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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에 나타난 장례의식과 부활의식

하나님아들 2013. 7. 30. 23:12

구약에 나타난 장례의식과 부활의식


서 론

목회를 감당하면서 많이 겪는 일이지만, 기독교 장례의 절차가 아직도 우리 문화에 적합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성경에 입각한 우리 장례의 절차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바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합당한, 그리고 성경에 기반을 둔 가장 적절한 장례의식을 연구하고 또 목회에 적용함으로, 다른 종교와 미신, 그리고 세속적 영향을 배제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먼저 구약 성경을 통하여 구약시대에 어떻게 장례의식이 치러졌으며, 어떤 부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 소논문에서 밝히고 싶은 것이 나의 욕심이다. 먼저 죽음의 의미와 장례절차를 다루고 부활의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본 론

I. 죽음의 의미와 葬禮

聖經의 장례의식에 대해서 알기 전에 간단하게 성경에서의 죽음에 대한 개념을 먼저 생각해보자. 성경에서 사람을 "영(靈)"으로 이해한 점이 특이 하다. 즉 산 사람은 산 영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靈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聖經에서 죽음이란 영이 극도로 약화된 상태를 말한다(창 25:8, 35:29, 49:33등). 결과적으로 사람은 육체가 존재하는 한, 뼈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사람은 살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시체를 무덤에 두지 않고 함부로 내버려두던가, 혹은 시체를 절단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며, 시체를 화장하는 것은 완전히 죽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흔히 피의 복수 (삼상31:12)나 중한 벌로서 화형에 처했다(레20:14, 21:9; 수 7:25). 이러한 면으로 볼 때 장례의 의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약에서의 장례의식과 매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葬禮의식

