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설교 모음!! 신약!!

[스크랩] 단계별 학습-85)갈라디아서 강해(신윤식 목사)

하나님아들 2013. 9. 28. 14:04

갈라디아서 강해

 

아버지로 말미암아(갈1:1-5)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라는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쓴 편지인데 사도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 동기는 갈라디아에 있는 개종한 이방인들에게서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에 대한 잘못됨을 지적하고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살피면서 우리에게서도 보여지고 있는 많은 율법적인 부분들의 잘못을 깨달아야 할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그 본성상 자신의 행위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행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행위나 의식이 없는 종교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행위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종교는 의식을 신성시하고 그 의식을 통해서 신과 만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종교심을 우리가 이해를 하고 기독교를 바라보고 믿음을 생각할 때 현대 교회의 많은 잘못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확보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눈에 보이는 행위와 의식을 믿음의 증표로 삼고자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결국은 율법을 신뢰하고 있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점들을 갈라디아서를 배우면서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진실로 신뢰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뭔가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의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시작하고 있는 말씀을 보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두 대립을 통하여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이 한 절을 통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해 놓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말씀은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좋든 싫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했던 사람도 자신이 외로울 때는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고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 힘이 곧 자기의 힘인 것처럼 든든해합니다. 유명한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인 것입니다. 때문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고아와 과부, 또는 나그네는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자신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보면서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사도된 것은 사람이 세운 것도 아니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세움 받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서 사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힘으로 삼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지 세상이 아니요 사람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기독교이고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힘있는 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힘있는 자를 통해서 세상의 것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자란 꼭 돈이 있고, 권력이 있어야 힘있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존재라면 나에게는 힘있는 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사를 한다면 손님은 모두 자신에게는 힘있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손님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한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도된 것, 세상을 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힘있는 분은 하나님이고, 자신이 두려워해야 할 분도 하나님이지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망하는 자의 모습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인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교회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상에 힘있는 사람들이 어른노릇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사, 장로라는 것이 지위나 계급으로도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내세우고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랑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지하는 모습이 팽배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보다는 헌금을 많이 하는 교인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목사를 더 믿으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흔히 교회는 '우리교회는 목사님이 계셔야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모습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목사가 재력이 있는 교인 때문에 힘을 얻거나, 열심 있는 교인 때문에 힘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있는 신앙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나 신자가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힘을 얻는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은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신자라는 것은 목사가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으로 인해서 신자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신자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불의와 죄악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며 타협하지 않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신자가 목사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 또한 교회에서 힘있는 자의 눈치를 보거나 자기를 도와준 신자를 의식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자기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만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가? 분명히 '하나님 때문에 삽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힘으로 삼고, 누구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사도 바울과 같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단지 우리를 만드신 분이라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피조물은 오직 창조주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내 삶을 책임지시고 나를 위해서 계신다는 것만 생각하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것을 꼭 기억하고 살 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갈1:6-10)

세상에는 진짜를 모방한 가짜가 많이 있다. 가짜는 진짜의 이름을 도용하지만 그렇다고 가짜가 진짜되는 것이 아니며 가짜가 진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도 본문을 통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복음에도 복음 아닌 것이 있다. 비록 스스로는 복음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복음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길이다. 이것은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따라서 복음외의 것은 모두 생명과 반대되는 저주로 떨어지는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복음이 있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다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은 모두 저주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기독교 말고 다른 종교는 구원이 없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안에도 얼마든지 다른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말한다. 즉 우리를 부르신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 다른 은혜를 좇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분명히 십자가의 은혜를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지 않으면 기독교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은혜가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부르신 은혜인지 아니면 다른 은혜인지에 대한 구별이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부르셨다는 것은 그냥 불러내시고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은 자리 이동이다. 이쪽의 자리에서 다른 쪽으로 옮김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김 받은 것인데 그 의인의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결국 주님은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신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단호하게 세상에 대하여 죽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기쁨이 모두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주어지는 은혜보다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기쁨을 얻고자 하게 된 것이고, 복음 또한 세상 것을 제공하는 복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른 복음이다.

그렇다면 복음과 복음 아닌 다른 복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10절을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한다. 따라서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게 되고 거부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진실된 복음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하는 기쁨과 하나님이 구하는 기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하는 기쁨은 모두 세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은 철저하게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쉽게 좇는 이유는 사람들의 요구사항과 일치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진짜 복음은 사람들의 요구 사항과 일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의 요구를 공격하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 진짜 복음이다. 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말한다. 결국 복음이란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십자가의 은혜는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상상하는데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착각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내가 전적으로 십자가 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복음을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좇고 있는 복음이 분명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는 복음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에는 저주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의 기쁨을 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가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다른 복음에 불과하다. 주일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다른 복음이다. 헌금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다른 복음이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다른 복음이다. 복음은 오직 십자가이다. 신자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신자에게 세상에 대하여 죽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은 언제나 자기 몸에 집착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몸에 집착을 하는 그 본성이 우리를 다른 복음으로 끌어가게 되고 그것이 결국 저주의 자리가 되기 때문에 항상 십자가는 같이 죽을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다른 복음을 좇게 되는 것은 한가지 이유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자기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그것만이 복음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하는 것은 사단의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신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땅에 대한 소망에 더욱 깊이 빠져 있을 때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종교행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한 것은 다른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가장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가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시면서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구별하시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 담겨 있는 복음을 좇아가는 마음으로 복음대로만 살아가는 신자되기를 바란다.

