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스크랩] 회개/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아들 2013. 2. 16. 13:15

마틴 로이드 존스 /회개




1. 죄인의 고백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1-5)


시편 51편이 구약성경에서 회개의 문제에 관한 고전적 진술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사실상 이 시편은 신구약 성경전체를 통틀어 회개의 포괄적 문제에 관한 고전적 진술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시편 51편은 이스라엘 왕이었던 다윗의 가증스런 범죄가 드러난후 그의 영혼이 몹시 고뇌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흠정역 kjv에는 시편 51편의 표제가 “악장에게, 다윗의 시, 그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 다윗이 시편 51편을 쓰게 된 당시의 정황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시편과 거기에 담긴 교훈을 제대로 읽어 낼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51편은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 우리의 인생이 그처럼 역겨운 것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 역시 역겨운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본질적으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고, 그의 군대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후방인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우연히 누가 보더라도 우연이라고 밖에 할수 없습니다.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다윗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우고 있었던 어느 장교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다윗은 욕정이 불같이 일어나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부하를 시켜 그녀를 궁궐 로 불러들이고는 간통했습니다. 그녀의 순결을 더럽힌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총사령관 요압에게 전갈을 보내 그녀의 남편인 헷사람 우리아를 예루살렘으로 소환했습니다.다윗은 왕궁에 들어온 우리아에게 요압과 병사들의 안부를 묻고 전쟁터의 형편도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우리아에게 집으로 돌아가 푹 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신의를 존중했기 때문에 자기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왕의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고 이스라엘의 운명이 바람앞의 촛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측하건대, 우리아는 “안되지, 안되고 말고 ! 어찌 , 나 혼자만 편하겠다고 그럴수 있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왕궁 문간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가엾은 우리아를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낼 속셈으로 술에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그날도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다윗 왕은 편지 한통을 써서 우리아 편에 요압장군에게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인즉 이러했습니다. “ 우리아를 제거해야겠소. 장군은 반드시 그를 최전방에 배치하시오.” 요압은 명령에 따라 헷사람 우리아와 몇몇 병사들을 용감무쌍한 적군이 포진하고 있는 최전방에 배치했습니다. 우리아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뜻을 이룬 다윗은 흡족해하면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후처로 삼았습니다.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땠습니까?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자신에게 보낼때까지 꿈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나단이 , 다윗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 폐하 , 한가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어떤 성읍에 두사람이 살았는데, 한사람은 부유했고 한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지만,가난한 사람에게는 어린 암양 한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암양을 자식처럼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기의 양떼나 소 떼 가운데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윗은 의분을 참지 못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은 그 치사한 놈을 당장 엄벌에 처하라!” 그러자 나단은 다윗을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단이 이 비유를 든 것은, 다윗 왕이 헷 사람 우리아에게 한 짓이 바로 그 부자의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음을 일깨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시편 51편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다윗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바로 이런 정황에서 다윗은 이 시편을 쓴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든 그 뒤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과 더불어 시편 51편을 깊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시편이 우리에게 현세적 삶에 관한 몇가지 기본적인 진리와 사실들을 아주 생생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위해 매주일 교회에 출석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식이 바로 이 성경에 들어있다고 믿기에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하나 ,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인간의 필요를 채울수있는데도 , 사람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성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만 성경의 능력과 구원의 은혜를 맛본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간략히 말씀드리자면,이 복음이 드러내는 위대한 구원을 맛보기전에 몇가지 선행조건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깨닫고 이해하고 또한 믿어야 하는 것이 몇가지 있는데 , 그중에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제가 설교 본문으로 시편 51편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포괄적 문제에 관해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회심자들의 간증을 읽다보면, 거기에는 회개라는 요소가 빠지지 않고 나타납니다.

