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스크랩] 11세기부터 세계사

하나님아들 2013. 8. 21. 11:53

11세기부터 세계사

 
1037
셀주크 투르크 제국 건국

1054
기독교,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로 분열

1066
노르망디 공 윌리엄 영국 정복

1069
송, 완안석의 신법 실시

1075
송, 3대 발명품(화약, 활자, 나침반) 이무렵 완성

1077
카노사의 굴욕

1096
십자군 원정(~1270)


사마광 : 1019~1086
북송 시대의 정치가. 왕안석의 신법 추진

왕안석 : 1021~1086
중국 북송시대의 정치가.

그레고리우스 7세
로마 교황. 독일황제로부터 '카노사의 굴욕' 받아냄

  십자군원정

 1096~1270년 서유럽 기독교도가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교도의 손에서 빼앗기 위해 일으켰던 동방 원정. 총8차에 걸쳐 일어났다.
11세기 이슬람 유목 민족 셀주크 투르크는 그 세력을 빠르게 확장, 동이슬람제국의 지배자로 나섰다. 1071년에는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 4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셀주크 투르크는 10년 후 시리아도 점령했다. 셀주크 투르크의 세력 확장으로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 세력 한가운데 놓이게 됐다. 기독교는 이를 늘 껄끄럽게 생각했다.
셀주크 투르크는 계속 세력을 확장했다. 투르크 군이 콘스탄티노플 근처로 다가오자 동로마의 알렉시우스 1세는 1095년에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교황은 같은 해 말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에 걸쳐 일어났다. 그러나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1차원정 때 뿐이었다. 나머지는 어처구니 없는 탈선행위로 일관했고 심지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라틴 제국을 세운 일도 있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지를 돌보지 않아 수입이 줄고 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국왕과 상인들은 눈에 띄게 세력을 키웠다. 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국왕은 교황과 제후들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층과 손을 잡았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사회가 지닌 힘을 분출시킨 사건인 동시에 봉건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어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는 서곡이기도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로마교황. 국가 권력이 교권을 지배하는 것에 반대했다. 교황에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 매매의 금지를 제창하고, 세속 권력에 의한 성직 서임권을 전면 부인하는 교황 교서를 발표해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와 대립했다. 하인리히 4세가 독일의 성직자들을 모아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자, 교황은 역으로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선언하고 독일 백성들은 황제에게 충성할 의무를 헤제한다고 명령했다. 독일 제후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선언을 계기로 두 파로 갈라졌다. 반황제파는 일치해 1년 이내에 황제가 파문에서 사면받지 못하면 폐위한다고 결의했다. 당황한 황제는 곧바로 교황을 폐위한다는 말을 취소하고, 1077년 1월 북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으로 교황을 찾아가 3일간 눈 위에 서서 사면을 애걸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하인리히 4세는 다행히 사면을 받게 되자 곧바로 복수를 계획해 원정군을 보내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포위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를 탈출해 피난하던 도중 살레르노에서 사망했다.


나침반의 사용

 중국이 대외 무역을 위해 처음 사용.
중국의 대외무역은 당대가 되면서 왕성해졌고 송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아라비아 상선이 내항했다. 중국과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항로는 원양 항해처럼 오랜 시일에 걸쳐 대양을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연안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상당한 거리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배의 진로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은 예로부터 자침이 남쪽을 가리킨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선원들은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를 항해에 이용했다. 초기에는 물에 띄워 놓은 나무 판자에 자침을 고정시킨 형태로 사용했다. 선원들은 이를 '수침반', 자침은 '지남어'라고도 불렀다.
선원들은 불안정한 수침반의 형태를 극복하기 위해 자침을 고정해 자유롭게 회전시킬 수 있는 현재의 나침반을 발명했다.
나침반은 아라비아에 전해졌다가, 15~16세기에 유럽인에게 전달됐다. 유렵인들은 이를 이용,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됐다.

노르만의 정복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왕위 찬탈을 목적으로 영국을 정복한 사건.
참회왕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국왕의 고문 회의는 웨식스 백작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 2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욤은 자신이 참회왕 에드워드의 사촌이라는 점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북프랑스로부터 영국의 남동 해안에 상륙했다. 기욤은 당시 데인족의 침입으로 영국군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영국의 남부를 평정했다. 그는 1066년 12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윌리엄1세로 즉위했다. 윌리엄 1세는 1071년까지 각지의 반항 세력을 토벌했고 그들이 소유했던 영토를 모두 반역자의 토지라는 명분으로 몰수했다.
윌리엄 1세는 몰수한 영토의 일부를 노르만의 귀족에게 분배했다. 그에게 대항하지 않았던 앵글로 색슨 족의 영주들은 보유 영토를 그대로 소유한 채 윌리엄 1세의 봉신이 됐다. 모든 봉토 소유자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정한 수의 기사를 제공해야만 했다. 윌리엄 1세는 또 1086년 '둠즈데이 북'이라고 알려진 토지 대장을 만들게 해 이를 기준으로 조세촵공물액을 다시 정비하고, 영국의 인간 관계와 신분제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1075 송, 3대 발명품
(화약, 활자, 나침반)

