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요약본 자 료
천년왕국
서론
성경주석가들이 필히 다루어야 하면서도 다루기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가르침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니엘서 2장이나 요한계시록 20장의 본문을 인류 역사의 과정에 관련시켜 보려고 시도 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통치에 대하여 많은 이론이 등장했고 그중에 세 가지 견해에 전 천년기설, 후 천년기설, 그리고 무 천년기설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세 종류의 왕국 설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지만 세 학설의 초점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다루는데서 벗어나 왕국의 설립방법, 통치방법에서 아주 다른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다.
* 제 왕국 설의 정의 전 천년기설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전에 복음이 만방에 전해지고 대 배교사건이 있을 것이며 전쟁과 기근과 지진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시기에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하여 지상에 거주하던 자들과 자유로이 왕래할 것이며, 사단은 그리스도에 의해 감금되지만 천년이 끝날 즈음에 이 악한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도들을 압박할 것이라는 것이다. 천년이 지난 후 주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이때 영원한 하늘나라와 지옥이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후 천년기설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그리스도인들의 전도행위와 가르침을 통해 지금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역이 세계를 기독교회 시킬 것이며 그 결과 천년왕국이라 불리는 평화와 번영의 긴 세월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간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의 심판과 더불어 종결된다는 것이다. 무 천년기설자들은 세상의 종말이전에 어떤 우주적인 평화와 의로운 시대가 있다고 보지 않는 다. 이세상은 계속해서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자라날 것이며 그것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최후의 심판이 있을 그때에 절정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것이며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영광스럽고 완전한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열망한다. 이들은 요한 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왕국을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현재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는 나라로 해석한다.
* 그 시대 그 견해 교회사속에서 이 세 가지 왕국 설을 각각 추종하고 주장한 무리들이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기독교의 초창기 3세기 동안에는 전 천년기설이 지배적인 종말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콘스탄틴 황제치하에서 무 천년적종말론이 받아들여졌다. 교부 어거스틴이 이 견해를 주장했으며 어거스틴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천년왕국이 있다는 신앙이 미신으로 정죄되었다. 따라서 중세의 지배적인 종말론은 무 천년설이었다. 15세기 마틴 루터는 성경을 보다 여자적(如字的)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옹호하여 전 천년기설 해석법으로 초점을 옮겼다. 칼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는 근세에서 아카데믹형식으로 전 천년기설의 가르침을 부활시켰으며 이것은 영국국교회의 조셉 메데를 전 천년기설자로 만들었고 이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지상왕국에 대한 소망을 일깨워 1640년 청교도혁명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의 계몽사상과 견해를 같이하는 후 천년기설이 전 천년기설의 뒤를 이었으며 19세기 불란서혁명기간 동안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이 갑자기 붕괴하자 다시 전 천년기설이 관심을 끌었다. 플리머스 형제단의 지도자였던 J. N. 다아비는 전 천년시설 중에도 세대주의적 견해를 피력했다. 즉 천년왕국이전의 그리스도 재림을 교회가 비밀리에 들림을 받는 단계와 그리스도가 왕국을 건설하기위해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는 단계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를 바울이 언급한대로 하나의 비밀이며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은 세대라 불리는 일련의 기간들에 의해 이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세대주의 영향이 미친 범위는 너무나 넓어서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 단체에서는 이 해석법이 지배적이다. 역사와 관련해서 간단하게 언급된 위의 각 견해는 각각 기독교인들의 추종을 받아왔다. 다음에 나오는 논문들은 각 견해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제 Ⅰ부 역사적 전 천년기설
전 천년기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다음 천년동안 이 지상왕국을 다스리시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최후 절정을 이룰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는 견해이다. 요한계시록 20장을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실제적인 절정에 대한 기독교의 예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다른 부분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통치의 성격을 알기위해 성경의 어느 부분을 끌어드릴 수 있는가?
1. 해석학적인 문제 복음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제각기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세대주의는 성경을 여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약의 예언서 중의 대부분은 천년왕국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두가 메시아의 천년왕국의 통치를 설명하기 위하여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의 첫 번째 필요 불가결의 특징은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별한 것이다. 즉 이들의 전제조건은 백성을 두부류로 나누고 여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도 두 가지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법에 반대되는 것이 “영해” 즉 구약성경의 예언들이 기독교회에서 성취되고 있다고 보는 무 천년기설 자들의 해석법이다. 종말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해석하되 구약성경의 문맥이 제안하는 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15은 예수께서 애굽으로부터 나오셔야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호세아 11:1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불러낸 출애굽 사건을 역사적으로 긍정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나 이아야 53장이 고난 받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은 신약성경에 의해 해석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여자적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분명히 긍정하는 반면 구원의 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천년왕국시대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비세대주의 신학의 종말론은 단순히 미래에 이스라엘이 구원될 것을 긍정하고 구체적인 설명은 하나님의 미래 계획에 맡겨버린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고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할 것이며 그로인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2. 문맥상 나타난 천년왕국 두 번째 생각할 내용은 어떤 천년왕국설이든 신약성경의 문맥, 특히 신약성경의 기독론과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중심 되는 교리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잠정적인 천국거주의 회기에 대한 교리이다. 히브리서 1장3절 ‘엄위의 우편에 앉으신.’ 2장8절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10장12-13절 ‘하나님우편에 앉으사, 원수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에서 시편 11d편을 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메시아의 왕적인 그리스도의 통치와 더불어 연관을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화와 통치에 대한 진리는 위대한 기독론의 구절인 빌립보서 2장5절-10절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이 처음으로 고백한 것은 예수를 구주로 말고 주로 고백한 일이다. 