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동방교회의 가르침
토마스 스피들릭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목 차
1. 기도의 본질
1) 기도의 탁월성과 필요성
2)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3) 기도의 정의
4) 청원기도
5)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고양
2. 기도의 단계와 유형
1) 기도의 단계
2) 전례기도
3) 이콘
4) 교회-건물의 상징
3. 끊임없는 기도
1)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데살 5,17)
2) 짧은 기도의 수행
3) 예수기도
4) 예수기도 안에서 3단계
5) 정신적-물리적, 과학적 방법
6) 러시아의 순례자
7) 예수기도에 관한 숙고들
1. 기도의 본질
1) 기도의 탁월성과 필요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대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고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기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은둔자 테오파네(Teofane il Recluso)는 기도에 관한 교부들의 작품이 그렇게 많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도는 전부이며 신앙과 신앙생활 전체를 요약한다. 누군가 교부들이 쓴 기도문들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음집은 구원을 위한 참된 입문서가 될 것이다.” 사실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생명에 대한 표현, 정신의 호흡, 영성생활의 바로미터이다. 전(全) 교회는 기도로 숨을 쉰다.
수도승들은 한때 기도를 학문 중의 학문인 거룩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언제나 궁극적인 토대와 모든 실재의 존재이유를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러한 토대는 성부이며, 성령은 성자를 통해서 우리를 성부께 인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하나의 인격이다. 따라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감은 대화를 전제한다. 기도는 바로 이 대화이다.
2)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고대 전례 규정에 의하면,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향한다. 오리게네스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해서는 안 되고 그분을 통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단지 나중에 와서야 중개자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일이 흔해졌다.
기도 중에 인간 정신은 성령에 의해 인도된다.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 목소리는 그렇게 하느님께 도달한다.
게다가 기도는 하느님 말씀(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아름다운 표현에 따르면, 하느님은 단지 개인의 기도 안에만 계시지 않는다. 오늘날의 언어로 ‘신비적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코미아코프(Chomjakov)는 기도의 이 교회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누구도 자신의 개인 기도를 신뢰할 수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전 교회의 중재를 요청한다. 천사들과 사도들, 순교자들과 성조들, 그리고 모든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하신 우리 주님의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 거룩한 일치가 교회의 참된 생명을 건설한다.”
기도를 통한 중재와 세상의 운명에의 참여인 사랑으로 충만한 이 도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의 공로들에 대한 가역성’이라는 표현을 너무 법률적이라고 생각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3) 기도의 정의
중세 신학자들은 기도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기 이전에 교부들이 내린 정의들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상당히 자주 이 정의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한 측면 혹은 다른 측면을 묘사하는데 제한되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전통 전체에서 다음 세 개의 정의들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 기도는 합당한 선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같다.
- 기도는 하느님을 향해 정신을 들어 높이는 것과 같다.
- 기도는 하느님과 영혼의 대화와도 같다.
요한 다마쉐노는 앞의 두 개를 혼합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들어 높임 혹은 합당한 선을 하느님께 청함이다.” 다른 많은 작가들이 이 정의를 따르고 있다.
4) 청원기도
하느님과 인간의 통교인 기도는 무엇보다도 천상 선물들에 대한 겸손한 요청이며 그것들을 받는 자세이다.
은둔자 테오파네에 의하면, 기도는 언제나 모두를 위해서 또 전 교회를 위해서 행해진다. 교부들은 ‘주님의 기도문’을 해설하면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입증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자는 개인적으로 필요한 모든 바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선보다는 차라리 천상적인 선을 청하는 것이 보다 완전할지라도 말이다.
