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역
이 과목에서는 성령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 다룰 것이다. 성령의 신비스런 사역을 다 이해하기는 힘들다. 계시의 한도 내에서 성령님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길을 추적하려 한다. 예수 안에서 성령은 어떻게, 교회 안에 어떻게 임했으며,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성령의 차이점, 우리 안에서와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성령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성령의 실체를 체험적으로 전인적으로 접하기를 원한다. 우리 안에 계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성령의 우리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역을 살펴보고, 은사를 체험하며, 내적 치유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성령께서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의 내적인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해야 한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어두움의 영의 결박에서 자유 하는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 이 시간에 참여하면서 지적 욕구보다도 마음의 목마름을 가지고 참석해 주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수업시간에 중요한 것은 현장 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서 론
1. 성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
1) 최근에 성령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그 동안 성령론은 신학 분야중에서 가장 연구가 소홀했으나, 지금은 상황에 역전되어 가장 큰 관심이 집중되는 분야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첫째, 오순절 성령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성령 세례와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의 입장을 지지 반박하면서 성령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교회가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신학을 회복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도록 한 공헌이 있다.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용어들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고, 성령 체험을 갈구하고 사모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단순히 지식적이고 교리적인 것만 알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느끼고 체험하기를 원한다. IQ→EQ. 이성적인 것에 대한 반박이 감성적이고 영성적인 것을 추구하게 한다. 전통적인 신학은 너무 주지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 교리주의적인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가지고있는 종교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특히, 이런 서구신학이 한국인들의 고유의 심성에 적합하지 않다고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안에 한이 서려 있는데, 서구신학이 이것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체험적이고 감정적인 공백을 틈타서 여러 가지 불건전한 spirituality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참된 영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성령에 의해 산출된 spiritually가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균형 잡히고 전인적인 영성. 이론적인 뿐만 아니라 체험적아고, 이성적일 뿐 아니라 감성적인 영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어야 하고, 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목회를 해야 겠다는 의식이 늘어나고 있다. 참된 목회, 열매 맺는 목회는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된다는 고백을 일선 목회자들이 많이 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인간의 테크닉, 열심, 탁월함 등이 성령의 대체해 감으로 황폐화 되고 있다. 말씀을 이론적으로만 전달해서는 강팍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성령의 증거나 나타나지 않으면 강팍한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선교가 아니라 power evangelism.
2) 둘째로, 현대신학의 거대한 흐름이 성령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성령론쪽으로 발전되고 있다고 하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알고 싶으면 허순길 박사의 은퇴논문집의 제 논문을 참고하세요. 어떤 신학자는 20세기 전반부는 기독론적 신학의 시대, 후반부는 성령론적 신학의 시대라고 했다. 20세기 전반 신정통주의 칼 바르트의 신학이 기독론 쪽으로 편중되어,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사역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그의 후예들이 성령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연구를 하고 있다. 근래의 성령론적 신학의 문제점은 성경에 부합할 수 없는 이질적인 사상을 도입해서 신학을 전개함으로 극단성과 이매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2. 개혁신학의 과제
1) 현대 신학의 성령론적 전환이 안겨다 주는 도전에 대응해서, 개혁신학의 과제는 첫째, 오순절의 가르침이 제기한 신학적인 문제에 답해야 한다. 성령세례, 방언, 예언 등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전통신학의 미개척분야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혁신학 안에 성령론이 결핍 부재해 있다고 볼 수 없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은 삼위일체 관점에서 신학을 전개해 왔다.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성령 사역을 강조해 왔다. 오순절신학처럼 성령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사역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말씀과 성령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연합, 중생, 개종, 성화 등... 칼빈은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을 가리킨다. 성령충만한 삶의 구체적인 내용인 soli Deo gloria, sola fide, sola gratia를 강조하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죄에서 회개하고 감사하는 삶 이것들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성령집회에서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많이 하는데, 그 내용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흥분주의, 감정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오순절의 가르침에 대응해서 우리는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성령충만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거짓된 안일감 때문에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실리적인 유익을 준다. 그러나 성경과 신학의 전문가로서 이것이 은혜가 된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는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야 하겠다.
2) 둘째, 현대신학의 도전에 대응해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는, 우리의 신학을 성령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재고해야 한다. 개별적으로 성령론만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 신학을 성령론적으로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신학이 성령의 활력소가 부여됨으로 다이나믹한 신학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성령론 중심으로 그 맥락속에서 발전된다면 온전한 삼위일체 신학의 완성된 단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삼위일체론이 성령론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론이 상당히 기독론적으로 치우쳐 져 있기 때문에 특히 서구신학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삼위일체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이위일체에 가깝다. 우리의 신학은 성경에 명백하게 나타난 삼위일체 중심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삼위일체론이 어렵고 딱딱한 사변적인 신학이 아니라 체험에서 출발하는 신학이다.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교회에 오시고,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의 이 세상에 그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신다. 우리의 구원, 삶이 삼위일체적이다. 성경은 분명히 삼위 하나님에 대한 독특성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하고 섬기는 삶이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이 만드시고, 임재하고, 그 곳에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임하는 곳이다. 기독론, 교회론도 성령론적 관점에서 재고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Ⅰ. 예수와 성령
1. 육신의 예수와 성령
1) The bearer of the Spirit → The sender of the Spirit
Hendrikus Berkhof는 성령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두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는 The bearer of the Spirit → The sender of the Spirit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의 증거에 의하면 성령의 사람이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종말론적 예언의 영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메시야 사역을 완료하시고 교회에 성령을 주시는 성령의 수여자가 되셨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성령의 사람, 기름부음음을 받은 메시야에 초점을 맞춘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만 성령의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예외는 세례요한,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임했는데, 이들에게 임한 성령은 구시대의 것, 구약에 속한 것이다. 구약의 성령사역의 근본적인 특색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것이다. 구약적 성령사역이 세례요한과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임했다. 그 외에 공관복음에 그 누구도 성령을 받았다고 언급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의 저자는 성령의 ............ 제자들의 사역을 묘사할 때도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처럼 성령론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성령의 사람으로 제자들을 사도행전은 묘사하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성령의 사역자로서 일을 한 것처럼 묘사하진 않는다. 공관복음의 저자는 성령을 예수님에게 국한시켜 사용하고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제한하고 예수님에게만 사용하고 있는 내면적 의도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다(not yet). 그런데 좀더 다른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좀 더 명시적으로 아직 성령이 다른 사람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요7:39. 요한복음에는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이 나타나는데 그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정점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지 않았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에 근거한다. 요14장과 16장에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내가 아버지께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낸다. 16:7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오지 않지만, 내가 떠나면 보혜사가 오실 것을 말한다.
사도행전에는 예수가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수여자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 중간에서 일종의 bridge 역할을 한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전환되었는지. 어떻게 성령의 담지자가 수여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근거로 해서 바뀐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 결론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오심은 구속사역의 완성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행2:33, 38에서 성령은 선물, 딛3:6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히 부어짐. 우리는 성령 사역의 기독론적 토대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2)
One Spirit-filled ManMany Spirit-filled men
복 음 서사도행전/서신서
one to many movement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성령은 구속사역에 근거한 gift다. 예수님의 공로로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성령과 보혈은 직결된다. 현대 성령론의 문제는 성령과 보혈이 직결되었음을 무시한다. 예수와 성령의 불가분리한 관계를 간과함으로 예수 중심적 성령론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 혹은 성령 중심적 성령론을 선호한다. 현대 성령론은 십자가를 회피히고 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무시한다. 십자가가 없는 성령론. 십자가를 꺼리는 이유는 그들의 윤리적 교만 때문이다. 십자가를 인정하면 우리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해야 하고, 우리의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현대 신학자들의 교만이 이것을 용납할 수 없다. 예수를 믿지 않고도 선한 사람들 안에 나타난 미덕을 성령의 은혜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보혈을 벗어난 성령의 은혜는 없다. 단지 인간의 종교성의 결과물이다. 인가의 영성과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은 참된 영성을 혼돈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오순절 이후 본격적으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부른다. Dunn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완전히 그리스도화 된 성령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들은 오순절 임한 성령은 사역의 특색이 기독론적으로 규명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성령이 완전히 그리스도와 되었다는 것은 성령 내에서 변화를 겪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영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성령이 차이가 있고 불연속성이 있지만, 여전히 연속성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순절 전에도 구약에도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었다. 베드로전서에서 선지자 안에 있는 예수의 영고 했다. 예수의 영은 후에 온 그리스도의 영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구속사역을 이루셨나 안 이루셨나에 따라 차이가 난다. 오순절 성령사역의 특징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 사역의 특색이 예수 중심적이 되셨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께 영광을 돌리고 구속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적용한다. 이런 면에서 볼때 성령집회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성령은 자기 이름을 나타내가 위해 운동하시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나타내가 위해 일하신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재고해야 한다. 성령은 예수의 운동의 다이나믹(원동력)이다. 그래서 성령님의 특성을 어떤 사람은 Shy member of Trinity라고 표현한다. 성령의 사역의 특성이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고 자기를 가리시고 역사하신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중매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시는 중매자.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 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리고 성령은 또 두 대상 다 사랑하지만, 우리가 성령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집중하도록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자도 성령과 마찬가지로 shy한 사역을 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하려 한다고 바울이 말했다. 사역자인 우리도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예수께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면 자기를 감추고 성도로 하여금 온전히 예수를 바라보게 한다.
성령체험의 가장 근본적인 특색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예수를 사랑하고 섬기고 본받게 된다. 성령체험의 내용은 우선적으로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적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삶의 주 되심을 온전히 깨닫게 됨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누린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심, 화평의 은혜와 자유함의 축복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
2. 예수의 구속사역과 성령
1) 성령사역의 기독론적 바탕(Christological foundation)
2) 성령사역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향
3. 성령강림과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
1)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
Richard Gaffin은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표현한다. H. Berkhof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또 다른 자(alter ego)라고 말한다. K. Barth는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주님의 새로은 존재방식(mode of existence)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성령강림을 1.5림(중간림)이라고 했다. 그런데 바르트의 표현은 양태론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성경이 단순하게 말하는 대로 성령 안에 부활하신 주님의 새로운 임재로 이해하면 되겠다.
2) Corporal existence / Spiritual existence
이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거에 오신 주님, 미래에 오신 주님을 섬기지만, 현재에는 부재한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현에는 부재하신 주님을 우리는 힘써서 섬기고 있다는 이 생각으로 말미암아 사신신학, 무신론이 파생된다.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심리 저변에 축적된 것이,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현현을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의 육신의 몸이 현존을 보이셨다. 그런데 교회시대에는 과거의 추억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보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불리한 것 같다. 이런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도 현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하심이 더 강력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스펄전의 설교. 주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보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맘아 믿는 사람들이 더 복되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 더 유익하고 복되고 영적인가를 생각해보자.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자.
① time and space의 문제. 주님이 아직 육체를 입고 계신다면 시공관의 제한을 입고 계신다. 그러나 새로 더 신비한 존재방식을 입으심으로 무시간적으로 그의 인격적인 존재가 확대된다. 종말론적으로 계속된다. 그의 임재의 영역이 장소의 제약에 메이지 않고 우주적으로 확대된다. 우주적으로 확대하심으로 예수님의 인격적 존재가 만물 안에 있게 하심으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계시다면 그 분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뉴욕에 있을 때 교황이 방문한다고 하니까 큰 성당에 며칠 전부터 천막 쳐 놓고 사람들이 기다리더라. 유명한 사람도 한 번 만나기 힘든데, 주님이랴... 만약에 육신을 입고 계시다면 다른 사람과 대화하시는 동안 그 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제는 영적인 존재방식으로 임재하심으로 내 안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안에 전인적으로 존재하신다. 예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함께함의 축복과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② 주님과 내적 연합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육체의 분리된 장벽을 가지고 있는 한 온전한 내적인 교제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같이 주님을 믿고 한 성령 안에서 신앙생활 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한 사람 찾기 어렵다. 우리가 안고 있는 염려와 고민을 다른 사람이 참여할 수 없다.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부모도 아내도 내 고통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내가 안고 있는 고민에 한 방울이라도 참여할 수 있는 친구를 얻을 수 있다면 성공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독한 존재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런 근본적인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효과적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심으로 온전한 내적 연합이 이루어진다. enthusiasm. 종교와 철학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종말론적인 축복이다.
③ 내적인 갱신. 우리의 문제는 속사람이 병들어 있다. 육신의 약함.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진리를 온전해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다. 주님이 아직 육신을 입고 계셨다면 바깥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영으로 오셔서 우리의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내적인 revival을 일으켜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영적으로 거하심으로 우리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갱신을 일으켜 주신다. inside out. 신앙생활은 working out of what God is working in us이다.
④ Christ in us의 축복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재생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재생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을 만들어 내신다.
⑤ 더 능력의 주님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육신의 주님은 약함과 죽음의 세력에 종속되셨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은 죽음을 이긴 분, 부활의 능력을 가진 분으로 우리 안에 임하셨다. 우리는 이 부활의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육신을 입으신 주님보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더불어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엡 1:19-20.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은 부활의 능력이다.
2002. 9. 18. 수.
성령의 사역
박영돈 교수님
은혜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을 준비해 오라.
참된 부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할 때이다. 한국교회와 우리 교단과 우리 개교회와 우리 개인이 절실하게 성령에 사로 잡혀서 영적인 깨어남이 필요한 때이다.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갈망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라. 숙제는 기도를 하고 오는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영적인 문제가 해결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 영적인 억압과 구습들과 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강의안과 책 두 권, 소논문 3편을 읽게 될 것이다. 이 소논문은 합동신학교에 칼빈강좌에서 특강한 내용이다.
예수와 성령의 관계
예수와 성령과의 관계가 헨드리쿠스 벌코프의 말처럼 두 단계를 따라 발전한다. 예수가 성령의 담지자(the bearer)로서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그 완성하신 구속사역에 근거하여서 성령을 보낼 수 있게 되셨다. 즉 수여자(the sender)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사도행전이 증거)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냄과 동시에 당신이 성령과 함께 임하셨다. 성령과 함께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성령과 함께 동반하셔서 이 땅 위의 구속사적인 열매를 적용하셔서 우주를 갱신하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뿐만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시는 co-dweller, co-worker, companion이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전에 계셨던 성령과 다른 점은 부활하시고 온 세상의 주님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은혜의 교리(theology of grace) 부활하신 주님의 공동 사역의 바탕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공동 사역의 맥락과 빛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은혜 교리에 포함되는 것(구원론, 성화론, 은혜론, 성령론)이 그러하다.
in christ and in the spirit. 삼위일체적인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공동체. 교회 선교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역이다. 그래서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하나님의 두 손Two Hands of God이라고 말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통하여서 성부의 뜻과 경륜이 세상 속에서 성취된다. 세상 속에 성부의 사랑이 두 분의 사역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어느 정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교리를 이해할 때 두 분의 공동 사역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사역이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다. 대표적인 구절이 롬1:4, 고전15:45, 고후3:17,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육체가 획기적인 변형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영적인 존재가 되셨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아주 영적인 존재가 됨으로 이제는 성령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문제가 된다. 그분이 바로 영이 되셨다면 본질론적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동일화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 없다. 삼위일체를 부인하게 된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ontological identity본질론적인 동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주님이 영이시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functional, economical, dynamic identity 기능적, 경륜적, 역동적인 동일성이다. James D. G. Dunn이 바로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신학자이다. 사역적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긴밀하게 연합하여서 역사하신다고 강조한다. 사역적인 구별성을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우리 신자의 경험 안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구별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거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는 것과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엄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 어려운 점이 실제적으로 경험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적인 의식을 갖지 아니하고서 신앙생활을 우리가 해왔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러나 두 분(Person, 인격, 위격)의 사역의 구별성을 또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사역의 구별성을 인정한다면 어떤 점에서 인정할 수가 있을까?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지만 우리의 신앙의 객관적인 대상으로 역사하신다.
구별성을 인정하기 전에 동일성은 무엇인가 살펴보고 구별성을 살펴보자.
동일성:
1)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이 예수님의 이 지상에서의 구속사역의 모든 열매를 전달하시고 적용하시고 체험케 하신다는 점에서 두 분은 동일하다.
2) 우리 삶의 인도자, 주관자 되신다.
3)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지만, 초월하신 분이다.
4) 경배의 대상이고 믿음의 대상이다.
구별성:
1)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객관적인 대상이시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성령을 믿으라는 말은 없다. 예수를 본받으라고 하지, 성령을 본받으라는 말은 없다. 분명 성령을 믿어야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사역의 독특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내가 사랑해야 할 당신(Thou)이다. 당신은 문제가 없으시다. 항상 나(I)에게 문제가 있다. 성령은 주관적인 나(I)의 안에 은밀히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내가 되게 하신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심직한 나를 만드신다. 성령을 체험하면 참 나를 체험하고, 참 나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성령충만하지 못해서 참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지 않는 것이다. 참 자아 속에서의 삶을 살지 못한다. 성령의 역할을 내 안에서 내 편에서 내가 주님께 바쳐드려야 할 신앙의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게 내 안에서 은밀히 역사하신다. 이론적으로, 경험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면 자유로워진 나를 체험하는 것이다. 죄의 억압에서, 시기와 질투와 미움, 인기에 대한 욕망, 구속의 결박에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신비이다. 성령은 많은 경우에 mother이미지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성령론의 필요성
1) 우리의 영성과 자율성의 출처를 규명할 수 있다.
: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전적 타락을 강조한다. 거듭난 후에도 우리의 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적인 타락성을 극복케 하고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는 영적인 다이나믹을 제공하시는 성령에 대한 강조를 해야 한다. 신앙 생활에서 책임과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우리를 성화를 율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내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경건의 책임과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다. 그래야지만 영적인 엘리티즘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다.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성령의 은혜로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영적으로 예민해지만 어떤 것이 성령에서 자극된 것이고, 어떤 나의 욕심과 욕망에서 자극된 것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된다.