1096 십자군 원정(~1270)

1127 북송 멸망, 남송 부흥

1145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아시아국가의 전성기(11세기~12세기)

서구가 아직 중세의 암흑기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아시아 천년의 시작은 선진국이던 중국과 이슬람 문화가 주도한다. 송의 3대 발명품이 완성되고 서구 근대과학혁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슬람 과학이 꽃피었으며 중국과 한반도의 주요 사상인 유교가 성리학으로 거듭났다. 12세기말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세워 동으로 태평양 연안, 서로 우랄을 넘어 동유럽에 이르는 인류 사상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1101~1200 (세계)
 
1112
성 베르나르두스, 시토 수도회에 입회, 개혁

1115
금 건국

1125
금, 요를 멸망시킴

1127
북송 멸망, 남송 부흥

1192
일본, 가마쿠라 막부 세움

 


주희 (1130~1200)
송나라의 유학자. 성리학 체계 완성


성 베르나르두스 (1091~1153)
프랑스의 개혁파 신학자.

  금 건국

여진족이 1115년 요를 물리치고 일으킨 나라.
금은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1127년 다시 북송을 무너뜨려 만주에서 화북 일대를 지배했다. 화남에서 다시 일어났던 송과 대치했기 때문에 북조라고도 일컬어진다. 금은 중국에서 정복 국가의 하나로, 정책에 강압적인 것이 많아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사회적으로도 지배자인 여진인과 피지배자인 한인 사이에 마찰이 많았다. 몽골인이 대두하면서 1234년에 멸망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

1192~1333년으로 일본의 봉건주의 기초가 확립된 시기.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독자적인 바쿠후를 세우고 그 본거지를 가마쿠라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199년 요리토모가 죽은 뒤 바쿠후의 실권은 호조 씨 가문으로 넘어갔다. 몽골이 1272년과 81년에 걸쳐 침략하였으나 가미카제가 이를 물리쳤다.
몽골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 재정이 약화되었고, 이후 천황 의 반란과 파벌 싸움 등으로 바쿠후는 1333년에 무너졌다. 무사계급이 등장하면서 할복이라는 자살의식과 검에 대한 숭배가 나타났으며, 무사의 성향에 맞는 선종 (禪宗)이 활성화되었다.
 
 
1206
몽골 제국의 성립

1215
영국, 대헌장 제정

1241
한자 동맹 성립

1254
독일 대공위 시대(~1273)

1265
영국, 시몽 드 몰포르의회 소집

1271
원 제국의 성립(~1368)

1299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출판

 


칭기즈칸 (1155~1227)
몽골 정복자. 몽골제국 건설

아퀴나스 (1225~1274)
중세 유럽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
활판인쇄술 발명

 1454년경 독일 마인츠 사람 구텐베르크(Gutenberg)가 라틴어 성서의 활판 인쇄에 성공한다.
활판 인쇄술은 책의 대량생산 시대를 열어 성서의 보급과 교육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으며, 새로운 사상의 전파와 종교 개혁의 파급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 의미를 갖는다.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사람이 손수 책을 베껴 쓰거나, 한권 분량으로 목판이나 금속 활자본을 일일이 새겨서 찍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 인력, 자금이 많이 들어 상당한 고가에 거래되곤 했다.
구텐베르크가 고안해낸 활판인쇄술은, 필요할 때마다 미리 주물로 떠놓은 낱개의 활자들을 판 위에 재조합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손쉽게 새 책을 인쇄해낼 수 있는 신기술이었다. 1500년 경에는 유럽에 1,000여 군데의 인쇄소가 설치되었고 저렴한 제작비로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로 찍힌 각종 고전 문헌들과 성서들이 일반인에게까지 보급되게 되었다.
당시 제작된 유명한 인쇄물로 1454년의 첫 인쇄물 '쿠텐베르크 성경'이 있다.