 

 

 

 

십자가에 못 박힘(갈2:11-21)

신자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며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지금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신자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모든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다면 그 신자는 철저하게 십자가에 다스려지는 삶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이 현재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지금의 가치 없는 것은 버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은 분명히 그렇지를 못하다. 뭔가 하나를 버린 삶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지금의 자신의 삶에다 추가시키는 모습에 불과하다. 즉 현재와 미래 모두를 보장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좋아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시킨다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말하는 모습이 비일비재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2천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해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구원의 효력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분명 지금의 우리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보지도 못했고, 그 피가 지금 우리들에게 흘려진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는 지금도 여전히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십자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면서 살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의 말은 했지만 그 삶은 십자가와 거리가 먼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의 심정은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게바를 책망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게 된 이유는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던 중에 유대인들이 자기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봤다. 그러자 게바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가 그만 그 자리를 피해 버린다. 그 이유는 혹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이방인과 함께 음식 먹는 것을 들킨다면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게바가 자기를 피하자 거기에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자연히 게바와 함께 자리를 피해 버린다. 바울은 이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애당초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뭔가 복음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게바는 복음대로 하지를 못했다.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복음 앞에서는 하등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두려워서 복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 모습을 바울이 책망하는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면서도 외식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느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십자가 앞에서, 복음 앞에서 모든 외식을 벗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들의 신앙의 삶에서도 외식은 얼마든지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기도를 짧게 하든 길게 하든 그것이 십자가와느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남들 앞에서 기도할 때 기도를 좀더 길게 하면서 기도다운 기도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기도를 통해서 남들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남들의 눈이 두려워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많다. 이것이 외식이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결국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바울이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과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유대인들의 법에는 저촉이 되지만 복음 앞에서는 전혀 거리낄게 없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우리가 붙들 것은 복음이다. 그런데도 복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공격받는 것을 싫어하고, 따돌림당하는 것이 싫어서 복음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의지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16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 외의 것을 붙들어서는 안되고, 내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믿음외의 것을 내세워서도 안되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로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을 헐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자신 스스로 생각할 때, 구원의 도리를 알고 잇고 십자가를 말하고 오직 믿음만이 나를 구원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수없이 말하면서도 기독교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고, 교회를 말하면서도 교회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는 말하면서 피는 눈에 보이지 않고 항상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만 관심이 가 있느냐는 것이 사도 바울의 탄식인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귀한 죽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말한다면 모든 관심은 나를 의롭게 하는 십자가를 향해야 하고, 나를 살리는 것이 세상이 아니고 십자가인 것을 안다면 결국 붙들어야 할 것은 십자가이지 세상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붙들려고 애를 쓴다면 그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신자는 단지 십자가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서 눈이 띄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를 향해서 눈이 띄어 있는 자는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몸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연히 주님을 향한 삶을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고 헐어버린 것을 우리가 다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노력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네가 십자가의 피를 믿은 증거로 이러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십자가의 피의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칠 것은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피를 믿는 내 속에는 이제는 내 욕심과 내 목표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다스리고 내 욕심은 애 안에서 떠나게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해 달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피를 믿는 신자이며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이 주님의 피를 믿는 신자라면 여러분 안에 주님이 살도록 하셔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 계셔서 오직 주님의 것만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온통 나의 것으로 감싸져 있다. 내 마음은 모두가 내 욕심과 내 소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주님의 소망은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십자가의 피를 믿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어 온 말이고, 당연한 말이고, 잘 알고 있는 말이라고 해서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 말을 지나쳐 버리는 자는 스스로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믿음 없는 모습을 하나하나 발견해야 한다.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나를 믿고 있고, 돈을 더 믿고 있는 자신의 불신앙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헐어버리신 것은 결코 다시 세우려고 하지 맙시다. 신자는 다만 십자가를 믿으면 될 뿐이다. 우리의 신앙행위가 의로움을 얻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 인간은 신앙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이미 구약이 증거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다. 그 피 때문에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서 그 시랑으로 헌금하고 봉사하고 신앙의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속에서 사랑이 보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죽고 내 안에 새롭게 사시는 주님의 피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귀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도다(갈3:1-5)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고자 하는 즐거움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누리기를 원하고 또 누리는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식이 잘되는 즐거움, 사업이 번창하는 즐거움, 가정이 평화로운 즐거움 등 여러 가지가 있는 데 그 즐거움의 밑바탕에는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즐거움이 자리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즐거움도 바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례를 받은 선택된 민족이고, 그 중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바리새파라는 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면서 그것을 과시하는 즐거움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은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종교행위까지 모두 자기를 과시하는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아 버렸으며, 자신들의 그런 즐거움을 부정해 버리고, 공격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관계로 등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고 칭찬을 해줄 때 그 사람을 자기의 친구로 여긴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충고를 할 때 적대관계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목적이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을 자기의 螡즐거움이나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 또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앞서 말한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육체로 사는 사람, 또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과시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이 뭔가를 하면서도 '이것을 보고 남들이 뭐라고 할까'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일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는 본성을 이길 수 없다. 즉 인간은 날 때부터 육체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을 바꿀 수없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후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난 후 인간은 육체가 되었다고 했다. 즉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야 할 인간이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애쓰는 존재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것을 극복할 수 없다. 자기를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보다 잘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상처를 입게 되고 하나님에게까지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한 존재가 등장을 한다. 그자가 노아이다. 그러나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시키신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다. 하지만 노아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던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었다. 창6: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한다. 즉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세상을 육체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체로 사는 사람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이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다. 성령이 함께 해야 그 사람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전12:12을 보면 세상에는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은 차이가 있는데,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과시하고 나타내는 즐거움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에 십자가를 깨닫지도 못하고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모든 선물들을 감사하며 기뻐할 줄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다.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무시해 버리는 육체로 사는 사람과 달리 어떤 일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 1절에서 가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책망을 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이같이 책망을 하는 이유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오직 은혜를 말하는 복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행위를 주장하며 육체를 신뢰하게 하는 다른 복음을 따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부터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내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애당초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된 일인데 지금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죄는 사람이 육체로 살려고 하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도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은 우리의 육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육체로 살고자 하는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곧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결국은 율법의 행위, 즉 육체를 신뢰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이 함께한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고, 뭔가 자기의 힘과 노력과 행위로 신자의 모습을 증명하기에 애를 쓰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것이 곧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모습인 것이다.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세상과 같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차츰 차츰 세상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기보다는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좋게 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이것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모두 성령이 하신 일이라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는 모든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한다. 헌금을 하든 봉사를 하든 모든 것이 자기 과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만드신 것은 인간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할 일을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기에게 입혀진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담이 할 일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는 안식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살아라고 했다. 그 유혹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죄인 된 인간은 남이 나를 위해서 살아주기를 바라고, 남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지 내가 남을 위해서 살고,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에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육체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살아난 노아와 같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으니 암큼 우리가 나타내고 보이고 전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이고 사랑이다. 내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복종하면서 사는 것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고 성령에 속한 자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령으로 시작된 것을 육체로 마쳐지게 해서는 안된다. 은혜로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은혜로 나아가기 바란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은혜만 믿고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내 즐거움을 앞에 두고 나를 과시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게 되고 많은 짐들을 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하는 소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이다.

