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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희가 삼가 지키니"-문동학 목사의 강해 설교 4장

하나님아들 2013. 9. 27. 19:44


"너희가 삼가 지키니"

 

문동학 목사님의 갈라디아서4장  강해설교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절-11절

 


전라북도 고창군에 감천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위해 멀리 물을 길러 다니는 효자를 보고 하늘이 감동하여 벼락을 쳐서 우물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그들의 후손들이 아직 그곳에 산다고 합니다. 동복오씨 감천공파라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사람이 정성을 지극히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지성감천에 관계된 설화와 속담과 명언과 성구들이 참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는 속담도 이들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렇게 배웠습니다.

교회에 갈 때에 ‘정성’을 다하라!

예배를 드릴 때 '정성‘을 다하라!

헌금을 낼 때에 ‘정성’을 다하라! 그래서 저는 새 돈으로 헌금하려고 노렸했습니다. 새 돈이 없으면 구겨진 지폐를 다리미로 다려서 헌금하기도 했지요.

기도를 할 때 ‘정성’을 다하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나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한 동안, 이런 가르침 즉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신다는 가르침과 이야기를 듣고, 제 자신이 ‘감동’을 아주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 안에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과 무속신앙 shamanism 이 배어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는 ‘율법적 신앙’과 ‘복음적 신앙’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 feedback 이 아주 다양합니다. 많은 분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하지만 어떤 분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렵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또는 “아주 위험한 입장이다.” “수정주의, 또는 자유주의 신학이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의 인간적인 사상과 신학을 강의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갈라디아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에게는 이 것이 적절하지 않은 메시지이다 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 처음 나왔거나, 그리스도와 사랑하는 관계를 처음 맺는 분들도, 처음부터 복음의 진리 가운데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는 죄의 종, 율법의 종, 종교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유하게 하신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 다시 종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4장 1절부터 11절까지 읽으면서 율법주의의 또 다른 측면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은 10절과 11절 말씀,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있게 살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한 때 종노릇하였다(1절-3절)


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절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바울은 유대 사회와 로마 사회의 관습을 예로 들면서 율법적 삶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로마 사회에서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아들이 법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가 어렸을 때에는 그 집의 종들과 함께 지냅니다.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다른 종들이 그 아들을 돌보게 됩니다. 지난 설교에서 저는 초등교사 또는 몽학선생이라 번역된 파이다고고스 paidagogos 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이는 주인의 아들을 돌보며 가르치는 노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후견인과 청지기가 나오는데 이들도 그 집의 노예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년례(成年禮)가 발달했습니다. 어린이가 성년이 되면 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는 관례(冠禮) 의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어른이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첫째 관문인 ‘관’이 바로 이 성년례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관례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는, 즉 어린 아이 시절에는 주인과 종, 양반과 상민이 어느 정도 서로 편하게 말을 하면서 함께 놀았다 합니다. 바울 시대의 로마에서도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주인의 아들과 노예의 아들이 함께 놀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관습을 예로 들면서, “우리도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 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초등학문’은 헬라어 스토이케이온 stoixeion의 복수인 스토이케이아 stoxeia 를 번역한 것입니다. 고대 헬라 철학에서 우주의 기본 원소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가 땅, 공기, 불, 물 - 이 네 기본 원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우주의 기본 원소들이 우주의 cosmos 의 스토이케이아 stoixeia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학과 종교의 기본 원리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초보적이거나 기초적인 것, 또는 초등학교 수준의 유치한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철학과 종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지요. 헬라 철학에는 종교가 구별되지 않았죠. 그러니, ‘이 세상의 초등학문’은 사실 ‘이 세상의 고차원적인 학문’ 또는 ‘수준 높은 철학’ 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의 사고와 감정, 등 모든 것을 지배했던 철학과 종교가 초급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8에서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진리를 알기 전, 우리가 오직 은혜로 아무 값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기 전, 이 진리를 깨닫기 전, 즉 율법의 인도를 받고 살던 시절은 이 세상의 종교와 철학에 종 노릇한 것이었습니다. 그 종교와 철학은 초등학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이 초등학문에 종노릇하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 4절-7절은 아들과 딸로 사는 삶을 설명합니다.