신대륙의 발견

 15~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활발히 일어난 신항로 개척과 동방탐험으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됐다.
당시 유럽은 13세기 말경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통해 인도를 비롯한 동양에 대한 신비감이 고조되어 있었고 이슬람에 의해 정상적인 동방무역로가 차단되어 새로운 항로의 개척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침 르네상스로 지리와 천문학 지식이 늘고, 조선술의 발달과 나침반의 사용으로 원양항해가 가능해지자,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다.
1492년 에스파냐에서는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얻은 콜럼버스가 지구는 둥글다는 말을 믿고 인도로 가는 빠른 길을 찾기 위해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한 끝에 지금의 서인도 제도에 도달, 역사적인 신대륙 발견의 획을 그었다.
그러나 그는 총 3회에 걸쳐 이 지역을 탐험하였음에도, 죽을 때까지 인도 근처에만 도달한 것으로 믿었다. 나중에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이곳이 신대륙임이 밝혀져 아메리카라 이름 붙여졌다.
한편 포르투갈에서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6년 아프리카 희망봉에 도달하고, 1498년 마침내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 신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인도항로와 신대륙 발견은 지리적 대발견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신대륙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물을 접하면서 서구인들은 그들의 세계관을 넓혔을 뿐 아니라 발견한 지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 (1254~1324)
이탈리아 여행가. '동방견문록'으로 유럽에 아시아 소개

  몽골 통일, 중앙아시아 원정

테무진은 알타이 산맥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만 부족과 일대 결전을 벌여 고비 사막 주변의 대초원을 수중에 넣었다. 1206년 테무진은 몽골을 통일하고 칭기즈칸이 되었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기마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재정비한 다음 원정을 떠났다. 칭기즈칸이 거느린 군대는 초원과 사막을 건너고 만리장성을 넘어 황하 이북을 수중에 넣었고 1215년에는 금의 수도 북경을 빼앗아 금을 정복했다. 칭기즈칸은 멈추지 않고 중앙 아시아로 뻗어나갔다.
그 후 칭기즈칸은 페르시아, 카프카스 산맥 너머의 남러시아, 크림 반도와 볼가 강 유역까지 진출, 몽골을 통일한 지 20년 만에 유럽의 동부지역까지 손에 넣었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칭기즈칸이 건설한 제국은 알렉산더를 비롯, 세계 그 어느 영웅도 이룩하지 못한 최대판도의 세계제국 이었다.


영국 대헌장 승인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은 1215년 영국 왕 존이 귀족 성직자의 압력을 받아 승인했던 칙허장으로 63개 조항으로 되어있다.
대헌장은 세금징수에 관한 국왕의 절대권을 제약하고, 병역 면제세나 특별 보조금은 봉신 회의의 심사를 거쳐야만 한다는 조건을 명시했다. 가신단의 근무 내용도 정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유민을 체포할 수 없다 등을 규정했다.
또 재산 몰수나 추방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영국 헌법의 기초가 됐다.

아스텍 제국 발흥

아스텍은 1220년경 일어난 남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 제국.
아스텍은 멕시코의 고문명인 마야 문명을 계승하고, 마야 문명을 제압했던 톨텍 문명의 종족에 대신해 일어났다. 호반의 도시 테노피티틀란을 수도로 삼고 부근의 인디언 부족을 지배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사원과 궁전을 건설하고 많은 기술을 자랑했으며, 국왕을 정점으로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켰다. 문자도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농경을 주요한 생계 수단으로 했다는 점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보다 훨씬 진보했다. 그러나 1521년 스페인의 탐험가 코르테스에게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약 300여년에 걸친 신권정치도 무너졌다.
 


1206 몽고 제국의 성립

1215 영국, 대헌장 제정

1236 고려대장경 판각 시작
백년전쟁 발발

 1338~1543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프랑스 내 영국령과 모직물 산지인 플랑드르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
전쟁의 계기는 14세기 초 프랑스에 새 왕조가 들어서는 와중에, 영국이 왕위계승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프랑스 노르망디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초기 전세는 프랑스에 불리했다. 15세기 초 프랑스는 국토 대부분을 영국에 빼앗기고 북프랑스 일대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골소녀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출현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프랑스가 영국군을 몰아내고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봉건체제에서 중앙집권 체제로 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시기 중 프랑스는 국왕이 6명이나 교체되는 혼란을 겪었으나, 백년전쟁의 승리로 통일된 국토를 가지게 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 체제가 발전하였다.
한편 영국에서는 백년전쟁 후 왕위계승 문제로 내란 장미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와중에 제후들이 몰락하면서 15세기 말 헨리 7세에 이르러 중앙집권 체제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흑사병(페스트) 유행

 1347년부터 1350년에 걸쳐 전 유럽을 휩쓴 살인적인 전염병.
당시 흑사병으로 감소된 인구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에 이르렀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통해 후세에 알려졌는데, 크림 반도에 정박했던 이탈리아 선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 제노바, 마르세이유 등지로 급속도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페스트는 부스럼으로 시작되며 전신의 피부가 검푸르게 변하기 때문에 黑死病이라고 불려진다. 흑사병에 한번 걸리면 의식이 흐려지다가 며칠을 지나지 않아 죽게된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이 이 때문에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하여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었고, 봉건 영주들은 농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348년을 정점으로 차츰 세가 약해졌다.

