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11-13(보상이 약속된 직분)
성경본문 디모데전서 3:11-13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
출 처| 정근두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5월 첫 주일에 있을 항존직 직분자 선출을 위한 말씀을 연속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3장에서 처음에는 감독 즉 장로의 직분에 대해서, 지난주는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 살폈고, 오늘 우리는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살핀 것은 직분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 강조점은 해당 직분자의 자격을 중심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말씀드릴 순서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권사라는 칭호는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1절은 남자 집사에 준하는 여자 권사의 직분에 적용시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이 여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여자들을 집사의 아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타당한 것 같지 않습니다. 집사가 되는데 아내의 자격까지 논한다면 마땅히 장로(감독)가 되는 데도 그 규정을 두어야 공정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자격을 논할 때는 그 아내가 어떠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는 것을 볼 때 이 여자들이 집사의 아내를 의미한다는 것은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문장의 구조를 살펴볼 때 감독과 집사에 준하는 또 하나의 독립된 직분을 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라고 시작하는 8절이나 “여자들도 이와 같이”라고 하는 11절의 구조는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여자들도”라고 하는 대신에 왜 “여 집사”나 “권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아마 디모데 전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권사는 그만두고 “여 집사”라는 칭호가 쓰이지 않았거나 혹 일부 교회에서 사용되어도 보편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남자 집사에 상응하는 여자들의 봉사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여자들”은 집사의 아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내의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서라는 편지가 쓰일 때까지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확정된 명칭이 없었기에 그것을 남자 안수집사에 준하는 여 집사로 부르든지 아니면 우리 한국교회처럼 권사로 부르든지 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11절을 가지고 권사의 직분, 그 자격을 살피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교회 내의 여자들 가운데 직분을 맡아서 수고할 사람들은 마땅히 소정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우선 놀라운 것은 남자 집사의 자격에 비해서 조금도 모자라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장로의 자격이나 집사의 자격이 그 수준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과는 다르게 결코 권위적 계급 구조를 가진 단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결코 계급식 직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은사와 소명이 다르기에 직책이 다른 것이지 직책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로, 집사, 권사에 대한 자격 기준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신앙인으로 직책으로 사람 사이의 우열을 가리지 않습니다. 비단 교회 조직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은 모든 조직에서도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일반 사원이나 과장이나 부장이라도 아니면 사장, 회장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직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풍조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학벌이나 능력이나 지위를 사람의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그가 누구며 무엇이냐를 떠나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열을 논하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은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르게 창조되었고 다른 일을 더 잘하도록 각각 지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남녀의 평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성의 차이가 인간 차별을 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동일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데 남 집사나 여 권사가 그 자격기준이 서로 다르지 아니합니다. 8절과 11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고”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비록 개역개정판은 헬라어 같은 단어를 가지고 남자 집사의 경우는 “정중하고” 여자의 경우는 “정숙하고”라고 달리 번역을 했지만 남녀를 막론하고, 집사이든 권사이든 막론하고 개역성경은 우선 꼭 같은 단어, “단정하고”라는 기준을 맨 먼저 말합니다.
어떤 단어로 번역되었든지 헬라어의 본래 의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공통분모입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존경을 받느냐는 구체적인 항목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기질이나 삶의 자리에 따라서 좀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존경받을 만한 여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먼저 “모함하지 말며”라고 규정합니다.
남자 집사인 경우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였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두 경우 공통점은 말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남녀 불문하고 직함에 상관없이 사람이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언어생활에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말이 신뢰할 만해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남자보고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라고 하는 반면 여자보고는 “모함하지 말며”라고 합니까?
일구이언에 대해서는 지난주일 상세히 설명했기에 그만두고 “모함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남을 헐뜯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필 여자에게 “모함하지 말며”라고 했을까요?
남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업 상(?) 일구이언할 위험이 큰 반면 여자는 그 기질 상 남을 헐뜯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할 위험이 커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자와 여자 중에서 대체로 누가 말을 더 많이 하고 잘합니까?
십년수도를 하고 방금 하산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자가 더 말을 잘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결혼해서 10년, 20년 살고 나서도 말로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대단한 남자입니다. 그런 남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을 만합니다. 말에 관한한 여자가 탁월합니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생활 몇 년 해보면 이웃사람 만나서 외국어로 수다 하는 것도 남자보다 여자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장점 그것이 바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왕자 압살롬의 머리털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는 이스라엘 처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든 왕자 압살롬의 등록상표였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그의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림으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말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경받을 권사의 자격 가운데 첫째 살펴야 할 기준은 “모함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 세워야 하는 존경받을 만한 권사는 무엇보다 남을 헐뜯고 비난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는 남자든 여자든 할 말 안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었다고 돌아서서 바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해서 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면보다 이 면에서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집사든 권사든 맡아야 합니다.
