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능력
국가의 혁신은 민주주의 정치가나 철학적 역사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개인의 인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인격과 행동이 세계를 기독교화 한다. 개인과 국가를 변화시킨다.
사람이 거룩하면 설교도 거룩하다. 설교는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설교자는 살아 있다.
내가 바랐던 천국은 바로 거룩함의 천국이다(조나단 에드워즈).
복음은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복음은 그것을 맡은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설교자가 복음을 인격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의 모형을 닮은 견고한 형상의 설교자, 영웅적이고 꿋꿋하고 군사 같으며 성자 같은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요, 심각하고 어렵고 순교하는 일이었다.
기도는 사람을 만들며, 기도는 설교자를 만든다. 기도는 목사를 만든다.
감동과 진지함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배우의 감동이요, 변호사의 진지함에 지나지 않는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불꽃으로 인해 감동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주석에 대해 웅변을 토할 수도 있고, 자신의 두뇌로 만들어낸 것을 전달하는데 진지할 수도 있다. 교수가 설교자의 자리를 차지하여 사도의 불을 흉내 낼 수도 있다. 조명된 말씀처럼 빛을 내고 광채를 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빛과 광채는 진주를 밭에 뿌린 것과 같이 생명이 없다.
의문의 설교는 웅변적일 수 있다. 시와 수사로 가미하고, 기도로 물을 뿌리고 감정으로 향을 내고 천재적 착상으로 조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값비싼 장식품이요, 시체를 담은 관 위에 놓인 작고 아름다운 꽃에 지나지 않는다.
겉은 아름답게 하나 덕을 세우지는 못하고, 사람을 즐겁게 하나 거룩하게 하지는 못하는 교회 자신의 인격에서 기도가 현저하고 주된 요소가 되지 못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생명을 주는 힘을 상실한 설교자이다.
일반 신자보다 더 기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맡은 직분을 감당할 자격이 없는 자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게으르다면 당신 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교인들까지도 불쌍한 사람들이다.
가벼운 기도는 가벼운 설교를 낳는다.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고하는 일은 훨씬 더 위대하다.
설교자에게 기도가 주어진 것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며" 주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설교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로 자신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신"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강력한 결과를 가져오는 설교자는 사람을 설득하기 전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데에 승리하는 사람이다.
기도는 자기를 낮추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과 자존심을 부끄럽게 하고 헛된 영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영적 타락을 경고해 준다.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기도에 별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증명된다. 보통의 설교자들이 기도에 바치는 시간은 매일 기도하는 양으로 계산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옷 바람으로 또는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입기 전에 서둘러 잠깐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는 기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습관에 견주어 볼 때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초라하고 유치한가!
기적을 낳았던 것은 기도이다(약 5:17-18).
강한 능력을 느끼게 하는 기도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한 데서 오는 산물이다.
우리의 짧은 기도는 그것에 앞서 드려진 긴 기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우연히 또는 바쁘게 들락날락하는 이에게 그분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 홀로 하나님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갖는 것이 그분을 아는 비결이요, 그분의 영향을 받는 비결이다.
우리의 모범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그의 습관은 많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정된 기도의 장소를 갖고 계셨다.
찰스 시므온은 새벽 4시부터 8시까지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에 드렸다.
웨슬리는 매일 2시간씩 기도했다. 그는 새벽 4시에 기도를 시작하였다.
루터는 "만약 내가 매일 새벽 두 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는다면 그 날의 승리는 마귀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켄 감독은 매일 새벽 3시 종이 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시작했다.
애즈베리 감독은 "나는 할 수 있는 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2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보낼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천국에의 초대의 저자인 조셉 얼라인은 기도를 위해 4시에 일어나 8시까지 기도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다른 상인들이 일을 하려고 왕래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는 "아, 이 얼마나 큰 수치인가, 나의 주님이 저들의 주인보다 못하단 말인가!"하며 안타까워 했다.
옛 감리교도의 기도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아침 4시 또는 5시부터 -개인 기도, 저녁 5시-6시까지-개인 기도."
경건하고 놀라운 생애로 이름이 나 있는 스코트랜드의 설교자 존 웰치는 하루에 8-10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잘못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울고 있는 자신을 불평하는 아내에게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할 영혼이 3천명이나 되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른단 말이요"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아침 일찍 하나님을 찾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영혼이 아니다.