사실 舊約聖經에는 장례의식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편이다. 초상이 나면 시체는 상에 누이고 천으로 싼다. 아사 왕의 장례(대하16:14)나 야곱과 요셉의 장례를 보면 몸에 향을 넣었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다고 본다. 특히 야곱과 요셉은 애굽의 풍습에 따라서 방부제를 넣었던 것 같고, 아사 왕의 경우에는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 같다. 야곱을 관에다 넣었다고 하지만 이는 멀리 이동하기 위해서 만든 것 같고, 히브리인들은 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면 애곡으로써 장례의식은 시작된다. 애곡은 자연적인 슬픔의 표현이 되는 동시에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므로 애곡은 親族의 의무인 동시에 죽은 자에 대한 예의였기 때문에 이것들이 빠지는 것은 대단한 불행으로 여겼다(왕상 14:13; 욥 27:15; 렘 16:4,6; 22:18; 25:33; 34:5).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가족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창 23:2; 50:10; 삼하 11:26; 겔 24:16). 그러므로 애곡은 모든 문상객들이 하게 되며, 이는 초상 때부터 시작해서 묘지에서, 그리고 끝난 뒤에도 보통 7일간 계속한다(창50:10; 삼상1:13등, 예외로 모세와 아론을 위해서는 30일간[민20:29; 신34:8], 야곱을 위해서는 70일간 [창50:3]계속했다고 함). 또한 聖經에서 우리는 직업적인 곡꾼들을 고용하는 것을 볼 수있는데, 이들은 주로 신들린 여자들로서, 대대로 그 업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대하35:25; 전12:5; 렘9:17-22). 성경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노래하는 여자( 샤로트)", "곡하는 여자들( 므코노트)", 또는 "지혜로운 여자( 하카모트)"등으로 불렀다. 아마 이들이 이렇게 불린 것은 전문적인 재능과 또한 애곡의 특별한 표현, 그리고 애가까지 지어 부를 수 있는 문학적 재능까지 겸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애곡에 대한 대가를 지불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직업을 전수하고 지키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애곡의 표현은 마치 한국식과 비슷하여 '어어' 도는 '아이고'를 반복하며, 그 뒤에 '나의 형' 또는 '나의 주' (왕인 경우)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 흔히 악기가 동원되기도 했는데, 특히 피리를 사용했다(렘48:36).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들은 이때에 옷을 찢고 허리에 띠를 띠며 신발이나 머리 수건을 벗어버리고 또는 수염이나 얼굴을 가린다(창37:34; 욥2:12: 삼하15:30등). 또는 두손을 머리에 얹거나 머리를 땅에 댄다. 어떤 때는 재 가운데 구르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극도로 슬픈 경우에는 머리나 수염을 밀거나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기도 한다(사22:12; 렘16:6). 그러나 유배 이후에는 신체 절단이 금지되었다 (레19:27-38). 식사는 물론 세수와 미용도 일체 금했다.
애곡과 함께 애가를 지어 불렀는데(삼하1:19-27, 3:33-34; 겔19:1-14등), 이것은 오늘날의 조사라 부를 수 있겠다. 이는 주로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고인의 아름다움. 선행 家族의 歷史. 전쟁에서의 용감성 등 어려 가지를 예거하며, 社會나 家族에 끼친 故人의 공로나 업적 등을 이야기한다. 그 좋은 예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지어 부른 애가이다(삼하1:18-27). 이것은 죽은 한 個人을 위해 보존된 성경구절이다. 또한 죽었거나, 죽은 것으로 간주된 집단을 위해 지어진 애가가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 애가와 그리고 바벨론, 두로, 애굽을 위한 풍자적인 애가가 있다(사 14:4-21; 겔 27:2; 32:2-16). 이러한 애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주제를 3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자.
첫째는, 죽은 자에 대한 칭송이다. 시적으로 혹은 담화 적으로 사용된 이 표현은 사실에 기인된 표현보다, 현실 초월적인 표현이 더 많다. 죽은 자는 언제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힘이 세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반듯이 그의 이름이 언급되고(삼하 1:26; 3:33; 겔 19:2; 26:17; 27:3; 28:12), 또 전쟁에서의 그의 용맹이 강조되며(삼하 1:27; 겔 32:27), 그의 혈통과 인간적인 가치를 표현하게 된다(삼하 1:19; 사 14:10).
두 번째는 죽은 자를 애통하는 것이다. "어떻게"라는 표현으로 애가가 시작되는데, 이러한 표현은 마치 죽음의 비극을 최소화하려는 표현이다. 그리고 전쟁이나 혹은 비극적 죽임을 당했을 때, 그들은 복수 혹은 저주를 요구하는 말로 바뀐다(삼하 1:21).
세 번째는 위로의 표현을 사용한다. 죽은 자가 남긴 훌륭한 추억과, 고인의 이름을 영속시킬 그의 후손들, 그리고 장례의식이 잘 치러졌다는 사실 등은 살아서 남은 자들의 슬픔을 덜어주게 된다.
葬禮의식은 보통 1일장으로 행해졌는데, 이렇게 친족과 문상객들의 애곡과 함께 매장을 위한 장례 행진을 하게 된다. 장례행진을 위해서 시체는 상여( 미타)로 운반했는데(삼하3:31; 대하16:14), 이것은 여러 명이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는 들것으로서 한국의 옛날 상여와 흡사하다. 히브리인들은 일반적으로 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관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애굽에서의 요셉에 관한 이야기에서 뿐이다(창 50:26).