성인들의 전기나 과거 하나님의 교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영적 거인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 자신의 삶에서 진정한 회심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헤를 맛본 사람들은 누구나 회개의 표징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회개없는 구원은 없다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회개의 필요성이야말로 성경이 논쟁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회개를 말할 뿐입니다. 성경은 회개를 자명한 일로 여깁니다.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회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서 기독교의 구원을 맛볼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회개야말로 지극히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죄를 용서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최초의 전도자가 선포한 첫 메시지는 바로 회개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 우리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루 다니면서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촉구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후원 아래 오순절에 최초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어떤 이들이 가슴을 치며 "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하고 울부짖자, 베드로는 " 회개 하십시오!" 라고 권면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알 수도 ,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는 필수적인 단계이자, 첫 번째 단계입니다.

어떤 이는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요?" 오늘 읽은 시편 51편은 회개의 포괄적 문제와 교리에 관한 고전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에 대한 오늘의 첫 설교에서 저는 회개의 첫 번째 단계라고 여기는것, 곧 회개의 한 모습과 한 단계를 꼭 다루고 싶습니다.

 

그 첫번째 단계는 죄의 자각 혹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오늘의 설교에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죄인의 고백, "죄의 자각" 또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백"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절대적 필수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에 들어 있는 많은 내용들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성육신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복음서의 이야기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 나아가 구속 사상과 의인이니 성화니 중생이니 하는 용어들이 낯설기만 하다는 사람들은 오늘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과연 필요한지 의아해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따지려 들 것입니다" 이론적이며 순전히 뜬구름 잡기 식의 이 모든 사상들은 교회가 전개해 온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사상들은 신학자들의 상상의 산물이 아닌가? 그것들이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이렇게 따지는 것은 죄에 관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임을 저는 지적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과는 사뭇 다르게 시종 죄의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합니다. 제가 보기에 , 성경은 사실상 죄의 교리를 언급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지금 혼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정치가들이라고 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철학자들은 문제 제기는 하지만 해결책은 없는 듯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이 세상이 온전해질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성경은 단언합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인데 너희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죄의 문제다 .개인의 문제든,대인관계의 문제든 , 국제관계의 문제든 , 온갖 문제의 원인은 죄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이 같은 사실을 도처에서, 그것도 매우 솔직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성경의 그런 면이 제게는 매우 색다르면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이 성경을 하나님의 책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로서는 이해가 안 갑니다. 성경은 매우 솔직한 책입니다. 성경은 거기에 등장하는 위대한 영웅들을 미화하려 들지 않습니다. 결점 하나 없는 영웅들로 가득한 선집 을 구성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장점뿐 아니라 약점까지 드러냅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궁극적 관심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들 신자가 불신자보다 낫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교리를 크게 훼손 하는 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인간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인간은 털끝만치의 소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성경은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 복음은 인간과 무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은 회개하지 않은 인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회개를 촉구하며, 이 같은 방식으로 무서운 죄의 교리를 다룹니다.