 

 

 

 

불변의 약속(갈3:13-18)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모두 자기의 육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살고, 육체를 위해서 일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애당초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며 살아야 할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자기의 육체를 위하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귀의 종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신자된 여러분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육체를 위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의 실체를 밝히 아는 가운데 내가 붙들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육체가 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생명이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일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약속을 이루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약속 안에서만 욱체된 인간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와 약속밖에 있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약속 안에 있는 자는 약속 안에서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소망으로 살아가게 된다. 육체된 자들이 살아가는 이 땅은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멸망당하고 사라지고 썩어져 버릴 것임을 알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살게 되는 것이다. 비록 몸은 세상에서 살지만 자신이 가야 할 곳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나그네' '풀의 꽃' '안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나그네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풀의 꽃으로 안개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마지막까지 내 육체를 부인하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이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주님을 믿거나 의지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죄의 모습이 내 안에 사라지지 아니하고 나를 붙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를 의지하고, 세상을 나그네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는 모습이다. 성령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십자가를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다.

신자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그 자체가 고난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육체된 자들이 살아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사람들은 세상을 육체로 살지 않기 때문에 육체로 세상을 사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산다는 그것이 곧 고난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세상을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가야 할 곳은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고 세상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과연 우리에게서 보여지고 있는가? 그렇지를 못하다. 육체로 세상을 사는 사람과 똑같이 그들이 가진 관심에 내 관심이 가있고, 그들이 세상의 것이 없음으로 인해서 한탄하고 슬퍼하느 그 모습이 나게게서도 보여지고 있고, 세상의 것을 가지고 으시대고 자랑하는 그 모습이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가 말씀을 통해서는 신자된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막상 세상의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그 머리 속에는 세상 문제만이 남아 있지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비리기 때문이다.

신자는 세상을 나그네로 산다. 우리가 갈 곳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육체된 우리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살리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할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한다. 그냥 예수만 잘 믿으면 천국 가지 약속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중심이다'는 말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갈3:6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의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후손에 대한 약속이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의 후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16절에서도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 약속은 세상의 그 무엇도 헛되게 하지 못한다. 약속이 요구하는 것은 믿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즉 어떤 법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신앙을 법적인 것으로 몰고 가고 있다. 십일조, 기도, 전도, 봉사, 헌신, 예배 이런 모든 것을 법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즉 이것을 부지런히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약속을 율법으로 훼손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친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동일하다. 그런데 만약 지금의 교회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를 열심 있는 것이나 정성으로 강조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나, 십자가의 긍휼과 자비는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가? 왜 꼭 시작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면서 마지막은 인간의 가치없는 열심과 정성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이것이 육체된 인간의 모습이다. 세상을 약속으로 살지 않고 육체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열심과 정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육체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는 것은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 우리의 행위는 그 어떤 것도 더러운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육체된 자이기 때문이다. 육체된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의의 나라이다. 거룩한 나라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죄인 된 인간에게 의가 입혀졌기 때문이다. 그 의는 우리의 힘으로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믿는다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내시는 것이고 우리가 약속을 믿고 세상을 산다면 결국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그네로 사는 것,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잊지 않고 내 본향은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약속을 믿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때문에 약속을 믿는자는 현재를 보지 않는다. 장차 내가 거할 하나님 나라, 마지막을 보고 사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삶으로 끝나버린다면 최고로 불쌍한 자는 신자들이다. 그러나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의 여러 자기 힘든 것들을 단지 고통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우리의 삶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신다. 마지막을 위해서 일하신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상을 나그네로 살고, 세상의 것은 사라지고 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세상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게 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삶은 마지막을 기지고 평가를 해야 한다. 마지막이 하나님의 나라로 끝난다면 그 삶은 성공적인 삶이고, 하나의 과정이었던 세상에서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결국 마지막의 선한 결과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인 것이다.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지금의 고통을 참고 이기면 하나님도 종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세상에서 다른 큰복을 얻기 위해서 지금의 조그만 고통은 참고 견디자는 의미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현재의 고통을 참고 이기는 자에게 있다는 말을 통해서 지금 어려움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려고 하는 데 이것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자신의 의지를 믿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자는 마지막에 서서 현재를 바라볼 때 지금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 선을 이루기 위한 과정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 속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인정하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내가 지금 무엇을 누리고 사느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사느냐를 보지 말고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를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의도 아니고, 우리의 정성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들어간다. 그 하나님의 의는 약속을 믿는자에게 주어진다.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버린 것이다. 내 상식으로 살지 않고, 내 경험으로 살지 않고, 내 지식으로 살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을 의로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그 약속을 믿고 언제나 마지막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중보(갈3:19-29)

세상을 살다보면 각자 나름대로 이것만큼은 세상을 사는데 꼭 필요하도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좋은 직장이 필요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학벌이 필요하고, 좋은 신랑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원하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하여간 세상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고 살 수는 없다. 분명히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신을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안타까운 점은 이것이다.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고, 주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 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게 되고, 나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향해서 채워지지 못하고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 않고 덤덤하게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해서 부복한 것에는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채우지 못해서 애타하는 것이다. 세상의 것이 부족해서 애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신자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애타하는 사람이 있다. 남을 미워하지 않는 모습, 남을 사랑하는 모습, 남이 나를 보고 칭찬할 만한 모습, 그런 모습들이 자신을 통해서 보여지고자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이런 삶이 신자다운 삶이고 신자에게는 누구나 그러한 마음은 가지고 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 것 때문에 애타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히 가질 마음 자세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오해하고 있고, 그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쪽에서 뭔가를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 남을 사랑하는 것을 이웃이 어려울 때 돕고, 구제하고, 남의 실수를 용서하는 등,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자기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를 바라보는 모습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해도 그것이 구원을 얻는 근거가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의 증거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보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값없는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값없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 편에서 정해 놓으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을 약속이라고 한다. 그 약속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었다.

신자라면 분명히 실천해야 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에서 자유를 얻는다고 하면서 또 다시 법으로 빠져 들어가는, 스스로 올무에 매이는 것에 불과하다. 신자가 실천해야 할 것은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곧 하나님 일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다. 주님만 바라보면서 그 은혜와 사랑이 나를 가득 채울 때 우리는 내 의지와 내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이것을 열매하고 한다. 내가 스스로 힘써서 맺는 열매가 아니라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이다.

