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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성서와 현대생활

하나님아들 2013. 3. 19. 14:58

구약성서와 현대생활

 

 

                            Ⅰ. 땅

 

1. 성서 본문의 의미

창세기 1-2장
  성서 본문은 인간의 본질이 '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땅에서 나왔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그같은 인간이 어떻게 땅을 정복할 수 있는가?  그 동안 2천년 서양의 역사는 인간이 땅을 정복하는 역사였다.  인간은 땅, 즉 자연을 개발하여 인간 문화 발전의 도구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각종 공해에 시달리며 자연 자원의 훼손으로 인한 생태계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창조 계획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도 땅에서 나온 존재임을 잊고 땅을 정복 대상으로 삼고 종속관계로 삼았기에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인간은 땅에서 창조된 피조물이며, 자연세계와 공동운명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레위기 25:23
  레위기 25장은 희년법을 다루면서 23절에서 땅의 소유권은 야웨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이스라엘에서는 실질적인 땅 주인을 야웨라고 보았다.  더구나 가나안 땅은 본토민이 그곳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는 그것이 야웨의 땅이었던 만큼 야웨는 본토민을 몰아내고 그가 선택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신명기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할 땅은 야웨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물로 주신 이상적인 유토피아임을 강조하고 있다.

미가 2:1-5
  느헤미야 시대에 생계를 위해 밭과 포도원을 잡히는 일은 이미 미가 시대부터 행해진 땅의 사유화가 가져온 극단의 횡포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가를 예루살렘 부근 모레셋에 사는 농부였을 것으로 추측하다면,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피부로 느끼면서 남의 땅을 빼앗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을 외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가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땅 가진 지배 엘리트들을 치신다는 것이다.  미가에게 있어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 백성에게 유산으로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2. 역사적 이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주장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무력 진압에 의한 진입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수11:6-20).  두 번째 주장은, 알트, 노트, 바이페르 등의 반(半)유목민들이 계절의 주기적 리듬에 따라 초원을 찾아 움직여 간 매우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이주였다고 본다.
세 번째 주장은 이집트에서 고생하던 소수 집단이 그야말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야웨 하나님의 평등사상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그 땅에서 살던 농민 계층이 그들을 억압하는 상층계급에 반기를 들고 봉기함으로 이스라엘이란 공동체가 그 땅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최근에 제시된 또 하나의 학설은, 이스라엘은 밖에서, 즉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이미 있던 이들이 '헤쳐 모여' 이스라엘 집단체를 이루었다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스라엘은 결국 남의 땅을 빼앗은 것이다.  그 경로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든지 간에 땅 없던 이들이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성서가 보여 주는 땅은 인간의 삶의 터전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땅은 곧 세상이다.  성서는 분명 어느 누구도 땅에 대한 절대 소유권이 없음을 보여 준다.  희년법과 같은 제도는 오히려 땅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들을 해소시켜 공동체 구성원간의 경제적 평등권,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 분수껏 똑같이 살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땅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간 삶의 터전이며 또 우리 생명을 키워 나가는 텃밭인 생명체이지, 그것이 결코 투기의 목적이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Ⅱ. 약자의 하나님

 

1. 성서 본문의 의미

 창세기 4:1-16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두 집단의 갈등 이야기로 집중되는 것이다.  즉 목축을 주요 생계 수단으로 삼았던 이스라엘 민족과 농사를 지었던 정착 민족과의 대립이었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양치는 동생의 제사를 받으시고 농사짓는 형의 제사를 거부하심으로 결국 그 하나님은 동생편을 드신 하나님으로 묘사된 것이다.

 출애굽기 15:1-18
  출애굽기 15장 1-18절은 모세의 노래라고 부른다.  이 모세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바다에서 바로의 군대를 물리친 것이고, 후반부는 가나안의 왕들을 물리친 것이다. 이 모세의 노래는 모세와 바로, 즉 이스라엘이 노예들과 그들을 압제한 이집트 지배체제와의 대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한 것을 노래하는 셈이다.

