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한 이해(Ⅱ)
사도행전 2장 1-13절, 고린도전서 12장 4-11절, 28-31절, 14장을 방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중요구절로 삼습니다. 그러니 먼저 각 구절을 정독하신 후 본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 2: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고전 12:4-11)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4장)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교회가 성령과 성령의 은사에 관해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방언에 관해 불분명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방언을 이해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언에 관한 교회의 견해는 현재도 방언은 존재한다를 인정하는 입장과 현재는 방언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 상이한 견해 앞에서 가장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방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든지 간에 현실적으로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경우가 보편적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오순절 계통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주요 원인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의 계통은 방언에 관하여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바, 방언은 더 이상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방언 은사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 노선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해 나가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
방언이 성경에 처음 언급되기는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이며, 방언이 처음 행해지기는 마가복음 16장 17절과 관련하여 사도행전 2장 1-13절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하셔서 땅에 계신 동안인 40일 기간에 여러 차례(11회)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자신이 살아 계신 것을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행 1:3). 그렇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보내실 성령을 기다리라, 너희가 이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행 1:4-5).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람산에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재차 성령의 강림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는 일이 있을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행 1:8).
이에 따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다락방에서 다른 많은 제자들과 함께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기도를 하며 그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수는 일 백 이십 명에 이르렀습니다. 기도회는 오순절이 이를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그 동안에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하여 사도의 수에 가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다락방에 울려 퍼져 진동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길이 혀 같이 갈라져 나타나서 모든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머물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음을 그와 같은 방식에 의해서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음을 확인하게 하시고 확신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자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거 하였는데, 제자들은 자기가 말하는 말로 하였지만 성령께서는 그 말을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제자들은 처음부터 성령의 이 개입과 사역으로 인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유대인이 사용하는 말이면서 또한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언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순절에 성령 강림하신 사건과 함께 왜 방언으로 말하는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방언이 존재했다고 하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방언을 하게 한 목적이 있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출 23:14-17).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아주 큰 명절인 것입니다. 이때는 성인 된 유대인 남자는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이죠. 그에 따라서 이번 오순절기에도 유대 땅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정한 이방인들, 그리고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 -일부는 이방인- 이지만 그들이 출생하고 거주하고 있는 지방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올라온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말하게 하였는데, 제자들이 말하는 말은 듣는 자들에게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러니까 방언으로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듣는 각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매우 놀라워하고 몹시 신기해하며 다음과 같이 서로 물으며 말하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지금 이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말로 들립니까? 우리는 각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각각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크신 이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행 2:7-12). 이렇게 당시 오순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각각 자기들이 사는 곳의 말로 하나님이 하신 큰 일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유대 본토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본토 말로, 다른 나라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각각 그들이 사는 지방에서 사용하는 말로 들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말인 한 가지 말로 하였지만 성령께서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각각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로 듣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말을 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의 말에 그렇게 간섭하여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신 것이죠. 이것이 사도행전에 처음 언급되고 있는 방언의 성격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 방언은 지방어의 성격을 갖습니다.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만, 하나님은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올라온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그들의 언어인 방언으로 말하게 하여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알아듣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방언을 하도록 능력을 입히우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루살렘에 모여 든 각 나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오순절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한 다락방에서 들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며 의아해 모여들었는데 거기서 제자들의 입에서 자기들의 언어로 증거 되고 있는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대단히 어리둥절해 하였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은 다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인데, 즉 갈릴리 사람들인데 여러 나라의 지방 언어로 말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요. 그들은 서로 수군거려 말하기를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하고 놀라며 의혹을 품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해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락방의 제자들이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하며 조롱하여 넘겨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람들 앞에 베드로는 나서서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방언은 술 취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선지자 요엘의 예언에 의해서 있은 일임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고 승천케 하여 모든 사람 앞에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셨으며, 약속하신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권한을 주셨는데 그 결과 지금 너희들이 보고 들은 광경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입니다(행 2:14-36).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유대인이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증거 하면서 그들에게 회개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구원 받을 것을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 -그 수가 삼천에 이르렀다- 은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그때부터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하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기도회에 함께 참석하여 기도 하는 일에 힘썼습니다(행 2:36-42). 그 전체 설명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 현대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났고 사도들은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우리가 오순절에 있은 성령 강림과 성령께서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에서 보는 대로 이때에 있은 제자들의 방언은 첫째, 성령의 주도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둘째, 각 나라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듣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복음 증거와 관련해서 있은 일이었습니다. 셋째, 복음 증거와 관련하여 계시적 방편으로 일회적인 사건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은 이후에 있은 사도들의 복음 전도 사역에서 있은 방언이나, 교회적 은사로 주어진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시 일어난 제자들의 방언으로 말함은 이후에도 몇 번 더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방언으로 말함의 특징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의 부어주심, 곧 성령 세례를 베풀어 주셨음을 확인시켜 주시는 한 증거의 방편으로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는데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이 있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무엇을 보고 성령 부어 주심을 보았는가 하면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직접 듣고 보는 것에서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행하였는데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행 10:44-48).
다른 곳에서 있었던 경우를 봅니다. 아볼로란 사람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배워서 열심을 다해 회당에서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요한의 물세례가 전부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가 예수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것이 전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를 보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찾아가서 요한이 온 후에 예수께 일어난 일들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볼로는 아가야로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다시 고린도로 갔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아시아 지방을 거쳐서 에베소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몇 사람의 제자를 만나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요한의 물세례만 알뿐이지 아직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는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한의 물세례와 함께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바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상징적 의미일 뿐이며, 요한의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요한이 말한 대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뒤에 왼 예수,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예수를 믿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바울의 이 가르침을 듣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세례를 베풀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열 두 사람쯤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보는 대로 에베소의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함은 성령이 있는지, 성령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바울을 통해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배워 알고서는 예수를 영접하여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가르친 복음에 의해서,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그 능력에 의해서 거듭났습니다. 성령 세례가 임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방언과 예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과연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을 때에 성령을 세례를 받았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표적입니다. 이렇게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있은 방언은 하나님의 큰일을 각 나라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증거 하게 하시는 계시의 한 방편으로 있었다고 하면, 그 이후에 사도에 의해서 복음 증거와 함께 예수의 이름을 믿은 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은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음을 확인케 해 주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을 인정하여 받아들이게 하시는 한 표적으로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
교회 내에서 방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다루어진 일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신앙 교리적 문제로 인해 분쟁 속에 놓였습니다. 파당, 음행, 결혼, 우상제물, 성찬, 은사, 부활에 관한 오해 곧, 무지로 인해서였습니다. 이 중에서 방언은 은사와 관련하여 고린도교회가 잘못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해를 끼치는 부분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부터 14장에 걸치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방언 문제를 다룹니다. 그만큼 방언이 교회 내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 언급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신령한 것 -은사 : 특별한 재능- 에 관하여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도가 되기 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녔는데 지금도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영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될 것인데, 그럴 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몰라 당황할 것인데, 그렇거든 다음의 사실을 잘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신령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며 신령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그들이 받은 신령한 은사를 인하여 예수는 주이심을 신앙고백 하는 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함께 주님의 모이신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선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상에 이끌려서 신령한 은사를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그들의 내세우는 일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이 됩니다. 교회를 이루는 일에 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지 못합니다.