특히 존경할만한 권사는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창고 붙이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말로서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참여할 일들이 많습니다. 위해서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위해서 전도하는 일도 모두 말로서 섬기는 일입니다.
다만 남을 모함하거나 헐뜯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 어쩌면 ‘권사’라는 명칭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직분을 맡은 사람은 봉사의 일을 해야 하고, 일할 수 없는 사람은 휴무를 해야 옳습니다. 권사는 손자를 보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집사의 직분을 교회가 주는 것은 공동체와 구역 내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
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권사의 연령기준이 이전에 50세에서 45세로 낮추어진 것을 아직도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그 어느 것도 명예직이 아닙니다. 모두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기력이 있고 여건이 될 때 직분을 맡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권사의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무 수행을 할 수 있고 하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너는 교회 오래 다녔는데 아직 권사도 못 되었냐?”하는 핀잔 방어용 직책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 존경받은 만한 여 성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절제하며”라고 설명합니다.
남자인 경우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며”라는 자리에 여자에게는 “절제하며”라고 합니다. 남자인 경우는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는 반면 여자인 경우는 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절제하며”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지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의 경우 술 문제와 관련한 자리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둡시다.
우선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절제운동”하면 잊히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주축이 되어서 절제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주요항목이 금주금연 운동이요 외채상환 운동, 물산(국산품) 장려운동입니다.
아마 육십 대를 넘은 분들은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 때 금주금연가를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술 하면 남자들만 조심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술만 문제가 아니라 담배도 문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중독성 오락이나 취미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절제하며”라고 여성들에게 말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여성 전용 카페가 등장한 지 오래 되었고 호텔 로비에 가면 담배 피우는 여성들이 오히려 많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므로 절제하고 조심하는 일에도 가히 남녀평등 시대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특히 여 성도들 가운데 새잡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화투로 Q. T. 하는 분들이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 권사 후보에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하여간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통제해야지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통제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생활 훈련이 되신 분들이 선택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뛰고 있는 분들을 골라도 후보군 259명 가운데 오십 명은 넘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존경받을 만한 여성도가 되기 위해서 세 번째 요건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이 항목에서도 남자에 비해서 예리한 지적이 없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충성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하겠습니다만 우선 남자 집사와 평행을 이루는 측면을 먼저 고찰해 봅시다.
여자 성도에게 기대할 경제적인 측면에서 충성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잘 생각해보면 남자가 부정직한 수입을 탐하는 일은 여자와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남편의 사회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아내가 끼친다는 것은 누구는 인정할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월급을 생각하지 않고 지출을 한다면 남편은 그 적자를 매우기 위해 무슨 돈이든지 호주머니에 넣을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가정의 살림 사는 일을 맡아 있는 여자 성도들은 경제운용에 있어서 성실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외국을 다녀 본 사람들이나 살아본 사람들이 지적을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우리 씀씀이가 너무 헤프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아끼지를 않습니다. 청소년 수련장에 수련회 끝나면 옷가지며 신발이며 시계며 찾아가지 않는 물건이 지천입니다.
어디 수련장뿐이겠습니까? 형편은 초등학교 중학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잊어버리고 왔다고 회초리 드는 부모가 요새는 실종되었습니다. 이렇게 생활훈련이 되어서는 세계를 상대로 앞서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 성도들의 성실한 삶의 자세는 매우 귀중합니다. 사실 아이들은 보고 배웁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의 삶의 자세가 아이들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남자 집사, 여자 권사 할 것 없이 공동체의 직분을 맡아 섬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삶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비록 여자들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규정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영적인 자격이나 가정적인 자격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만 영적인, 신앙적인 자격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앞에서 언급되었기에 중복을 피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그 정도는 상상력이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여자들도 역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라”는 규정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우리의 양심이 새로워지고 거기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해야 함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권사의 직분 역시 신앙공동체의 직분이므로 믿음의 비밀을 맛본 사람이 맡아야 함은 너무 당연합니다. 믿음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권속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남자 집사에게 물었던 가정적인 규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대신 “한 남편의 아내가 되며”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 남편의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의미합니까? 조금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은 너그러워야 한다면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아내입니다. 모든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은 맛있는 식탁일 것입니다. 거기서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새날을 위한 재충전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자기보다 말을 잘하는 것을 우리 남편들은 인정하지만 아내 혼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의외로 적습니다. 일방적인 선전보다 대화를 사람들은 누구나 선호합니다.