그림설명>>>패스트가 유행하자 도시를 탈출하는 사람들과 시체를매장하는 모습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중세봉건사회의 몰락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교황권이 쇠퇴하던 중,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발행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게시한 것을 계기로 전 유럽에 파문을 일며 시작되었다.
루터는 그의 반박문에서 인간은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해 구원되며, 돈으로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교황청은 루터에 파문을 경고하게 되는데, 루터는 교황의 칙서를 불태우고 이듬해 3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추방당한다.
은신 중에도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성서의 보급과 근대 독일어 형성에 기여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제후들과 자유 도시, 농민들에게까지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후 루터파는 카를 5세와 투쟁을 계속한 끝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성립하게 됐다. , 이로써 사람들은 루터파 교회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통일은 깨지고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교회가 정식으로 성립하게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와 영국에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나 교황권에서 분리된 교회를 인정받게 되었다. 스위스는 루터파의 영향을 받아 칼뱅이 종교개혁을 완성하였다. 영국은 독일과 스위스의 경우와는 달리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장령을 발표하여 교황권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면서 이루어졌다.

마젤란의 세계일주

 1519~1522년, 항해가 마젤란(1480~1521)에 의한 최초의 세계일주.
1519년 대항해시대, 에스파냐 왕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 출신의 마젤란(Magalhaes)이 향신료 산지로 갈 생각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된다. 그는 먼저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아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다시 북서쪽으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 제도에 도착하게 되나, 이곳에서 원주민과 전투 도중 살해된다.
남은 선원들이 인도양과 희망봉을 거쳐 1522년 에스파냐로 돌아온다.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가 이루어졌으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실제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아메리카가 아시아와 별개의 신대륙이라는 것도 명확해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중심설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가 당시 절대적으로 신봉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천동설)을 뒤엎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천체중심설(지동설)을 제창한 사건.
오늘날 획기적인 표현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란 말은 그의 업적이 지닌 역사적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근대과학의 역사를 열고 중세의 세계관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대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코페르니쿠스는 의사로 활동하다 볼료냐 대학 파도바 대학에서 천문학을 더 공부한 뒤 죽기 직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6권)에서 천체중심설을 주장한다.
그는 교회의 반대를 고려해 조심스럽게 이를 표현하였으나, 천체중심설(지동설) 자체가 당시 신부와 신학자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어서 그의 책은 로마 교회의 금서 목록에 오른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중심설(지동설)은 나중에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의 연구로 지지를 받았고, 18세기 말 별 시차 측정을 통해 완전한 진리로 입증되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태동

르네상스는 14세기~16세기까지 문학, 미술,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서 일어난 인간중심적, 사실주의 경향의 새로운 문화사조.
Renaissance의 원뜻은 '재생'. 잊혀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간적인 고전 문화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에 대한 단순 흥미가 아닌, 이전의 휴머니즘으로의 회복을 뜻하며,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성에 대한 저항이었다는데 의의를 갖는다. 중세의 엄격 일변도의 교권주의 종교세력과 봉건적 지배세력이 결탁했던 질서에 대항하여 신흥 시민계급 지식인들이 인간 정신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종교나 집단 속박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존재가 되고, 새로이 인식하게 된 자신의 인간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고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튼, 베이콘, 데카르트 등에 의해 발전된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성서에 기초를 두었던 중세의 신 중심의 사고와 대치되었고, 이런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기계문명과 기술문명을 탄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먼저 고개를 들었고 15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십자군원정(1069~1224)을 거치면서, 베니스, 플로렌스, 제노아 등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이 동서문화의 중심 교역지로 부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고, 문화적 자극과 새로운 사조에 대한 도전의식이 강해지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5세기를 지나면서 외세의 침입과 이탈리아내 정치적 분열, 16세기 신항로의 개척으로 대서양으로 무역의 중심이 이동하게 되면서 시들게 된다.

<르네상스 시기의 문학>

르네상스 시기의 기풍을 인문주의(Humanism)라고 한다. 르네상스의 고전문화 부흥에 앞장 섰던 사람들은 인문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중세 때 잊혀지다시피한 그리스, 로마의 고전 작품을 수집, 정리, 연구하였다. 단테는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씀으로써 새로운 경향을 보였고, 뒤이어 최초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의 보카치오에 이르러 세속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묘사하게 되었다.
15세기 비잔틴 제국의 멸망으로 그리스계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대거 건너오면서, 16세기 초에는 거의 모든 고전작품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정치적 분열로 쇠퇴하자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단순히 고전을 연구와 모방에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와 교회를 비판하는데 사용했다. 당시 독일과 스위스에서 진행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초기 그리스도교에 많은 관심을 보여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라고도 한다. 당대 제일의 인문주의자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간행하고, '우신예찬'에서 성직자와 교회의 타락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특색적인 국민문학의 꽃이 만발.,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는 '동키호테', 프랑스의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 몽테뉴의 '수상록' 등이 나오기도 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도 넓은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가로 포함된다.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