방언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방언의 공통점은 그 성격이 「표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게 하여서 무엇인가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에는 각기 독특한 특징을 짓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이 사도행전에서의 계시의 한 방편으로나, 성령이 임한(성령 세례를 받음) 표적(이적)으로서의 방언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은 ‘교회적 은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은사 방언」인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에 의해서 되어졌습니다. 말하자면 한 성령으로부터 나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롬 8:15-16).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자연적인 육적 재능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데 사용되도록 주어진 재능이기 때문에 ‘은사’, 곧 신령한 재능, 특별한 재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재능입니다. 이는 거듭나면서 타고나는 재능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마다 은사를 지니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은사에 대한 첫 번째 이해입니다.
그리고 은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써 주어졌다는 것이 은사에 대한 두 번째 이해입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나타나는 것이 여러 직임 입니다. 은사는 각 개인에게 있어서 재능으로 주어졌으며, 그 재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 교회적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섬기는 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곧 직분의 성격을 띠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얘기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셨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한 성령에게서 왔다는 말입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직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들은 다 한 주님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직임을 주셔서 일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인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으로서 일하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직임은 어떤 일을 위해 기능, 역할로 주어진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각 은사를 주시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세워 나가는 일로써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교회적 은사로 주어졌습니다. 각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는 은사는 개인 표적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일원으로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지혜의 말씀’은 누군가가 복음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또는 복음의 진리를 더욱 알아가도록, 또는 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권면이나 조언을 해 주는 일을 하는 재능을 말합니다. 마치 노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보듯이 말입니다. 그분들이 해 주는 말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인생을 살아온 경험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니까 산 체험에서 나오는 산지식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터득된 지식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믿고 함께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일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삶에 대한 지혜를 주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지혜를 공급해 주게 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지식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는 재능을 이름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십니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 곧 장차 있을 일에 대한 계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 를 깨닫고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 어떠한 큰 일이 행해질지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믿음을 갖고 바라보며 따르는 것을 이름입니다(참조. 고전 13:2).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병 고치는 은사’란 병 고치는 능력입니다. 이때에 병 고치는 은사는 그것이 개인에게 나타난 것이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병든 사람이 있어 고통을 겪고 있음으로 해서 온 교회에 근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병 고치는 재능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병든 자를 위해 섬겨 봉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온 교우가 병 고치는 은사의 나타남을 인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며 큰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온 교우가 합력하여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더욱 전심전력합니다. 이처럼 병 고치는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시에 나타내시게 한 것입니다. 은사, 곧 재능과 직임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로써 있는 것이기에 성도가 필요로 할 때 나타나지고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그렇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어떤 한 개인에게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병 고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은사를 베푸신 것이지 한 개인의 능력으로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병 고치는 은사가 개인의 능력이 되며, 개인의 의와 자랑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또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주셨습니다. ‘능력 행함’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이름인데 이는 사실 병 고치는 은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권세에서 행해진 것이었으며, 그리고 사도에게서 행해진 것으로서 곧 사도적 권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요, 그 사도는 교회의 초석으로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겨 세워 나가는 속에서 그 권세를 권위 있게 행사한 것이기에 교회적 권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인데, 교회가 각 지역에서 세워진 이후부터는 때때로 어떤 사람에게 사도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셔서 그로 하여금 능력을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행해짐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병듦과 귀신들림은 죄의 현상적 사건으로서 있는 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주어지는 것이며, 사단의 지배로 인한 억압의 고통의 현상으로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시는 일로서 어떤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새로운 능력으로 임하는 현상으로서 이적이 행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으니까 고쳐주고 다시 병드시니까 또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도 귀신을 쫓아내 주었더니 다시 귀신들려 있고 그래서 또 쫓아내 주고 하는 그런 능력이 아닙니다. 의사의 능력으로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에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그가 성령에 의하여 난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현상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행해지는 것을 통해서 기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믿음을 굳건히 하는 유익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특별한 능력을 각기 어떤 한 특정인에게만 행하여 나타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개만 그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능력이 나타나져야 할 자리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그 능력이 나타나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 된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인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에서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행해지게 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이런 은사는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행해져 나타납니다. 그럴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병 고치는 능력, 이적 행하는 능력, 이런 은사는 한 사람에게 개인의 능력으로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가 요구되어질 때, 그래서 하나님이 은사를 나타내셔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셔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만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으로 말미암아 개인 영웅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豫言입니다만 預言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장차 있을 일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일러주시고 맡기셔서 그에 관하여 미리 보고 그래서 앞서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말하는 예언은 예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설교의 특성을 띱니다. 예언을 풀어서 자세히 그 뜻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 자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은 그들에게서 나타나집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은사가 직분으로 주어져 행해졌을 때 그들은 사도였습니다. 선지자였습니다. 교사였습니다(고전 12:28).
