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요한복음10장1~21절(양의 문이요 참 목자이신 예수님)

하나님아들 2013. 4. 11. 06:34

본문 : 요한복음10장1~21절

제목 : 양의 문이요 참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누가 참 목자인자를 설명하십니다.

또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양을 늑탈하려는 삯꾼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교훈은 청중들 사이에 분란을 야기합니다.

 

1. 문으로 들어가는자가 양의 목자입니다(10:1,2)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양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의 인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의 인도자가 되는 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양을 먹일 만한 진리와 능력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된 일군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진정한 의미에서 돕지 못하고,

도리어 양 떼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는, 무의식 중에, 혹은 의식 중에 저렇게 불행한 생활을 보내기 쉽습니다.

 

2. 문지기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심(10:3-5)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여기 이른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는 이것이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를 생각할 때에, 그를 가리켜 문지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낮은 칭호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문지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보아 부합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맺어 주시는 점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당합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는 문구는 10장에 많이 나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실을 비유합니다.

택한 백성은 그 목자 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알아 듣고 모이는 법입니다.

교회의 사역자(使役者)는 하나님의 양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온 천하의 모든 세력과 능력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의 양 하나를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양(택한 백성)은, 오직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들을 모울 수 있고 또한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열심히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양 된 자들은 모여서 한 무리가 됩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점에 있어서 행스텐벌키는, 시 147편; 사 40:26, 43:1; 출 33:12,17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지식이

얼마나 친근하고 개별적인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피지도자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정성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혼을 먹이는 자는, 대중 본위로 사업의 동기를 가지지 말고,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영혼 하나에게라도 모든 사랑과 성의의 정력을 기울여 일해야 됩니다.

그런 역사(役事)가 진정한 복음의 열매를 맺힙니다.

그것은 마침내 광범위에 미치는 구령 운동(救靈運動)도 성립시킵니다.

설혹 그의 역사로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는 소수의 열매로써도 만족합니다.

비루마에 처음 선교사로 갔던 저드슨(Judson) 목사

7년만에 세례 교인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써도 천하를 얻은 듯이 기쁨을 느꼈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이란 말은,

그가 우리에 있는 양들을 인도하여 푸른 초장으로 갈 때에,

양 한 마리라도 빼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 표를 보입니다.

곧, "다 내어 놓은 후에"란 것이 이 뜻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는 양 한 마리라도 등한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는 인도자는,

소자 한 사람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됩니다.

 

3.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는 구약에도 많이 있습니다.

시 23편, 79:13, 80:1, 95:7; 사 40:11; 렘 23:1; 겔 34:1-2; 슥 11:17, 13:7 참조.

그때 유대인들이 구약을 알았더면 이 비유를 깨달았을 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 무식하였으므로 주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4.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다시 그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10:7~10절)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입니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합니다(14:6).

로마의 클레멘트는, 시 118:19-20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문은 의(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십니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양들을 의미한다."라고 하였습니다.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보다 먼저"란 말에 대하여는 사본상 차이가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내 권위를 횡령하여"(above me)란 뜻이라고 함.

이 해석이 옳다면, 이 귀절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절도나 강도로 간주한 것입니다.

(2) 이것은,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 "먼저"라는 헬라 원어가 그런 뜻으로 요한복음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11:55, 12:1, 13:1, 19, 17:5, 24).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염두에 있었던 인물이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와서 교권을 잡았는데, 아직도 그 현재에(예수님 당시에)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합니다.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누구든지"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 없이 관계한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란 말씀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의 중보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생명의 부요를 얻기 위하여 영의 양식을 자유롭게 받습니다. 이 사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알려집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란 것은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합니다(신28:6; 시121:8; 렘37:4).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령한 양식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시는 양식은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인간이 가져 볼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습니다.

그것들로써는 인간의 갈증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는 소금 물을 마셔서 갈증을 없애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하여질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꼴은, 먹는자마다 영원한 만족을 얻어서 모든 다른 것들을 진토와 같이 여기게 됩니다.

이 아래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은, 기독교회에 거짓 스승들이 종종 들어올 것을 미리 경고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에 나타나는 도적은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입니다(골2:8; 렘23:2; 겔34:2). 이런 자들은 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저희의 사리사복을 위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십니다.

곧, 그는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며, 또한 그 생명을 장성케 하십니다(시23편; 히13:20-21).

 

5.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10:11-13절)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선한 목자"에 대하여는, 구약에도 많이 예언하였으니, 대상11:2; 시23편; 사40:11; 겔34:23; 슥11장 등입니다.

이 귀절들을 보면, 여호와 자신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선한 목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때 그 예언들은 성취되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그말이 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실 것을 가리켰다고 합니다(막10:45; 마20:2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사53:10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고데이(F.Godet)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란 말씀이,

다른 이의 요구에 응하여 생명을 내어 놓음, 혹은 바침, 또 혹은 희생함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6.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10:14,15절)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 목자와 양이 서로 안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말함인가?

예수님이 그의 백성(양)을 아신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되어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아신다는 뜻입니다(민16:5; 딤후2:19).

그것은 그의 전지(全知) 성품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그를 안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이것은, 성부자(聖父子)의 서로 아심과 같이 신령하고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인간의 자율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마11:27 하반에 말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7. 선교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것은 이방 선교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킵니다.

이방 선교에 대하여는 벌써 구약에 많이 예언되었습니다.

사 49:1-13, 52:13-15, 53:10-12;미 4:2; 슥 8:23; 마 8:11 참조.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만 이런 놀라운 선교가 시작되겠으므로, 그의 목숨 버리신다는 말씀이 이 귀절 앞뒤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뱅겔(Bengel)은, 하나님 백성의 통일성을 위하여 아름다운 목자도 한 분(예수님)이심을, 이 귀절이 지적한다는 의미로 말하였습니다.

 

 

10:17,18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가 그의 목숨 버리심과 다시 사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자(聖者)이시니 존재론적으로 영원토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십니다(5:20).

그러나 그가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는 때에 구속 사업의 사명을 받으셨으므로, 그의 사명에 순종하신(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 그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방면도 있습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곧, 그가 목숨을 버리시는 것과 다시 사시는 것이 순연히 독자적(獨自的)인 의지(意志)로 순종하심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그 위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씀이, 그 사실을 역설(力說)합니다.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생명 버리심을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도 성자(聖子)의 생명을 빼앗을 처지에 계시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는 순연히 자유 의지로써 단 마음으로 순종하신 것 뿐입니다.

"계명"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사명을 의미합니다.

 

8. 듣는다고 모두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10:19-21)

“[19]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입니다(창 3:15).

듣는다고 모두 깨달은 것도 아니며, 안다고 해서 다 바다들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그분에 대한 논란만 일삼았습니다.

예수님을 참 목자로 인정하지 않은 채, 영적인 매인이요 목자의 양이 아님을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 헤브론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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