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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늘날의 예언 운동의 문제

하나님아들 2013. 3. 18. 00:32

오늘날의 예언 운동의 문제

 

홍성국 / 교회와 신앙 2000년 9월 호

 


 

1. 들어가는 말

 

앞에서 그 실례를 열거한 것처럼, 요즘 심상치 않게 선지자 혹은 예언과 관련된 집회들이 여기 저기에서 열리며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현혹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선지자와 예언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무속적 개념으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러한 현상은 기독교의 아노미적 실재를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러한 현상은 사회의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기독교를 주변적 종교 단체로 몰아내는 빌미를 준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 올바른 성경적 개념을 제시함으로 성도들이 그러한 운동에 현혹됨이 없도록 할 것이다.

2. 우려의 이유들

1) 성경적 개념의 왜곡

그러한 현상으로 인해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선지자와 예언과 관련된 개념의 왜곡이다. 그 같은 왜곡은 무속적 개념의 혼용과 그에 따른 행위들이 기독교의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성경에 있으니" 혹은 "성경적"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나가면 성경이 가지고 있는 권위 자체 때문에라도 그것을 비판할 수 없는 것으로 사람들은 간주한다. 바로 이점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무비판적인 사람들을 현혹시켜 왔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다미 선교회의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이었다. 그 예언을 주장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감추어졌었던 것을 밝혀주는 선지자라고 하면서, 교묘하게 성경의 일부분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전문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 왜곡시킨 내용을 비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많이 보는 이단들도 반드시 자신들의 주장을 성경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 깊게 관찰하여야 한다.

2) 아노미적 실재의 반영

문제는 그러한 운동이 성경을 왜곡시키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현재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종교 사회학자들에 의할 것 같으면 이러한 운동들은 대개 기존 교회의 세속화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즉 교회가 세속화됨으로 교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교회의 아노미적 상태가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은 거기에서 초자연적인 실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신앙 생활에 대한 보상심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무엇을 추구하게된다. 특히 요즘처럼 사회 전체가 불안한 상태에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러 면에 있어서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그러한 운동이 더욱 호소력을 갖게 된다.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 세상적 방법으로는 박탈당한 자신의 것들을 되 찾을 수 없고 그러므로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있게 된다. 그런데 선지자적 예언운동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추구에 대한 카리스마적 응답이 된다. 만일 그러한 카리스마적 응답이 비 성경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면 그것은 이단화의 첫발이 된다.

3) 기독교의 주변화

기독교는 기독교회가 처해 있는 사회 내에서 이탈하여 산속으로나 혹은 수도원에 묻혀 서 고행하는 단체가 아니다. 그 반대로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마디로 하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들 혹은 백성들로써의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회의 가르침이나 주장하는 바가 설득력을 갖게 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게 된다. 그것이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맞을 잃은 교회가 되며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 즉 기독교회는 사회 속에서 그 존재의 가치를 점점 잃게 되면서 사회의 중심 축에서 밀려나와 주변을 맴도는 단체로 변한다. 이러한 현상을 주변화 또는 보이지 않는 종교화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예를 든 그러한 예언 운동과 같은 비 이성적이며, 광란적이며, 마술적이며, 무속적이며 비윤리적인 운동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이름 하에서 퍼져나간다면 그것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려놓은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기독교회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변호하여도 이미 주변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러한 것들은 가시성이 높다) 이미지 때문에 기독교회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비이성적이며 비도덕적 집단으로 취급된다 (그 일례로 얼마 전에 일어났던 방송 매체 점거 사태).

3.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과연 "성경적" 혹은 "성경에 있으니"라는 권위는 그들이 주장하는 데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 그리고 그러한 "선지자" 또는 "예언"에 대한 주장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하되 그들의 표현 방식에 대하여만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을 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성경의 권위와 관련된 것을 먼저 다루고 다음에 선지자와 예언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도모할 것이다.