고전 미술을 스승 삼아 고전문화을 부흥하고, 자연과 인체를 세밀히 관찰, 기법상에서 원근법과 같은 혁신적이고도 독창적인 화법이 시도되었다. 새로운 미의 세계를 창조했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으로 이어가며 미술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건축에서도 중세 고딕양식에서 벗어나 그리스와 로마 양식이 절충된 르네상스 양식이 나타났는데,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16세기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르네상스 사조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에스파냐 등의 유명 작가들이 저마다 독특한 화풍을 발전시켰다.

<르네상스 시기의 자연과학>

중세의 신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 우주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려는 르네상스 정신은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폴란드인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 주장으로 중세 우주관에 큰 변혁을 초래하였고, 이시기 중국의 화약과 나침반이 이슬람 세계을 통해 전달되어, 화약과 화포의 사용으로 기사 계급의 몰락을 촉진하였고, 나침반의 사용은 원양 항해를 가능하게 하여 유럽의 해외 진출에 공헌하였다.
게다가 15세기 중엽에 독일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발명되었다는 활판 인쇄술은 제지법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운 지식과 사살의 전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299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1338 영국 프랑스, 백년전쟁

1368 원 멸망, 명 건국(~1644)

1393 조선건국

1394 한양천도

   휴머니즘으로의 회귀-인간성 회복의 시기(13세기~14세기)

 유럽은 십자군 원정(1069~1224) 이후 동방 이슬람교 문화권과의 접촉이 확대되면서 지중해 유역 도시들을 중심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는 르네상스를 이룩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14세기에 이르자 점차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대한 흥미가 재생되면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다. 이무렵 고려는 몽고의 지배 하에 들어가 핍박과 항쟁의 역사를 걷는다.


1443 훈민정음 창제, 반포(1446)

1445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술

1492 아메리카 대륙 발견

1517 루터의 종교 개혁

1543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592 임진왜란 발발

1608 대동법 실시

1636 병자호란 발발

1644 명 멸망, 청 건국 (~1912)

1689 '권리장전' 발표


   탐험과 정복의 시대(15세기~ 17세기)

15~16세기, 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육상 무역로가 봉쇄되자 인도 항로와 신대륙 발견으로 이루어지는 지리적 대발견 시대가 열린다. 세계의 다양한 문물을 접하면서 서구인들은 그들의 세계관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개척에 따른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무렵 조선은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농민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봉건적 신분관계가 변화되는 체제동요를 겪는다.


 
1776 미국독립 선언, 규장각 설치

1789 프랑스대혁명, 인권선언

1861 김정호 대동여지도 간행

1876 벨, 전화 발명

1879 에디슨, 탄소 전구 발명

1894 청일전쟁. 갑오경장

1896 제 1회 올림픽 대회  

 

메이플라워호 미국 도착(1620)

 메이플라워호 미국 도착(1620년) 영국 청교도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간 사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들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영국은 제임스 1세의 전제정치와 청교도에 대한 종교적 탄압, 인클로저 운동으로 야기된 농민들의 실업 등으로 어수선했다. 특히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넓은 신천지로 가려는 욕구를 갖고 있었다.
1620년 8월 5일. 102명의 이주민을 실은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을 출발했다. 이들은 9주 동안의 항해를 거쳐 11월11일 북아메리카 동부에 도착했다.
이 청교도들은 '필그림 파더스'(순례 시조)라 일컬어지며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건전한 생활을 하며 오늘날의 매사추세츠 주에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이들이 바로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선조들이다.

청교도 혁명(1642~1649)

청교도들이 왕정에 대항,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혁명.
영국의 제임스 1세와 이후의 찰스 1세(1625~1649)는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여 영국 의회와 대립했다. 특히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전제정치를 펼쳤다. 찰스 1세는 일부 귀족과 대상인에게 상업독점권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국왕의 통제 아래 있는 국교를 강제로 믿게 했다. 이에 대해 국민은 강한 불만을 가졌다.
귀족 대상인 등과 달리 도시의 중소상인과 수공업자, 농촌의 젠트리와 요맨 사이에는 국교를 기피하고 칼뱅파의 흐름인 청교주의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국왕과 늘 대립했다.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자 왕과 의회의 대립은 점점 심화됐다. 결국 1642년 내란이 발생했다.
의회측의 중심인물은 크롬웰. 내란을 주도하는 기병대를 '철기군'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동남부 지방출신의 열렬한 청교도들로 강력한 규칙을 지켰다.
찰스 1세는 체포되어 1649년 1월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후 영국은 크롬웰을 행정수반으로 하는 독립파의 강력한 군사지배에 들어갔다. 크롬웰은 군주제룰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크롬웰의 강력한 독재로 백성들은 불만을 갖게됐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1660)

