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바꾸는 기도
밥 베킷 지음/예수전도단 옮김
1. 헤밋으로의 부르심
1973년, 히피 운동이 절정을 이루던 때, 나는 주님을 영접한 지 5년 정도 되었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나는 주님을 섬기는 일이 내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5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빈민가의 아이들을 돕거나 마약 중독자들을 위해 일하거나 사역을 위한 훈련을 받으며 보냈다.
그후,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캘리포니아 주의 남부에 위치한 팜 스프링스에서 남서쪽으로 가면 헤밋(Hemet)이라는 지역이 있다. 이 작고 메마른 사막 도시에 주민들을 위해 세워진 허술한 청소년 보호 시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와 아내 수잔에게 비행 청소년을 위한 수용 시설의 책임을 맡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단순한 청소년 사역을 넘어서 새로운 차원의 여정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청소년 보호 시설은 소보바 인디언 보호 구역에 인접해 있었다. 산 재신토 산기슭의 작은 언덕들로 이루어진 주변 경관은 별로 장관이라고 봐 줄 만한 것이 없었다. 프레드라는 사람이 시설을 안내하면서 처음으로 나에게 그 지역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는 산 속에 있는, 나무가 울창한 계곡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돌과 흙으로 둘러싸인 작은 협곡에 도착했다. 프레드는 눈을 반짝이며 ‘지구의 배꼽’으로 알려진 이 작은 협곡이 대단한 것인 양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초월 명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것이었다. 수련생들은 고차원의 초월 명상에 도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물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시기에 맞춰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 이곳까지 들어온다고 한다. 협곡의 벽에는 수십 년 동안이나 시계 반대 방향으로 물이 흘러 나간 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프레드의 말에 의하면, 폭포수가 떨어질 때 초월 명상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주문을 외우며 명상에 들어가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물이 방향을 바꾸어 역방향인 시계 방향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졌는데도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내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자 프레드는 협곡의 바닥에 있는 침전물을 조사해 보라고 했다. 나는 바닥에 난 흙의 문양을 관찰했다. 증거가 명백했다. 실제로 물이 시계 방향으로 흘렀던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서고 등골이 오싹했다.
돌아와 내가 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나에게 그 불가사이한 장소를 보게 하셨을까? 과연 이 도깨비 장난 같은 일을 믿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그저 기억에서 떨쳐 버리고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내 신경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었다. 순간 나는 전에 사 두었던 그 지역의 사냥용 지도를 꺼내 우리가 갔었던 그 협곡을 찾아냈다. 순전히 충동심에 이끌려 옆에 있는 붉은 펜을 집어들고 프레드가 ‘지구의 배꼽’이라고 말했던 그 위치에 작은 점을 찍었다.
그후 수잔과 내가 헤밋의 청소년 보호 시설에서 일하던 2년 동안, 해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정원에 찍힌 이상한 발자국, 유령 역마차…. 나는 해괴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냥용 지도에 그 일이 일어난 장소를 찾아 또 다른 붉은색 점을 추가해 나갔다.