이제 아들과 딸로 산다(4절-7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4절,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음으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결코 성차별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꼭 여성의 몸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통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아들과 딸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곧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시 종으로 돌아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종 노릇 하려 하느냐?(8절-11절)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원래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인줄 알고 섬기고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십니다.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하려 하느냐? 이것이 바울의 탄식과 꾸중입니다. 헬라의 철학과 종교, 그리고 유대의 율법적 신앙과 삶으로부터 자유해졌는데, 다시 그 철학과 종교, 그 율법 아래 들어가서 그것을 지키며 그들에게 종처럼 살려고 하느냐? 바울의 책망입니다.



10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들은 날을 지켰습니다. 즉, 안식일뿐 아니라 한 달 중 첫날과 마지막 날에 관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또 달에 관한 율법을 지켰습니다. 절기와 해에 관한 율법,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율법을 지키되 보통 지킨 것이 아니고, 삼가 지켰습니다. 정성껏 지켰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는 할례에 관한 율법이 잇슈이었지만, 4장에는 날과 달과 절기에 해에 관한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율법이 포함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2장에서 할례를 예를 들어 말했을 뿐이지, 할례 하나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닙니다. 또 4장에서 이런 예를 든 것으로 보아, 우리는 바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율법들 가운데 몇 개의 중요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이 정성껏 지키려고 하는 ‘모든’ 율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질문해야 합니다. 그들이 율법을 왜 그렇게 철저히 지켰을까요? 율법을 지키는 목적과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종교철학적 질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들었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율법을 정성껏 지키게 된 의도와 동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동기와 의도가 의식적일 수도 무의식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 무엇인가 불행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삼가 지키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정성이 지극해야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정성이 모자라면 하나님이 분노하신다는 일반적 종교신앙입니다. 바로 이 삼가 지키는 행위가 바로 율법행위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불행과 화를 피하자는 것입니다. 이 삼가 지키는 행위가 바로 ‘자기 의’ self-righteousness입니다. 삼가 지킴으로써 무엇인가 얻었다면, 이것은 바로 삼가 지킨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며 스스로 높이는 행위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도 삼가 지키는 것이 참 많습니다. 성수(聖守), 즉 ‘거룩하게 지킨다’ 는 것도, ‘정성을 다하여 지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지킨다,’ ‘깨끗하게 지킨다,’ ‘지극한 정성을 다한다’ 는 개념과 용어는 무속신앙 Shamanism 에서 가장 강하게 가장 자주 나타납니다. 무속신앙은 러시아와 아시아에서 가장 폭 넓게 자리 잡고 있는 종교형태입니다. 우리에게는 무당과 관련된 신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간에 퍼져있는 신앙은 토속적 신앙과 함께 유교와 불교 등 전통적 종교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현상학적으로 보면 유교 불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민간 신앙에  이 무속신앙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의식 가운데 무속신앙적 요소가 본인도 모르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 예 중에 하나가 ‘삼가 지킨다’는 개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정성껏 지키라’는 교훈과 명령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한국 교회가 ‘삼가 지키는 것들’ 가운데서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첫째, 한국교회는 주일 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자, 예배하자” 고 표현하지 않고 ‘주일을 지키자’고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십계명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는 한국민족의 심성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는 무속신앙입니다.


둘째, 새벽기도를 ‘정성스럽게 지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새벽기도’를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한국교회는 새벽기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는데, 이것은 특별한 집착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집착은 우상적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 새벽기도의 기원은 불교의 새벽예불이었고, 또 무속신앙에서 새벽에 정한수(정화수 井華水) 떠놓고 비는 새벽정성이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교회 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한국 교회에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무속신앙입니다.


셋째, 십일조를 ‘철저하게 지킨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헌금과 제사에 관한 법과 제도가 아주 많은데, 특별히 십일조만 이렇게 강조하면서 철저히 지켜야 복을 받는다 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 개는 한국교회에 자리 잡고 있는 무속신앙적 요소의 예를 몇 개 든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여러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유독 한국교회가 ‘삼가 지킨다’ 또는 ‘철저히 지킨다’ 또는 ‘정성껏 지킨다’는 개념과 용어가 많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종교현상학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수(聖守)하는 몇 가지를 반대하면 이단이라 말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현실을 우리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무속적 신앙과 율법적 신앙의 관점에서 진지하며 심각하게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사도 바울의 염려를 다시 들어야 합니다.


