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하나님나라/김세윤박사

하나님아들 2013. 2. 16. 12:02

하나님 나라(1)

 

마 1장14-15

-천국복음 선포 -

 

김세윤 박사(미국 풀러신학대 교수,바울신학의 권위자)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 1:14-15)                       

 


   마가는 이 한 마디로 주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여러분과 함께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가르침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하나의 문제로 부터 시작하면 지금 마가는 예수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이렇게 말하죠.   그런데 우리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요한복음에만 가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가면 그 초대교회의 설교들을 요약한 것이 참 많은데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거의 안 나와요.   바울서신서들을 위시한 신약의 나머지 책들에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런데 사도행전에 요약된 설교들을 본다든가 서신서들을 통해서 사도들이 하는 설교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그래요. 

   대표적으로 전에도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고전 15:3절 기억나십니까? 거기 좀 자세히 공부한 바 있는데 고전 15장 1절 부터 읽어 보시죠.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쓴 것을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복음은 사도인 내가 바울이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 부터 받아서 너희들에게 제일로 먼저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달했다.  

 그 내용은 4개의 절로 되어 있다고 그랬죠.  

지난 번에 첫째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둘째 장사 그러니까 묻혔다는 것.   장사되었다는 것.   세째 성경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다시 살아 나사 뜻은 비슷할지 몰라도 번역이 좀 좋지 않아요.   사흘 만에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는 것 또는 부활되어졌다는 것.   네째 게바에게 보였다는 것 나타났다는 것.  

이 4문장들로 복음을 설명하는데 지난 번에 본 바와 같이 두 번째 문장 ‘장사되었다는 것’은 그 앞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요 네 번째 절 ‘게바에게 보였다는 것’은 또 바로 그 앞에 가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정확히 말하면 이 3절과 이 4절,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우리 죄를 위한 죽음과 부활,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고 ,이제는 이 11절에 봅시다.   11절에 그러므로 나나 저희들이나 ‘저희들’은 예루살렘 사도들‘ ,다른 사도들이나 다 함께 이와 같이 복음을 선포하매 너희들도 이와 같이 믿었느니라.   여기 지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게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이고 이것이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믿는 복음이고 이 복음을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지금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금방 의문이 하나 생겨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자! 어떻게 사도들이 주로 예수의 제자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해서 다 예수와 똑같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하여간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는가?

그런 문제가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이렇게 질문을 해 보아야겠어요.   이게 서로 다른 복음인가? 아마 다른 복음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언어를 달리하죠? 아 좀 다르니까 언어를 달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두 복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이것이 사도들의 복음이 어떻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서 나오게 되었는가? 기원하게 되었는가?

 

이런 것을 우리가 살펴 보아야죠.   이런 것은 순전히 역사적인 호기심이 아니고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어요.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몇 시간 공부할려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이 기독교 복음을 좀 정확히 깊이 깨닫고자 하는 것이어요.   이것을 정확히 깨달음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신안생활의 의미도 정확히 알 뿐아니라 우리의 그 믿은 바 신앙과 우리의 삶을 제대로 연결시킬 수가 있어요.   우리는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역사관, 인생관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 우리의 일 우리의 활동 우리의 직업과도 올바로 연결시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 그리고 올바른 윤리 올바른 태도 이런 것들을 확정하게 되어요.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 우리 신약성경에서 우리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하려고 해요.   단편적으로는 여러분들과 같이 제가 공부하면서 여러 번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듣다보면 아! 전에 조금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는 감을 느끼는 것도 가끔 있을거여요. 

 

  전에 제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한 동안 강의하던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부 중복되는 부분도 있을텐데 이번에 두 가지 단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전달했었던 것을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같이 생각함으로서 여러분들의 기독교 복음을 좀 깊이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해요.   그렇게 해서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삶의 일치 이런 것을 도모하고자 해요.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불행히 신학을 꽤 오래 한 사람도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없어 가지고 아주 혼동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복음이라는 말을 수 없이 쓰지만 복음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말을 잘 못한다든가 예수의 중심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인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 보세요 하면 잘 모릅니다.   잘 모른다든가 이런 현상이 참 많이 발생해요.   그래가지고 신앙과 사고 그리고 삶, 기독교적 삶의 일관성과 성숙을 도모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음을 보는데 조금 그런 문제에 있어 도음이 되고자 앞으로 몇 시간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 부터 출발하여 가지고 이 복음이 어떻게 거기서 발생하였으며 이 복음이 무슨 의미인가 그런 것을 생각해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가  신관 신론에 이 복음이 내포하는 신관만이 정말 우리에게 구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고 다른 종교들의 신관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의 관계들도 설명을 할 것이며 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도 연결시켜서 좀 설명을 할려고 그래요. 

  

우선 여기 마가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해요.  마가복음을 위시해서 마태 누가는 예수께서 그럼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쭉 기술을 해요.   그래서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을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 예수께서 과연 하나님 나라를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예수의 여러가지 행적 대표적으로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그리고 죄인들과 먹고 마신 이것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런 것을 우리가 공부하겠어요. 


  우선 이 배경,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 배경을 좀 생각해 보겠어요. 

 이 하나님 나라 또는 마가 누가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꺼려했지요.   그래서 하나님 이름 대신에, 대신- 이름, 대칭을 많이 발전시켰지요.   그래서 ‘전능하신 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이스라엘과 함께 임재하시는 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 ‘영원히 복 받으실 이’ 뭐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 많아요.   그 중에 하나가 하늘이지요.   하나님 이름 대신에 하늘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이 그 유대적인 성격 역시 유대인들을 위해서 그들을 주로 대상으로 쓰여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선포될 이 복음임을 우리로 하여금 금방 알게 해줘요.   그러나 하여간 같은 뜻이라는 것.

 

  그런데 구약성경과 우리 신약이전의 유대문서에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의 나라‘ 이런 문구가 잘 안 나와요.   거의 없어요.   구약성경에도 거의 없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중심사상이 ‘하나님이 왕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그러므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시리신다.  ’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런 말은 참 많이 나올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중심사상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려야 의가 있고 이 평화가 있음.   평화 샬롬! 화평 구원이 있다.   그런데 이 왕이란 말과 다스린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로 써요.   כלמ 은 어떻게 모음을 붙이냐에 따라 왕이라는 명사가 되기도 하고 다스린다는 동사가 되기도 해요.   그런데 이 말이 참 많이 나타나요.   그런데도 막상 하나님의 나라 또는 여호와의 나라, 하늘의 나라 이런 우리 복음서에 나오는 이런 고정된 문형은 안 나온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고정된 문형으로 쓰게 된 데는 상당히 새로운 시각적 시도를 했다.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을 계속 이어받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구약과 유대교의 어떤 배경을 내용적으로 이어받았나?

첫째로 창조사상,

둘째로 타락사상

세째로 언약사상

네째로 종말론 종말사상.  

 

이 구약과 유대교의 여기서 구약과 유대교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구약이후 신약이전에 그리고 신약시대의.   구약과 신약시대의 중간기를 중간사라고 그래요.   중간기라고 하고 그 기간에 유대문서들에 나타난 유대교의 이 신앙을 보통 우리가 유대교라고 그래요.   이들은 구약을 이어받았죠.   이것은 신약으로 이어져요.   그러니까 사도들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이 가르침이 구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어가면서 동시에 새로움을 새로움 해석을 또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인가.   이렇게 늘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이 점에 있어서도 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우선 내용적으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는 구약과 유대교에 이와 같이 근본 사상을 이어 가는 거여요. 


   그러니까 이 창조사상은 우리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 말도 하늘과 땅이란 말도 히브리 사람들은 우주전체를 말했어요.   우주란 말이 없었어요.   히브리어로 원래 세상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원래 나중에 올람 이라는 말은 원래 ‘세대’ 시간적인 개념으로 세대라는 말이었는데 나중에 장소적인 뉘앙스를 가진 ‘세상’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는 했으나 이것은 나중에 생긴 것이고 원래는 이 우주라는 말 헬라어 코스모스에 해당되는 우주전체를 통칭하는 히브리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우주를 하늘과 땅 이렇게 말했어요.   우주를 하늘과 땅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사상을 넣었느냐 하면 우주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늘과 땅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늘은 하나님께서 거처하는 곳이고 땅은 인간들이 거처하는 곳이어요.   여기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시고 마땅히 하늘과 땅의 왕이 되시죠.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니까 하늘과 땅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요.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이 주이시지요. 

 

  그런데 보통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요.   그래서 땅위에 자기 대리자를 하나 세웠어요.   그것이 인간이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을 대신해서 땅을 통치하는 대리자로 세운 것이어요.   그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다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굉장히 함축의미가 많은데 가장 기본적인 뜻이 하나님의 대리자라 그 말이어요.   하나님 대신 땅위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라 그 뜻이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이!

이 놀라운 선언, 창세기 1:26-28절의 놀라운 선언,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다는 놀라운 선언은 우리 창세기 내에서 부터 벌써 하나의 인권선언으로 받아들여져요.   그래서 가인과 그 후예들이 인간을 죽였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죄로 간주된다고요. 

  그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에서 그러니까 유대 기독교 문명에서는 살인이라는 것이 단순한 인간 끼리 저지르는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 저지르는 죄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형상으로 지었다는 선언이 이 유대 기독교 문명에 인권사상에 가장 근본이어요.   또 이 놀라운 선언은 물론 인간성의 높음 고양된 위치를 천명한 것 같으니까 옛 유대학자들로 부터 랍비들로 부터 우리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로 부터 해서 지금까지 엄청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어요.   인간의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냐? 그래서 온갖 이론들이 있죠.   한동안은 인간을 여러 분석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생각할 때는 인간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이해하는 힘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관계론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과 관계될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말과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말하는 능력과 관계있다.   뭐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인간내의 어떤 일부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의 모습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어요.   무엇까지 포함해서? 외모까지들도 포함해서요. 

 

  왜 그런 깨달음을 우리가 갖게 되는냐면 여러분 구약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술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대표적으로 이사야 6장 에스겔서 6장 같은 데에는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죠? 다니엘 7장도 마찬가지여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스스로를 계시하는 하나님과 이 사람과 이 외모 형상에서도 유사한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는 외모는 등한시하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엇만은 아니고 외모까지를 포함한 인간의 실존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가장 기본 뜻은 하나님의 대리자라 그 말이어요. 

 

  하나님께서 땅위를 통치하시는데 보통 하늘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땅에 자기의 형상을 세워가지고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어서 그 형상을 세워 가지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 말이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도록 세워진 자니까 그가 어떻게 해야 되어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나님의 대리자 노릇을 하지요.   그러는 한 아담은 땅위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자로서 땅위에서 제일로 높은 자죠.

 

  옛날에 영국의 총독을 부왕이라고 불렀지요.   빅토리아 여왕의 대행자라 대표라 해서 부왕이라고 그랬지요.   그가 총독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때나 자기에게 부왕노릇 하도록 권세를 위임한 빅토리아 여왕의 뜻을 충실히 받드는 한,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가 스스로 왕이라 하면 그 순간에 자기는 부왕의 위치를 잃지요.  

  바로 타락이 그런 것이어요.   아담이 땅위에 하나님의 부왕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아담이 어떻게 되었어요? 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졌지요.   사단은 우리를 속이는 자여요.   뭐라고 속였지요? 네가 하나님 밑에서 부왕 노릇하는 것 그런 것을 하지 말고 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이 과일을 먹으면 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에 의존하고 순종함이 없이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말을 아담이 들어서 그러니까 아담이 어떻게 되는 셈이어요?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는 사단의 말에 순종하는 셈이 되지요.   이렇게 해서 아담이 사단의 권세 아래 떨어져 버렸어요.   아담이 땅위에서 제일 높은 자였는데, 어떻게 해서 제일로 높은 자?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있는 한 제일로 높은 자였어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리어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사단의 말을 듣는 사단에 순종하는 사단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를 넘겨 버린 것이죠.   팔아버린 것이지요.   그것을 타락이라고 그럽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냐? 그 결과는 그러니까 아담이 더 이상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 하나님이 되고자 함, 그러니까 과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존해서 사는 자였는데 이젠 그 창조주 하나님, 무한한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필요 없음.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하나님임, 자기 자신이 하나님 노릇해 줌.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 노릇하는 상태에 떨어진 것이지요.   제가 여러 번 설명을 했습니다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내재의 자원속에 움추러든 셈이다 이 말이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제한된 자원 속에 움추러 든 셈이어요.   그것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공부하겠지만 주로 무엇으로 선포했어요? 비유들로 선포했지요.   그 중에 아름다운 비유 하나가 무엇인가요? 탕자의 비유.   이 아담의 타락을 그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요?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 분깃을 주세요.   그 분깃을 가지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멀리 간다.   그것으로 예수는 무엇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아담의 타락을 설명하는 것이어요. 

 

  아담의 타락이란 아담 후에 우리 모두 운명이 그때 결정이 된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의 현재 상태를 그렇게 설명하는 거여요.   아담의 타락, 우리의 제한된 분깃 재산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해요.   자기의 자원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자기에게 스스로 하나님 노릇,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 노릇 그래서 그 아들이 아버지로 부터 분깃을 받아 가지고 자기 것을 받아 가지고 멀리--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조그마한 자원을, 금방 무엇을 느껴요? 우리가 결핍성을 느낀다고 그랬지요.   이 부분을 내가 여러 번 설명을 했어요. 

 

  여러분들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하겠어서 다시 합니다만 ‘결핍성’, 우리의 지혜가 부족함,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름, 지혜가 부족함, 힘이 부족함, 무슨 문제가 발생해도 속수 무책, 우리가 시간적으로 제한된 존재여요.   그래서 우리 교회 연로하신 장로님들 권사님들 120세 까지 살기를 제가 간절히 바랍니다만 120년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까짓 것 지금 60세 사신 분들 깜빡할 사이에 60년 되어 버렸잖아요.   엊그제 저기 제기 차기 하고 뛰놀던 때가 엊그제인데 벌써 60세 되어 버렸어요.   앞으로 더 짧게 살면 120세일텐데 잠깐 사는데 그 잠깐 사는 동안에 늙고 병들고 쇠약해지고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장소적인 제약 우리에게 얼마나 압박하는 힘으로 우리에게 와요.   그런 결핍성, 우리의 결핍성 여기서 뭐가 옵니까? 모든 고난들이 오죠.   아까 제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함.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무엇을 표현했다구요?

아담이 타락함으로 6가지를 잃어 버렸다.   6가지 잃어버린 것 뭐라고 그랬죠?

처음에 얼굴의 광채를 잃어버렸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반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그의 얼굴의 광채가 전부 다 빛났는데 아담이 범죄한 후에 그냥 시커먼 추남이 되어 버렸다 이거예요.   그 다음 두 번째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뭐라고요? 아담이 키가 줄어들었다는 거예요.   랍비들의 신학에 의하면 아담의 키가 원래 장대한 자였는데 범죄하고 타락한 뒤에 키가 165센치로 줄어  버렸어요.   무슨 말이라고 그랬죠? 무능한 자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어요.   그 다음 세번째는 하늘의 광채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캄캄한 암흑과 혼돈 속에 살게 되었다.   네째 다섯째 땅의 열매와 나무의 열매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무의 열매 가령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포도 한 송이가 장정이 여나므명이 들어도 못 들정도로 컸는데 범죄한 후에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포도가 이주 작아졌어요.   아담이 농사를 하고 땅을 파고 땀을 흘리고 열심히 죽어라고 일해도 항상 기아선상에서 허덕이죠.  먹고 살뚱 말뚱 삶과 죽음의 선에서 허덕이는 존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영생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죠.

 

  그렇게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그게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말이죠.   아담이 아까 예수의 멋진 비유, 탕자 비유, 자기 분깃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으로 부터 삶과 자기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는 조그마한 분 깃 재산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재산으로 어떻게 해보면 자기 삶과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과대 망상증에 빠진 것이지요.   자기의 인간성 자기의 피조물성 이런 것들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망각하고 부인하고 자기 자신 자기를 믿음 만용 자만에 빠짐 내 속에  있는 재산으로 충분히 내 삶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   탕자같이 내가 가진 내 속에 내게 속한 상속 50억 이것으로 내가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독립하는 거죠.   그래서 이 타락이 어떻게 일어났다고 그래요?.   신학에서는 자만 교만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바울은 이를 뭐라 합니까?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3번이나 되풀이 해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당연히 알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지탱하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은혜로 옵니다 하고 인정하는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이죠.   그런데 인간이 어쨌다고요?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자기에게 속한 것이 당연히 자기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항함으로,결국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뭐라고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둔다고 인간을 그렇게 살려는 태도에 방치해 버렸다.   예수의 탕자의 비유에 다시 전환해서 말하면 이 탕자가 내 분깃을 주세요.   나 멀리 가서 내 멋대로 아주 잘 살겠습니다.  할 때 아버지가 할 수 없이 놔 두었다.   요새 우리 아이들 쓰는 말로는 아! 그래 잘해 봐라 하고 그냥 보냈다 그 말이어요.  그래서 인간들의 결핍성 속에 제한성이 빠졌는데 그 제한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온다.

 

  이 고난들은 제가 여러 번 말씀했죠?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그랬죠.   우리가 우리의 삶의 근원인 창조주로 부터 분리되었으니까 그림으로 말합시다.   생명줄이 끊어져 버렸으니 죽음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으로 죽음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 죽음이 이렇게 고난들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표현된다.   이것을 환절기라 감기 많이 걸리죠? 감기 걸리면 증상들이 나타나죠? 감기 걸리면 콧물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삭신이 쑤시고 감기 걸렸다고 그러죠? 우리 모든 고난들이 이것이 고난이 어떤 종류이든 육신의 질병이든 경제적 빈곤이든 부부간의 갈등이든 사회적 정치적 압박이든 심리적 어려움이든 외로움이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고난, 이것이 모두 이 죽음의 구체적인 증상들이어요.   이제 우리가 죽음병에 걸린 거여요.   그 죽음병이 뭐 어떻게 증상을 나타내요? 외롭고 이렇게 가을에 외롭고 허무하고 인생무상을 느끼고 앞의 소망 없이 그러다가 몸까지 아파 사업은 잘 안 돼.   이 아들놈이 대학입시에 합격할지 못할지 통 이런 게 다 뭐여요? 죽음의 증상들이어요.   이런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 말이어요.   이것도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사단이 어쩐다고 그랬어요? 우리의 육신을 신봉한다고 그랬지요.   육신을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으로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존재로서 인간을 육신이라고 그랬지요.   사단이 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네 뜻대로 살아라.   네가 행복하고 안전하다.   자꾸 충동질 해요.   네가 네 하나님이다.   자꾸 충동하는 거요.   그래서 육신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서 무엇을 해요? 죄를 짓죠.   죄를 지으면 사단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품삯을 준다고 했죠? 죽음으로. 


 이것이 로마서 6:23절 ‘죄의 품삯은 사망이라.  죽음이라’ 사단이 우리 육신을 자꾸 충동해서 자기 말을 듣게 만들어요.  사단이 아담을 총동해서 네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다.  그래서 아담이 사단의 말을 들었을때 어떻게 되죠? 어느 상태에 빠진 거죠? 죽음의 상태에 떨어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죽음의 상태에 떨어졌다.   창조주로 부터 분리되어 죽음의 상태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진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찬탈자 거짓왕 속임수로 우리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버린 사단의 통치 아래로 떨어져 버린 거죠.   사단의 나라에 떨어져 버린 거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는 거죠.   그 구원하는 일을 언약의 역사라 그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해서 그 후손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 삼아가지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언약이죠.  언약이란 말이 애매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죠. 아담과 그 후손들은 전부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의 자원으로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면서 내가 내 스스로 문제 해결해 가면서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면서 살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죽음이다.  그러면 우리가 역설적으로 사단의 나라에 떨어진 것이고 이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뒤집어야 되는데 그 방법이 이스라엘을 택해 가지고 아담같이 사는 게 아니고 사단의 통치 아래서 그 속임수에 빠져 가지고 네 스스로 하나님 노릇해 준다.  그렇게 살지 말고 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대해서 살라.  내가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  하나님 노릇해준다는 말은 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무한한 자가 이스라엘을 복주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렇게 하나님 노릇해 주는 것이죠.  그것을 하겠다고 약속함이어요.  그 약속은 언약은 무엇을 위해서? 창 12장부터 계속 나오지만 무엇을 위해서?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 인류를 사단이 통치에서 회복해서 신학적인 언어로 말하면 구속해서 구출하고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다시 한번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 살 수 있도록 죽음에서 건져 주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거죠.  그것이 언약이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왕권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두 개의 동심원으로 그릴 수 있는 거죠.  이 세상 땅 세상 땅 전체가 하나님이 지으셨으니까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죠.  야훼의 창조주가 온 세상을 통치하죠.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하죠.  이 세상이 스스로를 사단에게 팔아버림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는 사단의 통치여요.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죠.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니까 하나님이 합법적인 통치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법적으로 세상의 통치자요 그러나 세상이 세상이라 함은 인간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상이요 아담에 의해 주도되는 세상이 스스로를 사단에게 팔아넘겨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 안 받고 사단의 통치 받겠다고 함으로 실제적으로는 사단의 통치임.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음.  요한복음 3:16절 복음 기쁜 소식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가령 예수의 탕자의 비유를 다시 말합시다.  아담은 인류는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주심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살겠다고 자기 분깃을 도둑질하다시피 해 가지고 멀리 가 버렸으나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포가하지 않았어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래서 계속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구원의 역사를 해요.  그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려하심.  이스라엘의 그런데 이스라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통치 그런데 문제는 이 이스라엘도 자꾸 사단의 사주를 받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거역하고 그래서 세상도 하나님과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 되듯이 이스라엘도 그래요.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사단의 각축장이어요.  다만 세상과 이스라엘이 다른 것은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단에 빠져 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과 관계가 더 돈독하다고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여요.  한 마디로 자꾸 하나님 대신 사단을 쫓는 그래서 아담의 죄를 자꾸 되풀이 하는 그런 역사죠.  그러나 하여간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치하며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려고 한다. 

 

  이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들이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들이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시다.  하나님이 아비가 되시고 이스라엘이 그 아들이다.  출 4:22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또는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 돌보는 양떼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은 신부다.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 또는 농부이시고 이스라엘은 포도원이라.  하나님 포도원 주인 또는 농부가 잘 가꾸는 포도원이라.  하나님이 전쟁의 사령관이고 이스라엘이 그 징집된 병사들이다.  그 사단의 주권에 대한 성전을 하는 병사들이다.  이런 관계론적인 그림들이 전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시다.  하나님이 아비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이시다.  아들이다고 할 때는 가장 기본의미가 뭐라고 그랬어요.  상속자라고 한다고 그랬어요.  아들이라는 그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상속자라고 했죠.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주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주심에 의존해서 살 수 있는 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무한한 창조주의 그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도록 되어 있는 자라.  그 말은 좀 목자 양의 그림 여기 지금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그때에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있어요.  구원이 있어요.  하나님의 왕 노릇 해주심에 의존할 때  자! 히브리 말로 구원을 뭐라고 그러죠.  구원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말이 מ?שׁ ! 우리 삶 전체를 온전케 함 그러니까 평화라고 할 때는 헬라어로도 그렇고 우리 말로도 그렇고 전쟁이 없는 상태 이런 소극적인 개념으로가 아니고 우리 삶 전체가 온전해 짐 그러니까 죽음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죽음의 증상들이 전혀 없는 어느 면에서나 고난이 전혀 없는 상태 그게 샬롬이어요.  샬롬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그러니까 시편에 보면 야훼가 높이 등극하여서 세상을 다시리는 곳에 뭐가 있다고요? 의가 있고 샬롬이 있어요.  그런데도 불행히도 사단이 다스려서 불의가 있고 죽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단은 죄와 죽음으로 통치해요.  우리로 죄짓게 하고 죄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해요. 

 

  하나님은 의와 생명으로 다스린다.  이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이 사상이 구약의 언약사상에 가장 중요한 표현 방법 중의 하나로서 구약의 중심사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 야훼의 나라라는 말은 드물게 나와요.  이런 말은 드물게 나와요.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의 이 사상들은 내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장 잘 쓰이지 않는 고정된 개념으로 함축시켜 가지고 표현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전승사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한층 더 높게 표현했다 그것이죠.  자 이 종말론 금방 끝납니다.  여러분들 종말론 마지막으로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떤 역사라고요? 한마디로 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왕 노릇하시기 위해서 왕 노릇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또 대리자로 세웠어요.  그게 다윗왕조에요.  다윗자손의 왕 그래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게 했는데 그게 나단의 신탁이라고 제가 소개했죠. 

  삼하 7:12-14절 나단의 신탁에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면서 다윗과 그 후손을 자기 아들로 세운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를 대행하게 한다.  그렇게 했죠.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을 종점으로 해서 다윗왕조가 기울죠.  어떻게 기울어요.  열왕기 역대기는 계속 무엇이 나오죠?.  다윗의 후손들이 계속 하나님의 아들 노릇하는데 실패한단 말이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바알을 숭배하고 무슨 몰록을 숭배하고 그런 짓을 해가지고 하나님의 대행자 노릇에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실현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샬롬이 안 일어나지 그 대신 뭐가 일어나요.  고난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 고난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다윗왕조 세우는 약속 이것을 뭐라고 했죠.  나단의 신탁이라고 했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나단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것이 점점 종말론적으로 해석이 되어요.  종말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이 패역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심판하고 사단의 권세를 꺽고 그의 의의 통치를 확립하고 그래서 온 세상이 샬롬이 일어난다는 종말에 대한 소망이 발달하고 그 소망이 일부 어떻게 변동이 됐냐면 나단의 신탁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자기 아들 진짜 다윗 같은 메시야를 보내서 그의 의의 통치를 정말 대행하게 했어요. 