2) 신앙생활의 삼위일체적인 특성과 부요함을 좀 더 구별할 수 있다.
: 우리 안에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특성이 도무지 구별이 안된다면(James Dunn), 우리는 실제와는 다르게 경험적으로는 2위1체를 섬기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도 삼위하나님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너무나 삼위일체적인 의식이없었다. 성령론의 관점에서 다이나믹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삼위일체를 정교하게 이해를 해서 고백을 하지만 실제 경험을 통해서는 삼위일체 신학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의 우리의 신앙생활은 삼위일체의 부요함과 은혜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바르트 신학의 약점은 신앙 체험에 있어서 삼위일체적이지 못하고 양태론적이라는 점이다. 바르트 신학이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슐라이어마허는 정통주의 신학으 약점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슐라이어마허는 주관성에 치우쳤고, 바르트는 객관성에 치우쳤다. 그런데 바르트의 신학 뿐만 아니라 우리 개혁신학도 그러한 위험성이 있다.
Ⅱ. 오순절 전후 성령사역의 차이점과 동일성
성령론에 있어서 아주 큰 이슈.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제시하는 책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최대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추적해 가면서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풀어야 할 문제: “성경에는 성령이 오순절에야 임했다”라고 말씀하는 한 편 “오순절 전에도/구약에서 성령은 역사하셨다.”
1) 성경은 오순절까지는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않았다. not yet. 반면에 오순절전에도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내용도 있다. 성령이 임하신 것은 위치 이동의 개념,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했다고 적용할 수 없다
2) 성령은 공간을 초월하신 동시에 공간에 편재하신다. 강림하셨다는 표현과 성령의 편재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교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로 성령의 임재를 설명한다.
special presence : 신자와 교회 안의 특별한 성령임재
general presence : 불신자와 세상 안의 보편적 성령임재
폴 틸리히는 “모든 사람 안에 성령이 임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령은 우리 밖에 있다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장소 이동의 개념에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존재의 심연에 내재하시는 그 성령을 거스리고, 배척하고 있다. 그 성령과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단절되어 있으면,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애매모호한 불안과 초조의 문제를 우리는 안고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령을 받는다 하는 것은 위로부터 우리 안에 침투하여 엑스터시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재했던 성령이 나를 온전히 사로잡는 것이다.
“성령이여 내가 주님을 밖에서 찾는 동안에 주님은 내 안에 계셨습니다.” - 어거스틴 -
Territorial spirit(지역 영) : 그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 영을 기도로 축출해야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개종하고, 역사가 일어난다. 이러한 설명은 일리가 있지만, 악의 영이 어떤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성령의 주권적인 임재는 모든 이 세상의 공간에 확장되어 있다. 어떤 장소의 한 치라고 성령의 주권적인 영역 밖에 있는 곳은 없다. 그냥 어떤 곳에는 그 지역에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우상숭배과 죄 때문에 악의 영이 유난히 더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은 하나님의 어떠한 허용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세계의 어떤 장소가 어떤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이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의 임재가 실제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임해야 한다. 성령이 나타나야 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실상 우리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불같은 성령의 임재가 항상 함께 하신다. 우리가 너무 둔하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소멸시키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의 삶과 생각을 돌이켜서 그분을 근심시키는 죄악들과 추한 것을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분의 역사가 새롭게 된다. 이런 교의학적인 의식을 갖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가 실감나게 나타나지 않을 때 실제적으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무신론적인 삶이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내가 서 있지 않는 것 같은 불신앙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성령이 새로 오셔야 한다는 주장은 무신론적인 의식과 신학으로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영적인 방종과 나태는 조장할 수 있다. 3) 신학적으로 이러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예수님 안에 성령이 계셨지만 공생애를 위해서 성령께서 더 새롭고 강한 능력을 부어주셨다. figure of speech. 비유적인 표현이다. 성령이 전에도 계셨는데, 이제 더 강하게 역사하신다. Max Turner: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성령 강림’이라는 말씀은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에도 계셨던 성령의 새로운 역사이다.
마치 없었던 물체가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획기적인 임재로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 성경적인 표현을 보존해서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게 될 때 편재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교의학적 설명과 함께 그러한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사고의 전환에 따라서 용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성령이 오순절에 임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임하시지 않았다. 이 모순되는 주장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 The Advent of the Spirit at Pentecost
예수님이 오신 것처럼 오순절은 성령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나타나신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와 루터. 오순절 전에는 성령님께서 하늘에 계셨고 지상의 사역을 하지 않으셨다. 성경적인 표현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일면적인 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도 성령이 계셨고 역사하셨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오순절 전과 후의 사역을 명확히 설명해 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2) Exceptional / Universal
이 주장은 주로 요엘서에 근거한 설명이다. 구약은 특별한 사역에만 역사하셨다. 그러나 후에는 요엘의 예언대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졌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구약 성도들 안에 그 믿음과 경건과 영성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시가서, 지혜서를 읽다 보면 구약 성도들의 뛰어난 영성과 경건을 접하게 된다. 그들이 가졌던 탁월한 영성과 경건과 믿음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단순히 종교성에서 말미암은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보편적으로 그들 안에 성령이 내재하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 Temporary / Permanent presence
잠정적으로 잠시동안 내주하셨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영구적으로 내재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은 주로 요14:16에 근거하고 있다. 성령이 오시면 영원토록 너희 안에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이 말씀의 의미는 오순절의 이후의 성령은 영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적인 임재와 성령의 영구적인 임재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말씀에 근거해서 이러한 주장을 할 수는 없다.
4) on / in
시51:11에 근거해서 다윗의 기도에 의해서 성령이 임하고, 떠나고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령이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성신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임하시기를 원하는 기도문이라고 봐야 한다.
external / internal, intimate
오순절 이후에는 좀 더 친말하게 내적으로 임재하신다. 그러나 구약의 성도들도 내적으로 속사람 안에 역사하셨다.
5) arbitrary / regular
구약에는 무작위로 성령이 임했다는 설명이다. 신약에서는 항상 믿는 사람, 그리고 경건한 사람에게는 레귤라하게 성령이 임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구약의 경건과 참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발람 선지자와 같은 경우가 신약의 거짓 선지자와 같은 경우이다. 사울은 유다와 같은 경우로 볼 수 있다.
John Owen, Kuyper는 성령의 내적사역과 외적사역을 구분한다. 어떤 일을 위해서 사용하시고 성령이 거두어 질 수 있다. (히 6:5-6)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6) partial / complete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부분적이고 아직 불완전한 성령의 역사,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획기적이고 풍성한 성령의 사역. 존 칼빈의 설명. 헤르만 리델보스. 은사들의 풍성함이 오순절 이후에 가능해짐.
이스라엘의 시대, 예수의 시대, 교회 시대.
변하지 않는 것 : 하나님의 영.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 + (선재하신 예수). 새 언약을 예언, 약속(promise).
예수님 시대: 하나님의 영 + 육신의 예수를 통해 성령을 체험. 새 언약의 중보사역 완성.
교회 시대: 하나님의 영 + 부활하신 주님. 새 언약의 성취, 실현(fulfillment).
Conzelmann, Dunn, Fitzmeyer, 최갑종은 오순절 새시대의 성령의 축복을 맛보지 못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세 시대로 구분한다. 여기에 반해서 Max Turner, 이한수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축복들을 그때부터 맛보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두 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후자의 주장의 약점은 오순절에 그들에게 전과는 다른 획기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한다. 약간 더 풍성한 성령의 체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전자의 주장의 약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맛보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 두 것의 약점을 보완하려면 이스라엘 시대 - † - 교회의 시대.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시대와 교회 시대로 구분하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구약에는 retroactive(소급) 적용된 것이고, 신약에는 proactive(미리) 적용되는 것이다. 온전한 성령의 축복은 오순절 후에 맛볼 수 있지만, 소급적용을 통해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메시아 사역에 대한 소망을 통하여서 부분적인 새언약의 축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 새언약은 그림자같이 희미하다. 따라서 온전하고 풍성한 새언약을 누리지 모했다.
종합과 요약:
오순절에 임한 성령사역은 그 전과 달리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영의 사역이다.
이 말의 의미:
오순절 이전에는...
1) 부활하신 주님이 보내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완성된 구속사역에 근거해서 그 바탕에서 주어지는 선물로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다.
2) 그 모든 완성된 구원의 열매와 효력을 전달하는 영으로 역사하지 않았다.
3) 예수와의 연합의 축복을 우리 안에 실현시키는 영으로 임하지 않았다.
4) 새언약을 우리와 세상 속에 실현시켜주는 영으로 임하지 않았다.
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심겨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법을 즐거움으로 지키게 되었다. Christ in Us. 율법의 의로움을 사는 삶. 하나님의 법이 우리 안에 심겨짐으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율법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산다. 롬8:4.
②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 안에 창조하신다.
5)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영으로 임하지 않았다.
6) 하나님 아들의 온전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영으로 아직 임하지 않았다. Abba Father라고 부르는 아들됨의 특권을 주신 것은 오순절 이후의 축복이다.
7) 온전한 삼위일체적인 신앙과 삶의 부요한 예배를 드리게 하는 영으로 임하지 않았다.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장 깊은 비밀인 삼위일체가 가장 명료하게 계시되었다. 그리고 그 비밀 삼위일체의 중심으로 초대를 받는 사건이 성령체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영원한 코이노니아로 초대를 받아서, 성령 안에서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런 오순절의 축복을 우리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새언약의 풍성함이 실현됨을 우리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심각한 상태이다. F. D. 마이어는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오순절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로이드 존스 “오늘날 부흥을 다시 경험하는 길은 교회가 사도행전으로, 오순절로 복귀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이러한 오순절의 축복이 다시 회복되도록, 다시 이런 축복이 임하도록 기도하라!!!!!!!!
2002. 10. 2. 수.
성령의 사역
Ⅳ. 성령 충만
1. “성령충만”이라는 표현
이 표현의 사용에 있어서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차이점
이재철 목사는 자기 책에서 한국 교회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성령충만’인 것 같다고 썼다. 유행처럼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성령충만이 교회의 부흥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성령충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사모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에 대한 이해 없이 성령충만 운운하므로 오해와 혼란이 일어나는 것 같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누리고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여태까지 전통 교회에서 별로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용어였다. 성령충만이 아직 잘 정의되지 않고 있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성령충만에 대한 관심을 촉진하였다. 오순절 운동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성령세례가 제2의 독특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령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우리들의 주된 관심과 강조점은 그들과 상당한 공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오순절 교회나 우리나 다같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충만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서로의 신학적 입장을 규명할 필요는 있지만 교리적인 논쟁으로 소모를 할 것이 아니라, 공동된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성령충만을 누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할 것인가에 집중함으로써, 서로의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의 일치점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점에서 우리들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가르침에 대해서 성령충만이 더 좋은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안토니 후크마는 오늘날 교회의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시작하기 전에 케직 운동을 시작했던 F.B.마야라는 사람도 “성령충만하라는 성경의 권고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루터를 통해서 이신칭의를 다시 깨닫게 하셨듯이, 오늘 이 말세에 불로 달구어진 혀를 일으켜서 성령충만이라는 무관심 속에 방치된 교리를 새롭게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성령충만이라는 용어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성령충만이라는 말이 서신서 전체에 딱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은 15번 나타나는데 14번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눅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베드로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한 번도 베드로서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다. 베드로의 삶에서 성령체험은 일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체험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서신서에는 자신처럼 2차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나, 그런 어떤 의미를 암시하는 말씀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성령충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 요한과 야고보도 전혀 성령충만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오직 바울 사도만이 에베소서에서 단 한 번 성령충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왜 사도행전과는 대조적으로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가? 성령충만이라는 것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다. 어떤 사람은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 방언과 신유의 체험을 하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생각을 하고,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사람은 열정적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설교하고 하는 것을 성령충만의 증거로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면에서 성령충만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성령충만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채 사용된다면 많은 혼동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다행히도 서신서에서 성령충만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위험성을 잘(?) 피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와 내용은 결코 결여되고 있지 않고 있다. 말은 없지만 그 의미는 부요하고, 풍성하게 서신서 안에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삶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충만이라는 성령을 따라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산다는 말의 더 부요하고, 강력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고 고든 피는 주장한다. 성령충만한 삶이라는 것의 구체적인 지칭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 겸손하게 사는 것, 사랑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최초의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 그 자격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용을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목회 서신서에서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성령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놓고 있다. (딤전 3:1-8) ??[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과 강조점이 서신서와 다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누가의 1차적인 관심은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가를 밝히는 데” 있었다. 이 구절의 말씀에서 제시한 순서를 따라서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성령충만을 자주 언급한 것은 복음이 확장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성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하기 위해서이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충만했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의 터가 되는 시발점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도적 복음선포가 인간의 철학이나 오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철저한 주권적인 감화에 의해서 시행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최초의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에도 그 자격으로서 성령충만이 언급된 것은 인간이 직분자를 세우지만 그 배후에서 직분자를 세우시고, 자격을 부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모든 중요한 상황과 단계와 전환점마다 성령께서 개입하셨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누가의 성령론은 구약의 성령론, 구약의 예언, 특별히 요엘의 예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요옐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를 예언의 역사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성령을 증거의 영(spirit of witness) - 증거를 위해서 능력을 부여하시는 영 - 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충만이라는 것을 복음의 전파, 증거를 위해서 능력을 받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이 쓰여진 특별한 목적에 착안하지 아니하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실만을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기록만을 자신의 교리의 뒷받침으로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누가는 성령충만을 교리적으로다루고 있지 않다. 성령충만을 구원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고 있지만, 교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성령충만이 자주 언급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제시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파악은 할 수 있지만, 그것에 근거해서 성령충만의 교리는 확정적으로 발전시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성령충만의 교리를 위해서는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서신서의 가르침을 참고해야 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상호 보완적이다. 통전적인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2. 성령충만의 의미
비록 서신서와 사도행전이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큰 차이가 있고, 용어를 사용하는 목적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성령충만을 이해하는 근본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이 세 가지 헬라어 단어로 묘사가 되어 있다.
“핌플레미”, “플레로오”, “플레레스” 문자적으로는 “무엇으로 가득하다, 가득 채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물이 가득채워진 것처럼 공간적인 의미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성령은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충만하다는 표현을 물질계에 사용할 때는 그?이 명확하다.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영적 실체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은 물질처럼 부피와 무게를 가진 존재는 아니지만 영적인 실재(spiritual substance)임에는 분명하다. 공간을 초월하시지만 공간 안에 존재하신다.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 성령충만이라는 의미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능력이 우리 안에 가득히 채워진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자적인 의미로만은 성령충만을 온전히 의미할 수 없다. 엡5:18에서 성령충만을 술취함에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성령충만의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술취하면 알콜의 지배를 받듯이, 성령충만하면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압도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통합해서 성령충만을 정의해 보면, the definition of the fullness of the holy spirit : The whole sphere of one's being and life, being pervaded with the Spirit's Power and influence, is controlled and led by the Holy Spirit.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충만은 거의 같은 것이다. 인도한다는 것과 충만하다는 것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표현이다.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부각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용어이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전적으로 주관하시고 지배하신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조금 그 뜻이 좀 더 선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3. 성령충만의 종류
1) 존 스토트와 안토니 후크마의 분류
① Special filling (특별한 성령충만) - 핌플레미 : 즉각적인 성령충만. 어떤 사역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한 성령충만. 베드로가 설교하기 전,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복음을 변증하기 전.
② Ordinary filling (보통 충만) - 플레로오 : 이 동사로 표현된 성령충만은 보통 상황 속에서 계속 받아야 하는,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성령충만.
③ Character, state (상태, 성향) - 플레레스 : 예수님이 성령충만 했다, 스데반과 바나바가 성령충만 했다.
(평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헬라어의 다른 용어가 사용되는 것으로 이렇게 세 종류로 구분한 것은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핌플레미 동사로 사용되는 것은 항상 일상적인 충만과 차별되는 특별한 충만을 의미한다고 보는 데, 그것은 꼭 그렇지 않다. 하워드 마샬은 “핌플레미라는 동사가 아오리스트로 사용되었을 때 조차 지속적인 성령충만을 묘사하기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받는 성령충만을 순간에 포착해서 설명할 때 또한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누가의 아오리스트 시제 사용은 성령충만의 시간의 길이에 있지 않고, 행위와 순간적인 동작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핌플레미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구절은 duration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하심(act of filling)에 있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썼을 때 그의 1차적인 관심은 성령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별 충만 - 외적 충만 - 사역
보통 충만 - 내적 충만 - 삶
단일한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것이 더 좋다. 성령이 우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셔서 우리를 여러 가지 사역을 위해서 각양 방식의 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쉴 때 성령충만한 사람이 참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2)좀 더 원만한 견해
① The acts of Spirit's filling - 핌플레미(아오리스트)
② The state of fullness - 플레레스, 플레로오
서로 다른 헬라어 사용 용례에 근거해서 구분이 가능하다면 위의 두 가지 구분으로 하는 것이 낫다. 고재수 교수가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충만을 구함으로써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성령이 선재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을 간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충만한 역사를 거스리지 말고 이 충만한 역사를 따라서 살라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서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권적인 역사에 있어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가 콘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지 말고 항상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항상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지속되도록 해야할 책임이 내게 있다.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충만의 역사를 거스리지 않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충만의 은혜에 젖어서사는 것이다.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생명물 가에 사는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거스리지 않고, 순종해서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재수 교수의 말대로 기도가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성령충만을 받기 위한 여러 가지 지침이 있는 경건 서적들이 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다 이루어져야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주 아무도 성령충만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깨끗하고,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성령의 충만을 받은 상태라면 우리는 굳이 성령충만을 구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성령충만 상태일 것이니까. 인간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은 분명하다. 순종하는 삶, 주권을 양도해야 하는 것... 이런 측면에서. 성령충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서이고, 우리가 거룩한 삶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은혜가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못받아서 문제가 아니라, 폭포수처럼 밀려오는 성령의 은혜가 헛되게 되고 있는 것이고,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책임의 문제이다. 성령 충만케 하시는 주권적인 역사는 무엇이 근거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Indicative imperative = indicative(이미 은혜가 주어져 있다) + imperative(은혜 가운데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도록, 성령의 역사를 거스리지 말아라)
4. 성령충만함의 인식문제
1) A. W. Tozer / Charles Erdmans, Billy Graham
토저는 “자신이 성령충만 하지 못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고, 어드만과 빌리 그래함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성령의 은혜가 많은 사람조차 성령충만 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 안에서, 성령을 쫓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알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육적인 신자, 영적인 신자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적 차원에서의 구분이지, 신자들을 칼로 나누듯이 이등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100% 성령의 뜻만을 쫓아서 사는 사람은 없다. 100% 육신의 뜻만을 쫓아서 사는 성도도 없다.