10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한국 민족의 ‘초등학문’이 무엇입니까? 즉 우리 민족의 옛 종교의 옛 철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금기신앙 Tabooism 과 무속신앙 Shamanism 과 귀신신앙 Animism 의 혼합체입니다. 금기신앙은 어떤 금기사항을 지키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신앙입니다. 무속신앙은 무당이 복과 재앙을 통제한다는 신앙입니다. 무당이 복을 내리게 할수도 있고 화를 내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무당이 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귀신신앙은 귀신적 존재들 또는 영적 존재들 anima 이 우리 가운데 복과 재앙을 관리하며 제어한다는 신앙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이용하는 시스템입니다. 기복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을 빌고 화를 면하겠다는 신앙입니다. 율법적 신앙은 바로 이런 종교적 현상입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런 초등학문에 종이었습니다. 약하고 천박한 종교에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유케 해 주셨는데, 우리가 다시 그 약하고 천박한 종교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8절-9절)


아들과 딸이 되었는데 왜? 다시 종이 되려고 하느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왜? 다시 종이 되려고 하느냐?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하려 하느냐?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성숙하고 책임 있게 살아갑시다. 자유인은 화를 면하고 복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지키지 않습니다. 자유인은 화를 면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달리 표현하면 처벌을 피하고 상급을 받기 위하여 무엇을 지키지 않습니다. 자유인은 자유의 응답으로서, 자유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서, 자유에 대한 책임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첫째, 주일은 ‘삼가 지키는’ 율법행위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지키려는 주일은 안식이 아닙니다. 또 다른 부담입니다.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주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벌을 받기 때문에 주일을 지킨다면, 그것이 어찌 안식이 됩니까?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 서로 격려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을 기뻐하면서, 앞으로 종말적으로 궁극적으로 맛 볼 구원을 미리 맛보면서 기뻐하는 날입니다. 기쁘게 예배합시다. 이것이 자유인의 주일입니다.


둘째, 새벽기도도 정성껏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편하고 기쁜 것처럼 기도는 즐거운 일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과 새벽에 한 시간 동안 만나서 대화하면 서로 사랑이 지속되고, 만약 새벽에 한 시간 동안 대화하는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면 사랑이 깨진다고 생각하면서 대화한다면, 그것이 기쁘겠습니까? 부부의 대화를 강조한 나머지, 부부가 하루에 한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면 돈을 주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면 돈을 빼앗는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그 대화가 사랑의 대화이겠으며, 어찌 그 대화가 기쁜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만나고 싶고, 만나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대화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며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복받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대화가 좋기 때문에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새벽이 좋은 새벽형 사람은 새벽에 특별히 기도하고, 밤이 좋은 야간형 사람은 밤에 기도하시고, 낮이 좋은 주간형 사람은 낮에 기도하십시오. 만약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보다 더 거룩하다면, 그 시간을 우상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다 거룩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낮에도 기도하셨고, 저녁에도 기도하셨고, 밤에도 기도하셨고, 밤을 새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도.  새벽기도는 ‘지키는 행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절대화시키지 마십시오. 기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과나누는 친밀한 대화입니다. 그러니, 하루에 가장 편안한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과 단둘이 친밀하게 사귀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종이 아닌 아들과 딸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셋째, 십일조와 헌금도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말하거나 또 그런 이유로 하지 마십시다. 십일조와 헌금은 성도의 책임입니다. 헌금은 교회에 대한 책임이며, 십일조는 나보다 연약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책임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사로써 나의 수입 가운데 최소한 십분의 일은 나보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완전한 복이며, 완전한 선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십일조나 헌금을 내면서, 또는 그것을 지키면서 더 다른 복을 받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를 상대화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가 불완전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부족하니 다른 복을 더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율법적인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은혜와 완전한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 후 우리가 하는 십일조와 헌금과 다른 봉사는 우리가 이미 받은 복에 대한 응답이며, 감사이며, 기쁨입니다. 또, 우리가 내는 헌금과 십일조로 다른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구원을 받는 것을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입니까? 이것이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아들과 딸이 하는 십일조입니다.


복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건강하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고,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고 싶습니다. 더 편하게 살고 싶고 문화적인 삶을 살고 싶고 등등. 이러한 바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또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요구하는 것, 때로는 때 쓰는 것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조건부로 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겠으니 나에게 무엇을 주십시오!” 또는 “하나님, 내가 무엇을 했으니, 나에게 무엇을 주십시오!” - 이렇게 구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조건부의 기도는 이렇게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것을 행하고 지키면서 이것을 구했으나 하나님께서 주지 아니했으니, 앞으로는 내가 이것을 행하지 않고 지키지 않겠습니다.”고 말입니다. 사실, 조건부로 기도하다가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내가 주일 성수하면 나에게 복 주신다.” 또는 “내가 십일조를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많이 주신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하지도 마십시오.