하루는 우연히 시내에 갔다가 친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와 이야기하는 중에 나는 인도 요가 수행자 마하리쉬 마헤시 요기가 헤밋 근처에 얼마간의 땅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더 많은 은밀한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사이언톨로지 사교 집단도 이 지역에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구입했는데 그 교의 지도자들이 이 지역으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집단의 미디어 본부가 될 굉장한 복합 건물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지도에 또 하나의 붉은색 점을 추가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점들이 거의 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유독 이 장소에 그토록 많은 영적 활동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계속해서 이상한 사건이나 신비로운 활동, 또는 희생 제사를 드렸던 곳들을 주목하면서 보다 광범위하게 헤밋 지역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이나 작성한 지도에 대해서는 일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 골짜기의 사냥용 지도는 점차 영적인 그림이 되어 갔고 이것을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1975년 말에 수잔과 나는 청소년 보호 시설을 사임하고서 헤밋의 한 지역에 계곡 교회를 개척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환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내 눈앞에 곰 한 마리의 털가죽 전체가 산 재신토 산을 덮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마치 곰 가죽이 그 지역의 지도를 덮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매서운 발톱이 달린 4개의 곰 발바닥은 4개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무려 사방 5킬로미터에 이르렀고, 그 중심을 관통하는 곰의 척추 부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얼마 후 나는 똑같은 환상을 다시 보았다. 그후 기도할 때마다 환상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좌절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나는 이 환상의 의미가 무엇이며, 왜 내게 이 환상을 거듭해서 보여 주시는지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어느 날 응답을 받았다. 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내 영이 주님의 응답을 깨달은 것이다. 만약 12명으로 구성된 기도 팀이 산 재신토 산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곰의 형상을 한 사단의 척추 뼈를 부러뜨리실 거라는 확신이 왔다. 이상한 소리나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증거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결코 이전에 이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나 자신조차 이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곤란한 것은 다른 11명의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주님이 보여 주셨다는 확증이 필요했다. 이런 생각이 결코 나 자신에게서 나왔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님이 보여 주신 계시를 놓고 씨름했으나 결국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교회의 장로들을 찾아갔다. 곰 가죽과 주님께서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했다. 예상외로 이 자비로운 형제들은 내게 어떤 확신이 있다면 기꺼이 나와 함께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한 교인의 가게를 방문해야만 한다는 강한 내적 충동이 일었다. 어쩐지 그 교인이 이 일에 대한 기도 장소를 가르쳐 줄 것만 같았다. 걸어 들어가던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오, 밥 목사님, 목사님이 오실 거라고 주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열쇠꾸러미 하나를 꺼내 들고 내게 건네 주었다. “이건 아이딜와일드에 있는 저희 별장의 열쇠입니다. 필요한 대로 사용하시고 돌려주세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이딜와일드는 내 지도에서 곰 가죽의 척추 부분에 해당하는 산 재신토 산 위에 있었다.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돌아오면서 새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격했다.
약속한 날짜에 우리는 몇 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아이딜와일드의 산 위로 올라갔다. 별장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영적 전투에 대한 부푼 기대를 함께 나눈 후 이어서 밤이 될 때까지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점차로 영적 전투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육적 싸움이 우리를 사로잡아 가고 있었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때는 완전히 잠과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화가 느껴졌다. 음침하고 짙은 어둠이 별장을 내리 덮었다. 순간순간마다 뭔가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던 잠이 싹 달아났다. 우리보다 더 강력한 어떤 힘이 별장 안에 마치 유독 가스층처럼 스며들었다. 누가 인도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일제히 ‘보혈의 능력’이라는 찬송을 큰소리로 불렀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때, 무엇이 ‘우두둑!’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두 사람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던 그 굉음은 마치 맘모스의 관절이 부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별장이 실제로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발 밑의 땅이 흔들리자 우리는 목청을 높여 더 힘껏 찬송을 불렀다. 이윽고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던 어둠도 사라졌다.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졌고 이제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차를 몰고 곧장 산을 내려왔기 때문에 그때 일어난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그곳에 보내신 목적은 분명히 성취했다고 느껴졌다.
산꼭대기에서 기이한 일을 경험한 후에 우리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왔다. 그 도시의 목회자들은 기꺼이 협력하며 사역을 함께 했다. 헤밋의 무언가가 바뀌어 있었다. 그 별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이 뭔가가 더 있을까?
1992년 우리 장막교회에서는 내 오랜 친구인 신디 제이콥스를 강사로 초청해서 영적 전쟁에 대한 집회를 가졌다. 내가 존경하는 풀러 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도 기꺼이 강사로 응해 주었다. 집회 전날 밤 수잔과 나는 그분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수년 전부터 영적 전쟁이 교회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각 교파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지역적인 영, 즉 정사를 지배하는 악령에 대한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나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너덜너덜해진 내 지도를 펼쳐 놓고 이 지역에 대해 내가 파악한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마침내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루이스 라모르가 쓴 『고독한 신들(The Lonesome Gods)』이라는 책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라모르라는 작가는 소설을 쓸 때 그 지역과 지역의 역사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문헌에 기록된 사실에 기초하여 가상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피터가 말해 주었다. 『고독한 신들』은 내가 지도에 표시한 산 재신토 산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피터 와그너 교수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책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하는 타퀴츠라는 이름이 나의 주목을 끌었다. 전에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있었으나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타퀴츠라는 이름은 ‘악한 자(the Evil One)'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 지역의 토착 인디언들은 타퀴츠의 영을 숭배하며 그 영이 산 재신토 산속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주님의 영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지도를 꺼내서 타퀴츠를 찾아보라.”