주되심과 왕권은 상호 교체할 수 있는 용어인데 이 같은 현상은 “우리의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다.”(딤전6:15)라는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메시아적 통치를 재림 시에 시작한다는 것과 그의 왕권은 우선적으로 천년왕국에 속한다는 사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통치가 이미 그의 것인 주권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3. 천년왕국설 우리는 이제 천년왕국에 대한 가르침을 연구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실제적으로 천년왕국을 언급하는 유일한 곳은 요한 계시록 20장 1-6절이다.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 그리고 그리스도의 자기원수들에 대한 승리 등에 관해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해석상 약간의 융통성을 허용할 수 있는 문맥적 실마리가 없다. 이 부분에 나오는 단어들은 매우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다. 천년왕국의 초기에 죽은 자들 중에 일부가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머지가 살아날 것이다. 여기엔 말장난할 수 있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이 구절은 문학적으로 해석될 때에만 그 의미가 완전하게 된다. 문자적으로 천년왕국설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이 진리가 성경에서 한 구절, 즉 요한계시록 20장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서신 속에 천년왕국은 아니나 중간기의 왕국을 언급하는 구절이 하나있다. 바울은 고전15장 23-26절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승리가 몇 단계로 성취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어느 부분에서도 천년왕국의 신학,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목적에 대해 상술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계시되지 않았지만 아마 천년왕국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원수들을 발아래 있게 할 그의 메시아적 홀의 일부분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통치하신다는 데는 또 하나의 가능한 이유가 있다. 천년이 끝날 즈음에 악마는 그 감금상태에서 해방될 것이며 심지어 삶들이 비록 평화의 의로운 시대에 살았지만 그가 다시 유혹하면 여전히 그를 따를 것을 알게 된다. 이로서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공의가 찬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최후의 심판 날에 완전히 그 정당성이 입증될 것이다.
*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자의 비판 - (헤르만 에이 호이트) 역사적 전 천년설은 내가 옳다고 믿지 않는 어떤 것을 주장하고 있다. 2세기 이후 교부들은 이러한 전 천년설을 주장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전 천년기설은 그 자체의 타당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래드는 그가 해석학 문제와 더불어 천년왕국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점에서 옳다. 그가 세대주의 이론체계에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사실은 그의 해석학 입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체계는 세대주의라는 딱지가 붙여지고 다른 체계는 그러한 명칭을 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에 나오는 천년왕국 중에 세대의 순서를 무시한 것은 하나도 없다. 즉 세대의 순서를 무시하고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래드는 세대주의의 요점을 무너뜨리기위해 “세대주의는 구역성경을 여자적으로 해석해서 그 자체 종말론을 조직하고 그 후에 신약성경을 그것에 맞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래드는 그가 성경해석의 문제로부터 천년왕국설 본론으로 넘어갈 때 신약의 기독론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관심을 쏟는다. 또한 래드는 자기의 강조하는 바대로 결론을 내리면서 신약성경에는 천년왕국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고 그것에 대해 실제적으로 계시한 전부는 한 구절만 포함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요한 계시록 19-20장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줄잡아 말해서 그럴 것이며 래드조차도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래드는 천년왕국에 부수되는 성경진리로 천년왕국 교리 전체를 훑은 다음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저자들이 한 대로 노골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천년왕국 교리에는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 후 천년기설자의 비판 - (로뢰인 뵈트너) 나는 래드가 서술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해석되고 또 그것이 신약에 의해 적용되는 방법에 대해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 나는 우선적으로 나의 논지를 유대인의 회개와 앞으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질 위치, 그리고 천년왕국에서 가질 위치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점으로 제한시키고 싶다. 래드는 “천년왕국의 교리는 구약의 예언들에 기초할 수 없고 오직 신약성경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것과 “성경에서 실제적으로 천년왕국을 언급하는 유일한 곳은 요한 계시록20장 1-6절임”을 인정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물을 통치하고 있다.”고 한다. 래드는 천년동안에 걸친 그리스도 지상통치의 성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설명도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부활한 성도 그리고 공중휴거에 들어간 성도들이 여전히 육신 속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천년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지상으로 되돌아 올 때 기묘한 상황이 분명히 야기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영광중에 아버지의 것과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더불어 재림하실 때 그와 비교하면 티끌의 벌레에 불과한 인간들은 분명히 그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 래드는 로마서 11장 26절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은 아마 천년왕국과 어떤 관련을 가지면서 회개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대 백성들이 세계 다른 모든 백성들 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더 받는다는 것과 유대민족들이 그와 같이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기 위하여 선택하신 독점적인 경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셔서 자기의 대속사역을 완전히 이룩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양도될 이런 특별한 역할은 성취되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구약시대의 제도 중 그 어떤 한 요소도 부활시키거나 재확립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다.
* 무 천년기설자의 비판 - (안토니 에이 후크마) 래드의 논문에서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져야하고 전적이고 배타적인 여자적인 구약성경의 해석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한다. 다만 우리가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이다. 첫째, 래드는 20장 1-3절에 기술된 사탄의 결박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단은 현재 복음의 전파를 방해 할 수 없고 교회를 공격할 수 없다. 이는 이 결박이 신약교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래드는 헬라어 에제산을 ‘살아났다.’로 번역했으나 이 단어는 ‘살았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셋째, 래드는 에제산을 둘 다 육체적인 부활로 설명한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에제산과 같은 어근을 가진 자오 동사의 용도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육체적인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넷째, 나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지금은 거의 불가견적이라는 점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전히 가견적이 될 이 통치를 고대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 가견적인 통치를 천년이라는 기간으로 제한하는가? 래드가 언급한대로 왜 가견적인 그리스도의 통치가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할까?