영적 스승들은 만일 우리의 기도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적게 기도하기 때문이며 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다음의 조언이 주어진다. “하느님께 청하는 바를 즉시 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그것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려는 당신의 항구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보다 큰 선물을 주시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느님과 함께 대화하고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매료되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요한 9,31 참조). 교부들은 죄인들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그 청원이 무지로 표현되었다면 어떻게 신앙으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죄로 인해 야기된 이 참된 선에 대한 무지의 어둠은 의인들의 기도에서 역시 자주 지속된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의 양심에서 오는 청원보다 더 고귀한 청원을 표현하신다. 마음 은밀한 곳에서 우리의 기도이기도한 성령의 기도는 언제나 받아들여진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신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요청이 보다 자주 그리고 집요하게 반복되는데, 곧 죄인들에 대한 용서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용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고, 그 결과 이 안에서 그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사는 받은 선물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교 찬가 저자들은 70인 역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셈족 언어를 물려받았으니, 곧 호몰로제오(homologéô), 아이네오(ainéô), 독사조(doxázô), 에울로제오(eulogéô)와 같은 동사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용어 에우카리스테오(eucharistéô),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ía)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인 그리스도교적 감사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드러내면서 신약성서에 들어오게 된다. 교부들은 성 바울로가 언급한 기도의 네 가지 형태(déêsis, proseuchê, énteuxis, eucharistía: 1디모 2,1)를 설명하면서 에우카리스티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오리게네스가 했던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실제로 이 네 가지 측면은 청원과 감사의 응답 둘로 감소되며 또 떼어놓을 수 없게 일치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감사의 응답은 점차 영성생활의 핵심이 되어갔다. 바울로에게 있어 그리스도인 삶 전체는 지속적인 탄원과 감사로 유지되고 발전되었다.
5)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상승
이미 고대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고양(高揚)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플라톤은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상승(anábasis)과 높은 곳에서 오는 선들에 대한 관상, 즉 이성적인 세계를 향한 영혼의 상승을 묘사한다. 성서의 여러 곳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
플라톤적 지성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이 상승의 탁월한 기관인 ‘정신’(noûs)의 개념을 설명하고 적응할 필요가 있었는데, 곧 그것을 ‘마음’(kardía)으로 대체하거나 혹은 두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능력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모인다는 주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성부이신 하느님을 향해 고양되기 때문에 이 상승은 (플라톤적 의미로) 하나의 순수한 ‘환시’(vision)에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과 정신의 대화”가 된다. “독수도승은 밤낮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수도승으로 불림을 받았다.”
초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하나의 실제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육체는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이 상승과 그분과의 영적인 대화에 참여하는가의 문제였다. 교부들은 이교 예식의 형식주의를 거슬러 육체의 위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자주 단언하였다. 성 바울로는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하였고 우도는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경우들을 위해서는 바실리오의 다음 권고가 훨씬 더 인상적이다. “영혼의 능력이 어떻게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영혼의 감수성이 어떻게 육체에 의존해 있는가를 생각하라.” 조시프 볼로코람스크는 이 점에 관한 회수도승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다. 육체를 구부리는 것은 내적인 주의를 쉽게 해주며, 내적인 정신집중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태도와 더불어 외적으로 드러난다. 고독가들 역시 무엇보다도 장궤나 부복의 형태로 ‘몸의 기도’를 실천하였다. 헤시카스트들의 심신상관적(心身相關的)인 기법은 육체를 자주 관상의 상승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자 한다.
끝으로 전례를 잊어서는 안 된다.
2. 기도의 단계와 유형
1) 기도의 단계
기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힘과 능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드러난 요소에 따라 기도의 다양한 단계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다. 은둔자 테오파네는 이 단계들의 전통적인 체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구조와 일치한다.
(1) 몸의 기도 혹은 구송기도
(2) 정신기도
(3) 지성과 마음의 기도 혹은 단지 마음의 기도, 감성의 기도
(4) 영적인 기도 혹은 관상
첫 번째 단계와는 달리 뒤의 세 가지 형태는 ‘내적인 기도’라고도 불린다.
몸의 기도는 텍스트를 읽거나 암송하고 또 부복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영적 스승들은 이런 기도의 형태들을 무엇보다도 보다 높은 기도를 위해 필요한 준비, 하나의 단계, 꽃과 열매에 선행하는 잎, 예수의 육신과 첫 접촉, 혹은 하느님의 창조하는 말씀과 세상 안에 작용하는 그분의 권능에 우리 인간의 말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몸의 기도는 분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도의 보다 높은 단계들로 올라가기 위한 첫 도구로서 몸의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떤 주의나 정감 없이 행해지는 기도 양식들에 대한 단순한 반복을 혹독하게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르티리우스 사도나(Martyrius Sahdônâ)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두려움과 주의 안에서 우주와 주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성무일도와 기도는 헛되고 무익하다.” 반대로 오리게네스는 예수와의 단지 육신적인 이 첫 접촉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암송하는 기도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악마가 이해하지 않는가! 그러면 결국 악마는 쫓겨난다고 주장하는 어떤 저자들도 있다.