1) 성경의 권위

우리가 성경적이라고 하며 성경의 권위를 주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문자주의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의 마귀가 인용한 성경의 예이다. 다른 한 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밭에서 낱알을 주어 먹었을 때 바리새인들이 비판한 것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문자주의적 접근으로써 예수님의 반응은 문자주의의 오류를 넘어서서 원래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를 들면 예수님이 아주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거나 계시할 때 종종 비유들을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경우 문자 주의에 빠지면 그야말로 비유를 통하여 들어내려고 하는 원래의 것들을 발견할 수 가 없다. 예를 들면, 신랑이 올 때 등불을 준비하고 있는 처녀에 관한 비유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가? 신랑되신 예수님 다시 올 때 처녀들은 등불을 모두 들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성경이 사람들의 언어라는 상징적 수단을 빌어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사람들의 언어는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만치 않다는 점 또한 인식해야 한다.

둘째로, 어떤 사람이 자기의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기 주장이 나오는 어떤 특정한 부분만을 인용하면 안 된다. 어떤 특정 부분을 인용하기 위한 전제는 그것이 속한 전체의 문서 혹은 전체 성경의 맥락과 부합하는 것이라야 한다. 통일교가 창세기 3장의 아담의 타락 사건을 완전히 성경 전체의 맥락과 다르게 해석함으로 피 갈림 교리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주관주의에 빠지는 것이며 전통적 진리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이단들이 바로 주관주의에 빠져 전통적 진리 체계를 벗어나서 개별적으로 어떤 부분을 해석함으로 생겨났다는 사실을 주지하여야 한다.

2) 예언과 선지자에 대한 성경적 이해

그렇다면 예언과 선지자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는 진정 무엇인가? 우선 구약 시대의 선지자와 예언에 대하여 볼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상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왕국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써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데 가장 우선적인 역할이 있었다. 그리고 왕국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므로 멸망당하는 것과 유대 민족의 운명과 주변국들의 운명에 대하여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예언 속에는 그러한 운명이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약에서 말하는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의 연속 선 상에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 혹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자의 기본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구약의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선지자에 대한 언급은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의 하나로 신약에 나타나 있다 (예, 고전 12:28; 엡 4:11). 그런데 선지자의 역할은 단순히 개인의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점쟁이 식의 그것이 아니다. 그 역할로써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에베소서 2:20에 나온다. 그곳에서 선교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고 그 위에 건물 다시 말하면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선지자가 미래를 예언하는 경우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가 큰 흉년이 들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과 (행 11:28),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 (행 21:11)을 예언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그 예언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가난을 극복하도록 하는 준비를 미리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경우는 교회의 존립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바울이 그 예언을 들었지만 그가 그것을 무시했다는 점은 그 예언이 비록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예언의 말이지만 결코 바울의 복음 전도의 사역을 전개해 나가는 그의 결단을 구속하지 못하였다. 이 경우는 복음의 전파가 최우선임을 말해준다.

예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고전 14) 아주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선지자가 아니라도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예언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에서의 예언에 대하여 아주 분명한 것은 그 예언은 개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4:24에서는 예언의 결과가 미래적이 아니라 그 예언을 통해 믿지 아니하는 자와 어릭석은 자들이 자신의 실상을 모르다가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언을 말함은 광란과 무질서로 나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칭 선지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지적한 바울의 말이 은사의 수여자인 주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의 명령에 위배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4. 나가는 말

이제 끝을 맺기 전에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이러한 운동들은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그리고 주관주의적으로 인용하여 무속주의적 점쟁이들이 하는 것들과 혼합시키고 있다. 진정한 성경의 권위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선지자와 예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령에 의해서 교회에게 주신 은사의 하나인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그러한 은사가 성경 후에도 있다고 한다면,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웨슬레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는 앞일을 예언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교회와 복음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은사의 하나인 예언은 반드시 선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는 기능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인의 앞날의 운명을 미리 말하기보다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를 들어냄으로 그것을 듣는 믿지 않는 자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다.

끝으로, 선지자나 예언은 하나님의 은사임으로 결코 훈련을 통해서 또는 세미나를 통해서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온갖 자랑과 개인의 권위를 높임과 광란과 무질서와 비이성적인 그리고 물질의 착취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신앙인의 이성을 파괴시키고 정욕적이라면 베드로가 경고한 거짓 선생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지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 .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 . ." (벧후 2:1-19).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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