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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존재 확증에 관한 ...

하나님아들 2012. 8. 9. 17:04

어릴적 하나님이 있다,없다를 가지고 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편이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답을 모르고 있다가 하나님을 알기까지는 무척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늘 TV조선에서 한 목사님께서 나오셔서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는데

공중파방송상에서는 두리뭉실 적당하게 답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 정리중인 자료를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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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존재 확증

하나님의 존재 확증의 신학적 중요성

 

전통적으로 하나님 살아계심에 대한 증명 즉 신존재 증명은 주로 철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의 영향 속에 신학의 논리를 전개해온 로마 카톨릭 신학의 전유물처럼 이해되어 왔다. 최초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 신학자는 안셈(Anselm,1033~1109)이다. 그 후 로마 카톨릭 신학을 완성한 아퀴나스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신학대전’의 맨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차용하여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였다. 그런 전통을 따라 지금도 카톨릭 신학은 철학의 논리를 빌어 신존재에 대한 증명의 유효성을 주장한다. 현대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그의 저서 ‘신은 존재 하는가’라는 책을 통해 현대적인 의미의 신존재 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철학적인 입장에서의 신 존재 증명은 칸트가 그 논리의 문제점을 비판한 이후에 오늘날에 와서는 부질없는 논의로 전락되고 철학의 담론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신존재 증명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가 전적으로 부재하다. 오히려 그것을 문제시한다. 신존재 증명은 믿음이 없는 철학자들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성경적 논리를 따라 증명해야 하는 내용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치부하고 말았다. 이때의 믿음은 맹목적인 수준에 해당한다. 이것이 현존신학의 최대약점이라 생각된다.

 

신앙인에게 가장 주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어떤 논리나 근거 없이 막연히 그리고 맹목적으로 믿고 들어간단 말인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전통 신학은 믿음의 개념에 혼동을 가져왔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성경의 구체적인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증명되고 있다고 본다. 성경이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것을 소개 하는 것 즉 하나님의 속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 이전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이고 역사적인 증명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신학의 과제이다.

 

논리적으로 보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가 확증된 연후에라야 하나님의 속성을 거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증의 논리는 신학의 최우선적인 과제가 된다. 이 점이 정당하게 부각되어야만 로마 카톨릭의 허구적인 신존재 증명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겨나고 성경에 입각한 명실상부한 신학의 논리를 구축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 확증의 원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증명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언약과 성취라는 방법이다.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드러내시려고 채택한 방법이시다. 이는 어떤 신학자가 고안한 방법이 아니다. 이 언약과 성취의 방법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계시방법이다. 언약과 성취의 논리는 성경의 논리적인 통일성을 확보하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목하 논의 중인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 문제와도 직결된다. 이는 아래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은 시공간의 모든 존재와는 전혀 다른 영원한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을 영원한 존재방식으로 드러내신다면 우리 인생은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범주가 우리 인생의 인식의 기본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의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이 현재 특정의 시간과 공간에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존재 방식을 계시하시되 인간의 인식의 범주에 맞도록 자신을 드러내기로 하신 것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개미에게 자신을 가르쳐주자면 개미의 언어와 이해 범주를 통해 소통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한 시점에 언약을 하고 시간이 흐른 뒤 그 언약을 역사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성취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성취되었을 때 그것이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시고 성도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신다.

 

이것을 구조적인 방식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의 내용이다. 그 언약 성취의 절정에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것은 구약에 언약하시고 신약에 성취하시는 방법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본 논리인 언약과 성취의 방법을 발견하고 언약의 실체적인 당사자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증하게 된다. 그 결과 믿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그리스도가 부활승천하신 이후에는 약속한대로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지상위에 세우시고 성장의 길로 인도해 가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절대적인 주관아래 이루어져 가는 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교회의 탄생과 성장은 언약대로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확증인 셈이다.

 

이처럼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은 하나님 존재의 확증 문제를 신학적 논리 전개의 최우선적인 과제로 설정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결코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결코 무조건 믿고 들어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통한 증명의 문제이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믿음의 문제를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결단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만약 믿음을 인간의 주관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유치한 환상이나 단순한 인간의 희망사항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자들의 논거가 바로 이점이다. 기독교 비판론자들은 기독교의 믿음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문제 있는 인간들이 자기 욕망을 합리화하거나 실현하기 위한 주관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 믿음이란 파탄난 자들의 원한이라고 했으며, 프로이드는 한사코 어린애로 남고자 하는 자들의 환상으로 간주했다. 포이에르바하에게 있어서 신이란 인간의 자기 욕망의 투사(projection)라고 보았다. 즉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신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보았다. 맑스는 기존 체제의 정당화를 위해 주임되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표현했다. 그들 모두는 기독교 믿음을 인간의 주관적인 욕망의 실현 도구로 보았다. 그들은 과격하게 표현했을 뿐인데 실상 현실에서 기독교가 변질하고 타락하게 되는 양상은 그와 유사하다.

 

기독교 믿음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지 못하면 그러한 오류에 쉽게 빠져들어 간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관이 앞서는 것이 아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계시적인 방법으로서의 언약과 성취의 사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에 근거하여 믿음의 문제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결코 인간의 주관적인 구성물로 환원되지 않는다.

 

성경적 증거

 

성경의 기본 논리인 언약과 성취의 방식은 하나님의 존재의 구체적인 확증의 논리라고 간주하고 그것의 신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전통신학의 취약점을 극복하는 논리를 성립시킨것이다. 이를 알고 보면 성경의 전체를 관통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보편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 즉 약속의 신실함을 믿게 하시는 방법도 마찬가지의 논법을 사용하심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이 반드시 오셔서 자신이 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믿어지게 함이라고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에서 밀씀하신다.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 요한복음 14장29절 ]

 

위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나중 제자들로 하여금 성령하나님이 오신 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취된 사실임을 통해 믿음을 갖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이다. 만약 이런 예수님의 약속이 없다면 성령이 오셔도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을 수가 없다.

 

요컨대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막연한 방식, 혹은 무조건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약과 성취라는 방식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계시적으로 증명해 주고 계시는 자상한 분이시다. 이런 분명한 증명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증하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런 성경에 내장된 증명의 논리를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설교의 본령이다. 다음의 사도행전의 17장의 두 곳에 나타나는 말씀은 바울의 강론이 이런 증명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 사도행전 17장 2·3절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사도행전 17장 31절 ]

 

위의 첫 번째 인용된 말씀 중 성경은 구약을 의미한다. 바울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 가르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바울은 구약의 말씀이 모두 그리스도를 언약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구약을 들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가르침으로 예수는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신 일임을 ‘증명(proving)'하고 있다. 그것은 위의 두 번째 인용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He has given proof of this to all men)'가 된다. 도무지 우리 인간은 믿을만한 증거를 확인할 때 믿음이 생기게 된다.

 

이처럼 기독교의 진리 증거 방식은 구약의 말씀을 들어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핵심으로 한 증명의 방식을 취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확증을 위한 독특한 성경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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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성취라는 논리를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고나면 성경이 신기하고 정말 놀랍도록 쉽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믿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언약과 성취라는 성경신학적 논리가 모든 교리와 교단, 그리고 불필요한 이단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보아

개혁동지들이 학습하고 토론하는데 든든한 기초가 될 수 있는 성경신학연구소 소개합니다. http://www.ibt.or.kr

어쩌면 이것이 혁명적 사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학습할 사람들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출처 : 부산교회개혁연대
글쓴이 : 박기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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