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누가복음 22:47-53 이것까지 참으라 2012.10.14.

하나님아들 2013. 7. 24. 11:27

누가복음 22:47-53 이것까지 참으라 2012.10.14.

 

지금 저희 교회를 보면 친교실 뒤쪽에 여러 개의 화분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입당식을 하면서 선물로 들어 온 것과, 장권사님이 집에서 키우다가 교회를 꾸미려고 가져온 화분 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저 쪽 교회에 있을 때에 화분에 심은 화초들이 죽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화초들이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보고 제 나름대로 많은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여기 저기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충 간추려 보니 나무를 잘 키우는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1)물을 적당히 주라. 물이 너무 많이 주어도 문제이고, 너무 작게 주어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서 죽을 확률이 높고 적게 주면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몰라서 너무 물을 많이 주어서 귀한 난을 죽게 만든 적도 있습니다.

2)통풍이 잘되게 하라. 좋은 공기가 화초를 건강하게 키운다는 말입니다.

3)햇빛을 적당히 보게 하라.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도 있고 싫어하는 화초도 있기 때문에 화초에 따라서 햇빛을 조절하라는 말입니다.

저희 집에서도 키우는 화초가 하나 있었습니다. 창가에 놓아 두어서 잘 키우다가 지난 겨울에는 날씨가 유난히 추워서 화분을 거실로 옮겨놓았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잎이 누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싶어서 고민하다가 물이 적어서 그렇구나 생각하고 화분에 물을 계속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 자꾸 색깔이 변하더니 결국은 죽어 버렸습니다.

왜 죽었을까요? 햇빛을 보아야 하는데 햇빛을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화초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햇빛도 필요하고, 신선한 공기와 물도 필요합니다. 인간도 숨을 쉬면서 살아가듯이 화초도 숨을 쉬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숨은 생명이며 숨 쉬지 않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도 동물도 꽃도 나무도, 산도 강도 바다도 흙도, 물도 집도 교회도 나라도 경제도, 숨을 멈추면 그 순간에 죽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왜 경제가 어려운가요?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돈은 한 곳에 고여 있으면 썩은 물처럼 악취를 풍깁니다. 돈은 자꾸 돌아야 경제가 건강해지고 국민생활이 윤택해 집니다.

생명을 단축시키는 호흡이란 칼럼에 이런 내용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를 합니다.

나쁜 생각, 나쁜 감정이 숨을 얕고 불규칙하게 합니다. 화를 내거나 분노하면 숨이 짧고 불규칙해집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호흡을 병들게 합니다.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낼 때 숨이 단절됩니다.

숨만 잘 쉬어도 건강하고, 숨만 잘 쉬어도 무병장수한다는 옛말이 전혀 틀린 부분이 아닙니다. 한방에서 한의사들이 환자의 병을 진찰 할 때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맥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맥을 진찰하고 그 맥의 흐름과 뛰는 상태 등을 통해서 그 사람의 건강과 질병의 유무를 파악한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병원에 가서 고치면 됩니다. 그러면 내 영혼의 질병과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히 내가 가지고 있는 분노와 스트레스는 내 육체를 병들게 하고, 내 영혼을 망가뜨리는 주범이 됩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가룟유다를 비롯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등장 했을 때에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순간, 가롯유다가 데리고 온 일단의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잡아 가는 이 실갱이 과정에서 흥분한 베드로가 품에서 칼을 꺼집어 내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칼로 잘라 버립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자신에 얽힌 어떤 일이 발생하면 누구나 조급해 합니다. 쉽게 흥분하고 분노하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해하게 만들고 영혼이 무너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상황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하게 베드로에게만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조금도 참지 못하고, 단순하고도 말초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내 고집대로 살고, 내 성질대로 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면서 사는 모습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것까지 참으라는 뜻을 되새겨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1. 배신을 참으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2천년전 겟세마네 동산으로 우리의 장소를 옮겨 봅시다. 기도에 열중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돈 던질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모여서 졸고 있는 제자들의 무리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초대 받지 않는 손님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체포하여서 법정에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 초대받지 않는 무리들의 맨 앞에는 <가롯 유다>가 서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거짓 입맞춤을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깊은 밤인데다, 울창한 감람나무로 인하여 더욱 캄캄했을 것입니다. 체포자들은 예수님을 쉽게 알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그 신호가 가룟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을 가룟유다는 파렴치한 배반의 도구로 스승을 잡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 하나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15살 되는 형이 12살 되는 동생을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입니다. 문제가 있는 형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고, 주위의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착한 아이입니다. 그러면 동생이 문제 있는 아이였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가정입니다. 부모의 자녀 사랑도 좋습니다.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형이 동생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미국 교육계가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고, 이것이 충격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형과 동생을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형이 엄마와 이웃집 아주머니 사이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 집 큰 아이는 참 똑똑하고 부지런해요라고 말하자, 엄마가 그래요. 하지만 그 애는 좀 덤벙대는 게 탈이에요. 그에 비하면 우리 작은 애가 오히려 더 부지런하고 침착하지요. 그래서 저는 큰 애보다 동생을 더 믿는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동생을 더 편애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형은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도 하였지만, 동생에 대한 엄마의 편애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총으로 동생을 살해하는 결과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단순한 사건의 출발이 엄청난 파멸의 결말을 가져온 모습입니다. 이 바탕에 <배신>이란 단어가 깔려 있습니다. 엄마에 대한 배신이 동생에 대한 증오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에 베드로가 왜 칼을 휘두른 것인가요? 가롯 유다의 배신을 보고 흥분한 나머지 가롯 유다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릅니다. 베드로가 휘두른 이 칼에 말고의 귀가 잘려 버립니다. 배신이란 이처럼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을 흐트려 버립니다. 특히 배신의 상처는 모르거나 먼 사람보다는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에게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제가 아는 후배 목사님은 이 배신의 상처를 성도들에게서 받아서 목회를 포기한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지금 목회를 하지 않고, 전국에 다니면서 한옥을 짓는 전문 한옥 제작자입니다.