기도의 두 번째 유형은 추론적 지성의 활동에 호소하는 것이다. 서방에서 숙고, 성찰, 묵상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동방에서는 이런 형태의 정신기도를 몰랐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테오파네는 이런 수행들의 상대적인 가치를 망각하는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지성적인 숙고는 오로지 마음의 기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 암송된 말씀들을 더 잘 맛보기 위해서 그것들을 묵상(되새김질) 한다.
감성이 서서히 마음을 달구기 시작할 때,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탄식’이 될 것이다.
‘마음의 한 상태’가 되는 기도는 이미 참된 기도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택된 이들에게는 보다 나은 관상이 유보된다. 이 관상은 영적인 요소가 육적인 요소를 또 생각들과 인간적인 감정들을 지배할 때 실현된다. 또 기도가 성령의 깊이 안에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침묵 안에서, 탈혼 안에서 이루어질 때 실현된다.
2) 전례기도
동방은 공적기도의 교회적인 성격에 관한 아름다운 내용들을 남겼다. 동방 교회는 예식들을 거행한다. 거기에 참석할 때 우리는 교회에 결합되고 교회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다. 외적 예식들에서 멀어지는 사람은 교회의 기도에서 멀어지며, 교회의 기도에서 멀어지는 사람은 주님이 약속하신 큰 상급을 포기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다.”(마태 18,20)
교회성에서 예식들의 성사적 성격이 유래한다. 사실상 성사들은 말하자면 교회의 삶 전체와 그 전례 안으로 들어온다. 불가코프(Bulgakov)는 동방 예식들의 사실주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보브린스키(B. Bobrinskij)는 성탄절에 교회들 안에서 예수께서 참으로 탄생하시고 부활절에 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런 성체성사의 성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고골(N. Gogol)은 자신의 저서「거룩한 전례에 관한 묵상들」에서 공적기도의 교육적인 성격을 유효적절한 방식으로 강조하였다. 예식들은 그리스도인의 입맛을 향상시키고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한 일종의 학교 역할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 예식들 안에는 형식주의라는 실제적인 위험이 숨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식의 복잡성 역시 순수한 기도의 단순성을 방해할 수 있다.
3) 이콘
이콘은 동방 영성 안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성화벽을 이루고 있으며 또 행렬에도 사용되며, 신자들을 축복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각 가정에도 ‘아름다운 모퉁이’라고 칭하는 작은 성소가 있으며, ‘가정의 이콘’이 그려진다.
구원경륜에 밀접히 연결된 성상(聖象)은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의 주된 두 측면을 강조하는데, 곧 ‘진리의 설교’와 ‘하느님 은총의 전달’이다.
이콘은 교회의 거룩한 전승에 대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이다. 787년 니체아 공의회는 바실리오를 따르면서 이콘을 신앙의 설교에 비유한다. 이콘 예술은 사제직의 신비에 접근하였다. 화가들에게 부과된 전통적인 지침들이 여러 작품들 안에 수집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푸르나의 디오니시오(Dionisio di Furna, +1745)의「Hermêneía tês zôgraphikês」이다. 반면, 러시아에서 이 지침들은 ‘포들린니키’(podlinniki)라고 불려졌다.
거룩한 진리의 설교로서 이콘은 하느님 말씀의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은총은 성상(聖象)을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교회의 전례적이고 성사적인 생활은 표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콘은 보다 나은 실재를 표현하고 그 실재를 어느 정도 현존하게 한다. 이콘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 결과 이콘은 공경되고 관상된다. 따라서 이콘 예술이 제시하는 목적은 그 가시적 표상 안에 하느님 현존을 증거하고 또 그 시선 아래 있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데 있다. 이콘 예술의 목적은 관상이다. 이콘화가는 자기가 그리는 세계의 거룩하고 신비적인 의미를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 동기 때문에 이콘의 상징성이 그렇듯 심오한 것이다. 즉, 그 구성과 전망, 색깔과 빛, 장식요소들 모두 영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한편, 이콘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콘이 드러내는 신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순수한 양심으로 합당하게 이콘에 다가가야 한다.