죄인 된 나는 스스로는 주님이 요구하신 것을 하나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그래서 19절에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본분의 중심은 중보라는 말이다. 중보라는 것은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말한다. 양쪽이 끊겨 있는데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분을 가지고 중보자라고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그 중보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셨다. 즉 하나님은 우리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이다. 하나님은 중보자를 믿는 사람만을 찾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어떤 자격을 원하시지도 않는다. 단지 중보자만 믿기를 원하실 뿐이다. 중보자를 믿는자가 신자이다. 여기에 우리의 실천이 개입할 수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믿음을 보이고,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겠다고 애쓴다면 그것은 결국은 중보자를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신자의 조건이 못되는 것은 우리는 그 어떤 실천을 해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의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겠다고 한다. 이것은 전혀 의롭지 못하고 값싼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움직여 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 되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죄 아래 가둔다. 그 속에서 중보자만을 바라보고, 약속만을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 묵상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뭔가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에 묶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신자답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를 영접하고 믿는 것이다. 이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뭔가를 해서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쓴다. 자신이 신자라는 증거를 자신의 행위에서 확보하려는 열의로 가득 차 있다. 이 사람은 중보자를 영접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영접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 스스로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그것을 증거로 삼아서 구원을 얻어보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23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한다.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이 곧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윱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깨우쳐 주기 위해서 보내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보자는 그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죄인의 대가를 대신 갚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말한다. 몽학선생은 가장교사이다. 율법이 가정교사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새 누구도 율법 앞에서는 자기의 의를 자랑할 수 없다. 자신이 되인 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를 알 때 비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의 가능성과 힘을 다 포기할 때 내 눈에는 중보자가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중보자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내가 신자라면 무엇인가를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또 다시 몽학선생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되고 만다. 중보자가 이 땅에 오신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하다는 것은 자기의 의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됨의 증거를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됨의 증거는 오히려 반대이다.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다 버리고 오직 주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이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의롭게 된다.

29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 유업을 이을 자의 자격은 오직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밖에 없다.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실천이 아니다. 윤리와 도덕이 아니다. 종교행위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증거가 아니다. 그릿도께 속해 있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중보로 오신 분만이 나르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서 중보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누가 자기의 의를 포기하고 말씀을 통해서 중보자를 발견하고 그 분만을 바라보는지를 보자. 이것을 잊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자.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은 열매를 보이게 되어 있다. 열매는 맺으려고 애써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맺어지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했다. 그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고 주님 안에서 용서받은 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갈 3:26-2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만을 받으신다는 알아야 합니다. 보통 신자들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받으신다고 착각을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찾으실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내 보였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부하십니다. 제아무리 인간이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거룩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인간의 것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받지를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헌금을 했다고 해서, 기도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은 크나큰 착각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믿음을 우리에게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보여지는 믿음은 천태만상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의 전시회라고 할만큼 믿음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구제하는 것, 선교하는 것, 봉사하는 것, 믿음을 이런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행위가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전도하고 헌금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 등을 통해서 보여지는 믿음이 바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찾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한다고 본문 2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경 어느 곳에서 사람이 전도하고, 헌금하고, 구제하는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까? 분명히 그런 구절은 없다라고 말하고,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그 믿음의 증거를 우리의 행위에 두어 버린다면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은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다른 것은 전혀 믿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내 힘으로 삼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 없다라는 말은 예수님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를 묻는 것이지 봉사 열심히 하느냐, 헌금 잘하느냐, 전도 잘하느냐를 가지고 믿음이 있다 없다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내 생활이 내 관심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는 쪽으로 움직여져 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몸에 대한 문제는 2차적인 것이고 오직 예수님만 높여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사람들이 모두 예수에게로 간다고 하자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쇠하여도 예수님이 흥하여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흥하여지려고 하는 것은 믿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을 시기하던 무리가 자신을 비방하면서 바울에 대한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파했을 때 어찌됐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방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중심의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중심으로만 나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해를 입고, 내가 공격당하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 때문에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살다가 주일에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교회일 하면서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 가장 힘든 것은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즉 자기 포기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즉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믿음은 힘든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세상의 나는 어떻게 되든 나는 주님 안에만 있기를 원한다고 할 때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포기할 수 없는데도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만이 높여지기를 원하며 주님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믿음이 보여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고,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행동하는 모든 것은 믿음이 아닌 것을 명심합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모습, 즉 자기를 위하지 않고 주님을 중심으로 사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안에서'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땅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늘에 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을 하나님 나라에게 거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아들 되신 분은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을 보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신 자손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29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자니라"는 말씀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한분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시고 뒤에서는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안에서라는 말이나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 예수안에 있는 자, 즉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고 그 사람만 아브라함 자손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사는 자는 주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아들로 여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창 15:5). 한분 안에 다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속한 것입니다.

한분안에서는, 즉 그리스도안에서는 그리스도와 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주안에 주가 내안에'라는 말로 하나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한분안에 있는 다수도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지 않고,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만 붙들고 예수님만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붙든다고 하면서 결국 자기를 위해서 붙든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단 하나 기억할 것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입니다. 과연 내가 나를 포기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신자가 자기를 중심으로 살지 않을 때 남이 자기에게 뭐라 한들 그것 때문에 주님을 향한 믿음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자는 남이 하는 말, 남이 하는 행동 때문에 쓸데없이 상처입고, 흔들리고, 마음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를 중심으로 살 때 보여지는 것은 나이고, 나를 나타내고 자랑하는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언제나 주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된 모습을 보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유업을 이을 자(갈4:1-7)