2. 매장

매장은 가능한 한 1일장으로 하려고 했다. 즉 하루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위생상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매장하려 했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부정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聖經에서 시체를 밤새 두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했다(참고 신 21:23). 이것은 당시 근동지방의 풍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일종의 보호의식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모든 셈족에게 있어서 공통적이었던 것같다.
죽은 사람을 올바로 매장하는 문제는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과 기타 다른 고대의 문서들에서 매장에 관한 언급이 빈번한 점과 현대의 고고학자들이 성경시대의 지역에서 수천 개의 묘실을 발굴한 점으로 입증된다.
성경에서 '매장'이라는 말인 "케부라( )"는 매장하는 행위를 가리킨 말인지 아니면 매장 지를 가리킨 말인지를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자를 매장하는 관습은 전6:3; 사14:20; 렘22:19등의 구절에 암시된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매장 지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케부라(매장)는 빈번히 "묘실"을 가리켰으며, "매장지(창47:30)", "묘(신34:6)", "묘실(왕하 9:28; 21:26; 23:30)", "무덤(겔32:23-24)"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메카뻬림( )"이란 용어는 죽은 자를 매장하는 사람을 가리켰고, "장사하는 자들(겔39:15)"로 번역되었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의 매장의 풍습은 사라가 매장되고(창23:19) 또한 아브라함(25:9), 이삭, 리브가, 레아(49:31), 야곱(50:13)등이 매장될 막벨라 굴에 관한 전통에서 입증된다. 갈멜산의 와디 엘-무가라 동굴들과 고대 여리고 및 사해 북단 근처의 델레이랏 갓술에 있는 묘실들에서 발견된 사람의 골격의 위치는 이미 석기시대, 금석병용기 시대, 초기 청동기 시대에 벌써 죽은 자의 시체를 매장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연동굴 외에 성경은 여러 가지 매장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단지 그 성읍 또는 지역의 명칭만이 언급되는데, 아론의 경우를 보면 그는 모세라에 장사되었다고 되어있다(신 10:6참조, 민33:38-여기서는 호르산이 그의 매장지로 언급되었다). 또한 모세는 벧브올 맞은 편 모압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신34:6), 여호수아는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세라에 장사되었으며(수 24:30;참조, 삿2:9), 입다는 길르앗 한성읍에 장사되었다(삿 12:7)고 하였다. 삼손은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되었고(삿 16:31), 사울과 요나단은 화장된 후 에셀나무 밑에 장사되었고(삼상 31:13), 그들의 뼈는 후에 베냐민 땅 샐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실에 장사 되었으며(삼하21:14), 다윗과 솔로몬은 다윗성에 장사 되었다고(왕상 2:10; 11:43) 기록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스라엘 및 유다 왕들이 다윗성(왕상 15:8,24; 왕하 8:24;12:21등), 디르사(왕상 16:6), 사마리아(왕상16:28; 22:37), 예루살렘(왕하14:20)에 장사되었다고 되어있다.
매장지의 정확한 위치는 이 구절들에 기술되어 있지 않으나, 묘실들이 언급된 도성들의 거주지에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매장된 유해가 고대 여리고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집들 마루 밑에서 발견되고, 게발(비블로스)에서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집 뜰에서 발견되지만, 후대에 화서는 여리고, 라기스, 므깃도, 게셀, 텔 엔나스베(미스바), 델 엘파라(디르사), 디본, 예루살렘등지의 성벽밖에 있는 자연돌굴 또는 인공동굴에서 대체로 발견된다. 발굴에 의하여 묘실들은 가끔 재 사용되었고, 이때 먼저 장사된 사람의 유해는 한쪽으로 밀쳐졌음이 밝혀졌다. 쿰란수도원 근처에서 한 사람씩 매장된 천여개 이상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가 발견되긴 했지만, 한 무덤에 한 사람을 매장한 예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매장지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가 설명된 경우는 '벧엘아래 상수리나무 밑에'(창 35:8), '동산'(왕하 21:18, 26; 요 19:41- 여기서는 예수의 매장지가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무덤'이라고 기술되었다), '집에서'(삼상 25:1; 왕상 2:34; 대하 33:20)등이다. 사무엘, 요합 므낫세등과 관련되어 나오는 묘실로서, 집이 명명되고 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며, 고대 습관의 부활을 가리킨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단순히 묘실을 가리켜 말하는 완곡어법일 수도 있다(겔 43:7은 묘실들이 예루살렘성 안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70인경의 대하 33:20과 왕하 21:18의 그 평행구절은 므낫세가 그의 집 동산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묘소는 죽은 영들의 영주지이며 안식처로서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게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조상들을 한곳에 매장함으로써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 교통하며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살아서 잘못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이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의 소유물은 때때로 시체와 함께 묻혔는데, 가나안인과 모압인의 묘실에서는 무기, 반지, 귀걸이, 팔지, 등잔, 갑충석, 음식 그리고 쟁반 등의 나무로 만든 가구들이 발견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는 비히브리적으로 보아야한다. 신명기 26:14절에 죽은 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은 자에 대한 의식으로 간주되었으며, 성경에서 금하는 사항으로 보여진다. 혹 어떤 무덤에서 고인이 평소에 쓰던 기구들. 그릇들. 무기들이 발굴되기도 하지만, 구약성서에 이런 제도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나안과 모압의 풍속들이 이스라엘에도 영향을 끼쳐서 간혹 시행되었던 것 같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점 사라져 버렸다.