 

  이스라엘의 유대 왕 다윗의 그 자손들은 다 실패했는데 종말에는 진짜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떤 사람이어요.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썩 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윗보다 하나님 마음에 썩들 다윗의 아들을 세워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일어나게 하고 그래서 샬롬이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어요.  구약에서 부터 나오는 메시야 사상이어요.  그래서 구약의 유대교의 종말론이 크게 말하면 두 종류여요.  정말로 복잡했어요.  아주 단순화해서 크게 말하면 두 종류 종말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과 이스라엘 내에 있는 사단의 통치를 꺽고 이 세상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사단에 대한 순종을 심판하고 의의 통치를 이루어서 온 세상이 샬롬을 이룬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의 메시야를 보내서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를 보내서 그를 통해서 사단의 통치 사단의 나라를 꺽고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종말론이다. 

 

  그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어요.  유대교에 그래서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이 드렸던 기도 기도문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 이 카도쉬라는 기도가 있었어요.  이 기도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야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당대에 빨리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빨리 사단의 통치를 종결지우고 여호와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이런  context에서 여호와 그의 통치 그의 나라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쓰이기 시작했어요.  이런 종말론적인 소망과 관계해서 아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구약에는 안 나오고 유대교에도 드물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쿰란 문서 일부에 종말에 대한 소망과 관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바라는 그의 통치 그의 나라 통치라는 말과 나라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תכלמ 라는 말이어요.  이 말이 몇 문서들에서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기도가 얼마나 간절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의 당대에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 말이죠.  그의 통치를 세우신다.  그래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빨리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의의 통치를 세우시길, 이런 간절한 소망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께서 여기 뭐라고 했어요. 


  막 1:14-15 때가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로 작정한 예정한 그의 때가 찼다.  그의 때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 

이게 뭐여요.  기쁜소식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사단의 통치와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허덕이면서 하루 빨리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옵소서 죄와 죽음의 사단의 통치를 몰아내고 의와 샬롬이 통치 생명의 통치를 세우시길 간절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카도쉬 기도에서 하는 바와 같이 기도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지금 뭐라고 선포하는 거여요.  너희들이 바라고 바라던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가 당도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아주 기쁜소식 아닙니까? 이게 복음이란 말이어요.  복음 !

 

  자 이 다음 시간에 부터 이 내용을 예수께서 어떻게 설명을 했는가.  이 복음내용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모저모를 조금 시간을 두고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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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2)

 

막1장14-15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김세윤 박사

 

마태복음8장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번에 이어서 우리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몇 번에 걸쳐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하는데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번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배경을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4가지 존재들을 살펴 보았어요.  간단히 요약하면 창조사상 그리고 타락사상 언약사상 종말사상.  구약과 유대교에 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 사상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 지난 번에 살핀 배경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으로 세상의 왕이었다.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여야 이 세상이 생명을 누리며 의롭고 평화롭고 축복가운데 산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힘으로 스스로 자기가 인간 자신의 왕이 되어서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 가지고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단의 통치속에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결핍이 생기고 악의가 생기고 고난들이 생기고 그런 것을 죽음이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데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줄 것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심으로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 그 언약사상 그런데 거기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제 오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권자인 메시야를 보내서 이 땅에 그의 통치를 세우심으로 이 땅에 평회와 샬롬을 이루신다.  그런 것이 4개의 존재들이 말한 바인데 4개의 존재들이 다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4개의 존재들이 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나 실제로 이 구약과 유대교에 하나님 나라라는 구절 숙어는 참 드물어요. 

 

  예수께서 쓰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자체는 참 드물게 나왔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것도 유대교의 중심사상인데 그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사상은 예수께서 상당히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새로운 언어였어요.  듣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죠.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사상이었어요.  4가지 사상으로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는 구약과 유대교에 근거해서 구약과 유대교와 계속성도 있고 예수께서 전혀 새롭게 구약과 유대교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새롭게 표현하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그 새로움도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의 메세지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의 메세지를 쉽게 이해하면서도 아! 새로운 가르침이다.   우리들의 랍비들이 가르침과는 좀 새롭다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늘 새로움. 


  더구나 예수께서는 랍비들과 같은 형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아주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어요.  전에도 제가 한 번 말씀을 드렸는데 전에 기억납니까?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 예수의 모든 가르침에는 엄청난 이 권위의식이 숨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예수의 권위주장이라고 그래요.  신학자들은 가령 αμην 이란 말 사용에서 우리가 그런 것을 제일 먼저 느낀다고 그랬죠.  우리는 아멘을 어떻게 씁니까? 아멘이라는 말은 확실하다.  진실하다.  그런 말이어요.  진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멘을 응답용으로 쓰지요.  하나님 말씀 끝에 아멘 이렇게 응답하지요.  그런 말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게 진리이다.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멘이어요.  또 기도 끝에 또 아멘 그렇죠.  내가 하나님께 하는 찬양과 청원이 확실히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진정으로 나의 청원이다 하는 뜻으로 아멘하죠.  그리고 대표기도 끝에 아멘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사람의 기도를 함께 하나님께 드렸다 하기 위해서 아멘 하죠.  이렇게 응답용어로서 유대인들도 꼭 그렇게 아멘 했어요.  응답용어로만 그런데 예수는 응답용어로도 썼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복음서에 보면 아주 독특하게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하고는 예언의 말씀을 선포해요.  그래서 이 아멘이란 말을 비 응답 용어로 문장의 제일 첫 머리에 쓰는 것이어요. 

 

  그런데 유대문서를 아무리 뒤져 봐도 아멘이라는 말을 그렇게 쓴 사람이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여 진 성경인데 우리 신약성경에도 이 아멘이란 말은 헬라어로 번역을 않고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만 해가지고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남겨 놓았어요.  왜? 예수의 독특한 어법이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말 성경 번역에도 그 정신을 살려서 그대로 놔 두어야지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에는 이것을 전부 진실로 라고 하여 번역을 해 놨어요.  그 뜻을 번역해 놨어요.   진실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요? 여러분들 성경 읽다 보면 공관복음에 뭐라고 무슨 말이 가끔 나와요?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진실로는 사실 전부 아멘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에는 성경 일독 하시고 이독하시게 되면 그 차이를 알게 되지요.  요한복음에는 어떻게 되어 있어요? 아멘이 두 번 되풀이 되지요.  요한복음을 우리 개역번역으로 읽는다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니까 요한복음에는 원래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어요?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렇게 되어 있는 거여요.  하여간 중요한 것은 아멘을 비응답용어로 쓰는 것은 오로지 예수만 이렇게 쓴단 밀이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속에 예수의 엄청난 권위주장이 담겨 있는 거여요. 

  이 예수당시에 랍비들은 가르칠 때에 자기 선생님들의 이름을 대대로 부른다고 그랬지요.  랍비ㅇㅇㅇ는 랍비ㅇㅇㅇ의 이름으로 랍비 ㅇㅇㅇ의 가르침을 가르치되 이런 식으로 .  그러니까 제가 랍비 김세윤이 자기 선생 랍비의 가르침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해 주는데 이 사람 선생은 ㅇㅇㅇ 이 사람선생은 옥한흠.  이런 식으로 3대 4대 선생 이름을 댔어요.  왜 그렇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 그 가르침이 율법을 준 모세에게서 온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모세시대에서 부터 대대로 신실한 선생들에 의해서 이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된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 가르침을 이런 서문을 달아 가지고 가르칠 때는 여러분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려 가지고 제 선생 대대로 해서 궁극적으로 모세에게 호소함으로 제 가르침의 권위 그의 진리를 대대로 확보하려는 것이죠.  이것이 제가 사사로이 생각해 낸 진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세에서 부터 오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이 대래로 물려받은 위대한 가르침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이런 것 아닙니까?

  또 구약의 여러분들 선지서를 읽어보면 선지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까 이사야서를 읽을 때도 뭐라고 그랬지요? 여호와의 말씀이다.  랍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에게 임했다.  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내게 말했다 라고 서문을 달고 그 다음에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지요.  그래서 선지자들도 청중들로 하여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 인간적인 말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이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나를 이렇게 영감을 해서 내가 지금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선포한 말의 하나님 말씀된 권위 진리를 확보하려고 서문을 달았어요. 

 

  그런데 이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께서 전혀 무슨 랍비 누가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의 가르침을 기르치되 그런 것도 없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다.  그런 것도 없어요.  누가 말해요.  내가 말하죠.  아! 그러니까 아멘이란 말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말게 되는 거여요.  꼭 구조가 이렇게 되는 거여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나의 권위로 말하는 것이다.  그 내가 가르치는 말씀이 진리됨 아멘됨 아멘은 무슨 뜻이라고 그래요.  진실하다.  확실하다.  진리이다.  그런 뜻이라고 그랬지요.  내가 기르침 말의 아멘 됨을 내가 보장한다.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에서 엄청난 권위를 주장하는 거여요. 

 

  그 다음에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모세의 율법에 대한 것에서도 예수는 엉뚱한 표현을 주장했다고요.  살인하지 말라.  옛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라고 십계명을 인용하면서 옛 사람들에게 선포된 임시적이라는 것.  그러나 이제 자신을 통해서 선포되는 종말의 완성된 계시는 그냥 남의 목을 치는 살인이 아니고 남을 상대로 미워한다든가 형제를 무시해서 바보 멍텅구리라고 한다든가 이렇게 전부 살인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것은 모세의 법보다 더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는 예수의 자기주장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과 유대교의 종교는 모세에게 궁극적인 권위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이고 사상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가르침을 전제로 하되 그것을 더 풍부하게 새롭게 종말에 완성된 계시자로서 구약과 유대교가 더 새로운 더 풍부한 더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분이어요.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은 한편 구약과 유대교의 연속성도 있으면서 다른 한편 항상 새롭고 더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어구에도 그래요.  자 그러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하셨는가.  예를 좀 들면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 그것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예수는 뭐라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까? ‘당신의 나라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마땅히 왕으로 주로 군림하셔야 하나 이 땅에서는 그의 왕권을 찬탈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에 의해 그의 왕권이 무시되고 그의 뜻이 거스려 지듯이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더러 이 땅에 사단의 세력을 꺽고 그의(하나님) 통치를 세워서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빌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지요.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주로 역동적인 개념이다라고 알 수 있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하나님 나라가 주로 장소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통치하심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왜냐하면 당신의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하게 하소서.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죠.  마찬가지로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저 하늘이 아니고 하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의미로 땅에서와는 달리 땅에서는 사단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니까 그런 의미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장소적인 의미로 하늘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우선 여기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주로 역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통치.   이것이 곧 구원이어요.  구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사단은 우리에게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무엇으로 품삯을 준다고 그랬어요.  품삯은 죽음으로 그랬지요.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한 말이어요.  롬 6:23절 죄의 삯은 죽음이라.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주어요. 


  그것을 지난 번에 제가 여러 가지 그림들로 설명을 했지요.  그러니까 사단은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해요.  하나님은 의와 생명을 주어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덧입는다.  하나님은 어떤 분? 무한한 창조자 우리 생명의 원천 우리 생명을 지탱할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는 분 그 분이 우리에게 왕노릇해 주신다.  그러니까 이것이 구원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역동적이 된다. 

 

  둘쩨로는 여기서 무엇을 배워요.  그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와야 할 것이어요.  우리가 빨리 오도록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되어요.  그러니까 미래적인 것이 되죠.  미래적인 것.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을 선포하셨는데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문학전승과 연속된 것이어요.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다고 그랬던가요?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사상에서 그 세대 역사를 두 시대로 갈라 생각했다고 그랬지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대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서 이 세대를 심판하시고 사단의 세력을 꺽고 하나님의 통치 다스리심을 이루시는 오는 세대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구원의 시대라고 그랬지요.  오는 세대.

 

  그러니까 예수도 일차적으로 이 땅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이 구약과 유대교의 이 둘을 수용하셔서 하나님께서 빨리 사단의 통치를 꺽고 통치를 땅에 이루셔서 이 땅위에 의와 생명이 기득 차는 그런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기도하라.  그렇게 가르치고 그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곧 임한다고 여러 곳에서 가르쳤어요. 

 

  한 번 그 예를 보겠습니다.  막 9:1절 같은데 가령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미래에 임한다는 것 곧 임한다는 것 눅 21: 3절도 막 1:15절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이 구절은 이렇게도 해석이 되고 저렇게도 해석을 되어 엇갈리는데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하나님 나라가 거의 당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거의 모퉁이만 돌아오지 않았지 하나님 나라가 모퉁이에 돌아온 셈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가 가르쳤다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임할 것인데 미래에 임해도 곧 임할 것으로 그렇게 가르쳤어요.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인자’라는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여요.  그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을 인자가 오리라 그가 심판과 구원을 위해서 오는 것으로 그런데 그 옴이 하나님 나라여요.  함께 미래적인 것인데 임박한 일로 곧 온다고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것도 가면서 하나 해결해야할 문제여요.  재미있는 현상이어요. 


  이 우리가 복음서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와 인자라는 문구는 분명히 내용적으로는 연결이 되요.  그런데 이것이 같이 나오질 않아요.  거의 항상 분리되어서 나와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쓸 때에 인자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왜 내용적으로는 같은데 또는 연결되었는데 이렇게 분리되어서 나타나느냐? 그것도 우리가 해결해야 되어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요.  특히 인자 예수께서 자기를 인자로 불렀느냐 이것이 무슨 뜻이냐? 정확히 번역하면 문자적으로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란 말인데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왜 예수께서 자기를 그렇게 불렀는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을 해결해야 되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이것이 내용적으로는 일치하고 연결되었는데 같이 나오질 않은가? 그런 것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여요.  여기서 일단 내용적으로는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곧 온다.  이런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의 심판이 있고 구원이 있을 것을 여러 곳에서 말하지요.  막 12:32절에서도 그렇고 마 24:41,50절도 그렇고 여러 곳에서 말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관심을 가지고 묻기도 하고 즉시 임할 것을 생각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죠. 


  다음, 자,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임한다고 예수께서 가르쳤다.  그런데 그 미래라고 하는 것은 임박한 미래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둘째로 그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가르쳤나? 예수께서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양 모습을 가진다고 가르쳤나? 이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예수가 가르친 구절 생각납니까? 여러분들 이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예수께서 가르쳤나요? 주로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흔히 나오는 비유들이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주로 비유들로 가르쳤잖아요.  비유들은 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이 비유들을 자세히 보면 주로 잔치 베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그의 자녀들로 맞아들여 식탁을 배설하고 잔치를 베품 특히 잔치들 중에서도 흥겨운 혼인찬치를 비유로 많이 그렸죠.  또는 가끔 상속의 비유들도 가르쳤죠.  그럼 하나님 나라의 귀중함.  그것이 말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나라가 우리가 생각하고 계산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갑자기 임할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 도적의 비유로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가지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하나 다만 그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서 일체 그리지 않아요이것은 이 당시 유대교의 묵시문학이나 나중에 유대교 기독교 전승을 이어받은 이슬람 코란과 비교해 보면 예수의 가르침의 독특성이 금방 두드러져요. 

 

  당시의 유대 묵시문학이나 나중에 랍비들이 신비문학 더 나중에 이슬람 코란 같은데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굉장히 현란하게 그려저 있어요.  그 모습을 여러분들은 우리 요한 계시록에서도 일부 볼 수 있죠.  하늘의 궁전의 모습 금 은이 번쩍이고 무슨 촛불들이 번쩍이고 천사들이 굉장히 많이 거기 운집해 있고 그런 모습들.  그것이 묵시문학이나 신비문학이나 나중에 이슬람 코란에 있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런 기술이 예수께는 없어요. 

  다시 말하면 유대 묵시문학이나 신비문학에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것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귀중한 가치들로 생각하는 것들로 하늘에 전부 모여 있는 걸로 하나님 나라를 그려요.  그래서 굉장히 물질적인 인상을 줘요.  현란한 찬란한 그런 보석 금 은 보화가 번쩍이는 궁궐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하게 한다든가 그 곳에서의 삶이 만족하고 이런 굉장히 물질주의적인 인상을 주는 그림을 많이 그려요. 

  예수께서는 그런 그림을 엄격히 억제하고 그 하나님 나라가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주로 일반적으로 천명하는데 그쳐요.  그 구원을 물질적인 그림들로 그리는 일을 삼가해야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든 것 종말의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대에 땅의 소출이 어떻게 된다고 해야 맞다고요.  포도 한 송이가 장정 몇 명이 들어도 못 들 정도로 커진다고 이런 그림으로 그렸다고 그랬죠.  그리고 우리 얼굴들이 광채가 빛나게 현란하게 된다고 그런 그림들로 그려놓았다고 그랬었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잃었던 6가지를 다 회복한다고 봐가지고 그걸 그림으로 그린 거여요.  얼굴들이 태양보다 빛나고 우리의 육신이 장대해지고 장성해지고 먹을 것이 풍부해진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 땅의 열매 나무의 열매들이 엄청나게 많이 커지고 이런 그림들을 많이 그렸지요.  예수께서는 이런 그림들을 일체 삼가했다는 거여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아주 현란하게 그려주어야 기분이 좋잖아요.  우리가 그런대로 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서 재능 있는 부흥사들이 그렇게 많이 그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을 절제하셨다는 것.  그것은 왜 그러느냐면 나중에 보겠지만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워넝에 대한 굉장한 강조가 있어요.  예수의 가르침에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들이 확대된 모습으로 자꾸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그림으로 삼아서 자꾸 그리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굉장히 이 세상적인 가치로 물질적인 가치로 오해하기 쉬어요.  그것을 예수께서는 피 할려고 그래요.  그것은 예수께서 상당한 절제된 모습 속에서 주로 두 그림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그렸어요.  둘 다 그림이 똑같은 그 실제를 말하고자 하는 바여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잔치의 그림은 예수께서 아까 우리가 마8:11절도 하나님 나라에 어떤 답니까? 동과 서에서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의 식탁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 함께 앉는다.  잔치를 나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많이 비유하시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어떤 비유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푸는 주인으로 종들을 시켜 가지고 세상의 큰 길 골목길 다 가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다 불러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쨌다고요? 잘 안 올라고 이 핑계대고 저 핑계대고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어요.  유대인들을 두고 하는 소리여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면서 유대인들에게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는데 유대인들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쨌다고요.  원래 초대되지 않은 사람들 절름발이들 이런 사람 다 불러 오라고요.  무엇을 말하는 것이어요.  우선 일차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야 되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을 원래 초대했다는 자들이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행하지 않으므로 이방인들이 먼저 잔치에 들어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함.  이것을 다시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죠.  잔치의 비유는 이 잔치라는 것이 우선 여러분들이 잔치를 머리에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라요.  풍요로움.  음식의 풍요로움.  그러면 잔치의 경우에는 뭐가 있어요.  만족함이 배불리 먹고 만족함 만족함이 있으면 뭐가 있어요.  기쁨이 있죠.  잔치의 기쁨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잔치를 하면 꼭 노래 한 자리씩 하는 아주 재미있는 풍습이 있지 않습니까? 잔치에는 산해진미 이런 것이 여러분들 잔치를 하는 그림이 금방 머리에 떠오르기도 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이 말이어요. 

 

  그럼 지금 우리가 사단의 나라 사단의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의 우리의 실존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요.  지난 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결핍.  우리의 피조물적 제한성에 갇혀 가지고 우리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장소적으로 제약이 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제약이 되어 있고 이런 결핍성이 있어요.  여기서 뭐가 와요.  욕구불만이 오죠.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쌓일 수 있는 불만 그래서 뭐가 있어요.  슬픔과 아픔이 있지요.  인생의 슬픔과 아픔 왜? 슬픔과 아픔이 고난으로 가득차 있으니까 아무리 능력이 부족해서 지혜가 부족해서 그러죠. 

  영원에 참여하면 그런 변화의 노예가 되겠습니까? 쇠약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사회가 어떤 사회여요? 악의가 가득찬 사회이지.  서로 어떤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고 그래서 좀 더 많은 안전과 행복을 쟁취하려고 만인이 만인을 대항해서 싸우는 이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늑대 노릇하는 것이 인간사회지이요.  그래서 다윈의 법칙이 적용되는 약육강식하고 적자생존하는 엄청난 생존경쟁이 벌어진 것이죠.  이것이 지금 우리 인간사회가 사단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참여하는 무엇이냐? 그 무한에 들어감 .  그러기 때문에 무한에 참여함.  그 속에 만족과 기쁨과 사랑이 있다.  그것을 잔치에서 표현한 것이어요. 

 

  이것은 예수께서 처음이 아니고 구약에서 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보통 잔치에 표현했어요.  구약에서 부터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도 그렇지 않습니까? 끝이 어떻게 되어요.  내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베푼다고요? 잔치상을 베풀어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앞에 상을 베설하시고 어쩐디고요? 내 잔이 넘친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 품에 앉고 나를 그 쫓던 사단의 세력에서 부터 나를 보호하실 뿐아니라 그들 앞에서 내게 상을 베풀고 내 잔이 넘치게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그렇게 잔치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에서 부터 오는 아주 중요한 숙어 메타포여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인들이 종말에 있을 그 메시야 시대 종말에 있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의 통치를 꺽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이루실 것을 잔치로 많이 그렸어요.  그것을 예수께서 이어 받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해요. 

 

그러나 다만 가령 유대 묵시문학 같으면 그 잔치상이 어떻게 생겼고 그 잔치상은 어떠하고 뭐 많이 그렸을 것인데 예수는 일절 그런 것을 그리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우리가 참여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심.   그것은 뭘 말한다고 그럽니까?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  그러니까 피조물의 제한성 한계성 피조물성을 극복하고 어떤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피조물의 한계성에서 결핍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나옴.  이 고난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그랬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가 사단의 자리에서 우리의 피조물적 제한성 한계성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죽음인데 여기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럼 그런 생명은 어떤 생명이겠어요? 여러분들.  우리같이 결핍된 제한된 인간적인 자원들로 이루어지는 삶을 그런 삶을 삶이라고 그래요? 삶이라고 해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랬지요? 왜? 고난들 죽음의 증상들 죽음병 있는 삶.  이것을 우리는 인간적인 삶. 

그런데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  하나님의 초월을 통해서 무한한 지혜에 참여함으로 불안함이나 무한한 능력에 참여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를 일으켜서 괴로운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적인 삶 하나님적인 삶 하나님의 무한으로 이루어진 삶.   인간의 죄악 된 자원으로 이루어진 삶을 인간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진 삶이 하나님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성경에서는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는 오는 세대에서의 삶이라는 말이어요.  아까 유대인들은 이 역사를 두 세대로 나누어서 보았다고 그랬죠?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우리를 죄악 된 세계에 갇히게 만들어 가지고 죽게함.  다시 말하면 죄와 죽음으로의 통치에 반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오는 세대에서의 삶을 영생.  영생이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오는 세대의 삶이다.  그 말이어요.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해서 얻은 삶 이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이무런 결핍이 없는 삶.  아무런 고난이 없는 삶.  긍정적으로 말하면 온전한 삶 그러니까 신적인 삶을 가지는 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어요.  하나님과 같이 됨.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이어요.  인간이 피조물이 피조물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으로 하나님과 같이 됨.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됨의 궁극적인 구원이 품위 있는것 같이 보임.  아담이 취한 길.  스스로 하나님께 대항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함.  요새 말하면 인본주의의 길 인간 스스로의 지혜와 선행을 계속 계발해 나가면 인간이 자기자신의 문제들을 다 극복하고 전혀 결핍이 없고 고난이 없는 세상을 만듬.  그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유토피아 세상이라 그러죠.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상상을 하지요.  그것을 성경은 무엇이라 합니까? 교만이라 합니다.  그 길은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어쩐다고요? 비인간화.  인간을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인간의 모양에서 타락하게 만들어서 인간 이하로 떨어지게 됨.  그래서 사단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하고 죽음에 떨어지게 하는 것.  반면에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해서 우리에게 좋은 길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감.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하고 그 통치속으로 들어감.  그러니까 역설이죠.  이것이 첫 아담의 길은 하나님이 필요 없음.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이다고 자기 주장함.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하로 떨어뜨리고 죽음으로 떨어뜨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기는커녕 죽음에 떨어 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선포하는 길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해주심에 스스로 나아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함 하나님의 무한한 부한 잔치에 참여해서 신적성장을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됨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이란 하나님과 같이 된다.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두려워해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런데 우리 가령 예수의 이 가르침을 여러가지 표현을 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됨.  곧 상속이라는 뜻.  바울이나 사도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  하나님의 형상으로 옴.  하나님의 영광을 얻음.  이런 것들도 다 똑같은 말이어요.  전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됨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우리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느냐? 옛 아담의 길로 되는 게 아니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종국적으로 우리가 그에게 의존하는 피조물로 우리를 인정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참여해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것은 은혜죠.  그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 그것을 말하는 거여요

 

  자 그래서 예수께서 잔치로 구원을 잔치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설명하는 거여요.  상속이라는 의미도 마찬가지여요.  이것은 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께서 이 아까 아멘이라는 말을 예수께서 독특하게 쓰셨다고 그랬지요.  예수께서 득특하게 쓴 말 한마디는 하나는 아빠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마디가 뭐여요? 아빠.  하늘에 계신 이 아니고 우리 어순 때문에 그런다고 그랬지요. 