사람은 누구에게나 환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지만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대립입니다. 서로 자기가 살아온 환경이라는 시각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에서는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오면서 환경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을 때 이제 대학교라는 환경이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이지 대학이라는 환경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등학교 때의 환경만을 생각하고 그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대학 생활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환경이 바뀌었다는 것은 뭔가 예전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업을 이을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업을 이을 자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환경에서 자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자기의 아들이 어릴 동안에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두어서 정한 기간을 지내게 하신 것 같이 유업을 이을 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분으로 모든 것을 상속받을 주인이지만 어렸을 동안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하게 하셨는데 정한 기간이 되자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뀐 환경입니다. 초등학문의 종에서 유업을 이을 자로 바뀐 것입니다. 서로 전혀 다른 환경입니다. 유업을 이을 자로서의 환경은 초등학문의 종으로 살아왔던 그 환경을 벗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데 벗어버리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업을 이을 자로서의 환경,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환경과 초등학문 아래서 종으로 살아가는 학문은 어떻게 다릅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어떻게 다르내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교회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되고 안되고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것의 차이점은 살아가는 생활 환경이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헌금하고, 하나님 이름 부르면서 기도한다는 것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 아들과 아들이 아닌 자의 차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과 아들이 아닌 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살아가느 방식 자체에 대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 가운데와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영, 즉 성령이 와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부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혼란스러워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렵냐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닌 사람은 모두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봐야 합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교회 다니기 때문에 교회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이란 신을 아버지라는 다른 호칭으로 불러주는 정도의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내가 의지할 분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음을 알고 오직 나의 힘이요 나의 도움으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우리를 또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 속했다는 것을 4:19절에서는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었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는 자로서 달라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입니다.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이것이 주님과 내가 하나로 되어 있는 모습이고, 주님과 하나인 자는 주님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등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은 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등록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장로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셨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남에게 대우받고 존경받기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섬김을 받기 위해서 살지도 않았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우어졌다는 것이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말이나 다같은 의미로서 나는 이제 옛날 환경에서 옛날 방식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보여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높이고자 하고, 사람들로부터 섬김으 받고자 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사람들의 위에 설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귀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마귀의 아들입니다.

요즘 교회가 자꾸 성경에서 비정상적인 길로 나아가는 이유가 목사 중심으로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되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중심으로 한다고 하면서 목사 중심으로 하는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 한 사람의 잘못된 말에 의해서 교회 전체가 비성경적인 방향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총등학문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7절에 종이 아니요 아들이라는 말은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이제 세상에 매여서 살아가지 않느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께 매일 뿐이지 세상이 자기를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이 나를 살리고, 회사가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께 매이는 것이 아니고 회사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자유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하여 능력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능력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공부해야 하는 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신자는 공부는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학문으로도 천국은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마디의 말씀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거침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된 새로운 환경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옛날의 환경 방식 그대로 살려고 합니다. 옛날 방식으로 사는 것이 더 든든하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세상일이 잘 안돼서 도와달라고 부르는 호칭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천국 간다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이제는 땅의 것은 나에게서 희미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더욱 확실해지는 그 기쁨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업을 이을 자로서 아버 아버지라고 부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와 이제(갈 4:8-11)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기가 선호하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친구든, 음식이든, 분위기든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취하게 되어 있고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일단 관심 두지 않고 멀리 한다는 것은 내 성격이나 취향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며 삽니다. 옷도 자기가 선택하여 골라 입고, 음식도 선택하여 골라 먹습니다. 친구도 선택하여 사귑니다. 내가 뭔가를 선택한다고 할 때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입니다. 나를 돋보이는 옷, 나에게 유익이 되는 친구, 모두가 자신의 유익을 중심으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해가 되는 것은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이런 사람의 본능 속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면 언제나 자기를 옹호해주고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능 속에서 종교가 나온다면 그 종교의 모습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가 자기를 옹호해주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도와주고 지켜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에 자기를 옹호하기는커녕 책망하고, 수치를 드러내고, 약점을 고발하는 그런 원리가 주어졌다면 사람들은 과연 그 원리를 얼마나 선호하겠습니까? 백이면 백 모두가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하나님의 원리가 바로 그러한 방식입니다. 사람을 옹호해주지 않고, 변호해 주지 않고, 오히려 모든 약점과 더러움을 드러내서 제 아무리 양심가이고 도덕군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죄인이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다른 곳에 가면 진짜 신자답고 선하고 예수 같은 사람이라고 추앙 받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만 오면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더러운 모습만이 남게 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겠습니까? 자연히 그 말씀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옹호해주고 지켜주는 말씀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성경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과는 전혀 동떨어진 새로운 하늘의 법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땅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더러움을 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보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잘못됨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항상 자기를 옹호해주고 이익을 주는 쪽으로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 말씀을 멀리하게 합니다. 복음을 알고 싶다고 하고, 성경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복음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에 대한 옹호는 전혀 없이 스스로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교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그 복음이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성경을 읽는 것조차 소홀히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나의 인생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나가는 것을 중지하지 못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교회 일에도 부지런을 보이는 이유는 차라리 그 쪽이 자기에게 복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성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옹호해주는 쪽으로만 나아가고, 자기를 변호하고 지키기에 애를 쓰면서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마다 지금 나의 형편을 옹호해주고 변호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의 죄악된 모습을 드러내고 책망하는 말씀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8절 시작부터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권능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하고 세상에 복종하는 모습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애굽의 바로 왕이 두려워서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왕까지도 주관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애굽의 힘있는 바로 왕만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가 세상의 눈치를 보고,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게 잘 보여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가면서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기를 변호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 변호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세상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상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의 그 때의 상태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성경이 뭔가 나를 변호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절로 넘어가면 그러한 느낌을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9절을 보면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한 때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제 네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 때의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종으로 사는 것은 용납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와 이제는 하나님을 알기 전과 하나님을 알고 난 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세상의 종으로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면 그 때의 모습은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로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 외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을 멀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된 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과 환경에 처해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때에는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복인줄로만 알고 그 복을 얻기 위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열심히 지키고 세상 눈치도 보면서 세상의 종으로 살았는데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그것이 다 세상의 초등학문이요 멸망으로 끌고가는 것임을 알고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은혜이고 최고의 복은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임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볼수록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들이 깨달아지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때의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이제의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그 때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즐거워하고 감사하면서 이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믿음(갈 4:12-20)