 사무엘상 2:1-10
 사무엘상 1장은 한나가 아기가 없어 고통을 당하다가 드디어 사무엘을 얻게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곧이어 2장에서 한나의 감사 기도가 이어진다.  한나는 고대하던 아기를 얻은 것과 그 아기를 다시 하나님께 바친 기쁨, 그리고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2. 역사적 이해

  성서학자들 사이에도 견해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이 곧 창세기 이야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족장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사를 세계사에 연결시켜 놓은 것이라고 본다.   출애굽 사건은 동양화의 기법을 사용했을 때 구약성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굵은선이며, 또 구약을 통째로 치켜 올릴 수 있는 지렛대이기도 하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서 우리는 동생이 형을 제치고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창세기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동생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이같은 패턴의 시작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세의 노래에서 동생의 하나님이 약자의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을 압제한 이집트의 바로와의 관계는 혈연적인 형과 동생의 관계는 아니지만, 가인과 아벨의 경우처럼 유목민과 정착민의 갈등임에는 틀림없다.  출애굽의 이야기는 이같은 유목민들이 농업인들에게 온갖 고통을 당하다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은 바로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 약자들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약자의 하나님이란 것을 잘 알 수 있다.

 

 

                      Ⅲ. 하나님의 약속

 

1. 성서 본문의 의미

 창세기 12-22장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세계는 본격적인 아브라함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하나의 준비극으로서 또는 역사무대의 배경으로서 왜 아브라함이 등장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 것이다.  창세기 12장부터 22장까지의 이야기에는 이삭을 얻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기의 이야기는 이삭을 얻기까지의 고충이 언급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룰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뿌리내리며 정착하도록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2. 역사적 이해

  구약성서는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창12:3)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뫼시며, 야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 지금도 유효하여 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우리는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는 기원전 20세기에서 18세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아브라함은 분명히 역사적 인물로서 그에 관한 전승은 고대 근동의 기원전 20세기 문화를 반영한다고 본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는 단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를 약속의 새 땅으로 불러내셨다. 그는 후대 이스라엘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가공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창시자가 아니라 기원전 20세기 반월형 곡창지대 위를 움직여 갔던 실질적인 역사적 인물이다. 야웨기자가 이해하는 아브라함의 위치란 이스라엘 민족의 창시자로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세계 만방에 전달할 수 있는 수단도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국제 정치와 외교적 현실 속에서 터득된 범세계주의적인 당시의 경향을 나타내며, 또한 자신의 안정뿐 아니라 세계사에 공헌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이스라엘 사명"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Ⅳ. 우상 

 

1. 성서 본문의 의미

 출애굽기 20:4-6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제2계명은 우상숭배는 곧 인간이 신의 종이 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본문에서는 조각품 자체가 신이 되니까 인간은 그 조각품의 종이 되는 셈이다. 본문은 이같은 의미에서 우상에게 절하거나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야웨 하나님을 어떤 동물의 형태로든 조각품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명기 7:5
  신명기 7장 5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에게 이렇게 하여야 한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들을 불살라라."라는 규정이 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에 있는 이방제의를 송두리째 파괴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사야 44:9-20
  이 본문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 야웨만이 유일한 하나님이고 그 이외의 어느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44:6). 이같은 주장은 글자 그대로 유일신 사상을 나타낸다. 세상에 신이라고는 야웨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2. 역사적 이해

  고대인들은 우상을 만들어 그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즉 우상은 신의 실체이며 그 신은 자연의 막강한 세력인 만큼, 인간이 우상을 경배하며 그 신에게 호의를 입는다는 것은 자연세력을 인간에게 유리하도록 통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찾게 된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공식 종교는 야웨의 형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기본적으로 구약성서가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참 하나님은 형상이 없이 오늘도 세미한 소리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분임을 다시금 확인해야 한다.  그러기에 성서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을 불살라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신7:5-6)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꾸준히 개혁해 나가야만 하며, 우상숭배는 계속 철폐되어야 한다.

 

 

                           Ⅴ. 율법

 

1. 성서 본문의 의미

출애굽기 21:1-23:19
  학자들은 출애굽기 이부분을 '계약 법전'이라고 부른다. 계약법전은 우선 종에 관한 법을 다루고 있다(21:2). 또 사람이나 짐승에 대한 상해 또는 절도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밖에 정의와 복지에 관한 법, 안식일과 안식년에 관한 법, 그리고 세 가지 큰 절기(무교절,맥추절,수장절)에 관한 법을 규정하고 있다.