죄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죄는 끔찍한 악의 세력이며 너무도 끔찍하고 너무도 강력해서 인간이란 인간은 죄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 모두 죄 앞에 무릎꿇게 만든다는것입니다. 죄의 세력이 얼마나 크고끔찍한지는,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의 다윗 왕과 같이 훌륭하고 조금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까지 걸려 넘어진것을 보면 알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지금 죄의 세력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죄에 대한 그대의 인식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그대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내내 그대의 마음속에 , 그대의 주변에 그대 가까이에 이처럼 끔찍하고 극악무도한 세력이 판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면 그대는 이 문제에 관한 한 그야말로 풋내기다!" 진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땅에는 천사들과 권세들, 이 세상의 어둠의 주관자들, 하늘의 사악한 영들이 있어 우리를 꼬드기고 살살 달래어 마침내는 우리를 쓰러뜨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교리입니다. 시편 51편에는 이처럼 소름 끼치는 일이 명확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거쳐야 할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본성이 부패했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사실상 , 오늘 읽은 시편을 "변절자의 기도"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분과은혜로운 교제를 나누었던 자의 기도입니다. 진리를 알았음에도 타락의 길을 걸어간 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상관없습니다. 이 시편에 나타나는 죄에 대한 다윗의 고백은  신자의 죄든 불신자의 죄든 모든 죄에 예외없이 적용됩니다. 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기에, 다윗의 죄 고백은 죄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일컫는다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확신할때 필연적으로 밟게 되는 몇가지 단계와 과정을 보게 됩니다. 이제 각각의 단계들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인하는 단계입니다.3절에 나타난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확신하면,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죄와 직면하고 자신의 행위를 거짓없이 살핍니다. 시편 51편을 죽 읽어보면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처럼 죄를 지었음에도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놀랄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 다윗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어떻게든 외면하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처럼 끔찍한 죄를 범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비유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하지 않으셨던들 여전히 나 몰라라 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자신의 죄에 눈을 떴고 그로 인해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시편 51편을 쓰게된 배경입니다. 회개의 첫번째 단계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하던 일을 반드시 멈추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해왔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은 일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복음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회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리고 회개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는 죄를 자각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던 일을 접고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할 수 있었음에도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은 온갖 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추태 행진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었을까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지 않은채, 하던 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른바 쾌락 열광주의 pleasure mania-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어설픈 몸짓-를 뭐라 탓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느 날 , 홀로 밤을 지새우며 "나는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가? 나는 지금 마음속으로 엉뚱한 상상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자문하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그렇지만, 하던 일을 접어두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우리는 어쩌면 그렇게도 다윗을 닮았을까요? 자기 잘못을 변명하고 간과하며 망각하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죄를 짓다가 발각되거나, 그와 비슷한 일이 눈앞에 펼쳐지면 우리는 맹비난을 퍼붓습니다.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입니다.타락과 원죄로 인해 어누 누구도 거기서 예외가 아닙니다.우리는 부패한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갖가지 묘안을 짜냅니다.이 시점에서 간단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직시해본 적이 있습니까?"사람들의 시선은 의식하지 마십시오.이제껏 어떤 생각과 행동과 말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살펴보십시오.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자신의 잘못은 간과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이 정결해서 그렇게 하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그만따지라고, 자신을 직시하라고 촉구하십니다.각자자신을 살펴야 할것입니다.이왕 말이 나온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 , 이제 종교와 신학논쟁은 중단하고 한번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회개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자신을 살피며 마음을 들여다 본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데도, 현대인들은 이 권면을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현대인들은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영화를 즐겨 보거나 소설은 읽으면서도 정작 생각하는 일은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위해 투쟁하십시오. 세상은 가능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여러분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자신을 살피십시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상황은 개의치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것이 하나님을 알며, 그분의 영광스런 구원을 맛보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제 서둘러 두번째 단계로 가야겠습니다. 이 단계는 우리가 저지른 일의 성격이나 본질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세 단어로 아주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재 단어는 "죄과 transgression", 두 번째 단어는 "죄악 iniquity", 그리고 세번 째 단어는 죄 sin" 입니다 이제 이 세단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죄과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반역이며 , 권위에 대한 의지적 반항, 특히 권위자에 대한 반항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과의 의미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바꾸어 말해, 다윗은 자신이 죄과를 저질렀으며 반항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권위에 반항했으며, 누군가에게 반항했습니다. 자아가 거세게 일어났으며 스스로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욕망의 포로가 되었으며 정욕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죄과란 제 멋대로 하려는 욕구, 자신이 원하는 일과 즐겨하는 일만 하려는 욕구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의도적 선택, 적극적 반항 행위가 수반됩니다. 죄과란 우리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의지적이며 의도적인 불순종 행위, 권위의 침해를 의미합니다. 회개하는 자마다 자신이 그런 죄를 저질렀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이렇게 시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쁜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잘못을 인정합니다. 내면의 소리, 곧 양심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한 저는 반역자입니다!"