지도를 펼쳐 타퀴츠를 찾아보니 우리가 15년 전에 기도했던 별장이 바로 타퀴츠가 있는 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별장의 뒷문 정면에 타퀴츠 봉이라 불리는 300미터 높이의 뾰족한 바위산이 보였는데 그 봉우리는 내가 환상 중에 거듭 보았던 곰 가죽의 척추 부분과 완전히 일치했다.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곳도 그곳이었다. 15년 전 우리는 비록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전략적 차원의 영적 전쟁을 위해 우리를 그 별장으로 보내셨던 것이다.
아무튼 1973년 이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이 지도를 통해 내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계심을 깨달았다. 나는 더욱 더 깨달은 사실에 마음이 끌렸고 하나님이 어디까지 이끄시는지 보고 싶었다. 나는 지금 우리 지역의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흥미진진한 모험들을 하는 중이다. 우리가 수집한 역사적, 지리적 정보를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팀을 이루어 정확한 중보 기도를 하는 가운데 우리 지역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들은 어느 지역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확신한다.
2. 중보 기도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장막 교회에서 목회하던 초기부터 우리는 그 지역이 좋아졌다. 주님은 내가 헤밋 지방을 섬기겠다는 진지한 헌신을 하도록 이끄셨다. 나의 가장 큰 소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도시에 강력하게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마약이나 폭력배와 같은 문제들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우리 마을 주변에 거주하는 인디언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다. 음란물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직면하는 이러한 보편적 문제점들은 우리가 사는 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떻게 소규모의 지역 교회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만이 진정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을 위한 가장 강력한 병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5년 동안 무려 1,300시간이나 합심해서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헤밋의 문젯거리는 거의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 전쟁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는 걸까?
나는 주님께 나아가 간절한 심정으로 응답을 구했다. 점차로 주님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믿음으로 충성스럽기는 했지만 우리의 중보 기도는 한마디로 일관된 정확성이 없었다. 우리는 기도를 여기저기 날려보내면서 그것이 요행히 과녁에 적중하기를 바라는 스커드 미사일식 기도를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헤밋을 향한 주님의 계획을 아는 일이었다. 기도로 전쟁할 때 어떤 영역을 놓고 씨름하기를 원하시는가? 제각기 다른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우리 도시에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헤밋에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그 지역을 묶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들을 모아 탄두로써 장착시킨 스마트 폭탄식 기도를 해야 했다. 그후 우리는 전략적 차원의 중보 기도를 함으로써 스마트 폭탄 기도를 정확한 지리적 위치에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서부터 우리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기도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 지역이 어디며 왜 그곳이 더 큰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았기에 우리의 기도가 어떤 목표들을 때리고 있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기도 후에는 응답의 여부를 평가했다. 만약 분명한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다시 동일한 주제로 돌아가서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우리 도시에 변화가 일어났다. 사랑하는 우리 도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목사인 나에게 더 보람된 일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마트 폭탄과 같은 전략적 차원으로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영적 지도 그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고 말한다.
1. 우리 지역 사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2. 우리 지역 사회에 왜 그런 문제들이 발생했나?