 신명기 4:44-5:33
  신명기란 말은 신명기 17장 18절에 "이 율법책을 두루마리에 복사하여"의 '복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신명기법전은 십계명만 두 번 언급한 것이 아니다.  신명기법전의 거의 절반은 계약법전을 다시 거론하고 있다.

2. 역사적 이해

  출애굽기 19장의 모세와 시내 산 이야기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법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법전은 함무라비법전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십계명의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함무라비법전에는 없는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야웨 하나님의 법이 이스라엘의 생활 강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신명기 4장 45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훈령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다고 말한다. 히브리어 '미쯔와'(계명), '호크'(규정), '미쉬카트'(법령)는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으나 신명기 법전에서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들 표현 이외에 '다발'(말씀)이라는 용어도 사용된다. 이상 여러 가지 용어를 한마디로 묶어 부르는 말이 '토라'이다. 토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어 그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선물로 주신 '노정표'와 같은 것이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 또는 방향을 알지 못하던 이에게 노정표는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토라를 하나님 사랑의 선물로 보는 것이다.

 

 

                          Ⅵ. 제의

 

1. 성서 본문의 의미

 레위기 1:1-7장
  인간이 신에게 예배드리는 형태는 '제사'이다. 레위기는 제사의 종류와 절차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우선 '번제'라는 것이 있다. 번제는 제물을 제단 위에서 완전히 태워 모든 것을 다 신에게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의 호의를 구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화목제는 기본적으로 고기를 먹고자 할 때 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의 일부는 신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는 예배자와 제사장이 신과 더불어 친교를 도모하며 고기를 먹을 수 있기 떄문이다. 속죄제는 그 이름이 뜻하는 대로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속죄제는 성소가 더럽혀졌을 때 그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  속건제는 어떤 사람이 거룩한 제물을 바치는 데 성실하지 못하여 실수로 죄를 저질렀을 때 바치는 것이다.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이외에 곡식을 바치는 '곡식제물'도 있다.  곡식제물은 번제와 마찬가지로 제단 위에 올려놓고 다 태우는 것이다.

 신명기 16:1-17
  제사는 기본적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도모하며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기에 여기에 관련된 사람은 거룩한 제사장이며, 장소와 시간 역시 거룩한 것이다.
우선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안식일'이다. 이날은 신을 위해 따로 성별해 놓은 특별한 날이다. 또한 안식일이 중요한 날인 만큼 매7년 역시 특별한 날이다. 이것을 안식년이라고 부른다. 그밖에 이스라엘 사람은 3대 절기를 지켜야 했다.  첫 번째 절기는 유월절과 무교절이다. 유월절은 저녁에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고, 무교절은 엿새간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종교적 의식이다. 두 번째 절기는 유월절 다음 7주가 지난, 밀추수를 시작하는 칠칠절이다.  이 절기를 맥추절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부른다.  세 번째 절기를 초막절로서 과일을 추수할 때 지키는 절기이다.  칠칠절과 초막절은 모두 농사의 수확을 감사하는 것이다.

 2. 역사적 이해

  구약성서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성전예배이다.  왜냐하면 율법서는 구체적으로 성전예배를 어떻게 집행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며, 시편 같은 시가서는 성전에 드리는 찬미와 시들을 모은 것이며, 역사서의 일부는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 전부가 성전예배를 지향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는 곧 성전 공동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제사예배를 종교사적인 입장에서 고찰해 볼 때 민족적인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  이름이나 형태, 의식 면에서는 이스라엘 제사에도 이상적인 요소가 모두 내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오늘 우리의 과제는 세속화된 시대에서 참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극히 기계화되고 도시화되고 비종교적이고 복잡한 우리의 삶 속에 같이 계시며 또 활동하신다. 우리의 예배는 지난 세대의 종교적 기능을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이다.