죄악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그러지거나 어긋난 행위, 왜곡된 행위입니다. 다윗의 경우가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소서! 죄악은 부정한 것이며 비열한 것입니다. 내안에 있는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죄악을 범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일그러짐이며 왜곡입니다! 그 같은 죄악을 범한 나야말로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요!" 여러분은 다윗이 저지른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일그러지고 어긋난 마음가짐, 왜곡된 상태를 새삼 들먹이지는 않겠습니다. 이 점에서 다윗의 죄성은 우리가 짓는 모든 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혹 여러분과 제가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여러분과 저는 다윗이 저지른 그 밖의 다른 죄와도 무관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점검할 때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온갖 일들이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행위가 어긋나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시기하고 질투하며 악을 행합니다. 여러분의 자아는 너무 끔찍할정도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빌며, 또 어떤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배 아파합니다. 그런 생각은  그릇되고, 어긋나고, 일그러지고, 추하고, 사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죄악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안에 왜곡된 성향이 있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이 이처럼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지고 왜곡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죄라는 단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죄란 대체 무엇일까요? 죄는 과녁을 빗나가는 것입니다. 꽤 멋진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과녁을 빗나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의당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녁을 조준합니다. 목표가 있다는 말입니다. 화살을 당기지만 빗나가고 맙니다. 과녁을 빗나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그러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일관된 의미 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은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갔다 뒤로갔다 합니다. 똑바로 나아가는 성향이 없습니다.

이러한 논지는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세 가지 죄에 얽매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세가지 죄란 죄과(또는 반역), 죄악(또는 왜곡되고 일그러지고 어긋난 행동) , 그리고 죄(과녁을 빗나가는것, 목표에 미달되는것,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입니다. 죄의 확신과 죄의 고백에 따른 두번째 단계는 자신의 삶과 행동이 죄로 오염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의 삶과 행동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분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 누가 보더라도 그 고백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다윗은 "밧세바에게, 우리아에게, 전사한 병사들에게, 이스라엘과 내 백성들에게 내가 범죄하여"라고 토로합니다. "다윗의 고백은 백번 옳은 것입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지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가 단순히 행위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행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연루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주님께 대한 범죄임을 인식합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 remorse과 회개 repentance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느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죄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잠정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성에 반하는 죄를 짓고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흠 없는 존재로 지으셨으며, 그에 걸맞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는데, 인간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곧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신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분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고 왜곡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십계명 , 도덕법, 고결한 인간성이라는 보편개념 ,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죄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과, 죄악 혹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과 우리를 위해 세우신 그분의 계획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앞서 상기시켰듯이, 우리 안의 양심까지도 마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양심을 두셨습니다. 우리가 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는 양심이란 것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양심은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내면의 소리가 우리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칙을 파괴하며 그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다윗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얼마나 많은 자비를 베푸셨는지 모릅니다. 한낱 목동에 불과한 그를 세우셔서 위대한 왕국의 왕으로 삼으셨으며 분에 넘치도록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내가 정말 몹쓸 짓을 했구나" 라고 탄식하며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라고 통회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나기처럼 복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가정을 주시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과 쉴 곳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축복을 거두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반기를 들다니 ! 우리는 그분께 죄를 짓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선과 자비와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어떤 변명이나 구실도 내세울수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바꾸어 말해,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입이 열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어떤 핑계도 대지 않겠습니다.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순전히 제 고집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제 탓입니다. 제가 무슨 낯으로 죄를 덜어 달라고 아뢸 수 있겠습니까?" 다윗의 고백이야말로 회개와 죄의 자각에 있어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부분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온갖 행동을 정당화 할수 있습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할수 있습니까? 선지자 나단의 경우를 예로 듣겠습니다. 가령, 제가 이 자리에서 어떤 사람에 관한 예화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이러저러하다고 지적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은 기꺼이 그러한 지적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인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로 시선을 돌려 이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면 여러분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합리화하려 들거나 자신만이 옳다고 바득바득 우긴다면 여러분은 회개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다윗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이 열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았습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일이 혐오스럽게 느껴집니다. 제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 잘못을 깨닫고 시인합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망하실 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옥으로 떨어뜨린다면 온당치 않은 처사라는 생각이 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했는지의 여부는 이렇게 확인할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 상태와 삶을 점검하고 나서 이렇게 토로한다고 합시다." 나는 지옥에 떨어져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죄를 깨닫는 사람은 이 단계에 이릅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자신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한 것임을 깨닫고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지금까지 몇 단계를 거쳤는지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첫 번째 단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사실을 직시하며 자신을 살피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인식하고 그러한 행동이 세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임을 시인하는 단계입니다. 그런 후에 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맞아 내가 지은 죄는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거야.  마지막 세번째 단계에 이르면 그는" 내가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다" 고 시인합니다. 그러고 나서 죄인은 이렇게 자문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죄를 지었을까?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지? 내 안의 그 무엇이 이런 죄들을 짓게 만들었나? 시기 질투 미움 악의 탐욕 욕망 육욕 정욕인가? 마침내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 내 본성은 부패했고, 내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찬 것이 틀림없어! 부패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구나!" 바꾸어 말해 , 이같은 죄의 확신에 따른 최종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이 지은 여러 죄된 행동 sins에 대한 자각에서 죄sin에 대한 자각과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각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이같은 최종 단계를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18, 24절)

