에 조장시켰고, 오직 자신들만이 ‘절대적’ 진리를 가졌노라는 오만과 아집에 빠지게 했으며 진리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반대자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것은 타협의 가능성을 메말려버린 치명적인 해악의 요소였다.26)

우리는 이와 같은 유교사상에서부터, ① 형식이나 체면에 구애받는 우리들의 모습과, ② 율법주의적으로 짜여있는 종교의 권위에 맹종하는 무비판적인 모습과 그러면서 ③ 자기 교파의 교리나 노선만이 진리라는 아집에 사로 잡혀서 잔인한 정의를 실천하는 모습들의 뿌리를 발견한다. 사회 분위기 또한 이러한 유교적 사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민의 의식구조 속에 마련되어 있는 보수주의, 율법주의, 권위주의적 요소들 위에 기독교라는 씨앗이 뿌려졌을 때 기독교의 참 정신이 결실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 우리의 기독교가 거둔 결실은 프롬이 말하고 있는 전제형 종교의 모습과 유사함을 발견한다.

정의라는 이름 하에 권위와 율법 그리고 보수로 다가오는 종교의 힘에 인간은 어디에서고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순종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개인적 이익과 복 받고 잘되는 것에 집중되고 만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기복신앙은 또 한 번 왜곡된 방향으로 급성장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기독교 치유는, 첫째로 예수정신의 표상이기보다는 주술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치료의 한 형태로만 행해져 왔고, 따라서 둘째로 치유를 통한 삶의 근원적 변화는 부차적인 것이거나 관심 밖의 일이 되었으며, 셋째로 급기야는 여러 잡신숭배, 금기사항, 부적 등으로 애워쌓여 있던 무속적인 옛 삶과 똑같이 여러 사이비적인 영적 법칙들을 기독교 신앙이라는 미명아래 무속적인 것들 대신으로 대치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6. 치유보다 목회가 중요하다

문제는 현실주의, 이기주의의 무속신앙적 요소에도, 율법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교적 사상의 틀에도 있지 않다. 사람이 성공하고 잘 살고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속성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사상의 흔적들은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이루고 있는 일면(一面)일 수밖에 없으므로 부정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되는 문제는 우리의 의식구조 속에 있다기보다 기독교의 종교행위 속에 있어왔다. 상위종교인 기독교가 하위종교인 무속신앙을 건전하게 유도하지 못하고, 기독교 자체의 집단이기주의 내지는 팽창주의에 현혹되어 한국의 토착문화의 부정적인 면에 편승했던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나 유교는 무속적인 우리의 문화 속으로 들어와서 무속신앙과의 마찰을 통하여 한민족의 정신을 더욱 승화 발전케 하였지, 불교나 유교의 교세확장을 위하여 토착문화 속의 부정적인 면을 왜곡시키려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신라의 고유한 용신사상이 어느덧 불교와 결부되어 호국호불적인 용신사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나, 신라고유의 풍월도(風月道)가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합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에 주요한 구실을 한 ‘화랑도’로 전개되었던 것들이 그것이다27).

유교도 전통적으로 무속을 천시하고 억압하였지만 언제나 양자가 공존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 둘 사이에 사회적으로나 신앙의식에서 상보적인 기능을 지녔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유교가 전통사회의 상층문화를 이끌어 갔다면 무속은 하층의식을 이끌어 갔다. 유교가 도덕규범적 형식에 따라 엄숙성을 강조했다면 무속은 신비적 종교체험과 더불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가 전통사회에서 계층질서를 강화함으로써, 여기서 소외된 부녀자나 서민의 정신적 안식을 무속에서 제공해 왔다. 또한 무속은 그 사회적 내지 도덕적 질서를 유교체계에 의존하여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양자는 한 사회에서 균형점을 찾아 개별성을 유지해 왔던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한국의 전통사상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28).

상위종교 내지 사상은 언제나 하위신앙에 영양분을 보충해 주어 한민족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진실되게 이 민족에게 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무속적 사고방식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서 북돋는 일이며, 유교적 잔재에 대해서도 무조건 무시하거나 그것의 권위의식을 악용하려 들지 말고 유교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정신을 계발해 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하는 일이다.

기독교 치유에 그것이 국한된다 하더라도 그렇다. 이제는 가령 치유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치유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 될 때, 자칫 잘 못하면 현실주의, 이기주의들이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예수정신의 매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Robert L. Wise29)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신비한 이유들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없을지라도 믿음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왜’라는 질문보다는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편이 옳다고 충고한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30)는 자신의 치유기도 결과가 71%에서 치유가 안되었고, 29%가 완전치유 되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오히려 치유기도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여러 형태로 은혜를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어떤 병의 치료는 의학의 분야이다. 정신질환의 치료는 정신의학이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구태여 나눈다면 육체와 정신으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과학으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부분이 있다고 본다. 그 부분을 흔히 영적 부분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종교의 고유한 영역일 것이다. 그러므로 수술을 외과의사에게 맡기면서도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찰스 크래푸트 교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섬기는 일이 치유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치유보다 목회가 더 중요하다.31)’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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