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믿음으로 행동하는 신앙인(막5:25-34)

하나님아들 2012. 8. 11. 21:57

             믿음으로 행동하는 신앙인(막5:25-34)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지식적인 믿음을 말씀하지 아니하고 야고보 선생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고 말씀하신 것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 즉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믿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여야 할 성도가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즈가 멕시코를 정복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자신의 군대가 너무 적고, 모든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멕시코 인들은 수효가 많았으며 이 전투는 무모한 것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병사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코르테즈는 두세 명의 병사를 뽑아서 같이 바닷가로 내려가서는 자기들이 타고 온 배들을 모두 부숴 버렸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자 이제 우리는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해야 한다. 우리는 되돌아 갈 수 없다.”

  치유함을 받느냐, 아니면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서 사느냐, 죽음이냐 삶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용서냐 정죄냐 하는 문제가 닥쳤을 때 우리는 정복에 나셨던 스페인 병사처럼, 또는 12년 동안이나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처럼 단호하고 용감하게 믿음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마가복음 5장은 3가지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절로부터 20절까지는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무덤가에 살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는 25절부터 34절까지는 12년 동안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낳을 것이라고 많은 군중을 헤치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가서 옷자락을 만지므로 낳은 여인. 세 번째는 21절부터 24절, 35절로부터 46절까지는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되는 딸을 죽음에서 살려주신 사건입니다. 이 세 가지의 사건을 보면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에서는 가버나움에 12년 동안 혈루 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는 치유의 역사가 기록되어져 있다. 혈루 증은 여러 가지의 원인으로 해서 계속하여 하혈을 하는 만성병을 가르친다. 율법에서는 이 병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적인 모임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기의 병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무리에 섞여 예수의 뒤로 와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절망적인 영적 상태에 빠져 있는 많은 영혼들과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망을 안겨주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나는 불치의 병 혈루 증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회복되기보다는 점점 더 꼬여 가며 어려워지는 일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도 길은 없어 절망하는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우리도 그 기적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절망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은 여인.

  이 여인은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병자입니다. 12년간 지루하게 혈루 증을 앓고 있었으므로 몹시 쇠약해졌고 고통도 매우 심했다. 이 여인은 이 기간 동안 온갖 치료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고 많은 약도 먹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중대한 실험과 수술도 받아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치료를 해보려고 많은 돈을 써보았습니다.  그래서 26절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던 차에 라고 그 여인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 여인은 가난하고 비참하고 병들고 약해져 있었다. 아무도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그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이 여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으로는 쇠잔해졌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생활적으로도 절망입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이 여인을 부정한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고, 아무 곳에나 앉거나 잠잘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지거나 앉거나 눕거나한 모든 것은 부정해지므로 깨끗이 세탁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아 이 여인을 12년 동안 피를 쏟았으므로 그 육체가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삶의 용기와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상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버림받아야 했고, 병이라는 핑계로 의원들에게 괴로움을 많이 받았고, 병 때문에 가지고 있던 물질마저 다 허비해 버린 가련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위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잃어버린 채 절망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절망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요? 고난의 대표적인 인물인 욥은 사탄의 역사로 한순간에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친구들도 와서 욥의 처지를 보고 일제히 소리를 질러 울며 각자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동안 앉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욥은 자기의 절망적인 모습을 탄식하였습니다.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를 빨게 하였던가(욥3:3, 10-11)라고 절망했었습니다.

  정말 이 절망의 상황에서 그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는 어디서 병을 고칠 수 있을까? 그녀는 누구에게 가야만 하는가? 아직도 그녀에게 치료의 방법은 있는가? 아직도 사용해 볼 만한 치료 방법이 그녀에게 남아 있을까요? 육신적으로 보면 전혀 소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이 다 주워졌다고 해도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1800년대에 미국에 벳시 패터슨이라는 여자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받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의 미모와 매력은 익히 구라파의 상류사회에게까지도 당시에 잘 알려져 있었다.