하나님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자를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주십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인 각 나라 지방의 언어를 뜻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언어를 뜻합니다. 이 방언이 오순절에 있은 방언과 차이가 있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나 그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나 다 같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언어’라는데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알지 못하는 언어로 방언을 하게 하셨습니다(고전 14:2). 이때 방언 하는 자의 방언은 방언을 말하는 자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방언의 언어가 한 종류의 같은 언어가 아닌 방언 하는 자마다 전부 다르게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방언 하는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비밀 곧, 하나님의 신비한 일에 관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방언을 말하게 하신 것은 그를 영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입니다(고전 14:4). 그러므로 그의 경건한 생활을 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온전히 세워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유익을 주는 도움으로 표적을 보여주시는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때 여기서의 방언에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방언 그 자체만 하는 것 가지고는 개인의 경건 생활을 도와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유익 외에는 교회 전체적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 전체가 거룩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돕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기를 성장시킬 분입니다(고전 14:4).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방언은 그곳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 함으로써, 이후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회개와 믿음을 이끌어내는 표적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있은 방언의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이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 믿음을 가진 어떤 사람에게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이때 은사를 받아 방언을 말하는 그 자신은 믿음이 강화되고 상승하는 유익을 얻지만, 이것이 다른 믿음의 형제들에게 동일한 유익을 이끌어내는 ‘표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방언의 내용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그래서 방언이 믿음을 돕는 ‘표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것이지만, 방언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지금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로잡힘 속에서 하나님과 신비한 일에 관하여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서의 ‘표적’을 보고 있는 것 외에는 그 누구도 방언을 말하는 자가 누리는 유익에 참여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예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하는 편이 교회적으로는 훨씬 더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알아듣는 말로 하기 때문에 아직 믿지 않는 자들뿐만이 아니라 이제 새롭게 신자 된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요,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양심이 찔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다 털어놓은 뒤에 무릎을 끓고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4:22-2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방언의 가치성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고전 14:9).
고린도교회 내에서 행해진 방언은 그 은사가 사람에게 말하는 것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 ‘기도’의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거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고전 14:2). 이때 방언을 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그가 말하는 방언을 듣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므로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은사도 받도록 같이 간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도 같이 간구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로 기도한다면 그는 영으로는 기도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할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도 같이 받아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로도 기도 할 수 있어야 교회적으로 유익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의 은사를 같이 받지 못했다면, 통역의 은사를 받은 다른 사람이 통역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고린도교회 내에서 행해진 방언은 오순절에 있은 방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순절에 있은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로 행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통역자가 필요 없었지만, 고린도교회에서 있은 방언은 각 나라 지방 언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인 알지 못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통역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통역의 은사가 주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로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찬송을 올리며, 감사 드릴 수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고전 14:15-17, 26-28).
이 모두는 방언 그 자체만 가지고는 유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방언을 하면 기도하든지, 찬송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로 하는 것인데, 그 은사에서 보여지고 있는 표적을 인하여서는 자기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을 그 자신 스스로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영적 성장에는 도움이 받는 유익이 되지만 통역의 은사가 함께 행해지지 않고서는 교회적으로는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방언하는 능력을 주시는 것은 다른 은사와 더불어서, 그러니까 다른 은사 -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 와 합력하여서 개인의 신앙의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가게 하시는 것으로서 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몸을 고르게 하는 것과 같이 교회의 부족함을 서로 채워 온전히 만들어 가게 하십니다. 교회를 위하지 않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입니다. 은사는 철저히 교회론적 관계에 의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에서 있은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은사주의자의 발생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에 걸쳐 장황하게 성령과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다룬 것은 고린도교회 내에 성령의 은사에 관해 오해하고 은사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교회를 어지럽히는 은사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베풀어 주신 은사를 개인적 은사로 취급했으며, 그래서 은사를 개인 능력화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지체 개념에 의해 은사를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여러 지체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지체는 모두가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지체들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 곧 은사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모두가 다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 성도 전부에게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은사만을 특별히 고집하여 받고자 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은사주의자가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었습니다. 은사제일주의자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은사 우월주의자도 생겼습니다. 은사 중에서도 특히 어떤 은사를 강조하고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방언 은사는 고린도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그 당시에 방언이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힌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 은사가 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행하여지지 않고 개인의 의, 자랑을 드러내는데 사용이 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방언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고린도교회는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이 문제를 바로 잡아 해결하기 위하여 방언 은사에 대한 교회의 처신을 가르쳤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은사로써 방언 말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방언을 말하는 자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면 그 사람이 영으로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는 말을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자신도 모르니 무슨 유익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니 무슨 유익이 있느냐?, 그러니 방언을 말할 때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같이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를 하는 편이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예언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종합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셨으며, 이 모든 것은 교회 전체에 유익을 가져와야 하고 주 안에서 함께 신앙이 성장하는데 유익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교회의 질서를 염두에 두어 통역이 같이 병행해야 할 것이며,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소리 내어 방언하지 말고 혼자서 조용히 하나님과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방언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셔서 행해지는 것으로 금할 수 없으나,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방언을 말함으로써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일이 되지 못할 때는 결코 방언의 은사가 행해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뒤 안 가리고 방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교회 내에 은사가 행해진 그 당시에도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질서대로 적절하게 행해져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가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게 하기 위해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방언 은사의 현존에 대한 대립되는 두 관점
앞에서 방언을 다루면서 방언 은사가 잘못 이해되었을 때 교회 내에 끼친 심각한 피해를 보면서 방언 은사의 바른 사용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현대 교회가 양분화 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교회에 방언 은사가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놓고 지금도 방언 은사는 행해진다고 보는 교회와 지금은 방언 은사는 행해지지 않는다고 보는 교회로 양분되어 있고 이에 대한 서로의 주장은 교회가 대립되는 관계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하나는 오순절의 영향을 받은 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개혁주의 영향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에 대한 각 파의 주장을 살펴 본 후에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은사의 성질을 이해함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오순절주의 은사론
‘오순절주의’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오순절 사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오순절에 있은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때 성령 세례가 베풀어졌을 시에 제자들이 경험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인 방언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방언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 주장이 됩니다. 그 증거로 오순절에서의 방언을 말함과 사마리아에서의 성령이 주어짐(행 8:2-1), 고넬료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심과 방언을 행하게 함(행 10:44-46),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심과 방언을 행하게 함(행 19:1-6)을 듭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에 있은 성령의 강림을 구원론적 이해에서 성령 세례의 사건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구원하시는 중생과 내주의 원리에서 보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사역을 두 단계로 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성령의 중생케 하는 사역입니다. 자연인이 성령에 의하여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성령 받기 위하여 모인 120명의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거듭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령 세례가 베풀어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있은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토레이(Torrey)는 이 두 과정을 분별하여 말하기를, “성령 세례는 성령의 중생케 하는 사역과는 구분되며 그것에 뒤따라오며 또 첨가적인 성령의 작용이다.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더라도 아직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생에는 생명의 부여가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은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오순절주의의 성령 세례에 대한 기초가 되는데 디 기(D. Gee)는 이것을 요약적으로 말하기를, “신약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서 중생시에 성령이 처음 들어온 이후 신자들이 성령을 그 분의 원래적이고 유일한 인격으로서 특별하고도 인격적으로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체험을 ‘성령 세례’라 부르며 그 목적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부여하는데 있다. 그것에 특징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은사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파 신학자인 윌리암스(E. S. Williams)는 “중생에서는 성령이 주체요 대속의 피가 수단이며 중생이 그 결과이다. 성령으로의 세례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체요(‘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령이 수단이며 능력의 부여가 그 결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디기와 윌리암스에 있어서는 성령 세례가 신자의 생활에 나타나는 두 번째 체험으로서 이를 통해 능력을 받고 보통 방언을 수반하는 체험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의 성령 세례 사건이 반복적인 사건으로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제자들이 경험하였던 경험이 오늘날에도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경험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성령 세례는 곧 방언을 받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그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성령 세례의 불체험과 방언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영향은 그대로 우리네 교회에 미쳐 여기에 의해서 오늘날 성도들은 체험적인 신앙과 그렇게 방언을 받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별 수단을 다해서라도 방언을 받으려고 하는 잘못된 풍토가 생겨났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네 교회의 모습입니다. 방언 신학 ‘방언의 이해와 유익’이란 책(이천수, 도서출판 영성목회, pp.92-93)에서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서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도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는 자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움직이고 일하는 것인데,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고 일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신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생명(운동력)이 와 있고, 믿음을 가지고 몸을 움직일 때 즉,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귀신들린 자에게 나가라고 명하고, 뱀을 집게 될 때,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방언이 나오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지르면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하게 하십니다.”