성령충만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된다. 양심이 밝아진다. 그래서 섣불리 자기 입으로 나는 성령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령충만은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성령충만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내 자녀, 내 가족, 내 부인이 인정해 주는 사람이라면 매우 성령충만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상대적일 수가 있다. 성령충만하면 가정에서부터 참된 신자로서의 삶이 나타난다. 성령충만해야 은혜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영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옥합을 깨뜨려져서 온 주변에 성령의 기름이 흐르는 데 주변의 사람이 그것을 접하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절대적인 평가는 될 수 없다. 사람의 평가는 상대적이다.
5. 성령충만의 특성
1) 성령충만의 점진성 : 충만이라는 것은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충만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충만이라는 양은 그릇의 수용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자주 사용되는 예화가 있다. 세 살 짜리 어린 아이의 폐에 채워지는 공기의 폐활량과 서른 살 어른의 폐에 채워지는 공기의 폐활량은 다르다. 갓 예수 믿은 초신자도 성령충만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갈수록 그 충만의 양이 더 커진다. 성령은 전인격적으로 내재하시는 성령이므로, 성령을 받는 것의 양이 더 증가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더 많이 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를 더 많이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런 장애가 없이 거리낌없이 편하게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spirit gets the more of us. (o) I get the more of the spirit. (x) 은밀한 곳에서도,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며, 강대상 밑에서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 강대상에 올라가서만 성령의 은혜가 쏟아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 계속 속으시면서도, 우리가 성령을 이용하여서 내가 영광받으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성령께서는 우리는 너무 사랑하셔서 또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속아 주시고, 이용 당하신다. (-_-;;) 어떤 여자가 애틋한 마음으로 사기꾼같은 남자를 계속 사랑하고, 이용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는 것과 같다. 오늘날 강대상에서 은혜 충만한 목사는 너무 많다. 그러나 강대상 아래에서부터 은혜 충만한 목사가 찾기 어렵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인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영광도 높임을 받고자 하는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되지 말아라. 성공신학의 노예가 되어서 목회자의 욕망의 세속화가 너무나 팽배하게 퍼져 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핑계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목회자가 되지 말아라.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말’이 성령에 의해서 콘트롤 받는 것이다. 말 때문에 은혜가 새어 나간다. 우리의 교만한 말, 세속적인 말, 경솔한 말 때문에 성령의 은혜를 감소시킨다. 말조심하라.
2002. 10. 9. 수.
성령의 사역
5. 성령충만의 특성
1) 성령충만의 점진성
성령이 전 인격적으로 내 안에 거하셔서 그 동안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안타까움과 괴로움과 아쉬움과 근심을 가지시고 우리 안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성령의 임재를 바로 인식하여야 한다. 생수의 강은 흐르고 있다. 더 특별한 체험을 기다리지 말고, 성령님이 내 안에 임재하시니 그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했던 죄악의 요소들, 불순종의 요소들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척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내 삶 속에 성령의 물결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조금씩 경험하게 될 것이다.
2) 성령충만의 집합성(The Corporate Aspect)
두리 뭉실하게 성령충만을 전할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의 구체적인 내용과 결과를 분명히 밝혀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특성은 성령충만의 집합성이다. 성령충만한 인물들은 교회와 단절된 사람들이 아니고 교회와 연결된 사람으로서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대표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성령충만을 받은 것이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충만의 공동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엡5:18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 개인에게 주시는 명령이자 공동체에게 주시는 명령이다. 바울은 근접 문맥에서 성령충만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공동체적인 삶, 예배, 교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다. 엡5:18은 교회가 성전이라는 바울 사도의 독특한 교회획론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바울은 보고 있다. 바울의 성전 이해는 구약적 토양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구약에 보면 솔로몬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한 것을 뜻한다. 말세에서는 손으로 만든 장막이나 성전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성령으로 친히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새언약의 성취로 말미암아 우리 공동체 안에 영광의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바울사도는 교회를 새언약의 성취로,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약에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처럼 교회에 성령의 임재가 가득할 뿐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해 더 나아가서 세상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바울은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길성남 교수님이 에베소서 강해를 하면서 “에베소서의 중요한 테마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 통합’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교회 안에만 은혜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에베소서에서 바울 사도가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의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속에 우주적 통합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개인이 성령충만한 교회가 성령충만하며, 교회가 성령충만한 교회의 개개인이 성령충만하다.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고,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경험과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교회 안에 성령충만을 위한 영적인 분위기가 토양이 준비되어야 한다. 강단에서 성령충만한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 현대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성령충만한 삶이 배양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피폐해 있다. 영적인 토양이 아주 척박하다. 아무리 개인이 성령충만하게 살려고 발버둥쳐도 교회 안의 황폐한 분위기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개인 신자의 성령충만은 공동체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성도의 삶은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다. 우리가 환경에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가? 나는 비계가 없어서 추위를 많이 탄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리의 영혼은 더하다. 영적인 분위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영적으로 은혜가 충만한 공동체의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 그런 분위기에 쉽게 젖어들게 된다. 그럼으로써 아주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성령충만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개인의 문제만 해결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새로워져야 하고, 교회의 분위기개 쇄신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들에게 영적인 피폐에 있어서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사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성령충만한 분위기를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직분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장로의 직분에 대한 재고를 해야 한다. 장로의 직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장로 행세만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충만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이 피폐된 교회를 성령충만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 주옵소서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3) 성령충만의 보편성
성령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indicative / imperative의 구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로에만 의지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성령이 내주함과 동시에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공급해 주신다는 보장과 약속과 함께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요 축복이요 약속이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날 때부터 받게 되는 생득(生得)권이다.
이렇게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스리지 않고, 그의 충만한 은혜가 헛되지 않게 우리의 삶 속에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 성령충만은 긴급한 명령으로 주어진 의무이다. 옵션이 아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면 안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죄 가운데 하나는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이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우리 교회가 술취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데, 왜 성령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왜 용납하는가?”라고 말한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내 안의 죄성을 내가 이길 수 없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사단의 억압에서 자유할 수 없다. 내가 성령충만 하지 않으면 성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 찰스 피니는 말하기를 “세상은 성령충만하지 않은 교인에 대해서 불평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성령은 약속과 함께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indicative이다. 은혜이다. 그런데 그 indicative(직설법, 은혜)가 imperative(의무, 명령)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그 직설법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성령충만하라”는 명령이 주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잠재적으로(Potentially) 성령충만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경험적으로(experientially) 성령충만하지 못하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성령충만하다는 것이 교회의 상황이다.
4) 성령충만의 계속성
한 번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계속 성령충만한 것이 아니다. 2차 은혜라는 말은 그 은혜를 한 번 받기만 하면, 전무후무한 은혜가 되어서 계속 성령충만할 것같은 말이다. 오순절 교회에서 이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큰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얼마 안 있어서 깊은 죄악의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순간순간 성령의 능력을 사모해야 한다. 엡5:18에는 특권과 의무의 측면이 다 포함되어 있다. 주권적인 역사로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시려고 한다는 것은 직설법이다. 그러나 우리의 책임은 이런 충만케 하시는 은사를 거역하지 말고, 소멸시키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삶으로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계속 충만한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명령법이다. 성령이 너희를 충만케 하시니, 성령이 너희로 항상 충만케 하시도록 하라. Let the Spirit keep filling you. 성령이 keep하시도록 우리는 let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성령충만은 2차 은혜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성령충만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2차적인 은혜를 누리면, 오랫동안 아무 문제가 없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long interval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우리가 죄에 대해서 전격적으로 죽었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새 사람이 된 사람으로서 죄의 삶을 청산하고 성령님의 붙들림을 받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세례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성령만을 쫓아서 살겠습니다”라는 언약과 고백이다. 현대는 세례의 의미가 상실되어 버렸다. 현대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죄를 끊어버리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기 보다는, 오랫동안 육신의 죄악 가운데 오랜 방황과 혼돈을 하면서 생명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가운데에서 획기적인 2차적인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상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2차적이라는 이 용어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은혜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2차적인 은혜라고 말하기 보다는, 현재 교회의 상황 속에서 뭐라고 말해야 하겠는가? 오순절 교회에서는 중생 이후에 획기적인 제2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대비해서 개혁교회는 단회적인 은혜의 체험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성경에 근거해서 올바른 시점을 제공하고 있지만, 현대 상황 속에 그 성령론을 지혜롭게 적용하지 못한다. 현대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성령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육신을 쫓아서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둠 가운데 있으므로 획기적으로 돌이킬 필요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것을 2차적인 은혜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성령충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해야 한다. 은혜의 길에서 탈선했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삶으로 획기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어떤 획기적인 은혜를 받는다고만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영적인 침체 가운데 있다가 갑자기 어떤 계기를 맞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물결처럼 밀려 올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 은혜의 체험으로 끝나버리면 안된다. 이것이 새로운 계기가 되어서 그 은혜로부터 다시 떨어지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받는 삶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을 때 즉각적으로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복음을 온전히 깨닫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의 삶을 온전히 바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신앙 생활 초기단계에서 성령충만한 삶을 알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한 번 육신을 따라 사는 삶 속에 신자들이 길들여지면, 성령충만한 삶으로 돌이키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성령을 근심시키고, 사는 것이 아주 길들여진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아주 구제불능의 사람들이다. 우리 인간이 도무지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찾아오심과 갱신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래야 한다. 국민일보에서 크리스천 센터에서 앙케이트를 했는데, 평신도의 98% 정도가 “우리 교회의 상태가 너무나도 영적으로 피폐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절박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평신도들이 영적인 부흥을 이렇게 갈망하는 것만큼 목사들도 이런 부흥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6) 성령충만은 회복해야 할 은혜.
무한히 낭비하고 있는, 소모하고 있는 그러한 은혜였다. 생수의 강은 예수를 믿은 이후 우리 안에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 생수가 제공하고 있는 무한한 활용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헛되하게 하였다. (잠 5:16)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이 우주를 갱신시킬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다이나믹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그 다이나믹을 제공하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것을 여태까지 무시하고, 무한한 은혜와 능력을 무시하면서 살아 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성령의 뜻을 거스리면서 살게 되면 영적인 침체와 영적인 가뭄의 상태를 유지하신다. 울면서 씨를 뿌릴 때가 바로 지금이다. 눈물의 선지자가 필요한 때이다.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목사가 되려고 해야 한다. 생사를 걸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도록, 하나님의 생수의 강이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헌신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6. 성령충만의 결과
1) 구원론, 성화론적인 관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객관적으로 성취하신 사역을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체험케 하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그래서 그런 사역을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충만히 역사하신다. Christ in us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가 온전히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spirit of new creation. 그리스도의 인격을 우리 안에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 안에 배양된다. 앞으로 성령 운동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쪽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은사를 추구해야 한다. 열매는 은사와의 긴밀한 연관관계에서만 맺히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한 은사가 있어야 한다.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는 은사를 통해서 나타난다. 설교자로서 여러분은 말씀을 전함으로써 영혼을 새롭게 하고, 거듭나게 함으로써 가장 좋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사랑의 행위는 은사를 통해서 열매 맺는 것이다. 사랑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은 은사를 활용하는 장 속에서만 구체화될 수 있다. 목사는 나에게 주어진 섬김의 은사, 리더십의 은사를 사랑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을 따라서 활용하면서 사랑의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설교를 하면서도 사랑의 자세로 해야 한다. 설교를 잘하면 아주 우쭐하기 쉽고, 자랑하기 쉽다. 자기를 유명한 설교자로 만드는데 그 설교를 사용하기가 쉽다.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겸손하고, 그 설교를 가지고 사람들을 콘트롤 하려고 하지 말아라. 설교를 통해서 쌓은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설교자가 되지 마라. 설교 몇 편 해가지고 변하지 않는다고 강퍅한 사람들이라고 분노하거나,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다. 성령님께서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을 자기가 어쩌겠다는 말인가? 열매와 은사를 둘 다 구해야 한다. 은사와 조화된 열매를 추구해야 한다.
전인적인 변화를 이루시면, 잠재적인 의식까지도 깊숙히 침투하셔서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치유와 변화를 이루신다. 근본적인 치유와 변화를 이루신다. ‘내적치유’가 유행하는데, 너무 인간적인 방법론이 유행하고 있다. 왜 내적 치유가 필요한 교인들이 많은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병든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치유보다는 성령이 그 사람을 근본에서부터 사로잡으시고, 가득 채울 때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하다. 잠재의식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꿈의 세계도 변화시켜 준다. 꿈의 신학.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잠을 자도 아주 숙면을 한다. 달콤한 잠을 잔다. 꿈도 영적인 꿈을 잔다. When I dream, I dream of you, Jesus! 프로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대개 우리의 꿈에서는 잠재의식에 깔렸던 것이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이 꿈 속에서 메시지가 주어졌다. 평소에 성령충만한 사람이 꿈에서도 영적인 꿈을 꾼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얼굴에도 그 영향이 나타난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런 은혜의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라.
①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 : 성령의 열매와 은사
② 율법의 의로움의 관점 : 책임과 자유
③ 하나님 나라의 관점 : 의와 희락과 화평
2002. 10. 16. 수.
성령의 사역
6. 성령충만의 결과
1) 구원론, 성화론적 관점
①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 : 성령의 열매와 은사
성령충만의 결과를 은사보다는 열매에서 찾아야 하며, 열매만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열매+은사이다. 열매와 은사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은사를 활용하는 삶과 사역 속에서 열매가 부양되게 된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 교회가 주님의 구원의 경륜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는데 바로 은사라는 장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열매가 맺힐 수 있는 장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충만하게 되면 우리 교회 안에 열매와 함께 은사가 풍성하게 나타나게 된다. 성령충만함이 온전하게 발휘될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충만하면 능력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다. 병고침의 역사,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은사가 나타나게 된다.
② 율법의 의로움의 관점 : 책임과 자유
롬 7, 8장의 율법과 성령이 서로 대조되는 관점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는 삶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율법의 폐기 혹은 무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주님께서 온 것은 율법을 온전하게, 성취하려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객관적으로 성취되었다. - 우리 대신 200년 전에 완전하게 성취해 주신 그 분이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므로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이 율법을 실현시켜가게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서 당신과 같이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목적이다. 그래서 바울의 구원론과 성령론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롬8:1-4의 말씀에서 이런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롬 8:1-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되면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이루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게 되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게 되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 안에 있지 아니하고, 육신에 있을 때에는 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 수 없다. 왜 육신 안에 있을 때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가? 바로 육신의 부패성 때문이다. 육신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 바, 그것을 극도로 증오하는 마음이 육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도무지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의 부패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렘31 새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의 법을 증오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적인 자유가 내 안에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주신 자유함을 만끽하면서 사는 삶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삶이다. 더 이상 외부적인 윤리를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율례가 우리를 강요하고 협박하고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우리 마음 속에 심기어진 자유의 법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이끌어가시는 것이다. 새언약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새롭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할 수 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기 싫어하는 완고한 마음 가운데 살게 만든다. 우리는 새언약의 축복을 청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정직한 영을 주시고, 자원하는 마음을 주소서”라고 다윗이 기도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서 그가 하나님께 자주 기도했던 내용이 바로 “자원하는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개혁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너무 성령 안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기 보다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쓰여진대로 “십게명을 지키는 삶, 율법을 지키는 삶”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것에 장점이 있다. 주관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정직한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계율주의(계명주의)로 흐를 수가 있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칼빈은 왜 성령으로 구원론을 시작했다가 끝에 가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끝내고 있느냐?”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들의 메시지가 너무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너무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의 측면도 강조해야 한다. 풍성한 은혜가 우리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휩쓸어 가기 때문에 이 안에서 성령의 자유함과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율법을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를 응답해 드리는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③ 하나님 나라의 관점: 의와 희락과 화평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펄젼은 “만일 우리들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두 개의 천국을 누리게 되는데, 하늘에서의 축복과 이땅에서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말했다. 천국의 축복은 천국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을 실감나게 체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인격적으로 우리 심령의 깊은 곳에서 능력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알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성령 체험을 통해서 삼위일체적인 신앙고백과 교제와 예배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톨릭의 유명한 성령신학자가 있는데 Herbert M?hlen이다. 이 신학자가 말하기를 “성령을 체험하면 삼위 하나님을 리얼하게 체험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성부를 성부의 사랑으로 체험하게 된다. 롬5에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 있다. 찰스 피니도 이렇게 고백한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 몸과 영혼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마치 전기 파장이 내 몸을 꿰뚫고 가는 것 같았다. 투명한 사람의 물결처럼 내려오셨다.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존 오스틴은 “뜨거운 영혼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흘러 들어왔다. 시내가 흘러 들어오듯이 내 안에 들어왔다.” 호웰 해리슨 “갑자기 나는 양초가 불에 녹아내리듯이 내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났다” 성부의 사랑, 성자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성령 체험 안에서 일어난다. 성령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는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Unspeakable Joy.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의 영어 제목이다. 성령님의 사랑을 이렇게 독특하게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재수 교수는 이렇게 성령의 체험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을 비판한다. 고재수 교수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는가? 성경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기쁨과 따뜻함, 평화 등과 같은 느낌은 성령의 오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말한다. 성경은 성령이 오셨을 때의 느낌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의 체험적인 측면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아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강조하다보니 감정적인 것을 너무 배척해 왔다. 저급한 것, 미성숙한 것으로 간주해 왔다. 정통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은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해 왔는데, 체험을 너무 무시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양극단을 피할 필요가 있다. 성령을 체험했을 때 어떤 것을 체험하는가를 성경이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성령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삼위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였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 다르기 때문에 생생한 정도와 방법이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감정적, 기질적인 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경험한 센세이셔날하고 드라마틱한 체험을 누구나 다 가져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님 안에서의 그 기쁨이 이 땅 위에서 고난과 환란과 핍박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력을 맛보면서 살게 된다. 내 안에 계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깊어지고 강해진다.