 

 

                           Ⅶ. 성윤리

 

1. 성서 본문의 의미

 민수기 25:1-5
  민수기 25장에 언급된 브올에서 생긴 일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나안 바알 종교의 성적 매력에 유혹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장난삼아 가나안 신전에 들렀을 때 그곳에 있던 바알 신전의 성창들에게 붙들리어 성적인 쾌감을 맛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성서는 이같은 행위를 '음행'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호세아 4:7-14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그것에 팽배한 성개방 문화에 도취된 상태를 보여 준다.  그는 신부의식이 공동체 전체에 널리 퍼져 있음을 지적한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여인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혼외정사를 즐기는 격이 된다.  즉 이스라엘 여인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성적인 관계를 갖는 만큼, 그것은 음행이며 간음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호세아 2:14-23
  호세아의 해결책은 참 픙요의 근원이 바알이 아니라 야웨임을 깨닫는 데 있다고 보았다.  호세아는 그날이 오면 야웨와 이스라엘이 다시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여인은 야웨를 자신의 남편, 즉 주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야웨는 남편이 되어 성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여자를 뜨겁게 끌어안는 것이다.

 신명기 22:13-29
  신명기는 호세아에 비해 성문제에 대해 사회가 엄격히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호세아의 경우 성개방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회가 성문제에 대해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고 성창제도에 놀아났다고 하면, 신명기에는 그 반대로 봉쇄 쪽으로 기울면서 가급적 성을 통제하는 쪽으로 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신명기가 음행을 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역사적 이해

  예배자는 제사를 드리며 성창과의 교접을 통해 땅의 풍요를 기원한다. 이같은 행위는 일종의 교감적인 주술 행위이다.  즉 인간의 성적 행위를 통해 신들의 성적 행위를 유발시킴으로서 비의 신이 비를 내리고 땅의 신이 그 비를 받아 곡식을 생산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모든 작은 산 위마다 바알의 신전이 있었으며 예배자들, 특히 갓결혼한 새색시들이 아기를 갖기 위해 그곳으로 몰려간 것이다.  비록 이같은 성행위가 당시의 관습으로는 하나의 의식이었을지라도 호세아는 그것을 음행으로 규정한 것이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우리 시대에 성윤리 문제는 결코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니다.  중세교회가 성직자들에게 특히 성의 유혹을 경계했던 만큼 성개방 시대에 우리는 도처에 성문화 유혹의 덫에 노출되어 있다.  호세아는 바람피운 고멜을 다시 맞아들였다.  야웨께로 다시 돌아간 이스라엘은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나는 이제 우상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응답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주마"(호 14:8)

 

 

                              Ⅷ.왕

 

1. 성서 본문의 의미

 사무엘상 8:1-22
  고대 이스라엘이 부족 동맹체에서 왕정체제로 바꾸어지게 된 것은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청하는 이유는 사무엘상 8장 20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에 있다.  고대세계에서 왕은 가능한 한 전쟁에 많이 참여하여 영토도 확장하며 또 전리품을 노획함으로써 자치적으로 내분을 방지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득 원천을 삼은 것이다.

 사무엘하 7:1-17
  사무엘서가 보여 준 반왕정 이데올로기와 친왕정 이데올로기의 병행이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이루어졌고, 또 그 작업이 포로기에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때, 다윗 왕조 체제는 적어도 그의 아들 솔로몬 시대까지는 반왕정적인 세력을 포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북왕국이 떨어져 나감으로 인해 반왕정 이데올로기가 표면화된 것이다.

 신명기 17:18-20
  왕정은 원래 이상적인 요소였으나 역사적인 필요성에 의해 이스라엘도 그 제도를 채택하게 되었으며, 그 후 남왕국 유다에서는 나단신탁을 통해 다윗왕조의 정체성과 합법성을 다윗계약의 형태로 찾아내게 된 것이다.  그런 다음 신명기 역사에서는 북쪽의 반왕정 이데올로기를 수용해 왕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그 왕조가 보장된다는 왕의 법도를 고수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본다.

 2. 역사적 이해

  고대사회에서 왕권은 하늘 나라 신들 세계의 우주 통치 질서가 그대로 인간 세계에 전해졌으며, 왕은 신의 아들로서 지상에서 이 과업을 대행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같은 생각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풀어 본다면, 정권을 새롭게 장악하여 새 창조를 시작하는 이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신의 이름으로 찾게 된다는 것이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이스라엘에서는 한 때 야웨가 왕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왕정제도라는 정치적인 조직체를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회적 조직체로서 왕이 우주 질서를 대표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가난하고 힘들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재판을 해주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성서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왕제도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다윗왕조의 후예 중에서 이상적인 메시아가 나타나 그야말로 완벽한 사회를 이끌어 나갈 새지도자가 될 것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Ⅸ. 공의