명예혁명 (1688)

전제정치에 대항, 입헌군주제를 수립한 혁명.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에 성공해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크롬웰이 죽은 뒤 영국은 찰스2세를 중심으로 왕정복고를 이뤘다. 그러나 찰스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2세는 다시 전제정치를 시작했다. 의회는 제임스2세를 견제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토리당과 휘그당이 협력해 네덜란드의 오라네공 빌렘3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빌렘3세는 왕의 큰딸인 메리의 남편.
1688년 빌렘3세가 영국으로 건너왔고, 제임스 2세는 군대에 배신당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오라네공 빌렘3세는 의회에서 추대되어 즉위했다. 그는 '월리엄3세'라 일컬어졌으며 의회가 기초한 권리장전도 승인했다. 이로써 영국에서는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됐다.


혁명의 시대(18~19세기)

루이 14세가 죽은 후(1715년)부터 빈 회의가 개최될 때(1815년)까지 100여 년 동안의 서구사회는 영국의 시민운동, 프랑스 대혁명(1789), 미국 독립(1796)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특징을 가진 혁명의 시기였다. 정치적 혁명과 더불어 18세기 중엽(1764년 방적기 발명)부터 19세기 초까지 진행된 산업혁명은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생활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조선은 당쟁이 격화되고 봉건 지주들의 농민 수탈이 심화되어 백성의 삶이 궁핍해졌다. 농민들은 반봉건투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괄, 이인좌의 난이 있다. 정부는 수취제도를 변혁하기 위해 대동법과 균역법을 실시하였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 독립(1775~1783)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 독립 전쟁을 일으키고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사건.
영국은 아메리카 정책에 대해 다른 식민지보다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자 식민지로부터 원료를 싸게 생산하고 본국의 제품을 팔려는 계획을 세웠다.
게다가 동인도 회사의 재정난을 해결하고 본국의 산업보호를 위해 미국 식민지 내 산업을 제한하며 모든 문서에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조례를 강요했다. 이런 영국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여 1773년 12월16일 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보스턴 차 사건을 벌였다. 이 사건이 독립전쟁의 발단으로 작용했다.
1774년 9월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1회 대륙회의를 개최하고, 식민지 주민의 권리를 선언하였다. 식민지 대표들은 제2회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776년 7월4일 독립선언서를 공포했다. 독립선언서는 제퍼슨이 기초하고 프랭클린을 포함한 기초위원들이 작성했다.
독립선언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밝힌 것으로 미국은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정해 지키고 있다.
1783년 프랑스의 중재로 파리조약이 체결되면서 8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이 조약으로 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가 독립을 얻었고 새로운 나라 미합중국이 탄생하게 됐다.
1789년 워싱턴은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800년 선거에 의해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퍼슨이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합중국의 헌법은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성문법으로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확립하였다는 데 큰 의의를 갖는다.

프랑스 혁명(1789)

 1789년 프랑스 민중이 시민계급을 선두로 절대주의 아래의 구제도(Ancien Regime : 앙시앵레짐)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운 투쟁.
혁명의 직접적인 계기는 재정문제였다. 루이 14세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재정 궁핍이 루이 15세의 낭비와 전비에 의해 더욱 심해진 것. 루이 16세(1774-1794)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농주의 경제학자 투고를 재무장관에 등용했다. 그러나 궁정귀족의 음모와 길드의 반대로 면직당했다. 뒤를 이어 스위스의 은행가 넥커가 재무장관이 되어 재정 정리를 꾀하였으나 그 역시 귀족, 승려의 반대로 사직했다. 이후 재정위기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마침 미국에서는 독립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의 독립은 프랑스 민중에게 영향을 미쳤고,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구 제도의 폐지, 헌법 제정, 자유와 평등의 확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루이 16세는 혼란을 막기 위해 3부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각 계층의 이해로 타협을 보지 못한 채 공전했다. 시민들은 카페와 바 등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였고, 신문과 팜플렛 등은 연일 혁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국왕은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던 네카르를 파면하고 군대를 베르사이유에 집결시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파리 민중들은 격분했다. 시청을 점령하고 자치 행정조직을 만들고 각 지구에 국민의용대를 조직했다. 7월 14일에는 폐병원을 습격하여 3만2천정의 소총을 빼앗고 정치범을 가두어 두고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했다. 국민들은 또 전국에서 영주의 저택을 습격했다. 교회와 귀족에게 바치는 공조와 부역을 거부하고 독점상인을 처단했다.
결국 의회는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선언하고 8월26일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왕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파리 시민은 왕과 의회를 파리로 옮기고 혁명적 민중의 감시아래 두어 반동파의 책동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국왕은 드디어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선언을 승인하였다. 1791년 9월 '입헌군주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 공포됐다.
신 헌법은 군주제를 인정하고 있지만 사실 상 인민 주권주의에 입각했다. 그러나 인권선언에 주장된 평등주의는 그대로 실현되지 않아 선거권은 일정한 재산을 가진 유산계급에게만 부여됐다.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오스트리아에 보호를 구하기 위해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와 더불어 망명을 꾀하다가 실패하고 붙잡혔다.