3. 그 문제를 놓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만약 우리가 도시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음모에 대항하여 단순한 기도를 하는 정도에 머문다면 전략적 중보 기도나 영적 지도 그리기의 궁극적인 목표에는 안타깝게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예레미야 1장 10절에서 우리의 사명은 오로지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건설하며 심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둠의 세력을 무력화시킬 때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과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기도는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무기다. 더군다나 어둠의 심장부를 표적으로 삼아 기도하는 것은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렇다고 기도가 초자연적인 힘을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주문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3. 이 세상은 주님의 소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을 사랑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땅을 돌보는 책임을 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돌보라는 책임을 지워 주셨다. 그 대가로 아담이 거처할 장소와 음식을 에덴 동산을 통해 공급하셨다. 이것이 ‘에덴 언약’, 또는 ‘책임을 수반하는 관계’의 본질이다. 에덴 언약은 하나님이 거하도록 정하신 땅(에덴 동산)을 섬기겠다는 아담의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땅의 관계 또한 변화되었다. 실제로 아담에게 내려진 징계를 보면 땅에 대한 저주를 포함하고 있다. 최근 나는 성경에 지명을 나타내는 구절이 많음을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토지가 하나님께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카인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아벨의 피가 호소함에 따른 응답으로 가인의 살인죄에 가장 엄중한 형벌을 내리셨다. “나는 네가 소유한 땅에 대한 권리를 빼앗아 죽는 날까지 유랑자가 되게 하였다. 네 삶에는 계획도, 희망도 없게 될 것이다.” 유랑자가 된다는 것은 정처가 없다는 의미며, 곧 저주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와 자비로써 인간에 대해 뿐 아니라 아담으로 인해 저주받은 땅에 대한 구속도 계획하셨다. 첫 번째 아담으로 인해 땅은 순종을 상실했지만 두 번째 아담이 신성한 나무 위에 매달림으로,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땅은 순종을 회복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장소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갖기 원하신다. 오직 최선을 다해 충성할 때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향해 갖고 계신 소명과 온전한 목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사역의 소명을 깨달았어도 하나님이 어느 곳으로 부르셨는지를 알 때까지는 결코 그 가능성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곳이다. 그곳이 우리에게 주어진 분깃이기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사역을 해야 하는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곳이다.
지역 교회의 목회자나 책임 있는 지도자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 지역보다도 해외 선교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과 재정을 쏟아 붓는다면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교회들이 전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도 정작 자기 도시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동일한 노력과 재정을 투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 사회를 사랑하고 헌신된 목회자가 섬기는 지역 교회는 큰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목회자는 자신의 은사를 십분 활용하여 지역 사회를 향한 원대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4. 지역에 대한 헌신
한 지역에 대해 영적인 소유권을 취한다는 개념은 상당히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제도와 정부 조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대적들은 더 강력한 힘에 의해 제압당할 때까지 합법적인 영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의 권위, 즉 갈보리에서 보혈을 흘려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강력한 대적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 29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주인 정신을 갖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은 그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잡혀 간 도시의 평화를 구하고 그 지역을 섬기라고 요구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옮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곳에 머물러 살면 삶이 평탄하고 그 땅을 축복하게 되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지역 사회에 헌신할 때 나타나는 결과로, 즉각적인 것과 장기적인 것이 있다. 즉각적인 결과는 번성의 축복과 평화의 축복이다. 장기적인 결과로는 첫째, ‘장래의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에 찬 기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이 개인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비전과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성경적인 헌신을 통해 그 이상의 수많은 결과들이 맺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5. 지역에 대한 이해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개인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똑같은 도시는 없다. 특징이나 외형적인 모습, 심지어 역사까지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당신이 살고 있는 곳과 똑같은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 도시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독특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서로 다른 은사와 가능성으로 그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듯이, 각각의 도시도 천부의 신성한 목적을 갖고 탄생했다. 또한 도시를 장악하려는 사단의 전략도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 그리기의 방법을 아는 것과 실천을 통해 지역 사회를 제대로 파악할 뿐 아니라 가장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도시에는 짊어져야 할 어떤 책임이 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어느 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의 세 도시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인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을 향해, 고대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 소돔과 비교하면서 엄히 꾸짖으셨다. 그렇다면 도시들도 그 지도자들과 더불어 심판의 날에 명백하게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6. 사단이 어떻게 합법적인 권한을 갖게 되는가?
시편 24편은 물질적인 땅과 그 열매, 그리고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것들 - 헬라어로 erets -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한복음 14장의 본문에서 이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스모스(cosmos)로 이 단어는 구조, 인간 조직, 정치 체제 등을 의미한다. 사단은 코스모스, 즉 인간 조직이나 정치 체제의 지배자이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이 세상과 공중은 자동적으로 사단의 것이 되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왕권 정치를 완강히 반대하셨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인간 정부 체제로 바꾸면 불법적으로 들어온 사단이 그 속에 합법적인 왕국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은 뒤로 물러서고 사단의 합법적인 접근이 허용되었다.