2) 교회론적 관점
- 1)에서 말한 모든 것들이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새 사람의 공동체이다. 목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새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율법을 따라 사는 거룩한 백성들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는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신약 성경에 교회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가 세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백성, 가족. - 신약교회의 구약적인 뿌리를 밝히는데 중요한 측면이다. 그의 언약의 실현으로 신약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언약의 측면으로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하나로 이어주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2. 그리스도의 몸 - 교회에 대한 가장 독특하고 중요한 이미지. 3. 성령의 전
이 세 가지 이미지가 안고 있는 장점은? 교회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를 각각 규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저기 관점에서 이해하게 돕는다. 삼위 하나님의 작품이고, 창조물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 교회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구속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이고, 성령을 통해서 주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이다. 교회를 삼위 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교회에 대한 인식에 따라서 우리의 목회적인 관점도 달라질 것이다. 거기에 근거해서 예배가 어떠해야 하며, 목회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가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측면에서 교회의 모든 사역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 예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①예배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은 삼위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통치하시는 실재가 임하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배는 그 실재가 구현되고 임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의 통치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하늘의 영역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그 안에 주님이 임하시는 것이다. 얼마나 부요한 축복인가? 성령이 충만히 우리 예배 속에 임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다. 땅의 분위기가 하늘의 분위기가 될 것이다. 거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영혼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깊은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것이다. 폴 틸리히조차 “우리들이 성령을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 속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체험은 엑스터시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불안과 혼돈과 불완전의 문제가 그 만남 속에서 해결되게 된다”고 말한다. 삼위 하나님을 깊은 내면에서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존재는 변하게 된다. 이신철 교수님이 새벽 기도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조수옥 권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했다”면서 그 체험이 나중에 일제의 신앙의 핍박을 이겨내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셨다. 우리의 잠재 의식에서부터 우리가 안고 있는 내적인 문제들이 삼위하나님을 예배에서 만나게 될 때 해결되는 것이다.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예배 시간에 sense of holiness, sense of transcendency가 사라졌다는 점이라고 한다. 정말로 신약이 말하고 있는 영적인 상태와 영적인 모습과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서 신약 성경이 말했던 축복이 교회에 임했을 때 어떠한 일이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이러한 축복이 임할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누려야 할 은혜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에는 불신자들 조차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기록이 많다. 로이드 존스도 “어떤 신접한 여인이 개종하고 로이드 존스가 인도하는 예배 시간에 참석을 했는데. ‘내가 여태까지 접했던 것과는 다른 신선하고 순수하고 거룩한 영을 체험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고 사는 삶은 구약 성도들도 이미 누리던 축복이다.
우리의 죄악과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삶을 현재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형식적으로 관습적으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지 않는 곳에서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성령의 능력과 실재적인 임재가 없이도 우리들의 에너지와 힘으로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성령이 부재한 가운데에서도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② 교제와 섬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도 회복된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파괴되었고, 원수된 관계가 되었다. 인간 안에 극한의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적인 마음이 다른 사람을 항상 이용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한다. 서로가 피곤한 존재가 된다. 서로를 이용하려고 노려보고 있다.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은 지옥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단절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분쟁과 분열에서 헤어날 수 없다. 목회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인간관계이다. 한국의 아주 훌륭한 설교자가 있었다. 아주 한국교회에서 기대를 받는 그 목회자가 당회 한 번 갔다 오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속상해 하셨는데, 결국 빨리 돌아가셨다. “나는 모든 회는 좋아하는데 당회는 싫다”라고 말했다. 성령충만의 은혜가 교회 안에 임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극한 이기주의가 극복될 수가 있고, 참된 펠로우쉽이 가능해진다. 우리 안에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을 경험해야 한다. Not only Spirit in us, But Also Spirit Between us~!!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죄라는 것은 교제의 결핍이다”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교제의 회복이 없이 성령충만은 불가능한 것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부흥이 일어났을 때 선교사들 간의 반목과 시기심들이 회개되어지고, 용서의 역사가 일어났다. 초대교회에는 이 두 차원의 은혜가 임했다.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자기 중심적인 측면들이 극복되어질 수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뜨거운 교제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모여서 성령 안에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교제의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3차원적인 예배를 드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 수직적인 관계에만 포커스를 두고 있다. 수평적인 차원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③ 복음사역
교회에서 복음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담대함과 온유함의 조화가 우리 안에 형성된다. 비단과 강철의 조화가 일어난다.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항상 치우치게 된다.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육적인 혈기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한 육적인 혈기의 용기로 일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하늘에서 주시는 용기를 가지고 복음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자신의 용기가 바닥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서 주어지는 용기를 받았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의 평판을 너무 의식한다. 대중에 대한 공포가 너무 많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단에서 신실하게 전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잘 못해서 실패하거나 체면이 깎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많다. 복음의 증인이라는 것은 부활의 능력 가운데 복음을 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가운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 매일매일의 사역을 감당할 필요가 있다. 안정된 목사직을 갖게 되면 소신껏 목회하지 못하고 장로들 눈치보고, 인기에 신경쓰면서 목회하게 된다. 목사직의 특권과 안정된 특권을 미련없이 내팽개칠 각오를 가지고 목회해야 한다. 나도 미국 가서 10여년 공부해서 겨우 이 직책(교수)을 얻었는데,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이것을 던져버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곳으로 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짧은 시간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인데 비굴하게 살다가 갈 필요가 없다.
온유함이 중요하다. 온유함이 우리의 전인격에서 베어나와야 한다. 2학년 때 인간론 시간에 워치만 니의 ??자아가 깨어질 때??를 읽었을 것이다.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우리 안에 온유함이 넘치게 된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 온유함의 넘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접하게 된다. 온유함은 사람들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온유함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육적인 강퍅함과 완고함들이 성령의 은혜로 완전히 굴복되고 제어되었다는 싸인이 되는 것이다. 내 안에 고집이 있고 교만이 있더라도 성령의 은혜로 굴복되는 것이 바로 온유함과 부드러움의 역사이다. 우리는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육신의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온유함은 흉내낼 수도 없다. 인위적으로 온유함을 흉내내려고 하면 너무 역겹다. 굳이 온유함을 흉내낼 필요가 없다. 솔직하게 하라.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육적인 남성의 기질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윤리는 거세된 윤리이다. 남성의 강함을 완전히 도말시켜 버려서, 남성을 여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윤리이다. 권력에의 욕망을 부정해 버린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일리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성령 안에서 남성적인 혈기에서 나오는 기질이 할례를 받은 것이다. 인간적인 남성적인 기질이 죽고, 하나님의 남성적인 기질이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강인함이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담대한 사람은 유약한 사람이 아니다. 진리의 문제 앞에서 정말 단호하게 대처한다. 내가 청년때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 계시던 작고하신 목사님(5회 졸업생)은 얼굴과 모든 자태에서부터 온유함이 베어나오는 분이었다. 같은 교회에서 일하던 사무원이 목사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했다고 한다. 그만큼 얼굴과 걸음걸이에서부터 은혜가 충만한 분이었다. 그분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성령의 은혜는 전인에 영향을 미친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다. 그 사람이 오기만 해도 은혜가 넘친다. 어둠의 세력을 몰고 오는 사람과 다르다. 온유하게 되면 자신이 먼저 편해진다. 육신의 에너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굉장히 편하게 해준다. 온유함의 은혜가 전인에 흠뻑 베어나오는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한다. 관상을 보지 말아라. 자신의 얼굴을 보라. 남의 얼굴을 보지 말아라. 사람의 얼굴을 보면 대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갈수록 관상이 틀리다는 것을 더 알게 된다.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스럽냐 은혜스럽지않느냐의 문제이다. 계산을 해봅시다. 4가지 종류의 얼굴이 있을 수 있다. 잘생기고 은혜가 있는 얼굴. 못생기고 은혜가 있는 얼굴. 잘생겼는데 은혜스럽지 않은 얼굴. 못생기고 은혜스럽지도 않은 얼굴. 2번이 가장 은혜가 된다. 그 다음 1번. 그다음 4번. 3번이 가장 최악의 조건이다. ^^;;
욕망을 따라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 육신의 힘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대가를 요구하게 되고,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성령충만하게 되면 수고를 해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된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역에 있어서 수월함을 누리게 되고, 죄를 이기고, 축복 가운데 거하는 것이 쉬워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쉬워지기 때문에 게을러지거나 방심할 수가 있다. 설교가 쉽게 작성되기 때문에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성령 충만할 때 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선교적인 관점
선교를 위해서 우리들에게 성령충만이 주어진다.
① 누가의 관점 - 성령 충만은 항상 전도와 결부된다. Verbal Proclamation(witness).
② 바울의 관점 - 성령 충만은 공동체적인 성화와 결부된다. Light-bearing mission. 빛을 발하는 사명. 교회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세상 만물에 증거가 된다. 온 세상의 우주 속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전파된 복음으로 인해서 교회가 각 지역에 파견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싸이클(Cycle)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분명하게 빛을 발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 2세기에 접어들고 있다. 이제는 교회가 각 지역에 많이 세워졌다면 이 교회들에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역할을 잘 감당할 때 다시 복음전파의 일을 잘 감동할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싸이클이다.
2002. 10. 23. 수.
성령의 사역
7. 성령충만의 조건?
1) 조건을 제시하는 입장의 문제점
성령충만을 다루는 경건서적을 살펴 보면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제하에 여러 가지 조건과 스텝이 제시되어 있다. 대개 그런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1. self-emptying
2. consecration(정화(淨化))
3. self-surrender
4. obedience
5. faith
믿음이 마지막 단계로 제시된다. 앞의 조건을 다 이룬 뒤에야 믿음이 효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개 성령충만에 대해 쓴 책들이 이러한 스텝을 제시하며, 이 단계를 거쳐야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책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도전을 줄 수는 있겠지만, 여러 가지 혼동과 오해를 야기시킨다. 구체적으로 이런 가르침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제임스 패커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우고, 자신을 양도해야 한다. 이런 축복을 받기 위해서 나는 마약 중독자처럼 결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의 처절한 싸움 뒤에 나는 점점 더 그들이 말하는 성령충만과는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을 발견했다. 그들의 답변은 그러한 상황에 들어가기를 입장료를 지불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나를 성결케 하기 위한 노력을 되풀이 하면서 내 안에 양도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파고 헤집어서 그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더 이상 살기가 싫을 정도가 되고, 신앙 생활이 너무 힘들어지기 까지 하였다.”
이것은 마치 루터의 경험을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도 이런 식으로 성령충만을 추구하다가 자기가 미쳐버릴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런 가르침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500년 전에 종교개혁시에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했던 것처럼,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지나치게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점이다. 만약 이러한 조건을 다 이룬 다음에야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성령충만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은혜를 받기 전에 이러한 조건을 다 이루어야 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사 우리의 노력으로 이 조건을 다 이루었다고 한다고 치면 성령충만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건에서 말하는 삶 자체가 성령충만한 삶이니까! ^^ 이 가르침은 이러한 오류를 안고 있다.
우리가 이 가르침을 성경적으로 교정해 보자.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느냐는 질문 자체도 정확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누릴 수 있는가? 성령충만을 indicative와 imperative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indicative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장된 특권이다. 우리는 이 관점에서 우선 성령충만을 이해해야 한다. 성령충만한 은혜는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 믿음으로 이 은혜를 지속적으로 우리가 받아누리는 삶을 살 수가 있다. 성령 충만은 또한 imperative의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니 우리는 그 인도하심을 거역하지 말고 항상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 충만한 은혜로 함께 하시니 그 은혜를 소멸하지 말고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전자도 우리가 믿음으로 누릴 수가 있다. 그리고 후자도 믿음과 책임(행함)을 통해서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전자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전제가 되는 것이고, 후자는 우리가 실제로 누리게 되는 은혜를 말한다.) 내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의 능력과 힘을 의존해서 내가 주의 뜻대로 살리라! 믿음이 없이는 죄를 이길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롬7장을 강해하면서 우리 안에 두 가지 상반된 의식이 공존한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 죄의 세력이 역사하고, 죄의 법이 역사하기 때문에 나의 말을 의지하면 나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내 힘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성령이 충만한 은혜 가운데 역사하시니 내게 은혜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은혜가 주어졌다. riches in Christ. 이것을 깨닫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만이 승리하는 삶으로 인도한다. 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자유케 하였다. so Grace prior to Human responsibility!!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강조한다. 이 요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성령충만한 은혜를 의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해야 한다.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면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인디카티브돠 믿음으로, 임페라티브도 믿음이 선행되고 난 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다.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는 믿음이 있기는 있지만, 믿음이 병들었다. 상당히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믿음이 병든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성령충만의 은혜를 원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원함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들에게 갈망(渴望)이 없다. 정말 성령충만의 은혜를 원하면 내가 받는다. 약4:2의 말씀처럼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다. 여기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원치 않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간절히 구한다면 그들은 그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 은혜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한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가능한가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다. 우리 복음 사역자들의 문제도 있다. 성령충만한 삶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복된 삶인가를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고,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삶이 가능한지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사는가 말이다. 목사들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사들이 성령충만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하면 받는다고 그랬는데...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동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목사에게 무슨 정욕이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목사들에게 있는 정욕은 아주 교묘하다. 종교적으로 포장되고 합리화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종교적 야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내심 자신이 잘나가는 목사, 능력있는 종이 되고, 명성과 성공에 대한 욕망이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보다 더 큰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정욕이다. 잘못된 동기로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소명을 받아서 신학교에 오는 사람들보다 야심에 이끌려서 신학교에 오는 사람이 너무 많다. 성령충만을 통해서 이 야심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 이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재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한다면 정말로 비극이다. 동기가 순수해야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신학교때부터 이 성령충만의 은혜를 간구했다. 성령충만에 대한 서적은 다 읽었고, 신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 240페이지 성령충만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렇게 내 마음 속에 갈망하고 학적으로 연구하고 10년 정도 지나서 점점 더 나에게 확실하게 깨달아 지는 것은, 그토록 내가 성령충만을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진실로 성령충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성공과 인기에 대한 욕망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충만한 삶 자체를 바래야지, 주님께 완전히 통제되고 주관되는 삶, 주님 자신을 원해야지요. 죄를 버리기 원해야지요. 죄를 버리는 삶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경건 자체보다는 경건의 유익함을 더 많이 원하고 있지 않은가요? 여러분들은 이런 시행착오를 하지 말아라. 나는 10년 도를 닦고 깨달은 것이다. ^^
정말 내가 나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통제하심을 따라서 살기 원하는가? 내 생각과 말, 내 상상까지도 온전히 성령께서 주관해 주시기를 원하는가? 죄를 완전히 끝내버리기를 원하는가? 자아중심적인 생활을 완전히 끝내기를 원하는가? 냉철하게 생각해보라. 현대 교회의 문제는,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는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사는 데 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는 생수의 강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과 정반대 되는 육신을 따라서 살고 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땅으로 가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 교인들은 이런 영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너무 육신을 따라 사는 삶에 익숙해져 버렸다. 익숙해져서 이제 그것이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헤어나기가 어렵다. 한 번 육신을 따라 사는데 익숙해진 사람이, 성령을 따라서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는 어렵다. 죄에는 중독성이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너희들이 악을 행하기에 익숙하니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겠느냐?” 자기의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악을 따라 사는 것이다. 거기에 익숙해지면 거기 굳어지면 돌이키기 힘들다. 영적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면 우리에게 은혜가 임한다.