II. 舊約에 나타난 復活思想

舊約에는 復活에 관한 뚜렷한 敎理가 없다고 흔히들 말한다. 특히 舊約 가운데 오래된 책일수록 더 그렇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해석이 나왔지만, 여기서 수많은 해석의 문제를 다루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들이 잘못된 방향에서 이 교리에 관한 근거를 모색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에 대한 옳은 해명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학적인 견지에서 "靈魂不滅"의 교리를 모색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族長들과 옛 聖徒들의 참된 소망은, 그들이 所望을 품었던 이상, 肉體와 더불어 復活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미 잘 알려진 정통적 聖經 敎理와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혼이나 영이 육체가 장사지낸 후에도 존속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의심을 품었었다면 좀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고대인들도 이러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애굽 사람들은 사람이 죽이면 하계로 내려가는데, 이곳은 그들이 오시리스와 그의 마흔 두 명의 보좌원에 의해 심판을 받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바벨론과 앗수르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일곱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로 생각했으며, 강이 그 도시의 주위나 혹은 한 가운데로 통과해서 흐르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들이 이 도시에 붙여준 이름은 "수알루(sualu)"로 알려져 있는데, 히브리어의 "스올(sheol)"과 같은 단어로서 구약에서는 "스올"을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거처로 묘사하고 있다. 영어 개역 성경에는 여러 곳에 "스올"이란 단어를 직접 사용했다. 어떤 번역에는 "스올"이란 단어가 어떤 때는 "무덤"으로, 어떤 때는 "구덩이"로 또 어떤 때는 "지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명백히 "헬라어의 '하데스' 즉 하계에 해당되는 '분리된 영혼의 거처'"이지 "매장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스올"에 내련 간다는 생각은 의인에게 있어서 위로가 될만한 것은 못 되었다. 그곳은 음울한 죽음과의 접촉만 점령하고 있으며, 침묵과 망각의 땅으로 상상되었다. 세상의 풍부한 빛과 온기가 제거된 곳이며 그 어두움을 몰아낼 복음의 빛이 아직 다다르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므로 "스올"이라는 개념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시체안치소의 정적과 싸늘함이 감도는 으슥한 분위기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불쾌감을 이 단어에서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이 든든한 성도는 비록 "스올"에 내려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그곳에서도 계속 대면하시고 교통하실 것을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승리적 신앙은 믿음이 강한 순간에만 가능했을 뿐 다시 낙담했을 때에는 가장 음울한 생각이 그를 엄습하곤 했던 것이다. 그의 참된 소망은 그가 소망을 지닐 수 있었던 이상, 하나님께서 그의 혼을 "스올"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러한 상태에서 그를 구원하셔서 몸안에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었다. 그의 소망은 곧 부활이었던 것이다. 영혼의 분리된 존재 상태에 관한 이러한 느낌과 신앙을 예증하기 위해 주제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한 두 곳 인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혼의 미래 상태에 대한 신앙의 표시는 창세기에 여러 번 나타나는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라는 표현에서 발견되어지는데, 창세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스올"에 있는) 그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장하는 행위와 명백히 구별되어 있다 (창25:8,9; 35:29; 49:29,31,33). 다른 확증들은 강신술에 대한 신념, 부활을 언급한 성구 등에서 제시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속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스올"이 어떤 곳이었는지 욥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욥10:21,22).
이와 같은 死後 거처에 대한 예견은 활기찬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義人들일지라도 낙담되었을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 계시고, 은총도 거둬가 버리신 것으로 생각하여 고통으로 부르짖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이런 방향에서는 구약의 영생에 관한 활기차고 적극적인 면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에서 모색해야 한다. 사람들은 구약에 영생에 관한 교리가 없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실제는 성경의 처음부터 영생의 교리가 있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의 창조주에게서 영생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의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였다. 인간의 창조는 죽도록 의도한 것이 아니라 살도록 의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죄와 더불어 죽음이 왔다. 아담은 그의 아들을 셋이라고 불렀고, 셋은 그의 아들을 에노스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란 뜻이다. 셋 자신도 죽었을 뿐아니라 그의 아들도 죽었고, 그 아들의 아들도 죽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죽음의 계열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의 계열 속에 예외가 생겼다. 즉 죽음 이상의 법, 즉 영생의 새법이 중간에 끼어든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에녹은 죽지 않았다. 창세기 5장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일대기는 마지막에 "그리고 그는 죽었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지만, 에녹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과 관계없이 "데려가심"으로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존재는 없어진 것이었으나 그는 보이지 않는 다른 존재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에녹의 경우는 몸도 영혼과 동참하는 진정한 전인의 불멸 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모든 불멸성에 대한 참된 모형이 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영혼만의 불멸 성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몸과 혼이 연합한 전인적인 불멸이다.