제 Ⅱ부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
1. 성경이 선언한 천년왕국 왕국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성경에 400번 이상 나온다. 이 중에 거의 200번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왕국을 언급한다. 이 왕국사상은 특수한 용어의 그 고유한 개념을 넘어 성경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다. 인간의 만물을 지배하는 문제는 성경의 초두에 소개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지배하라고 하신 때로부터 계시록 22장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이 땅위에 세워지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다스릴 때까지 성경전체를 통하여 이 사상은 흐르고 있다.
2.성경해석의 원리 성경의 메시지는 구약과 신약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모세는 이러한 사실을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를 끝맺으면서 명백하게 했다. 이 메시지는 어떤 윤리적이고 영적인 유익이 이 백성들에 의해 실현되기 위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만일 메시지가 인간의 마음에 닿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 한다면 그것은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명백한 방법으로 전달되어 져야만 했다. 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낮은 수준의 사람들도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원리에 찬성한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왕국설을 여자적인 해석법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기본적이다. 전 천년기설이 팽배하는 곳에는 전 천년기설이라는 여자적인 해석법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이 점을 기초로 하여 성경전체를 조직하는 조직신학을 세운다. 무엇보다도 전 천년기설은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빛나는 역사철학을 제공해 준다. 전 천년기설은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으로 역사를 통해 움직이시며 모든 사건의 경로가 결국 선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지도하신다는 사실을 지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로 그 모든 야망을 실현하게 하고 보다 나은 것을 얻으려고 투쟁하도록 동기를 제공하며 인생의 모든 참된 가치가 보존된 채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전히 성취될 것임을 깨닫게 한다.
3. 천년왕국의 해석 1) 그리스도의 초림 전의 유대인들 중에 이 왕국이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2) “하늘의 왕국”이라는 구절은 천년왕국과 하늘나라를 동일시여기도록하며 그 결과 이 구절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3) 성경을 영해하므로 교회 그 자체가 그 왕국의 전부라고 이해되어 왔다. 4) 영적인 해석 원리에 지배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그 마음속에 그 왕국이 임했다고 해석했다. 5) 이 왕국이 순전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고매한 원리나 하나님의 영적인 목적으로 관심을 돌렸다. 6) 근래에 인류의 생활구조가 개선됨에 따라 천년왕국이 미래의 종말론적 왕국이 아니라 현재가 바로 그 왕국이라는 해석을 환영했다. 7) 어떤 사람은 피해망상으로 성경기록자들 심지어 주 예수그리스도 자신도 비난했다. 8) 발트나 부룬너는 매우 환상적인 왕국설로 기독교의 관심을 끌었다. 9) 성경을 액면 그대로 취급하는 성경관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 한 왕국이 세워진다고 한다.
4. 성경적인 천년왕국의 해석 천년왕국에 대한 참된 개념은 결코 어떤 단편적인 성경이나 구절에 의거하지 않는다. 모든 성경들의 자료들을 개괄하여 역사의 변화와 성경 신학의 방법론에 따른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과 관련을 지으며 점검되어야 한다. 천년왕국에 대한 구절들을 정독해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중요한 구별이 드러난다. 많은 성경구절들은 천년왕국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왕국에 대한 성경구절을 가장 합리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의 왕국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왕국들이 상호간에 완전히 구별된다는 거짓된 사상을 경계하기 위하여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토론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왕국으로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 중보적인 왕국, 중보적인 왕국의 영역 내에 더 한정적인 영역 교회, 이렇게 세 가지 영역이 있음이 명백해 진다.
5. 중보적인 왕국의 역사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언급할 때는 그것은 자기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의미한다. 이 중보적인 왕국이 영원하고 우주적인 왕국을 실현함에 있어서 첫 번째로 나타나는 양상인한 이 중보적인 왕국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구절들은 우주적인 왕국에도 마찬가지로 해당할 것이다. 이 중보적인 나라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펼쳐지나 이 왕국의 연한에 대해서는 성경의 맨 나중 책에서야 비로소 계시된다. 역사 속에서 이 중보적인 왕국을 건립하기위한 준비 작업은 천지창조 때 시작되었고 그 기원을 출애굽하여 시내산과 광야에서 머물 때를 지나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기간을 지나 열 왕들의 실패의 시기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래의 이상적인 왕국을 약속하도록 인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배교와 타락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으로 그들을 떠나게 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이스라엘 나라는 이 중보적인 왕국과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고 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이 중보적 왕국은 회복 될 것이며 예언서는 이 미래의 왕국의 전조가 될 어떤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6. 예언서에 나타난 천년왕국 실제적으로 여러 역사적인 상황들은 이 중보적 왕국에 관한 예견적인 예언이 성취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구약성경의 예언은 모세 오경에 산재되어 희미하게 언급되어 있는 어떤 내용과 더불어 시작되며 그 대부분은 이 중보적 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왕국이라는 단어는 모든 의미에서 볼 때 여자적인 왕국일 것이다. 이 왕국은 사람들이 투쟁하나 결코 얻지 못할 그런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이 왕국은 지상에 세워진 모든 나라와 같이 특히 이스라엘왕국과 같이 실제적일 것이다. 이 중보적인 왕국의 현현도 여자적이다. 도래하는 이 왕국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왕 즉 여자적으로 신인 동시에 사람은 그런 인격이다. 그에게 한 영광이 둘러질 것인데 그는 우주에 있는 어떤 것도 감히 그의 진가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그런 분이다. 이 중보적 왕국의 정부형태는 군주체제이다. 이것 또한 여자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 중보적 왕국의 외적인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현상적이다. 인류사상 지금까지 어떠한 정치구조도 이와 동일하게 기획되지 않았다. 어떤 실제의 한 나라의 모든 양상을 살펴보면 이 중보적 왕국의 본질적인 특성이 규정지어질 것이다. 영적인 통제의 열매는 윤리적인 행위로 나타날 것이며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제도는 이 기간 동안에 운영될 것이다. 저주로 인한 재화는 대부분 일소 될 것이고 그 결과 물리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인 변화가 이 왕국을 특정지어 준다. 예루살렘은 민족적인 분쟁을 조정하는 도성이 될 것이며 그 행정 중심부의 권위는 주권적이고도 불변적일 것이다. 이 왕국의 치리자가 왕이며 동시에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름에 따라 종교적인 정화현상이 엿보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며 모든 관점을 조화시키는 완전한 국가관이다.