풍성케 하는 은혜가 있는 반면에 시들게 하는 은혜가 있다. 육신의 열심과 육적인 기쁨과 육적인 평안을 말려버리는 은혜가 존재한다. 스펄젼 목사는 withering grace라고 했다. 성령을 따라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뒷면에서 역사하는 은혜가 있다. 은혜의 뒷면이 있다. 사랑의 뒷면은 질투이듯이. 은혜로 우리 안에서 우리 심령을 감동해서 역사하실 수 없다면, 환경을 동원하셔서 말리는 은혜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온유하게 인도하실 수 없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총동원해서 충격요법, 비상수단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경우가 있다. 고통스러운 방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항복시키시고, 울며 회개하오록 나아가게 하는 경우가 있다. 멧돌에 넣고 갈고, 절구에 넣고 찧는다. 내가 몇 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오. 아직도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너무도 괴로워서 많이 죽을 번 했고, 죽고 싶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제가 10년 동안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하면서도 구습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하였다. 자기를 은근히 과시하고, 교만하게 행하고, 이러한 죄들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계속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했다. 미국에 유학가서 공부했는데, 나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만성 두통을 주셨고, 짓눌리는 고통도 갖게 하셨다. 나만 겪는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니게 하셨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했더니,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하면서 죄를 끊지 않으니까, 그런 고통스런 방법으로 나의 죄를 끊어버리시더라는 것이다. 내 주변에 나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은 놓아 두시고 나만 이렇게 말리시는 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쓰디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하면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비하라. 전혀 기대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아라. 성령충만을 위해서 나의 죄성을 보게 하고, 나를 깨뜨리심으로 응답하시는 경우가 있다. 교인들 가시를 사용해서 목사를 찌른다. 장로를 사용해서 나를 찌른다. 하나님의 손길 아래 바짝 낮추어야 한다. 금식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의 창문에 먼지가 너무 많이 끼어서 빛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너무도 분명하게 성령을 근심시키고, 거스리고 있는 분명한 죄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은 충만한 은혜를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이미 와 있다. “이 충만한 은혜를 제발 받아라!” 우리들의 문제는 계속 그 은혜를 소멸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구해야 할 것은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은혜를 근심시키고 있는 나의 죄의 습관들을 끊어버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그 성령충만의 은혜를 끊어버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은 중독성이 있고, 끊을 수가 없다. 금단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을 씹는 맛에 살고, 자기 욕망과 인기와 명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가 그것을 끊어버리면 삶이 공허해진다. 중독증이고, 금단현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서만 이 중독증을 고칠 수가 있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죄의 올가미를 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해야 한다. 주여 나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이 중독적인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이 죄를 끊어버리게 하옵소서! 이것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평생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여러분을 무력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나의 생각과 말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 통제되지 않고, 성령을 거스리는 나의 죄악된 생각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나의 모든 삶을 주님께 다시 한 번 주님께 헌신하라. 나의 모든 삶의 영역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주님의 온전하신 통제하심을 따라서 주님을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라고 헌신하면 지금까지 막혔던 성령의 생수의 강이 밀려 들어올 것이다. 이 생수의 강을 맛보아야 한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맛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의 술을 구하지 않는다. 새 술에 중독되는 것이다. 성령의 새술을 맛보면 이것을 다시 맛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고, 살아날 수가 없다. dying for you! 주님으로 인해 미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죄를 버리라? 할 때 내 결단이 부족하고 약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줄 것이다. “아직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달려와서 아들을 끌어 안은 것처럼” 참으로 하나님께 재헌신하기 원한다면 아버지께서 달려 오시고, 끌어 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쥐엄열매나 먹는 그런 영적 상태에서 너무나도 곤고한 신앙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이여 죽음이 아니면 은혜를 주옵소서라는 간절함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결박을 끊어버리고,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 아버지 집에서 살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라. 이런 회복의 은혜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던 야곱처럼 그런 간절한 심정을 가져야 한다.
성령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성령충만에 사로잡힐 때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하기 전에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외식적인 삶에 불과하다. 사막에 백합화가 피는 그런 시간이 올 것이다. 우리가 부족해서 성령충만하면 역사에 길이 남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인간적으로 똑똑해서 성령충만하면 아주 비루한 목사로 살다가 갈 뿐이다. 하나님,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는 그러한 나의 육체의 소욕을 끊어버리게 하시사, 영광스러운 사역자가 되게 하소서!
(타이핑 못했음)
사랑은 더 큰 은사라기 보다는 은사를 사용하는 더 좋은 방법, 동기, 자세이다. 방언처럼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은사보다 더 유익한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더 유익이 되는 은사를 더 큰 은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고린도 교인이 가지고 있는 야심을 대변해 주는 방편으로 ‘더 큰 은사’라고 말한 것이다. 바른 동기를 가지고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은사를 사용하는 더 큰 은사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13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모든 특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결핍된 특성들을 우리들에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사랑을 제각기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을 완전히 혁명적으로 새롭게 이해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열매와 은사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은사를 바로 활용하는 그런 과정에서 열매가 맺힌다.
6. 은사의 개발
1) 평신도의은사의 개발 : 모든 성도에게 하나 이상의 은사가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편으로 은사를 주신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그 은사를 발견하게 해주시고, 사랑을 실천하는 밑천으로써 은사를 허락하신다. 사랑이 고갈된 세상이기 때문에 은사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 때 자신의 역할과 은사를 발견하게 된다.
2) 목사의 은사 개발: 가르침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비전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이런 은사들을 교회 부흥의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피터 와그너는 목사에게는 “외우는 은사”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이 포웰이라는 목사는 16000명의 거의 모든 교인들의 이름을 외운다고 한다. 한 번 만난 교인도 1년 뒤에 만나서 그 이름을 외우고 있었더라고 한다.
3) 은사를 구할 수 있는가? : 은사는 하나님 뜻대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더 큰 은사를 구하라는 말씀도 있고.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는 말씀도 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실 때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 안에서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우리의 뜻이 상치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그 은사를 사모하는 마음을 먼저 주실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목사로서의 소명은 있는데 목사로서의 자질이나 탈랜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아닌가? 그리고 탈렌트는 있는데 소명이 없다는 것이 문제 아닌가? 그러나 이것을 달라고 기도를 할 때 꼭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려고, 쓰시려고 그 은사를 사모하게 하신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대로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구하고 사모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구해서는 안되고 사랑의 비전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은사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모든 은사가 다 주어져야 한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모든 은사를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는다. 각 사람의 역할을 존중하고 서로 의존하라고 하신다.
2002. 10. 30. 수.
성령의 사역
지난주 성령의 은사, 이번주 성령세례를 다룸.
Ⅴ. 성령세례
오순절의 관점을 분석.
1. 역사적 관점
성령세례는 20세기에 가르침이 널리 퍼졌지만, 원래는 웨슬리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으로 one stage로 이해했다.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개종한 후에 성화의 점진적 과정을 통하여서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런 한 단계 주장에 비해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두 단계(two stage)로 주장하여서 교리화하였다. 2차 은혜 교리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회심 후에 획기적인 2차적인 성령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화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성화의 체험을 entire sanctification, instant sanctification이라 불렀다. 이 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 온전하여 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체험으로부터 본격적인 성화가 진행된다고 말한다. 간혹 성령충만이라고도 말하였다. 이런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서 죄의 경험이 제거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의 죄성이 제거된다고 하였다. 그의 후계자가 존 플레처(John Fletcher)인데, 획기적인 성화의 체험을 ‘성령세례’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성령세례가 존 플레처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2차적인 획기적인 경험으로서 성화를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칭의와 성화를 2단계적인 체험으로 설명. 칭의를 통해서는 죄를 사함 받고, 성화를 통하여서는... 이 Wesley Holiness Movement는 Higher light, deeper light movement로 그리고 Keswick Movement로 이어진다. 웨슬리와 홀리니스의 영향 뿐만 아니라 케즈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의 특징은 2차적인 단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획기적인 이러한 성령체험을 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아가 죽을 때,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체험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웨슬리의 가르침과 홀리니스와 케즈윅의 가르침의 차이는 무엇인가? 웨슬리는 절대적인 수치에서 완전성화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보았지만, 우리 안의 죄성이 뿌리가 뽑힐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케즈윅은 뿌리가 뽑히는 것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하면, 이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죄성의 능력을 counter-action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오순절파는 성령세례의 가르침이 웨슬리의 eradication을 따른다기 보다는 counter-action된다고 가르친다. 두 단계를 주장하는 면에서 오순절파와 동일한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케즈윅의 주장과 더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케즈윅을 주도한 인물들은, 마이어, 머레이, 토레이 등과 같은 사람들이다. 무디, 고든, 심슨 등은 그들의 가르침과 경건서적들을 통해서 보편, 대중화 시켰다. 19세기 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성화론에 있어서 그러하다. 무디와 토레이의 메시지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많이 건너왔다. 획기적인 은혜를 받음으로서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많이 전했다. 인간론 공부를 할 때 워치만 니도 이러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고, A. W. 토저 같은 사람도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반에 와서 토레이 같은 분은 이러한 체험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오순절 성령운동이 확산되면서 이런 성령론적인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다. second blessing보다 baptism of the Spirit을 선호.
오순절운동은 1900년대에 생겨났다고 본다. 성령의 은혜가 임할 때 방언의 은사가 보편적으로 있더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주사 거리에서 펜타코스탈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순절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오순절 날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한 패턴과 같이 우리도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따라다니고 이미 예수를 믿고 있지만 오순절날 새롭게 세례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나중에 획기적인 체험을 해야 우리의 삶과사역이 놀랍게 변화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오순절주의자들에 따라서 견해가 굉장히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으면 이 성령세례는 성결함과 관계없이 사역에 주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역의 능력과 동시에 성결의 능력도 주어진다고 본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와 성결의 직결하는 것보다 사역의 능력에 더 연결을 시킨다는 점에서 케즈윅 운동과 차이점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교단이 오순절 교단이다. 생긴지가 1세기 밖에 되지 않았는데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육박하고 있다. 이 운동을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이들의 가르침은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동일한 논리적인 틀과 바탕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모두가 두 단계를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된 2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있게 가르쳤던 칼빈의 가르침과는 상이하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고,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충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우리의 입장과는 달리, 칭의와 성화를 완전히 분리된 2단계의 체험으로 보고 있다.
2. 성경적 관점
1) 오순절 제자들의 경험
오순절 운동이 발전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적인 근거를 주로 사도행전에서 찾고 있다.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1) 오순절날 제자들의 성령체험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중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오순절에 2차적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고오는 성령체험의 하나의 규범적인 패턴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이 중생하고 난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처럼 제자들이 이미 예수를 믿었고, 그런 측면에서 중생했다고 볼 수 있다.주님이 요15장에 “너희들은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미 중생의 은혜, 회심의 은혜, 예수를 믿는 성령의 은혜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들의 중생 이후에 성령세례를 체험한 것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 규범적인 패턴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와 아주 다른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패턴에 따라서 체험을 한 것이다. 그들은 오순절 전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은 전환기적 시점에 살았던 사람이다. transitional time. 그들은 육신의 예수를 보고 믿었다. 지상에 계실 때는 육신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했고, 부활한 볼 수 없는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했다. 예수를 믿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과도기적인 체험을 했다. 육신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라는 두 예수를 믿었다. 육신의 예수를 보고 믿었고, 부활하신 예수는 보지 않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볼 수 없는 예수님을 성령을 통해서 믿을 수밖에 없다.
오순절 전후의 성령의 사역을 말할 때, 제자들은 오순절 전에 어떤 성령을 체험했다고 하였나? 육신의 예수를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을 체험했다. 주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체험하였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볼 수가 있다.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강건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후에는 그들이 체험한 성령은 육신의 예수를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이 아닌,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는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런 성령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아직도 육신을 입으신 예수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역을 종결할 때까지 이 성령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역의 절정을 이루는 사역을 끝내기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영광을 받으신 예수와 함께 하는 성령이 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영광을 받을 때까지 제자들은 육신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은 이후에 새로운 성령, 보혜사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단계라고 말씀드렸다. 부활 승천, 아버지의 약속을 통해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1차적인 사역은 종결되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상사역을 이 땅에 적용하시는 새로운 2차적인 사역을 시작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되풀이 되지 않는 것처럼.
8.15 해방 전에 태어난 사람은 그 해방때까지 광복의 새시대를 맞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광복의 새시대를 맞기 위해서는 1945년 8월 15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두 시대를 걸쳐 산 사람이다. 두 가지 통치를 경험했다. 일제 식민통치와 자유 대한민국의 통치를 경험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전에 산 사람은 광복의 새 시대를 맞기 위해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광복의 새시대가 오매 두 가지 경험을 다 했지만, 8월 15일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오순절 신학자들은 우리들의 시대적 경험과 삶을 증거로 해서 설득력 있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오순절 전에는 제자들이 나약했으나, 오순절 이후에는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담대해 졌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습은 오순절 이전의 나약한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물세례를 받았지만 불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획기적인 성령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도 놀랍게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당히 설득력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문제는 새로운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순절 축복이 이미 임했는데 그 축복을 거스리고 F.B.마이어가 말한 것처럼 “오순절 반대편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서글픈 현실에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오순절의 영광스러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을 불로,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에 근거해서 물세례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받는 물세례를 구분한다. 요한의 세례는 임박한 구원을 예비하는 회개의 세례이다. 그것은 아직도 예수님의 완성된 구속 사역, 죄사함과 구원에 근거한 세례도 아니고,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이 받는 세례는 완성된 구속 사역에 근거해서 받는 세례이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 이름으로 받는 것이고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고 성령의 인치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엄밀한 의미에서 2차원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참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현대교회에서는 세례의 참된 의미가 희석되었다. 이런 의미도 모른 채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이 많다. 정말로 물세례와 성령으로 받는 불세례의 의미를 잘 모르고 받기 때문에.
2) 사마리아인들의 성령체험(행8:14-17)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다. 예루살렘 대표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안수를 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고서, 이것이 2차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임스 던은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빌립의 전도함을 믿었다고 보는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들 안에 온전한 성령의 영이 임하지 않았다. 마술사 시몬도 믿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신실함에 의심을 가게 한다. 그러나 빌립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은 좀 잘못되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성경의 기사를 오도하는 듯 하다. 막스 터너는 그들이 믿었다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었다고 본다. 그들 안에 성령의 활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이 대목을 기록했다면, “그들이 구원론적인 성령을 받았다”라고 기록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누가는 구원론적인 관점에는 관심이 적고, 성령론적이고 구원역사적 관심이 크기 때문에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 기록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기록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었을 때 이미 중생하는 구원론적인 은혜가 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새로 받았다”라는 것을 이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의미할 때 이런 표현(람바노 프네우마)을 쓴 것이다. 가시적인 현현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성령의 은혜가 그전에는 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존중하자면 “믿을 때 성령을 받지 못했다”라는 말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 구원받을 때 성령이 임했고, 그 후에 성령의 능력이 임했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교의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따라서... 믿었으나 그러나 믿을 때 성령이 주어지지 아니하고 성령의 주어짐이 잠시 지연되었다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오순절 이후 성령은 “믿을 때 성령이 주어진다”는 규범적인 패턴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행2:38, 12:18에 나타난다. 믿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그런데 왜 사마리아에서는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지연되었는가? 특별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주권적인 섭리로 이것을 지연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오랜 반목가운데 살아왔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서 주변 민족들과 혼혈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 혼합주의로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주전 450년 경에는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건축했다. 그리고 구약 중에서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민족적, 종교적 순수성을 중요시하는 사마리아의 혼합주의를 오랫동안 경멸하였다. 이런 깊은 반목 사이에서 만약 사마리아에 예루살렘과 관련이 없는 성령이 임한다면 교회는 예루살렘파와 사마리아파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해서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도록 하여서, 그리심산의 혼합주의 위에 기독교가 세워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의 순수한 구약적 전통 위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신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온신학. 예루살렘을 통해서 확산되었다는 것. 사마리아인들을 하나님의 합법적인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인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성령을 주심을 잠깐 지연시키신 것이다.
사도행전은 행1:8의 패턴을 따라서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점차 뛰어넘어서 땅끝까지 확산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랜 반목을 넘어 복음이 사마리아로 확산되는 중요한 국면에 있어서 성령이 특별하게 역사한 특별한 사건이다. 누가가 이 본문을 기록할 때 이렇게 성령 내림이 주어진 것이 지연된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것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신속하게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왜 예수믿고 세례를 받으면 행2:38에 누가가 제시한 대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야 정상인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는가?”라는 뉘앙스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의외적인 것이고 빨리 교정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과 성령받는 것을 나누어져야 할 두 개의 경험으로 보고 있지 않다. 잠시 보류되었는데, 다시 시정되어야 할 문제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마리아 케이스를 근거로 해서 2차적으로 성령이 주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3) 바울의 경험(행9:17-19)
3일후에 성령이 임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행22:16에 자세한 기록.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이제 왜 주저하느뇨? 이제 일어나서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으라고 했다. 따라서 바울의 회심은 3일간에 걸쳐서 완성된 회심. 마지막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죄씻음을 받고 성령이 임했다. 아주 회심에 근거해서 성령이 임한 정상적인 패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경험은 회심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3일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꼭 회심이 찰나적인 경험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은 짧게 걸리고, 어떤 사람은 길게 걸린다. 성령의 주어짐은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경험이다.
4) 에베소인들의 성령체험(행19:1-6)
바울이 에베소에 내려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성령이 있는 것도 듣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믿은 후에 2차적으로 성령을 받는 것 같으나, 자세히 이들의 대답을 분석해 보면 이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나 신자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고, 세례 요한의 가르침만을 쫓아 살았던 사람이고,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이다. 성령이 있지를 듣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온전히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완전하게 가르친 다음에 세례를 주었다. 엄밀한 신학적인 의미에서 신자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완성된 구속 사역에 대한 확신과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고 세례를 주니 그에 근거해서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패턴이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지금도 간혹 교인들 중에 교회만 형식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도 복음에 대한 핵심적인 진리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있다. 외형적인 교인의 모습을 갖췄지만 올바른 신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와 같은 케이스가 에베소인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5) 결론적 고찰
① 누가와 바울의 성령론의 차이
누가는 성령을 요엘의 용어를 따라서 예언의 영, 증거의 능력을 부여하는 영으로 보고 있다 누가는 우선적으로 구원역사적인 관점, 선교적 관점에서 성령의 사역을 고찰하고 있다. 누가는 성령의 개인 안에서의 변화와 갱신에 1차적인 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다. 1차적인 관심은 구원론 안에 갱신에 있지 않다. 성령 사역을 이해하되 교회의 확장과 관련된 외부적인 사역에 주로 연결시켜서 부각시키고 있다. 구원역사의 점진적인 과정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 Outward adfunctional in the mission of church.
inward and individual
바울의 관점은 didactic(교훈적)이고 누가의 기록은 descriptive(서술적)이다라는 것. 바울의 기록은 교리적, 누가의 기록은 역사적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옳지 않다. 바울은 아주 교리적인 신학자인데, 누가는 신학적인 문외한으로 보아야 한단 말인가?