 

1. 성서 본문의 의미

 사무엘하 15:1-6
  성서 본문은 다윗 궁중설화의 일부이다.  우리의 본문은 '왕의 공의', 즉 인간의 공의를 말하고 있다. 고대세계에서 왕은 공의를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보았다.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에서 공의는 '아윌림', 즉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같은 경우 사회의 안정은 다분히 왕을 중심한 권력구조, 즉 상층계급의 안정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윗의 공의 역시 왕정제도 구축을 위한 사회의 기본 강령의 준수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명기 16:18-20
  신명기 규정은 여기서 '공의'로 재판하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신명기는 재판 진행에 대한 자세한 규정보다는 공정한 재판의 원칙을 천명한다.  그것은 공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이스라엘의 재판관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공의를 집행하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모스 5:24
  아모스의 공의는 사회가 질서를 지키며 존속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안전장치가 되는 것이다, 즉 권력자가 임으로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이 사법부의 공의라는 심판 선언인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야 주먹이 법보다 앞서는 만큼, 아모스 시대에도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의로운 사람들의 억울한 처사가 많았겠지만 그래도 아모스는 공동체가 살기 위해서는 사회정의와 경제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것을 외친 것이다.

2. 역사적 이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은 인류 역사 초창기부터 공의 수립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성서에서, 공의는 미쉬파트와 체데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미쉬파트의 어근은 '재판하다'라는 동사의 뜻을 가진 '샤파트'이다. 이 낱말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심판 언도를 선언하다'라는 뜻보다는 서로 상이한 주장을 펴는 양측이 각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권위 있는 제 삼자에게 호소하는 과정을 말한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왈쉬 신부는 성서의 공의개념을 현대적인 술어로 잘 표명해 주고 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는 그가 어떤 권한을 행세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는 히브리성서에서 '미쉬파트'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성서에서 '재판하다'라는 말은 샤파트이다.  그 명사 '세페트'는 재판 또는 심판이란 뜻을 가지며, '미쉬파트'는 공의라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어원상 공정한 재판이 공의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왈쉬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모두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성취하려고 애쓴다고 본다.  즉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필요 사항을 돌보는 대신 우리가 가진 모든 재윈을 동원해 프로젝트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Ⅹ. 인도주의

 

1. 성서 본문의 이미

 신명기 24:19-21
  신명기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과부, 고아, 나그네들을 돌보고 보살펴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신명기법전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돌보아야 할 계층으로서 과부, 고아, 나그네 이외에 레위인을 더 첨가시키고 있다.여기의 레위인은 야곱의 아들 레위의 후손으로서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 이후 세속지파의 성격을 상실하고 성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예배자의 헌물에 의존해야 했다.

 신명기 15:7-11
  위 본문은 가난한 자들에게 인색한 마음 없이 필요한 것을 꾸어주라는 규정이다.본문은 가난한 자가 꾸고자 할 때 희년을 맞아 탕감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필요한 것은 꾸어 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신명기는 정녕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공동체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신명기 23:15-16
  본문은 도피성의 원리와 같은 정신으로 도망한 종을 보호하라고 명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주인의 손을 벗어나 도망쳐 나온 종은 본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고 그를 보호해 주라는 것이다. 신명기의 의도는 종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그를 죽이는 일과 마찬가지이니 하나의 생명을 살펴 주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명기 22:8
  이 본분은 난간이 없어 사람이 떨어져 죽게 되면 그것은 집주인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안전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신명기는 매사에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명기 25:4
  본 규정은 신명기법전에만 언급된 특유한 것으로, 신명기의 제4계명 해석(5:14)을 동물에게까지 적용시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신명기 20:19
  본문은 과일나무는 그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도 벌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본문은 전쟁 상황에서도 나무에까지 적대감을 표출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2. 역사적 이해