  원래 어순에는 아빠 하나님 아빠 이것은 유대인들이 감히 하나님께 쓰지 못하는 언어라고 그랬지요.  예수만 하나님 아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뭐가 되는 거여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지요.  예수께서 너희들이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할 때 2차적인 의미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결하고 견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2차적인 의미가 무엇이라 했어요.  하나님을 아빠 부르는 자들이 되라.  왜? 아빠는 어린아이 언어이거든요.  가정내에서의 어린아이언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들이 되라는 것.  예수께서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그랬지요.  주께서 가르쳐 주신 첫 마디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죠.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스스로의 상속자된 우리가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어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등 청원.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를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이거든요.  기도라는것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고자 하는 것이지요.  잔치와 똑같은 그림이죠.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상속받고자 함.  그래서 우리의 제한성 결핍성으로 부터 해방되어서 풍요로움을 얻고자 함.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상속의 그림으로 많이 그렸어요.  상속의 그림과 잔치의 그림이 합쳐져서 나오는 아주 가장 유명한 비유는 탕자의 비유여요. 

 

  여러분들 탕자의 비유 전반부는 무엇을 그려요? 아담적 인간의 모습.  하나님으로 부터 어느 정도 자원을 받은 인간이 마치 아버지로 부터 자기 분깃을 주장해 가지고 멀리 아버지로 부터 가 버리는 자 그래서 자기의 제한된 분깃으로 자원으로 자기가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누리고 자기 멋대로 스스로 주인 노릇 하면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자.   아담적 인간의 모습.  우리 죄인을 사단의 통치아래서 사단의 꼬임 속에 빠져서 있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뭐라고요? 죽음이라고요.  그에게 구원은 무엇이어요.  아빠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 감히 더 이상 상속을 바랄 수 없어요.  그래서 나를 아들로 취급하지 말고 종으로 취급해 달라.  예수의 비유여요.  하나님께서 그 탕자를 다시 아들로 회복시키시고 상속자로 회복시켜요.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상속자로 회복시켜요.  그리고 뭐합니까?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고 그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모습이어요. 

 

  그래서 이 잔치와 상속을 두 그림으로 합쳐서 아주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이 뭡니까? 탕자의 비유죠.  이 안경을 쓰면 책이 보이는데 여러분의 아름다운 얼굴이 안 보이고 이 안경을 쓰면 여러분의 빛나는 얼굴은 보이는데 태초의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의 그림이 보이는데 글씨가 안보이고 그래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데 이 상속의 그림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  이런 하나님 나라에 오라.  예수께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어요. 

 

자 오늘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이어요.  오늘은 미래 올 하나님 나라의 한 면을 봤어요.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나? 이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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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3)

 

 

눅11장14-22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

 

김세윤 박사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희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있던 재물을 나누느니라”


  지난 시간에는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실 것으로 곧 오실 것으로 선포하셨다.  그때 그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나타내는 역동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곧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우리에게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할 것을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주로 미래적으로 말씀하셨는데 미래에 오시되 곧 오실 것으로 가르쳐 주셨다 하는 것을 살펴보았고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면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 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예수는 그 당시의 유대묵시가들이든지 또는 나중의 랍비들이든지 그런 사람들처럼 현란한 물질적인 감각을 굉장히 자극하는 그런 언어들로 그리지 않고 단순히 그게 우리 인간의 삶 전체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는 일반적인 언명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우리가 그의 자녀들로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특히 그림으로 그린다면 상속이란 그림과 잔치라는 그림으로 그리되 더 자세히는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서 굉장히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하나 예수도 그런 쪽으로는 많이 권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어서 우리가 온전해짐 우리가 신적인 생명을 얻음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됨 그래서 인간의 제한성 결핍성에서 오는 모든 문제를 고난 이런 것들이 종식되는 상태이고 우리의 온전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는 주로 두 가지 그림으로 상속 잔치라는 그림으로 설명을 하되 그 상태를 현란한 물질주의적인 언어로 그리지는 않으셨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어요. 


   자 오늘은 세 번째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살펴보면 또 하나 특징이 드러나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여기 지금 임했다는 선포여요.  눅11:20절에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  예수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 실현이 되었다.  실현이 되고 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것이어요.  사실 우리가 공관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래서 한 편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해서 미래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가 곧 오실 것이다.   한 편 현재적으로 말하기도 해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여기서 지금 구원의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현재적으로도 말해요.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이렇게 미래적으로도 하신 말씀이 있고 현재적으로 말하는 말씀들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자세히 보면 현재적인 면에 비중이 더 가 있어요. 

 

  현재적인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그 구원의 힘을 이미 발휘하고 있다는 현재적인 면의 비중이 좀 더 커요.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당시 유대교의 가르침과 더 다르게 특징을 부여하는 요점이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사실은 당시의 유댜교적 배경과 비교해 보면 특징들이 참 많아요. 

 

  지난 번에 말한 것처럼 구약과 유대교의 기본사상을 이어받으면서도 그만큼 공통점이 있죠.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교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를 많이 가르쳤는데 그게 차이점이죠. 

 

  그 중의 하나가 두드러진 것이 예수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지금 여기서 현재 구원의 힘을 발휘한다.  이것을 강조하는 점이죠

 

그래서 예수께서 뭐라고 그럽니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가 세례요한으로 끝나고 자신의 사역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시대가 도래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고 선언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통치 영역으로 지금 들어 오도록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 11:13절을 읽어 봅시다.  13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에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귀 있는 자들은 들을 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역사를 두 세대로 나누어서 생각했다고 그랬지요.  이 세대 오는 세대,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통치하는 죄악과 고난의 죽음의 세대.  끝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를 보내서 사단의 세력을 꺽고 그의 통치를 한다.  하나님의 통치 노릇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한다.  그래서 구원의 세대 이렇게 보았다고 그랬지요.  이 예언자들 선지자들 구약과 유대교의 이 세대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며 준비하도록 했던 그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가 세례요한으로 끝나고 세례요한이 구약과 유대교의 시대의 즉 이 세대의 종결이라고 자기와 더불어 세로운 세대 종말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새 시대가 도래 했음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도래하여 그 구원의 힘을 지금 나타내고 있음을 무엇으로 증거했느냐? 여기 오늘 읽은 본문 눅 11:14-2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의 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이것으로 그를 통해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를 삼은 것이어요. 

 

  이 이야기는 잘 아는 이야기이지요.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까 귀신을 쫓아내고 신유의 일을 많이 하심으로 사람들이 거기 예수를 적대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비아냥거려요.  그 사람이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바알세불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여기 본문에는 분명히 바알세불이 마귀 사단의 별칭으로 쓰는 것이 분명해요.  본문에서는 모든 귀신들을 졸개들로 거느리는 귀신들의 왕국 이 세상의 왕 그러니까 사단의 별칭으로 바알세불이란 말이 쓰인 것이 사실이어요.  이 본문에서는 .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에 사단이란 별칭이 참 많았어요.  여러가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바알세불을 별칭으로 삼은 것은 우리가 아직 문서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까지 공용되지 않았다.  그런 말이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를 욕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단의 별칭 바알세불이란 말을 만들어냈다는 말이어요.  그러면 이 바알세불이라는 말이 본문에서는 예수를 욕하기 위해서 사단의 별칭으로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이런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근거가 무엇일까? 이 말을 분석하면 이 말은 두 마디로 되어 있어요.  바알과 세불이라는 말.   이 말들을 엮어서 한 말로 만들은 것이어요. 

 

  바알(לאב)이란 말은 원래 샘족어에 남편 또는 주 라는 보통 명사여요.  우리도 지금도 그렇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부인이 우리 남편을 우리 주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럽니까?  누가 그러네요.  옛날에 남성위주의 사회에서는 부인이 남편을 주인이라고 불렀어요.  우리 한국에도 그런 관행이 있어서 부인이 남자를 우리 주인이라고 그래요.  남편은 거기 상응해서 자기 아내를 집에서 부리는 하인으로 생각을 해서 우리 집 사람 이렇게 완전히 부부관계가 주인과 하인으로 되는데 이 팔레스티나에서도 그랬어요.  그래서 바알이란 말은 남편이란 뜻도 있고 주라는 뜻도 있는 보통명사여요. 

 

  그런데 이 말은 신에게도 적용했어요.  특히 가나안 신화 가나안 종교는 부, 주신들을 중심으로 한 다신교였죠.  “לא” 아버지 신.   부신은 엘과 부신으로 부터 권세를 위임받아서 세상을 통치하는 아들신이 자신이 לאב.   가나안 종교는 엘신과 바알신, 부신과 주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였는데 바알신이 주로 세상과 관계하는 신이어요.  세상을 다스리고 이 신은 구름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비를 내려주어요.  비를 내려서 땅으로 하여금 비옥하게 하기도 하고 소출을 많이 하게 하도록 하는 신이어요.  소출 생산을 많이 하게 하는 신인 동시에 생식의 신 그래서 모든 생식을 하게 하는데 있어서 원동력을 바알이 준다고 봤어요.  땅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짐승들 간에도 사람들 간에도 생식은 바알의 신에 의해서 된다.  그래서 가나안의 바알숭배가 가나안 종교에 있어서 바알숭배가 바알숭배를 통해서 생식이 힘을 얻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알숭배가 어떻게 표현되었느냐면 여러분들 구약성경에서 가끔 보다시피 성전의 창기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바알신전에서 신을 섬기는 여자들을 고용해 가지고 남자 사제들과 이 여자들이 성교를 함으로 신을 기쁘게 하고 생식이 힘을 얻는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바알숭배가 아주 음란한 종교로 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눈으로 볼 때는 타락의 극치의 현상을 속출하는 그런 종교였어요. 

 

  그런데 외형적으로 이스라엘의 야훼숭배사상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 그들의 모세를 통해서 준 하나님의 야훼의 계시와 야훼의 출애굽의 구원에 따른 체험에 근거한 야훼숭배종교와 자기들이 새롭게 정착해서 관찰하게 되고 자기 주위에서 행해지는 가나안의 바알종교와 많이 혼합을 했어요.  그래 가지고 이스라엘의 야훼숭배가 많이 타락하고 위협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구약의 선지자들은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의 아주 많은 수가 특히 포로 이전 선지자들의 대다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알숭배를 없애는 바알숭배와 싸우는 그런 역활을 하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엘리야 선지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바알하면 이렇게 남편 주라는 보통명사이면서도 동시에 가나안의 타락한 우상숭배의 가장 잔인하고 퇘폐적이고 천박한 형태의 신 그런 감을 갖는 것이어요.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우상 자체는 하나의 돌조각 나무조각에 불과하다고 보았어요.  그러나 인간의 우상숭배행위를 이용해서 인간을 사로잡는 힘이 사단이라고 그랬어요.  우상 표현을 사단이 작용한다고 보았어요.  그러니까 바알이라는 우상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 사단이 있는 것이어요.  거꾸로 말하면 바알은 사단의 표현이어요.  그런 의미로 바알이라는 말을 썼구나 우리가 알게 되어요. 

 

  “세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처지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하늘이 세불이어요.  하나님의 거처지로서.   땅위에 있는 세불은 무엇이냐? 예루살렘 성전이 땅위에 있는 세불이어요, 다시 말하면 세불은 성전이란 말이어요. 

  자, 바알세불이란 말이 이런 두 단어의 혼합어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원래 조합할 수도 있지요.   바알세불이란 말이 성전의 주 라는 뜻을 들 수 있죠.  그러나 바알신전에서 퇘폐적인 예배가 벌어지는 사단의 인간을 타락시키는 힘이 그런 우상숭배를 상상하게 하는 말이죠.  그래서 아주 최근에서야 몇몇 학자들 간에 이런 새로운 관찰이 이루어 져서 유대 예수의 대적자들이 예수를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 하면서 바알세불을 새롭게 만들어낸 데는 예수의 어떤 주장과 관계가 있다.  예수의 자기주장과 관계가 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성전에 대해서 무슨 주장을 했는데 이 주장을 비꼬아서 비아냥해서 이런 말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아주 쉽게 말하면 예수가 자신을 성전의 주라고 주장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 다음 쯤에 가서 우리가 볼 것이어요.  예수께서 어떤 의미로 성전의 주라고 주장을 했나요?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어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아주 깡그리 부서 버렸지요.  성전에 올라가서 무슨 제사하고 그러는 것.   반면에 예수께서는 성전의 기능을 자신이 성취한다고 주장했어요.  죄용서를 선언하기도 하고 문등병자가 깨끗이 되었음을 선언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고 자신이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주장하고 .  그래서 바로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 예수의 체포와 재판의 죄목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산헤드린에서 재판받을 때 죄목이 그것이어요.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했다.  그 말을 성전에 가서 소란 피움으로 성전에 가서 제물을 팔고 사는 것을 금지하는 식으로 소란 피움으로 그 말을 뒷받침 했다.  그것이 예수께서 체포되고 재판받는 직접적인 동기이고 죄목이어요. 


  그런 것들이 다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 다음시간에 하겠지만 예수께서 자신을 성전의 주라고 한 것이어요.  곧 이 예수께서 자신을 성전의 주라고 하는 것은 또 예수의 그 알쏭 달쏭한 자기 칭호 우리 개역번역이 인자라고 번역된 말 그것이 사실은 알쏭 달쏭한 자기 칭호여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 그런 말인데 그 당시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그 말을 잘못 알아 들었어요.  알쏭달쏭한 말이었어요.      왜 그런가도 이 다음시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예수의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성전의 주라는 주장과 다 연결되어 있는데 그러한 주장과 빗대어서 유대적대자들이 네가 성전의 주이기는 커녕 사단의 앞잡이인 가나안의 우상 바알 우리 야훼신앙을 가장 역사적으로 위협하고 우리 민족을 오도한 바알과 연계해서 바알을 힘입어서 바알에게 작용한 사단을 힘입어서 귀신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욕을 한 것이어요.  그래서 바알세불이라는 말을 새로 만든 것이어요. 

 

  자,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무엇이라 합니까?

그것이 세 가지로 답을 하지요.  그것이 엉터리 틀렸음.  왜 그것이 틀렸어요.  논리적으로 틀렸음.  어떻게 사단의 힘을 빌어 가지고 사단의 졸개들을 쫓아내느냐? 사단이 자기 졸개들을 내어 쫓는데 힘을 빌러주어요? 그럴 수 없는 것이어요.  만일 그렇다면 사단의 집이 지금 파괴되었다는 말이 아니냐? 내분이 일어났다는 말이 아니냐?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질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만일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바알세불이 사단인데 사단의 힘을 빌어 사단의 졸개들을 쫓아낸다면 사단의 집안이 스스로 분쟁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저희 나라가 서겠느냐?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말이어요.  논리적으로 이것이 맞지 않다.  

  첫째 답.   그런데 여기 7절 18절을 읽으면서 특히 나이가 드신 분들 40세 이상 되신 분들 기억나는 말이 없습니까? 무슨 구호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여기서 온 말 여기서 온 교훈이어요.  저기 그 말은 이 본문에서 나온 말로서 서양숙어로 꽤 오래 있었던 말이어요.  아마 이 박사께서 우리 한국에 해방정국에 혼란스런 상황에서 뭉치라고 한 모양인데 그 양반이 제일 뭉치지를 못했던 양반 아닙니까? 미국에서 독립운동 할 때도 제일 뭉치지 못했던 양반이고 해방 후에도 제일 뭉치지 못한 양반이고 그래서 우리 민족이, 그 양반이 공로도 많지만 그 양반의 단점도 단점으로서 우리에게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지요.  하여간 이 본문 읽으면서 갑자기 이승만 박사가 생각나는 군요. 

 

  둘째로 예수의 적대자들의 말이 옳지 않음을 두 번 째로 19절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여기서 너의 아들들이란 말은 예수의 적대자들의 진짜 문자적으로 아들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다 셈족 언어의 숙어들이어요.  '너희들은' 그 말이어요.  너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이어요.  아들이란 말은 여러가지로 쓰였어요.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개별화하는 의미로 소새끼 소 한 마리 송아지 송아지를 셈족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면 ‘소떼의 아들’.  문자적으로 소떼의 아들.   무슨 말이냐 하면 송아지 한 마리 하나의 송아지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불렀어요.  듣고 보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누가 사람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어디가 있어요.  이것이 다 숙어적 용법이어요

 

  인류 인간중의 하나 인류라는 종 중의 하나로 개별화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 아들이라는 말이어요.  소떼의 아들, 송아지 한 마리 그래서 너희들의 아들들이란 말은 진짜 너희들의 육신적인 아들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떼거리 유대인들 너희 떼의 몇 사람 그런 말이어요

 

  몇 사람들은 그러면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느냐?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압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어요.  그리고 병 고치는 이런 일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행했어요.  유대선지자들도 했고 랍비들도 했고 또 이방 사람들 중에서도 가끔 그런 보고가 있어요.  그래서 두 번째로 그저 말도 안 됨.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다른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음을 너희들 중에도 증거가 있지 않느냐?

 

  그러나 세 번째 20절에 진짜 대답.   예수께서 하나님의 힘으로 원래 원 본문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그 말이어요.  하나님의 손이란 말은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보신다.  이런 언어를 전부 의인법이라 그러지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 인간의 기능에 비추어 말함.  하나님께서 손을 내민다 뻗친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속으로 개입하신다.  그런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역사속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구원의 힘을 발휘함.  바로 그 힘을 입어서 내가 귀신을 쫓아낸다. 

 

   예수께서 누구를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그래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서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개입하셔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그 힘에 의거해서 내가 귀신을 쫓아낸다.  그러니까 자기 귀신을 쫓아내는 게 무슨 증거여요.  역사속에 지금 현재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지금 나타내고 있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나타나고 있음.  죄악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를 자꾸 제거하려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의 중간입니까?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 증거를 들어서 뭐라고 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했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증거를 세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느냐? 그것을 21절 부터 설명을 해요.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요.  강한 자가 집안에 지키고 있고 그 집안이 이제 안전하죠.  그러나 더 강한 자가 그 집에 침투해서 그 강한 자를 꽁꽁 묶고 그 집안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 올 수 있죠.  탈환할 수 있죠. 

 

  이것으로 예수자신과 사단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더 강한 자로서 강한 자 사단의 왕국에 침투했어요.  강한 자가 지금까지 인류를 그의 집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어요.  귀신들로 해서 지키게 하고 인류를 꽁꽁 감옥 속에 가두었어요.  예수께서 더 강한 자로 오셔 가지고 강한 자를 꽁꽁 묶었어요.  그래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졸개들을 쫓아내고 이 사단의 왕국에 졸개들을 위해서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가고 있음.  그게 자신의 일이라는 거여요.  언제 예수께서 사단을 꽁꽁 묶었어요? 이 그림을 예수의 시험 때와 예수의 세례 때의 이야기를 예수께서 뒤돌아보면서 하는 거여요.  예수께서 세례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고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았죠.  하나님의 능력을 입었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도록.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의 세례 때 뭐라고 선포되었어요?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로서 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통치를 대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그를 성령으로 힘을 주셨어요.  성령으로 무장시켰어요.  그랬더니 사단이 즉각 예수에게 전투를 걸었지요.  결투를 신청했죠.  그것이 시험 때여요. 

 

  그래서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간시켜 가지고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대항하게 자기 주장할려고 만들려고 그렇게 해서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힘을 행사 못하고 도리어 옛 아담과 같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하려고 사단이 애를 썼죠.  그것이 시험 기사죠.  그때 예수께서 분명히 사단의 시험을 극복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고 의존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들 노릇한 것임.  그래서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할 것임을 결단하죠.  이것이 무엇이냐면 사단을 일차로 한 번 묶은 것으로 생각했죠.  그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은 사단의 통치에 대항하는 것이고 사단은 너희들을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한다.  여기 하나님의 통치가 구원의 힘을 발휘하면서 곧 완성될 것인데 지금 벌써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시위하는 거여요


  귀신들을 쫓아내서 귀신에 붙잡힌 인간들을 해방시켜서 그들을 온전하게 함, 여러가지 죄에 눌려 사는 사람들 삭개오 같은 사람들을 그의 죄의 신에서 해방시켜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결하게 하고 이웃과 연결되어서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해서 그 사람을 온전케 함.   또는 문등병자 중풍병자 혈루병자 온갖 병자들을 사단의 통치 죄악과 죽음 고난의 통치에 시달린 사람들을 치유해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나타남을 시위하고 이렇게 예수께서 계속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단의 집안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을 자꾸 구출해 가는 과정이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점점 실현되어 가는 과정이죠.  그러니까 뭐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여기에 지금 구원의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보아야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예수와 사단의 대결은 크게 세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예수의 세례 때의 소명과 시험 때의 예수가 사단을 묶음.  예수가 시험 때 사단에게 지지 않고 사단을 꺽음은 사단을 묶은 셈이어요.  그러나 사단은 예수에게 계속 대항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요.  그 인간들을 충동해 가지고 유대 지도자들을 충동하고 로마 권세자들 빌라도를 충동해 가지고 예수를 사형에 처하죠.  사단이 하는 짓이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죽음이란 사단의 최후의 무기인데 그런데 예수로 하여금 사단의 최후의 무기를 부활로 무력화시킴으로서 사단을 이기게 해요.  결정적인 승리이어요.  이런 것을 우리 신약성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에서의 예수의 사단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인 승리이니까 이것을 우리는 등뼈를 분질렀다.  이렇게 표현해요.  예수께서 사단의 등뼈를 분질렀다는 말은 두 가지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하나는 결정적으로 이겼다는 것.  하나는 그러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등뼈만 분질렀지 아직 사단의 힘이 잔뜩 남은 거여요.  아직도 그 두 가지를 말하는 거여요. 

 

  이것을 최근 2차 대전 이후에는 어떤 그림을 쓴다고요.  D-day라는 그림을 쓴다고 그랬지요.  전쟁이 결판이 났다.  그런 의미로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사단의 전쟁에 있어서 결판이 났어요.   그러나 아직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어요.  아직 사단이 항복을 안 해요.  엊그제 신문에 났습니다. 


내년 4월이 2차 대전 때의 D-day 50주 년 이랍니다.  1944년 4월이니까 연합군이 불란서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해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르는 날 그것을  D-day라고 그러지요.  전쟁이 결판이 난 날이다.  그런데 사실은 전쟁이 1년간 더 끌었죠.  1945년 5월 8일에 히틀러의 후계자 체내스 제독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무조건 항복서명했을 때 총성이 멎은 거죠.  연합군의 승리가 결정이 된 것이어요.  그 날을 승리의 날이라 그러지요.   Victory Day.  승리의 날 그 날은 예수의 재림 때 그 날은 사단에 대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고전 15:28절 이하 지난번에 공부할 때 기억납니까? 예수께서 어쩐다고요.  재림하셔서 사단을 무력화시킨다.  또는 사단을 완전히 파멸한다.  우리에게 자꾸 죄를 사주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월급을 주는 게 사단의 본업이죠.  그래서 사단이 실업자가 되면 죄악과 죽음이 없지 않습니까? 사단을 완전히 파멸한다.  또는 실업자가 되게 한다.  또 좀 더 히브리서 10: 14절입니까? 좀 더 그림으로 뭐라고 표현해요.  사단을 발등상 만든다.  여러분들 고대 중동 그림들 한 번 보세요.  왕이 앉아 있고 왕 앞에 발로 딛는 상이 있어요.  그것이 발등상인데 그 상 밑에 누가 조각이 되어 있느냐면 가령 용이 조각이 되어 있다든가 또는 카오스 혼돈을 일으키는 신 원수 원수가 조각이 되어 있어요.  원수를 완전히 제거함의 그림이 발등상 만듦.  그러니까 예수께서 사단을 발등상 만든다.  발로 딛고 앉은 상 만듬.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사단의 대결은 이런 큰 단계로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어요.  이 상황에서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아들의 가장 기본 의미는 뭐라고 그랬어요.  상속자라고 그랬어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자 하나님의 통치를 예수가 대행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사단의 도전이 처음 와요.  예수께서 그 도전을 이겨요.  이것이 예수께서 사단에 대한 첫 승리여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 현재 예수가 하는 것은 이 사단의 통치 죄악과 죽음의 통치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벗어나서 의와 생명의 통치의 영역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고 사람들을 자꾸 초대하는 것이어요.  죄악과 죽음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여러분들에게 기쁜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사단을 주로 따르고 죄를 짓고 그래서 죽음과 고난을 품삯으로 받는 그런 삶이 아니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의 뜻에 사십시요.  그러면 거기에 의와 생명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 구원이 곧 완성될 것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눈물과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  왜? 고난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 기쁜소식을 선포하고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선포하는 그 복음을 시위하는 거여요.   그 진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시위하는 것이어요.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침 그것으로 시위하는 거여요.  그런데 그 과정을 계속 사단이 대항해요.  그래서 예수의 전 하나님 나라의 선포기간이 예수와 사단과의 투쟁의 기간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사단의 통치에 대행해서 선포하고 하나님의 통치 그 구원의 힘을 사단의 통치에 죽음의 힘에 대항해서 나타나게 하고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에 뭐라고 보내뇨?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라 이렇게 보내죠.  눅 10장 항상 이 두 가지는 같이 가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귀신 좇아내고 병자고침은 항상 같이 가요.  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침이 사실은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위요 해설이어요.  또는 실제화여요.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여러 동네에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라고 그러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이 이제 자기들의 선교사역의 성공담을 가지고 기쁨으로 돌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눅 10:17-18절 사단이 저 하늘의 왕자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고 예수께서 그러지요.  예수와 그의 제자들 교회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이 사단의 통치에서 점점 더 많이 해방되어 가는 과정은 동시에 어떤 과정이어요? 사단이 불법적으로 앉아 있는 하늘의 보좌에서 점점 더 굴러 떨어져요.  그래서 사단의 왕국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어요.  이렇게 예수께서 벌써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자신의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그 구원의 힘을 발휘하고 있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말할 수가 있고 그런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인간들의 체험의 실제여요.  인간들이 체험할 수 있는 그 구원의 힘이어요.  그래서 예수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라고 설명을 했다. 