최근에 많은 학자들의 견해는 히브리인들의 죽은 자의 부활 교리가 그 사상의 근원을 아주 후기, 곧 바벨론 포로 시대나 그 후의 시대에 페르시아에서 빌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영생에 대한 소망은 이미 족장시대로부터 전수된 형식 그대로 성경의 가장 오랜 개념 중의 하나라고 본다. 그것은 까마득히 먼 고대의 교리였다. 우리는 히브리민족 주변에 있던 많은 고대 종교의 흔적에서 영혼불멸에 대한 개념이 참으로 있었다는 유익한 고증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애굽 사랍들은 육체의 소생은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이 바로 미이라를 만들게 된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영생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예증으로서 인류 역사 초기에 살았던 에녹의 경우를 들었다. 족장들을 살펴볼 때, 그들의 신앙과 소망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은 당연히 희소하며 추론적인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그 초기성과 순수성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그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특징짓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그들은 자신들을 땅위의 "외국인과 나그네"로 여기며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들과 개인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복된 약속들의 미래적 성취를 소망했던 것이다. (히11:13). 족장들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애굽사람들의 행한 것과 비슷하게) 소중히 취급했는데 이것은 부활에 대한 일종의 소망에서 고무되어진 바로서 못마땅한 처사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야곱과 요셉이 그들의 뼈를 한 처사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야곱과 요셉이 그들의 뼈를 약속의 땅에 장사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던 것이다(창 47:20-31; 50:25; 출 13:19; 히 11:22). 히브리어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실을 부활신앙과 관련시킨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을 주리라" (창17:8)하신 말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추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른 족장들은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복된 약속들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고 거짓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증거를 갖게 되는데, 영혼불멸의 증거뿐 아니라 율법의 기반 즉, 죽음에서의 부활의 증거를 갖게 된다." 만일 이같은 추론이 기발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면 랍비보다 더 위대하신 이의 교훈을 언급하겠다.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의 이러한 인용은 단순히 족장들이 어떤 막연한 존재의 상태로 계속 생존해 있음을 증거 함이 아니라 죽음에서 그들이 부활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대로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인적 부활을 수반한다는 근거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살핀 대로 육체를 소유한 영생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면, 이러한 계약 관계는 이들 족장들에게 영원한 삶뿐 아니라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구속, 즉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럼 실제로 성경의 몇몇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대표적으로 욥기, 시편, 선지서 등의 그 후의 책들을 보게 되면 구약성도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영혼불멸의 소망을 더욱 밝히 알 수 있게 되는데, 이 所望과 復活의 소망은 거의 혹은 완전히 일치한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욥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책을 먼저 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 기록되었든 간에 족장시대와 관련되어 있거나 혹은 적어도 그 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근동지역의 지혜를 보여주는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 14장에 나타난다. 이 장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바로 그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러한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주목할만한 육체적 부활의 전망을 보게된다. 먼저 욥은 인간의 부활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늘어놓는다(7-12절). 곧 뒤이어서 신앙이 극도의 위기로부터 불일 듯 일어나, 의심과 두려움에 대항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震怒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期限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지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보셨겠나이다(욥14:13-15)