사단의 합법적 권리가 인간의 조직과 정치 체제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성경에 있다. 바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이다. 사단이 예수님께 제안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가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 만국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조직과 정치 체제에 대한 합법적인 권세를 주겠다는 말이다. 만일 사단이 주겠다는 천하 만국이 진정한 그의 소유가 아니라면 이 유혹은 말도 안 되는 한낱 조롱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유혹거리도 될 수 없다. 사단은 진정으로 이 만국을 소유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나라들을 원하셨으며 그래서 사단의 유혹은 적절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틈에 해당되는 헬라어 topos는 ‘어떤 곳에 위치한 장소, 집, 땅’을 의미하며, 영어 ‘지형적인’(topographical)이라는 단어의 어근이다. 왜 바울이 이 구절에서 지리적인 용어를 사용했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의 실제 부동산 거래와 비교하면 좋은 예가 되리라 생각한다. 당신이 비록 99평의 땅을 소유하고 전용 도로를 갖추었어도 그 안의 1평을 소유한 사람에게 당신의 땅을 24시간 불편 없이 통행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것을 동등 통행권이라고 한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동등 통행권이 동일하게 작용한다. 만약 내가 나의 삶 속의 다른 모든 영역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한 영역만 남겨 놓는다고 해도, 그 하나의 영역으로 인해 사단은 여전히 합법적 권한을 갖고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있다. 동등 통행권이 부정적인 인상을 준 것 같지만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당신 또한 어둠의 지역에서 동등 통행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역적인 헌신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7. 도시 전체가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
사단은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에 한 장소에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를 향한 악한 계획이 이행되기 위해서는 과업을 자기의 추종자들에게도 위임해야만 한다. 사단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추종하며 활동하는 사악한 영들에게 이 과업을 위임한다. 때때로 지역적 영들로 불리는 높은 계급의 귀신들은 지역 사회의 사회적 구조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귀신론 분야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귀신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개인의 죄로, 한 개인이 적극적이든 방임적이든 죄를 범하면 사단에게 문을 열어주는 셈이 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 : 19~21)."
두 번째는 조상의 죄이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 : 5)."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이 불공평하게 보일 것이다. 이 흐름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후손들이 동일한 죄를 반복하면 또다시 삼사 대에 걸친 저주가 이어져 내려간다. 비록 후대에서는 더 이상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해도 주님의 보혈로 그 죄가 씻김을 받지 않는 한 혈통 안에 약점으로 남게 된다.
세 번째는 학대와 거절, 상처이다. 부당하다고 느끼겠지만, 학대를 당하거나 거절되거나 상처를 받게되면 귀신의 영향에 노출되는 비극이 생긴다. 귀신은 비열하게 활동한다. 희생자가 어릴수록 더 좋아한다. 그들이 섬기는 주인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축사 사역자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학대, 거절, 상처 등의 이유로 귀신에 억눌려 있는 사람을 자유케 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다.
네 번째는 주술, 신비술, 비밀 결사 조직이다. 의식적으로 귀신을 불러들이는 행위는 하나님보다 다른 신 또는 능력들에게 의도적으로 자신을 내어 줄 때 또는 그것을 숭배할 때 가능하다. 뉴에이지의 신비술도 이에 해당한다. 영적 교통을 추구하고 그 영들의 인도를 바라는 것은 명백하게 사단적이다. 건강이나 환경에 관련된 것처럼 건전해 보이는 활동도 많이 있지만 뉴에이지 활동에 참여하는 자들은 귀신의 역사에 노출될 위험이 대단히 크다. 그 외에도 신비술에 연루된 단체로는 프리메이슨단, 크리스천 사이언스, 사이언톨로지 교회가 있다. 또한 강신회에 가담하는 것, 점 보는 것, 책상 기울이기, 공중 부양, 심지어 우이자판과 타롯카드도 단순한 놀이처럼 보이지만 위험하다.
다섯 번째는 저주이다. 저주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신이나 사단의 능력이 그 대상에 임하도록 기원이나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주문은 저주의 말이나 저주가 서린 어떤 물건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제사나 마교 등의 신비술적 행위를 겸해서 저주할 때 영적인 효력이 더해진다. 귀신들림은 저주의 결과일 수 있다.
귀신들린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사람에게 어떤 요인이 작용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 원인을 알고 나면 귀신이 들어오는 문을 차단할 수 있는 정확한 전략을 세울 수 있고, 기도를 통해 사단이 활동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무효화시키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귀신들이 한때 자유롭게 들어왔던 문설주에 예수님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악한 영향이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도록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낼 수 있다.