4) 교회-건물의 상징
교회의 상징성은 4세기부터 해석되고 설명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7세기와 8세기에 증거자 막시모의 Mistagogia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소프로니오(Sofronio),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제르마노(Germano), 그리고 후에 테살로니카의 시메온의 작품들 안에서 보다 완전한 신학적 표현을 얻게 된다.
교회-건물은 일차적으로 교회-집회(신자들의)의 상징이다. 그 안에서 영혼들은 한 실재를 이루는데, 성령께서 그들을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이 새로운 성전, 그리스도 몸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전례적 희생을 통하여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성사적 가치를 지니지만, 동방인들은 오히려 다른 본질적 진리, 목적과 결과, 이 희생의 의미 자체, 즉 인간과 가시적인 세계 전체의 변형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지상의 천국이다.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예식들의 아름다움 안에서 또 건물의 상징성 자체로 인해서 어느 정도 눈에 보이게 된다. 모스코바의 총대주교 알렉시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보는 것과는 구별된다. 모든 것이 빛나고, 모든 것이 정신을 들어 올리며, 정신을 생각들과 이 세상에 대한 습관적인 느낌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3. 끊임없는 기도
1)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데살 5,17)
에바그리오는 말한다. “지속적으로 일을 하고, 깨어 있고, 단식하라고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성은 기도하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증거자 막시모는 덧붙이기를, “성서는 불가능한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하다’와 ‘언제나’, 이 두 단어에 대한 해석은 전혀 일의적(一意的)이지는 않았다.
메쌀리아니들은 다음 주장과 더불어 바울로 사도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즉, ‘기도하다’는 ‘기도문들을 말하는 것’을 뜻하며, 또 ‘언제나’는 모든 이교적인 일, 무엇보다도 ‘손노동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체메띠(acemeti)는 공동체 울타리 안에서 절대로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공동체 안에서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여러 그룹의 수도승들이 바치는 성무일도 안에서 계속해서 항구한 기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원칙은 ‘항구한 성체 흠승’과 ‘영구적 로사리오’란 명칭 하에 최근 서방에서 확산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을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메띠’(acemeti)라고 불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 해결책은 오리게네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기도를 필요한 일들에 결합시키고, 일들을 기도에 결합시키는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한다. 오로지 이런 식으로만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계명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성인의 전 생애가 하나의 위대한 기도로 간주된다.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는 단지 그 한 부분이 된다.
희랍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주석가의 이 가르침은 라틴 계통에서 가장 탁월한 아우구스띠노와, 시리아인들 가운데 으뜸인 아프라테(Afraate)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기도와 일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남아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아체메띠’의 창설자 알렉산드로는 하루 24시간에 부합하는 24개의 일상 수행들을 제시한다. 후에 교회법적인 일곱 시간 규정이 발전되었지만, 성인들 마다 개인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기도시간을 다시 규정하였다.
이 모든 다양성의 동기는 무엇인가? 고전적 해결책은 ‘일’을 하나의 ‘기도’로 만들지만, 훌륭한 내적 자세로, 그리고 관상 안에서 즉, 기도 안에서 나고 양육되는 ‘디아테시스 아가테’(diáthesis agathê)로 일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언제나 까시아노의 표현에 따른 ‘기도의 상태’(orationis status)를 살고자 직접적으로 기도에 할애된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하였다. 피곤함도 분심도 기도 행위의 외적인 지속을 방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기도의 삶은 하나의 상태, 하나의 정화(katastasis), 하나의 습관적 마음 자세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 이런 습관적 자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2) 짧은 기도의 수행
즉시 지속적인 기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구송기도에 충실하고 그것을 잘 암송함으로써 시작할 필요가 있다. 독수도승 테오파네(Teofane)는 ‘기도의 규칙’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적 사부와 함께 기도문을 정해야 하며, 그 다음 거기에 특별한 필요들이나 또는 마음의 영감에 의해서 제시된 다른 기도문들이 부가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투쟁에 대한 러시아 전통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교부들은 분심을 피하려고 반복해서 하는 짧은 기도들을 창안하였다. 까시아노도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까시아노에 의하면, 이 짧은 기도들은 이집트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나이, 팔레스티나, 시리아, 전 그리스도교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기도들의 일반적인 특성은 그 ‘간결성’과 ‘단순성’, ‘지속적인 되새김’(meletân, meditari)에 있다. 초기에는 상당히 다양한 양식들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금욕가들에게서 그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양식들이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오! 하느님, 저를 도우러 오소서, 주님, 저를 구하러 어서 오소서”(시편 69,2)와 같은 것이다. 그 후 ‘예수기도’만의 고유한 이점으로 인해 자유로운 양식들을 배제하게 되었다.