사람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인간적인 관계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도, 출세를 위해서도 인간적인 관계는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라면 멀리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가까이 하게 됩니다. 오늘 비록 친구였다고 해도 내일 나에게 해가 된다면 멀리하게 됩니다.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만약 저 사람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저 사람이 있어야 내가 세상에서 출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굽혀가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이 더 좋은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을 사는데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쉽게 마음을 돌려버리고, 다툼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관계의 모습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인간관계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한 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여있는 관계입니다. 교회의 이 인간관계를 이해하고 모인 것이 참된 교회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단지 인간들의 단체로만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세상적인 인간관계가 난무하고, 시기와 분쟁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잘 되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교회에 오는 자는 결단코 신자가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가 어려움에 빠질 때 도와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편에서 세상에서 도움 받는 것을 목적으로 교회를 찾는 것은 결코 신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신자와 신자와의 관계, 목회자와 신자와의 관계가 얽혀 있는 곳입니다. 사실 얽힐 관계도 아니지만 세상적인 인간관계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얽히고 얽힌 관계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목회자와 신자와의 관계는 성경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는 모습이 너무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 보여지는 목회자와 신자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관계입니다. 목회자는 신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신자를 접근합니다. 즉 신자를 잘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자신의 목회에 도움이 되는 일꾼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상은 목회자인 자신이 주인으로 되어 있는 가운데 그 교회를 크고 위대한 교회로 만들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힘있는 목사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자신의 교회를 찾아온 신자들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는 성경도 복음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의 욕망을 도와주는 쪽으로만 해석을 하게 됩니다. 결국 성경을 이용해서 신자들을 꼼짝못하도록 만들고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들이 목사의 말에 반박을 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쯤으로 아는 대단한 착각 가운데 목사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자신이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가 목사의 말을 듣는 것도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한 수단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서로 협조를 잘하지만 반대로 서로에게 방해가 될 때는 멀리하고 끊어버리는 세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신자가 목사의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질 때 자신의 단체에서 몰아 내버립니다. 또한 신자의 입장에서 목사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가차없이 자신들로부터 나갈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목사는 자신의 생존 문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점검해서 만족시켜주는 목회를 해야 하고, 신자들은 그러한 목사를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 교회의 모습은 오늘에 보여지는 새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도하면서 교회를 세우던 그때에도 보여지던 모습입니다.

우리는 천지창조때부터 보여지던 인간의 죄악된 모습이 지금에도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인간의 핏줄을 따라 본성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 누구도 아담의 죄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인간관계로만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느냐, 아니면 바울이 가지고 간 복음을 보느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느냐에 따라서 사도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바울이 들고 간 복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문제를 바르게 하지를 못합니다. 물론 지금 목사가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를 목사로 비유할 때 지금의 많은 교회들이 목사를 보는 눈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들어줄 수 있느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교인을 잘 교육시켜서 일꾼들로 만들 수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인가 교회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복음인 것을 알고 복음만을 본다면 그것이 바른 교회이고, 사람을 본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도 복음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교회를 찾았고, 교인도 복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 교회를 부흥시킬 사람을 찾았다면 이들의 만남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싫어하고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면서 지금의 믿음을 칭찬해주고 열심을 독려하는 말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 편에서도 자기들을 난처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고 편안한 말만 해주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니까 마음놓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나 할 것없이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의 모습은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14절에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가지고 판단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약함, 즉 볼품없는 모습 그대로 갈라디아 교회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외모야 어떻든 그들은 바울은 환영하고 영접했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14,15절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원했습니다. 순수하게 복음만이 자기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고 복음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합니다. 처음에는 복음만을 원했고, 복음을 영접했는데 나중에는 그 복음을 도리어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을 외면하게 된 이유는 17절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행위를 주장하고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더 좋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앞에서는 초등학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한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다시금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는 쪽이 처음에는 복음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고 복음만을 원하다가 인간의 본성에 맞는 세상의 초등학문에 마음을 두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쪽이 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합리적이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처음에는 복음이 좋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원했는데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던 믿음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이나 나중에나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알기 전의 그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갈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처음 주님을 믿을 때의 그 마음, 그 모습이 그대로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처음 그 사랑이 있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신자는 처음도 나중도 내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이끌어 가는 복음 아닌 복음은 거부하고 오직 십자가로 인도하는 복음만을 마음에 두면서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자유자(갈 4:28-31)

오늘 오전에 종교열심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신자가 종교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한가지 착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열심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열심, 성경 보는 열심, 헌금하는 열심, 이런 것들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믿음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현재의 열심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헌데 만약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나, 모임에 참석하는 정도, 기도하는 시간, 헌금하는 것, 이런 것들이 스스로 만족이 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즉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예배 참석의 횟수를 늘이게 되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하게 되고, 모임에도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고, 헌금도 더 많은 액수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자유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법에 매여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교회라는 눈에 보이는 단체에 매여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교회에 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지금 신자들이 신앙생활하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를 향한 열심이 여러분을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니까, 내가 장로니까, 내가 권사니까, 내가 집사니까 뭘해야 한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직책에 매여있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목사가 하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은 가만히 두면 게을러지기 때문에 날마다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계속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소위 교회 분위기를 뜨거운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열심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주님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신자들을 이용하고자 자기 멋대로 법을 내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힘을 믿고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교회입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육체를 따라 난 자를 '계집종의 자녀'라고 하고, 성령을 따라 난 자를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계집종의 아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계집종의 아들은 무엇이고, 계집종의 아들은 왜 유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부인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부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해서 누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자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부인은 종의 신분이었던 하갈과 자유자의 신분이었던 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둘의 신분을 비유를 해서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 즉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났다고 하고,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삭을 성령을 따라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난 아들은 내어 쫓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체로 난 것은 무엇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살이 가까워지도록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갈이 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보고자 한 증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즉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보고자 하는 열심을 가리켜서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가 이삭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을 따라 나지 아니한 아들, 즉 인간의 혈통을 따라 나지 아니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났지만 아브라함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난 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와 같이 성령을 따라난 자만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같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이 죄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율법도 자신의 노력으로 지켜서 천국 가는 방편으로 삼아버렸던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 아래 매인 자가 되어 버렸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또 다른 법을 만들어 내고 그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증표를 찾고자 합니다. 믿음이 있는 증거는 뭔가 달라지고 보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그 약속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었지 자신의 노력으로 약속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었던 것 같이 믿음의 증거는 말씀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열심을 가지고 스스로 믿음의 증표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스마엘을 만들어 내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나게 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목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누가 종의 아들이고, 누가 자유자의 아들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면 됩니다. 성령을 따라난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난 자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살면서 종교적인 열심을 통해서 복을 얻어내고 천국에 가고자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멋대로 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붙들려서 움직이고,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하는 것은 여러분을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할뿐입니다. 자유자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갈 5:1-6)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은혜와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은혜요 사랑이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머리에 담긴 지식으로 그쳐버리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것을 무엇을 알 수 있냐면 자신의 신자됨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행위를 가지고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자가 안다면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신앙을 확인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신자라는 것을 자기의 신앙 행위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와 사랑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내세운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만한 신앙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간편에서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에 미달할 때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법에 매여 사는 모습입니다.

