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제자가 꼭해야 할 3가지 (누가복음 6 : 27-38) 글/김창인 목사
제자는 좋은 스승을 모시게 될 때 영광이요, 자랑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 스승 밑에서 배운 제자요 하게 될 때 자신도 영광이지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제자는 곧 스승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스승을 배우고 그 이념을 배우고 정신도 배우는 등 스승을 온전히 배워서 스승을 따르고 스승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천상 천하에 제일 가는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예수님이 우리의 스승이라는 것은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대스승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배워갑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정신, 생활, 예수님의 전부를 배우며 살고, 또 따르며 배우고, 그분의 모습을 살아가는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만 차분하게 앉으셔서 하나하나 떠 먹이듯이 가르치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가리켜서 산상보훈이라 합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에 대하여 증거 하려고 합니다.
I. 대접하는 생활 (27 - 31절)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원수에게도 원수 갚지 말고 사랑해 주고 선대하고 축복해 주라, 그런 이야기로 바꿔 놓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그렇게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느냐, 그렇다면 문제가 아니냐? 심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원수를 갚으라는 말과 신약의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고 축복해 주라는 말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 이런 율법을 주실 때 그때는 지금부터 3천 5백년 전 좀더 올라가게 되면 4천 년 전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로 단군 할아버지 때 이야기입니다. 단군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4천 년 전에는 법도 없을 때요, 그때는 주먹이 곧 왕이요, 법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치고 빼앗아도 누가 보호를 못해 줍니다.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누가 나의 눈을 찔렀다고 하면 주먹이 센 내가 가서 눈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죽여 버리고 맙니다. 또 어떻게 하다가 이를 하나 부러뜨렸다고 가서 죽여 버리고 맙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그네들이 가장 어렵지만 가능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너희의 이 하나가 꺽였느냐 가서 죽이지 말고 이만 하나 꺽어 줘라, 눈이 찔렸느냐 죽이지 말고 눈만 찔러 줘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으라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만큼 지키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때의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최대한 그런 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에 와서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으나 사실상은 그게 아니라 눈은 찔렸어도 이는 부러뜨렸어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선대해 주고 저주하지 말고 그를 미워하지 말고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12장의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권한에 속해 있다는 것이요,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만 원수를 사랑해 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원수 갚는 권한을 우리에게 준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원수 갚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수를 갚으면 원수가 원수를 낳습니다. 내가 저 원수를 갚으면 그 아들은 나를 원수 삼아서 또 날 죽입니다. 내 아들이 원수 삼아 그를 또 죽입니다. 세상이 무슨 꼴이 되겠느냐, 너의 원수를 쓸어버리든 그렇지 않으면 은혜를 주든지, 갚는 것은 내게 맡기고 너희가 할 의무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우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30절).
그러나 다시 꼭 되돌려 받아야 되겠다, 이자를 얼마로 계산해서 계 놀이하고, 이런 계산 하에 주었다가는 돈도 떼이고 친구도 잃는다는 말입니다. 돈 거래야 가까운 사람끼리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꼭 이자를 받아 가지고 수입을 보려고 하면 거래를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이 질적으로 좋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돈이 말을 안 듣습니다. 마음대로 안 되어, 제때 갚지 못하다 보니 돈은 돈대로 떼이지 않습니까.
그 다음 친구가 멀어지고 맙니다. 돈 잃고 친구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돈 잃고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친구가 다시 벌어 가지고 그 돈을 나에게 갚아야 합니다. 돈도 찾고 친구도 찾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웃에 대한 것은 항상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꿔줄 때는 반드시 내가 못 받아도 좋겠다는 자세로, 꾸는 사람은 내가 정말 이 사업이 망하게 되어 저 친구의 돈을 못 갚는다 할 때에 전세방이라도 빼고, 숟가락이라도 팔아서 갚을 예산하고 꾸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에 사람도 잃지 않고 나중에 돈까지도 찾게 되어 친구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는 이렇게 살라는 교훈을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참 너무 좋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은 남을 죽였기 때문이다. 남을 죽이는 것은 곧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뒤집어 놓으면, 남을 살리면 나도 사는 결과가 되고 남을 죽이면 나도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에 대한 대접은 나에 대한 대접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높임 받기 원하면 남을 깎아 내리지 말고 또한 높아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높여 주면 그 사람이 나를 높여 줄 때 그것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대한 대접이 곧 나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제자된 생활 중의 첫째로, 대접하는 생활은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에 대해서는 선을 행하는 것, 그리고 자기에 대한 대접인데, 이것은 곧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니까 나도 너를 사랑한다, 그것이 무슨 칭찬을 받을 것입니까? 거기 무슨 상급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잘하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네가 사랑하니까 나도 사랑한다는 것은 패거리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패거리 사랑은 칭찬 받을 일이 전혀 못 됩니다. 상급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입니까. 