180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이 미국을 방문하여 여행하는 중에 벳시 패터슨을 만나보고서는 그만 홀딱 반해 버렸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드디어 결혼을 했다. 미국에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소유했고, 프랑스 나폴레옹 동생의 부인이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요? 천하에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을 까요?

  그러나 그의 미모와 천하의 명성과 재물이 그에게 참 행복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벳시 패터슨이 중년이 되었을 때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잘 기록되었있었다고 한다.

  “나는 무료함과 지루함으로 죽을 지경이다. 책을 읽는 일도 이제 싫증이 났고, 시간 보내는 일이 지겹다. 운동을 하자니 그것을 할 만큼 젊지는 않고, 아무 재미가 없어서 모든 것이 다 시시하다. 공주는 내가 아름답다고 칭찬을 하며 의상 만드는 일에 내가 취미를 붙이도록 해주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것에도 나는 흥미가 없다. 내가 과거에 살아온 것을 돌아보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건 간에, 모든 것이 그저 지루하기만 합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인생에 진정한 소망이 없는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된다. 질명으로 인하여 살 소망이 없는 여인이나, 모든 것을 가지고도 삶의 의미의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동일하게 절망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소망이 있을 때에 어떤 고통과 슬픔도 참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어버리면 죽음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인간의 의지를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유한하고 절망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모든 축복과 환경을 사탄에게 빼앗겨 버린 인간은 죄의 고통으로 절망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에 때로 우리에게 이 절망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찾은 여인.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상태에서 이 여인은 어느 날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즉 구원의 복된 종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려 오셨으며, 병든 자를 위한 대 의사로 오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었던 어떤 소문보다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불치의 병도,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헛된 소문에 괴롭힘만 당했던 여인에게는 온전히 보상받고도 남을 놀랍고도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 소식에 소망을 걸었습니다. 이 여인은 소문의 확실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은 자기의 병도 고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에게 나설 수 없는 질병을 가진 사람이기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 고쳐달라고 할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왔던 백부장은 자기에 집으로 가시겠다는 예수님에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라고 고백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가져야 합니다.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으로 믿고 온전한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럴듯한 온갖 세상의 소리는 우리에게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몰아가는 유혹일 뿐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을 걸고 예수님께로 나가는 믿음을 행동하는 믿음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내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절망이 나를 둘러쌓아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아버지 품에서 부족하고 모자람을 모르고 살던 탕자는 세상을 만만히 보고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다가 재산은 다 허비했고, 그 나라도 흉년이 들어 꼼짝없이 거지가 되어 남의 집에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상황이 절망적이었을 때야 비로써 아버지의 집이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망은 정말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혈루 증을 앓고 이 있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만이 소망이라는 것을 찾았다면 우리의 소망도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3. 믿음을 행함으로 옮긴 여인

  예수님이 자신의 난치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많은 장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병은 매우 중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리는 병이기에 빈혈이 있어서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과 접촉하면 접촉한 사람들이 부정해 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병이 중하고 빈혈로 어지러운 여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예수님의 뒤까지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 병 고침을 받고자 할 때는 반드시 예수님과 실질적인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이 연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옷자락을 스치거나 몸과 부딪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이 여인뿐입니다. 그 많은 무리들 중에는 질병에서 고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영적 축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많은 문제를 해결함을 받아야 할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이 여인만 병에서 고침 받고, 문제를 해결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원인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의 주님이심을 믿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믿고 만지는 영적인 특별한 접촉을 가질 때 일어나는 이적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니까 따라가는 사람들, 예수님을 무엇을 보여 주시려나 하고 호기심에 따르는 사람들, 저들은 기적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기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과 또 다른 다양한 이유로 따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다양한 동기로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큰 무리가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른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올바른 동기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바른 동기로 예수님께 접근했고 이로 인하여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 병 고침을 위해서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자기를 치료할 치료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스치는 스침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 옷을 만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연한 스침이지만, 여인에게는 의도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중들이 미는 압력 때문에 저들의 몸이 닿는 것이지만, 여인은 목적을 가지고 일부로 옷자락을 만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나 기대하지 않고 그를 만진 것이나 이 여인은 자기 병을 치료될 것을 확신하는 만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호기심이나 우연히 만진 것이지만 이 여인은 일정한 목적과 소망을 갖고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할 때 참다운 연합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놀라운 발명품 가운데 전선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무선으로 더 많은 것을 합니다만. 전선은 대륙과 대륙을 이어주었습니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지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를 연결 시켰습니다. 온 세계를 하나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연결이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예수님과 얼마나 연결되었습니까?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과 영적으로 접촉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것 같고, 십자가와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 영적인 삶과 그 능력 안에서 살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의 입구까지 와서 아그립바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