여기서 욥의 心中에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復活의 問題였다.
그럼 시편에서는 어떠한가? 시16:8-11절에서 이에 대한 명백한 부활의 예를 볼 수있는데, 신약에는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언으로 인용되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행2;24-31절 참조)


한 구절 더 생각한다면, 시 17:15절에서 시편 기자는 악인의 외견상의 번영을 기술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여기서 "깬다"는 뜻은 죽음의 잠에서부터 깬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더 명확한 구절이 시49:14,15절이다.

양같이 저희(악인들)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여기에서도 부활의 "아침"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다시금 나타난다. 이 구절은 시73:24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마지막 부분에 에녹의 예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이 구절들과 아울러 다른 몇 몇 구절들이 흔히 詩篇의 靈魂 不滅 敎理가 즐겨 인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구절들은 이 所望이 復活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선지서에 있는 구절들도 다루어 보자. 여기에 부활에 대한 개념이 잘 드러난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납득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빈번하게 부활 사상과 관련되어 나타날 뿐아니라, 個人을 포함한 전체로서의 敎會를 위해 사망이 승리에게 삼키운 바 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도 復活思想과 연결되어 있다. 호세아서는 이러한 면의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음과 스올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며, 이것을 깨뜨릴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6:2)

역시 다른 구절에: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호13:14)

이러한 내용의 진술은 사25:6-8절과 26:19절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또한 겔37:1-10절, 마른 뼈의 환상 참조) 이제 인용할 마지만 구약 성경 구절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구절로서, 의인뿐만 아니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특별한 면을 지니고 잇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단 12:2절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 이 구절 말씀에 대해서는 주석을 첨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 론

結論的으로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聖道들이 가졌던 죽음과 그에 대한 永生의 所望은 바로 復活로 연이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所望은 성경중심의 계시에 근거한 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를 바로 의식함으로써,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확실히 믿을 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었다. "生命과 썩지 않을 것"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福音 안에서 밝히 드러난 지금과는 달리(딤후1:10) 그 때에는 아직 완전한 빛으로 나타나지 않았었다. 이러한 原理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決定的으로 진지해짐에 따라서 永生에 대한 히브리인의 敎理가 되었던 것이다. 靈魂不滅에 대한 히브리인의 신앙은 결코 靈魂이 死後에 단순히 存在함을 믿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信仰은 어둡고 神秘한 죽음의 사건이 한 聖道가 이 세상에서 누린 하나님과의 즐거운 삶의 관계를 결코 중단시킬 수 없다는 그와 같은 信仰이었다. 하나님께서 存在하실진대 復活도 당연히 存在한다. 그것은 靈魂만의 復活이 아니고, 靈魂과 肉體의 全人的 부활인 것이다. 이러한 舊約 全體의 가르침은 우리 주님께서 확실하게 要約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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