3) 예수기도
‘예수기도’는 희랍어 ‘에우케 예수’(euchê Iesoû)와 동일한 러시아어 ‘몰리트바 지수소바’(molitva Jisusova)의 문학 전통이다. 수세기 전부터 다음의 형식으로 고정화되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러시아인들은 ‘저에게’에다가 ‘죄인’을 덧붙인다). 이 기도는 정교회의 심장이며, 비록 그 기원이 보다 고대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오늘날 동방 그리스도교 안에 매우 활발히 남아 있는 수행이다.
비잔틴과 러시아 수도승들은 ‘암송’과 그것들을 동반하는 ‘머리 숙임’을 세도록 도와주는 로사리오의 방법에 예수기도를 결합한다.
11세기 중엽까지 이 기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14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널리 확산되었다. ‘필로칼리아’(Filocalia) 안에 선별된 저자들이나 그 외의 여러 저자들은 서로 경쟁하듯 이 예수기도의 탁월성을 찬양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은둔자 테오파네는 필로메노 아빠스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열렬히 주님을 불러라. 성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노동과 식사 중에, 그리고 너의 잠자리 위에서 중단 없이 이것을 하여라. 한마디로 눈을 떠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렇게 하여라. 정확히 햇볕에 어떤 것을 쪼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의 태양이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예수기도 안에서 3단계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에서처럼 예수기도에 있어서도 구송의 단계, 정신의 단계, 마음의 단계, 이 세 단계로 구분된다. 구송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치를 지닌다. 자주 반복되는 짧은 기도수행의 경우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은둔자 테오파네는 이 기도에 성사적인 능력을 돌리기를 원했던, 그리고 이 기도 안에서 일종의 부적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한다.
내용과 관련하여 14세기부터 많은 저자들이 그 양식의 우수성을 경쟁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하였고, 이 기도의 온갖 효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예수기도의 첫 번째나 두 번째 요소에 강조점이 주어질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예수기도는 탄식(pénthos)을 낳는 수도승적 환경 안에서 유행하던 수많은 기도들 중 하나이다. 반대로 보다 최근의 작가들은 오히려 첫 번째 요소, 즉 주님의 이름이 지닌 특별한 힘에 강조점을 두기를 좋아한다. 실제로 흠숭과 탄식,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심연에 대한 환시, 그리고 모든 심연을 뛰어 넘는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분의 자비를 분리시키지 않는 편이 더 낳다.
세 번째는 마음의 단계이다. 은둔자 테오파네는 말하기를 “마음 안에서 다음과 같이 정신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라.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네가 이렇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이 기도를 통해 마음으로 들어가 갈망했던 목표에 도달할 때, 너의 무질서한 생각들이 멈추고 네 영혼의 움직임들을 이끌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 마음과 정신을 결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5) 정신적-물리적, 과학적 방법
이 기도의 목적은 어떤 마음 상태를 낳고 강화하는 것이다. 아토스 산의 헤시카스트들은 이 내적 융화의 과정을 수월하게 하려고 수도승 니체포로(Niceforo: 13세기 후반부)가 최초로 이론화한 정신적, 물리적 기법을 계발하였다. 이 기법은 어떤 윤리적 준비, 순수한 양심, 즉 ‘아메림니아’(amerimnía: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전제한다. 그러나 밀폐된 방, 등받이 없는 낮은 의자에 앉는 자세, 온 정신으로 시선을 배 한가운데, 즉 배꼽 위에 두면서 가슴 위에 턱수염을 기대어 놓는 것 등과 같은 외적인 조건들 역시 필요로 한다.
이 수행은 호흡을 규칙적으로 늦춤으로써 호흡의 박자에 맞추어 기도양식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정신적인 탐구와 항구한 예수 호칭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고 어둠으로 가득하지만, 정신의 통합은 곧 기쁨, 형언할 수 없는 환희, 적이 공격하지 못하는 불가침, 하느님께 대한 보다 큰 사랑, 어떤 위대한 빛(후에 ‘타볼산의 빛’이라고 칭하게 될) 등과 같은 기도의 열매를 낳는다.