7. 복음서에 나타난 왕국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놓은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 이 중보적 왕국은 신비스럽다. 이 왕국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언한 내용이 복음서에서 많이 발견된다. 조심스럽게 연구해보면 복음서에 나타난 왕국과 구약성경의 예언서에 나타난 중보적 왕국이 동일하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복음서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이 왕국과 구약 선지 서에 나온 왕국을 연관 짓는다. 구약의 예언서가 보여주는 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사역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왕국의 다양한 양상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 왕과 그 나라를 거절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자기왕국의 배척당함이 불가피했음을 깨달으셨으므로 이 일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제자들을 준비하시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는 그 왕국이 배척당하는 기간 동안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방향전환의 계획을 제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일을 위하여 스스로 예비하셨을 때 그의 교훈 중 중요한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는 이 왕국을 세움에 있어서 지체함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 왕국과 이 왕은 너무나 완전히 동일성을 띠기 때문에 그를 배척함이 곧 그 나라를 배척함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는 이스라엘에 의하여 완전히 배척을 당하는 경험을 했다. 이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은 마지막 유월절에 잘 묘사되어있다.
8. 현 시대에서의 그 왕국 현 시대는 이 중보적 왕국에 대해 변이 기간으로 간주 된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뒤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확신시키기 위하여 신자들에게 새로운 확신이 주어졌다. 이 왕국을 선물로 주셨다는 다른 증거가 또한 이 변이기간 동안 일어났다. 여기서도 복음서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유대인 중에는 그 왕과 그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에 대하여 점점 반대하는 무리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 왕국은 여전히 바울이 했던 대로 선포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 경륜의 일부분이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이 왕국에 참여하는 행위는 오늘날 교인들에 의해 경험되고 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이 땅에 가시적이고 유형적인 왕국의 설립이 있기 전에 실제 그 나라로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왕국의 현재의 형태는 그리스도에 의해 신비와 비밀로 묘사 되었다.
9. 이 왕국의 실현 이 중보적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바로 그때에 그에 의해 시작될 것이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왕국을 설립하시며 자기에게 위임된 권위를 행사하실 것이다. 그때에 이 중보적인 왕국은 그 모든 측면에서 실현될 것인데 신약 성경에는 이 왕국에서 일어날 엄청난 변화에 대해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서에서 찾아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에게 이러한 변화들이 구약의 예언서에 나타난 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다. 이 사역이 완수될 때 그는 자발적으로 이 왕국을 아버지의 수중으로 바칠 것이며 이 중보적인 왕국은 영원한 상태로 돌입할 우주적인 왕국과 합병할 것이다. 그때 거시에는 세세토록 유일한 보좌만 있을 것이다.
* 역사적 전 천년기설자의 비판 - (죠오지 엘돈 래드) 호이트의 천년왕국에 대한 정의에는 뚜렷하게 세대주의적 색체를 띄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호이트가 어떻게 이 중보적 왕국이 이스라엘에 의해 배척당하자 정지 되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지 그것을 알기 어렵다. 호이트가 간과한 세대주의 특징 중에 현저하게 중요한 점은 천년왕국기간동안 유대주의의 부활문제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예루살렘성전의 재건과 끝없이 반복되는 피의 제사가 포함되는 구약의 전체의식의 회복을 의미함을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호이트는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그의 왕국개념이 구약성서에 나타난 그것과 다르다고 암시한 적은 없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는 복음서의 메시지를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이 왕국이 종말론적인 능력과 영광으로 오기 전에 그것은 뜻밖의 형태 로 이미 인간에게 임한 것이다. 내게 있어서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신비” 계시된 비밀이다.
* 후 천년기주의자의 비판 - (로뢰인 뵈트너) 나는 호이트의 천년왕국에 관한 해석에 대답하려고 노력하면서 선지 서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고 나 자신의 관점에서 이 세대주의 체계를 논박하며 또 성경이 실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을 보여주는 어떤 근본적인 원리들을 제시할 것이다. 기독교회의 내부에서만 권위를 지닌 문서인 신약은 새 언약으로 불리어야 한다. 계약이란 임종 시의 유언서나 유언장에서와 같이 임종 시의 말이나 최종적인 성격을 띤 재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은 예수의 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레미야를 통해 온 약속이 성취되었을 때 주어진 새 언약이다. 구약성경에서 어떤 약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래에 다시 모아지며 그 고토가 회복된다는 내용에 관해서 한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약속들은 항상 순종을 조건으로 한 것이라고 명백하게 공언되거나 분명하게 암시되었다.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배척당하셨을 때 그는 배교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장로들을 폐하시고 새로운 직책인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자기의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그가 다시 오실 때에 어떤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님을 배우게 된다. 그는 초림 때에 한 왕국을 세우셨고 지금은 그것을 다스리고 계신다. 즉 그는 지금 자기의 중보적 왕국 안에서 다스리고 계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현재의 중적 왕국과 영원한 왕국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한 하나님으로서 다스릴 그 나라와 합병하기 위함이다.