오늘날 목회에서는 영적 영향력이 눈에 띄게 부족하다. 나는 이것을 나 자신에게서 느끼고, 또 다른 사람에게서 본다. 우리 안에 천박하고 잔재주를 부리며, 책략을 쓰려는 기질이 너무 많지 않은가 우려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 사람 저 사람의 취향과 편견에 맞추려 애쓴다. 사역은 중대하며 성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소박한 영적 습관과 모든 결과에 대한 거룩하고도 겸손한 무관심을 요구한다. 사역자들의 가장 큰 결함은 경건의 습관의 결여이다.
기독교는 최선을 다하여 가장 매력적이고 완전한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헌신 없이 참된 기도가 있을 수 없고, 기도 없이 참된 헌신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브레이너드)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그를 통해 일하실 수 있었다. 온 통로가 하나님의 충만하고도 강력한 능력이 통과할 수 있도록 넓혀지고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사람을 발견하시기만 하면, 못하실 일이 없는 것이다.
"내가 집에 돌아와서 금식과 기도와 묵상에 잠길 때면, 나의 영혼은 금욕과 자기 부인과 겸손과 세상 일로부터의 분리를 갈망한다. 나는 이 땅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정직하게 땅에서 일할 뿐이다. 땅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위해서는 일 분도 살고 싶지 않다."(브레이너드)
자리와 찬사에 눈이 어두운 야욕이, 몸소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태를 취하시고 명성을 등지신 이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교만하고 허영에 가득 찬 자기중심주의자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이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성미가 좋지 못하고 감정적이며 이기적이고 모질고 세상적인 인간이, 오래 참음과 자기 부정과 온유함을 지님으로 세상 사랑을 버리고 세상에 대해 죽기를 요구하는 이의 삶의 원리를 전할 수 있을까?
사무적이며 마음이 결여된 고용인이 선한 목자로 양들을 위해서 가지 목숨을 바친 이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사례와 돈을 탐하는 욕심쟁이가 그 마음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바울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오늘날 강단에서 가장 심각하고 가장 보편적인 과오는 설교에 기도보다는 사상을, 마음보다는 머리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머리는 결코 순교자가 될 수 없다. 사랑과 충성에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슬퍼하는 자에게 입맞추며, 비참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아픈 자를 쓰다듬어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사도적 기도는 사도적 성도를 만들고 교회의 순결성과 능력이 사도 시대와 같게 만든다.
영적인 지도자가 있는 시대가 곧 교회의 영적인 번영이 있는 시대였다.
설교자는 기도해야 한다
설교자는 기도 지원을 받아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마음에는 구원이 찾아 오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에게는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에게는 설교가 덕이 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는 알아주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가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모이면 마치 물방울이 모이는 것처럼 대양을 이루어 모든 저항을 격파할 수 있다
(롬 15:30, 엡 6:18-19, 골 4:3-4, 살전 5:25, 고후 1:11, 살후 3:1-2).
사도들이 간청하고 목적한 바는 교회가 기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즐겨 헌금하는 은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생활에서 종교 활동이나 일이 차지하는 위치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의 평가나 긴급성 면에서는 이들 중 어느 하나나 모든 것을 합쳐도 그 필요성과 중요성이 기도와 견줄 수가 없었다. "성도들이 모든 곳에서 기도하게 하라."
엘리야의 기도는 단지 몇 줄로 농축되어 나타나 있지만, 그가 기도 드릴 때에 수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고귀한 교제를 위해 애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확신을 가지고 대담하게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고 말할 수 있었다.
영적인 일은 힘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적인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도, 참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집중과 시간을 쏟아 넣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은 그것을 즐거워 하지 않는다. 피상적인
일에서는 곧잘 하지만, 그런 희생적인 일을 할 만큼 강인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좋을 정도로만 간신히 기도하는 습관, 곧 고상한 모양이 되고 양심의 소리를 잠재울 수 있을 만큼만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아편이다.
좀 더 이른 아침에 좀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도리는 것은 마치 마술과 같아서 영적으로 쇠퇴한 영혼들을 다시 새롭게 하고 힘을 얻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한 삶으로 나타난다.
설교자와 교회를 다시 기도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고도 남도록 뜨겁게 기도하자."
E. M. Bounds의 "기도의 능력"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