왜 귀신들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계시하시는 지식의 말씀을 통해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귀신들린 사람과 면담하는 것이다.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 후에 축사 사역을 한다.
도시가 사단에게 점령되는 요인도 한 개인에게 귀신들림이 일어난 원인을 찾아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일단 어떻게 악한 세력들이 도시나 집단 안에 발판을 구축하는지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한 후에는 어떻게 그들이 통제권을 유지해 나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영적인 수단인데 대부분 의식과 축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다른 하나는 물리적으로 영토에 표시를 함으로써다.
다음은 지역 사회 안에 사단의 영역으로 표식된 지점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질문들이다. “당신의 도시 안에 심령술사나 신비술과 관련된 상업이 있는가?” “폭력 조직의 문제가 있는가?” “매춘이 성행하는 홍등가가 있는가?” “성인용 도서 판매점이나 동성 연애자들이 모이는 술집이 있는가?” “프리메이슨 조직이 있는가?” “사단에게 이용되는 조각상이나 기념비들이 있는가?” “건물에 장식된 예술품들 중에 그리스 신이나 악마의 얼굴 형상이 있는가?” “박물관이 관능적이거나 사단적인 예술 작품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은가?” “신비술사나 점술가들의 집회 장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한탄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 : 6)." 기독교인들은 눈을 열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특별히 이런 것들이 우리 지역 사회의 영적 기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8.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
사단의 계략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올바르게 인식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되도록 부르시고 무장시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 : 21~22)."
만약 우리가 자신을 어둠의 세력보다 약하고 부족하고 무능하다고 스스로 인식한다면 어둠의 세력 또한 우리를 동일하게 취급할 것이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 : 6)."는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의 힘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과 중보 기도가 우리의 주된 무기인 것을 깨닫는다면 사단은 변변한 방어도 못하게 된다.
영적 전쟁이라는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 단계를 살펴보자. 첫 번째 단계는 전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위가 곧 힘이며 강점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연합해서 하는 기도는 개인이 혼자하는 기도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 : 10)."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됨이 기독교의 진보를 측정하는 기준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을 2천 년 동안이나 못 깨닫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셈이다. 분열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병들게 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지역 교회이다. 아주 단순하지만 배우는 데 수년이 걸린 교훈이 있다.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하라.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중단하라.” 각 교회마다 독자적인 강함과 독특한 방법으로써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역 사회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갖는 아름다운 모습임을 우리 모두는 보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로는 개인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에게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영적 은사가 주어져 있다. 모든 기독교인은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사단의 세력이 감소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심도 높게 임하게 하는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위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도시들을 창조하셨다. 우리의 싸움터를 안다는 것은 단지 왜, 어디서, 어떻게 악이 지역 사회에서 활동하는가를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왜 그 도시를 창조하셨으며 그 도시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9. 회개로의 부르심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따르는 일이 중요하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오늘날 성령이 교회를 회개의 시대로 인도하고 계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종류의 영적 전쟁도 시도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회개로의 부르심은 회개의 내용이, 개인이 책임져야 할 죄악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는 점에서 파격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회개를 동일시 회개(Identificational repentance)라고 부른다. 즉, 연관 있는 집단(예를 들면 도시나 국가)의 죄를 자신의 죄와 동일시하여 용서를 구하는 행위다. 동일시 회개는 우리 시대에 영적 전쟁 무기고에 비치된 가장 강력한 병기다.