우리는 배신을 해서도 안되지만, 배신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분노를 참아야 합니다. 쓰러지거나 보복하면 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알고서도 모든 것을 다 감당하시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용을 본 받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2. 원수를 참으라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군병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역하는 공생애 모든 기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갖은 음모를 꾸몄던 사람들입니다. 간악한 올무를 놓고 모함을 하고 비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대항하지 아니하였고, 묵묵히 비방과 모함을 넘어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무리들을 예수님은 원수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받아야 하는 불쌍한 영혼이라 생각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끝까지 베푸십니다. 원수를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모범된 행동입니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되면 법으로 정해져 있어 맘대로 행사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 13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 중에 가장 강력한 권한은 국군통수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입니다. 대통령에게 이 강력한 힘이 있다고 해서 대통령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요?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심각한 경우에는 국군까리 총부리를 겨누는 내란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력한 힘이 있다고 해도 대통령은 그 힘을 잘 사용하고 통제를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에게 가장 큰 힘은 하나님이 내 우편 그늘이 되시고, 예수님이 나를 위한 구세주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권세요 힘입니다. 이 힘이 있기 때문에 원수를 향해서 총칼을 쓰면서 보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원수를 이기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힘이 있어도, 매가 무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도 내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가 잘려져 버립니다. 자신의 스승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스승을 보호하기 위한 의리 있는 행동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과 판단은 달랐습니다. 무력을 행사한 베드로를 향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권면합니다.

왜 이것까지 참아야 되나요? 내가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왜 무력을 사용하면 안되나요? 그것은 무력이, 칼을 휘두르고 혈기를 부리고,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본문의 상황에서 베드로의 무력은 또 다른 시빗거리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율법의 기준에 따르면, 신체의 어느 부위가 불구가 된 사람은 제사장을 시중들고 봉사하는데 부적격자로 판명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을 못합니다. 또한 유대 사상에 의하면, 종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그 종의 주인이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가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공격을 받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귀가 잘려진 말고는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하지 못합니다. 고로 직업을 잃어버리고 생계를 위협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흥분해서 단순하게 앞뒤 재어 보지도 않고 칼을 휘둘렀지만, 베드로가 휘두른 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의 추이는 다양하게 학대 재생산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종의 귀가 잘린 것으로 인해 간적 모독이라고 판단한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님의 제자들을 다시 혹독하게 탄압합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실들을 너무도 명확히 아셨고, 그래서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시면서 제자들의 공격을 만류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칼부림은 예수님의 구속 역사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정의를 이룬다고 해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울러 무력을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화가 난다고 칼을 빼어 남의 귀를 자르는 행위는 용감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순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무력을 행사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불행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말고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무력을 자제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수지에 차가 빠져서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죽고 다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었고, 사람이 다친 인명사고라서 경찰에서 사고 조사를 합니다. 행여 사람을 죽일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차를 저수지로 몰아서 죽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사고조사를 하고 난 뒤에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사고가 난 원인이 네비게이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캄캄한 시골 길을 가는데 네비게이션이 엉뚱한 도로로 안내를 합니다. 달리는 길 앞에는 저수지가 있는데, 네비게이션은 저수지를 표시하지 않고 직진도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도 모르고 그냥 속도를 내고 달리다가 저수지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저수지로 차가 돌진합니다. 결국 운전자는 헤엄을 쳐서 빠져 나왔지만, 동승자는 물에 빠져 죽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출발하는 오류를 범하거나 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로 인정을 받은 대목장이 이런 말을 한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한 번 자르기 위해 두 번을 쟤 보라나무를 자르기 전에 두 번 생각해 보고 나무를 자르라는 말입니다. 일단 한번 톱을 가져다가 잘라 버린 귀한 고급 나무는 다시 붙여 눈가림을 속이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나무의 본래 가치를 잃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한번 자르기 위애 두 번을 재어 보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내 고집과 내가 가진 혈기를 십자가에 매우 묶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발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덕민사랑
글쓴이 : 선한목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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