다시 말해, 그는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부패했구나. 나는 악한 사람이고 , 내 속은 시커멓구나, 내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 자체가 문제로구나. 내 속에서 악한 일 하기를 갈망하고 있구나. 왜 그럴까? 악의 달콤한 유혹에 내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로구나.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내게는 악을 행하는 능력이 있고 악을 즐기는 마음이 있구나,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내 마음이구나."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고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브루터스여 , 하늘의 탓이 아니라 우리 탓이구나.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된 것은

                    
" 내가 죄악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 속에는 악으로 기우는 성향, 곧 일그러짐과 왜곡이 나타납니다. 그것들은 마음속에 있는 , 우리 존재와 본성의 일부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죄를 자각하고 그것을 고백하기까지의 여러 단계를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제 말씀의 진의를 파악했다면 다윗처럼 탄식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 ,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성도 여러분,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이며,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이 든다면 하나님께로 달려가십시오, 그분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의 죄를 씻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갈보리 언덕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에수님은 우리 죄값을 치르셨고, 우리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분께로 속히 가십시오. 그럴 필요를 느끼셨다면 여러분은 실천할 것입니다.

 

다윗이그랬듯이,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은 이러한 탄식이 즉시 터져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여러분도 이러한 탄원기도를 드리면 놀라운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라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회개 복있는사람

2. 죄인의 무력함

하나님이여 ,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시편 51장 1-2절 )



특징에 관하여 ..


자신의 상태와 처지를 살핀 후 절망에 빠져 그에 따른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적은 한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라는 다윗의 고백을 보면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벼랑끝에 서있었습니다. 자신의 상태와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일생일대 가장 심각한 문제에 부닥친 것입니다. 다윗은 매우 부유한 왕이었고.

그의 왕국 또한 넘치는 재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상을 목도하자 다윗은 그 많은 재산. 권력. 지위가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문제는 소홀히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간파한 다윗은 죄책감에서 벗어나 평안을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 " 고 결심합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그 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씨름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은 한번이라도 여러분 자신과 영혼의 상태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교회의 등록 신자가 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은 누구도 피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저는 그런 걱정을 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 예배에도 참석했으며, 착한 일을 하기도 했고 ,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걱정을 제가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요? 글쎄요 ,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것 자체가 가장 큰 죄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인들의 삶을 다시 살펴보시기바랍니다. 믿음이 깊은 이 사람들, 제가 앞서 언급했던 경건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성인이라고 일컬음받은 사람치고 자신을 사악한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사람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악한 죄인이라는 자각이 없다면 여러분은 성인 근처에도 못가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든 영혼과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그 다음 특징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라는 자각과 의식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이 사실을 엿볼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다윗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양심을 진정시킬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양심은 그를 고발하고 있으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양심은 가만히 있지를 않고 죄를 폭로합니다. 양심이 깨어나면 이를 감당할 수 없는데, 조만간 모든 사람들의 양심은 깨어나면 이를 감당할수 없는데, 조만간 모든 사람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필연적으로 임종을 맞이하는데, 그 자리에서 양심이 깨어날수도 있고 사후에 깨어날 수도 있습니다.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갔을때 거기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거지를 보는 순간 자신의 양심이 깨어났다는 이야기(눅 16:19-31) 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양심은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양심을 잠재우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부자인데다가 소와 양도 많이 있는 다윗은 양심을 잠재울수만 있다면 뭐든 포기할 심산인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나온 삶을 회고하면서 어떤 과오들이 발견되면, 그 과오들을 제거하고 그 흔적들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다윗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 역시 평안을 누리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잠이 제대로 오지를 않습니다. 양심은 언제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에 그것에서 벗어날길이 없습니다. 제 말은 여러분이 반드시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평안과 안식과 고요를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전혀 손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가련한 다윗, 저는 그의 심정을 너무 잘 압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 다윗은 부자였기에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이라면 조금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게는 양과 소가 많아 큰 제물을 바칠수 있지. 하지만 온 언덕에서 노니는 가축들 이 모든 주님의 것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것이 다 주님의것 나는 주님께 바칠 것이 없네 제물을 바쳐서 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지만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말뜻을 알아들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양심이 깨어나면 정신이 퍼뜩 들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잡고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버릴것은 버리고 새출발을 시작하자.