이런 영향 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가 갖는 생각은 참으로 병폐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방언을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자신도 믿음 생활을 잘 하겠다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모교단 시문에 실린 모교회 전도위원장이 한 말에서 보겠습니다. “…또 십일조에 대한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까워서 드릴 수가 없었어요. 저는 방언하는 사람을 부러워했어요. 방언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는 거다 생각하고 기도했어요. 나에게 방언을 하게 하시면 하나님 나라를 의심하지 않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이 기도를 드리고, 이삼일쯤 지나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2. 신오순절주의
신오순절주의의 역사는 대체로 1960년대 성공회 목사인 데니스 베네트(Dennis Bennett)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에서 시작한 것으로 봅니다. 베네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교회에 잘 나오며 십일조 생활도 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네트 목사와 함께 시무하는 친구 모사가 그 이유를 묻자 그들은 성령의 체험을 받았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를 중심으로 12명이 한 그룹을 만들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목사는 그 그룹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주간을 통해서 성경공부를 하였는데 그러는 중에 베네트 목사는 자기에게 없는 경험이 그룹에는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베네트 목사는 자신도 같은 체험을 하기 위해서 기도했고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두 번째는 짤막하게나마 방언을 하게 되었으며 세 번째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이 나오도록 격려하였는데 갑자기 베네트 목사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말들을 성령이 자신의 입술에 담아 주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네트 목사는 자신의 경험을 교회에 말하였고 이로 인해 논쟁이 일어났으며 베네트 목사는 사임하게 되어 다른 교회로 옮겼는데 그러는 사이에 그의 교회에는 몇몇 신오순절 그룹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순절 그룹 안에 이미 있어왔던 체험과 같은 것이 개신교 교단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린 결과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 비슷한 사건들이 감리 교회와 장로교회, 침례교회, 루터파교회 안에서도 일어났다는 보고가 나왔으며, 로마가톨릭 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후로 신오순절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그리고 독일에서, 세계 각 대륙에 퍼져 나갔습니다. 신오순절주의의 특징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무기력한 신앙 속에서 성령 세례를 바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신오순절 운동은 그 기원을 살펴볼 때 오순절주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쓴 책들은 성령의 체험과 은사에 초점이 모아져 있는데 이 책들을 읽고서 신앙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 해결책을 찾았다고 하며, 이 신오순절주의자들은 그룹을 형성하여 자기들의 경험을 확산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성령 세례, 곧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선물 곧 방언과 기타 은사를 받을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들을 오순절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라고 부릅니다. 이 운동을 주장하는 신오순절주의자들은 기성 교회 안에 오순절의 불을 붙이자는 것입니다.
3.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교회는 칼빈에 의해서 시작되어집니다. 루터가 이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왔던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켜 그 시작을 열었다면 칼빈은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사람입니다. 개혁주의 교회란 가톨릭교회와 구별시키기 위해 붙인 이름입니다. 가톨릭교회를 구교라고 부르며 개혁주의 교회를 신교라고도 부릅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입니다. 칼빈은 마태복음 3장 11절 이하에 대한 주석에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그리스도만이 외적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나타내고자 하는 어떠한 은혜라도 베푸신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피로써 양심을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옛 사람을 죽게 하고 중생의 영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행하시는 전체 구원 사역, 곧 죄를 씻음, 옛 사람의 죽임, 중생 등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오순절의 성령 세례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렇게 장엄한 방식으로 성령을 보내심이 주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감추어진 은혜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요한의 증거를 그것에다 결착시킨 것은 마땅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사도들이 그 자신들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도 거기에는 그가 그의 성령 선물을 충만한 정도로 부어 주심으로써 그의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우주적 은혜가 반영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거두인 바빙크(H. Bavinck)는 오순절에 있은 성령 강림(성령 세례)의 사건에 관한 언급에서 그 사건이 성령의 중생의 사역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날 있은 “성령의 부으심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첫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특수한 능력과 사역들을 수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순절에 있은 방언,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특수한 사건들, 예컨대 사도들이 담대히 말하는 것이나, 믿음의 특별한 힘, 기쁨, 지혜, 예언, 이적 행함 등 이 모든 것은 사도의 첫 시대에 있었던 제한된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에게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는 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언급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를 이루어 가심으로서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들을 능력 있게 이끌고 나가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에 관한 일로서 방언이 있었으며, 믿음이 담대함, 이적을 행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그들이 복음에 지혜 있는 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령 세례인 곧 능력 받음, 방언과 기타 은사를 받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견해인 것입니다.