 

  그래서 귀신의 쫓아냄과 병고침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의 시위이며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여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공급하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으로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설이며 그것의 그 실재가 되게 하는 과정이다 이 말이어요.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 주로 안식일 날에 치유활동을 벌이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어요.  왜 예수가 안식일 날 주로 치유하셨는가?

이것은 4복음서에서 심지어 요한복음에서까지 공통적으로 증거하는 바인데 바로 그 일 때문에 예수가 유대인과 유대신학자들과 심각한 마찰에 들어가요.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그런 갈등을 마다하지 않고 주로 안식일을 골라서 치유를 했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무슨 뜻인가를 알지만 아마 여러분들이 많이 관심 있는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고 지내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올바른 지냄인가? 이런 것도 모두 함축적으로 설명을 해야 되겠어요. 

그래서 이 다음 시간에 제가 설명을 하겠어요.  다만 여기서 제가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한다는 말을 많이 썼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 자신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시는 일을 꼭 같이 한다.  제자들을 보낼 때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도록 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함은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보금에 대한 해설이고 그것의 실제화이다.  이런 말을 많이 쓰는데 이때에 귀신 쫓아내고 치유함을 높게 생각해 가지고 포괄적으로 우리가 하기 쉬운 좁은 의미로 서울의 김 아무개 목사가 하고 다니는 그런 의미로 생각할 것도 아니고 산 속에서 손 얹어서 앉은뱅이 낫는다는 여자들의 의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폭 넓게 생각을 해야 되요

  우리 삶을 온전하게 하는 모든 행위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고 치유하는 행위여요.  그런 것도 이 다음시간에 아울러서 설명을 하겠어요.  이것에 대한 오해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해요.  우리 신앙이 한 편으로는 이런 자꾸 미신화해 가고 미신화에 대한 반발을 느끼는 정통적인 개혁신학에서는 자꾸 우리 신앙이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어 가고 성경의 가르침이 올바로 회복이 되어야 되요.  한편 미신화도 방지하면서 다른 한 편 우리 신앙의 극단적인 추상화 관념화도 막아야 되요.  우리는 복음이 실제 우리 삶에서 체험할 수 있는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 이런 것을 이 다음 시간에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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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4)

 

막2장13-17

 

 

-치유와 하나님나라 -

 

김세윤 박사

 

 

 

 

  오늘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번째 공부로서 지난시간에 우리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미래에 종말에 완전히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지금 벌써 예수를 통해서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어요.  치유로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힘을 시위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룬 구원을 가져다준다.   지금 벌써 이런 구원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종말에 그런 구원이 완전히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항상 치유로 뒷받침하고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지요.  치유가 항상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같이 가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보내면서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라고, 하나님 니라를 선포하고 치유하라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는 항상 같이 가요. 

하나님 나라 선포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 구원을 약속하는 것인데 그것을 치유로 시위하고 현실이 되게 하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이 치유활동을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라.  그렇게 신학자들이 말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실제화라.  그렇게 말씀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손에 쥐어주는 그림이어요.  삽화(illustration). 


  오늘은 그런데 주로 예수께서는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다.  4복음서들이 똑같이 한꺼번에 증거를 해요.  그런데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또 유대신학자들은 서기관들은 안식일 날 병 고치는 것이 아주 못마땅해 가지고 예수를 그 이유로 죽이려 달려들지요.

 

  먼저 예수와 유대 신학자들과 맨 먼저 갈등을 일으키는 issue가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어요.  유대 신학자들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일을 고집하시는지를 오늘 좀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웠어요. 

 

  우선 예수의 안식일 날 치유활동과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왜 예수는 그 치유가, 그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시위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 실제화라고 그랬는데 왜 그것을 특별히 안식일 날 해야 의미가 있다고 보았는지 그것을 오늘 살펴보고 그것을 살펴보다 보면 안식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게 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더 지켜야 되는가 그런 것도 알게 되어서, 오늘 그 공부를 할려고 작정을 했는데, 자꾸 2시 까지 성경공부가 마쳐야 성가대를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안식일 문제를 다룰려면 1시간을 꼬박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중에 잘리면 아주 고약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다음 주로 그 문제를 미루고 오늘은 하나님 나라와 치유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일반적인 서론을 하고 여러분들이 혹 질문할 일이 있으면 질문하면 좋겠어요. 


  먼저 막 2:17절을 한 번 펴 봅시다.  거기 막 2:13절 부터 17절 까지 한 번 읽어보십시다.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이 경건하고 스스로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그 회개하여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잘 응하지 않아요.  그런데 도리어 죄인들과 세리들은 많이 응한다 이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그 선언을 하나의 증거로 주기 위해서 그들과 늘 먹고 마시는 잔치를 행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늘 잔치의 비유로 많이 설명했다고 그랬지요.  종말에 완성될 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부요한 잔치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인간의 한계성 결핍성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 영생을 얻게 된다.  그것을 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이 비유를 설명을 했는데 바로 종말에 지금 여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한 죄인들은 바로 종말에 그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 그 영생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보증해 주고 그 잔치를 미리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항상 죄인들과 잔치를 베풀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항상 잔치를 베풀었다고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이지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로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대적자들이 예수에게 뭐라고 별명을 붙였습니까? 마11장을 제가 읽겠습니다.  11장 18절 부터 읽어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세례요한은 아주 금욕주의자였지요.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고 사막에서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양식으로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까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늘 이렇게 잔치를 베풀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창기의 친구로다.  예수의 별명이 3가지여요.  탐식하는 자요술 좋아하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께서는 뭐라고 정당화해요?

우리가 아까 읽은 막2:18절 이하에 쭉 정당화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볼 것이 아니고 17절에 예수께서 자기가 온 것은 자기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렇게 표현하지요. 

  그런데 죄인을 부른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병든 자를 불러 그들을 치유함.  막2:17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이 병과 죄가 동일시 되어 있고 병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요.  그래서 우리가 2장1-11절 그 이야기를 잘 알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읽지는 않겠습니다.  중풍병자를 그 친구 넷이 들 것에 들어다가 아주 예수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음으로 길을 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들것을 내리니까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선언합니까?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5절에 저희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선언하는 것이어요.  이 사람은 중풍병자여요.  중풍병자.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준다.  너는 이제 온전케 되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아 있는 신학자들이 시비를 걸어요.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최후의 심판관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아! 이 사람이 죄를 용서해 준다고 선언하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침범하는 자로구나.  이것을 참람죄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기가 죄를 용서해줄 권세가 있음을 설명하는데 여기서도 중풍병과 죄가 동일시되어 있고 중풍병 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될 수 있고 그래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시편 103편을 보십시다.  시편103편을 예수께서 즐겨 부르는 18번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가르침을 공부해 보면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마찬가지 이지만 시편 103편의 사상이 곳곳에 드러나요.  그래서 예수께서 특별히 이 시를 사랑하시고 많이 부른 것을 우리가 확인하게 되요. 

 시 103편을 보시면 3절 4절 보십시다.  ‘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여러분들 시의 병행 구조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바로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읽고 있는 막 2장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어요.  중풍병자에게 죄용서를 선언하고 그것에 대해서 여기 시비가 붙자 예수께서 2장 17절에 자기의 오신 목적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불러 그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할 수 있고 병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치유한다고 할 수 있고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어요. 

 

  가령 이렇게 선포할 때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특별히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세리 하나 있지요.  이 삭개오 이야기.  눅 19장의 삭개오 이야기 알지요.  이 사람에게 삭개오가 예수의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가 그를 알아  보시고 이 삭개오는 사람들 틈에 가지도 못하지요.  세리로서 하도 사람들을 압제하고 못된 짓 하고 아주 죄인으로 유대 공동체 안에서 낙인 찍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를 좀 보고 도움을 얻을려고 하지만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해서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예수께서 은혜로 구원의 손을 내밀지요.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고 내가 네 집에 가겠다 하니까 이 사람이 예수의 은혜에 감동이 되어서 여기 뭐라고 말합니까?

  완전히 회개하지요.  그래서 구약의 정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보상한다고 보상하겠다고 자기 회개의 열매를 실제로 보여주고 여기 눅 19장 8절을 보십시다.  ‘삭개오가 서서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사오면 4배나 갚겠나이다’ 완전히 회개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가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오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온전케 하는 힘이 이 집에 실현이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지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하지요.  그래서 이 세리들을 죄를 용서해줌은 병을 고침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몇 구절들은 여러분들에게 계획에 없었던 공부로서 몇 구절들을 방금 소개한 이유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냐면 치유란 개념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유란 개념을 많은 사람들은 꼭 육신의 병만을 고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병고를 치유하는 것으로만 보지를 않았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포괄적인 의미로 우리의 실존의 모든 면에서 전체적으로 치유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여요

 

  죄라는 것이 우리 모든 문제를 낳잖아요.  죄가 낳는 문제들은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갈등관계로도 나타나고 삭개오가 토색하고 억눌러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그래서 원수지고 거기에 고난이 있지요.  죄가 그렇게도 나타나고 방탕 아예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술 담배 향락으로 소진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죄가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고난들을 주어요.  그 고난들이 전부 죄로 부터 나온 곳이어요.  죄가 모든 고난들의 원천이지요. 

 

  그러나 죄와 고난들이 1:1로 성립하지는 않아요.  가령 지금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중풍병을 앓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어요.  전에도 제가 예를 들었는데 예수도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해서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소경이 된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입니까? 그것이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한다는 아주 원시적인 신학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지요.  우리들도 많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아요. 

  1:1로 성립될 수도 있어요.  전에도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만 제가 술을 많이 마시고 운전하다가 전신주 가로수를 받아가지고 다리가 부러지면 그것이야말로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20살 먹은 녀석이 술이 취해가지고 내 차를 받아 제 다리가 부러지면 제가 죄를 지어 가지고 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니지요.  이웃의 죄로 다만 우리들이 인간들의 공동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주고 남의 선한 행위가 나에게 유익을 주고 그래요.  그래서 항상 죄라는 것이 1:1로 성립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누구의 죄든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고난이 있지요.  그런데 그 고난이라는 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심리적인 병으로도 나타나고 관계에서의 고난으로도 나타나고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지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치유하는 것인데 그 치유는 그러기 때문에 죄가 나타나는 다양한 고난들을 다 없애는 것이어요.  꼭 육신의 병고만이 아니고--. 

  그러니까 치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얻는 치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를 온전케함이어요.  모든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함.  그것이 치유여요.  그러니까 이 치유가 어떤 때는 육신의 병고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서 그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빈곤도 엄연한 고난 아닙니까? 빈곤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리적인 질병으로 부터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부간에 늘 싸우던 갈등관계에서 오는 고난으로 부터 해방되기도 하고 정치적인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오늘 같으면 환경의 공해의 제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치유는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면에서의 온존케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어요.  그 치유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요.  구원을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어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되어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성령의 역사로 지금 우리 안에 실현이 되었는데 그것은 꼭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항상 두개의 극단의 오류가 나와요.  하나는 완전히 카리스마틱한 오순절 신학의 오류가 나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난다고 말하지 않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치유로 나타난다.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사고는 그것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그런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라는 것으로만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을 체험하려고 거기에 몰두를 해요.  그래서 다른 방면으로의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나타남을 경시해요.  상대적으로 아니면 무시해 버리든지.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발생해요.  아 믿음이 좋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육신적 병고가 안 나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은 그것을 기법을 개발해요.  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육신적 병고의 제거 그쪽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함으로 어떻게든지 그것을 체험하려고 온갖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점차 신앙이 미신화 되어 가지요.  우선 여기에 과장된 주장이 많이 발생해요.  그래서 신앙이 점점 미신화 되어가요.  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우리 실존의 모든 면에 나타나야 된다는, 모든 영역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자적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리적 갈등의 해소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빈곤의 퇴치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적 평화의 확대 이런 것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이렇게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한 것 모든 아름다운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의 통치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어 우리 삶을 온전케 하는 것은 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다.  구원의 힘이다.  이렇게 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안수하고 기도하고 뭐해서 뭣 나은 것에만 치유의 의미를 부여하니까 이 사람들의 신앙이 많이 균형을 잃고 그것에 몰두하다 보면 과장된 주장을 많이 하게 되고 환상을 많이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신앙이 굉장히 미신화 되어가요.  그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이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아까 말한 대로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함, 모든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  하나님의 통치의 열매여요.  구체적인 열매, 그러기 때문에 첫째로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둘째로 그 치유의 힘이 인간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음, 보통 그렇게 나타나요.  인간들을 통해 나타나는데 꼭 안수니 기도니 이렇게 만이 아니고 의사를 통해서도 훌륭한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약전문가를 통해서도 훌륭한 영양사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나타나요.  어떤 의사가 암 환자를 잘 수술해서 나았다.  하나님의 나음이지요. 

 

  지금 수능 시험이 어려워 가지고 낙담한 친구들이 있어요.  혹시 자살한다고 덤벼드는 친구들도 있을 거여요.  또 요즘 금융실명제로 파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요.  일생동안 양심적으로 사업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도가 나서 감옥에 가고 실망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욱 하는 상황속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어요.  죽음 직전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아 여기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잘 설교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용기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하게 했으면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치유가 아니어요? 네? 아이 어떤 권사님이 아주 못된 젊은이 하나 못된 길로 빠지는 젊은이 하나를 계속 몇 년 동안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고 counselling해서 돌이켜 가지고 그 사람이 자기 가족에게 이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게 하면 그것이 치유가 아닙니까? 죽음 가운데 생명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여기 삭개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많이 끼친 삶이어요.  압제하고 뺏고 강탈하고 도둑질하고 그래서 이 삶이 예수에게 치유함을 받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므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그를 통해서 남에게 전달되었어요.  이것이 치유하는 것이어요.  온전케 함. 

한국의 목사님들은 대대로 독재자들에게 아부를 했는데 아부하지 말고 그 독재자들 앞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해 가지고 그 독재자들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통치하도록 했으면 이 나라에 사람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애매한 사람 감옥에 집어넣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회정의가 사회 자유가 인권이 평화가 확대되어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이어요.  그것이 죽은자 가운데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까? 이 기도해서 암환자 나은 것보다 더 큰 생명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첫째로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되고 둘째로 이 치유는 꼭 기도하고 안수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복음선포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counselling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음악에서 한 사람이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새롭게 치유가 일어나요. 

 

  이렇게 이런 전제에서 둘째 오류는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전통 보수 장로교회에서 많이 범하는 오류인데 바로 치유는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로만 의미한다는 그런 전제하에서 이 사람들 균형을 잃고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그 사람들 신앙이 자꾸 미신화 되고 과장된 주장을 하고 그래서 신앙이 아주 한 마디로 볼품없다 그 말이어요.  걸레 같아요.  균형을 잃고 미신화 됨.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전통보수 개혁신학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이런 의미로의 치유는 예수와 사도시대에만 그랬고 이제는 더 이상 없다고 그러는 것이어요.  그것이 유명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아주 유명한 B.  B.  Warfield가 처음에 제창한 이론인데 그것이 우리 한국의 보수장로교의 일반적인 이론이 된 것이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성령의 역사로 실현이 되는데 더 이상 육신의 치유나 이런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요.  그것이 틀렸어요.  왜 틀렸느냐면 이 전제가 틀린 것이어요.  치유라는 것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치유라는 것이 아까 말한 대로 심리적 문제의 해소 관계의 해소문제 빈곤 등 모든 고난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도 엄연한 고난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 육신의 병고의 제거가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정신과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서도 음악 시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특히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선포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런 카리스마틱한 사람들의 과장된 주장 헛된 주장에 너무 반발을 해가지고 그런 것은 이제 없다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아요. 

  B.  B.  Warfield가 그렇게 이런 것이 없다고 한 이유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 굉장히 발생하면서 이 분이 조사를 해 보니까 자기가 조사한 모든 case가 거짓 말이었어요.  이 분이 이 이론을 제시한 책 이름이 “거짓말 기적” 이라는 책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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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5) -

 

막2장13-17

치유와 하나님나라2-

김세윤박사

 

 

  오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두 번째로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치유활동의 관계를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치유하심으로 구원의 실제가 되게 했다.   그때 우리는 치유라는 것을 아주 폭 넓게 생각을 해서 모든 면에서 우리 삶을 온전케 함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인데 그것이 먼 훗날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그런 것만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벌써 우리에게 구원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구원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냐면 치유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 치유라는 것이 육신의 병고의 치유로도 나타나고 절망 가운데서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새로운 용기를 얻도록 하는데도 나타나고 늘 갈등 속에 있는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올발라짐으로 해서 이웃과 더 평화가 있고 자유가 있게 하는 면으로도 나타나고 정치적 압박, 경제적 빈곤 이런 것의 제거로도 나타나고 하여간 모든 점에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 말씀을 지난 번에 드렸죠.   그 점을 예수께서 특별히 효과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쳤어요.  

 

  그래서 오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의미를 주로 생각해 보려고 그래요.   우리가 4복음서 들을 다 읽어보면 공통되게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치시죠 바로 그런 이유로 아주 초기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사역의 초기부터 유대 신학자들의 시비를 받아요.   큰 적대감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해요.   왜 그러느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이 무엇인가 부터 생각을 하게해요. 

  안식일은 원래 창2장에 무슨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이 심히 좋은 상태였죠.   그러니까 창조를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창조가 완전케 되었을 때 다시 말하면 심히 좋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할일 하셨으니까 안식하셨다는 거죠.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창조를 즐김이에요.   그게 안식일의 뜻이어요 원래.  

  그래서 가령 십계명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우리가 한 번 출애굽기 20장 볼까요? 십계명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는 제4계명을 주신 이유가 거기 있죠.   출20장 11절 한 번 보시겠읍니까? 8절부터 읽읍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을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함이니라.   11절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그 마치고 완전한 창조를 즐김의 의미가 있었어요.  

  또 한 번 보시겠읍니까? 신5:15절 너는 기억하라.   애굽 땅에서 14절부터 읽읍시다.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는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신5장15절에서는 안식일을 지킨 의미가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게 출20장에 보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신5장15절에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도 얼핏 보면 2가지 다른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 설명 같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기원에 대한 아주 참 좋은 설명이어요.   이 2가지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   전에도 제가 여러 번 설명했지만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에서는 항상 구원은 태초의 회복이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서의 구원은 출애굽이어요.   출애굽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요.  가령 이것을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많이 표현했다고.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라든지 광야에서 공급받은 므리바의 물 이런 것이 아담이 타락 전에 낙원에서 누렸던 축복의 회복 재현으로 보았어요.  시내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 그 얼굴에 빛났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이런 식으로 출애굽이 바로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심히 좋은 상태의 창조를 기념하는 것인데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사단의 꾀임에 빠져 가지고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고 죄와 죽음아래 놓이게 되었지요.  그런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구원은 무었이냐 하면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함이어요.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이 되면 안식이 있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출애굽이 첫 구원의 사건으로서 태초의 완전한 상태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출애굽 이후의 안식일은 원래의 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출애굽의 구원 즉 재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그렇게 설명이 되는 것이어요. 

  하여간 이렇게 출애굽은 그것이 첫 창조에 완성된 완전한 창조에 대한 기념이든 아니든 그것의 회복으로서 구원의 기념하는 것이든 항상 안식일은 무슨 뜻을 가지냐면 하나님의 완성 되고 완전한 창조를 기념함 이것이 안식일의 기본의미여요.  그러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아담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지죠.  사단은 속이는 자여요.  이렇게 아담에게 사단이 속임수를 썼어요.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창3:5절에.  그래서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지요.  그래서 아담이 결단한 거여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됨.  스스로 자기에게 하나님이 됨.  하나님 같이 됨.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그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 없이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아담이 다시 말하면 자기 속에 내재하는 힘, 지혜,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 자기의 안전 자기의 행복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하는 행위여요.  그것이 죄라는 것이어요.  그것이 죄의 본질이어요.  그것을 신학에서는 교만이라고 해요.  왜 교만이라고 해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자기의 피조물성을 무시하고 부인한다는 말이어요.  자기가 기껏해야 피조물인데 하나님으로 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전, 행복 모든 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인데 그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최종적으로 책임질 수 있고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환상에 빠지는 것이죠.  교만한 것이죠. 

  그것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 해서 뭐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인간이 그렇게 하겠다고 부득불 등을 돌리니까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포기해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지요.  요새 속된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했단 말이어요.  그러면 한 번 잘해보라 ---란 말이지요. 

  예수의 탕자의 비유로 말한다면 무슨 이야기여요.  탕자가 아버지로 부터 내 분깃을 주세요.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고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아버지께 등을 돌리고 멀리 가버린 거지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아담이 진짜 하나님과 같이 됩니까? 하나님같이 되지 않죠? 그때부터 자기가 하나님이니까 자기의 자원으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 되니까 아담은 무엇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어요.  일을 하는 거여요.  농사를 시작해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첫 시작이 무엇이냐면 농사여요.  땅을 파고 씨를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 자기일의 댓가로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이어요.  더 이상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공급받지 않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니까 스스로 자기가 일해서 이제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이죠.  그래서 일하게 된 것이어요.  그런데 일하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확보가 됩니까? 되는 것 같죠.  되는 것 같아요 일해 먹고 살잖아요.  일 안하면 누가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지난시간에도 제가 작년 이맘 때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우리 권사님 한 분이 질문해 가지고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가? 참 좋은 질문을 하셔서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해서 한 번 특강한 일이 있죠.  그래서 예수는 무슨 메시야인가 그때 제가 상세히 설명을 했는데 그 녹음된 것을 글로 옮겨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책자 뒷면에 나왔어요.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 작년에 들었던 강의가 새롭게 이해가 되고 더 자세히 이해가 될 것이어요.  하여간 작년에 무엇을 강조했느냐면 인간이 일을 해서 얻는 열매는 항상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동전과 같은 것.   이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의 이면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껏해야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실제를 얻는다고요.  일한다는 말에서 인간이 일함.  일해서 얻음.  이것이 문화라는 말이어요.  문화란 말이 일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해서 얻은 것 그것이 문화여요.  그래서 인간의 문화 문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 준 것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일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확대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죽음을 그만큼 또 확대해요.  어려운 말로 말하면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실제 그것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를 들자면 자주 드는 예지만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인간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서 이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자는 것이어요.  지혜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가령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관찰 자연과학적인 관찰 이런 것이 과학기술 문명을 이루어 가지고 산업생산수단의 개발로 연결되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났지요.  산업혁명이라는 생산수단의 발달로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소비에서 엄청나게 풍요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삶이 얼마나 확대되었어요.  엊그제 보리고개를 앓았던 한 30년 40년 전까지만해도 보리고개가 심각한 위험이었는데 이 땅에 농업혁명으로 쌀이 남아돌고 배고품이 없어지고 생명이 확대되었지요.  이 공업화로 우리의 옷 입는 것 쓰는 것 누리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와졌어요.  삶이 그만큼 확대되었지요. 

  아 그런데 삶만 확대되었습니까? 삶만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산업화의 길을 갔어요.  가봤더니 지금 어떻게 된 거여요.  서울에 지금 숨도 못 쉴만큼 공해가 있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공해 자원고갈 이런 형태로 죽음이 그만큼 --- 그것만 입니까? 또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의 존재 의미 삶의 의미가 소유에 있고 소비에 있다라는 인생관 가치관으로 우리가 세뇌되어 가지고 우리 인간성이 황폐화되어 버렸지요.  인간미가 없어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다시 말하면 그만큼 죽음이 확대된 것이죠.  그래서 소유가 소비가 팽배한 구미의 소비사회 한 번 가보세요.  거기 인간성의 황폐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땅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항상 인간이 일을 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일을 하면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그만큼 온다.  이 말이어요.  이것은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지요. 

지난번에도 예를 들었지만 교통통신수단의 발달로 우리에게 장소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어요.  우리의 자유를 그만큼 확대함으로 우리의 생명을 확대한 거죠.  그러나 바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해서 생명을 확대한 그 교통통신수단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해요.  그 첨단 통신 장비로 정부가 우리를 감시하고 또 범죄인들이 그 수단으로 우리를 도청하고 그래서 안방에서도 자유롭게 말 못하게 만들어요.  얼마나 속박인가? 그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일을 해서 자기의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명 낙관론이지요.  그래서 그런 줄 알고 한참 가다보니까 죽음의 힘이 더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어요. 

