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몇 가지 교훈
(제임스패커)
나는 “나의 기도의 길”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크게 충격을 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 주제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로봇 머레이 맥케인(Robert Murray McCheyne)의 “한 사람이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다. 맥케인과 마찬가지로 나도, 기도가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영적 척도 방법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다. 나의 충격은 기도에 대해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주제는 내가 상당히 자주 글을 썼던 것이었다.
또한 교사인 내가 그런 주제를 오랬동안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을까? 바로 나의라는 말이었다.
요구된 주제는 나의 기도의 길이었다. 그들은 내가 기도를 잘할 것이니까 당연히 모범이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가정하고 내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묘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내가 나의 기도에 대해 느끼는 것처럼 유약하고 변덕스럽고 서툴게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내가 기도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은 내가 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세상에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은밀한 일들을 과시하는 것은 내 편에서 생각할 때는 불쾌한
노출 행위이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경험들을(오늘날 불행하게 만연되어 있는) 몰래 훔쳐 보는
비영적인 취미에 영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위해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시편 기자(시 66:16)와 같이 하는것과 나의 기도 실행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른 일 -
흥미를 줄지는 모르나 분명히 유익을 주지는 못하는 일종의 스트립쇼 - 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쓰기로 - 즉 내가 기도할 때 실제로 내가 얼마나 잘 이행하고
있는지, 또는 잘못 이행하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내가 따르려고 애쓰고 있는 길에 대하여
쓰기로 - 결정했다.
나는 각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공통요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에서는 짝을 찾을 수 없는 독톡성이 있다는 자명한 이치로 시작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자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시들을 따르기만 하면 우리가 잘못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목공 기술 독습서나 요리책과 같이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기도 설명서는 없다.
기도는 목수 일이나 요리와 같지 않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개인적 관계, 친밀한 교재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를 하는 방법은 우리가 지배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많이 지배하신다.
결혼 지침서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서들은 마치 완벽한 기술이 모든 난제들의 해답인 것처럼 미신적인
맹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기도서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라 노력해야 하는 일들을 제시하는 것
이다. 다른 친밀한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알맞은 방법들을 시행착오에 의해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 의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모함으로 어떤 사람들은 보다 많은 말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보다
적은 말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계속하여 소리를 내어 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의 기도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에 몰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방언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대로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한 기도 법칙은 성경의 지침 내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돔 존 채프먼(Dom John Chapman)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성경의 지침 내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고
우리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기도하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1. 기도의 원리
성경의 기도 지침은 두 종류, 즉 원리와 모범이다.
여기에서 나는 몇 가지 신학적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통한 교통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부와 성령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바를 은혜룰 통해 응답하는 믿음의 실행이다. 이 믿음의 실행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항에 의해 조장되고 촉진된다. 곧 ⑴ 감사와 찬양,
⑵ 고백과 간구와 중보를 불러 일으키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것들에 대한 인식,
그리고 ⑶ 모든 중생한 심령에 존재하는,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성경이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 또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칭하는 기도로 이어지는) 열망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목표는 우리의 뜻을 행하도록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도 자신의 뜻을 더 넒게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약속에 근거하는 간구는 이러한 기도의 진수로, 하나님께서 즐겨 고취하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어떤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르짓는 것은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본능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행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도는 언제나 혼란과 낙심을 대적하여 싸우는 전투이며, 사단과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자발성이 기도의 본질을 이루지만,
우리는 끈기 있게 기도의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집요한 기도의 훈련이 없을 때 기도는 혼잡스러워질 것이다. - 사단은 그렇게 되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한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집중과
하나님의 은사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열망이 없는 현식적인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일이 될 때, 그것은 절대로 진정한 기도가 아니다.
기도가 솟아나는 깨달음과 열망을 주시고, 기도의 말과 생각들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요구
하시는 끈질김을 주시는 성령, 오직 이러한 힘을 주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모든 것이 된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명하는(엡 6:18; 유 20절)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과거에 나는 대화로서의 이 기도의 원리가 잘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나는 내가 과연 옳았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복음주의 전통을 제외하고는, 간구적인
기도 개념보다는 명상적인 기도 개념이 유력한 것으로 보이며, 복음주의 내에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 17세기의 신비주의적 신앙운동) 사상의 물결이 꾸준히 흐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다음의 존 그린리프 휫티어(John Greenlef Whittier)가 지은 찬송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악전고투가 끝날 때까지
주님의 고요하고 은밀한 이슬들을 맺으소서,
우리의 영혼에서 긴장과 압박을 제하시고
우리의 정돈된 삶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주님의 평안의 아름다움을.