(방언) 은사에 대한 성경관
개혁주의 교회와 (신)오순절주의자들과의 (방언)은사에 대한 차이는 왜 생기게 되었는지를 방언에 관련된 기록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에서 본대로 이때의 방언은 가깝게는 마가복음 16장 15-8절에서 하신 주님의 약속의 성취에 따른 표적으로, 멀게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맺은 언약의 성취(렘 31:31-34), 그리고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표적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로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것이며, 이로 인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자에게 세례가 베풀어져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시는 계시의 한 방편으로 표적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단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며 적용되는 특성만을 보고 모든 사람에게 반복적 사건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이 그러하듯이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가 지니는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있은 방언은 성령 강림이 어떤 일로서 일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기 위해 표적으로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계시적 성격으로서 주신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에 여러 차례 있었던 성령 세례가 주어졌을 시에 함께 나타난 방언도 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를 회개하고 구원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표적으로 보여 알게 해 준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만 행해진, 성령 세례 받은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진 방언입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방언을 교회적 은사 차원에서 보면서도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를 들어서 ‘믿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따르는 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표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계시적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눈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으로서의 표적이요 이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든지 원하고 구하면 경험하게 하고 그 능력을 소유하여 행사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도 방언이 행해졌는데 왜 오늘날에는 방언이 은사로 주어져서 행해지지 않겠느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표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은사 방언은 각기 그것이 주어진 독특한 목적과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 두 방언이 서로 다른 점은 표적 방언은 성령의 능력이 이적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어느 한 때 나타나진 것이지만, 방언 은사는 성령의 능력이 성도 안에 내적인 재능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목적은 교회에 덕 -은사를 행하여 교회를 섬겨 봉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신앙고백과 증거를 나누어 서로 신앙을 세워 나감- 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방언 은사는 표적 은사와는 달리 여러 은사와 함께 교회에 주어졌는데 그 은사들은 개인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란 ‘안’에서 행해졌습니다. 우리는 각 은사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예배 정황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26-33) 이 말씀은 사도 시대에 고린도에서 행해지던 평상적인 예배였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만이 아니라 계시(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식), 방언, 통역을 행하였습니다. 예배에 이처럼 은사가 행해진 것은 이 모든 것, 곧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해 그들 안에 성령께서 친히 계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임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선물이 곧 여러 은사를 나타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들로서의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따라서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과 여러 은사들은 이처럼 특별히 사도 시대의 교회를 구별하는 특징이었기 때문에 철저히 사도 시대에 속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사도 시대의 교회에만 여러 은사를 나타내 주셨을까요? 사도 시대는 선지자 시대와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문서화되는 기간으로 있습니다. 사도는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는 성경 기록자였습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성경을 통해서 온 인류에게 밝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구원받는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서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하여 나타내 주는 일을 했으며, 그 예언의 역사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선지자에 의해서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는 선지자가 예언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입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위에 세워진 ‘교회’에 의해 증거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증거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 신앙을 전승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곧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어 기록한 성경에서 사도들이 가진 신앙을 전승 받아 계승해 나가는 일을 합니다.
성경 기록이 종결 될 때까지 하나님은 교회에 여러 은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통해 봉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여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성경 기록이 완성 될 때까지 교회 안에는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은사가 계속해서 베풀어질 필요가 남아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난 자들에게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교회의 온전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이 종결되어 완성되고서는 그러한 은사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교회 안에서 행해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종결되어 완성되고서는 이제는 성경에 의해서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풍성함에 이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권위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증거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알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충족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성경 외에 다른 것에서 은사를 찾는다고 하면 그 은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이 모든 은사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표적으로 주시기도 하셨고, 은사로 주시기도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표적과 은사의 완결로 주신 것이 성경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도 시대의 교회 이후인 이제는 은사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신 은사의 종류(은사의 종류는 고린도전서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한 은사 외에도 더 많은 은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는 사도가 활동하던 당시 시대의 교회를 특징짓는 것으로서의 역할과 목적을 띠고 있었으므로, 사도가 맡은 사명을 다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일을 위하여 필요했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게 만들어 가시는 계시적이고 이적적인 성격을 띤 은사도 함께 중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이것은 은사 그 자체와 은사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마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대표적인 은사로 언급되고 있는 병 고침과 귀신 쫓아냄 등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믿음을 주시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을 통해서 누구든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었듯이, 이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각 지체된 자가 성령으로 난 자임을 서로 확인케 하고 또한 서로 돌보아주어서 온전하게 몸을 만들어 가게 하는데 서로 유익을 끼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은사는 그것이 필요시에 각 사람에게 특징 있게 주어져 나타나져서 서로 섬김으로 교회에 유익을 끼치며 교회에 덕을 세워나가는 일로 있었으며, 이러한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을 두신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고전 12:27-28).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들, 다음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 남을 돕는 사람들, 함께 교회를 섬겨 가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사람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각 은사는 모두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사도가 될 수 있거나 선지자가 될 수 있거나 교사가 될 수 있거나 이적을 행할 수 있거나 병을 고칠 수 있거나 방언을 할 수 있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교회를 온전히 섬겨갈 수 있도록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각 사람이 맡아서 해야 할 역할에 따라 각각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으로서 말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사를 직분의 성격 속에서 다룬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기능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누리는 유익 안에서 은사를 사용한 그들 자신들이 함께 기쁨을 지닐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 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점차 계시적인 성격을 띤 표적의 차원에서 고린도교회의 은사에서 보듯이 봉사적인 성격이 강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 세상에 점차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각 구성원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섬겨가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 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성도)를 섬기는 봉사에 의해서입니다. 교회(성도)를 섬기는 봉사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그대로 남아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난 자는 누구나 교회를 섬기는 재능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함께 만들어져 가는 일에 그 재능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엡 4:1-16). 이것은 말입니다. 본능적으로 행해지며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 의 식 속에서 말입니다.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여러 은사보다 더 나은 것을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여러 은사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였고, 여러 은사들은 부분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온전해질 때 온전하지 못한 이 모든 은사들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은사들이 보여 주어 말해 주려고 했던 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서 은사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사랑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시대 교회 이후에 가장 큰 은사는 성경입니다. 교회에 가장 큰 은사로 오랜 역사 속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문서로 기록해 오셨던 성경을 사도에 이르러서 그 기록을 완성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자는 교회를 섬깁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시대 교회에 주어졌던 은사들은 종류별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은사 그 자체와 은사의 속성은 여전히 교회 안에 남아 있습니다. 사도 시대 교회 이후에는 이제 은사는 ‘섬김’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교회를 섬기는 은사(재능)를 주셨습니다. 교회가 성도의 신앙 성장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는 성도의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지 간에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적으로 섬겨 돕는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적성에 맞추어서 적성에 맞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헌신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교회 속에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섬김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 (신)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은사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은사주의’ 이 자체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만, 오순절식 은사주의는 분명히 잘못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식의 은사는 사도 시대 교회 이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습니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든지 나타내십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과 성도의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어떤 사람에게 이적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란 공적인 성격이 온 세상에 드러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이적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것을 계속해서 행사하는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이적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은사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첫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성경 기록이 완성되어 종결된 후에도 계시의 방편으로 행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계시의 유일한 방편으로는 성경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때에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로서 병 고침도 있고 귀신 쫓아냄도 있다고 하면 방언도 있을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지혜의 말씀이며, 지식의 말씀이며, 믿음이며, 방언이며, 통역이며, 예언입니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 하는 ‘언어’와 관련되어 있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하는 가장 신비의 언어로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도들에게 내적 조명이 되어(마음에 비추임이 됨) 밝히 말해지고 교제(성령과의 교통)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기록되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드러냄을 위한 필요에 의해 일정한 때에 한시적으로 행해져왔으나, 이제 성경의 기록이 완성 된 후에는 그 역할과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중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습니다. 맥클로드(Donald Macleod)는 방언, 예언이 계시적인 은사라고 하면서 방언은 예언과 마찬가지로 정경이 형성되는 동안에 교리의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하였고, 그러나 계시가 완성되어진 후에는 방언은 교사들의 성경 해석으로 대치되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둘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사도 이후의 시대에도 이적의 방편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보는 은사에서 병 고침과 귀신 쫓아냄과 더불어 이적의 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적인 능력 행사가 아닙니다. 병 고침과 귀신 쫓아내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사람들에게 말하여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 기간에서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메시야성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와 관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시대 이후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세우신 교회가 어떤 것인지가 온 세상에 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의 능력을 행하여 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생명의 왕 노릇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사람에게 죽음과 죄 아래 있는 현상적인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것들을 다스려 가시는 능력을 보이시면서 알게 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 은사들 중에서 이적의 능력과 관련한 것들은 중지되었습니다.