만약 복을 받고 싶다면 그냥 복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병이 낫기를 원하시죠? 그냥 병을 낫게 해달라고 때를 쓰십시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조르십시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기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의 교인으로서, 이 사회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헌금을 책임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십분의 일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구조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나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기쁘게 내어 놓겠다고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성숙하게 사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고, 종교의 노예도 아닙니다.  기복적 신앙이나 무속적 신앙의 머슴이 아닙니다. 이제는 ‘무엇을 삼가 지키면 복 받고, 삼가 지키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내가 무엇을 지켜서 복을 받았다. 내가 무엇을 지키지 않아서 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도 말고 그런 말을 듣지도 마십시오. 당신이 어떤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행했거나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당신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많이 부어주실수록, 그에 대한 응답 즉 책임은 더 커집니다.

 

 

네 안에 그리스도가 이루어지기까지!

 

 

갈라디아서 4장 12절-20절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 몇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비밀을 기꺼이 그리고 철저히 지켜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결혼했다가 이혼했었습니다. 그 후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이혼한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여인을 사랑했고 그래서 자기의 첫 번째 결혼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한 두 달 동안 교제를 하다 보니 자기의 과거를 밝히는 것이 더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처음에 고백할껄” 하고 후회했지만, 그 둘의 사랑이 깊어갈수록,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 더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행복하게 보이는 결혼생활이었습니다. 결혼생활 중, 그는 혼신을 기울여 사업에 몰두했고, 교회 봉사도 헌신적으로 했습니다. 그는 남을 돕는 일에도 헌신적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잘 섬겼습니다. 그는 헌신적인 교회생활과 희생적인 봉사 그리고 완벽주의에 가까운 사업, 그러니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45세에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비밀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의 결혼생활이 망가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비밀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하여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헌신적인 교회봉사와 희생적인 구제활동 등으로, 자기의 죄값을 치루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현재의 자신의 결혼, 자신의 가정’을 지켜주시는 담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자기가 이제까지 헌신적으로 일했던 일들이 모두 허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의 비밀을 고백했더라면, 처음이든 나중이든 빠를수록 좋았지만, 아무 때라도 자기의 비밀을 아내에게 고백했더라면 그는 자신과 가족을 엄청난 비극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으로부터 풀려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생활 즉 주일성수, 헌금, 봉사를 참회하듯이 했고 또 용서받기 위하여 했고,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을 감추기 위하여 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허탈감과 자괴감으로 엄청나게 괴로워했습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의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붙잡혀있는 삶을 살고 갇혀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4장 11절부터 20절을 통해서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관하여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복음을 받아 들이고 보여 준 첫사랑, 그 첫사랑의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다음, 그 첫사랑이 어떻게 타락하여 자유가 율법으로 전락했는지 사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락한 그 사랑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1. 사랑의 시작 : 자유(自由) (12절-16절)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의 어조가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호소합니다. “내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져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우정을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졌기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이제 너희들도 다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라.”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아라!” “너희들은 나처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했다” 는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자유의 메시지를 처음 전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반대하거나 공격하지 아니하고 기쁘게 받아들였음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바울과 영적인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합니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은 소유, 복종, 탐욕, 또는 거짓과 쾌락입니다. 자유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의 시작, 그리고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가 간질, 또는 심한 안질, 또는 척추와  관련된 질병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가시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 고통의 강도가 심하고, 그 고통의 기간이 오래되었습니다. 율법적으로 판단한다면 육체의 질병은 영적인 문제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아니한 형벌 또는 징계로서 육체에 가시가 꽂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질병을 보고  바울의 믿음과 성품과 경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옳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대에 보편적인 세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환영했고, 그의 복음의 메시지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그들이 율법적 공식으로부터 자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할 만큼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은혜와 함께 시작합니다.