  그러면 문명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무슨 운동이 벌어지느냐 하면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삶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까 문명을 때려 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인 운동이 벌어져요.  낭만주의가 주기적으로 일어나요.  전 세계적으로.   마지막 낭만운동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히피운동으로 일어났지요.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50-60년대 문명 낙관론에 따라 많은 것을 생산해 내서 소비재가 풍부하면 삶이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해 보았는데 그것이 전쟁의 수단으로 월남전쟁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죽음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연공해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원고갈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젊은이들이 이런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거기 구원이 있습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려고 할 때 이것을 뭐라고 그래요.  인본주의.   일을 해도 삶과 죽음에 변증법적인 실제의 쇠사슬에 묶어 있어요.  일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확대되지 않고 그냥 죽음만 있겠죠.  자연으로 돌아가면 다 굶어 죽음만 있겠죠.  그러니까 일을 해야죠.  일을 해도 항상 죽음의 인연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생명 죽음병에 든 생명을 얻는 거여요.  그것이 왜 그래요? 사단의 나라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어요.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에게 충성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여요. 

  그러니까 사단의 통치아래 아담과 세상이 떨어짐으로 이 사단의 통치아래 죄악과 죽음의 통치아래 떨어짐으로 이 세상 속에 뭐가 있어요.  죽음이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일을 해 보았자 죽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 타락한 질서 속에서 아까 말한 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없이 일을 해야되요.  뭐하기 위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일을 하면 죽음이 없는 생명이 아니고 항상 죽음을 동반한 생명.   이런 상황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안전하고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인 양 생각을 해서 어떻게 해요? 우리 한국말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지요.  그래서 한국의 40대가 가장 많이 죽는다지 않아요.  전 세계적으로.   왜 그래요? 죽어라고 일을 하니 죽지요. 

  그런데 왜 죽어라고 일을 해요? 그만큼 생명이 확대할 줄 알고 더 나은 안전 더 나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양  환상이 우리 앞에 있는 거여요.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많이 벌면 더 많이 안전하고 더 많은 자유와 쾌락을 누릴 수 있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어요.   그런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놓인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시작하신 거여요.  하나님의 구원사가 시작이 되는 거여요.  이 세상이 다시 말하면 죄악과 죽음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심히 아름답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거여요.  무슨 일을 ? 구원의 역사 구원의 일을 하신 거여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으려다가 깜빡 잊고 안 읽었는데 요한복음 5장 이야기 알죠.  예수께서 안식일 날 베데스다 못가에 누어 있는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그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시비를 하고 왜 안식일 날 일을 하느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해서 일을 하게 하느냐? 이렇게 시비를 하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답을 해요.  1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아요? 안식일에 일하신다 이 말이어요. 

  유대 랍비들 간에 토론하는 신학적인 주제 하나가 창세기 2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했으니 진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시니 안식하느냐? 이것이 토론의 주제였어요.  그런데 안식일 날도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안식일 날도 아이가 태어나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안식일 날도 일하신다.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거두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안식일 날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일은 다 쉬고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대권 생명을 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 이 일만을 하신다.  이런 식으로 타협하는 그런 대답을 했어요. 

  그러나 예수는 훨씬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요.  무슨 일을 ? 생명을 주시는 일 구원의 일을 계속하셔요.  왜? 이 세상이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일을 하시느냐? 죄악과 죽음의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그의 나라 그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폄으로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임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창조주께서 하나님 노릇 해주심으로 더 이상 자기 스스로가 자기 하나님이라고 환상하고 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 살도록 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했어요.  그래서 이 고장 난 창조를 고쳐서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을 계속하신다.  이말이어요.  그것이 언제 완성이 되냐면 종말에 완성이 되어요.   이 종말은 그러니까 구원의 시대죠.   이때에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완전히 종결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다시 한 번 온 창조가 심히 좋은 상태가 되는 거여요.  이것을 재창조라고 해요.  그 때 진정으로 안식이 있죠.  그 때는 온 피조물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차죠.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없는 거여요.  거기에 하나님과 그의 피조세계가 전체 안식이 있는 거죠. 

  그래서 안식일은 종말론 태초적 개념이면서 종말론적인 개념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온 세계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게 될 때 거기에 안식이 있는 거여요.  온 피조세계가 다시 한 번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덧입어서 살게 되는 때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과 그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상태가 될 때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는 거여요.  하나님께서 그 종말에 안식을 위해서 계속 일하라는 거여요.  계속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 사단의 통치를 꺽고 자기의 통치를 세워 가신 거여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세요. 

  자 그러면 여기 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의미는 무엇이겠어요? 이것이 한 편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에 안식일을 소망하라 그런 말이어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그리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 됨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그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하라 그런 말이어요.  우리가 일하는 행위를 뭐라고 해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행위죠.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죽음의 이면이 있는 생명 밖에 가져다 주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말이어요.  그것은 다른 말로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때 까지는 우리는 사단의 통치아래 타락한 질서속에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엿새 동안은 우리가 일을 해야죠.  이것이 타락한 창조의 질서여요. 

  그러니까 우리가 엿새 동안 일을 해요.  일을 해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밖에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해야지요.  그러나 일을 한다고 해서 항상 생명만 오느냐? 그렇지 않고 항상 죽음이 같이 옴으로 우리가 안식일을 망각하고 안식일이 없이 살면 바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가 내 스스로 일을 해서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그런 환상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데 하죠? 그 환상에 젖어 있으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일을 해서 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을 하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그러나 아까 이야기한대로 죽는다고요 죽어.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 4계명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 살기 때문에 일을 해서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로 해서 항상 죽음이 없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이죠.  엿새 동안은 그렇게 살더라도 하루는 그렇게 사는 삶의 태도를 쉬고 지양하고 일을 중단하고 생업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으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을 하라는 말이어요.  그전에는 또 무슨 소리냐면 그 엿새 동안만의 하루 그렇게 신앙고백하면 그 다음 엿새 동안을 그 신앙고백아래 살라 그 말이어요.  다음 엿새 동안도 안식일을 지킨자로서 살라 그 말이어요.  아까 내가 이야기했죠.   안식일을 모르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는 삶이어요.   왜? 일을 해서 자기가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것으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 어떻게 하겠어요.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려고 할 것 아니어요.  즉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면 그만큼 생명이 더 확대될 것 같은데 그만큼 확대될 만큼 죽음이 더 확대 되요.  그래서 계속 죽음 속이어요.  더 큰 죽음 아래 빠지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엿새 만에 하루씩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뭐라고 그럽니까? 나의 안존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신앙고백을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 의미여요. 

  그런 신앙고백을 엿새 동안에 한 번씩 하는 사람들은 그 다음 엿새 동안을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을 하면서도 어떤 태도로 일을 해요.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로 일을 해요.  다시 말하면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를 사랑하심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달렸다.  그런 자세로 엿새를 일을 하면서 사는 거여요. 

  그런데 일을 하면서 안식일을 모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는 그런 자세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산다고요.  죽어라고 일을 해요.  왜? 그 사람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어요? 소비와 소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더 안전한 것이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행복한 것이라는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어요.  인간성은 더 황폐되고 이웃과의 관계는 더 파괴되고 건강은 더 나빠지고 그래서 스스로 죽고 그 사람은 죽음을 더 퍼뜨려요.  공해의 상태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고 이런 상태로 죽음을 더 퍼뜨려요. 

  반면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로서 엿새를 산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세로 엿새를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내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일하며 나의 안전과 생명을 얻어야 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나의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내 일의 열매가 아니고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우선 자신의 일 자신의 힘을 절대화하지 않아요.  그것을 상대화해요.  그러기 때문에 우상숭배로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일을 선택할 수 있죠.  이것이 더 생명을 북돋우는 일인가 아니면 죽음을 북돋우는 일인가? 일의 종류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수 있죠.  그냥 산업화만 한다고 해서 생명이 더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다 죽게 되었어요.  도대체 인간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타락한 질서속에서의 안전과 행복을 최대로 확보하는 것일까?

  벌써 60년대 70년대부터 여러분들 로마클럽의 이름으로 모인 지혜로운 자들이 뭐라고?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 보다 더 성장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더 갖다 주고 안전과 행복을 더 많이 갖다 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많이 가져 오니까 이제 어떻게 하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아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삶의 스타일을 변화하고 무조건 많이 갖는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안전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뭐하자고요? 좀 단순한 삶을 개발하고 여러분들 나 지금 회의가 많아요.  스스로도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이 엄청난 독가스를 마시면서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여러분들 회의 안 납니까? 차라리 저기 어디 시골에 사는 것이 서울에 살아서 돈 많이 버는 직장 애들 교육하기 좋고 뭐 어쩐다고 해서 다 서울에 살지요.  서울에 살면 삶이 확대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우리 독가스 마셔서 내일 모래 죽는다면 무슨 확대여요.  차라리 시골에 살아서 맑은 정신으로 연구를 하면 내가 학교 대학이라는 직장 안 갖는다고 해도 그래서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는 적어지더라도 나도 건강하고 인간성이 더 풍부해지고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도 생명 확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엿새 동안 살면서도 일의 종류에 대해서도 선택할 여유가 있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비판적으로 생각할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해서 이 타락의 질서 속에서도 그래도 죽음 보다는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삶의 방식인가? 일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역하는 자가 되요.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려는 그런 운동에 동참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킴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서 그냥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가 일을 해서 내 힘으로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런 삶을 사는데 그런 삶은 결국 생명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죽음에 의해서 압도되는 거여요.  그것이 올바른 삶의 방법이 아니라는 거여요.  그래서 적어도 하루는 그런 삶의 방식을 지양하고 그러니까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라고 그랬어요? 첫째로 생업을 쉬라고 그랬어요.  자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 행위를 멈추고 나의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하는 것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로 부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하나님의 역사의 주되심 하나님의 구원자 되심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그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거여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요새 우리가 쓰는 재충전이라는 말로도 괜찮겠죠.  일생을 그러니까 일하는 다음 엿새 동안도 그런 신앙고백으로 살라는 말이어요.  안식일을 지키는 자 곧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 달렸다는 그 신앙고백으로 그 자세로 살라는 말이어요.  그 자세로 살면 어쩐다고요? 거꾸로 그 자세가 없으면 어쩐다고요? 한마디로 죽어라고 일해서 죽음.  그런 자세로 살면 이 타락의 질서속에서도 우리가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죽음 보다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일을 하면서 그런 자세로 일을 하면서 살게 되는거여요.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여요. 

  그러니까 구약에 뭐라고 그랬어요? 안식일을 안 지키면 어쩐다고요? 죽지요 죽어.  그래서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 거여요. 

  자 그런데 예수는 뭐하러 오신 거여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 분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에 우리 구원이 완성이 되어요.  그래서 심히 좋은 상태가 되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안식을 갖게 되는 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이 무슨 대목입니까? 예수는 자기와 함께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기 의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 벌써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거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뭐라고 그랬죠?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동댕이쳐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롬1:18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아담이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내버린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내버리지 않았어요.  기쁜 소식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전체 내버렸으면 거기에는 더 이상 구원과 생명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바울의 복음이 뭣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 주셨다.  그것이 기쁜소식 아닙니까.   그것이 바울의 신학언어로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바울은 롬1:16절에 뭐라고 그럽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 그 복음은 뭐라는거여요? 무엇이 복음이라는 거여요.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기본적으로 관계론적인 개념이어요.  관계의 신실함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신실하게 지키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세상을 창조하실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한 거여요.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들을 지어 가지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정할 때에 이 피조물들에게 약속한 거여요.  무슨 약속을?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슨 의무를 증거해요? 그 창조주에 의지하고 순종해 살도록 그런데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 의지하지 않겠다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는데 하나님께서 나도 몰라 해버리면 하나님도 불의한 거여요. 

  의란 말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  관계에 신실함.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창조 중에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함으로 인간은 불의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말이어요.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는 거여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뭐라고 선언하는 거여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다 그것을 신학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기쁜소식이 창조주 그러기 때문에 초월자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바울의 언어로 롬 1:18절의 언어로 나 몰라라고 내동댕이 쳐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이 창조 때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셨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복음이라는 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 피조물 전체에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기쁜 소식이어요.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 거지요.  이제 우리에게 창조주 초월자의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  바로 그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시행하는 거여요.  그것을 예수께서 선포하고 복음이라고 하나님이 통치하심 그래서 우리를 사단의 통치에서 건져내심.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  우리를 내동댕이 친게 아니고 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꾀에 인간의 뜻에 내버려두면 죽음 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운데 오셔서 그의 구원의 통치를 폄으로 우리에게 끝까지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이 복음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이 통치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심으로 시위했는데 실제가 되게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어요? 안식일의 범주로 말하면 태초의 안식일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병든 세상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자 이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의 형태로 시위하시되 특히 안식일에 하셨는가를 우리가 알게 되었어요. 

  자 이제 여기 지금 안식일 날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뭐 하러 모였어요.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더불어 있을 그 안식을 고대하는 의미로 그것을 간절히 바래서 기도하는 의미로 여기 모였어요.  그런데 지금 손마른 자가 앉아 있어요.  또는 중풍병자가 앉아 있어요.  이것은 지금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의 극적인 표현이어요? 안식일이 더 이상 없음 다시 말하면 빨리 하나님의 통치가 사단의 통치를 꺽고 완성이 되어 종말에 안식이 있어야 될 것임을 절규하는 거여요.  그 상황에서 예수가 그 사람을 고쳐준다고 그랬어요.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어요.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는 자로서 곧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분으로서 바로 이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병든 세상을 고쳐서 죽음아래 놓여있는 피조세계에서 죽음을 몰아냄으로서 이 죽음의 힘이 손마름으로 나타났는데 38년 중풍병으로 나타났는데 또는 삭개오 같이 도덕적인 병듦으로 나타났는데 이 죽음의 힘을 몰아냄으로서 종말에 안식을 가져오는 자임을 거기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dramatic하게 표현하는 거여요.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자기가 안식을 가져오는 분 진정한 안식일이 안식이 되게 하는 분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사단의 통치로부터 건져내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데려옴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을 있게 하는 분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주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친 거여요.  예수의 많은 가르침과 그 행위들은 상당히 드라마 극에 대한 센스를 가지고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어요.  그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극을 상징행위를 많이 하시고 요새말로 하면 데모를 많이 하셨어요.  안식일 날 병고친 것도 하나의 데모여요.  오늘 우리가 하는 최후의 만찬도 하나의 극이어요.  효과적인 메세지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연극. 

  자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주로 병자를 고쳤다.  이 초대교회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그 제자들은 한 동안 유대인들의 안식일 오늘 우리의 월력으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 해짐으로 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어요.  유대 관례로 말하면.  그 안식일과 그 다음날을 주일이라 해서 예수의 부활의 안식일 다음이었으므로 부활한 예수를 만남을 기념하는 안식일 다음날 양일간 예배 모임을 했던 것 같아요.  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는 나중에 안식일의 의미가 안식일 다음날 주일로 합류되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을 지키는데 그것은 신약적으로 참 잘한 일이어요.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종말의 구원의 성취에요.   그래서 아까 출애굽후 안식일은 무슨 의미를 갖는다고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의미를.   출애굽의 구원은 무슨 의미로 해석이 된다고요? 첫 창조의 회복으로 해석이 된다고 그러지요.  신약성경에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설명을 하고 이것을 뭘로도 설명을 해요? 첫 창조로도 설명을 하지요.  그래서 가령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누구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하는 고전 5:17절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에게는 새창조가 일어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새 창조라고 그래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새 창조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역사이해에서 그래요.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역사의 원칙에 따라 그래서 출애굽의 구원을 첫 창조의 회복으로 보고 곧 안식일이 바로 태초의 안식일의 회복으로 의미를 가졌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주의 날. 

   부활하신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 ‘주’란 말이어요.  주라는 칭호는 가장 기본적으로 무슨 뜻이냐면 부활하시어 하나님께 높임 받은 분으로서 예수를 주라고 지칭해요.  주라는 말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다 상호교환 용어로 쓰는 칭호들이 아니고 다 의미가 좀 달라요.  쓰임세가 달라요.  그런데 주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았다는 말 그래서 세상을 통치하는 분으로서의 예수를 주라 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주의 날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태초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뭐라고요? 창조라는 category를 쓴다고요.  곳곳에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쪽에서 완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이미 일어남 미리 주어짐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 그리고 그 때에 있을 안식이 미리 주어짐 그래서 요새 한국 신학자들이 지어낸 새 줄기 새 신학언어가 ‘선취함’ 이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나온 말 이어요.  한국말 번역으로 미리 취함 선취함 저도 한동안 한국에 와 가지고 신학을 안 해서 신학 용어들이 참 생소해 가지고 선취란 말을 쓰기 어려웠어요.  잘 안 써 지더라고요. 

  선취 그래서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종말의 구원의 성취로서 그러기 때문에 종말에 주어질 안식의 성취로서 이해가 되는 거여요.  그래서 주일에 부활을 기념하는 것과 원래 안식일을 합류해서 우리가 주일날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자 그러면 지난 번에 우리가 안식일에 대해서 토론했지요.  지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왜 병자를 많이 치유하셨는가 순전히 역사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만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그러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안식일의 원칙을 올바르게 지키는가? 그런 질문들이 다 있을 거여요.  지난 번에 다들 질문하고 토론해서 아주 간단히 한 마디만을 하고 지나면 어떻게 지켜야 되겠어요?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있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종말에 이 구원이 성취되어서 우리에게 안식일의 축복이 그만큼 더 확대되어 체험되게 되었다는 것.   예수의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심.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함이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치유로 나타남.   치유가 뭐라고요? 우리를 온전케 함.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온전케 함으로 나타남.  그것을 우리가 기념하고 그것이 빨리 완성되기를 고대하는 모임이 오늘 우리의 모임이어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가 그 주권이 빨리 완성되도록 그래서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빨리 종결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완성되도록 예수께서 모든 원수들을 다 극복한 후에 어쩐다고요? 바울이 고전 15:25-28절에 그때에 그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린다고 그때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것 위에 궁극적인 의미로 존재하게 됨.  그때에 완전한 구원 완전한 치유.  인류와 세상의 온전케 됨.  안식이 있죠.  그것을 빨리 오시기로 기도하는 모임이 첫째 우리 모임이지요. 

  그래서 초대교회에 그런 기도가 뭐였다고요? 마라나타 주여 오소서! 그 다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으니 구원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의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도 하고 그런 말로 표현하는 말에 대한 체험.  그것에 대한 확신을 다시 받고 확신을 어떻게 받아요? 설교로 받고 성경공부로 받고 지금까지 성경공부를 뭐하러 합니까? 바로 그것에 대한 새로운 확신 그 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 확신에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거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그의 전능함으로 그의 전지함으로 그의 온전하신 사랑으로 끝까지 하나님 노릇 해 주실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그 분께 의지하고 순종해 살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해야겠죠. 

  우리가 하루의 생업을 쉬고 다음 6일을 생업에 종사하면 살되 그 신앙고백의 자세로 산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내게 달렸다.  내 손에 달렸다.  내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  내가 죽어라고 일을 해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내게 안전이고 행복이다.  이런 자세가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   그에 뜻에 따라 그 일을 해야 할까? 저 일을 해야 할까? 악을 도모하고 죽음을 도모하는 일 보다는 그래도 생명을 도모하는 일을 해야 되고 일을 하되 어떤 자세로? 죽어라고 일을 해서 죽은 자세가 아니고 과연 정말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생명을 북돋우는 길인가? 를 비판적으로 생각을 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신앙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비판하게 만들어요.  그런 자세로 살아야죠.  그것이 안식일을 지킴이죠.  안식일을 지킴이 무슨 말이라고요? 아무 것도 안한다.  그런 말이 아니어요. 

  지난 번에 그것에 대해 충분히 토론했으니까 아무 것도 안한다고 생각하면 유대인식으로 무엇에 빠져요?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 가지고 위선에 빠져 가지고 신학적인 의미는 모르고 우리 삶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보다는 도리어 얽어매는 일만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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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6) 눅12장22-32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내재성 - 김세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내재성

 

 

  눅 12장 22-3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바보부자에 대한 비유를 하시고 곧 자기 소유의 넉넉함에 만족해서 곳간에 잘 곡식을 많이 쌓아놓은 것을 두고 이제 19절에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니라’ 하는 부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뒤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렇게 맘몬을 숭배하면서 맘몬을 의지하고 맘몬에게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는 이런 우상숭배의 삶을 경고하시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서 하나님께 바라고 사는 삶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2절 부터 교독합시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가르치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홥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세상 백성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하겠어요.  그런데 중간에 쉼이 있어 가지고 벌써 지금까지 생각했던 점들이 무엇이었는가 잊어버린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아서 간단 간단이 제목만 요약을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고 선포했다는 것.  미래에 오는데 곧 온다고 선포했다는 것.  그런데 곧 오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구체적으로 세상적인 이해를 비유로 삼아서 자세히 그리기 보다는 그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함이어서 하나님의 그 삶을 얻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신적인 삶을 얻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 결핍이 없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 없는 것이다. 


  고난들이란 죽음의 증상들인데 그런 것들이 없는 삶이다.  그렇게 주로 가르치시면서 그 점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쓰신 아주 많이 쓰신 비유들이 하나는 잔치의 비유이고 하나는 상속의 비유를 많이 쓰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잔치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풍요로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더 이상 결핍이 없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 없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짐이다.  또는 하나님 아빠의 무한한 부요를 상속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같은 그림이죠.  같은 진리를 말씀하고자 하는 그림이죠. 

  창조주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부요함을 나의 아빠의 것으로 상속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결핍속에서 그 결핍으로 부터 오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결핍과 고난으로 부터의 해방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삶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삶을 성경적인 숙어로 말한다면 영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은 곧 그 영생 신적인 삶 하나님의 삶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주로 설명을 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오고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와 같은 영생의 축복이 곧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미래적으로만 설명을 하지 않고 지금 현재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기서 벌써 실재가 되어 간다고 설명을 했다.  지난 번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벌써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듣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벌써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와서 우리에게 주어지리라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벌써 실현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이런 일들을 많이 하셨다.  그것은 특히 안식일 날 그 일을 많이 하심으로 태초의 안식의 온전함.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풍요로움 에덴동산의 낙원의 그 풍요로움 삶을 누리게 됨.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초의 원래 안식일이 회복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주로 안식일 날 병 고치는 일을 많이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이 태초에 온전한 상태로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는 것이다는 것을 시위하려고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지금 문제가 하나 발생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 그랬는데 또 벌써 지금 실현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금 벌써 실현이 된다고 했는데 시간적으로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또는 조화 되는가 미래에 온다고도 가르쳤고 지금 실현된다고도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한동안 많이 토론을 했어요.  금세기 전반부 까지는 많이 토론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 하는데 있는가 아니면 현재 실현이 된다고 하는데 있는가 이런 것을 많이 토론을 했는데 1950년대부터 금세기 중반부터는 학자들이 대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어서 일치를 보았어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도 가르쳤고 현제 실현이 된다고도 가르쳤는데 미래에 온다는 것은 미래에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를 통해서 지금 현재 실현된다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가 이제 출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범! 그래서 출범과 완성이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 된다.  그래서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올 것이며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미 출범했다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다고 할 수 있고 지난번에 우리 본 바와 같이 눅 7장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 가운데 이미 임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원래 유대인들의 종말론을 그리스도께서 더 자세히 가르쳐줌이지요.  유대인들은 원래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에 의하면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통치하는 이 세상 그러니까 사단이 죄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이 세상 끝에 하나님이 오신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를 보낸다.  그래서 오는 세상이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출범시킨다.  이렇게 봤어요. 

  그래서 두 세상 두 세대로 나누어서 생각을 했어요.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죄악과 고난으로 통치한다.  그래서 이 세대는 사단을 우상들을 통해서 실제로는 사단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득세하는 세상.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고 못살게 구는 세상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셔서 이 역사속에 오셔서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그러니까 이 세대를 종결시키고 오는 세대를 출범시켜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이 된다.  의와 생명의 통치가 이루어 진다.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언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의 통치를 이룰까 빨리 좀 그러셨으면 지난번에 우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 공부할 때 유대인들의 그 기도하나를 제가 소개했죠. 

  우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내용적으로 많이 연결되어 있는 기도라고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에 유대에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하나 소개했지요.  주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의 생애에 너희의 날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곧 세우시기를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간절히 묵상했던 것과 같이 이 이방인들을 통한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까지이니이까?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를 지체하셔서 우리를 이 고난 가운데 두시렵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렵니까? 하고 하나님께 탄식했죠.  시편과 선지자들이 그것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렵니까? 라는 탄식으로 가득 차 있죠.  십자가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는 기쁜소식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언제까지나이까 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알마나 기쁜소식이어요.  하나님의 통치가 곧 온다.  사단의 죄악과 고난의 통치가 금방 꺽고 의와 생명의 통치를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이어요. 

  곧 오는 것만이 아니고 지금 벌써 왔다.  지금 벌써 출범을 했다.  나의 말씀선포를 통해서 그리고 나의 말씀대로의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나를 통해서 실현됨이 어떻게 나타나요.  병자를 고치고 치유함으로 나타난다고 그랬죠.  죄악과 고난의 통치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 실증된다고 그랬지요.  삭개오 같은 사람이 온전해 지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손마른 자가 문등병자가 깨끗해지고 혈루병자가 깨끗해지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그 통치가 언제 완성이 되냐면 미래에 완성이 된다.  지금 현재 실현되기 시작했어요.  출범을 했어요.  미래에 완성이 된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어요. 

  이것을 우리가 다음에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겠는데 우선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그리스도께서 흔히 쓰는 동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동사여요.  ‘오다’ 아주 독특한 어법이어요.  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여기 오늘 읽은 본문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주신다고 하죠.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하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  이것도 예수의 독특한 어법이어요.  이런 어법이 구약이나 유대교의 문서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어법이.  