셋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유일한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경과 더불어서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된 성도들의 다양한 재능이 교회를 섬겨 가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 끝 날까지 지속적으로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방언의 은사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은사는 관심이 없고 방언만을 구하는 것은 구해지고 안 구해지고는 차치하고서라도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에 행해지고 있는 방언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신)오순절주의자들은, 꼭 그들이 아닐지라도 우리 주변에 방언을 하는(듯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된 것이겠습니까? 이 문제에 앞서 먼저 이것부터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방언을 하던지 간에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복음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이 방언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방언을 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던지 간에 지금 우리 눈앞에서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보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 그 자체에 신뢰감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방언을 하게 된 과정을 보면 이것이 전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게 된 것이라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방언을 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방언을 달라고 구합니다. 그때 참으로 비 신앙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강하게 반복적으로 외우는 가운데 방언이 터졌다고 하는 경우를 보는데 어떻게 방언이 사람이 달라고 하며 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응답으로 주시고 합니까?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방언을 구해서 방언을 하게 된 것입니까? 성령께서 어떤 일을 위해 성령의 주도에 의해서 된 것인데 말입니다. 이는 그 후에 사도들이 주님의 명령을 좇아 온 땅에 교회를 세워나가는 복음 전도 사역을 수행하는 중에 있은 방언이나, 또한 세워진 교회 속에서 있은 다양한 은사의 하나인 방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방언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체험과 은사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은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구원론적인 것이었지 은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 세례 베푸심은 그 세례가 지니고 있는 원리를 드러내시는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계시적 의미의 표적으로서 방언이 있었던 것이지 개인적 체험을 갖게 해 주시며 그 체험의 선물로서 방언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데 바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봅시다.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전 12:13)고 하였으며, 또한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누구나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까? 방언을 말하게 한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은사로 주신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방언을 못하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참으로 가당치 않은 틀린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구교를 막론하고, 오순절주의, 개혁주의를 막론하고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단언하건대, 오늘날의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하는 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가 아니면 그런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다른 영에 이끌려서 예수를 주시라고 하는 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열심인 것이 아니라, 다른 일에 열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방언운동이니 신유운동이니 하는 은사주의가 그렇습니다. 이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는 그들이 구하는 방언이나 신유를 허용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게 합니다.
따라서 방언이 하나님이 말하게 해 주셔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단에게 미혹되어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한 예가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 세례 받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은사 우월주의(영웅주의)에 빠지게 되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자기 의가 됩니다. 기도하면 방언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권면 했던 통역이 같이 있어야 하고,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한 것 자체가 무시가 됩니다. 교회의 질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가 어지러워질 때,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 이것은 사단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시라고 할 사람이 없다, 예수를 저주한다”는 말은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를 복음에서 이탈하게 하여 뭐가 뭔지 다시 말해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를 모르게 하는 참 교회로 만들어가지 않는 데에서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방언이란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정욕으로 삼게 하여 실은 가장 성경의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방언을 한다면 얼마나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얼마나 성경을 알아갔느냐, 은혜와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있게 알아갔느냐 하는데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방언에 매달리고 그것만을 신앙의 방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사실 성경으로부터는 가장 멀어집니다. 먼저 방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조차 신뢰를 갖지 않게 되지 않습니까? 단지 방언을 한다는 그 자체에 신뢰를 갖는 것이 아닙니까? 아멘.
(*이상으로 필자의 ‘방언에 대하여’를 끝맺으며 이어지는 아래의 글은 황부일 목사의 방언과 은사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 두 편을 필자가 교정 본 후에 ‘방언과 은사의 원리에 대한 이해’로 한데 묶은 것입니다.)