이럴 때에 기도는 본질에 있어서 평온을 구하는 요청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루터교의 경건주의자 할레스비(O. Hollesby)의 (기도)(Prayer)라는 책을 즐겨 읽고
추천한다. 이 책에 대해서는 도날드 블로에쉬(Donald Bloesh)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술한 바 있다. :
기도 생활에 존재하는 투쟁에 대한 할레스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생에는 복음주의적 요소보다 정적주의(quietism)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더 지배적이다. 그에게 있어서 투쟁은 괴로운 부르짖음이
아니라 고통 없는 굴복이었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너무나 종종 나타난다. 성령의 역사가 너무 강조되다 보니 인간의 노력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할레스비에게 있어서 기도는 끝없는 전투라기보다는
우호적인 대담이다. 비록 기도의 씨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세상의 혼란과 씨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낸다.
할레스비에게 있어서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자세”, “거룩한 수동성”이다(The Struggle of Prayer, 1980, p.15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지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시도들만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워지고 자신의 권리를 얻으려는 모든 노력까지도 버리라고 요구하시며, 긴장을
푸는 응답이 항상 하나님과의 참된 친교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이라는 사상이 오늘날 매우
일반적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사상이 심히 걱정스럽다고 고백한다.
1940년대 중반에 나는 초심자 그리스도인으로 당시에 유행하는 정적주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
이 사상이 전혀 비실제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내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거의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그때에 나는 성공회 신자 라일(J.C.Ryle),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 그리고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의 저서들과 접하게 되었고, 그 책들은 나에게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인 전투 - 내적으로는 육체와 싸우는 전투이고(갈 5:16, 24), 외적으로는 세상과 싸우는 전투이고(롬 12:1-2; 요일 2:15-17), 이 두 싸움 모두에 있어 마귀를 대적하고 있는 전투(벧전 5:8) - 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이 전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진정성과 활력을 판단하는 척도이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로마서 7장 하반부의 내용에서 면제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고 위의 저자들은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실천적인 표준의 한 진리를 제시해 주었고, 그 후에 폴시트(P. T. Forsyth)가 그의 작지만
위대한 저서(기도의 정신)(The Soul of Prayer)에서 나를 위해 이 진리를 신학적으로 다루어 주었다.
그 진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저항하시는 수가 잇는데 하나님께서 저항
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의 저항을 극복하여 결국 하나님을 더 깊게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더 부요함을 얻는 자리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라는 진리이다(야곱의 씨름과 욥의 외침과 불안한 재판관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이제 나는 수동성 - 지적인, 감정적인, 또한 의지적인 수동성 -을 조장하는 가르침을, 믿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이해한 비영적이며 불건강한 가르침으로 거부한다. 나는 모든 진정한 순종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기도란 우리가 여러 가지 반대와 싸우며 나아가는 부단한 전투라고 본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발전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자신의 불완전과 미완성을
깨달으며, 아무리 멀리 나아갔다고 할지라도 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반세기 동안 이 진리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진리가 소수의 생각으로 잔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2. 성경에 나타나는 기도의 모범들
성경은 수 많은 기도의 모범들 - 150편의 시편들, 주기도문,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바울에까지 이르는
성도들의 기도들 -을 수록하고 있다.