② 누가의 성령론적 입장 : Redemptive-historical Missionary
③ 바울의 성령론적 입장 : 총체적으로 기술.
성령의 구원론적인 기능을 부여한 최초의 신학자가 바울이라는 말도 있다. 성령을 구원의 영, 새창조의 영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육신에 속한 사람에서 성령에 속한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 성령을 모시는 것이 바로 모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6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주라 할 수 없다. 고전12:3
윤리적인 문제를 많이 안고 있었던 고린도 교인에게도 그들 안에 이미 성령이 내주하심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부흥사가 윤리적인 문제가 많은 교인들에게 접근한다면 “더러운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 불세례 한 번 받아라”라고 말하겠지만, 바울은 “너희들은 거룩한 성전이고 성도들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다.
누가의 입장은 바울의 입장은 상충되지 않는다.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누가의 규범적 패턴.
전체적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증거를 볼 때 바울의 구원론적인 입장과 누가는 근본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그러므로 중생 이후에 성령세례 도식을 사도행전에서 끌어내는 것은 무리한 시도이다. 그들이 제시한 증거 본문 마저도 2차 은혜를 말하고 있지 않다. 2차적으로 성령을 말하는 것이 규범적인 패턴으로 볼 수 없다. 유일하게 믿는 것과 성령받음이 잠깐 분리된 것이 사마리아에서 나타나는데, 사마리아의 성령 체험의 패턴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타당하다. 믿은 후에 성령세례를 획기적인 체험을 받는 것은 근거가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성령세례라는 표현, 이들이 제시한 증거본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각복음서 4번, 사도행전에 다시 되뇌이는 것 2번, 고전 12:13에 바울이 한 번. 여기에서 바울의 성령세례 개념과 누가의 성령세례 개념은 차이가 있다. 바울의 성령세례 개념은 교회에 접붙임을 받는 것이다. 교회에 입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성령세례 경험은 새 시대(New Age)에 진입하는 체험이다. 그와 동시에 증거를 위한 능력 부여로서 성령체험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누가의 개념에 있어서 성령세례를 꼭 개인의 입문시의 경험을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매우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오순절의 경험도 성령충만의 경험이다. 성령충만을 받은 이후에 계속적으로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최초의 성령의 내주는 성령충만일 수도 있고, 내주의 시점부터 성령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one baptism, many filling”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도식도 아주 적절하지는 않다.
3. 조직신학적 관점
1) 예수를 영접하는 것과 성령 받는 것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오순절 성령의 특성은 부활하신 주님,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성령이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을 중재하시는 분이다. 성령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을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2) 예수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엡1:3, 벧후1:3, 엡1:17-20 바울의 관점은 예수와 연합함으로 말마임아 아직 우리가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something more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주어졌으매, 저희들의 영안을 밝혀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다. 연합을 근거로 해서 우리들에게 성령이 주어지고, 풍성하게 역사한다.
3) 칭의
골 2:9-10에 보면 예수 안에 신성이 충만히 거하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한 의인, 죄가 없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 죄가 없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고, 충만하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법적인 근거에서.
4) 근본적인 성화
우리 안에 죄의 성품이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처리가 된다. 새 언약의 실현이다.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성령을 거스리는 영이 제거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실 수 있다. 그래서 웨슬리와 케즈윅 운동에서는 획기적인 성화가 나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획기적인 성화를 통해서 자유롭게 성령이 역사한다고 본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화가 칭의와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강조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 예수 믿을 때 성령이 내주하시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을 살면, 돌이키기 힘들다. 중독이 된다. 현대 교인들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지 않고, 자기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이 너무 익숙하고,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전격적인 찾아오심. 예수믿을 때부터 분명하게 헌신하고, 죄를 끊어버리고, 성령을 쫓아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메시지, 양육 프로그램, 교제가 교회를 통해서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대혼동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성경의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4. 결론적 고찰
두 단계 주장의 문제점. 웨슬리의 가르침에서 오순절 운동에 이르는 가르침.
1) 성령체험의 다양성을 간과한다. 2단계 구도의 체험 속에 모든 성령 체험을 도식화 해버릴 위험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은 개종이고 중생이다. 중생을 통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육신에 속한 사람에서 성령에 속한 사람으로 옮겼다. 개종 후에 또 그것과 버금가는 획기적인 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빈약하다. 어떤 이이에는 그런 획기적인 경험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경험을 일반화시키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정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정도로 돌이킨다는 의미에서 획기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정상적인 패턴으로 강조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의 죄와 방황 때문에 일어나는 변칙적인 상황이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현대 상황에서 이런 경험이 필요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야한다. 본시에서 졸시를 합격해야지, 재시를 많이 본다고 해서 그것이 정상이라고 주장하면 안되는 것이다.
2) 2차 체험 이후에는 항상 고양된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 것 같은 기대를 준다. 그러나 어떤 획기적인 영적인 은혜라도 자동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어떤 전환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은혜 후에 충만의 은혜가 나에게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3) 2차 은혜의 획기적인 은혜 체험을 어떻게 하느냐? 대부분의 가르침(로이드 존스)은 “기다려야 한다”라는 것이다. 조건을 내건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새로운 율법주의적인 삶으로 우리를 끌어갈 수도 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조건을 다 이룬 다음에 어떤 은혜를 누린다면 이것은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평생을 2차 은혜를 간구하다가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던 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4) 획기적인 은혜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증거주의, 체험주의로 빠지기 쉽다. 성령세례는 방언이라는 증거가 나온다. 센세이셔널한 체험을 바라게 된다. 증거를 추구하게 된다는 오류 가운데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생수의 강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다. 내 안에 나를 사랑하사 은혜를 주신 분이 항상 나에게 믿음과 힘을 주신다. 행하면 된다. 행하면 되는데 행하지 않고, 계속 증거를 구하면 잘못된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오순절의 가르침과 비슷하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2차적인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리고 성령세례는 성결과 연결시키지 않고, 복음증거의 능력과 연결시킨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아서 대단한 설교를 하고, 능력이 갑자가 주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점진적인 과정과 극적인 체험이 병행되고 혼합되면서 다각적인 패턴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런 것이 더 원만한 견해이다. 어떤 존경스러운 사람의 견해를 비판하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아무리 훌륭해도 오류가 있다.
5) 영적 요행주의의 문제
wonder drug. 만병통치약. 성령세례만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죄의 문제, 갈등, 능력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가 그런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하다가 지치게 되면 어떤 획기적인 변화, 대박, 일확천금을 노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아주 매력적인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스티브 맥베이가 쓴 ??은혜의 영성??에도 그러한 메시지가 나타난다. 이런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혹하게 하는가?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한꺼번에 대박을 터뜨리고 싶어하는 유혹을 준다.
6)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육신에서 져서 육신을 따라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아도 우리의 리얼리티는 성화에 있다. 우리는 변화된 본분대로 살지 않고, 육신에 속한 사람처럼 방황하며 산다는 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이다. 오순절이나 웨슬리처럼 획기적인 경험을 해야한다는 것은 매우 적용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의 문제점은 우리가 성령충만할 수 있는 시점을 줄여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전 과정을 성령충만하게 살 수 있다. 나중에 성령충만을 받는다면 성령충만하기 전까지는 무력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무력한 삶을 살아도 변명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가르침은 지금 성령을 받은 우리가 무한한 영적인 자원을 낭비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우리의 잘못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입장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충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상황에 지혜롭게 적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성도들이 방황하고, 정도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은혜가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새로운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지 않게 한다는 약점이 있다.
오순절의 입장은 열심을 장려할 수 있는데, 우리의 입장은 새로운 획기적인 은혜를 강조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대 상황을 강조해야 한다. 현재 상황이 정상이 아님을 말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며,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이러한 획기적인 은혜를 받은 이후에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2002. 11. 6. 수.
성령의 사역
Ⅶ. 성령과 설교
1. 성령과 성경말씀
성경과 성령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져 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성령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쓰여진, 계시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만 깨달을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다. 단회적으로 계시된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새롭게 이해되고 깨닫게 되고 해석된다. 이것을 편의상 inspiration/illumination으로 나눌 수 있다. 성령의 영감/성령의 조명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성경의 기록/성경의 깨달음.
?칼빈
성경과 성령의 긴밀성(unity)를 강조했다. 성령의 감화와 함께할 때만 성경을 읽는 자에게 효력이 있다고 말하였다. 성경 말씀은 항상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령의 새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듣는 자와 읽는 자에게 살아있고 적용되는 말씀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경과 성령은 항상 같이 간다고 하였다. 복음의 외적 소명(external calling)이 effectual calling으로 전이. ???
?개혁파 정통주의
성경 말씀의 객관적인 충족성, 객관적인 완전성 - 우리에게 와닿지 않을지라도, 성경 자체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 에 너무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경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주관적인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는 것을 온전하게 강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이미 완성된 성경의 내용을 우리가 교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 터득한 것으로, 계시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리적인 경향에 치우치게 되는 오류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inner light, inner illumination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주관적인 측면을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것은 교리가 아니고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초대 자유주의는 이 경건주의에서 파생된 경건주의의 사생아라고 볼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주의의 강조점과는 반대로 객관적인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으로부터 신학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객관적인 진리 위에서 신학을 건축했는데, 이제는 주관적인 체험의 관점에서 신앙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거기에서부터 기독교를 이해하는 시도를 하였다.
?칼 바르트
너무 주관적인 자유주의의 접근에 반대하여서 바르트는 객관적인 출발점을 다시 강조하였다. 말씀의 신학(Kerygmatic Theology)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통주의의 방법론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고, 그는 정통주의가 너무 성령의 주관화하는 사역을 강조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칼빈이 부각시킨 것처럼 성령과 말씀의 긴밀한 unity를 강조하지 못함으로써 말씀의 역동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통찰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Reformed Orthodox →Schleiermacher→Karl Barth
철저한 객관주의 주관주의 성령과 성경의 긴밀한 연결성 강조(칼빈으로 복귀)
그러나 바르트의 문제점은 말씀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시도 속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지나친 객관화를 반대. 신 정통주의(Neo Orthodox).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는 우선적으로 propositional(명제적인 것)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personal)이라고 하였다. 성령이 실존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이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말씀의 역동성을 강조. 그러나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은 기존의 정통주의 입장을 따라서 Scripture = His word을 동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가서 더 온전한 의미에서는 오직 성경이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우리의 삶에 와 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Scripture becomes the Word of God. 실존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것은 우리 정통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바르트의 성경관과 계시관의 문제는 - 바르트의 성경의 역동성에 대한 강조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 말씀의 객관적인 완전성과 충족성을 약화시켜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적으로 효력이 있는 말씀이 되지 않을지라도 이 말씀은 객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그 정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바탕 위에서 칼빈이 강조한 것처럼 이 말씀 자체는 완전히 충족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말씀이 성령의 새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능력있는 말씀으로 와 닿아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바르트의 신학을 교정하면서 우리는 다시 칼빈으로 돌아가야 한다.
2. 성령과 설교자
성령은 말씀을 효력있게 해주시기 위해서 설교자를 택하시고 부르신다. 그래서 설교자, 말씀의 선포자는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소명을 받은 사람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신학 학위를 몇 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목사가 되고 있는 현상이다. 콜링과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신학교에서 많은 유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콜링과 기름부음이 없는 사람이 신학교 제도를 통과한다고 해서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콜링과 기름부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위해서 울부짖어야 한다. 성령의 콜링은 내적인 콜링과 외적인 콜링으로 나눌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자기에게 내적인 콜링은 “끊임없는 갈망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적인 소명이 아무리 강해서 이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서 외적인 소명에 의해서 점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에서 내가 설교자의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위에서 인정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책임성 있게 목사 후보생을 추천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전통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부르실 때 여러 가지 자질을 주신다. 언변, 지적인 능력 등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유창한 언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설교의 능력은 인간의 유창함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의 웅변에 있지 않다. 말이 유창한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유창함에 의존하려 할 수가 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말 잘하는 목사님 중에서 설교를 못하는 목사도 많다. 말을 너무 못해서도 안되겠지만.
설교자는 은사와 함께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격이 성숙할수록 우리들의 설교가 성숙해진다. 필립 브룩스는 “설교는 우리들의 인격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 영성, 인격, 기도, 경건의 모든 모습들이 설교를 통해서 묻어 나오는 것이다. 반짝반짝하는 설교 몇 편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삶이 받쳐 주어야지 성숙한 설교가 될 수가 있다. 좋은 설교가 나오기 전에 좋은 설교자를 만드신다. 김남준 목사는 “설교란 설교자 자신의 깨뜨림 속에서 흘러 나오는 진액과 같다”라고 말했다. 양심이 양심을 찔러야 하고, 가슴에 가득한 진리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소명과 기름부음(성령충만)이 있어야 한다. 성령충만은 열매와 은사로 나타난다.
3. 설교 작성하는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사
설교학에서 배우기를 나의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해야 하며, 성령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균형있게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를 작성하는 노력, 설교를 철저히 준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성령의 은혜만 의존한다는 초경건파도 문제가 있다. 강대상에 탁 서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받아서 말해야 한다는 초강경파 목사들이 있다. 지금도 있었고, 과거에도 있었다. 루터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주시는데, “이 게으른 놈아”라는 메시지를 주신다고 하였다. 우선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마음이다. 기도를 깊이 하면서 준비해야 한다.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막힌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이 하나님의 감동과 조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청결하심을 청결한 자에게 보이시고,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보이신다. 마음이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면 하늘에서 메시지가 확 주어진다. 깊이 기도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다. 이런 마음에서 설교를 준비하지 아니하고 인위적으로 설교를 준비하면 메시지도 잘 풀어지지 아니하고 그렇게 만든 설교는 잘 전달되지도 않는다. 17년 전에 칼빈신학교에서 Th.M.을 할 때 한인교회에서 주일날 설교를 대예배 설교를 담임목사님 대신 한 적이 있다. 모처럼 설교를 부탁 받았는데, 그 교회는 칼빈신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설교를 들었다. 나는 이 때 내 실력을 한 번 뽐내야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본문을 택하고 금요일부터 준비를 하는데, 하루종일 그 메시지를 붙들고 씨름을 했는데 한 페이지도 작성이 안되었다. 금요일 하루종일 헛수고 하고, 토요일 하루종일 붙잡고 있어도 한 페이지도 작성을 못했다. 그때부터 엎드렸다. 그때부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밤새 기도했다. 밤에 몇 시간 동안 계속 기도를 하면서 나의 마음의 동기를 점검하고, 마음을 비우고,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니까 새벽 6시가 되었다. 그러고 나니 30분 만에 설교를 작성하였다. 너무나도 은혜스러운 설교를 했음은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때부터 나는 설교를 준비할 때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설교를 작성할 때도 기도를 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 가야 한다. 박윤선 목사님이 설교를 작성할 때 막히면 “하나님이여 막혔습니다~!”라고 부르짖었따고 하지 않는가? 내가 공부할 때 설교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도 감동받지 못하는 설교에 누가 감동하겠는가?” 그리고 설교 초기에 몇 년 동안은 설교문을 완벽하게 쓰도록 하여야 한다. 가능한 원고를 의존하지 말고 완전히 메시지를 소화해서 가슴에 담고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올라가서 가슴에서 끌어내서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문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어체로 써야 한다. 실제로 말을 할 때의 어투로 쓰도록 하라. 스펄전은 아주 유창한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 원고를 만들지 않고, 아웃라인만 만들어서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을 잘 해석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본문을 충실하게 잘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문에 제시된 하나님 말씀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한 또다른 요소는 ‘그리스도의 마음’, ‘성령의 충만’이다.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마음과 뜻을 우리들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만 연구를 해서 그 말씀을 우리들이 포착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을 때 충분히 말씀을 이해하고 전할 수 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영적 수준에 맞게 전할 수가 있다. 성령 충만했을 때 범사에 지혜를 주시고, 그들에게 적절한 말씀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 어떻게 눈높이 교육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주신다. 본문을 잘 해석해서 적용이 부적합한 경우가 참 많다. 그렇게 되면 효과적인 설교가 되지 못한다. 어떤 분은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다른 주석이나 설교를 참조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감화하실 때 꼭 직접적인 방법으로만 감화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동하신 진리로 똑같이 우리를 감동하시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신 영감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전병욱 목사는 자기의 영감이 없으면 남의 영감이라도 빌리라고 하는데, 사실 자기의 영감이라는 것은 없다. 모두 하나님의 영감이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을 감화하신대로 나를 감화하시는 것이다.