신앙 생활을 기쁨으로 즐거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법에 매여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법에 매인 신앙 생활에도 기쁨과 즐거움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즐거움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기쁨이 아니고 신앙의 법을 지킨 자기 성취에 대한 기쁨이 만족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은 자유함에 대한 훈련보다는 신앙의 법에 대한 훈련이 너무 잘되있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묵상을 조심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묵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묵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좋은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앙의 기준을 성취하기 위하여 묵상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어떤 기준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신자는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고 말할지라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와 같이 법에 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나아갈 때 그 교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획일화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신앙 생활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자로 사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는 그 어떤 법도 효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6절).

여러분, 그리스도안에서는 그 어떤 법도, 신앙의 기준도 효력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표로 삼았던 할례도 그리스도안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합니다. 할례도 효력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법도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가 어떤 기준을 정해서 그것을 지킬 것을 신자들에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잘못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니까 기도해야 하고, 신자니까 예배드려야 하고, 신자니까 헌금해야 한다라는 것은 기도, 예배, 헌금 등을 신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됩니다. 즉 기도, 예배, 헌금이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 법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예배에 빠진다는 것 때문에, 헌금을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상대방을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아도 정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법으로 하느냐 은혜와 사랑으로 하느냐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한가지나 몇 가지 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보면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또 다른 법, 법 모두를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없기 때문에 4절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합니다. 즉 법을 지켜서, 신앙의 어떤 법칙을 지킴으로서 신자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천국은 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사랑이 있을 때 천국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랑이란 친절이 아닙니다. 사람을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서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인다는 것은 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가정 또한 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법에 매이지 않고 사랑에 붙들린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남들이 자기에게 하는 행동을 가지고 교회의 사랑의 유무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내가 남에게 사랑을 가지고 다가갔느냐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내가 받는 것이 있어야 베풀려고 하고, 또 조건없이 베푼다고 해도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신자들입니다. 여러분 한사람이 이 주님의 사랑을 이해한 가운데 그 모습을 교회에서 보인다면 그 교회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법으로 자꾸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열심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복을 받기 위해서 열심을 보여야 하고 그 열심을 신자의 기준을 열심히 지켜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피곤할 뿐입니다. 짐이 되고 억지가 되고 기쁨이 없습니다. 설령 필요했던 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또 다른 필요한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피곤이 이어지고, 불만이 이어질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법을 지키고 신앙의 기준을 행하는 열심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명분있는 종교 열심을 가지고 모인다고 해도 그것은 책망의 도구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법이나 어떤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용납과 용서하는 사랑으로 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남이 나를 돕는 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먼저 남을 돕는 자로서 나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남이 사랑이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먼저 남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런 교회만이 천국을 보여주는 교회이고, 가정과 같은 교회입니다.

 

 

 

 

성령을 좇아(갈 5:16-17)

지난 시간에는 신자가 어떤 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신자가 어떤 법적인 기준을 선호하는 것은 교회서 제시하는 몇 가지의 기준을 지킴으로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삶의 전체를 신앙생활로 강조하는 것보다는 몇 가지의 기준을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것으로 세워서 그것을 지킴으로 신앙생활을 완성시키는 것이 신자에게는 부담이 가지 않고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적인 기준을 원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모든 판단을 그 기준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법적인 기준을 가지고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서 하루에 성경을 5장을 보자라고 했을 때 5장을 보는 사람은 신앙이 좋은 것이 되고, 보지 못한 사람은 신앙이 좋지 않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들을 아주 싫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법적인 기준에 매이지 말고 자유자로 살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성경의 말씀을 따라 자유자로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권유합니다. 법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는 그 훈련이 여러분에게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유자로 신앙 생활하라고 하면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합니다(13절). 즉 자유라고 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 자유가 남에게 해가 될 때는 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의 새로운 의미를 제시합니다. 즉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13절)입니다. 자유란 사랑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랑이 자유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우상 제물의 문제에서 제물을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우상 제물이 죄냐 죄가 아니냐를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신앙의 지식으로 인해서 자유함을 가지고 거리낌없이 우상 제물을 먹는 자들에게 신앙의 지식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그 자유를 절제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합니다. 즉 나에게 종교적인 행위가 있으면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을 말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쉽게 나는 성령편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자로서 성령의 편에 서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물어야 할 것은 성령의 편에서 살고 있느냐 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령의 편에서 사는 것입니까? 종교 의식 행위가 성령의 편에 있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이 내가 성령의 편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16절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편, 즉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좇아가는 사람이다고 합니다. 성령을 좇는다는 말은 법이나 어떤 규칙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알고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내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뭘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들은 온통 내 기쁨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지 내 기쁨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겠다는 믿음은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 편에 서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 편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지 않는 자는 하나님 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편으로 사는 자의 하나님이시지 자기편에서 사는 자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시편 118:6,7을 보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가 내 편이라는 것은 이 시의 저자가 이미 여호와의 편이 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자는 이미 자기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는 이런 자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 도움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오셔서 모든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도움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에서도 원수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도움을 말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편으로 살아갑니까? 성령을 좇아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예배와 기도와 설교 듣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있습니까?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모든 삶이 움직여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도록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하고 싶어하는 것을 성령이 내안에서 거부합니다. 내 힘으로는 거스릴 수 없는 것을 성령이 내 안에서 거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싸움이고 갈등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싸움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까? 그 싸움 속에서 자기의 것을 조금씩 포기해 가는 모습이 있습니까? 그런 싸움이 있음으로 기뻐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편으로 자신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나님 편으로 서고 싶은 자기의 소원을 아뢰며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편으로 사는 것이고 성령을 좇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갈급함 마음이 되기를 구하십시오. 세상에 대한 갈급한 마음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행동을 하실 때 먼저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일의 결정을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편에 서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늘 찾아가며 성령을 따라 살고 여호와의 종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박음(갈 5:18-26)

밖을 나가보면 사방 곳곳에 교회가 있고, 교회마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과연 저렇게 많은 교회들 중에 진심으로 십자가를 아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할 때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물론 우리 교회를 제외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의 정신을 찾아보기란 참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너나 할 것 없이 교회마다 교회란 이름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모독하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남이 한 것을 이용해서 자신이 이득을 보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고생하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경제 원리입니다. 사람을 잘 이용하는 것이 사업 수완이고 성공의 비결로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버립니다. 그래서 이용당하지 않고 이용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이 땅의 모습입니다.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능한 목사는 교인들을 잘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흔히 사람을 적시 적소에 잘 쓰는 것이 능력있는 목회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회사 경영주에게도 같이 적용됩니다. 결국 교인도 그 재능을 잘 간파해서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교회가 성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회사의 인사관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도 이용의 대상일 뿐입니다.