* 무 천년기주의자의 비판 - (안토니 에이 후크마) 호이트의 논문에서 내가 동의 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가 진술한 입장과는 의견을 달리한다. 내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 해석의 방법이다. 호이트는 자기 자신이 주장한 해석원리, 즉 “성경을 여자적이고 평범한 의미로 취급하는” 원리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인들의 장래가 이스라엘인은 아니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장래와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있다. 호이트의 논문에서 발견된 다섯 가지는 성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배격해야 한다. 1. 구약성경은 천년동안에 걸친 그리스도의 통치를 예언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구약성경은 이러한 천년동안의 통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2. 호이트의 논문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명확하게 구별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장래는 교회의 장래와 아주 다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방인신자와 유대인 신자가 한 권속임을 보여준다. 3.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들은 항상 여자적으로 해석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그 자체는 이러한 원리를 배격한다. 신약 성경은 구약성경의 여러 가지 개념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고 마르틴 원가아든은 지적했다. 4. 미래에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서 열방 중에 중심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이 미래에 하나의 국가로 회복된다고 예언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죄 사유하심으로 성취되었음을 말한다. 5. 중복적 왕국이 유일한 미래이다. 그러나 이 중보적 왕국이 유일한 미래라고 말하며 이 왕국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시작되었음을 부인한다는 것은 성령의 가르침을 매우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죄가 된다. 하나님나라가 현재적인 실제일 뿐 아니라 미래적인 실제라는 사실은 바울의 말을 들어보아도 명약관화하다. 그러므로 중보적인 왕국이 단지 미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정당하게 다룬 것이 못된다.
제 Ⅲ부 후 천년기설
후 천년기설은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의 전파와 각 개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구원사역을 통하여 지금 확장되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는 마침내 기독교 화되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소위 천년왕국이라 불리는 의와 평화의 긴 한시대의 말기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말론이다. 따라서 후 천년기설자들이 기대하는 천년왕국은 현 세대, 즉 교회시대동안 누릴 영적으로 번영된 황금시대 이다. 이 왕국은 지금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향력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이왕국은 무한이 긴 시간, 아마도 여자적 천년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다.
1. 부적당한 용어 우리가 이 문제를 토론하면서 직면하는 한 가지의 난제는 부적당한 용어이다. 후 천년기설자들은 현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그런 황금시대를 기대하고 있다. 현 시대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점점 기독교로 개종함에 따라 천년왕국시대와 병합하고 있다. 반면에 전 천년기설자들이 기대하는 천년왕국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왕으로 직접 그리고 가시적으로 통치함을 포함한다. 이 왕국은 오랜 기간에 걸쳐 회개한 개개의 영혼들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급작스럽고 불가항력적인 능력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 천년기설자들은 후 천년기설이나 전 천년기설의 개념을 배격한다. 그들은 보통 그 단어가 뜻하는 대로 천년왕국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만족스럽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자체가 무언가 부적당하고 오도적 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적절한 용어를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세 학파는 천년왕국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2. 구원받은 세상 후 천년기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보편성을 강력하게 강조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효의 인류들의 구원을 위한 소망이 예비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급되지 않은 수백만의 이류를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수효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는 사상은 성경에 묘사된 대조법에서도 성취되어 있다. 우리가 모험삼아 추측한다면 구원을 얻은 무리들은 자라서 번창하는 나무의 원줄기와 같고,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잃어버림을 당한 무리들은 잘라내어 불속에서 사라지는 작은 나무줄기나 가지에 불과하다. 이것이 후 천년기설이 제공할 수 있는 안목이다.
3. 이 세상에서의 영적이 전진 이 세상에 대한 구원사역은 길고도 느린 과정으로 수세기를 통하여 뻗어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해진 결승점을 향하여 다가서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신 이래 지나온 2000년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참으로 거기에 기적적인 진보가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영적인 전진이 있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는 높은 수준에 달했다. 기독교의 원리는 여러 나라에서 생활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이전의 그 어떤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부요가 교회에 헌금되고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시대까지 성경은 다만 성직자들을 위하여 존재해 왔다. 오늘날 성경은 부분적으로든 전체로든 세계의 98% 방언의 사람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확실히 이것은 큰 진전으로 미래의 기독교 뼈대를 세울 매우 광범위하고 본질적인 초석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라디오를 통해 세계의 모든 주요 언어로 방송되고 있다. 성경이 언급하는바 천년왕국이 수반할 거대한 물질적 번영은 주로 그 시대의 높은 수준의 도덕 및 영적인 삶의 자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타락 이전에 인간에게 부여된 숙제, 곧 인간이 땅을 적절하게 관리하면, 식물과 동물의 생명은 인간에게 유익을 줄 수 있도록 회복 되는 쪽으로 진일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번영이 아무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풍성하게 와도 그것은 여전히 이미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나마 기독교 화된 나라들을 특징지어주고 있는 도덕적 및 영적인 번영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천년왕국의 도래는 여름이 오는 것과 같다. 그 보다 훨씬 느리게 올지 모르지만 훨씬 더 장관을 이루면서 온다. 천년왕국의 도래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교회사의 다른 모든 각 시대의 법칙을 따를 것이다. 즉 점진적으로 그리고 불확실하게 천년왕국에 닿을 것이다.