4. 선포하는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사
설교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성령을 의존해야 한다. 스펄전이 설교했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는 강단이 높게 배치되어 있다. 그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이 말씀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계단을 올라 갔다고 한다. 설교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준비를 하려고 하다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원고만을 의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약간 부족한 설교 원고를 준비했다가도 성령을 의지해서 좋은 설교를 하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완벽한 설교를 최선을 다해서 만드는 동시에 설교단에 올라갈 때는 성령의 은혜만 온전히 의존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설교를 선포할 때 주시는 은혜는 무엇인가? 1) 설교자 안의 부패성을 억제하셔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신다. 우리 안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위해서 설교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설교하려는 마음을 제어하신다. 자신의 유창함, 학식을 과시하려는 부패성이 얼마나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모른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충만하셔서 이러한 부패성을 제어해 주셔야만 우리가 온전히 주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우리가 설교를 하면서 너무 조급한 경우가 있다. 성령께서 온전히 역사하도록 맡겨 드리지 못하고 성령이 해야할 일까지도 우리가 다 해치우려는 조바심이 설교시에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설교를 오히려 더 무력화할 수 있다. 이런 부패성을 성령께서 제어해 주신다. 2) 성령께서 담대함을 주신다. 베드로가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처럼 말이다. 성령께서 assistant가 되어 주신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다. 대중에 대한 공포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신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하는 길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건전한 긴장감을 갖게 하신다.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긴장감을 대부분 “내가 잘해야지”하는 긴장감이다. 주님을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잘해야 하겠다는 건전한 긴장감을 갖도록 해주신다. 3) 설교자의 영적인 기능을 새롭게 해주신다. 생각, 기억력, 영적인 통찰력을 새롭게 만들어 주신다. logic on fire라고 로이드 존스는 말했다. 논리 정연한 메시지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설교 작성 때 풀리지 않았던 것이 설교를 할 때 멋지게 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착상들이 설교를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은혜인 것이다. 4) 말의 표현이 적절하게 되도록 해주신다. 5) 육체의 힘을 주신다. 피곤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전달하고 나면 새로운 힘이 생긴다. 어떨 때는 그 여파가 며칠을 간다. 설교자의 건강의 비결은 은혜스럽게 설교를 전하는 것이다. 보신탕 많이 먹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롭게 설교하면 자신이 건강해진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주일날 설교하고 그 여파를 몰아서 다음 주 설교를 준비한다고 한다. 상당히 지혜로운 목사님이다. 6) 음성, 표정에 자연스러움을 주신다. 설교의 내용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표정과 자유한 모습 속에서 복음의 핵심적인 의미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도록 하신다. 헤르만 틸리케는 이 점을 강조했다. 나를 보는 사람이, 내 메시지를 듣는 사람이 감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은혜가 있으면 음성도 부담스럽지 않는다. 설교하면서 음성을 바꾸거나 말을 굴리거나 꼬거나 하지 말기를 바란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기의 목소리로 설교하기를 바란다.
5. 회중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
설교를 통해서 온 회중에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리얼리티와 능력과 함께 우리를 찾아 오신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세계가 활짝 열리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말씀 안에서 찾아오시는 그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느끼게 하신다. 깊은 심연에서 영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전인적인 치유가 일어난다. 과거에는 항상 예배시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은혜의 수단이 말씀의 선포라고 개혁교회는 강조했다. 그러나 강단의 쇠약으로 인해서 그러한 능력이 임하지 않는다. 강단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은혜는 일일이 찾아가서 상담을 해야 하는 필요를 줄인다. 근본적인 치유와 변화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하다. 가장 근본적인 성령의 은혜의 방편이 말씀 사역이다. 개혁교회는 말씀이 가장 최고의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하면서 말씀이 강단에서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지금 커다란 모순에 빠져 있다. 설교 시간이 은혜를 주지 못하고 인내 운동을 시키는 교회가 있다. 이것은 개혁 강단이 아니다. 이 강단의 말씀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강단의 능력을 회복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여러분들은 경험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교인들이 예배 시에 하나님 나라의 리얼리티를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론, 구원론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삼위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 실존이 변화되고, 전인적인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 안식을 누리는 것, 죄악과 영적인 결박에서 성령을 접함으로 말미암아 자유하게되는 것. 이러한 것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꽁꽁 매어 있다가 교회에 와서 죄악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경험을 하지 못하니까, 계속 묶여 있다가 교회에 와서도 풀리지 못한 채 묶여서 돌아간다. 현대 교회가 성령충만의 은혜를 상실했는데, 이것을 회복하는 일차적인 단계가 강단의 메시지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성령 충만한 설교자가 될 때 우리 교회가 새롭게 부흥되는 것이다. 설교에 야심을 좀 가지시기를 바란다. 이런 주권과 능력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보장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설교 사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잔소리 같고, 도덕적인, 맥이 없는 무력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접하게 되면 한 주간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힘을 얻는다고 한다. 형식적인 설교 사역은 그만 두라. 여기에 목숨을 걸어라. 지금 강단이 얼마나 쇠약해져 있는가. 성령의 불이 우리 강단에 임해야 한다. 젊은 설교자들을 보면 신학 교육을 많이 받아서 성경 강해도 잘하고, 논리적이고, 기발한 착상과 아이디어가 가득하고, 유창한 설교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능력을 부재하다. 많은 교회를 돌아보면서 설교를 돌아보니 뭔가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과거 능력있는 목사님들은 굉장히 단순하고, 내용도 엉성했고, 지식도 부족했고, 재미있는 예화도 없고, 기발한 아이디어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나도 그것을 경험했다. 우리 신학교 5회 졸업생인 목사님에게 설교를 많이 들었다. 말도 시원치 않았다. 유창함도 없었다. 재미있는 예화도 없었다. 성경만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만주 봉천에서 신사참배하다가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셨지만, 목사님의 메시지는 능력이 있었다. 청중을 압도하는 능력, 말장난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양심을 찌르는 메시지. 과거에 이런 능력있는 목사님들이 단순한 메시지이지만 양심을 대고 푹 찌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인간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타고남이 성령의 능력을 대치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학적인 바탕 위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적인 준비를 잘 갖춘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다이나믹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이 문제가 있지만 은혜를 구하라는 도전은 받아야 한다. 강단에 설 때마다 기름부어 달라고, 특별한 능력을 달라는 기도와 함께 말씀 사역을 해야 한다. 무디와 피니의 설교도 굉장히 내용이 단순하다. 그러나 열매는 너무나도 어마어마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Sinners in the hands of Angry God”을 설교했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설교문을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냥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하나님의 능력들이 우리들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으로 우리가 설교 사역에 임해야 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으로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자연스럽게 역사하셔야지 너무 인위적으로 수법을 쓰려고 해서는 안된다. 능력있는 설교를 한다고 해서 소리를 지르는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온유한 목소리로 설교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온유한 목소리 가운데 뼈를 찌르는 능력이 있다.
6. 이상한 은혜
우리가 설교할 때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나 혼자인 것처럼 힘들게 맥없이 설교할 때가 있다. 로이드 존스도 이것을 논하고 있다. “어떤 주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은혜스러운 설교를 할 때가 있다. 그 다음 주에는 더 많은 성도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더 적은 교인들이 나온다. 그런데 어떤 날은 설교를 죽을 쒔지만, 다음 주에 성도들이 더 많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설교자의 로맨스다.”
이것은 이상한 은혜이다. 자기를 의존하지 아니하고 좀 더 성령의 은혜를 의존하기를 원하신다. 미국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한 교회에 능력있는 설교자가 있었다. 교인 중에서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도 전혀 변화가 없이 뺀질뺀질한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쑤는 설교를 한 날 그 뺀질이 성도가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는 스토리가 있다. 지금까지의 설교는 그 목사가 자기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설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성도들도 인식해야 한다. 전혀 죽쑤는 경우가 없이 항상 승승장구하는 설교만 한다면 그는 잘못하면 교만해질 수 있다.
7. 설교를 위한 성도의 기도와 성령의 역사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뿐 아니라 성도 전체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설교는 모든 교인들과 동역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선지자적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목사는 입으로 전하고 모든 성도는 기도로 동참하는 것이다.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목사는 설교를 하는 것이며,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목사의 설교를 축복하신다. “여러분의 기도가 없이는 나는 설교 못한다”라고 선포해야 한다. 성경은 전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도로 보고 있듯이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설교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교만한 사람이다.
8. 성령과 설교자의 인내
열매가 금방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2002. 11. 13. 수.
성령의 사역
개혁교회에서는 치유의 신학이 부재하다. 어떻게 보면 치유 사역은 굉장히 중요한 사역인데 이에 대한 신학적인 연구와 고찰이 너무 부진하였다. 그로 인해서 많은 혼란이 있었다. 바른 성경적인 치유에 대한 입장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Ⅷ. 성령과 병고침
1. 신약 성경에 나타난 치유 기적
1) 예수님의 치유 기적
구약적 배경을 통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말에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억압에서부터 liberate해방시키는 메시아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이 대망한 메시아 시대는 치유와 회복의 시대였다. 구약의 종말론적인 기대와 소망을 예수께서는 실현시키는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셨다. 눅 4:18-21의 구약적인 소망을 다시 인용하시면서 당신의 삶을 특성을 설명하고 계신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신 것과 병자를 고친 것은 이 땅 위에서 사단의 세력이 물러 가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표징이 된다. 예수님의 치유의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임할 때, 그 하나님 나라의 수반되는 종말론적인 회복, 종말론적인 구원의 한 단면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종말론적인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복음 메시지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두 가지를 명령하신다. 1)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2) 병자를 고치라. 병자를 고치는 것은 복음사역과 분리된 또 다른 사역으로 볼 필요가 없다. 복음 사역에 포괄적으로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종말론적인 치유가 임한 것의 구체적인 나타남으로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라고 하셨다.
2)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패턴이 사도들의 치유사역에서 나타난다.
행 3:1-16에서 베드로가 앉은 뱅이를 일으키고 바로 복음을 전한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는 이 사도들의 치유 사역을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평행을 이루도록 그리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의 치유 사역이 평행을 이루도록 해 놓았다. (표준새번역 인용)
? 앉은뱅이 고침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치다> a오후 세 시 기도를 하는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a. 그, 제 구 시)??(행 3:1)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서, 걸어 본 적이 없었다.??(행 14:8)
?손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킴
??<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다>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솔로몬 행각에 모이곤 하였다.??(행 5:12)
??<스게와의 아들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다.??(행 19:11)
?
??또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 많은 사람이 병든 사람들과 a악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a. 그, 더러운)??(행 5:16)
??그들은 극진한 예로 우리를 대하여 주었고, 우리가 떠날 때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배에다가 실어 주었다.??(행 28:10)
?죽은 사람을 살림.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리다> 그런데 욥바에 d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d. 아람어 이름. 그리스어로는 도르가. 둘 다 사슴이라는 뜻)??(행 9:36)
??<유두고를 살리다> a주간의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 바울은 그 다음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a. 또는 안식일 밤에. 또는 토요일에. 또는 주일에)??(행 20:7)
3) 연속성과 구별성
워필드는 치유사역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보수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고, 그 하나님 나라의 회복의 징표로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동시에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독특한 면이 있다. unique.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통해서 복음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치유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래서 이러한 치유 기적은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입증할 뿐 아니라,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심, 신적 존재이심,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히심, 특별한 인간이심,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에서 주장하는 바이다. 워필드가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신 것이다.
사도들의 복음 사역도 우리들과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 그들에게는 특수한 임무가 주어졌다. 오고 오는 세대에 세워져야 할 교회의 터를 닦는 일을 그들이 맡았다. 복음의 메시지를 입증하는 역할을 치유 사역이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구원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특수성과 우리 교회의 사역의 특수성을 인정함으로 어느 정도 구별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누구도 예수님과 똑같은 정도로 치유의 기적을 일으킬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성령에 완전하게 사로잡히신 신적인 존재. 그래서 교회 시대와 예수님 시대의 연속성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고,병의 치유함을 받는 것은 종말론적인 전인적인 치유의 한 단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병고침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된다. 불연속성과 구별성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씨, 밀알로서 떨어졌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셨다. 이 사역은 unique하다. 그 다음 사도들의 사역은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발판(foundation)의 역할을 했다. 그 다음 교회시대의 사역은 building을 세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2. 교회 역사 속의 치유 기적과 사역
1) 초대교회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순교자 저스틴, 폴리캅.
:치유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거나, 긍정한 사람들.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어거스틴
: 서방교회의 대 감독들은 이러한 치유 사역을 강조하고, 이 치유 사역을 계속 실행했다.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어거스틴은 초기 저 454년 ??하나님의 도성??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그 당시 자신이 살던 힙포에서만 70건의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2) 중세교회와 종교개혁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개혁. 종교개혁은 자유롭게 인간을
루터 : 참된 기적은 영적인 것이기 육적인 것이 아니다. 말년에 치유 기적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된다. 말년에 야고보서에 근거해서 치유 사역의 지침서를 남김.
존 칼빈 : 질병을 근본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징계 방편으로 주신다고 이해하면 안된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은사가 중지되었다는 개혁교회의 입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병은 죄와 사단이 파괴하는 것
3) 청교도 전통
스펄젼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영적으로만 해석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도 치유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도 이 입장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4) 홀리니스, 케즈윅, 오순절 운동
A.B.Simpson, A.J. Gordon, Andrew Murray
“faith-healer Movement" - 캐트린 쿨만
Agnes Sanford, Francis MacNutt(Catholic)
Peter Wagner, Charles Kraft,
John Wimber, John White
3. 오늘날 치유 사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점.
1) 교회 발전의 단계
2) 사회 문화적 요소
3) 교회의 영적인 상태
칼빈은 초대교회의 영적인 풍성함이 없어지고 우리 교회가 빈곤한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에 대한 형벌이라고 말했다. 현대에 은사가 잘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 망각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은사가 잘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다양한 복합적 이유가 있다. 그러나 칼빈의 말처럼 우리의 죄와 침체가 현대 교회의 은사의 부재에 대한 이유 중에 하나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회가 침체될 때 은사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교회가 왕성한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때 강력한 은사가 다시 회복되게 된다. 손양원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뒤에서 소경이 눈뜨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내가 눈을 떴어요”라고 외쳤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조용히 좀 하세요. 설교좀 합시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건을 대단치 않게 여길 정도로 겸손하셨다.
성령 충만하게 살지 않고 죄에 자신의 몸을 허용해 버리면 약함과 육적인 곤고함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체를 온전히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바쳐 드릴 때 병이 낫게 되는 많은 경우가 있다. 성령 충만하게 살지 않고, 육신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삶을 살기 때문에 몹쓸 질병에 걸리는 것이다. 신명기의 말씀처럼 말이다. 그들이 깊이 회개해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 병고침도 많이 일어날 수 있다.
4) 종말론적 관점
‘이미’와 ‘아직’의 관점에서 치유를 이해해야 한다. 치유의 기적은 종말론적인 치유의 한 부분이다. 성령 안에서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도 강건함을 얻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영육간의 강건함이 주님의 뜻이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구원과 회복, 치유는 마지막 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종말론적 축복이 이루어지고 체험되는 already의 측면이 있다.
온전한 의미에서 육체적 회복은 종말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땅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이 육체는 아직도 죄로 인해서 늙고 약하고 병드는 것이 정상이다. 성령 아무리 충만해도 할머니가 주름살 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늙고, 약해지고, 병드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래서 not yet의 측면이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already만을 강조하면 영광의 신학에 빠지기 쉽다.
고침을 받지 못했을 때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우리를 바로잡는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성화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징계의 의미가 실현되면 징계의 방편으로 주신 고난과 질병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며, 성화의 방편으로 질병을 사용하시면 우리가 영적으로 성결해짐에 따라서 그 목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짐에 따라 그 질병을 거두어 가시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두 측면을 모두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도 하지만, 치유를 보류하심으로써 특별하신 뜻을 이루기 원하시는 경우도 있다.
너무 일방적으로 십자가의 신학(약함의 신학)을 강조하는 것도 우리를 패배 의식에 빠져 살도록 한다. 영육 이원론에 빠질 위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만, 육체의 문제는 해결해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영광의 신학도 문제이지만, 십자가의 신학만 추구하는 것도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고, 가장 큰 기적은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이지만, 그 측면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구체적으로 우리의 육체에 이루어지는 기적은 바라지도 않고, 일어나면 놀라고 겁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의 믿음없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측면들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패배주의적인 신앙에 빠지도록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경건의 개념도 교정이 필요하다. 병고침을 고하는 것보다도 그 고통을 감수하는 태도가 더 성숙한 신앙의 태도인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인 성숙을 통해서 은혜스럽게 사용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일면적으로 그 쪽 측면에서만 질병과 치유를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기적적으로 치유하심으로 그분의 긍휼하심과 사랑을 나타내심보다, 우리의 인내함으로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고만 보아서는 안된다.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치유함을 통해서 만져주심을 통해서 나타내신다고는 왜 보지 않는가? 항상 고정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으로만 믿음을 이해하지 말아라. 바른 성경적인 분명한 토대를 가지고 그 위에 믿음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이다.
4. 치유사역의 위험성
1) 영광의 신학
치유를 받지 못하면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이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광의 신학에 과도하게 치우친 것이다. Not yet의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2) 말씀보다 이적에 더 치중함
인간은 신기한 것, 기적적인 것에 대한 생리적인 호기심이 있다. 말씀과 기적적인 치유 이 두가지를 제시하면 교인들이 더 선호하는 것은 기적적이고 센세이션한 것이다. 말씀 사역쪽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고, 일상적이고 보통적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비상하고 기적적인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치유 사역을 복음 사역의 일환으로서, 포함되는 것으로서, 말씀 사역의 우선 순위를 두고 치유 사역을 시행하지 않으면 이것이 아주 잘못되고 오염될 수 있다. 그래서 치유 사역을 말씀 사역과 분리시켜서 독립시켜서 더 앞장 세우면 큰 혼란과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말씀 사역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 일환으로써 치유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치유사역을 목회 부흥의 수단으로써 병고침을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기의 말씀 사역이 부진한 것을 메꾸기 위한 방책으로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말씀 사역에 등한시 하면서 이것을 강조하는 것도 옳지 않다. 자기의 권위가 세워지고 자기가 높아지는 것을 위해서 치유를 강조하는 것도 옳지 않다.
3) 교회 부흥의 수단화
이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교회를 위해서 건전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여 전도사는 치유 선교회를 만들어서 밀가루가 고약이라고 해서 팔아먹고 있다. 전통 교회가 바른 치유 신학을 제시하지 못하고 본을 보이지 못한 책임이 있다. 여러 가지 혼란과 무질서가 있는 것을 보고 치유 사역에 대해서 더욱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우려해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5. 치유 사역의 필요성
1)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리얼리티, 실체가 우리들에게 임했다는 싸인이다. 그안에서 종말론적인 회복과 구원이 우리에게 임했다. 종말론적인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다. 그리고 이 치유 사역은 죄로 말미암아 뒤틀리고 파괴되고 일그러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우리 안에서 다시 회복되는, 새창조가 우리 안에 시작되는 싸인일 수도 있다. 새창조가 우리 안에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일그러진 창조의 질서가 우리 안에서 회복되고 소생된다.