사랑을 해 보셨지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이고, 연약하게 보이는 그것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강하게 보입니다. 아름답고 강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사랑하기 때문에 강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섬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섬기기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은혜와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의 추함과 연약함으로부터 자유로와집니다. 열등감과 우월감도 사라집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아름답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즉 우리가 율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 서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자유해집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더 경건해지거나 더 도덕적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벌써 이미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더해질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사랑에 가끔 위기가 오듯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 사이에 위기가 유혹처럼 슬그머니 기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오해와 불화가 생겼습니다. 무엇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갈라 놓았을까요? 그들의 사랑이 타락했습니다. 그 사랑이 왜 타락했을까요?


2. 사랑의 타락 : 율법(律法)(17-18절)


17절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어떤 사람들이 들어 와서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랑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17절과 18절에 “열심을 내다”라는 동사가 세 번 나옵니다. 이 동사는 헬라어로 ‘젤레오’ zeleo 이고, 명사형은 ‘젤롯’ zelot'인데, 젤롯은 ‘열심을 내는 사람’, ‘열심당원’, 또는 그룹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 15절에 ‘셀롯이라는 시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을 낸다’는 동사는 열성적 유대주의자들, 또는 극단적 율법주의자들, 또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사용되는 전문용어, 또는 고유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당원’들이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들처럼 유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전통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의 율법과 전통을 지켜야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된다고 갈라디아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이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분열시키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고, 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거나 더나아가 그것을 독점하려고 하면서 서로 분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으나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은 타락입니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의 결국은 분열입니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의 결말은 사망입니다.


2000년 5월 21일 서울 한 쪽에서 세상이 경악한 부모 토막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부모 토막 살해 사건이었습니다. 범인의 이름은 이은석이고 당시 고려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비교적 중류에 속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이은석 군을 세 차례 만난 한 심리학자 교수가 그 충격적인 과정을 심리학적 조명과 함께 출판한 책이,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입니다. 아내와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속 읽어가면서 이 아이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어릴 때부터 청년까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기를 아주 꼼꼼하게 적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자기를 학대했던 내용을 조목조목 적은 놓은 항목들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어릴 때, 혼난 후 무릎 꿇고 회개 기도한 것.

2. 무릎 꿇고 잠언 등 성경 낭독한 것.


그의 부모는 아들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열심히! 도덕적으로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원리원칙주의자라서 인간관계가 미숙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자식을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친답시고 애정표현과 사람과의 친교를 게을리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은석 군을 철저하게 교육하면 할수록 은석 군은 성장하면서 마음 속에 증오를 키워왔습니다. 결국 이것은 율법, 율법적 교육, 율법적 신앙, 율법적 도덕이 사람을 파괴시킨 또 하나의 비극입니다.


물론 이 은석 군의 이야기는 아주 극단적입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들이 들려 주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놀랍니다.  한 마디로 부모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아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친구들이 자기 부모에 대하여 심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나중에 내가 크면 부모를 OOO 하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다만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을 내서 공부시키고, 열심을 내서 아이들을 성공시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의 열매는 분열과 이간과 증오와 사망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타락이고 사랑의 타락이고 자유의 죽음입니다.


스티픈 아터버언은 그의 책 “상처주는 신앙, 치유하는 신앙: 건강한 신앙과 영적 학대 사이에 그어지는 미세한 선”에서1)  해악한 신앙과 종교적 학대에 잘 빠지는 사람들의 특징 네 가지를 들었습니다. 즉 완고하고 엄격한 부모(Rigid Parents)와 실망적인 경험(Experience of Disappointment)과 낮은 자존감(Low Self-worth)과 학대의 희생자들(Victims of Abuse)입니다. 엄격하고 완고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 즉 율법적 사고와 율법적 신앙과 율법적 도덕을 가르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해악한 신앙과 종교적 학대와 파괴적인 성격에 빠지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이 자기들은 그 누구보다 더 뜨겁게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그렇게 엄격하게 교육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타락입니다. 부모는 사랑이라 생각하고 믿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율법은 사랑과 행복의 탈을 쓴 증오와 불행과 죽음입니다.  율법의 자유의 타락이고, 이것은 곧 사랑의 몰락이고, 이것은 곧 죽음입니다.