이 모범들을 고찰하며 우리는 성공회의 기도서가 마치 부모들이 자녀들이 성장하기를 바라며 사는
큰 의복과 같다고 말한 토마스 플러(Thomas Fuller)를 생각한다. 똑같은 말을 이 성경의 기도들이
제시하는 행동하는 거룩한 심령들의 표현들에 대해 훨씬 더 큰 진리로써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주기도문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따라야 하는 목표들과 열망들의 귀감을 보여준다. 나 자신의 기도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반복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의 기도는 주기도문에 제시되는 바를 모두 말하고 있는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하나님에게
내가 말하는 일들의 요지가 되었는가?’ 또한 내가 하나님에게 하는 모든 말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느낌에 의해 당혹감에 빠지거나, 말문이 막힐 때, 주기도문의 각각의 절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주기도문을 되짚어 보는 것이(청교도들이 “가지를 분기하는 것”
시편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편들을 적용하는 방법을 찾는 데 항상 흥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회심한 후에 시편들에서 평안함을 얻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내가 앞에서 말했고 시편들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삶을 전투로 보는 견해가 내 머리에는 뿌리를 금방 내렸으나 나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질서 정연, 자의식의 균형, 그리고 자제가 경건의 필수 요소들이라고 생각하는 중산 계급의 그릇된 의식, 대부분의 시편들을 새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오해가 나의 머리와 나의 마음을
훨씬 더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츰 시편 기자들의 도움의 요청, 그들의 불평, 죄의 고백, 침체, 의기소침, 하나님에 대한 찬양,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외침, 하나님께 대한 도전과
헌신,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두는 소망은 내 기도의 감정이 되었다. 지금 나는 이 감정이
모든 사람의 기도의 감정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내가 따르기 위해 애쓰는 기도의 모범은 다음과 같이 목록화될 수 있다.
첫째로, 기도는 대화이다.
나는 인간으로 창조주에게, 종으로 주님에게, 아들로 아버지에게, 친구로 친구에게
(요 15:13-16, 20:17을 보라), 하나님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
둘째로, 기도는 삼위일체적인 실행이다.
나는 성자의 중재와 성령의 능력 주심을 통해 성부에게 기도를 드린다.
나는 적절할 때, 즉 성경이 성자, 또는 성령의 직접적인 관심사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일들에 대해
기도할 때에는 성자와 성령께 직접 기도를 드릴 수도 있다.
셋째로, 기도는 양방의 교제 방식에 있어 인간 쪽의 응답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섬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편지(성경)로 뜻을 전달하시고,
우리는 전화(기도)로 대답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 주님을 직접 뵙고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는 이렇게 진행된다.
넷째로, 기도는 송영, 즉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고 높여 드리기 원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열망은 기도의 핵심이다.
다섯째로, 기도는 두 색조의 언어 형태를 취한다.
즉 기도에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일을 행하셨고, 또 어떤 일을 행하실 것
인가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유발된 찬양은 부족함의 깨달음에 의해 일어나는 간구와 교차한다.
여섯째로, 기도는 성령의 분발시키는 작업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셩령께서는 조금도 어렵지 않게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높여,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도우신다. 통성 기도는 유익하다. 기록들은 청교도들, 감리교인들, 그리고 챨스피니(Charles Finney)와 같은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기도했다고 한다. 한 청교도 목사에게 기도실이 딸린 농원이 있었는데, 그 기도실에서 그는 매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농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가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께 하는 말을 다 들을 수 있었고, 이 기도가 그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기도를 따르기를 주저한다. 은밀한 기도는 은밀하게 드려야 한다(마 6:5을 보라).
그러나 분명히 통성기도는,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곱째로, 기도는 활력의 수단이다.
영적 각성, 활기, 확신은 어떤 제목에 대한 진지한 기도의 불변의 부산물이다. 청교도들은 기도를
여혼이라는 기계에 기름을 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상급이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은 다른 무엇도 주지 못하는 기쁨과 격려를 주기 때문이다.
3.기도의 실용성
매우 실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사형들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할 수 있다.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요청을 해야 하며, 성령의 우리의 기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역들에 더하여 우리로 주님 앞에서 진실을 진술하도록 인도하는 것도 성령의 임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종종 우리는 특별한 인도를 받지 않고 단지 일반적인 말로 필요한 소망을 일으키시고,
우리로 비범한 확신을 가지고 요청하도록 인도하신다.
여기에서 두 가지 개인적인 실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내가 교장으로 있던 신학 대학이 감독의 명령에 의해 문을 닫아야 했던적이 있었다.
우리 공동체는 이 문제를 놓고 하루를 기도하기로 정했다. 그날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정확하게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인가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다른 대학과의 합병을 구체적으로 구하는 것이었는데 너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요청이었다. 당시 나는 이 기도 제목을 아무네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비전을 철저하게 고수하였고, 일 년이 안되어 내가 기도하도록 인도받은 일이
이루어졌다. 할렐루야! 또 한 가지 예는 검사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위해
기도한 일이었다. 암의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상황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내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확신 있게 치유의 기적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이끌림을 받는 것을 발견했다(그렇게 확실하게 치유의 기적을 구한 것은 나의 생에에 있어
단 한 번 뿐이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서 집으로 걸어오며 그 기도를 다시 드리고 있을 때,
나는 그 기도가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계속 조를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내가 듣고 있음을 느꼈다.