  저들은 하늘나라 입구까지는 갔으나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면서도 자기의 주님으로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전기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전선에 연결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과 연합되지 아니하면 그의 생명과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중들이 만졌던 만짐과 이 여인과의 만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의 수단입니다. 이 수단은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요 영적인 연합인 것입니다. 단순한 종교적 의식과 단순한 신앙고백과 생명 없는 기도로 만나는 만남이 아닙니다. 이런 만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믿음에 의한 만남이 될 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여인의 만남이 이런 만남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에 이 여인은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소망을 위해서는 사력을 다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힘들다고 누워만 있었다면, 소식은 들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적극적인 자세야말로 안일만을 추구하는 오늘 날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믿음은 우리에게도 기적을 불러오는 지름길입니다.

  기도드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섬기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헌신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식탁에 가득해도 그것을 먹어야만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당신의 눈앞에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마시기 전에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제 이 여인이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에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행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 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 7-8) 는 말씀과 같이 찾고, 열리고, 얻는 축복 받은 여인이 된 것입니다.

 

     4. 믿고 행함으로 구원받은 여인.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은 줄을 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만 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가련한 여인은 믿음으로 그 신유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전선에 다른 전선이 붙이게 되는 그 전선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이 이 여인에게 들어갔고 그 능력은 이 여인의 혈루 병의 근원을 근본적으로 치유되었습니다.

  2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헨델은 버림을 받고 절망에 빠져 힘없는 몸과 마음으로 안개 짙은 런던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한 때 황제들과 황후들의 찬사를 받던 어제의 추억만이 그에게 남아 있고, 모든 창의력은 다 말라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무거운 마음과 힘겨운 인생의 짐만이 그에게 가득 안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 아침에 헨델은 방향 없이 거리를 거닐다가 초라한 그의 방에 들어왔을 때 그의 책상에는 소포 보따리가 한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풀어 보니 제넨스가 쓴 음악의 가사가 들어있었습니다. 헨델은 그것을 힘없는 손으로 펴서 한 장 한 장 보기를 시작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3)

성경 말씀으로 이어지는 그 가사를 읽는 순간, 그 지치고 좌절했던 헨델의 마음속에는 신령한 영감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헨델은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 잡혀서 역사상 위대한 메시야 대곡을 작곡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주일 동안 거룩하게 취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의 먹지도 않고, 자기도 않고 작곡해 나간 것이 바로, 오늘날도 전 인류에게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오라토리오(성담곡) 메시야 곡인 것입니다. 아무리 혹독한 삶이라도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나면 새 힘을 얻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진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 돌이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을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숨김없이 다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열 두 해 동안을 혈루 증으로 앓다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 여인은 일생 동안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며 봉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외경 니고데모 복음서란 책에는 이 여인의 기록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도중에 손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의 땀을 닦아 드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듣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당시의 혈루 증 환자는 무리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일방적 상식에 억매이지 않고, 자신이 약함으로 저 많은 무리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다는 생각도 과감히 버리고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김으로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지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실상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있습니까? 주저앉아 있지 마세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 앞으로만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출처 : 은혜 위에 은혜
글쓴이 : 성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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