신자들에게 십자가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못박혀 죽으신 장소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잘 아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묵상하며 감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이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거부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만큼은 할 수 없다는 의도입니다. 즉 나에게 손해가 안되는 한도 안에서 주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십자가를 아는 신자는 24절의 말씀과 같이 자기의 정과 욕심까지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이용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사일 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안에 주님이 살아계신 자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육체에서 나오는 열매들이고, 성령의 열매는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열매도 우리가 맺을 수 없는 것이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고 주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신자입니까?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함께 죽은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지 않은 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자기의 본성에 이끌려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모두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면 교회도 뒤로하고, 주님도 뒤로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는 주님만 죽으신 십자가지 자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가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것은 주님의 은혜를 받거나 복을 얻거나 신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아는 자로서 십자가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천국에 관심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인가?'를 생각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십자가만 바라보는 삶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만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조그만 문제가 발생하면 금방 모든 관심은 십자가에서 그 문제로 쏠려 버립니다. 그 문제 때문에 세상 모든 행복이 다 사라져 버리고 자기만이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이 여겨버립니다. 진심으로 십자가를 알고 그 십자가에 인생의 모든 행복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문제와 환경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변함이 없어야 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는 것부터 분명한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해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교회도 자기를 위해서 있어 주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대해서는 수없이 걱정하고 계획하고 모든 힘을 다 쏟으면서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는 조그만 마음조차 두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천국 가기 위해서 예비해 놓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런 의도가 있는 것 아닙니까? 내 인생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워 하고 반발하면서도 당장 그 십자가를 버리지 못한 것은 마지막 때 천국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신자라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인생에 관심을 두고 살다보니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몸에 속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한 운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체가 각각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몸의 운명이 곧 지체의 운명입니다. 따라서 몸의 지체들은 한 운명 안에서 움직여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각자의 인생은 한 운명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주어진 각기 다른 역할과 환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그것을 가지고 서로 차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존재로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서로가 돕고 힘쓰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돕기 위해서 보여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러한 관계가 점차 사라집니다. 서로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고 모이는 것이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체라고 하는 것을 전혀 거부해 버리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 관심의 대상이지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지체라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만 편하면 되고 나만 천국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유익을 위해서 내 유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유익을 위해서 남이 유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내 하고 싶은 대로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자유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기쁨으로 자기의 자유를 포기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결국 자유란 사랑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지 아니한 사람에게서는 전혀 보여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항상 자신의 육신의 문제만이 심각한 것입니까? 왜 주님의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함이 없습니까? 주님께 대한 심각함이 없기 때문에 지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나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달렸습니다. 그래서 지체입니다. 이제 옆에도 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정과 욕심은 못 박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아 계시고 끊임없이 주님의 간섭을 받는 가운데 여러분들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주님과 함께 사는 신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갈 6:1-5)

지난 시간에는 신자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신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은 직장도 그만두고, 학교도 그만두고, 가정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조건과 환경들이 나의 육신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고 그것을 삶의 방향으로 삼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면 과연 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가 분명합니다. 결국 주님은 우리의 삶을 돕고, 내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잘되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행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이제는 우리를 통해서 계속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대로 나의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범죄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은 범죄가 시험으로 인해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지 아니한다면 범죄가 없습니다. 범죄가 없다는 것은 죄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본성에 의한 열매가 시험으로 인해서 열매로서 보여지게 되는 것을 범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내부에는 언제나 육체의 일을 따르고 싶어하는 흔들거림이 있습니다. 그 흔들거림이 평소에는 자신의 억누름에 의해서 외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시험이나 유혹이 미쳤을 때 평소의 흔들거림들이 실제 행동화되어서 외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범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자가 모이는 곳이니까 모두가 깨끗하고 선하고 싸움도 없고 다툼도 없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용서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번으로 끝난 용서가 아니라 교회로 모일 때마다 용서 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죄를 무조건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모여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보다는 육체의 일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 내에서 범죄 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절에 보면 그러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는 범죄한 자를 위해서 신령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범죄한 사람에게 죄에 대한 권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에서 범죄한 자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는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가 신령한 신자, 즉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주님만을 사랑하고 성령으로 살기를 힘쓰는 신자가 왜 필요하느냐면 시험과 유혹에 의해서 범죄한 형제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신령한 신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범죄 함만 보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하나 죄를 지적하고 권유할 사람이 없어지고, 또 이웃의 신앙 생활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모습으로 되어 가기 때문에 결국 교회는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되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석교회가 그러한 교회의 모습으로 전락해도 상관이 없다면 저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은석교회를 어떤 이상적인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자로 부름 받은 것은 여러분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제발 그 역할을 여러분이 감당해 주기를 원해서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랑과 섬김입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짐을 서로 지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두지 마시고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된 여러분의 지체에게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언제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령한 모습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정신이 은석 교회에 충만할 수 있을까? 여기에 관심을 두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4:11,12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맡은 모든 일도 자기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역할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자유라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몽땅 내가 이웃에게 할 일만 있지 이웃이 나에게 해 줄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랑이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결과입니다. 남이 나에게 한 일을 나의 자랑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4절의 말씀은 일한 것을 자랑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되는 신자는 언제나 이웃을 위해서 자기 할 일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데 두고 사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성공의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패의 인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을 성공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공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이고, 또 인간에게 성공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인생은 그리스도의 법에 붙들려서 용서함 받은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합니다. 자신의 몸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몸을 위해서만 움직인 사람은 결국 거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더 썩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에 관심을 두고 살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은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여기에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실패한 인생이 성공해 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근심과 염려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실패의 인생이 그리스도의 용서에 의해서 성공의 인생이 된 것을 감사하며 여러분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법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성공의 인생을 보여주는 신령한 신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때가 이를 때까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석교회/신윤식 목사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bloom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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