4. 성경 해석의 원리 각 천년왕국설은 복음적 신앙에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고 또 지금도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명하다. 전 천년기설자들은 여자적인 성경해석에 강조점을 두며 성경을 쓰인 그대로 취급한다는 태도에 긍지를 가진다. 후 천년기설자들이나 무 천년기설자들은 신구약성경의 대부분이 의문의 여지없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주어졌음을 염두에 두면서 상징적인 해석의 원리에 반대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해석이 낫다는 증거가 있으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상징적인 언어로 쓰인 많은 다른 구약의 예언들을 인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대부분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여러 가지 예로 볼 때 성경의 어떤 구절들을 여자적으로 취급해야 할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취급해야 할지 그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렵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들이 주장되어 왔고 또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사람으로 그의 진지한 진리에의 탐구 자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의 견해차가 편벽되지 않는 주석과 친근한 토론으로 항상 다루어질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 정통성 여부의 시금석이 되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교적 본질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될 이러한 천년기설의 견해차는 실제에 있어서 교회를 나누고 성도사이의 교제를 방해하는 심각한 요소가 되고 있다. 교회가 위대한 다른 신앙교리처럼 이 문재를 거론해 왔고 또 이러한 결론들을 기독교회의 신조형태로 구체화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종말론에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따라서 본질적인 면에서는 하나로 일치하고 비본질적인 면에서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역사적 전 천년기설자의 비판 - (죠오지 엘론 래드) 위의 논문은 성경자체에 거의 호소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비판할 건덕지가 없다. 뵈트너는 전 천년기설을 세대주의 용어로 정의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나의 논문이 보여주듯이 나는 뵈트너가 “전 천년기설자”들에게 그 잘못을 돌린 그런 여자적 해석법을 추구하지 않는다.
*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자의 비판 - (헤르만 에이 호이트) 뵈트너는 후 천년기설을 현재의 교회세대기간동안에 이루어질 영적인 번영, 곧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떤 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번영의 황금시대를 기대하는 견해라고 성급히 정의한다. 이 말은 이 천년왕국이 아직 미래에 있음을 의미함이 틀림없다. 주님의 위대한 위탁명령이 복음을 우주적으로 선포하도록 재촉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다. 그리고 구원의 준비과정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부분의 인류가 구원함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견지하는 뵈트너의 생각도 옳다. 뵈트너가 긍정하는 바대로 (슥 9:10, 계 7:9-10) 이런 구절 속에는 이세상이 점점 개선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성경에 비추어서 조심스럽게 측정되어야 한다. 뵈트너는 그의 논문을 해석의 원리를 거론함과 더불어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바로 이 점에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영해법을 변증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그는 성경해석 문제에 있어 문자주의를 부인해야 한다. 세대주의자는 성경에는 상징적인 말들이 많이 사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왈가불가 하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는 그러한 상징적인 구절들을 그 문맥 또는 동떨어져 있는 다른 문맥이 요구하는 대로 해석하는 것이 여자적인 해석법이라고 주장한다. 종말론은 다른 신학영역에 영향을 끼칠만한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야에 속하는 여러 가지 견해들은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다.
* 무 천년기설자의 비판 - (안토니 에이 후크마)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가시적으로 재림하심과 심판,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의 방법 등은 동의하지만 천년왕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 이 저자와 의견을 달리한다. 뵈트너의 논문에 대꾸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가 요한 계시록 20: 1-6에 대한 그의 해석 방법을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없으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뵈트너는 자기가 기다리는 천년왕국의 황금시대가 요한 계시록 20: 1-6에서 가르쳐 지고 있음을 믿고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다. 실제에 있어서 뵈트너는 자기 입장을 위하여 두 가지 주요 주장만 내세운다. 먼저는, 구원받은 자들의 수효가 잃어버린 자들의 수효를 훨씬 능가하리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은 점점 향상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자들의 수가 버린 자들의 수를 능가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 또 어떤 사람이 이세상은 참으로 점점 향상되고 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 할지라도 이런 사실이 이세상은 천년왕국적 황금시대를 향해 전진해 가고 있음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볼 때 뵈트너의 논문에는 대 배교사건, 대 환란 혹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언급한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뵈트너의 천년왕국관은 비록 매력적이기는 하나 성경에 굳건하게 기초하고 있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제 Ⅳ부 무 천년기설
1. 요한 계시록 해석법 무 천년기설적 천년왕국설의 배경을 살펴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요한 계시록 해석법에 대한 문제와 관계해야한다. 내게 매우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요한 계시록 해석법은 윌리엄 핸드릭슨의 그의 요한 계시록 주석에서 옹호한 점진적인 평행법이다. 이 해석법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은 상호 평행적인 내용을 지닌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며 그 각각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그의 재림사이의 교회와 이 세상을 묘사하고 있다. 비록 이 일곱 구획이 상호 평행하지만, 이것들은 또한 상당히 종말론적인 점진성을 계시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이를테면 제일 마지막 구획은 우리를 다른 구획들보다 더 먼 미래로 인도한다. 이 일곱 구획 안에는 구획 각 개별적으로 뿐만 아니라 요한 계시록 전체적으로 종말론적인 점진성이 내포되어 있다.