  그러니까 또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고 그래요.  인간이 하는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또 하나님 나라를 받아요.  반면에 이것의 의미 어법의 함축 의미를 더 확실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법과 비교나 대조를 해보면 좋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말을 많이 쓰죠.  우리 기도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루기 위해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해야 된다고 하죠.  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선교사를 보내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고 이런 말을 우리가 많이 하죠.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런 말을 일체 쓰지 않아요.  복음서들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든지 확장하다라든지 하는 말을 쓰지 않아요.  왜 그런가? 우리가 금방 알 수가 있지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동사들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여요.  그리고 그것의 은혜성에 대한 강조여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에 대한 강조 하나님 나라가 인간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그들의 힘으로 그들의 재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에요.  초월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어요.  우리 인간들이 이루면 그것은 내재적인 것이지요.  이 우주의 내제적인 현실 그것이 아니고 이 우주 밖에 계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초월자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에요. 

  여기서 주신다 받다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느냐하면 그 말이 그래요.  이 말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느냐면 상속의 뜻이 들어 있어요.  우리가 그 상속을 받는다.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거여요.  우리가 이미 여러분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의 탕자의 비유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 다시 아들로 회복되고 아들로 회복이 되면 그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회복이 되는 거여요.  그래서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들어감.  탕자의 비유가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데 대한 아주 훌륭한 비유지요. 

  이렇게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했어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룬다든지 또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확장한다든지 이런 언어를 일체 안했다고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인간들의 내재적인 산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언어를 일체 안했다고요.  왜냐하면 이것이 전에도 한 번 설명했지만 구원의 조건들이어요.  이 두 가지를 갖춘 것이 구원이어요.  거꾸로 말합시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초월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것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어요.  전에도 한 번 설명을 했지만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전체를 한 번 더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마당이니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는데 이른바 세상의 고등 종교들의 신관 신론들과 거기에 따른 그들의 구원론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비교해 보면 이 진리를 우리가 금방 깨달아요. 


  인도종교들은 원래 인도의 힌두교라든지 아주 쉽게 말해서 개혁 힌두교라고 볼 수 있는 불교라든지 이런 종교들의 신론을 뭐라고 그래요.  범신론이라고 그래요.  범신론이라고 그러죠.  범신론은 그러니까 힌두교나 불교는 범신론을 가진 종교여요.  그 종교에서는 신의 초월성을 부인해요.  하나님의 초월성.   우주 밖에 무슨 초월하는 신이 있는게 아니어요.  우주가 신이어요.  우주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합일신이다 그렇게 보는 거여요.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하나의 신의 표상들이어요.  이 표상들은 사실은 그 신 우주의 본질적인 신의 다양한 나타남의 형상들이기 때문에 그 형상들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다만 그렇게 나타날 따름인 그러니까 환상에 불과한 것이어요.  불교용어로 말하면 삼라만상이라는 것이 실제가 아니고 실제신의 다양하게 나타날 따름인 표상들이고 그러기 때문에 환상들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뭐 이렇게 아름다운 것과 추함 이렇게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다 헛된 나눔이어요. 

  선이라는 것도 악이라는 것도 없고 무슨 추악함이라는 것도 없고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없고 그런 것이 다 하나의 신의 다양한 표출 나타남에 불과한 거여요.  그러니까 무슨 나무 사람 소 돼지 이런 것들이 다 하나의 신의 다양한 표출 나타남이다.  이런 신론을 가진 그러니까 신의 초월성을 부인한 신을 가진 종교는 자연히 구원론이 어떻게 설정이 되냐면 자력구원론으로 설정이 되어요.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해야 됨.  왜냐하면 우리를 우리 밖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무슨 신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가 그 신의 하나의 표출이어요.  그러니까 우리 밖에 우리 보다 크신 이로서 문제를 해결해줄 그런 신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문제가 있다면 자기 힘으로 해결을 해야 되는 거여요.  자력으로 해결해야 되는 것이어요.  어떻게 해결을 하느냐 지혜 깨달음이죠.  깨달음을 터득을 해서 우주의 본질인 그 신과 다시 합일됨을 통해서 또는 선행을 통해서 주로 이 두 가지를 구원의 방도로 삼지요.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신비적 요가라든지 참선이라든지 이런 심신의 단련을 통해서 우주의 본질과 합일되는 신비적 체험을 하는 것이죠.  그런 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그러는데 자력으로 입니다.  자기 힘으로 이런 자력구원론이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자력구원이 가능하다면 인간이 원래 구원받아야할 이유도 발생하지 않죠.  우리가 제한 된 존재이고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고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고 하기 때문에 고난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시간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우리의 제한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자력구원론이란 구원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여요.  이것 인본주의 사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거지요. 

  반면에 또 이슬람교는 이런 종교들의 신론을 이신론이라고 그래요.  이신론은 신의 내재성을 부인해요.  그가 은혜로 우리 가운데 오심 내재성을 부인해요.  그러니까 이신론은 신의 초월은 있으나 신의 은혜로 이 세상에 오심.  내재성을 부인해요.  이슬람 신관에 의하면 알라가 세상을 창조한 분인데 그림으로 말하면 저 하늘 꼭대기에 혼자 고고히 앉아 있는 거여요.  그래서 이 타락한 세상 속으로 오시지 않아요.  그래서 이슬람 나라 가보세요.  회교나라 가면 하루에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회교사원의 높은 탑 있지요.  미나베트라고 하는데 거기에 이 사람들 기도하러 오라고 불러요.  그런데 그 부름이 아라비아어로 이슬람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을 시작한다고 그래요.  그것이 뭐냐면 두 마디여요.  알라는 전능하시사. 

  둘째로 그 다음은 제가 모하멧이 그 선지자이다.  이슬람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이 두 마디여요.  알라는 전능하다 위대하다.  그리고 모하멧이 그의 선지자다.  그런데 알라는 전능하시다는 말은 신의 초월성이 더 강조.  그것이 너무 강조되어 가지고 그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 속으로 오시느냐? 오실 수 없다.  그래서 이 내재성을 부인한다.  이런 신관을 가진 종교는 그러면 구원론이 어떻게 성립이 되냐면 아주 숙명론으로 빠지든지 창조주 알라가 우리 모두를 창조할 때 원래 모두를 결정한 숙명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짐.  결정론이지요.  운명론이지요.  그래서 구원받기로 한 사람들은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니고 이렇게 아주 숙명론으로 빠지든지 그래서 이슬람 사람들이 말끝마다 하는 소리가 알라의 뜻대로 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주 깊은 숙명론에 빠져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든지 그런데 깊은 숙명론에 빠져 있으면 인간의 위로가 없다고요.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구원에 대해서 논해야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사람들도 자력구원론을 논할 수 밖에 없어요.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얻어서 또는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감.  왜? 이신론에 의하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초월자는 계시는데 그가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여기서도 구원이 인간이 스스로 이루어 가야 되는 거여요.  아까 여기 범신론의 신론에 있어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자력구원론으로 빠져들듯이 반면에 이신론에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있으나 그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지 않으므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야 되요.  그렇게 되는 것이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그러나 자력구원론이란 사실은 불안한 이야기라 구원이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여요.  보다시피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그 신은 초월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어야 하며 그 분이 이슬람 같이 혼자 저기 한 꼭대기에 앉아서는 소용이 없어요. 

  그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야 되요.  내재성과 초월성 또는 신의 초월성과 은혜성과 내재성 이것은 그러니까 진정한 구원이 있기 위한 조건들이에요.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여요.  이것이 복음이라 이 말이어요.  이것이 왜 기쁜소식이냐? 아주 쉽게 말하면 초월하셔서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다.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그 무지함 속에 우리의 그 죄악스러움 속에 우리의 고난 속에 우리의 죽음 속에 방치해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오셔서 그 분이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통치로 베푸신다.   이것이 기쁜소식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로 시작해서 막 1: 15절에서 마가는 그리스도의 선포를 무슨 말로 요약해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가 복음 됨이 기쁜소식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제한된 우주속에 우리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그냥 방치되어 버린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지요.  우리보다 크신 우리를 지으신 무한하신 하나님 초월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다.  그 분이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통치를 베푸신다.  이것이 기쁜소식이어요.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기쁜소식.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제기한 질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첫 답은 뭐여요.  하나님 나라가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들은 다들 수동적인 의미이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부인하는 말이어요.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 나라가 표상하는 상징하는 구원이란 것이 인간의 자력에 의한 것일 수 없다.  그 말이어요. 

  그러므로 모든 인본주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은 모든 인본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라고도 볼 수 있는 거지요.  지난 번에도 설명을 했습니다만 모든 인본주의는 자력구원론은 항상 두 가지를 구원의 방도로 삼는다고 그랬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지식 하나는 선행 이것에 근본적으로 하나를 덧붙인다면 신비적 합일의 체험 심신의 수양을 통해서 신비적으로 우주의 본질과 합일한다는 그런 체험 이런 것을 주로 지혜와 선행을 구원의 방도로 삼는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많이 홀린다고 그랬어요.  왜 그러느냐면 인간이 지혜를 잘 개발하고 선행을 잘 개발하면 정말 삶이 확대되는 것 같고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전에 작년 이맘때도 특강으로 설명을 했지만 인간들의 과학의 발달로 자연에 의한 관찰로 얻은 지식 과학적인 지식 그것의 지식의 활용을 통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교통통신수단이 발전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확대되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고 우리가 얼마나 장소적 제약을 극복하고 우리가 얼마나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우리가 얼마나 삶이 확대되었어요.  그것으로 계속 지식을 개발해 나가면 우리의 문제들을 우리가 다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환상을 우리에게 주어요.  그러나 이 인본주의적인 방법은 항상 삶만 확대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또 그만큼 확대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산업혁명이 우리로 하여금 농업혁명이 우리로 하여급 배고품 그리고 소비적인 결핍으로 부터 해방을 가져와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확대했으나 그만큼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말미암는 인간성 황폐를 가져오고 그만큼 자원고갈 공해 이런 것으로 죽음이 확대되는 거여요.  교통통신수단의 발달이 우리로 하여금 장소와 시간적인 제약으로 부터 많이 해방을 해서 우리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풍부하게 확대했지만 동시에 그 첨단 통신수단의 방비가 우리를 시간과 장소의 제약으로 부터 자유롭게 하는 그 첨단 통신수단의 장비가 우리 모두를 속박하는 거여요.  우리 모두를 속박하는 죽음이 그만큼 확대되었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전화가 우리를 속박하고 첨던 통신수단의 장비가 우리를 일거수 일투족 감시함으로 인한 속박이 일어나고 이렇게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개발하고 선행을 개발해서 구원을 이루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과 죽음의 삶이 확대되는 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변증법적인 실제만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지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의 이면이 없는 온통 순수한 삶 덩어리만의 축복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력구원론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도대체 초월 온전한 자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루어야 된다는 강조하는 신학이 있죠.  이른바 요새말로 하면 해방신학이라고 하지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역사의 과정속에서 투쟁해서 자유를 확대하고 정의를 확대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어서 이렇게 해서 이 땅에 샬롬을 이루어야 된다.  그런 것을 우리는 해방신학이라 그러지요.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주신다는 언어를 쓰면서 동시에 제자들더러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너희들의 지혜를 너희들의 선행을 동원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는 것은 크게 말하면 인본주의적인 철학에 대한 선전포고이면서 좁게는 신학적인 맥락에서 말하면 해방신학에 대한 거부이기도 해요.  해방신학에 대한 것이 요새 나오는 것만이 아니고 예수 당시에 아주 절실한 신학이었어요.  왜? 열심당 열혈당의 신학이 사실은 해방신학이었어요.   자기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압제자 로마 사람들과 그들과 결탁한 집권층과 무력투쟁을 통해서 민족을 해방하고 거기에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있게 한다는 것이 예수 당시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열심당이었어요.  그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내세워서 그런 그 인간들의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야 된다고 그래요. 

  예수 당시 아주 절실한 대안이었어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주 인기 많이 얻고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얻었던 운동하나가 열심당이었어요.  거기에 반해서 지금 예수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누구와 누구의 죽음과 생명이 교차합니까? 바라바와 예수의 생명이 교차하지요.  바라바가 누구여요? 바로 이 열심당원이지요.  그러나 우리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가 어떻게 오느냐를 가르치면은 초월에서 은혜로 오기 때문에 해방신학과 같이 예수 당시의 열심당의 신학 같이 또는 오늘날의 해방신학 같이 인간들이 무슨 투쟁을 해서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해방신학은 틀렸고 우리 신학이 옳다.  이렇게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만족케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우리도 보수 경건주의자들도 해방신학 같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신학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여러가지로 많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공로신학으로도 나타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섬김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의 도에 맞게 반대 급부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다.  그런 신학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어요.  그것은 사실 해방신학은 사회구조로 개혁하고 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게 좀 큰 체제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경건주의자들은 그것을 개인의 삶 아주 개인주의적인 평면으로 줄여서 생각한다는 차원만 있지 사실은 똑같이 하나님 나라 구원을 자기 힘으로 얻어 내려고 하는 자력구원론으로 빠져있는 거여요.  또는 우리가 선교도 가끔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회에서 다분히 개인윤리 차원에서 우리가 거짓말 안하고 아주 개인윤리적인 차원에서 아주 소극적인 윤리에서 어떤 음식을 삼가하고 몇 가지 율법들을 잘 지키고 이렇게 해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게 하겠다.  이런 태도를 갖는다든지 이렇게 해서 우리 경건주의자들도 까닥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거슬려서 자력구원론에 빠질 때가 참 많아요.  우리가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아주 근본적으로 잊지를 말아야할 것이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확장한다는 이런 말을 전혀 쓸 수 없느냐 예수는 안 썼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그래도 쓸 수 있지 않겠느냐 아마 쓸 수 있을 것이어요.  어떤 맥락에서? 선교맥락에서. 

  가령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보내시고 70인 제자들을 보내시고 나중에 그의 교회전체를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하셨지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도록.  교회는 보냄 받은 자들의 공동체여요.  뭐 하러 보냄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사는 동네에서 또는 직장에서 먼 나라에 이르기 까지 보내고 또 우리가 가고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에 믿음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 생기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기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들이 사단의 주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주로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함.  그것이 그들의 사고와 그들의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나타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뭐한다고 볼 수 있어요.  이루어졌다고 실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의 복음전파 우리의 제자도의 삶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삶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  그런 영역이 확대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선교 우리 제자도의 삶 사랑의 행위 이런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여요.  이차적으로 그리스도는 그 말을 안 썼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이런 말을 쓰기는 쓰되 그때 염두 해 두어야할 것은 그것이 이런 해방신학이나 또는 경건주의자들 공로의 신학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서 써야한다.  어떻게 하면 변질되느냐.  하나님의 초월에서 그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신본주의적인 하나님 중심주의적인 신본주의적인 관점을 우리가 망각하면 우리는 이런 해방신학이나 공로주의신학을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적인 신학으로 전락을 해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것과는 동떨어진 생각을 갖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뒤틀리게 되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이루는 삶이 못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실현시키는 그래서 우리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온전함을 맛보게 하는 삶이 못되고 정반대로 죽음을 더 앙양하는 고난을 더 앙양하는 삶이 되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시간에 더 하기로 하겠어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 처음 조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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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7) 마13장31-33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1 - 김세윤

 

 

 

마13장31-33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오늘 같이 묵상할 말씀은 마 13:31-33절 까지 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두 비유를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 하도 오랫만에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어서 이전에 같이 생각했던 것을 다 잊어버렸을까봐 걱정이 되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없고 그래서 한 달 전에 했던 것만 간단히 간추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던 중이었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  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  이렇게 가르쳐 주셨는데 어떻게 오는가를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 그리스도께서 특히 강조했던 한 한 말을 지난 번에 살펴보았어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편에서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온다.  어떻게 오는가? 인간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바벨탑이라 그러지요.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초월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굉장히 강조했어요.  그 강조한 것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같이 쓴 동사들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받고 이렇게 온다.  주신다.  들어간다.  받는다.  주로 이런 동사들을 쓰셨지 인간들이 인간의 힘으로 지혜로 이룬다는 동사는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서 제일 먼저 우리가 강조해야할 것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그렇게 그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의 힘을 갖기 위해서 초월성과 은혜성이 두 개의 조건부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에게 도대체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인간들 밖의 인간들보다 더 큰 신에서 그러니까 완전한 자에게서 무한자에게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초월에서 와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속에 내재해 있는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 그것은 항상 제한된 것이어서 구원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초월에서 은혜로 밖에 올 수 없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온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의 모든 인본주의적인 사고 인본주의적인 문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요.  인간들이 항상 자기들의 현재 문제를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구원을 얻고자 동반하는 두 개의 방편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지혜 지식과 선행이라고 그랬지요.  이것들이 얼핏 보기에는 우리에게 상당히 그럴듯한 면을 가지고 있어요.  지식을 개발해서 우리의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선행을 잘 개발해서 또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인간들이 지식을 개발하고 선행을 개발하면 구원의 상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들은 결국 바벨탑 같은 것이어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어요.  그래서 구원은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점을 굉장히 강조하셨다. 

  오늘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두 번째 요점은 방금 요약한 지난 시간에 묵상한 것과 얼핏 보기에는 상반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어요.  그것은 우리의 역사속에서 우리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자라고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그런 가르침을 여기서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대 묵시문학가들은 하나님 나라가 일시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천지개벽과 같은 변혁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으로 그리기도 하고 예수 당시에 열혈당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를 재건하여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열혈당은 큰 정치적 사회적 혁명을 동방하고 하나님 나라가 올 것으로 보았어요. 

  우선 로마와 같은 외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고 다윗왕조가 재건이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정복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법대로의 통치가 펼쳐져서 자유와 정의가 평화가 일어나다.  이렇게 보았어요.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 그런 식으로 별로 가르침이 없어요.  예수의 재림 때에 예수께서 인자로서 하나님의 천사들과 임할 때에 세상에 큰 갱신이 있을 것을 말하기도 하나 예수의 강조점은 지금 여기서 예수를 통해서 오고 구원의 힘을 발휘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있었는데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큰 천지개벽 같은 변혁을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어떤 정치적 사회적 혁명을 이야기한 것도 아니에요.  한쪽에서 지금 A.  D.  66년에 드디어 터지는 해방운동 해방전쟁 하나님의 통치의 이름아래 로마에 선전포고할 기세로 열혈당 운동이 지금 가고 있는데 예수의 활동을 한 30년쯤 본다면 여기에 하나님 나라 선포운동과 라이벌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운동이 열혈당 운동이라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로마에 대항해 항전해야 할 것을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는 거기에 등을 돌리고 그런 쪽으로 우리에게 해석하게 하는 어떤 사회정치적 경제적 운동의 프로그램도 그런 것은 조금도 제시하지 않았어요.  우리 복음서에 사화경제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서 별로 볼 수 없어요. 

반면에 우리가 방금 읽은 이런 비유들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냐?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땅에 심겨져서 점차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많은 새들에게 깃들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냐? 큰 반죽덩이에 가미되는 누룩 같은 것이다.  가루 서말로 만든 반죽에 조금 가미되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밀 세 말의 반죽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비유에 하나의 비유를 덧붙이면 스스로 은밀하게 자라는 씨의 비유가 있지요.  스스로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자라는 씨의 비유 막 4: 26-29절 그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지금 우리가 본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와 같은 성격의 것이어요.  여기서 세 비유가 같이 가지고 있는 공통성이 무엇입니까? 은밀성이지요.  씨 겨자씨 보일랑 말랑한 씨 은밀성 그 다음에 점진성 점진적으로 자라는 거여요.  또 누룩이 점진적으로 발효해서 누룩덩이 전체를 변화시키죠.  그 다음에 강조되는 것이 무엇이죠? 필연성 .  그러나 겨자씨는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누룩도 필연적으로 온 반죽덩이를 부풀리게 되어 있어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도 마찬가지여요.  그 씨가 땅에 심기우면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왜 씨가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땅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작아서 보일랑 말랑한 미미한 것일망정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나라도 그런 것이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갈릴리 아주 피폐했던 이북의 착취가 심했던 곳에 몇 안 되는 제자들과 여자들을 예수께서 모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유대 땅 전체의 맥락에서 보나 더 크게는 당시 로마 제국의 맥락에서 보나 더 크게는 세계제국의 맥락에서 보나 진짜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의 하나님 나라운동이라는 것은 진짜 겨자씨만한 것이었지요.  서말의 반죽덩이에 비해서 조그마한 누룩 같은 것이지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점차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많은 새들이 깃든다.  많은 새들은 많은 민족들을 표현하는 랍비들의 상징이라고 그러지요.  많은 민족들이 구원의 안식처를 얻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은 복음선포를 통한 선교를 통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선교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지요.  누룩의 비유는 인간과 사회적인 변화 문화적인 변화를 많이 생각하게 하지요.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렇게 예수와 갈릴리 출신의 몇 사람들에 의해 시작이 되었지만 온 세상의 사상과 인간관계와 가치관과 윤리와 제도와 이런 것들을 완전히 변화시켜요.  그래서 그곳에 구원이 있는 더 많은 자유가 더 많은 정의가 더 많은 평화가 더 많은 풍요로움이 있게 변화시킨다. 

  그러니까 열혈당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사들로 스스로 생각하고 무리를 지어서 무기를 들고 로마제국에 대항해서 그리고 로마제국과 결탁한 자들에 대항해서 싸워서 거룩한 전쟁(성전)을 벌여서 다윗왕조를 건설해서 일단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노예문서 부채문서를 다 불질러 가지고 사회정의를 확보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법대로 통치함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본 거여요.  이렇게 본 거여요.  그러니까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히 정치적 사회적 혁명적 프로그램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반대로 그런 것은 별로 없고 틀리게 가르쳐요.  첫째로 지난 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초월성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은혜성을 강조했는데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은혜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그러면 지금 역사 속에서 어떻게 와서 어떻게 실현이 되느냐? 이런 것을 몇 개의 비유들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비유나 누룩의 비유나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같이 되기 위해서 요구하는 전제 조건들이 여기 있어요.  이렇게 말해요. 

  일단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당시 절실한 대안으로 제기 되었던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요.  그렇게 보아야 되어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 거여요.  예수께서는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말라.   그런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  그 대신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생각하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첫째로 부정적으로 말하면 당시의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 부정적인 비판을 담고 있어요.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러면 예수께서 무엇을 전제로 하고 말하느냐.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 

  이런 부름을 받아들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뭐라고 그래요?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그래요.  예수의 제자들은 순종을 전제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통치에서 순종하고 사는 것을 전제하고 지금 예수께서 이렇게 말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  죄를 회개하고 사단의 죄악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나라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예수의 부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말로는 받아들였다고 하고 실제로는 사단의 사주를 받아 사단의 뜻대로 살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면 지금 이야기한 대로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저절로 자란 씨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속에 오고 역사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실현되어 가고 그래서 그 속에 이미 들어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더 맛보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깃들 곳 안식처를 제공하는 구원을 얻도록 하는 그런 힘을 발휘한다 이 말이어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두 가지다.  막 12:28-34절을 보시겠습니까?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와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묻되 모든 계명들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첫째가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라’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두 마디여요.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이어요.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복잡하고 율법이 괜히 복잡해요.  우리 신약성경을 보면 가령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편지에서 이렇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이러지 말라하고 금하는 것도 굉장히 복잡한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자세히 보면 예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두 마디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두 마디여요.  두 마디가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적용되도록 다양하게 나타날 따름이지 복잡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 윤리를 생각한다든지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에 원리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내가 이것을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할 때 원리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 율법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복잡해지고 판단을 못하고 그래요.  우리는 구체적인 삶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는 뜻이 무엇이냐? 내가 하나님께 올바로 드려야할 순종이 무엇이냐? 성경에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어떤 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가르침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삶의 정황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저 때는 저렇게 해야 되고 가르쳐 주지 않아요. 

  옛날의 랍비들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그랬어요.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요.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인가? 아닌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수에 대한 사랑인가? 아닌가? 두가 지만 생각하면 되어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여요.  예수께서 특히 우상숭배는 뭐여요? 맘몬 우상 돈에 대한 사랑 특히 경계한 우상숭배 맘몬 숭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장 크게 훼방하는 것이 돈을 사랑함이어요.  우리가 왜 돈을 사랑해요? 돈으로 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것을 갖기 때문이죠.  돈이 우리에게 안전을 주고 행복을 준다는 생각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 맘몬 우상 돈을 우상으로 섬길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해요.  돈을 더 많이 벌면 할 수 없이 어떻게 되요.  이웃과 착취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갈등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자유가 없어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평화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아까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는데 사실 두 마디가 아니고 한마디여요.  한마디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어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은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그 속게 포함하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으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나의 행복과 안전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고 내가 전적으로 시인하지 않는 한 내가 내 지혜를 동원하고 내 힘을 동원해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고수할 수단을 얻어야 되요.  어떻게? 이웃에 대해 대항해서 나를 주장하고 착취하고 그것은 무엇의 반대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과 반대말.  그러나 내가 나의 모든 안전과 행복이 나의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초월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준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헌신한다.  하나님이 내가 이웃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해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한다.  이런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면 이웃에 대해서 자연환경에 대해서 너그러울 수 있고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두 계명들은 두개가 아니고 하나여요. 