죄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저가 나를 대접 잘해 주니까 나도 너를 대접한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 즉 세상의 세리와 죄인들이 더 잘해 주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너희가 선대를 하고 칭찬이 있으리라, 상급이 있으리라 하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세 번째로 밝히는 이야기는 너희가 이자 받을 생각으로 돈을 빌려 주면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 같아도 그것이 무슨 칭찬 받을 것이며 그것이 무슨 상급받을 것이냐는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돈을 빌려 2부,3부 이자를 받고 그것을 계 놀이해 가지고 내 돈 키우겠다는 것은 너를 이용해서 돈벌겠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지 않느냐, 그런 것이야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잘한다는 것입니다. 고리대금업자가 더 잘하는 것이지 어떻게 그것이 칭찬 받을 일이고 상 받을 일이냐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나에게 칭찬을 받고 싶으냐, 너희가 나에게 상을 받고 싶으냐? 받을 생각만 하지말고 줘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줘라, 그겁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정말 칭찬 받을 일을 할 때에만 우리에게 상급이 있다는 가르침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베다니 동네에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살려 주었으니 누이동생들의 고마움이야! 그런데 작은 누이동생 마리아에게 남편이 있었는데 이름이 시몬입니다. 시몬은 문둥병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까지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에겐 예수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 집에 들르신 예수님에게 300데나리온이 더 나가는 값진 향유를 옥합에 넣어와서 부어 드렸습니다.
그 때 가롯 유다가 그것을 왜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일이지 왜 허비하느냐,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손해를 보는 것이며 얼마나 밑지는 것이냐고 할 때 예수께서 가로막고 말씀하시되 그만 둬라, 이 일은 너희들이 전하고 또 내가 온 천하 어디서든지 이야기하게 하여 기념을 삼겠다 하셨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걸 밑지고 손해난다고 하였고, 예수님은 나를 위해 밑지는 것은 밑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손해 보는 것은 손해보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손해보고 밑지는 것은 내가 어디서든지 기념하겠다, 이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 밑지는 생활은 주님의 상급 받을 생활인 줄로 믿습니다.
즉, 내 주위에 그런 악질이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이 햇빛을 주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안 줍니까? 선한 사람이라고 맑은 공기를 주고 악한 사람은 숨도 못 쉬게 합니까?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이렇게 골고루 하나님께서 혜택을 준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아들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바라지말고 빌리는 이 생활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안다는 것처럼 우리의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거 되는 사랑의 생활에 주님의 칭찬이 있고 상급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표준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두고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표준은 둘 때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표준이라니 무엇을 우리들에게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표준이라 그것입니다. 우리 신교가 천주교에서 개혁될 때에, 세 가지 개혁의 표어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믿음 위에다 공덕을 쌓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해서 공덕사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천주교에서는 신부들만이 제사장이다, 그래서 신부가 제사 안 드려 주면 너희는 제사를 못 드리듯이 신부가 죄를 용서해 줘야 죄를 용서함 받고, 신부가 다 해줘야 너희가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고 종교 개혁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성전 휘장이 갈라져서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너도 나도 똑같은 제사장이다. 즉, 만인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제사장이며 사람과 하나님사이의 누구도 끼어들 필요도, 끼어들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같이 제사장이다, 그 말입니다. 제사장은 반드시 피를 들고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듯이 예수님의 피 공로를 너도 나도 의지하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주교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주장합니다. 교회에서 결정하고 공표를 해버리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잘못 결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38년 총회가 신사 참배를 결정하였습니다.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신성하다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하기 때문에 실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절대적인 권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변함도 없고 틀림이 없는 까닭에 표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바로 믿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표준, 우리의 자비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떠 먹이듯이 가르치는 말씀을 그대로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용서받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김 창인 목사도 본래가 죄 없어서 의인이 아니고, 죄 없어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 아닙니다. 저도 다 죄인이지만 용서받아 의인입니다. 용서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라면, 어떻게 남을 정죄하느냐 그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도 용서받았으니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에게 옷 한 벌 해주고 굶는 사람에게 쌀 한 가마 주는 것, 그것도 자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크고 좋은 것을 주는 것이 뭐냐, 예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얻어먹는 거지에게 돈 한 푼 주는 것, 그것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나사렛 예수를 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때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주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은 예수그리스도라 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 다 주고 예수 안 주면, 주는 것 아닙니다. 다른 것 없어서 못 줄 망정 차라리 예수를 준다고 하게 되면 주는 것 중의 최고의 자비인 줄로 믿습니다. ③ 자비의 결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도로 받을 것이니라" (38절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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