2. 요한 계시록 20: 1-6의 해석 이 구절은 분명하게 1-3절은 사탄에 결박에 대하여 4-6절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목 베임 받은 자의 영혼들이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장면에 대하여 서술한다. 요한 계시록 20장 1-3절에서 사탄의 결박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악마 혹은 사탄”으로 신원이 명백하게 밝혀진 그 용은 천년동안 결박되었다가 소위 무저갱이라는 곳으로 던져 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탄을 결박하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천년이 차기까지 열방을 더 이상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 20장 1-3절에 기록된 사탄의 결박 상태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복음시대 동안에 사탄의 영향력이 너무나 축소되어 사탄은 이제 복음이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는 것을 방해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현 시대 동안에 사탄이 결박되었기 때문에 열방은 교회를 정복할 수 없으나 교회는 열방을 정복하고 있다. 4절에서 요한은 심판할 권위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 보좌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보좌위에 앉은 이들을 요한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 받은 자들의 영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충성심 때문에 순교당한 신자들의 영혼인 것이다. 가장 논란이 많은 구절은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라는 구절이다. 요한은 이 구절에서 일종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5절 하반 절 “이는 첫째 부활이라.”를 보아서 명백하다. 그런데 이 구절은 분명히 4절에 나오는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림에 대하여 언급한다. 천년기간동안 참으로 그러하다는 것은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구절이 지적해 준다. 여기에 “까지”로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원어 아크리는 여기에 언급된 내용이 전 천년기간동안 유효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제 6절에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 20장 1-6절에 대한 무 천년기설의 해석법이다. 이와 같이 이 구절은 유대인 왕국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상적 통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이미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다스림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시기 사이 기간 동안 다스리는 것이다.
3. 구약예언의 해석법 전 천년기설자와 무 천년기설자들이 채용한 성경해석법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 천년기설자들, 특히 세대주의 학파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소위“여자적인” 해석법으로 다룬다. 반대로 무 천년기설자들은 비록 수많은 구약의 예언들이 반드시 “여자적으로 해석 되어야겠지만, 그와 많은 다른 부분은 여자적인 아닌 방법으로 해석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해석 방법의 차이점을 깊이 다룰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전 천년기설자들이 통상적으로 미래의 지상 천년왕국의 통치에 대한 묘사로 이해하는 두 개의 구약성경구절을 개관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967년에 나온 새 스코필드성경의 이사야 11장 1-11절의 표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될 다윗왕국의 성경과 범위”로 기록 되어 있다. 1절의 각주에는 “본 장은 다윗의 자손이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 세워질 영광스러운 미래 왕국에 대하여 예언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므로 새 스코필드 성경은 이 구절이 미래의 천년왕국시대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분명하다. 새 스코필드 성경의 17절 초반부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기록되어 있고 18절 초반부는 “새롭게 된 땅의 천년왕국에서는 저주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의 편집자들은 17절이 궁극적인 새 땅을 묘사하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반면에 18-25절의 의미를 제한시켜 이 구절들이 마치 궁극적인 새 땅이 오기 전에 임하는 천년왕국만 언급한다고 한다. 우리는 25절 끝부분에서 11장 9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의 메아리 소리를 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여호와의 말이니라.” 참으로 새 땅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아닌가! 누구라도 만일 그가 사전에 자신의 천년왕국에 안경을 끼기만 한다면 여기서 천년왕국을 볼 것이다.
4. 무 천년기설의 종말론 무 천년기설 종말론은 이미 시작된 종말론에 대하여 가르치는 내용과 미래적 종말론에 대한 가르침이다. 1) 이미 시작된 종말론 (1)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이 사시다가 우리 죄의 대속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심으로 죄를 멸하셨고 다시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다. 즉 그리스도는 죄 사망 그리고 사탄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로 말미암아 기초가 놓아 졌고 지금 역사 속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 나라는 다가올 생명세계에 완전히 계시될 것임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다. (3) 비록 최후의 날은 아직 미래에 있지만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금 말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이미 종말론적인 축복의 시작을 맛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4) 요한 계시록 20장의 천년에 관한한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천년왕국에 살고 있다. 이것은 현재 생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이 이 기간 동안 결박되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천년왕국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성도들의 영혼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자기의 육체적 부활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만물을 다스리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2) 미래적 종말론 (1) 무 천년기설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에 대 배도사건, 대 환란, 적그리스도 등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취될 때에는 지금까지 있어온 징조들이 그 강도가 짙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때의 징조”는 현재와 미래 둘 다 관련되어 있다. (2)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 한 번의 유일한 사건일 것이다. (3) 신자와 불신자들의 부활이 천년을 사이로 구분된다는 주장과 서너 가지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세대주의의 견해는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보편적인 부활이 있을 것이다. (4) 고린도 전서 15:51-32에서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 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부활사건 직후에 그때 살았던 성도들은 갑자기 변형하여 영화로운 몸을 입을 것이다. (5) 모든 성도들의 “공중 휴거”는 이때 일어난다. 즉 살전 4:17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부활하여 변화된 몸을 입은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간다는 것이며 동시에 이 영접 후에 이 성도들은 주님과 더불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6) 그 다음 최후의 심판이 있다. 이 심판의 목적은 첫째, 각 개인에게 받을 최후의 운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원수 사이에는 매우 반대되는 성향이 있음을 궁극적으로 공공연하게 지적할 것이다. 셋째, 이 심판은 각 개인이 받을 상급과 형벌의 정도를 드러낼 것이다. (7) 이 심판 후에 영원한 상태에 돌입한다. 불신자들과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 머무를 것이다. 반면 신자들은 새 땅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영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새 땅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비추어 볼 때 가나안 복지와 하나님백성의 미래에 대한 구약 성경의 여러 예언들은 제대로 맞아들어 간다. 무 천년기설자들은 약속의 그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고 이리가 어린양과 더불어 거하며 물이 바다를 넘침같이 이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칠 것 등을 예언하는 구약의 예언들은 단지 천년동안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영원토록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5. 무 천년기설 종말론의 기타 다른 의미 1) 신약과 구약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은혜계약의 단일성이다. 무 천년기설자들은 성경내용의 역사가 뚜렷이 구별되는 일련의 여러 세대로 나누어진다고 믿지 않고 전 역사를 통하여 흘러내리고 있는 하나의 은혜계약을 바라본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역사의 주류를 이룬다. 이 나라는 구약시대에 예언되고 준비되었으며 신약시대와 교회역사기간동안 팽창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내세에 완성될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이 말은 전 역사는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있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목적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4) 모든 역사는 전 우주의 구언을 위한 결승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역사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의미심장한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개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반드시 항상 분별할 수 없지만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가 어떠한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결정적으로 악의 세력을 이기셨다는 것과 그리스도는 지금 보좌위에 계심을 알기 때문에 무 천년기설종말론의 지배적인 입장은 낙관론이다. 그러므로 무 천년기설은 우리에게 현실적이고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해 준다.