단둘이서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남편을 인정하고 세워주십시오. 중요한 집안 일에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는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남편에게 할 말이 있거나 따질 일이 있을 때에 남편의 기분을 참작하십시오.
또한 남자들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남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라는 책을 읽고 남편 연구를 좀 하십시오. 서로를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으로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추천합니다.
이제 장로, 집사, 권사, 이 세 가지 직분자의 자격을 살펴보는 설교의 마지막 결론으로 13절을 살펴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형식은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에 대한 보상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이것 역시 모든 직분자들을 향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감독 즉 장로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그리고 권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기대할 수 있는 복된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읽어도 무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두 가지 영역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름다운 지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는 말은 오해되기 쉽습니다. 마치 안수 집사로서 직분을 잘 감당하면 더 아름다운 지위인 감독, 장로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구절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교권체계가 갖추어진 후부터 이런 잘못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말은 바른 의미는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그 직분에 어울리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집사의 직분에 뽑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직분에 충성하면 모든 성도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장로라도 다 같은 장로가 아닙니다. 집사라고 다 같은 집사가 아닙니다. 권사라고 다 같은 권사로 성도들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는 직분자는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고 문제를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를 드리고 싶은 장로, 집사, 권사는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보에 이름이 나란히 기재된다고 꼭 같은 직분자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람에 이름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고 꼭 같은 크기의 사진이 실렸다고 성도들이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13절에 나오는 아름다운 지위라는 말은 직분을 잘 감당하면 우선 땅 위에서 성도들로부터 그 직분에 어울리는 존경과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의 약속은 무슨 의미입니까?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본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에게 직분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받게 되는 축복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믿음의 비밀을 맛본 정도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담력에 관해서 약속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행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믿음이 있는 자가 직분을 맡습니다. 그러나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되면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정도가 아니라 믿음의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믿음의 큰 담력을 가진 분들은 그 행사가 다릅니다. 신앙생활에 활기가 넘칩니다. 겨우 주일 한 번 나오는 예배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일 주 일 세 번 공적 예배뿐만 아니라 매일 기도의 자리를 사모합니다. 무슨 사역을 해도 열매가 있습니다.
특히 여기 “담력”이라는 말은 성령 충만과 관련해서 신약에는 자주 나옵니다. 마음속에서 넘치는 확신 가운데 자유롭게 터져 나오는 말을 일차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를 해도 틀립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힘이 있습니다. 폭포수와 같습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이 힘이 넘칩니다.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전도를 해도 다릅니다. 듣는 사람이 감화를 받습니다. “아줌마 이야기는 다르네요”라고 듣는 사람이 그 힘 있는 증거에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도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다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고 다 같지는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자들에게 허락하신 약속은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주님을 따르면 한 날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귀한 직분을 받게 될 것이고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게 약속하신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된 교회에서 직분자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집사나 장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일은 신중히 처리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기준을 살펴보면서 한 사람씩 세워나갈 때 교회가 주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권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먼저 그 삶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존경받습니까?
첫째 언어생활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대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모든 삶에 절제가 되어야 합니다.
연속극 보다 성경 묵상을 매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
세 번째로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합니다.
근검절약하며 남편을 더러운 이익을 탐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권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사죄함을 경험한 자이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했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탁월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백성을 돌보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권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집안에서 남편과 자식, 그리고 함께하는 식솔들을 잘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오십 명 골라보십시오. 45세에서 65세 안에 드는 분 가운데 그 정도는 충분히 있습니다. 미리 답안을 준비해 오셔서 투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혹 이번에 권사 피택 후보군에 들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자 성도로서 여러분도 이 정도 목표를 세우시고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3: 1-13(교회가 필요한 일군) (0) | 2013.07.19 |
|---|---|
| [스크랩] 3: 8-13(교회의 일꾼) (0) | 2013.07.19 |
| [스크랩] 3:13(직분자의 축복) (0) | 2013.07.19 |
| [스크랩] 3: 8-13(집사에게 필요한 7대 생활) (0) | 2013.07.19 |
| [스크랩] 3: 8-13(건강한 교회의 특징) (0) | 2013.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