3. 사랑의 회복 : 성화(聖化)(19-20절)


그렇다면 이와 같이 타락한 자유와 타락한 사랑, 즉 율법의 저주로부터 어떻게 다시 해방될 수 있습니까?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부모의 심정으로, 어머니의 심장으로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입니다. 그는 분만의 고통을 다시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낳는 고통이며, 또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이 어머니의 심정으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소망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원한다는 마음을 여러 곳에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롬8:29)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우리가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목적과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기 위하여 우리는 최선을 다하며,  또 언젠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둘째, 바울은 그 희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말합니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통하여 타락한 자유가 회복될 수 있고 타락한 사랑이 회복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해산하는 고통은 은혜입니다. 아이가 태안에서 어머니에게 무엇인가 선행을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해산의 수고를 합니까? 그렇다면 어머니의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해산의 수고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해산의 수고라는 이 은혜와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율법과 형벌, 그리고 채찍과 매질로 애완동물을 길들이고 훈련시킬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적 방법으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자유의 사랑, 사랑의 자유로써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가 “멘토링으로 성장하는법: 변화하는시대에 적응하기” 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는 달라스 신학대학원의 저명한 교수이자 크리스천 리더십 센터의 회장입니다 . 그는 전 세계 60여 개국을 다니며 하는 강연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 이 시대 교회와 영적지도자들에게 탁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워드 박사는 이 책에서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님이 이혼하여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모 두 분 모두 그의 영적상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가 죽든 살든 지옥에 가든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열 살 정도일 때 어느 날,  구슬치기에 한창 열중하고 있을 때, 키가 190센티나 되는 거구인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사람이, “교회학교에 다니지 않을래?” 하고 물었을 때, 하워드는 학교라는 말이 기분 나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구슬치기 할래?” 하고 물었고, 하워드는, “물론이죠.” 하고 말했습니다. 게임의 결과는 그 사람이 모두 이긴 것이었습니다. 최고 구슬치기였던 소년 하워드는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자기와 게임을 한 것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하워드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월트이었고 근처에 있는 교회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월트는 하워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월트는 매번 하워드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교회학교 하이킹에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함께 온 숲을 뛰어다녔는데, 월트 선생은 자기 심장이 좋지 않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하워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첫번째 사람이었다.”


교회학교에서도 월트는 언제나 공과공부를 성실히 준비해왔습니다. 월트는 교회학교 교사로서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교사였습니다 . 그는 금속으로 틀을 짜는 ‘금형일’에 종사하였는데, 교회에서 가르칠 때에는, 창조적이면서 부지런하였고  언제나 아이들을 배움의 길로 이끌어내는 방법들을 궁리하였습니다. 하워드 박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월트는 나에게  있어서 성육하신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우리 동네의 다른 열세명의 아이들에게도 그러했다.  아이들 중 아홉은 나처럼 결손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열한 명은 나중에 목회자가 되었다. 월트 자신은 겨우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일에 쓰임받는 데엔 박사학위가 필요없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해산의 수고를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해산의 진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값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안에 그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서로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서로를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가족입니다.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4:21-5:1


1. 질문: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1절)

2. 성경: 두 아들(22-23절)

3. 해석 : 두 언약(24-27절)

4. 적용 : 약속의 자녀로 살라!(4:28-5:1)


율법과 복음의 논쟁은 갈라디아서 4장에 와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지만 논쟁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되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성경이야기를 통해서 밝히고,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명백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제 논쟁을 마칠 때가 왔습니다. 이야기 하나를 하면서 논쟁을 마칩니다. 이 방법은 당대의 탁월한 수사법이기도 하지요.


오늘 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율법주의자들에게 진지한 질문을 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어머니인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두 어머니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권면을 합니다.


먼저, 바울이 마지막으로 율법주의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1. 질문 :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1절)


2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이 질문의 대상은 “율법 아래에 있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즉 유대인과 유대적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의 종교와 신앙은 율법적입니다. 율법적이란 어떤 규칙과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체계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원칙과 규칙과 법칙을 지킴으로써 정통적인 신앙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예배 때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한 분이 저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와서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당회의 결정도 없었는데 예배 순서를 왜 바꾸었습니까?”

“예? 저는 예배 순서를 바꾸지 않았는데. 저는 단지 설교만 했지 않았습니까?”

“아니, 목사님, 찬송을 부르다가 4절은 일어나서 부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제가 그랬죠. 설교 후의 찬송은 결단을 위한 것이니 4절은 함께 일어나 찬송하자고 했지요.”

“목사님, 그것은 우리 교회의 예배 의식을 바꾼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미리 당회에 허락을 받으셨어야죠?”