* 역사적 전 천년기설자의 비판 - (죠오지 엘론 래드) 나는 후크마의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주해를 제외하고는 실제적으로 그가 서술한 내용전체에 동의한다. 그리고 모든 전 천년기설에 있어서 최대의 난점은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그 절정을 예수의 파루시아 때 일어날 것으로 기술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후크마가 다음의 세 가지 논거에 대한 주해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느낀다. 첫째, 후크마는 계시록 20장에 19장의 내용이 반복 개괄 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19장과 20장은 내용상 연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둘째 논거는, “그들이 살아서”로 번역된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는 죽음후의 생명(부활제외)을 묘사하기 위하여 결코 사용되지 않고 부활 생명을 언급하는 여러 경우에 이 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셋째, 후크마는 계시록 20장 5절을 보통과 다르게 해석했다. 즉 육체적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온 20장 5-6절이 육체적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회피하려는 후크마의 노력은 결코 설득력이 있지 않다.
*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자의 비판 - (헤르만 에이 호이트) 후크마는 윌리암 핸드릭슨이 계시록 주석에서 사용한 점진적 병행 법을 채용하고 있다. 이런 해석법으로 해석하는 초상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끼이는 시간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 이러한 해석법은 그 자신에게는 만족할 만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난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크마는 계시록 20장 1-6절을 거론하면서 본문의 지지를 얻기 힘든 주장을 여러 번 한다. 즉 성경 해석 가는 20장 1-3절의 천년기간과 20장 4-6절의 그것을 동일한 것으로 마음 놓고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20장 4-6절에서 두 번의 육체적 부활로 이해되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 그는 계시록 20장 1-3절에 기록된 사탄의 상태를 거론하면서 사탄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 결박당했으며 십자가의 사역으로 참패당했으며 지금은 상대적으로 그의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복음시대 동안 사탄은 결박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몇몇 성경구절을 인요하고 있으나 이들은 결코 논쟁점의 해결모색에 설득력이 없다. 후크마가 열거한 무천년기설의 의미를 숙고해 보면 마음에 위안이 된다. 고루 미치는 하나의 은혜의 계약이 신약과 구약을 하나의 단위로 묶는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이 하나의 계약 안에는 다양한 국면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후크마는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역사의 중심부분이고 그것은 마침내 영원한 세계에서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이 역사를 전 우주를 위하여 구속사역을 통하여 성취하고 있는 목표 즉 결승점으로 인도하고 있다.
* 후 천년기설자의 비판 - (로뢰인 뵈트너) 무 천년기설에 대한 후크마의 해설은 우선적으로 계시록 20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년왕국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해석하는 그의 방법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칭찬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의 구약성경 예언에 대한 방법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그가 간략하게 지적한대로 계시록 19장 11-21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교회의 진전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20장 1-6절에 대한 후크마의 해석도 내가 믿기로는 본질적으로 옳다. 그러나 후크마는 어떤 표적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이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표적들은 미래뿐 아니라 현재와도 관련을 가진다고 덧붙인다. 그 이유는 이러한 표적들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시초부터 우리와 더불어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러한 표적들을 실제에 있어서 무의미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 같다. 열방으로 복음전파사역은 지금까지 다양한 여러 시대에 걸쳐 있어 왔으며 주의 재림이 임박하다는 표적으로서 유대인의 회개 사건이 있는데 단지 비교적 작은 부분의 유대인들만 기독교로 돌아왔다. 이것은 종말은 아직 요원함을 지적해 준다. 그리고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한 환란도 많았다. 무 천년기설에 대하여 통상적으로 가해지는 반론은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 먼 미래에 있다는 가르침인데 우리는 그의 오심을 위하여 똑바로 “깨어”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반론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사실로 대답해 줄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하여 다루는 많은 책들 중에서 그들 대부분은 주께서 최후에 가시적으로 재림한다는 것을 제외한 다른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비웃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 독서후기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생겨나고 그리고 사라져간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자신이 온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갈 것 또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실제 이들은 자연계의 고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순응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반항하지 않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리라는 위임을 받은 인간들은 그 권한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을 어겼다. 이로 인해 죄에 젖어버린 인간은 타락 후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하신대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취해졌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죄에 대한 징벌을 아들로 대신하게 하시고 그의 공로로 우리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시러 오신 후,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도들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우리의 후생애에 대하여서도 묵시로 말씀에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해 알려진 인간의 마지막 모습과 그리고 주님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시는 그때에 일들을, 그리고 주님과 만나게 될 때의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 하여 말씀을 근거하여 학문적으로 체계를 갖춘 것이 종말론이며 종말론의 한 부분이 천년왕국 즉 천년설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에 천년이라는 말씀은 언급되어 있지만 천년에 대하여 또 그때에 일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정확한 언급을 하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시기와 구원의 때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들과 신약의 말씀들을 천년왕국에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것을 편파적인 해석을 가져오게 할 우려가 있다. 지금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의 시기나 천년왕국의 존재 유무가 아니다. 우리 즉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생에 들어가는 때와 방법보다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소망 없이 죽어야 할 인생들이 주로 인해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가질 수 있으며 확실히 그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확신시켜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말씀에 있는 그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는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때를 소망하며 오늘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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