  우리가 신명기를 읽으면서 특기할 사항은 신명기의 인도주의적인 측면이다.  이같은 사상은 사회전반에 걸쳐 대인관계뿐 아니라 심지어 동물과 식물세계에까지도 적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또한 신명기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이웃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핵심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신명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계명 준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신명기는 철저하게 계약 공동체의 책임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모든 계약체 구성원은 평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부, 고아, 나그네, 종, 여성, 가난한 이들 모두가 야웨 앞에서는 동등한 이스라엘인의 기본적인 인권과 인간의 권위와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의 질책을 받던 사치 낭비의 시대 못지않은 과소비 사회가 되었다. 더욱이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 이 사회의 양심이 무뎌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단 이기주의가 활개치는 세상이 되었다.  신명기의 정신을 반영하는 설교가 양심에 호소하는 소리라고 할 때, 그것이 한낱 귓가에 흘리는 마이동풍에 불과한 소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 평화

 

1. 성서 본문의 의미

 미가 3:1-12
  미가는 평화란 정의를 수반하는 것이라 보았다. 미가의 시대가 아무리 겉으로는 평화의 시대인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불의가 판을 치고 있으니 예언자들이 '평화'라고 외치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의 기본적인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민중이 도탄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외치는 평화 이데올로기의 평화가 참된 평화가 될 수 없음을 미가는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미가 4:3-5
  성서 본문은 민족간의 분쟁 종식을 위하여 전쟁도구를 평화의 도구로 바꾸는 정치, 군사적 차원의 평화이념을 보여 주며, 생업의 특권을 위협받는 일 없이 구사하고 그 특권의 결실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사회 경제적 차원의 평화이념, 그리고 각자가 자기의 종교와 신앙을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종교적, 신앙적 차원의 평화이념을 말하고 있다.

2. 역사적 이해

  팔레스타인은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였다.  바람잘 날 없다는 말 그대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강대국의 말발굽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으며, 주변 강대국끼리 칼 부딪치는 소리가 쉴 틈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동네 북처럼 주변 다른 민족들에게서 공격을 당했으며, 주변 여러 나라의 위협을 받아 왔다.  이스라엘은 이같이 전쟁의 와중에 시달리면서, 전쟁이 그칠 평화의 미래를 갈구하게 된 것이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그 동안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것 때문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전쟁도 치렀지만,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대방이 뿔 달린 악마라는 전제를 버리고 같은 형제로서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평화통일 교육'을 교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서로가 상대방을 제거하기보다는 더불어 사는 방법, 더불어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역사

 

1. 성서 본문의 의미

 이사야 45:9-23
  제2이사야는 야웨가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야웨가 선포한 미래의 '일'은 곧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쇠사슬에서 풀려나리란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출애굽에 해당하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야웨 하나님을 가리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이같이 구체적인 역사 현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78편
  시편 78편은 이스라엘 역사를 교훈 삼아 남왕국 다윗왕조 체제의 합법성을 천명하고 있다.  시인은 우선 이 시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후손에게 전달해야 하는 역사적 교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시편 78편은 신명기 사가의 역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북왕국을 버리시고 남왕국을 선택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2. 역사적 이해

  우리는 위의 이사야 본문에서 야웨가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즉 야웨가 시간의 처음인 창조와 시간의 마지막은 미래를 관장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직선적 역사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삶도 다스린다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이것이 이스라엘 주변 고대세계의 윤회적인 역사관과는 다른 이스라엘의 직선적인 역사관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알브렉츤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신다는 이스라엘 개념이 독특한 것이 아님을 밝혔고, 이렇게 함으로써 구약 성서의 역사관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성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많은 방법들이 있다.  우리는 새로운 연구법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그리스도교가 역사종교라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역사 속에 현현하셨으며, 성령이 인간 역사과정을 주관하신다고 믿는 데 있다. 이같은 역사관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최후 목표지점을 향해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그 최후의 날이 다가와 인간의 역사가 완성되기를 바라며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2이사야가 그 시대 청중에게 외친, 야웨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메세지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ⅩⅢ. 개인과 공동체

 

1. 성서 본문의 의미

 에스겔 18:1-32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공동체 생활의 회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도덕 및 정신적인 책임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에스겔은 18장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포로 공동체가 참으로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그 모든 죄에서 떠나 돌이키면 살게 된다는 것이다. 포로민 공동체에게 들려준 에스겔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그 길을 택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 역사적 이해