또한 용서도 영적 전쟁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한복음 20 : 23)." 이처럼 용서함과 용서하지 않음의 파생 효과는 엄청나다. 후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24)."라고 말씀하시며 용서에 대한 원리를 본으로 보여 주셨다. 사단은 용서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는 요새를 세울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갖게 된다. 그에 반해, 용서는 범죄자와 피해자 모두를 사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한다. 피해자가 범죄자를 용서하면 사단의 법적 권한은 사라지기 때문에 주님이 그 상황 가운데 역사하셔서 깨달음과 용서와 치유가 일어나게 하신다. 예수님도 용서함이 없이는 그들의 눈을 가리우고 있는 것들이 결코 떨어질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
내가 헤밋에 처음 도착했을 때 헤밋 골짜기는 건조한 불모지여서 마치 사막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때 손쉽게 지하의 물을 끌어 쓸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한 용수 회사가 헤밋 골짜기의 물을 인근 지역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기술자들은 산을 통과하는 파이프의 방향을 잘못 계산하여 법적으로 자신의 소유가 아닌 지하의 수맥을 실수로 뚫어 버렸다. 실제로 1년 이상 막대한 양의 물이 산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물의 방향을 전환시켜 강 하류로 흘러가도록 한 뒤 인근 리버사이드와 오렌지 카운티에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팔아먹었으며 결국은 반발을 사고 말았다. 소보바 인디언들은 땅이 메마르고 황폐해지자 용수 회사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무당들을 불러서 용수 회사의 송수관 작업을 했던 인부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 이후 실제로 회사의 인부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원인 모를 사건으로 죽기도 했다.
우리 장막 교회는 양측의 상처와 죄가 이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고 기도 모임을 통한 공개적인 용서와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소보바 보호 구역에 사는 한 기독교 추장의 여동생이 함께 참석했고, 용수 회사를 대표해서는 현재 그 회사의 직원으로 있는 한 젊은 기독교인이 나서서 서로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그때 갑자기 교회 뒷좌석에 앉았던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아르헨티나에 선교사로 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휴가 차 고향집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50년 전 송수관을 설치했던 용수 회사의 인부 중 한 사람이었다. 소보바 사람들과 용수 회사 대표자들이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대적의 권세가 깨뜨려졌음을 확신했다. 양측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졌다. 따라서 사단의 법적인 권한도 제거되었다. 그 모임 직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보호 구역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삼대 째 무당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의 할아버지도 용수 회사의 인부들을 저주하는 데 참여했다고 했다.
그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지역의 땅을 고치셨는가 하면, 바로 골짜기의 고갈된 지하수를 다시 소생시키심으로써였다! 기도 모임 이후에 강수량이 해마다 기록적으로 증가하더니 급기야 정부 관계자들이 저수지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로 지목한 곳이 바로 헤밋이었다!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지질학자는 나에게 저수지가 조성되면 지하 수면의 수위도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부족끼리의 죄를 서로 고백하며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헤밋 지역의 사람들과 땅을 함께 축복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10. 지역 사회 구원의 열쇠
나는 진정으로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이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어떤 기관이나 사역도 지역 교회를 대신할 수는 없다. 실제로 지역 교회는 지역 구원의 열쇠며,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주요한 전초 기지다. 많은 경우 우리가 교회에 헌신하는 것만큼 지역 사회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균형을 잃어버린다. 진정한 목자에게는 지역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왜냐하면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이 바로 미래의 양들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비전을 받고 사기 충만한 교인들이 있을지라도 한 교회가 단독으로 전 도시를 감당할 수는 없다. 그런 시도는 아예 하지도 말라! 하나님은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 접근하기 위해 여러 교단의 다양한 측면을 사용하신다. 그리스도의 몸 된 각 교회들은 교단적 특수성과 개별성을 잃지 않고 같은 목적으로 얼마든지 함께 동역할 수 있다.
목회자의 진정한 권위는 그에 따르는 책임을 수반한다. 영적인 문지기로서의 역할과 관련된 두 가지 특별한 책임에 대해 말하자면, 첫째는 도시의 죄악을 용서받아야 하며, 둘째는 교회의 죄악을 용서받아야 한다. 목회자의 책임은 도시의 죄악에 예수님의 보혈을 바르는 것이며, 신약의 새언약적 차원에서는 기도를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진다. 또한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분파주의나 교리적인 편견으로 범죄했을 때 그것은 서로에게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 대해서도 죄를 범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러한 죄악을 용서받아야 할 책임과 기름부음이 있다.
목회자들이 도시의 영적 문지기라 할지라도 목회자 단독으로 대적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 수는 없다. 더구나 목회자는 대적들의 공격 표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문지기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목회자를 도와 줄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보내 주신다. 그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눠 보면, 첫째는 ‘성벽 위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중보 기도자들이요 둘째는 ‘숨은 장로들’로 중보 기도와 예언의 능력을 갖춘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영적 문지기들이 지역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분별력을 제공하게 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이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공통적인 일치를 보인다면 목회자는 더욱 확신 있게 행동할 수 있다.