-----------------
방언의 은사와 은사의 원리에 대한 이해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방언의 은사로 인해서 생겨지는 문제와 그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 방언의 은사를 성경적으로 정리를 해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자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오순절 교파 계통을 통해 성령 세례는 곧 방언이라는 공식을 세워 유행의 운동처럼 온 교회에 퍼트려 놨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교회가 이제는 교파를 초월해서 마치 기독교 신앙의 기준은 방언인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례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장로교회 한 목회자는 교인들이 다 방언을 하는데 목사인 자신이 방언을 못해서 되겠느냐고 고민하는 경우도 실제 있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드물게 몇 몇 교회 빼놓고는 방언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전부요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방언을 받아야 체면이 서고 자랑거리가 생기는지 방언! 방언! 하고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도 방언의 은사를 받는데 사람이 되어서 주는 방언도 못 받느냐”며 방언의 은사를 받을 것을 촉구하는 희한한 방언 공장 기도원도 있으며, 부흥회나 그런 식의 집회에는 의례껏 은사 집회라 하며 방언 부대를 동원하여 마치 방언의 은사를 자기가 주는 것처럼 “방언 받으라!”고 소리치고, 그래도 안 되면 “아멘!”, “주여!”, “할렐루야!”를 몇 백 번 반복하라는 등, 영어로 기도하라는 등 인위적인 연습과 훈련 방식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계에 굉장한 신앙의 증표처럼 유행되어 버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방언의 공통점을 보면 집회를 통해서 체험하는 자들이 많은데 흥분한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분위기를 성령 충만한 뜨거운 상태라면서 이것을 성령의 역사로 하는 방언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방언을 성령 세례, 중생, 심지어는 구원의 증거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이런 방언에는 이단도 사이비도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관이나 영생교나 그 외 사이비, 이단들도 이런 똑같은 방언을 체험하고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한 것은 이런 방언에 열중하는 교회의 교인들일수록 신앙이 건전치 못하다는 점이며, 복음 중심적인 신앙이 아니라 신비적이고 감정적인 신앙들이며, 요란한 집회나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복잡하고 어렵게 여기는 신앙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 먼저 믿음의 원리를 알고 있으면 다 풀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들은 그것을 원리적으로 풀지 않고 당장 느낀 체험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입장만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혼란을 더 야기 시키고 있으며 서로 자기 입장이나 체험 등을 고집하며 다투는 것입니다. 그 중에 방언의 은사는 문제가 많은 것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성령의 은사는 우리에게 내주해 계시는 한 분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뜻에 따라 교회 된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7-11절 참조). 또한 성령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한복음 16장 13-14절 참조),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다시피 오늘날 방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자들이 가진 갈망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유행되어진 이 방언은 교회에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방언을 하는 것으로 자기 자랑삼습니다.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믿음의 삶으로 돌아가고 자라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교인들을 그런 체험에만 묶어놓고 집착하게 합니다. 마치 방언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인양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이 구할 가장 큰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 믿음 생활에 최고로 여기고 신앙의 푯대로 삼는 것에 진정 참된 모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핵심이 오히려 방언 운동 때문에 흐려지고 복음적인 건전한 기독교 신앙이 초점을 잃고 말아 버리는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릇된 신앙이, 하나님 중심의 참된 신앙과 인본주의 신앙이, 말씀으로 구분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변화의 모습과 열매의 신앙으로 분별되는 것이 방언하고 못하고로 구분 지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이 땅에 수많은 순진한 교인들을 참으로 사모해야 할 것을 바로 사모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믿음이 올바르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진리 중심의 신앙을 갈망하며 힘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반복적인 그런 몇 마디를 하게 하는데 빠져들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달려야 할 것에, 참 중심해야 할 것에서 비껴 엉뚱한 것에 빠지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요즘의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하는 방언을 보면 오순 절기에 있은 성령 강림 때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2장 1-11절) 여기서 사도들이 말한 다른 방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의 큰 명절 중의 하나인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는 각국에 퍼져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로 개종한 여러 족속들이 모여들었는데 이 수많은 각처 사람들이 각자 자기들이 거주하며 살던 나라나 지방의 말로 말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도들이 전하는 것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러 오신 성령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리기 위해 사도를 통하여 각 사람에게 나타내신 은사가 방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주로 갈릴리 사람들로 다른 나라나 각 지방 말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에게 증거 되어 전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령은 제자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모인 무리에게 증거 하도록 방언의 은사를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살던 나라와 지방의 말로 말하게 하신 것이 다른 방언이었던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이 담겨진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되고 많은 교인들이 그토록 받아 보려는 방언들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어디 나라 어디 지방의 말도 아닙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신비한 종교 따위에서나 나오는 주술이나 주문 같은 이상한 말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들인데 또한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나라나 지방 말이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은사로 사용 된 곳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방언 외에도 다양한 은사가 각 성도를 통하여 나타났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은사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는 더욱 믿음이 상승하는 성숙한 상태에 있지를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으로 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4장 19절).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곁에 통역하는 자가 있어야만 합니다(고린도전서 14장 5-13절). 방언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나타내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시는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함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만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거니와 통역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없이 방언의 은사만 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에 은사로 인해서 있었던 문제점은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서 올바르게 사용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제각각 이었습니다. 자기 자랑으로 서로 나서서 말함으로써 질서 없이 은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뜻과는 다르게 은사가 남용되고 오용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무질서해졌고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 방언은 그 중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여 이런 방언은 믿는 자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으로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방언과 그리고 그것을 통역하는 말이 지닌 신비로움에서 믿지 않는 자가 듣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하나님은 결코 자기 자랑삼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은사로 주시지 않습니다. 정말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앙이 말씀 중심이 아닌 것이 쉽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복음이 진리에서 이탈되어 있으며 방언 한다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능력을 입은 자인양 자랑하고 그 행하는 것으로 의를 삼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보면 너무나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을 놓치고 남만큼 능숙하게 방언 못해서 안달이니 이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진짜 방언
복음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워필드(B.B.Warfield)는 초대 교회 때 있었던 각종 기적 은사 -병 고침, 능력, 예언과 영 분변 형식의 지식, 방언과 통역의 구변의 능력- 는 사도시대로 끝났다고 합니다. 기적 은사는 사도 시대의 교회를 구별 짓는 특징으로서 철저히 사도 시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성령의 은사로 각 나라와 지방의 말로 들리게 했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냈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 신비한 방언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 한정된 것이었기에 그 이후 시대에서는 중단되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개혁교회)는 방언은 -다른 기적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계시와 연관되어 있는 은사이기에 성경 계시의 종결과 함께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는 견해를 일관되게 지지해 왔습니다.
하기야 오늘날에 방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을 볼 때 사도들이 말했던 다른 방언의 경우만 생각하더라도 이 시대는 외국어를 배울 수도 있고 그 나라 말을 미리 배워서 선교사로 가고 하니까 옛 초대 교회 때처럼 각 나라 말과 지방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가 나타나야만 하는 그런 특별한 상황은 없어진 셈입니다.