  그런데 그 중에서 우선된 것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어요.  십계명의 제 2계명.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시대부터 우상숭배를 가장 큰 죄악으로 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이 두 가지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두 가지 길을.  열혈당의 길 예수의 길 이 열혈당은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악한자들을 징벌하는 복수전쟁을 통해서 억눌리고 짓밟힌 자들의 한을 푸는 복수전쟁을 통해서 그래서 거기에 좀 더 많은 사회정의를 확보하는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경제적 분배 기구를 만들어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풍요가 확보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게 가르쳤죠. 

  오늘날 그런 가르침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장 체계적으로 가르쳤고 실험했던 것이 공산주의이지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세속화된 형태지만 사실 공산주의가 열혈당의 이데올로기를 세속화한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무슨 사회주의적인 정의 사회주의적인 평등을 말했지만 거기에 무슨 정의가 있었고 평등이 있었고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었고 풍요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으로 힘 있는 놈은 힘없는 놈 억누르고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착취의 원칙으로 삶을 꾸려나가면 사회가 더 발달하고 부가 확대 재생산되어서 결국 가난한 자에게도 조금이라도 더 돌아간다.  이런 체제로 산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구원의 길이 있어요?

  지금 자본주의 세계에도 내부적 병이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나타나 있어요.  그런 것을 길게 논의할 필요도 없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자본주의적 무슨 정치 사회적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고.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조금 피상적인 기독교인들이 손봉호 장로님이 들었던 예 같은 것을 들면서 아니 손장로님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아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 가보면 적어도 3대 부터는 잘 산다.  또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이 더 경제적으로도 낫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 나타나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것을 금방 그러니까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자본주의를 더 옹호하고 지지하는 그런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여야 된다.  이런 식으로 논리적 비약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께서는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라든지 사회제도라든지 무슨 정치적인 프로그램.  반면에 사회주의적 시계추가 한동안은 반대로 돌아 가지고 정말 기독교인이면 사회주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착취하는 꼴을 보고 어떻게 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자기 종으로 인권을 무시하고 부리는 일을 할 수 있느냐.  기독교인은 사회주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이것이 한동안 유행했어요.  지금도 상당히 유행해요. 


   가령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여러분들 독일에 큰 두개의 정당이 무엇입니까? 기민당 이들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에 강조점을 두지요.  사민당이 있지요.  이들은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요.  두 정당이 서로 다투지요.  그 속에서 이제 많이 토론해요.  누가 더 기독교적이냐? 기독교 민주당 기독교의 이름을 붙인 기민당이 더 기독교적이냐? 기민당은 원래 카톨릭 사회운동에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거기 카톨릭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고 또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요. 

  반면에 이 사민당 속에는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열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은 양심이 민감한 기독교인들도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이 사민당은.  어느 것이 더 기독교적이냐 하고 다투고 그러는데 그래서 정말 기독교인을 위해서는 정말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려면 사회주의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고 사회주의적이어야 한다.  이런 것이 한 때는 구호로 내세워졌는데 사회주의적 정치 경제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실현된다고 보지 않은 거여요. 


  지금 다시 강조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초월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그런데 지금 또 어떻게 둘째로 오느냐?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은밀하게 점진적으로 필연적으로 역사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할 때 그렇게 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예수의 부름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면 그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에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에 일어난다.  그런데 그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두 마디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모든 우상숭배를 극복하고 하나님에게서만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구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의 뜻에 완전히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태도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내 인간의 재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우리 선행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이런 맘몬인 우상숭배도 아니고 물론 무슨 다른 종교의 숭배대상이라든지 어떤 인간 무슨 카리스마 큰 힘을 가진 무슨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무슨 저기 주체 왕궁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이나 무슨 심지어 우리 김영삼 장로 인간에게서 무슨 저기 구원을 얻으려는 이런 태도는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서만 우리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 그러기 때문에 그의 뜻에 완전히 순종해서 살려고 하는 헌신 이것 하나.  그런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이것을 우리가 확대되면 그 두 가지를 갖고 살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요구하는데 그것에 순종해 살면 우리 주위에 우리가 아무리 미미한 존재일망정 점차 필연적으로 자유가 확보되고 더 많은 정의가 확보되고 더 많은 평화가 확보되고 도 많은 풍요로움이 확보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역사속에 실현이 된다 이 말이어요.  그 이야기여요. 

  그러면 아까 처음에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가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는데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에 순종하면 은밀하게 무슨 큰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난리 피우지 않고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은밀하게 한꺼번에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더 많이 자유가 확대되고 더 많이 정의로와 지고 더 많이 평화로와 지고 더 많이 풍요로와 지고 이런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 순종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것 .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면 앞에 강조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본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과는 모순된 것 같죠? 완전히.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왜? 아까 손장로님도 강조했는데 그래서 오늘 여러가지로 묵상하는 기도들이 잘 통하는데 도대체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이 땅에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서 할 수 있어요?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하는 것, 아까 린턴은 원수 김일성이도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랬는데 진짜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김일성이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한국전쟁을 일으켜 가지고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 조국을 초토화시켜서 엄청난 고난을 끼친 이 자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김일성이는 고사하고 나에게 따귀한대 때린 내 옆의 친구 어떻게든지 따귀 한대 때려줘서 따귀 한대 아니고 두 대쯤 때려 가지고 그래야 지금 속이 좀 시원히 한이 좀 풀리겠는데 그 놈의 한이 지금 여기 맺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힘 자체가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없는 거여요.  이것을 신학적으로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고 하죠.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한마디로 하면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더 사랑하고 같은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 휴머니즘 인간성을 도야하고 개발하고 이렇게 해서 부를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상대방의 인권을 존중해서 상대방에게도 더 많은 자유의 영역을 확보해 주고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과 지금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이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반대여요.  인간의 내재의 선함 선행을 개발하고 재능을 개발해서 이것에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그것은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공산주의의 형태로든 자본주의의 형태로든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과 내게 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 선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조금이라도 의존할려고 하고 내 힘으로 무엇을 할려고 하고 내게 선함을 자랑삼을려고 하고 바울의 말로 말하면 자기 육신을 자랑함.  인간의 우리속에 내재해 있는 힘으로 무엇을 할려고 함.  이것은 완전히 우상숭배여요. 


  이것을 철저히 부수고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어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하는 것 밖에 없어요.  어떻게? 구체적으로 내가 자꾸 우상숭배에 빠지려고 하는 거여요.  내 재능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나의 선행을 믿으려고 하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요.  교만해지고 독선해지고 도움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권력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려고 하고 하나님 나를 이런 우상숭배에서 건져주시고 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게 내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초월에서 그의 은혜로 내게 믿음이 주어지도록 기도하고 나는 이웃을 사랑할 힘이 전혀 없어요.  그것을 철저히 의식하고 의식한 만큼 하나님 제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초월에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곧 헌신의 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하나님의 그 구원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여요.  겨자씨같이 누룩같이 그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그 구원의 힘이 나타나고 사회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오는 거여요.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나타난다 이 말이어요. 

  이것을 우리는 개인윤리의 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고 사회윤리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의 개임적인 삶에서도 그러함 자세로 살아야 되겠지만 이러한 원칙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가 나의 삶의 영역에서 가치관으로 법으로 행동양식으로 문화적인 표현으로 표현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각계각층 모든 분야에 들어가서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그러니까 우상숭배에 반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 복수 앙갚음을 해서 정의를 확보하려는 내가 당한 만큼 되갚음으로 해서 발란스를 다시 이루려는 것에 반해서 그런 법칙이 아닌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또는 원수의 사랑의 정신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그렇게 나타나니까 그 가치들과 그 원칙들이 입법하고 정치하고 사법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제도로 더 많이 나타나게 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속에서 그것이 완벽히 나타날 수 없지만 최대한도로 많이 나타나도록 노력을 해야할 것이며 아까 린턴이 영화 이야기했습니다만 영화 만드는 사람 소설 만드는 사람 글 쓰는 사람 시 쓰는 사람들은 또 인본주의 우상숭배를 앙양하고 퇴폐 맘몬이즘 우상숭배를 앙양하고 이웃에 대한 복수를 앙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의 정신을 담고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실현시킨가 하는 것을 자꾸 표현하는 것을 해야할 것이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음악 하는 사람들 상거래 하는 사람들의 사업의 장에서도 각자의 장에서 물론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교육하는 사람들은 책임이 크지요.  설교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서 우리가 우상숭배에 반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이웃에 대한 자기주장 또는 원수에 대한 앙갚음에 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 또는 원수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그 다스림 하나님의 그 요구에 우리가 순종함으로서 개인윤리측면에서 아까 예를 든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오도록 은밀하지만 점진적으로 필연적으로 확대되어 가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거여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온다고 했어요?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게 하고 우리에게 우리로서는 도저히 갖지 목하는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힘을 주셔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이말이어요.  또 나중에 이 문제를 토론하기로 하고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토론을 일단은 이만큼으로 마칠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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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8) 막11장1-12장11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2-김세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쳤나를 살펴 보았어요.  간단히 한 두 마디로 요약하고 새로운 단계로 오늘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는 은혜요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에게 온다.  이것을 굉장히 강조했다고 그랬죠.  둘째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특히 겨자씨의 비유 또는 누룩의 비유 또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이런 씨들의 비유에 덧붙여서 생각한다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도 거기에 속하는 비유들인데 그 비유들에서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은닉된 상태에서 점차 점진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자람.  그래서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온 세상을 변화시키서 그 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축복이 나타나게 한다.  그 구원의 축복이 자유 평화 정의 뭐 이렇게 온전해짐 고난이 적어지고 온전해짐으로 나타난다.  그런 말을 했죠. 

  그런데 두 번째로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면 우리들의 제자들의 선교와 제자들의 삶.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삶을 전제로 한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죠.  우리들이 복음을 선포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로 인정하고 그러니까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사단의 뜻을 쫓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고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예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해서 그 곳에 샬롬이 일어나요.  더 많은 자유가 있고 더 많은 정의가 이루어지고 더 많은 사랑이 실현이 되고 더 많은 평화가 실현이 될 때에 그 곳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제가 되어간다.  이 말이어요. 

  그것이 점차 일어나요.  그것이 몇 사람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겨진 상태이지만 그러나 점차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자라간다.  확대되고 성장해간다.  이런 말을 했죠.  그러니까 제자들의 선교와 제자들의 삶이 전제가 된다.  이 말은 예수 당시 상황이나 우리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두 가지에 대해서 반대로 나타난다.  하나는 열혈당의 혁명신학 정치적 수단 특히 무력혁명을 통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력혁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해야 된다는 당시의 그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해서 예수께서 반대를 하고 그것에 대항해서 이러한 대안을 제시하는 거여요.  오늘날로 말하면 이것이 소위 해방신학이죠.  해방신학에 대해서 무슨 혁명적인 투쟁을 통해서 이 사회에 새 질서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어야 된다는 해방신학.   이 해방신학을 가장 철저하게 세속화된 형태가 공산주의이죠.  그런데 그런 것을 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예수께서 보지 않은 거여요.  그래서 지난 번에 하나님 나라는 무슨 정치적인 경제적인 사회적인 무슨 프로그램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슨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는 다른 말로 무슨 소리냐면 무슨 자본주의적 무슨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요.  무슨 과학혁명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또 특히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염두에 둘 것은 그렇다고 예수께서 경건주의적인 소극주의를 말한 것은 아니어요.  소극주의 신앙과 삶의 다른 영역들을 분간해 가지고 우리 기독교의 복음과 기독교인들의 삶은 아주 좁은 의미로 종교적인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사회에서나 사회의 여러 과정들 정치 경제활동이라든지 또는 문화활동에 대해서 신경쓸 것 없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 가질 것 없고 그런 태도를 경건주의적인 소극주의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교회생활 잘하고 기도생활 잘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헌금 열심히 하고 선교나 열심히 하고 그러면 되지 정치의 장에 뛰어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고 문화의 장에 뛰어 들어서 그 곳에서 올바른 가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가치를 표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추한 것을 추한 것으로 분간하게 하고 또 그런 미술이라든지 음악이라든지 문학이라든지 이런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을 더욱 온전하게 하고 이런 것에는 별로 관심 없이 그냥 날마다 부흥회를 하고 기도회나 하고 이런 것에만 집중해야 된다.  이런 태도가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죠. 

  아까 목사님 설교 가운데 삼일 운동 때는 일제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려는 것을 비폭력적인 시위로 이룰려고 하다가 그것이 좌절되니까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경건주의적 소극주의로 후퇴했다고 아까 아침 설교에서 예를 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신비주의적인 체험으로 빠지고 아주 개인주의적인 신앙형태로 빠지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정치과정에 나타나지 않고 경제생활에 나타나지 않고 문화에 표현되지 않고 이렇게 되었다고 그랬죠.  예수께서는 지금 아까 본 바와 같이 이것도(열혈당 신학) 배척하지만 이것도(경건주의적 소극주의) 배척하는 거여요. 

  이것은 그러니까 제자들이 어떻게 한다고요.  적극적인 선교 선교라는 것은 폭넓게 모든 삶의 과정속에서 삶의 장속에서 하나님의 왕 되심.  예수의 주되심을 선포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에 하나님 우리 왕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말이어요.  실현이 되어가요. 

  그런데 여러분들 기억납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종말에 완성되는 것으로도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지금 현재에 자기를 통해서 이미 와서 점차 실현되는 것으로 가르친다고 그랬지 않아요.  지금 현재 역사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어 가지고 점차 실현되어 가는 거여요.  점차 성장해 되어 가는 거여요.  언제까지? 예수의 재림 때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이 될 때 까지 그런데 그때까지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  우리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우리들의 적극적인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는 것일 수 있느냐?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모순이 되는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선교할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서만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뭡니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그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어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 뜻이 이루어 지도록 해요.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용서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우리속에 주어져서 그 은혜에 힘입어서 이 은혜로 오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지배될 때 우리가 비로소 선교할 수 있고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우리를 통해서 점점 실현이 되어가요.  이것을 믿음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한 바울의 은혜라는 가르침과 똑같은 거여요. 

  여러분들 바울 사도가 은혜와 은사 지난번에 여러 번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했죠.  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하는 겁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힙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어요.  그런데 이 은혜는 무엇으로 표현된다고 그랬지요.  은사로 표현이 된다고 그랬지요.  각 개인에게 은사로.  은사는 무엇하도록?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힘.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순종이 무엇으로 나타나요? 이웃을 섬기게 하도록 섬기는 힘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은사로 표현될 때에 그 곳에 무엇이 일어나요? 구원이 실현이 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가 나를 내 따귀를 오른 편 뺨을 때려서 내가 지금 복수를 해야 하는 상황속에서 왼 뺨도 내어 놓고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그 힘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나와 내 원수 간에 무엇이 이루어져요? 평화.  샬롬이 이루어져요.  그것이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이에요.  지금 현재 거기에 자유가 있어요.  서로에 대한 공포 때리고 복수하는 상황속에서 공포 부자유가 사라지고 그 곳에 사랑이 넘쳐서 평화가 이루어 질 때 자유가 있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실현이어요.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온다는 말이어요. 

  자 그러니까 우리가 늘 생각할 때에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에 예수께서 왜 지금 오늘날 해방신학자들이 그 당시에 열혈당 혁명가들이 답답하게 여길 정도로 정치적 무슨 경제적 사회적 해방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는 거여요.  더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는 은혜에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그런데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 경겅주의적인 소극주의에 빠지면 또 안 된다고 그랬죠.  둘 다 배격하면서 적극적인 제자도의 삶을 살 때 우리 삶의 모든 정황속에서 하나님의 우리에게 각자에게 부어주신 소명의 장에서 의사는 의술의 장에서 사업가는 사업의 장에서 정치가는 정치의 장에서 예술가는 예술의 장에서 문필가는 글 쓰는 장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서 사는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이 되어가요.  구원을 확대하면서 자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와요. 

  오늘은 또 하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의 또 한 면을 보려고 그래요.  아마 여러분들 상당히 생소한 면 일텐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성전으로 보신 것 같아요.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이제 좀 보려고 그래요.  앞으로 두 시간 우리가 보려고 아예 기다란 본문을 잡았어요. 

  왜냐하면 막 11:1-12:11절 까지 인데 이것은 한꺼번에 보아야하기 때문에 오늘 좀 길게 읽겠습니다.  누가 마가복음 11장 1-11절 까지 읽어 보세요. 

“막 1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이것은 예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명이죠.  스가랴 9:9절에 예언된 대로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지요.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자세히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12-14절 까지 읽어 보세요.  

“막 11:12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것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장면이죠. 


   그 다음 15-18절 까지 읽어 보세요. 

“막 11: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음새 19절인데 ‘매양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더라’ 19절도 여기 포함될 수 있죠.  이것은 우리가 보통 성전 청결 사건이라 그러는데 하여간 성전에서 예수께서 시위한 사건이죠.  데모한 사건이어요. 


  그 다음에 20-25절 까지 누가 읽어 보세요. 

“막 11: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지금 정확히 말해서 20-21절 까지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말라 비틀어짐.  무화과 나무의 말라 비틀어져 죽은 이야기.  22-25절까지는 그것에 이어서 예수께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매 힘을 설명했어요. 


  그 다음에 27-33절까지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막 11:27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의 권세에 대한 도전 질문 심문을 하는 장면이죠.  예수께서 산헤드린 당시의 통치기관인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이 와서 성전에서 예수께서 소란을 피웠어요.  시위 데모를 했어요.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했소? 이런 일을 했느냐고 시비를 하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그것을 알고 싶으면 너희들이 세례요한을 참 선지자로 보느냐? 거짓 선지자로 보느냐? 그것을 먼저 밝혀라.  하니까 그들이 이렇게도 대답할 수도 없고 저렇게도 대답할 수도 없어서 모르겠다고 하고 답을 피함으로 예수도 그러면 나도 답을 안 하겠다고 피하는 것으로 답을 하죠. 


  그러나 예수는 이어서 12장 1-12절 까지의 비유를 하나 들어요.  그것이 지금 공부할려는 단락의 마지막인데 12장 1-12절을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막 12: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7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 두고 가니라”


  이 비유는 예수께서 여기 지금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했소 하는 것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는 나도 안 하겠다 했지만 사실은 이 비유가 답이어요.  이 비유로 답을 한 거여요.  우리가 자세히 보겠지만 그 내용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그런 일을 했다는 거여요.  하나님께서 최후로 보낸 그 아들 이것을 보통 포도원 비유라고 불러요.  이것이 막 11:1-12:12절까지를 분석한 것인데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눈에 띄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자세히 보면 눈에 띄는 것이 많아요.  이렇게 써 놓으니까 이 두개의 무화과 이야기가 하나의 무화과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고 그 무화과가 그래서 말라 죽는 이야기가 예수의 성전청결의 시위로 쪼개져 나타나죠. 

  마가복음에 두 개의 이야기를 샌드위치식으로 섞어서 기술하는 기법이 자주 나타나요.  여기가 그 중의 하나여요.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 하느냐면 성전에서의 시위사건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비틀어진 그 사건과 연결해서 해석하라는 사건이어요.  예수께서 성전에서의 소란 피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헤아여 보아야 하겠는데 그것에 대한 실마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 좋은 실마리가 무엇이냐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예수께서 저주 심판해서 그 무화과 나무가 죽어버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의 구원사의 종말 그것이 성전파괴와 연결이 되어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시위한 것은 그 성전이 곧 파괴될 것이며 그것은 곧 무엇을 말하느냐면 열매 없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끝남을  지금 예고하는 거여요. 

  그렇게 보면 지금 또 이 이야기와도 연결이 되어 있죠.  무슨 이야기여요.  구약에서 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괸계는 여러 그림들로 표현한다고 그랬지요.  왕과 백성의 그림 또 이스라엘이 포도원이고 하나님께서 농부로서 이스라엘을 잘 가꾸어 놓으심.  무엇을 하도록? 많은 열매를 맺도록 그래서 이 포도원의 이야기는 벌써.  아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구나 하고 잘 알잖아요? 구약을 잘 알면 .  어때야 구약을 잘 알야요? 어때야 성경을 잘 알아요? 내가 지금 마음이 답답한데 내게 위로 주는 말이나 하나 있나? 그것만 찾느라고 성경 읽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모르죠.  그러나 그렇게도 성경을 읽어도 좋지만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나?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더 확실해지고 우리의 제자도의 삶이 더 확실해져야 되겠다.  이렇게 읽어야 하죠.  이렇게 읽는 사람들은 아! 포도원은 아마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것이구나.  그런데 여기는 지금 하나님이 농부이고 포도원의 주인이어요.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여기서 농부들이 나요죠.  이 사람들은 누구여요.  소작농들이죠.  주인한테서 경작의 권리를 받아 가지고 거기서 소출을 주는 소작농이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말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지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해야 되는 사람들이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때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열매를 바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인이 종들을 보내서 소출을 얻고자 하나 이 종들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선지자들을 가리키죠.  마지막 선지자가 누구였어요.  세례요한.  그들을 어쨌어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하나 하나 죽였다고요. 

  오늘 이스라엘 왕 아합이 엘리야를 핍박하는 이야기 오늘 몇 주간에 걸쳐서 같이 아침 설교를 통해서 묵상했죠? 그런데 모든 선지자들을 왕들이 핍박하고 패역한 세대들이 죽이잖아요.  그 이야기죠.  마지막에 누구를 보냈어요 하나님께서 포도원 주인이 자기 사랑하는 아들 예수께서 은근히 자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사자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냄을 받은 사자임.  그런데 자기가 오기 전에 마지막 온 세례요한 까지 다 죽였는데 이 포도원 주인이 어쩐다고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결국 자기까지도 죽이리라 어떻게 죽여요?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져 죽여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밖에 시온 하나님의 도성 밖에서 죽임을 당하죠.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멸하고 파괴하고 심판 그리고 어쩐다고요? 그렇게 버린 바 된 아들을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   이것은 시편 118편 22절의 인용인데 여기선 여러분들 히브리어로 아들이라는 말은 נב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관사가 붙으면 נבה 그래요.  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נבא 이어요.  그래서 아들(נבה)과 돌(נבא)들을 말함으로서 예수께서 앞에 아들을 듣는 사람에게 연상시키는 거여요.   이런 것을 말의 유희라고 그러는데 word play라고 그러는데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word play 발음이 비슷하게 나는 말을 가지고 자기의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그런 일이 참으로 많았어요.  우리가 앞으로도 그런 것을 좀 도 보겠지만 여기가 그 중의 하나여요. 

  그래서 앞의 농부들이 누구를 죽입니까? 아들을 죽여요.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쩐다고요? 돌을 일으켜요.  건축자들은 앞의 농부들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여요.  그들이 버린 돌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된다.  무슨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어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춧돌이 된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죽임을 당한 아들의 부활과 그 아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주춧돌이 됨을 예고하면서 그 전에 무엇을 예고해요? 그 방자한 농부들 시편의 말로 하면 건축자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어쩐다고요? 심판을 받아 파괴된다는 그런 예고여요.   자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 쭉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오면 그가 다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건축자들이 버린 아들 또는 돌이 버림을 받는데 그 돌이 다시 모퉁이 돌로 되어진다.  그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성전의 주춧돌이 된다고 예고해요.  이 예고는 예수의 재판 때에 죄목으로 등장하는 막 14장 58절의 말과 사실은 같은 거여요.  막 14:58절 한번 보시겠습니다.  55절 부터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제 체포되었어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예수께서 어쨌다는 거여요?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때려 부수고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않는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해서 그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소 산헤드린에서 지금 예수께서 죄목으로 거론이 된 거여요.  증인들이 나서서 그렇게 한 거여요. 

  그러니까 60절에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이 송사에 대해서 할 말 없느냐? 하니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심을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증인을 더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이렇게 해서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빌라도에게 사형시켜 달라고 넘기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그의 죄목 예수께서 체포되고 재판받고 사형언도를 받는 직접적인 이유가 예루살렘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한 것이라는 거여요.  성전은 무엇이기 때문에 그러는가? 저는 그래서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아주 독특해서 재미있어요.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의 유대교의 신학만이 아니고 좁은 의미로 종교생활만이 아니고 삶 전체의 중심이었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가서 제사를 하든지 또는 중요한 순례의 절기 때에 그 곳에 가서 제사를 하고 잔치를 하든지 또는 율법에 규정한대로 자기에게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가서 제사장들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제사를 드리고 꼭 그렇게 했잖아요? 그래서 유대교가 성전중심의 종교이지요.  우리가 이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거의 무시해 버렸어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갔다느니 그런 기록이 복음서에 하나도 없어요.  제자들더러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라 그런 기록도 없어요 그런 가르침도 하나도 없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자주 가시는데 큰 절기 때에 가시는데 가서 그곳에 가서 무슨 같이 제사하고 그런 것이 아니고 자세히 보면  자기가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성취하는 분이라고 가르쳐요.  가령 초막절에는 이제 시내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계시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의 체험을 기념하면서 종말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계시되어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로 환하게 될 것을 간절히 바라는 의미에서 잔치가 벌어졌어요.  그것이 초막절의 의미여요.  그래서 초막절의 행사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면 성전의 여인들의 뜰에 밤에 횃불을 밝혀서 온 세상이 환하게 됨을 상징하도록 했어요.  그 곳에 가서 예수께서 뭐라고 선언해요? 내가 세상의 빛이다고 선언해요. 