월요일 아침의 수술은 암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판명됐다. 다시 할렐루야! 우리는 항상 우리가
기도드리며 구하는 일들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마음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묵상과 기도 간의 연결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며 내가 사용하는 말인 묵상은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것을 준비시켜 주는 유용한 수단이며,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라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유명 인사들과 면담할 때 어떤 의식 절차가 있는데, 그 의식 절차는 그 명사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면담에서 가장 큰 유익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은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악됨과 초라함을 잠시 깊이 생각함이 없이 하나님에게 돌진하여 마구잡이로 우리의 생각에 대해 지껄여대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천박하게 안드는 것이다.
나는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 성경을 읽고, 내가 읽은 내용이 나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나타내는지 충문히 생각하고, 그 비전을 찬양으로 바꿈으로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한 기도의 실마리를 여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입을 열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잠깐 경건한 생각을 하는 것은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질적으로 크게 다르게 한다.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직그히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는 상상으로 응답 못 받은 기도의 몬제에 의해 낙심할 핑요가 없다.
내가 “상상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상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응답이 항상 쌀쌀맞은 “안돼”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의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곧 신자가 하나님 앞에 어떤 필요한 상황을 말씀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행동하신다. 그러나 구하는 것에 대해 항상 동일한 방법으로, 또는 동일한 속도로 행동하시지는 않는다. 그 필요한 것을 충족시킴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실 때에 가장 선하다고 알고 계시는 일을 행하신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이 탄원하는 응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기다리다”는 것임을 보여준다(눅 18:1-8). 따라서 다른 간구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치유해 주시기를 구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고후 12:7-9) “안돼”라는 의미
였지만, 단순히 “안돼”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씀은 바울이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구했던 치유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우리도 하나님께 상황들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것 대신으로 행하신 바가 우리에게 변하지 않은 상황들을 감당할 힘을 주신 것임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이 응답은 단순히 “안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도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답이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기억한다. 나의 열한번째 생일이 다가올 때, 나는 부모님에게 내가
성인용 자전거를 원한다는 사실을 노골적인 암시들로 알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성인용 자전저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시고, 타이프라이터를 선물하셨는데, 그 타이츠라터는 실제로 가장 좋은 선물이었고,
나의 소년 시절에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 되었다. 그것은 훌륭한 부모님의 배려였고, 자전거라는
나의 요구에 대한 가장 등정적인 응답이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닐 때,
우리의 요구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신다.
존 뉴턴(John Newton)은 이렇게 기술했다. :
나는 주님께 구했다.
믿음과 사랑과 모든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주님의 구원을 더 많이 알고,
주님의 낯을 더 많이 찾게 되기를.
주님께서 즉시 어떤 은혜로운 때에 」
나의 요청을 응답하실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주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나의 죄를 정복하고 평안을 주실 것으로,
주님은 그렇게 하는 대신 나로
내 안에 감추인 악을 느끼게 하시고,
무서운 지옥의 세력들이 사면으로
나를 공격하게 하셨다.
“주여, 왜입니까? 당신의 벌레를
죽이시렵니까?“ 나는 떨며 외쳤다.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주님은 대답했다
“나는 은혜와 믿음을 구하는 기도에 은답한다.”
“이 내적인 시련들을 사용하여,
자아와 교만으로부터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고 너의 모든 땅의 기쁨을 꺽음으로,
내 안에서 네 모든 것을 �게 하리라.“
우리는 항상 우리의 기도들에 대한 응답을 감사하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협력 기도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기도회와 같은 보다 넓은 교제(그런 모임이 성경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분명하지만)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료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헌신적인, 같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함께 드리는 기도의 특별한 유익이다. 청교도들은 “가슴속에 간직하는 친구”(bosom friend)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자주 말했다. 곧 우리가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고 실제로 나누는 친구, 그리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가슴속에 간직하는 친구”와 함께 기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청교도들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동반자를 얻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동반자를 전혀 찾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많은 다른 활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여행하는
것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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