  구약성서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는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앞섰다. 이스라엘의 사회구조도 부모를 중심한 사회의 기본 구조인 '베스아브'가 있다. 이것은 거주 및 생산성을 지닌 사회 경제적 단위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각 개인은 그가 속한 가정, 종족, 민족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마치 한국 사람이 '우리나라'라고 말하듯 이스라엘 사람 역시 야웨의 백성이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초기부터 이같은 공동체성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구약성서가 분명히 공동체성을 많이 강조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개인을 강조하는 면도 있다(삼하21:9, 왕하10:11).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하나님 백성이라는 개념은 구약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신약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성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  비록 혈연중심의 집단은 아닐지라도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는 구성원끼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공동체 정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ⅩⅣ.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1. 성서 본문의 의미

 아모스 3:1-2
  아모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성문 앞에서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하나씩 공격하는 열방신탁을 공포하였다. 사람들은 좋아라 손뼉을 치며 정신없이 듣고 있을 때 아모스는 '바로 너희들도 그렇다'는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비수를 던진 셈이다. 아모스는 3장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모든 족속이라고 말하며, 3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이사야 19:16-25
  이사야 19장은 열방신탁 가운데 일부분이다.  19장 16, 19, 23, 24절은 모두 '그 날이 오면'이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여기의 '그 날'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심판하실 종말의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모두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을 주로 시인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미가 4:1-4
  미가는 억압 받던 소농이나 가축사육자들의 무리에 속해 있던 것으로 당시의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소작농들의 땅을 빼앗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정부 관리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미가는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이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으로 보았다.

2. 역사적 이해

  미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주께서 우리와 하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라는 것이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적인 생각이다. 이같은 정통사상은 모든 사상체계의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야웨의 선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올린스키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며 그런 면에서 민족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주의 질서에 관여한다고 본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구약성서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체험이며 그들의 신앙, 미신, 의문, 탄식, 찬미의 숨결이 담긴 발자취의 기록이지만, 그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 그같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분은 오늘 우리들의 삶도 주관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다.

 

 

                         ⅩⅤ. 메시아

 

1. 성서 본문의 의미

 창세기 3:14-15
  창세기 3장 15절에는 뱀의 자손과 여자의 자손과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내가 서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 예언으로 해석되어 왔다.  구약성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더욱이 세상 최초의 창조와 관련되어 여자의 자손이 뱀 자손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악을 승리하는 이야기로 보아 '최초의 복음'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초창기부터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 예언을 찾아보았다.

 이사야 7:10-16
  구약의 메시아 예언 중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 바로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장에는 이 구절이 마리아에 의해 예수 탄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마 1"21-23). 그러나 구약 교수들은 본문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 예언이 아니라고 본다. 이사야 7장 본문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역사적 이해

  우리말의 '메시아'는 히브리어 '마쉬이하'(기름부음 받은 자)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의 그리스어역은 '크리스토스'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가 곧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란 뜻이 된다. 구약성서에서는 왕이나 예언자가 임명받을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며, 포로 후기에는 왕의 기능을 이어받은 제사장에게도 사용되었다.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은 다윗 왕가의 왕 즉위와 관련된 이상적인 왕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메시아 사상의 기원으로서는 다윗 가문의 메시아가 다윗과 같은 왕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되리라는 기대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예수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말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왕정을 복구시키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예수는 죄의 명패 그대로 '유대인의 왕'이었다.

3. 본문의 현대적 의미

  구약성서가 예수를 메시아로 예언하지도 않고, 또 비록 구약성서에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윗 후손으로 정치적인 메시아이기 때문에 예수와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메시아 문제에 관한 한 구약성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베이커의 설명을 빌자면, 구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 아님을 받아들이며, 또 동시에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고백은 어디까지나, 신약성서의 눈을 가지고 구약성서를 보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시아의 기대는 고립된 예언자의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는 것이다"라는 말 속에서 그 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왕조 초기에 있었던 반왕권운동은 '성취'의 면에서 보면 잘못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길을 예비한 것이다. 그리고 왕조 그 자체도 완성의 목적이 될 수는 없었으나 신정론으로 조화가 되어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해 준 것이다. 목적 없이 끝없이 방황하는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가 굽이칠 때 거기에는 메시아 또는 '인자'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성경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데 도움이 될 곳 같고, 또 성경을 읽으면서 그 시대만을 생각함에 머물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과 오늘날 현대생활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다시금 알게 되었고 좀더 성경과 오늘날의 생활의 많은 문제들을 생각하며 연관지을 수 있는 좋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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