산업혁명 (18세기)

 기계의 발명에 따라 수공업에서 탈피, 기계공업으로 전환된 일련의 과정.
산업혁명은 우선 면업 부문에서 일어났다. 1764년 제니 방적기 발명을 시작으로 각종 방적기가 개발되었다. 이 때의 방적기는 주로 수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1769년에는 제임스 와트에 의해 증기기관이 발명됐다.
1807년에는 기선이, 1814년에는 기관차가 발명돼 공장의 원료와 생산품을 수송하는 혁신을 이루게 됐다.
산업혁명은 크게 수공업의 몰락과 자본주의 사회 확립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자본가는 자유무역, 곡물업 폐지, 선거법 개정 등을 통해 자유주의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노동자 에 대해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 계급주의를 낳았다. 또 노동문제는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운동을 태동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03 라이트 형제, 비행기 제작

1905 아인슈타인, '특수 상대성 원리' 발표, 을사조약 체결.

1909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살해

1910 한일합병. 일제 무단통치

1914 제1차 세계 대전(~1918)

1917 러시아혁명

1919 3.1운동 1926 텔레비전 발명

1929 세계 경제 공황, 스탈린체제

1933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 수립

1936 손기정 베를린마라톤 금메달

1937 중일 전쟁

1939 2차 세계대전 발발


   제국주의 시대 (19세기 20세기 초)

산업 혁명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식민지 쟁탈전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870년부터 이탈리아 등 선진 제국들은 경쟁적으로 식민지 확장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비롯하여 아시아, 태평양의 많은 지역은 유럽과 미국의 분할 통치에 들어가고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극동에서는 일찍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경제-군사대국으로 성장하고 상대적으로 조선과 중국은 서구 열강의 수탈대상이 된다. 일본은 조선과 중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침투를 위해 마수를 뻗친다.


 
1941 일본 진주만공격

1945 히로시마 원폭투하, 유엔창설 8.15 해방

1946 최초 전자계산기 애니악개발

1950 6․25 발발

1955 소련, 인공위성 발사

1956 유럽 경제 공동체 성립

1957 3.15 부정선거, 4.19혁명, 이승만 하야

1961년 베트남 전쟁 발발 5.16 군사쿠데타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1, 2차 세계대전, 이념의 대립, 냉전시대 (20세기 전반)

1914년~19년의 제 1차 세계대전은 유럽 대륙을 무대로 전쟁이다. 38~45년의 2차 세계대전은 유럽 대륙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의 일부지역에까지 전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동서 진영의 이념 대립으로 냉전시대를 맞이한다. 세계 대전을 치르는 동안 세계 국경선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미국과 소련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등장,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수립되었다. 식민지였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계속되는 내란과 이념전쟁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36년간 일제의 식민지를 겪은 한반도는 이념과 체제의 갈등으로 남북으로 나뉘는 비극을 맞는다.


1972 7.4 남북공동성명. 10월유신

1973 제 4차 중동 전쟁

1979 박정희대통령 시해, 12.12 군사쿠데타

1980 5.18 광주민중항쟁. 전두환대통령 취임

1985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글라스노스트

1986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진

1988 88서울올림픽 개최.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1991 소연방 해체, 독립국가연합 출범,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1999 나토의 유고공습 (1999. 3.24) 유럽 단일통화 출범   화해와 개혁의 시대(20세기 후반)

80년대에 이르면서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의 양대 축인 중국과 소련이 개혁 앞에 무릎을 꿇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다. 그 결과 이념을 초월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확립. 정보와 문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자원의 무기화, 또는 공업 개발에 따라 신흥 공업국들이 부상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는 경제위기에 직면하지만 새 천년을 맞이하는 지금, 경제회복에 박차를 가하며 아시아 시대의 개막을 준비하고 있다. 