우리 장막교회가 헤밋의 지역 사회 안으로 들어가 행한 여러 가지 사례들 중 하나를 소개하면서 끝을 맺으려 한다. 1991년 8월 어느 주일 아침, 나는 5시도 못되어 잠이 깨었다.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정신은 말똥해 있을 때 주님께서 놀랄 만한 지침을 떠올려 주셨다. “마을 골짜기에 기도 장막을 설치하라. 골짜기로 들어가는 각 방향, 즉 동서남북의 입구마다 장로들을 배치하라. 장로들은 각자 1미터 길이의 나무 막대기를 만들어 그 위에 이사야 33장 20~24절을 새겨 넣어라. 너는 골짜기의 중앙에 있는 교차로로 가서 장로들이 골짜기의 네 지점에서 땅에다 나무 막대를 박는 순간 사람들과 같이 찬양의 제사를 올려라. 찬양하는 동안 너는 골짜기 중심 지역에서 중보 기도 장막의 중심 기둥을 세울 것이며, 네 개의 나무 막대는 장막의 네 모퉁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너는 이것을 오늘 오후 5시에 행하되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라 성경에서 이사야서를 펼쳐 보았다.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 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원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기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 33 : 20~24)." 나는 헤밋의 황무지에 위치한 지역 사회와는 별 상관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큰 배’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 땅의 구원과 안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오전 예배 시간에 간단한 광고를 했지만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도하려고 모여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는 다섯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의 위치로 나아갔다. 5시 정각에 장로들이 각 방향의 땅에 막대를 박으면서 이사야서의 본문을 큰소리로 읽는 동안, 수잔과 나는 우리 그룹을 인도하여 골짜기의 중앙 교차로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렸다. 지나다니는 차량과 사람들 때문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우리 마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꼈다.
6시에 우리 모두는 저녁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각기 교회로 돌아왔다. 예배 시간에 세 명의 장로들이 자신의 그룹이 경험했던 것을 차례로 이야기했다. 이사야서 구절에서 왜 배의 노, 돛대와 줄, 그리고 돛을 언급했는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역 사회를 위한 기도에 깊게 감동했다. 마지막 네 번째로 던 헤일즈 장로가 일어서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던 장로가 맡은 장소는 재신토 강의 언덕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학살의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 있었다. 바로 하수와 강 옆에서 기도했던 것이다. 던 장로는 기도회를 마친 후에 다른 길로 돌아서 교회로 가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이 개울을 끼고 사이언톨로지 교회의 사유지에 들어섰을 때 돛과 돛줄과 노를 갖춘 완전한 실물 크기의 배 구조물을 본 순간, 그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예언적인 기도 모임이 있은 후에 우리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둠의 활동들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사단의 비밀에 빛이 비추이면 우리 대적들의 가장 큰 약점, 즉 전투 계획이 폭로되는 일이 일어난다. 장막교회의 교인들은 또한, 하나님께 순종할 때 지역 사회의 어둠이 폭로된다는 명백한 상관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던 지역 교회들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장막 교회에서도 단 몇 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주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나님은 이러한 회개와 또 다른 노력들을 존중히 여기시어 서로를 경쟁 상대로 생각했던 목회자들에게도 연합의 기적을 베푸셨다. 연합은 교단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마을의 목사들은 오순절 교회, 은사주의, 개혁주의 그리고 보수 교단의 모든 교회들이 참가하는 천막 부흥회를 개최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조화였다. 어느 날 저녁에는 오순절 교회의 예배 팀이 섬기고 침례교 목사가 말씀을 증거했다. 부흥회는 대만원이었으며 끝나갈 즈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고 치유와 축사를 경험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마을에서 서로 연합한 결과였다. 현재 우리는 매주 목요일마다 초교파 교역자 모임을 갖고 지역 사회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교제를 나누고 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지역 사회를 섬기고자 헌신한 이후 교단적 차이는 점차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략적 차원의 중보 기도 사역은 분명히 효과가 있고, 비록 값진 헌신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원한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오는 세대에 경건한 유산을 남기게 한다. 이제 우리 지역 사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사명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과업을 완수하여 우리의 자손들, 그리고 그 자손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기쁘게 깃발을 들고 나아가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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