또한 이제는 방송의 매개체가 발전하여 한 사람이 연설하는 것이 동시에 몇 개 국어로 번역되어 들려진다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던 사도 시대에 필요했던 방언의 은사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방언 한다는 요즘 어떤 모습에서도 사도들이 했던 다른 방언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비한 방언의 경우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서를 통해 규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나 원하면 받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데다가 이 사람 저 사람이 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표적을 나타내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행해지지 않는 한, 또한 질서 있게 행해지지 않는 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교회만이 아니라 사이비와 이단도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도 그것을 방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상식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성령께서 교회이건, 사이비이건, 이단이건 가리지 않고 방언의 은사를 주십니까? 그렇게 기독교, 비기독교를 초월해서 나타나지는 것이 방언의 은사입니까? 교인을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좇게 하여 배도의 길을 가게 하는 사이비와 이단에도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비록 기독교로 한정할지라도 한 개인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 위하여 방언의 은사를 주고,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 방언 하게 해 주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능력을 받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 표식으로 방언 하게 해 주는 것입니까? 그래서 자기 의 삼고 자기를 자랑하게 합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교회가 성령께 구할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방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은사 문제를 다루면서 사실 우리가 성도로서 해야 할 진짜 방언을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덕이 되는 말, 은혜가 되는 말, 선한 말, 영적 유익을 주는 말, 새 노래, 신령한 찬미 등을 성경은 교회가 해야 할 방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진짜 방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20절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받아야 할 신령한 언어생활입니다. 이 언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말이요 성도끼리는 은혜를 끼치고 영적 유익을 주는 말이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선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그 은혜와 생명을 누구에게나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성도는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신령한 말을 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또한 그런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말인 참 하나님 나라의 방언을 사모하는 자는 얼마나 있으며 이것을 사모하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가르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워져 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사의 원리
은사란 은혜란 말과 의미가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 같이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혜택이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은혜와 좀 구분해서 말한다면 은사는 예수를 믿는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각각 특별한 특기나 재능이나 어떤 역할을 주어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봉사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넓은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재능과 특별한 역할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성령의 은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해 쓰여 지고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영적 유익과 그리스도를 위해 합력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집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세상에서 특별한 재능이나 특기를 가졌다고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써주고 직분 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의만 나타내어 자랑하게 할 뿐 정작 교회에는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성악을 전공한다고 해서 성가대 지휘자나 대원으로 무조건 쓰는 경우나 학교 선생이라고 해서 교회학교를 일선으로 맡기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성령이 주시는 교회 안에 은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사는 여러 가지로 다르게 각자 교회 안에 주어졌지만 그것을 주신 성령은 같고 또한 은사의 직임은 여러 가지나 섬기는 주인은 한 분인 주님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일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2장 4-6절). 그러니까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은사의 원리는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보면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유익은 영적 유익으로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그리고 그리스도를 세우는데 유익이 되도록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한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비한 능력이나 특기나 역할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세상 일반적인 자기를 위한 재능이요 아니면 교회를 혼란케 하려는 사탄이 준 능력이나 역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인들도 무지한 자가 많고 어린아이 같은 자가 많지만 사도 시대의 교회 중 하나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그랬던 것을 성경은 보여주면서 우리를 깨우쳐 주려 합니다. 특히 우리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서 볼 때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신 원리를 보면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교인들에게 골고루 각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남이 가진 은사를 저마다 가지려고 인간적으로 애쓴 것을 봅니다. 특히 남보다 위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가르치는 은사와 남으로부터 집중 받고 놀랍고 신비롭게 여겨지는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특히 오늘날 오순절 계통의 교인들처럼 너나 나나 다 가져보려는 방언의 은사 등을 자기도 가져서 나타내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병 고치는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린도전서 12장 29-30절). 성령은 교회 중에 사도나 교사를 따로 세우셨고 또한 능력, 병 고치는 은사, 각종 방언하는 은사를 교인들 모두에게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가르치는 능력을 은사로 주셔서 직분을 맡게 해 주신 자만이 가르치는 일을 하여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가르치는 직분에 서겠다고 하니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잘못된 신앙으로 실족케 하는 혼란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적이고 자기의 욕망적인 목회자나 교사들이, 지도자들이 교회에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잘못된 신앙의 흐름이 많고 교회들이 외적이고 세속적이고 인간적 중심의 모습들이 많은 것은 성령의 은사로 신앙의 지도자가 된 자들보다 자기가 원해서 된 자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는 오순절 계통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모든 교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방언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증표인양 저마다 받으려고 합니다. 전에는 주로 기도원이나 부흥집회에서 교인들은 의례 방언을 다 받아야 하는 것으로 몰아세웠었는데 이제는 점점 더 확산되어서 교회들마다 방언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거나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너도 나도 방언을 받으려고 하며, 방언을 받기 위해서 별 수단을 다 쓰다 보니까 인위적인 것, 거짓된 것, 이교도적인 것들이 남발되고 기독교 신앙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정작 교인들 모두가 똑같이 함께 받아야 할 은사는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은사로서 그리스도인 모두가 사모해야 하며 갖추어야 할 것들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 이런 은사를 사모하지는 않고 성령이 주시지도 않는 은사를 자랑하려고 하며 자기를 나타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들만 많으니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더 큰 은사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자기가 나타나지고 자랑되어지고 영광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지체에게 주신 선물이요 역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필요를 따라 각 지체에게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 은사들, 가령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섬기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 등등은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나 오늘날 잘못된 교인들은 죄다 자기 욕심이나 자기중심의 뜻대로 남에게 나타나지는 은사만 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즘 모든 교인들이 너나 나나 방언의 은사를 모두 받아 보려고 난리 법석인 것에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들이 다 방언 하는데 목사인 나마 못한다고 고민하는 목회자도 있을 정도이니까요.
많은 교인들은 은사를 마치 도깨비의 요술 방망이나 마음대로 사용하는 주문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의 은사를 받아보려고 갈망하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과 신앙의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원이나 특별집회는 은사 공장이 되고 이름 난 부흥강사들은 이런 은사를 마구 퍼주는 은사 제조사가 되어 있고 수많은 어리석은 교인들은 자기도 그런 은사를 가져보려고 그런 곳을 열심히 찾곤 합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모두가 다 요구하고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는데 그것을 성경은 참으로 사모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말함이요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은사보다 더 나은 것이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모습들이요 참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의 푯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면서 거기에 걸 맞는 합당한 자로 향상해 나가는 모습이 없이 그 어떤 능력의 은사, 남이 알아주고 놀라운 은사를 가지면 무엇 합니까?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고 거치는 사탄의 역할뿐인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이 가진 직분, 특기, 능력, 그런 은사를 따르려 억지를 부리지 말고 먼저 더 큰 은사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모하고 그런 향기로운 자가 되도록 늘 기도해야겠습니다.(*)
'신약 내용!!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약개론 총론 (0) | 2013.09.03 |
---|---|
[스크랩] 신약성경 주요내용정리[27권,260장] (0) | 2013.08.23 |
[스크랩] 요한계시록(Revelation) (0) | 2013.06.26 |
[스크랩] 로마서 개요 (0) | 2013.06.26 |
[스크랩] 고린도전서 개요 (0) | 2013.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