아편전쟁 (1840~1842)

영국 상선의 아편을 청이 불태움으로써 일어난 전쟁. 이 전쟁으로 유럽의 대아시아의 식민지 정책이 가속화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구에서는 산업혁명으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어 막강한 경제력을 키워나가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아직도 전근대적 생산방식과 관리들의 횡포로 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미 인도를 차지한 대영제국은 중국을 엿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화의 자존심을 지닌 중국인들은 통상요청을 거부했다. 한편 영국 상인들은 동인도 회사의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에 팔아 이익을 취하는 악덕 상행위를 자행했다. 중국인들은 아편을 사기 위해 은을 지불했고 과다한 아편구입으로 은값이 폭등하여 생활고를 겪게 됐다. 아편 중독으로 인한 피해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39년 청왕조의 관리 임칙서는 광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상선에서 아편 2만 상자를 몰수 소각시켰다. 이에 영국은 중국에 개전을 결의하고 1840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 진 청은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 지불 외에도 5개항의 개항, 그리고 홍콩을 영국에 양도했다. 이 사건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에게 잠식당하기 시작하여 반식민지로 전락되어 갔다.

미국 남북전쟁 (1861~1865)

남부의 농업자본과 북부의 공업자본이 맞서 대립한 전쟁. 북부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으로 노예제도 등이 폐지됐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합중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남부는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들을 이용해 면화농업을 발전시켰다. 반면 산업혁명을 추진하고 있는 북부에서는 남부의 흑인문제를 비판하였고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남북관계의 대립이 악화되자 남부 7주는 미합중국에서 탈퇴, 미연방을 만들어 북부에 대항하였다.
남북의 대치는 1861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유리하였으나 물자와 공업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진 북부가 승리를 차지했다. 게티즈버그 격전을 끝으로 1865년 60만명 이상의 전사자, 총 비용 100억달러 이상의 희생을 치루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남북전쟁의 근본원인은 상공업에 기반을 둔 북부의 산업자본과 노예제에 기반을 둔 남부의 농업자본간의 대립이었다. 노예제 폐지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이 전쟁으로 남부 면화왕국은 무너졌고 정치적으로도 쇠퇴하게 되었다. 이 전쟁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산업혁명을 전개했다.

일본 메이지 유신(1868)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한 사건.
도쿠가와 막부는 개항 후 신식 군대의 창설, 서양식 병기의 제조 등 여러 면에서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양이론자들은 유럽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국왕 중심의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내 사츠마, 조슈 번은 반 막부 세력을 규합하여 국왕 중심의 새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유신이 성공하자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은 종래의 쇄국 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 일본 정부는 즉시 산업혁명을 수용하여 서구를 따라갔다. 서구 유럽이 민족주의 전쟁으로,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일본은 재빨리 세계 열강의 대열로 올라갔다.

마르크스 '자본론' 출간 (1867)

자유당과 보수당의 양당 정치로 발전한 영국은 노동자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을 주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1838년에서 1848년까지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최초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는 이 운동을 계승하여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마르크스는 후대에 사상적,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혁명을 낳았으며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케 했다. 마르크스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연구를 계속해 1867년 '자본론'을 출간했다. 그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특히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며 인간을 소외시키는 체제라고 비판했다. 마르크스 사상은 독일 고전 철학, 영국의 고전 경제학,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흡수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인류사회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변화발전하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사회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는 평생 혁명을 위해 일하다 1883년 사망했다.
그의 사상은 그가 죽은 뒤 더 널리 전파되어 실천에 옮겨졌다. 유럽 각지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1917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20세기 전반을 거쳐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중심 사상이 됐다.

제 1회 국제 올림픽 개최 (1896) (1867)

 올림픽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폴리스 인들이 4년에 한번씩 올림피아에서 모여 벌인 체육대회. 올림피아 제전 경기는 서기 393년까지 무려 1100여년 동안 열렸는데,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함에 따라 이교도의 제전이라 하여 393년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1500여 년 후인 1896년 제 1회 국제 올림픽이 프랑스의 쿠베르탱의 노력으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다시 개회되었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 경기의 이름을 따서 올림픽이라 명명하였다.
쿠베르탱의 염원은 스포츠 정신을 통하여 세계 평화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었다.
1892년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하여 1894년 국제 올림픽위원회 IOC가 조직되었고 1896년 4월 6일, 13개국 311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근대 올림픽이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육상, 체조, 펜싱, 사격, 테니스 등 10개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고, 1위 그리스, 2위 미국 3위는 독일이 차지했다. 그후 올림픽은 제 1.2차 세계 대전으로 세 번 중단된 것을 제외하고 4년마다 한번씩 지금까지도 계속 열리고 있다.
오늘날 올림픽은 자국의 이념을 선전하고 경제적 우월성을 상징, '스포츠는 국력이다'란 말이 나오게 될 정도로 또 하나의 새로운 정치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출처 : 삼용이와 순애
글쓴이 : 따스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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