종말론적인 구원이 임했다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실체의 사인으로써 지금도 존재해야 한다.
2) 복음전도에 필수적이다. 지금은 power evangelism이 어떤 때보다 더 필요하다.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제 별 효과가 없다. 바울 사도가 보여주누 능력 전도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현상을 통해서 전도를 하는 방법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 어떤 선교지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역사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기 전까지는 전도가 되지 않는다. 낙도에서 전도를 하는데 그 지역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사람은 신들린 어느 무당 여자였다고 한다. 이 여자는 귀신을 잡아 넣었다가 뺐다가 하는 것이다. 그 섬에서 전도하려면 그 여인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다. 그 지역의 신보다도 하나님이 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선교하러 간 멜 테리는 보수 신학을 공부했었으나, 무당의 역사보다도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큰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서 치유사역을 선교의 큰 방편으로 삼게 되었다.
3) 치유 사역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보수 신학의 관점은 현대인들의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에 대한 불신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이 많다. 이런 세속주의 세계관을 엎고, 초자연적인 세계나 현상은 없다는 교만한 생각을 때려부수기 위해서라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4) 과학과 의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의 상황 속에서는 과학과 의학이 새로운 메시아로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실제로 의지하는 것은 과학과 의학이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제대로 의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현대에는 과학이나 의학이 새로운 우상으로, 하나님의 라이벌로, 메시아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라이벌, 우상을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해야 한다. 현대 세계 속에서는 이런 이적이 아주 필요하다.
5) 이런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통치하심을 구체적으로 리얼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한 채 이론으로 풍설로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실제, 파워, 사랑을 실제적으로, 전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세대들에게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심, 통치하심을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 한 번 체험하면 사람이 달라진다. 이런 역사가 꼭 있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사역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의 주님이 구체적으로 외형적인 수단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주시고 만나 주시는 것이다. 육체의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심으로 육체의 질병을 고쳐 주셨듯이, 지금도 우리를 고쳐주실 수 있다. 그의 사역을 우리 안에 지금도 연장시키고 확대시키시고 계신다.
6. 치유 사역의 성경적 지침
1) 병고침의 은사 활용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그 은사를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을 사용해서 돈을 벌려고 하거나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지도 아래서 겸손하게 이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안타까운 측면은 이러한 병고침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이 은사를 제대로 사용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교단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은사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2) 목사의 기도
교인들을 위해서 손을 들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치유는 간혹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 괜한 희망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주님께 믿음으로 구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1년을 기다리고 난 이후에 병고침의 능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3) 중보기도
이동원 목사님이 중보기도 사역을 일으키고 나서 교회 안에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사역을 해야 한다.
4) 기도의 내용과 형태
우리는 많은 경우에 병고침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했다. “만일 병고침이 주님의 뜻이라면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믿음의 결여와 의심을 요소가 많이 깃들어 있다. 믿음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를 하면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하나님께서 이 병을 꼭 고쳐주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과 건강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를 고쳐 주옵소서!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시점에 고쳐 주실지는 주님께 전적으로 맡깁니다. 나의 몸을 주께 의의 병기로 드리기 원합니다. 이전의 불의의 병기로 죄에 몸을 드렸던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사오니,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맛보게 하옵소서!”
<실제로 병고침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
박영돈 교수님의 망막의 치유를 위해서.
오우석: 화상을 입은 박영환 전도사님의 동서.
홍상희: 홍전도사님 아버지 간암 말기. 2년째.
2002. 11. 20. 수.
성령의 사역
Ⅸ. 축사(逐邪)와 영적전쟁
1. 축사를 이해하는 관점
1) 기독론적 관점
?예수의 축귀 사역의 의미 :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칼 바르트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단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가 일어났다. 그 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이제는 더 이상 사단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획기적인 승리의 빛 가운데 새로운 리얼리티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헨드리쿠스 벌콥, ??역사의 의미??(The Meaning of History)에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에 획기적인 변혁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
?오스카 쿨만 : Already, Not yet을 대중화 시킨 신학자. 사단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이 구도에서 설명. 결정적인 승리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사단의 패배는 종말까지 유보가 된다.
2차 대전이 종료되기 직전에 D-day가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독일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V-day가 되어 독일군들을 완전히 격퇴해야만 독일군의 완전한 패배가 이루어진다.
2) 성령론적 관점
예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단회적인 승리의 사건을 성령이 세게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적용해서 역사를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확장되게 하신다.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은 기독론적으로 낙관적(optimistic)이지만,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승리 사건을 계속적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역할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부정적이다. 바르트 신학의 약점은 기독론적으로 낙관적이지만, 성령론적으로 염세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바르트가 성령이 이 세상 속에 내재하심으로 인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류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초월성을 강조했다.
3) 교회론적인 관점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리얼리티(실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사단의 세력이 분쇄되는 곳이다. 교회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모든 문화의 영역 속에 누룩처럼 확산된다. 그래서 귀신들림 현상, 마귀의 역사는 이런 기독론적 관점, 성령론적 관점, 교회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 전후의 상황이 다르다. 세상 여러 문화 속에 하나님 나라가 편만하게 확장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귀신의 역사는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학자는 미국 역사 속에서 귀신들림 현상이 적게 나타나는 현상은 기독교가 미국 사회 체제에 중심이 되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 최근 컬트 문화와 종교다원주의가 퍼지면서 귀신들림 사건이 더 많이 보고되고 있다. 귀신들림은 교회의 상황과 요인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지금도 복음이 안들어간 곳,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곳에 귀신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고 귀신들림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난다. 선교 상황에서 축귀의 역사가 자주일어나게 된다. 처음으로 그곳에 복음이 소개되면서 하나님 나라가 그 곳에 침투하는 싸인이다. 초대교회의 상황에서도 이러한 축사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선교지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은 한국의 초대교회 상황과는 다르다. 지금 그렇게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어떤 선교 지역에서는 귀신들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축귀의 역사가 필요하다. 심각한 죄악의 루트를 통해서 귀신이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런 역사는 아직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2. 귀신들림과 정신병
정신병을 귀신들림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중세에는 악마가 들어갔다고 해서 머리에 말뚝을 박아서 죽였다. -_-;; 정신병과 귀신들림을 잘 구별해야 한다.
1) 구별성과 관련성
두 극단적인 견해:
?자연주의적 환원주의 - 귀신들림도 정신 장애의 한 가지이다. 정신의학이 발달하기 전에 원시적으로 생각하여서 정신병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귀신들린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증상에 대한 다른 설명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
?신령주의적 환원주의 - 정신병은 다 귀신의 영향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우리는 이 두 입장에 대하여 균형잡힌 입장을 정립해야 한다. 서로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현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구별되지만 간혹 정신장애와 귀신의 영향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그래서 정신병과 귀신들림은 별도로 독립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두 질환은 독립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함께 일어날 수도 있다. 두 질환은 상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정신병과 귀신들림을 구별하는 특징이 여러 가지 있지만, 기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2) 구별되는 특징
① 귀신들림과 정신병은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괴상하게 행동, 초자연적 행동, 환상과 환청, 벗은 몸으로 돌아다님.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이러한 이상한 행동 외에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다 안다거나, 목소리와 행동이 완전히 독특하게 변화된다. 목이 180도 돌아가거나, 혀가 길어지거나, 방의 온도가 확 떨어진다. 신앙적인 것에 대한 강한 적대반응.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개인적인 악과 신앙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우상숭배를 루트로 해서 그 사람에게 귀신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신병은 개인의 죄악과 신앙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직 제한적인 역할만 한다.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축사가 가능하다. 즉각적으로 축사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정신병은 축사를 통해서 해결되지 않고 더 악화될 수 있다.
②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자신의 인격 외에 다른 인격이 그 안에 내재한다. 다른 인격이 그 안에서 본 인격을 콘트롤한다. 정신 질환 중에서도 다중 인격장애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본래 한 인격인데 여러 다른 인격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인격장애는 부차 인격이 철저하게 악하거나 지속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다중인격장애가 극심한 경우에는 부수 인격들이 본래 인격과 완전히 문화적, 교육적 차원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철저하게 파괴적이거나 악하지 않다.
하지만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본 인격 외에 부수적인 인격들이 본인을 파괴하게 하고, 더할 나위 없이 악하다.
편의상 구별될 수 있지만, 대중인격장애와 귀신들림이 같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다중인격장애는 귀신이 들어가기에 쉬운 상황을 제공한다. 그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본래 인격을 파괴하여서 정상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사례를 상황과 증상에 따라서 면밀하게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다. 축사사역도 개인적으로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안되고, 전문적인 팀사역을 개발해야 한다. 로마 교황청 아래에는 전문적인 축사 사역팀이 존재한다.
스콧 팩 : 축사 사역에 대한 전문적 연구. 정신질환이 양호한 여자에게 귀신이 더 심하게 들려 있었다.
3) 귀신들림을 판별하는 방안
① 증상을 분석
대인관계 어려움, 끔찍한 어두움과 억눌림 경험.
② 과거 삶을 점검
오랜 습관화된 범죄, 포르노, 마약, 시기, 증오, 원한, 교만, 정죄 등을 통해서 어떤 사람의 삶 속에 잠입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통해 정서적인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사단이 그런 것을 통해서 많이 역사한다. 사단은 잔인하고 악독한 자이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③ 영적인 분별
이것이 정신적인 것인지, 악의 영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인지 이것을 판별하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영적 직관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 모든 증상들을 점검하고 과거의 삶을 다 살펴보고 분석함과 동시에 총체적으로 종합하고 판단하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마이클 그린은 귀신들린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가는 순간 그 사람 속의 사악함을 느끼는 분별력이 있다고 한다. 축사사역 전문가는 사단의 실제적인 임재를 느끼는 싸인을 하나님께서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3. 그리스도인과 귀신들림
1) ‘그리스도인도 귀신 들릴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
그리스도인들에게 악령이 내재할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메릴 엉거와 에드 머피의 견해가 그러했다. 그들은 엄청난 반발과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입장을 재점검하였다. 그래서 엉거는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릴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에드 머피는 “그리스도인들도 귀신들릴 수 있다”라고 견해를 수정하였다.
프레드 딕카슨, 찰스 크래프트, 닐 앤더슨
돈 바샴은 ??Can a Christian Have a Demon???이라는 책에서 상당한 그리스도인들이 귀신의 괴롭힘을 받고 있고, 성령의 획기적인 체험을 경험한 사람이 절반 이상이었다고 주장한다.
2) 용어상의 문제
① daimonizomai : demonized - 귀신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꼭 귀신에 의해서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귀신의 영향을 받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emon-possessed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도 귀신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
② ‘귀신들림’이라는 표현의 문제점 : 그 표현으로 인해서 엄청난 마음의 수치에 사로잡힐 수 있다. HELPLESSNESS에 빠지게 할 수 있다. 투사심리(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귀신의 탓으로 돌려버림) 속에 빠질 수가 있다. 유아기적인 사고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책임의식을 져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귀신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은 우리의 인격의 내부의 중심에 들어와 내재할 수 없다. 우리 안에 귀신이 만약 들어온다면 내면의 중심이 아니라, 내면의 외부에 변두리에 침입한 것이다. 공비가 서울 한복판 보다는 국토의 귀퉁이 산속에 잠입하는 것처럼. 완전히 마귀에서 사로잡혀서 지배당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죄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죄를 루트로 해서 마귀의 세력이 우리의 삶에 잠입, 침투할 수 있다. 그래서 심각한 경우에는 우리 몸의 표피적으로 잠입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마귀를 꾸짖고 대적하고 나오라고 하는 기도가 필요할 경우도 있다.그러나 마귀가 그의 인격에 중심부에 내주하고 있고, 그의 인격을 주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몸의 한 부분을 사로잡고 있는데, 그렇게 잠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의 전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오랫동안 습관화된 죄악을 범하는 사람에게 마귀의 세력이 신체의 일부분에 있다가 나올 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귀신들림보다는 귀신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③ 편의상의 분류
Demon Possession
Demonic Oppression, Affliction.
복음적인 교회의 85%가 귀신의 어떠한 괴롭힘의 경험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마음과 생각 속에 죄의 결박에서 자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음란, 시기, 교만, 자기자랑, 원한 등이 마음 속에 붙어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 작은 마음과 생각의 결과로 영적으로 무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자유하지 못함은 아주 작은 결박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5%는 심각한 억압 가운데 있다. 정서적 불안, 인격적인 심각한 장애 등. 정신 장애보다 인격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귀신의 괴롭힘을 더 많이 당한다. 귀신의 은밀한 영향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근심시키니까 사단의 압제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그만큼 악령의 은밀한 영향을 받게 된다.
3) 귀신에 괴롭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
닐 앤더슨. 탈봇 신학교 교수.
4. 영적 전쟁
1) 귀신들림에 대처하는 방법.
귀신축출은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주어졌다. 귀신들림의 현상을 해결하려고 할 때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 모두 칭의의 은혜에 의존하고, 근본적인 성화에 의존하여 죄에서 자유한 가운데 성령충만한 가운데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성령으로 살아가지 아니하면 이 권세가 유보된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 면허 정지된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어프로치하기 보다는 팀사역을 해야 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귀신이 접촉할 수 있는 영적인 문제와 내적인 문제를 치유하고 해결해야 한다. 어둡고 쓰레기가 있는 곳에 쥐와 병균이 들끓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 있어서도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깨끗해야 귀신이 범접할 수 없다.
<개역한글판> (행 16: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 16:18) ??She kept this up for many days. Finally Paul became so troubled that he turned around and said to the spirit, "In the name of Jesus Christ I command you to come out of her!" At that moment the spirit left her.??
축귀명령!!
"In the name of Jesus Christ I command you, evil spirits to depart(leave)!"
2) 사탄의 공격전략
① 자기를 철저하게 은폐한다. Incognito. dispendable = 소모품. 마귀의 일처럼 확연히 드러나는 일은 실력없는 귀신을 시켜서 그 귀신을 소모시켜버린다. 아주 실력있는 귀신은 그것이 마귀의 역사인지 영향인지 잘 알지 못하는 일에 투입한다.
②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전략을 교묘하게 바꾼다. 초대교회 극한의 핍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교회가 공인되었을 때, 마귀는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 안에 부패성을 통해서 더 은밀하고, 효과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였다. 어거스틴이 그 시대를 사는 종교지도자로서 고백론에서 말하기를 내적인 부패성과의 치열한 싸움, 그 싸움을 역사의 지평으로 확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싸움으로 설명하였다.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던 마귀는 이제 우리들의 명성과 세속주의와 성공주의 우상으로 변신하여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③ 마귀는 아주 조직적으로 역사한다. 전략적으로 치밀하게 우리를 공격한다. 마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철저하게 가르친다.(^^) 특별히 인간론을 제일 열심히 가르친다. 인간의 부패성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유혹 앞에 약한지를 철저하게 가르친다. 쓰러뜨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성령론도 철저하게 연구해서 어떻게 하면 성령의 사역을 방해할지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방해한다. 성령의 역사의 모조품을 만들어서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혼돈하게 만든다.
④ 마귀는 우리의 심령 속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제도를 통해서, 구조적인 악을 만듦을 통해서 더 전략적으로 개인들을 억압한다. 교육제도.
⑤ 대상에 따라서 다르게 역사한다. 자신에게 큰 위험이 되는 존재. 동시에 기도의 후원을 많이 받지 못하는 부분을 집중 공격한다. 복음 사역자가 그의 타겟의 1호이다. 지옥의 세력을 총동원해서 완전히 우리를 토벌하려고 한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는 찾는다. 성령충만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를 한다.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게 한다.
⑥ 적절한 때를 포착해서 우리를 공격한다. 은혜 받았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 빌리 그래함도 말하기를 복음을 잘 전하고 난 다음에 엄청난 사단의 공격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영적으로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메말랐을 때에도 강한 혹을 안겨준다. 성적인 유혹, 광야의 기간 동안 가장 극복하기 싫은 것이 성적인 유혹이다. 짙은 성적인 유혹을 주어서 완전히 쓰러뜨려 버린다. 설교를 한 다음에 사단의 공격을 받기 쉽다. 삼손이 하나님의 일을 한 다음에 허탈감을 느끼고 갈증을 느꼈던 것처럼, 설교를 끝내고, 주일 사역을 끝내고 나서 사단의 공격을 받기 쉽다. 중요한 일을 하기 직전에 방해를 한다. 아주 작은 일을 통해서 역사한다. 조심해야 한다. 사단은 시도 때도 없이 역사하는 존재이다.
2) 교회론적 관점
영적인 무장
무서운 대적을 대처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사단에 대한 승리를 확신해야 한다.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간혹 사단의 역사를 허락하신다. 성령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빈틈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빈틈을 내보이면 독침에 쏘일 수 있다. 이 어두운 시대가 어쩌면 희망과 갈망의 시대이다. 부흥의 여명이 밝아오는 시대일 수 있다. 어두운 시대를 통해서 영적 거인들이 나타난다. 어두운 시대에 부름받았다고 낙심하지 말고 이 시대에 오히려 놀라운 역할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라. 내 안의 결박, 죄악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하고 이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개혁자가 되자.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는 죄악을 회개하며 기도하라. 부분적인 결박이 없는가? 음란물에 매여 있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 부정적인 사고를 계속 하는 사람 기도하라. 죄의 습관을 끊어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서 모든 죄의 문제가 법적으로 해결받았음을 믿으라. 그리고 신체적으로 자유함을 경험하라.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