이런 다짐이 계속 되지만 여러분은 아직도 평안과 안식과 고요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돼 마침내 자신의 다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자신이 완전히. 전적으로 , 그리고 절대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 아직도 여러분에게 일말의 자신감이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만족 시켜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러분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두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것으로 첫째와 둘째가는 위대한 계명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계명의 준수 여부에 따라 여러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자기의를 더 이상 신뢰하지 마십시오.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이 같은 도덕과 선을 행하려는 노력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손을 쓸수 없음을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깨달으십시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가 이를 여실히 증명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다윗의 변화야 말로 우리가 회개했는지의 여부와 우리가 현 위치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시금석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시편에서 이 사실을 눈여겨보았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만을 애타게 찾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다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 회개한 적이 없고 양심의 가책만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될때 그분을 멀리합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듭니다. 아담과 화와는 그 시점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간섭을 받지않으며 죄의 확신과 자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려 하며 그분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살피지도 ,성경을 읽지도,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잊을 수만 있다면 뭐든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에 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그분만을 애타게 찾으며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죄를 지은 대상을 간절히 찾는 것이야말로 회개의 특이한 역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회개하지 않는자는 하나님을 피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실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요구할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분에게 기대어 뭔가 아뢰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도움이라고 믿으며, 번제나 희생제사도 소용이 없고, 세상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하면 죄의 흔적을 없앨 수 있을까? 하나님만이,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 가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회개하는 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없앨수 있는 능력이 있으실 뿐 아니라 언제든 그렇게 하실 의향도 있으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 달리 무슨 간구를 할수 있을까요? 주의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 얼마나 놀라운 간구입니까!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자의 역설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하나님께서 인자하시며 크신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그분의 자비에 몸을 맡기며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세리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셨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기에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다윗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답은 당연히 그가 몸소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죄를 범한 다윗에게 복을 내려 주셨고, 은혜를 베푸셨으며, 또한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나는 거리낌없이 그분께 나아갈수 있다. 예전의 나는 거짓말을 일삼았고, 사람을 죽였으며,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렸다 나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지만 거룩하기 이를데 없는 하나님께서는 내 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은 분이시다. 이제 내가 거리낌없이 그분께 나아가면 그분은 나를 모른 채 하지 않으실것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것은 여러분과 저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독생자에게 전가하셨으며 독생자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멸하셨고 우리에게 거저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분께 담대히 나아가라.
세상 그 누구도 신뢰하지 말고 오로지 그분께 나아가라.

우리의 죄로 인해 큰 상처를 입으셨던 그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사실,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또 다시 전율케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해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또한 죄를 판단하는 척도이기도 합니다.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죄의 문제를 다루셔야 했습니다. 죄는 그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행으로는 죄값을 치르기에 역부족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그 유일한 해답이 있습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죄값을 치르기에는 충분치 않았다네.
그분만이 천국문을 여셔서 우리를 들어오라 하시네.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분이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의롭다 , 여긴 나 , 한마디 간구도 하지 않았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위해 피 흘리셨네,
주님 나를 오라 하셨네.
하나님의 어린양, 내가 이제 갑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현재상황이 어떤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죄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바야흐로 그래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피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고, 영원한 구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십자가 이야기
글쓴이 : 메탄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