“아, 그렇습니까? 다음부터는 미리 허락을 받겠습니다 ..... ”


제가 미국에서 어느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을 때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미국 장로교에 속해 있는 한인 교회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즐거운 대화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갑작스럽게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교회는 이단입니다.”

저는 당황한 어조로 질문했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인지요? 우리가 이단이라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 교회는 주일예배에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네요. 그러니 이단이지요.”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설명을 비교적 자세하게 했습니다. 요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신경을 믿는 것과 사도신경을 주일예배에 암송하는 것은 다릅니다. 저와 우리 교회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습니다. 하지만 주일예배에 꼭 사도신경을 외우지는 않습니다. 물론 가끔은 주일예배 때 외우기도 합니다. 미국 장로교에 소속된 교회에서 주일 예배 때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 교회가 더 많아요.” 제가 한 삼십 분 동안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했지만 그분은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 예배는 가짜요. 이단적 예배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법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 두 개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이렇게 법 아래에 살려는 신앙인들은 의외로 참 많습니다. 교회 구조, 강대상, 예배 의식, 찬양대와 음악, 교회 직분과 제도, 신앙생활과 교회생활 등에서도 법과 전통 및 법칙성을 강조하면서 그 아래에서 살려고 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든다면 강대상이 둘이어야 하는가? 하나로도 괜찮은가? 는 논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여성이 강대상에 올라올 수 있느냐? 없느냐? 논쟁하고 있고요. 여성 목사 안수는 해묵은 논쟁이고요. 찬송가 이외의 찬양을 주일예배 때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논쟁도 하지요. 축도를 “....있을지어다”가 옳으냐? “.... 하기를 축원합니다”가 옳으냐? 논쟁하고요. 미국에서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에 그 동네 시장이 참석했을 때, 담임목사가 시장에게 축도를 부탁했고, 그 시장은 눈을 뜨고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축도했습니다. 물론 그 시장은 안수받은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장애인의 날에는 장애인 중 한명이 휠체어를 타고 강대상에 올라와 축도했습니다. 물론 그도 안수받은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이단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런 법 또는 법칙성,  헌법과 정통성을 논하면서 목숨 걸고 투쟁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이렇게 교회법을 기준으로 경건과 정통의 모든 것을 가름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질문합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율법 아래에 살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율법을 바로 알라!” “너희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는 율법을 너희들이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찬송을 부르다가 4절은 일어나서 부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하고 싶다면 미리 당회에 허락을 받으셨어야죠?” 고 말한 사람이나,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 예배는 가짜요. 이단적 예배요! 이것이 예배의 법입니다.” 라고 말한 사람들이 예배나 사도신경에 대해서 철저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신학자들 또는 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입문적으로 배웠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강한 확신을 갖고 말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케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게 법칙과 전통을 법처럼 여기고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법을 철저하게 배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법과 전통에 대하여 더 철저하고 폭넓게 배웠다면 오히려 그 법과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 조금 배운 것에 평생 종속되는 것같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너희들이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질문한 것은 “너희들이 율법을 잘 알지 못하니, 내가 이제 율법의 참 의미를 알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해당하는 오경 가운데서 처음 책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2. 성경: 두 아들(22절-23절)


22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절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창 16:15, 21:2).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는 해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아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제안했습니다. 자기의 여종 하갈과 함께 아들을 낳아 후사로 삼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는 해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삭입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말하면서,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두 여자 자유있는 여자와 여종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의 해석을 들어 봅니다.


3. 해석 : 두 언약(24절-27절)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절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하고