6) 러시아의 순례자
‘자신의 영적 사부에게 했던 한 순례자의 진실된 이야기들’, 이미 여러 언어로 출판된 이 이야기들은 서방 독자들 가운데 예수기도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순박한 농부인 순례자는 계속해서 기도에 관한 전통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영적 사부(starez)가 그에게 단순화된 한 방법을 권고한다. 그것은 점차 3.000번에서 6.000번으로, 마침내는 12.000번으로 매일 그 횟수를 늘리면서 예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방법이다. 그런 다음 순례자는 더 이상 회수를 셀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그의 입술은 잠자는 중에도 저절로 움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움직임은 입술에서 혀로 옮겨 간다. 그 다음 기도는 혀에서 심장(마음)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순례자는 마치 심장 자체가 매 박동마다 한 단어를 암송하듯이 자기 기도가 심장 박동의 리듬에 일체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따르면, 기도를 자기 심장 박동에 일치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기도를 멈출 수 없다. 기도는 사실상 존재 자체의 활발한 작용이 된다. 이것이 완전한 기도인가? 순례자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길에 있음을 믿는다.
7) 예수기도에 관한 숙고들
최근의 비평가들은 예수기도에 수반되지만 단지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한 정신적, 물리적 기법에서 참되고 고유한 기도를 조심스레 구분한다.
예수의 이름에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교적 의식의 느린 각성과 연결된다. 우리는 5세기부터 18세기 러시아 영성가들에 이르기까지 동방 전통을 따를 수 있다. 이 신심을 향한 수많은 움직임들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헤시키오(Hesichio)에게 있어 예수호칭은 ‘넵시스’(nepsis)에 연결되며, 결과적으로 모든 악마를 거스른 효과적인 방어수단이다.
14세기부터 저술가들은 그것을 자주 그리스도교 신앙의 짧은 요약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예수 이름에 대한 공경의 극단적 형태는 ‘오노몰라트리’(onomolatri)라고 부르는 몇몇 러시아 수도승들을 1912년과 1913년에 러시아 교회를 분쟁으로 몰아넣었던 교리에로 이끌었다. 불가코프(S. Bulgakov)는 예수 이름을 예수의 인격과 동일시하지 않고 나름대로 하느님 이름의 성사적이고 역동적인 능력에 관한 이론을 계발하였다. 콜로그리보프(I. Kologrivof)는 동방 전통의 윤곽 안에서 입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베네딕도회의 한 이콘 안에 나타나는 주님의 현존에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심리학의 관점에서 다양한 측면과 구성요소를 지닌 정신적, 물리적 방법을 제시하는 그 관심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고대의 의사들은 호흡의 입김이 인체의 구성요소와 뒤섞이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교부들에게 있어 호흡 안에는 영(pneuma)과 피, 영혼, 목소리의 만남이 있다. 오늘날 헤시카스트들의 호흡법은 가끔 의식을 모아 묵상을 준비하는 힌두교의 요가 호흡법 ‘프라나이아마’(pranayama)와 비교된다. 그러나 료욜라의 이냐시오의「기도의 세 번째 방법」에도 비교된다.
「예수기도에 관한 담화」와「러시아 순례자」의 저자들은 이 방법의 건조한 수행에 따라오는 위로의 열기와 감정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또한 자연적인 효과를 성령의 은총과 혼돈하지 말도록 권고하며, 이런 실수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단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물질적이고 고유한 의미로 이해된)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생겨난 모든 효과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구심운동을 도와주는 마음의 영역에서 오는 모든 일련의 예민한 감정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저자들은 성적인 감정들 역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리석고 우둔한 것’으로 정의하면서 배꼽 위에 집중하는 것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 대신 ‘약간 왼쪽’ 가슴 위에 주의를 집중할 것을 권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요한 환경, 어두운 장소, 앉아 있는 자세, 근육의 긴장, 이 모든 것은 기도 안에서 영혼의 주의가 마치 한 건물의 기초와도 같은 몸의 자세에도 달려있다는 일반적인 경험이 된다.
한편 진정한 영성가들은 모두 이 방법이 ‘신속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수행의 정상적 수단들을 거치지 않고서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지름길로 간주될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게다가 그것이 전부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지는 않으며, 개인적인 안내자 없이 자주 위험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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