바울은 두 어머니를 두 언약으로 비유하면서 해석합니다. 먼저 바울은 하갈을 시내 산 언약으로 비유합니다. 시내산은 율법과 모세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입장에서 충격적인 것은 이 시내 산으로부터 ‘종’이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그 시내 산이 아라비아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아라비아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있지 아니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다는 설명입니다.  요약하면 시내산과 율법과 모세와 예루살렘과 하갈과 종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 입장에서 왜 충격인 해석이 됩니까?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라를 통하여 태어난 이삭의 후손이며, 거룩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거룩한 율법을 받았고,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성에서 살고 있는 선택된 민족이라고 믿었기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시내 산이 이방 땅 아라비아에 위치해 있고  지금 유대인들이 여종인 하갈의 후손이라 하니 그 유대인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절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이 예루살렘은 자유자 즉 우리 어머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과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입니다. 하늘에 있는 거룩한 산과 예루살렘이 자유자입니다. 종인 하갈은 율법의 상징입니다. 종은 이 땅의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곧 유대주의입니다. 그러니, 유대주의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율법은 종의 자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자이니,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사는 자유인들입니다. 시내산은 옛 언약이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새 언약입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시민입니다. 이 시민은 종이 아니고 자유인으로 삽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하면서 아이를 낳지 못해 슬퍼하는 여인과 아이를 낳아 즐거워하는 여인을 언급합니다. 원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 민족에게 선포된 구원의 말씀입니다.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여 부르짖은 여인과 비유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중에 아이를 많이 낳아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는 구원과 희망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이렇게 적용합니다. 율법주의자들 즉 유대주의자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며, 은혜와 자유를 알고 그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아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두 어머니 사라와 하갈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4. 적용 : 약속의 자녀로 살라! (4장 28절-5장 1절)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형제들아! 자매들아! - 이들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곧 우리들입니다. 율법 아래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유 안에서 살고자 하는 우리들, 바로 우리들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적, 혈통적 자손을 일컫지 않고, 영적, 초자연적 자손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이면 이삭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로 받을 첫째 대우는 핍박입니다.


29절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창세기 21장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사라의 아들 이삭을 놀렸습니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유자의 이삭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율법적,  종교적 기독교인들, 즉 율법 아래에 살고자 하는 자들이 자유 안에 살고자 하는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을 놀리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유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자유주의자라고 놀립니다. 율법 아래 사는 자들은 은혜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무원칙주의자 또는 방종주의자라고 괴롭힙니다. 우리가 약속의 자녀로 살 때 이러한 핍박과 조롱이 있다는 것을 예측하십시오.


우리가 약속의 자녀로 살 때, 받게 될 둘째 대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약속의 유업입니다.


30절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창 21:10, 12).

31절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창세기 21장 10절과 12절을 보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여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 쫓아 주세요!” “이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똑같은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일로 인해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오직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아들만이 아브라함의 씨라 불려질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유대주의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자유 안에 있는 우리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이 참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려질 것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자유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게 됩니다.


지난 당회에서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컴퓨터에 있는 프로그램들을 모두 정품으로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의식하지 못하고 사용해 왔지만 복제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행위입니다. 이제라도 늦은 감이 없잖아 있기 하지만 정품으로 바꾸기로 한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복제품을 사용할 때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제품은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할 수 없습니다. 정품만이 업그레이들의 유업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복제품과 같아 보입니다.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영적인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습니다. 자유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정품으로서 영적으로 업그레이드를, 즉 유업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유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유업만 받습니까? 자유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전인격적인 유업을 받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교육과 문화, 예술과 도덕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자유의 영과 자유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의 중심에는 자유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책임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단어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가 무엇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의 능력을 아직 잘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크리스챤 심리학자인 스티픈 아터버언 Stephen Arterburn 이 건강한 신앙에 관한 책을 최근에 출판했는데, 그 제목이 “예수님은 더 많이, 종교는 더 적게”(“More Jesus, Less Religion") 입니다.  즉,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더 많이 강도하고, 종교성을 덜 강조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이며 건강한 신앙임을 스티픈 아터버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규칙으로부터 관계에로 옮기기”“(”Moving from Rules to Relationship”)입니다. 법칙성, 규칙성, 원칙주의 등을 많이 강조하면 할수록 해로운 신앙이고, 관계를 많이 강조하면 할수록 건강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진리를 말할 때 사랑과 정의, 평화와 기쁨을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어떤 규칙들 Rules 이 아니고 관계들 Relationship입니다. 당신의 교회는 규칙이 많고 법칙성을 논하고 법칙성을 지키려고 하는 교회가 아니고, 관계, 즉 사랑과 화평과 용납과 이해 등, 한 마디로 관계를 많이 갖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절정입니다. 성경의 꽃입니다. 성경이 금반지라면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 반지에 박힌 보석입니다.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아멘!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라!

흔들리지 말라!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유혹에 빠지지 말라!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말라!

다시 율법과 종교의 종이 되지 말라!


거듭해서 말씀드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9).


율법 아래 사는 것은 저주이며 죽음입니다.

자유 안에 사는 것이 축복이며 생명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연결고리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내용의 결론이면서 앞으로 말할 내용의 시작입니다. 다음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자유인이 자유인으로서 책임 있게 사는 법에 대하여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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