  또 초막절의 또 하나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광야 출애굽하여 가지고 약속의 땅 구원의 땅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물을 공급해주심 그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그들의 생명을 지탱해 주심을 기념하면서 종말에 하나님의 물 그러니까 물은 무엇을 가능케 해요? 아까 빛은 무엇을 가능케 해요? 지식을 가능케 하지요.  무슨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생명이라고.  물은 무엇을 가능케 해요? 물은 생명의 수단이지요.  생명의 힘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영 성령.  성령이 종말에 모든 육신 위에 퍼부어져서 우리 모두의 삶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왕성해짐 온전해짐 그것이 종말의 구원의 실상이어요.  그래서 초막절에 하나님께서 물을 부어주심을 기념하는 것.  그것은 지금 현재는 비가 제 때에 내려 가지고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짐.  또는 반 사막지대와 같은 팔레스티나에서 비가 물이 제대로 있어 가지고 오아시스가 제대로 기능해서 사람들이 살아야죠.  육축이 살아야죠.  그런 것을 고대하면서 동시에 종말에 부어줄 성령의 물 생명의 힘을 간절히 바라는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 초막절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극으로 또 표현했어요.  그래서 물을 깃는 실로암에서 물을 길러다가 성전의 제단에 뿌리는 그런 행사를 했어요.  그 곳에서 예수께서 뭐라고 선언해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자기가 주는 물은 우리 뱃속에서 흐르는 성령의 강물이든가 자기가 바로 성령의 물 생명샘이 우리 뱃속에서 흘러넘치게 한다고 선언해요. 

  이와 같이 예수께서 아예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 바리든지 성전 제사를 무시해 버리든지 아니면 성전에 또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유대 절기라든지 그 절기들이 나타내는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자신이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거여요. 


  둘째로 유의할 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또는 문둥병자 같은 또는 혈루병자 같은 구약의 레위기 법대로 하면 정결치 못한 자들을 정결하게 하고 선언을 하고 이런 일을 해요.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법에는 전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에 근거해서 제사장이 선언하게 되어 있는 것들이어요.  그런데 예수는 제사장도 아니고 또 성전과 관계도 없는 분이 아무 제사도 드리지 않는 가령 막2장에 친구들의 들 것에 올려서 저기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이 든 자에 대해서 뭐라고 선언해요? 소자야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수동형이라고 하지요.  그런 것을 무슨 수동형이라고 하지요? 신적 수동형이라고 그래요.  여러분들 제가 한 번 시험을 보려고 그래요.  여러 번 가르쳐 준 것을 시험을 보려고 그럽니다.  합격해야 장로 되고 권사님 됩니다.  그런 것을 신적 수동형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행위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기를 꺼려서 수동형으로 표현했다고 그랬죠.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하고 선언한 거여요. 

  다시 말하면 네 죄가 용서되었다.  우리 옛날 어려운 한문으로 네 죄가 사해졌다.   그 말은 내 죄가 용서되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용서했다.  거기 있는 서기관들 당시 신학자들이 뭐라고 해요? 아니 네가 뭔데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했다고 그래.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권세를 침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참람죄라는 죄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는데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요. 

  지금 예수는 제사장도 아니고 성전에서 무슨 제사 자기가 지은 죄에 해당하는 제사를 드린 일도 없는데 하나님이 죄를 용서를 선언하거든요.  문둥병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결은 무엇입니까? 정결하다는 것은 뭐여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거지요.  하나님께 누구만 나아갈 수 있어요? 정결한 자만.  정결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레위기 법에 따라 제사를 드려 제사장이 네가 이제 정결하게 되었다고 선언해야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뭐라고 그래요?

  막 1장 40절-41절에 보면 “네가 깨끗케 되었다”고 수동형 무슨 소리여요? 하나님께서 너를 깨끗이 했다.  그 증거?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내가 하나님께서 너를 깨끗케 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인정을 안 할 수도 있으니 할 수 없이 모세의 법에 따라 성전에 가서 추후 수단으로 제사를 해도 된다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이미 깨끗케 되어 버렸어요.  이렇게 예수께서 성전의 기능 죄를 용서해 주고 사람들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함.  이것을 예수께서 스스로 행하신 거여요. 

  그러니까 유대인 신학자들이 이거 성전을 참해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침해했다고 막 시비를 하죠.  또 예수께서 정결의 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막 7장에 보세요.  유대 신학자들과 예수가 시비를 붙어요.  왜 붙어요? 예수의 제자들이 바리새 법에 따라 그릇도 씻고 밥 먹을 때 손도 씻고 이런 정결의 법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어요.  이런 정결의 법들은 뭐 하러 있는 거여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거에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런 것 없이 자기를 통해서 지금 당장에 하나님 아빠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치는 거여요.  그러니까 시비가 붙었죠.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막 7장 15절 아주 유명한 예수다운 말씀.  그 내용만 예수다운 말씀이 아니고 그 형식도 그래요.  밖에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알쏭달쏭한 격언.  그런데 사실 그렇잖아요.  너희 유대인들이 먹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돼지고기 한 점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더럽히는게 아니고 예수가 뭐라고 그래요.  그 돼지고기가 우리 배속에 들어가서 12-24시간 있다가 우리 밖으로 나오면 그것이 어떻게 되요.  여러분들 무서워서 다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무엇의 비유입니까? 밥 먹을 때 무슨 그릇을 유대법을 따라 씻고 무슨 채소를 씻고 또는 안 씻고 한다고 그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 그 음식을 가지고 무엇을 비유로 삼는거여요. 

  진짜로 악한 것 우리를 더럽히는 것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 막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뇌 속에 있는 악한 생각 우리 심장의 하나님에 대한 완악함.  이웃에 대한 증오심.  더러운 생각.  우리의 나쁜 동기.  이것이 다 어디서 나와요? 성경적인 의미로 우리 심장에서 나오는 거여요.  우리 실존의 가장 깊은 곳 우리 심장에서 나오는 거여요.  그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이 말이어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해요.  다시 말해서 이것이 무슨 의미여요? 예수께서 구약의 레위기 법의 형식을 그 많은 정결의 법들이 모두 무엇을 말하느냐? 그것이 형식적으로 무슨 그릇에 담고 음식을 담고 1년에 몇 번씩 성전에 가서 제사하고 다 그런 것의 진정한 의미가 뭐냐면 우리 심장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 거기에 달려있음.  그래서 이 구약의 정신을 올바로 가르침으로서 당시 성전중심의 제사장들의 신학과 관행 또는 그것을 평신도들에게 까지 확대할려는 바리새신학 이런 것을 예수께서 다 뒤집어 엎어 버렸어요. 

  그런 점에서 봐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이 아주 혁명적이었다고요.  그러니까 요새 성경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려는 사람들에게는 아까 제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에 무슨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혁명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학적으로 큰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느냐 이 말이어요.  당시 사두개인 제사장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어요.  예루살렘 인구가 상존인구가 한 5만으로 추정을 해요.  그런데 초막절이라든지 유월절은 4배쯤으로 확대해서 20만으로 왔으리라 보았는데 그 순례객들이 이 5만이 무엇으로 먹고 사는 거여요.  이 20만 순례객들이 거기 와서 떨구는 요새 말로 하면 관광수입으로 먹고 사는 거여요.  대부분이 성전에서 고용하죠.  성전에 물건 공급하기도 하고 성전건축에 참여하기도 하고 예수 당시에 성전이 계속 건축이 되어갔죠.  건축에 참여하고 성전의 심부름도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1년에 몇 차례씩 밖에서 오는 순례객들에게 여관제공도 하고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아! 이것이 요새 말로하면 어떤 셈이 돼요? 자기들의 밥줄이 끊어진 거여요.  직업을 잃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굉장한 이것은 정치 경제 사회적 함축의미를 갖고 있는 가르침임에 사실이어요.  그러나 예수는 그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올바른 관계에 주안점을 두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그런데 그러니까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가 당시 유대인들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일반유대인들과 이렇게 많이 달랐음.  지금 내가 많이 설명했죠.  그런데 마지막으로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를 보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되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쓴 용어들이 성전의 용어들이어요.  그래서 거꾸로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일면 성전으로 생각하도록 성전으로 개념화하도록 가르쳤어요.  오늘 그것을 하려고 그랬는데 서론을 하다 보니까 벌써 3시가 다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이 다음 시간에 할려고 그러는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되 그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그래서 뭘 할려고 하셨나 그것을 우리가 살펴 보아야 겠어요.  그러면 이 이야기들의 진전을 알게 되요. 

  그래서 왜 예수께서 성전에서 소란 피우고 그 의미가 무엇이며 예수께서 왜 체포되고 왜 십자가에 죽었는가를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무엇을 이루실려고 했는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겠고 메시야로서 왕으로서 스가랴서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 입성했는데 그래서 온갖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만이 아니고 심지어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라도 다 나와서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어요.  그때에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지금 기대하고 환영하는 거여요? 다윗왕조가 재건되는 거여요.  종말에 메시야를 통해서 다윗왕조가 재건되는 거여요.  그래서 로마의 압제로 부터 해방이 되고 이스라엘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환영하고 예수를 환영하고 호산나 호산나 불러대면서 환영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꿈을 이루어 주시기는 커녕 도리어 이스라엘의 심판과 성전의 파괴와 자기의 죽음과 이런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문자적으로 다윗의 왕조의 재건을 통한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않을 바에야 왜 그러면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연극을 하는거여요.  이것이 하나의 드라마여요.  다시 말하면 다윗 왕조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 사상과 또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앞으로 생각하겠어요.  이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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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9) 막11장1-12장12 하나님 나라와 성전- 김세윤

 

 

 

 

  하나님 나라와 성전과의 관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  이런 것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하다 말았는데 다시 한 번 막 11:1-12:12절 까지를 읽겠습니다. 

  지난번에도 본 바와 같이 이 이야기들은 쭉 연결이 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무렵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거여요.  그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스가랴서 9장9절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평화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해요.  그래서 이와 같은 메시야적 입성의 상징행위에 예수의 제자들을 위시해서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해가지고 예수를 다윗의 아들의 다윗의 왕조를 재건해서 이스라엘을 로마통치로 부터 독립시키고 이스라엘에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  그런 구원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고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이 지금 여기 그려져 있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군중들이 기대했던 대로 가령 군대를 동원한다든지 무슨 기적적인 힘으로 로마제국을 뒤집어엎고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이방민족들을 다 정복하고 그런 일을 하지 않고 구약 스가랴서의 예언대로 메시야적인 입성을 하기는 했는데 그 다음부터의 행위는 그 때까지 사람들이 메시야 보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시온을 장악해서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이방인들을 다 굴복시키고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스스로 왕으로 이렇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풍요의 통치를 이룰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지금 성전안의 시위를 하는 거여요.  이 정치신학 해방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 성전에서의 사건을 그러기 때문에 메시야로서 입성해서 예루살렘을 장악하려고 했던 하나의 정치적 혁명적인 사건으로 해석을 할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우선 물리적 여건이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금방 가르쳐요.  예수가 무슨 군대를 동원했다든지 기적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커다란 성전을 지난 번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성전 뜰이 300미터에다가 475미터크기였어요.   거기에 성전 건물이 있었는데 이 바깥뜰에서 제물들을 사고 팔고 환전하는 장사들이 이루어 졌었는데 예수께서 거기서 장사치들에게 너희들이 이 성전을 시장으로 만든 것은 바로 지금 성전의 타락상에 대한 가장 좋은 상징적인 형상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 예수의 성전시위의 내용인데 그것이 성전을 장악하고 로마 사람들과 결탁하고 성전을 통해서 국민들을 착취했던 사두개 제사장 집권층을 무너뜨리려는 정치적인 혁명 사건이었다면 예수께서 상당한 군대적인 힘이 필요했어요. 

  특히 성전의 서북쪽 벽으로 높이 올려져 있는 안토니아 요새는 로마군대가 4,500명이 상주하면서 성전들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특히 유월절 같은 때는 보통 가이샤랴에 주둔하는 로마 총독이 증원군을 가지고 와서는 예루살렘 전체를 삼엄하게 감시했어요.  왜냐하면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고 종말에 출애굽의 구원을 염원하는 그런 절기이기 때문에 유월절에는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자들 또는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자들의 시위가 늘 있었어요.  군중들의 소요가 늘  있었어요.  그런 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로마군대의 경비가 아주 삼엄했고 레위인들로 구성된 성전경찰의 경비도 아주 삼엄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여기서 무슨 정치적인 혁명적인 군사적인 행동을 시도했다면 예수께서 아주 미쳤든지 상당한 병력이 필요했든지 그런 것인데 둘 다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요.  그래서 정치적 신학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해석은 틀렸다.  예수의 성전시위사건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아요. 

  그런데 예수께서 메시야로 입성하는 것은 사실인데 이런 일련의 행동으로서 예수가 어떤 메시야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거여요.  스가랴서 9:9절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겸손이 입성하는 메시야로 예수는 시위를 했어요.  그 자체가 자기가 군사를 동원하는 점령자 군사적인 영웅 그런 메시야가 아니고 겸손한 평화의 왕 메시야인 것을 나타내죠.  스가랴서 9:9절에 나귀를 타고 겸손히 그런 상장 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을 위시해서 예루살렘 시민들은 온통 자기들의 전통 메시야 사상에 입각해서 예수에게 군사적인 정복자 정치적 왕 메시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여요. 

  다윗 왕조를 재건해 주기를 호산나! 다윗의 나라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고 지금 외쳐대는 거여요.  그런데 예수는 그것 보다도 성전에 들어가서 상징행위를 하나함으로서 이것이 상징행위죠.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메시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상징행위 즉 연극적인 행위를 많이 했죠.  예수도 그 전통을 이어 받아 가지고 연극적인 행동을 많이 했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이 성전에서의 시위사건이어요.  그러면 이 성전에서의 시위사건이 예수께서 이 시위를 통해서 무엇을 상징할려고 했는가? 어떤 메세지를 어떤 뜻을 의도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는가?

  아까 첫째로 정치적 혁명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둘째로 또 많은 오해는 예수께서 타락한 성전 이 시장 바닥이 되어버린 타락한 성전을 청결케 해 가지고 하나님께 바칠려고 했다.  그런 오해가 참 많아요.  그래서 이 본문을 보통 성전청결 사건이라고 그러는데 그것도 아니어요.  왜 그것도 아닌 줄 아느냐.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 예수께서 성전을 그렇게 귀히 여기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 다 공관복음서들에서 보지요.  예수께서 성전에 가서 제사하고 무슨 성전의 제사장들을 존중하고 거기에 제사를 중요시 여기고 그렇다는 본문 어디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우리 공관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성전의 제사에 대해서 한 가지 가르침이 있어요? 예수께서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거여요.  사실은.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성전에 한 번 가요.  언제? 지금 .  그의 마지막 유월절에.   가서 그가 제사합니까? 사실은 제사를 방해하죠.  여기서 제물을 사고 파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하기 위해서지요.  레위기 법에 의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가장 흠 없는 제물들을 바쳐야 되는데 순례객들이 저 먼 곳에서 양이고 염소고 소고 데리고 오면 흠이 생길 가능성도 있고 특히 여기서 환전상들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 헬라동전에는 헬라신상들이 새겨져 있었어요.  로마동전에는 로마 황제상이 새겨져 있었어요.  그런 동전이 보통 일상생활에서 통용이 되는데 그런 동전 그런 은전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왜?  그것은 십계명 위반이니까. 

그래서 신상도 새겨 지지 않고 로마 황제도 새겨지지 않은 은전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이 두로의 은전이라는 거여요.  거기서 환전을 했어야 했어요.  그 두로의 은전으로.  그래서 환전상도 필요 했고요.  그래서 여기 시장에서 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타락의 상징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성전의 제사를 원활하게 하고 더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성전의 제사를 방해하는 거여요.  더구나 우리가 복음서에서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는 제사장도 아니고 성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분이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많이 했어요.  가령 예수께서 죄인들에게 너희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죠.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그들과 예수께서 먹고 마시는 잔치를 늘 하지요. 

  그래서 예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죄인들의 친구라.  사실은 구약의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죄의 용서는 어떻게 확보하느냐면 자기가 지은 죄에 해당하는 레위기에 정해진 법대로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림으로 그 제사의 근거에 의해서 제사장이 너희 죄가 용서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용서했다고 선언하는 거죠.  예수는 스스로 제사장도 아니고 성전의 제사도 안 드렸는데 중풍병자에게도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는 거여요.  이 정결의 법도 마찬가지여요.  문둥병자 혈루병자도 마찬가지여요. 

  거기 가서 제사하고 그 제사에 근거해서 제사장이 네가 이제 깨끗하게 되었다.  깨끗케 되었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말이어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사귐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혈루병자에게도 문둥병자에게도 너는 깨끗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깨끗케 했다.  그것의 증거로 문둥병이 낫고 혈루병이 나은 것으로 증거를 삼아서 깨끗케 되었다고 선언하는 거여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다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행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어요? 다른 말로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그 대신 자신이 성전의 기능을 지금 성취해감.  그것의 증거로 예수는 무엇을 삼았어요? 문둥병자가 깨끗해 지고 중풍병자가 나았고 혈루병이 깨끗케 되었고 하는 것으로 삼은 거여요.  이렇게 예를 많이 들 수가 있어요.  더 시간이 없으니까 자꾸 더 예를 들지 않겠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성전을 존중하고 그 성전의 제사에 참여하고 그런 기록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 스스로 성전의 기능을 대신한다든지 아니면 이 성전에 대해서 예수는 무어라고 예언해요? 막 12장 2절 지난 번에 읽어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성전을 나가실 때 갈릴리에서 온 시골뜨기 제자들이 입이 딱 벌어져 가지고 선생이여 어떠하뇨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나이까? 이 아름다운 건물 이 아름다운 돌들 이 엄청난 건물 헤롯의 이 성전은 엄청나게 위대했어요.  헤롯이 작고 형편 없었던 스룹바벨 성전을 헐고 엄청난 성전을 지었어요. 

  그래서 로마 역사가들의 기술에도 나중에 유대 랍비들의 기술에도 이런 격언이 전해 내려와요.  헤롯의 성전을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일생에 아름다운 건물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격언이 내려올 정도여요.  그런데 헤롯이 이 엄청난 성전을 지은 이유는 성전건축하고 메시야 대망하고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곧 보겠지만 이 헤롯이 누굽니까? 그 아버지가 에돔족 어머니가 유대인이죠.  그런데 로마사람들이 헤롯을 유대인들의 왕으로 강제로 세워 놓은 거여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헤롯이 왕 되는 것을 반대해서 3년 동안 싸웠어요.  그래서 헤롯이 용병들을 사 가지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3년 동안 전쟁을 벌여 가지고 B.  C.  4년 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 특히 경고하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 유대인들에게는 헤롯이 정당한 왕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 거여요. 

  누가 왕이 되어야 해요?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하지요.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종말에 와서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고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높이고 자유와 평화와 정의와 구원을 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부당한 비 합법적인 헤롯이 로마 사람의 힘에 의해서 왕 노릇하는 거여요.  헤롯은 우리 복음서에 예수의 탄생하는 기사에도 다윗가문에 무슨 메시야가 났다.  그러면 자기 통치권에 대해서 위협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우리 마태복음에 보면 무슨 일이 벌어져요? 다 죽이는 베들레헴 일대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이런 잔인한 일을 벌리죠.  그것은 자기 통치권에 정통성이 없음에 대한 불안 때문이지요. 

  그래서 국민들의 마음을 이 종말에 올 다윗 왕 다윗적 메시야 왕에게 돌려 가지고 자기의 왕권의 합법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헤롯이 성전을 엄청나게 크게 지은 거여요. 

  그것은 삼하 7:12-14절 까지의 나단의 신탁이라고 하는 곳.  이스라엘의 모든 가장 중요한 다윗적 메시야 대망의 뿌리인 이 예언에 나단의 예언에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앉고 하나님에 의해서 성전을 지은 것으로 예고되어 있어요.  이것은 일단 솔로몬에게 대한 예고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한다는 예언이죠.  그런데 솔로몬에 의해서 성취되었지만 종말에 이 예언이 다시 와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의 왕위에 앉고 성전을 건축하리라고 기대하는 거여요.  그 기대를 될 수 있으면 약화시키고 자기의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헤롯은 엄청난 성전을 지은 거여요.  자기가 바로 그 성전을 지었으니까 자기의 통치속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종말의 축복을 발견하라 이런 거여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막13장 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 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뭘 예언하는 거여요.  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는 거여요.  이 예고는 실제로 주후 66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성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요.  그래서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성전을 포위하고 있다가 불화살로 성전을 태워 버리고 완전히 망가 뜨렸어요.  서쪽 벽 하나만 남겨놓고 기념으로 서쪽 벽 하나만 남겨놓고 정말 예수의 이 예언대로 싹 쓸어 버렸어요.  로마의 황제 데스파시안 장군 거기서 승리를 해서 그 장군이 황제가 되어요.  물론 마지막 전투는 그 장군의 아들 디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여러분들 로마에 가면 포럼 로마포럼이라고 로마의 엣날 경기장에 들어가는 행렬하는 광장이 있어요. 

  거기에 아취가 있는데 거기 양면에 예루살렘 유대전쟁에서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물들을 탈취해 가지고 유대인들을 몽땅 노예로 끌고 행진하는 디도 장군의 개선장면이 양쪽에 부조되어 있어요. 

  하여간 그렇게 해서 예수의 말처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어요.  지금 예수가 이 이야기를 언제쯤 하고 있어요? 주후 30년쯤 하고 있어요.  무슨 소리냐면 예수께서 내일 모래 이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되리라 하는 말은 이런 것을 신적 수동형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무너뜨린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타락한 성전 하나님이 무너뜨려 버린다는 거여요.  내일 모래 무너뜨려 버릴 성전을 예수께서 뭐 청결해 가지고 하나님께 바치고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성전청결해서 하나님께 헌정한다.  그런 것도 아니어요.  보시다 시피. 

  우리 요한복음에 보면 공관복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한 번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을 여러 번 가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고 7장에 보면 초막절에도 가고 또 나중에 유월절에도 가시고 이런 식으로 여러번 가시는데 그것을 또 가만히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가서 많은 순례객들에게 당시 유대 예루살렘 인구가 상주인구가 한 5만이었다면 순례객들로 인해서 한 4배로 불어서 20만 쯤 된다고 그랬죠.  순례절기에 초막절이나 유월절에 그런데 그곳에서 많은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예수께서 뭐라고 선언해요? 자기가 바로 성전과 성전에서 벌어지는 이 잔치 유월절 또는 초막절의 신학적인 의미를 성취한다고 선언해요. 

  유월절에는 첫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고 제 2출애굽의 구원을 간구하던 그런 절기에 예수께서 바로 자기가 그런 유월절의 구원을 가져다 준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 첫 출애굽때 먹었던 만나가 상징하고 첫 출애굽 때 마셨던 므리바 물이 상징하는 그 구원의 생명을 자신이 준다고 선언해요. 

  초막절에 기념하는 신에게 율법의 계시와 사막에서 물을 공급하는 생명의 힘의 공급 이런 것을 기념하면서 종말에 그것의 재현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내가 바로 세상의 빛이다.  내가 준 물을 마시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뭘 두고 말하는 거여요? 성령을 가져 오시는 분.  이 세상의 빛이란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와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분이라는 말이어요.  종말에 계시자로서 종말에 성령을 가져오시는 분으로서 이렇게 지금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잔치에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런 잔치들의 신학적인 의미를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거여요.  

  지금 제가 여러가지 예를 들었어요.  무슨 예를 다 들었어요? 예수께서 당시 예루살렘에 서 있었던 성전 그리고 그 곳에 있었던 사두개인 제사장의 서열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제사.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그것이 곧 파괴될 것을 예고하면서 반면에 자신이 이 성전의 의미와 기능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거여요.  성전의 기능이 뭐여요? 성전이 뭐하는 거여요? 성전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집이 왜 예루살렘에 있어요?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왜 예루살렘 가운데 있어요? 언약에 의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내 백성이다 라는 언약의 표징으로 성전이 거기 있죠.  성전의 제사라는 것이 뭡니까? 언약의 관계에 손상을 가져오는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 버리고 해서 훼손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성전제사의 기능이죠.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경건하지 못하고 더러워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지 못하는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그러니까 성전의 기능을 재개발한다고 주장하는 거여요.  자 그래서 예수께서 성전시위의 의미가 무슨 정치적 혁명적 사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전청결사건도 아니고 또 오해가 많은데 사실 마가복음이 그런 오해의 근거를 조금 제공하기도 하는데 여기 지금 이 성전의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어요? 성전 제일 바깥뜰에서 일어났다는 거여요. 

  그런데 이 성전 제일 바깥뜰은 어느 뜻이냐면 그 다음에 성전 벽이 있고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은 여자들의 마당이라 그래요.  유대 여자들이 여기 까지 올 수 있어요.  그 다음 마당은 이스라엘의 마당이라고 해요.  유대 남자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어요.  그 다음 마당이 제사장의 마당이어요.  제단이 있고 지성소가 있고 뭐 이렇다고요.  그런데 이방인들이 올 수 있는 곳에 장이 섰는데 예수께서 그들을 몰아냈다.  게다가 여기 지금 막 11장15-16절에 뭐라고 그럽니까? 17절에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라고 하였느냐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그러니까 만민 이방인들이 와서 기도할 곳을 너희들이 다 장사로 차지해 버려서 이방인들이 이 성전에 접근 못하니까 안 되겠다 해서 예수께서 몰아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에게로 접근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그렇게도 해석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큰 오해 때문에 그래요. 

  이것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예수 당시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여요.  우리가 여자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에 견주어서 편리하게 그렇게 우리가 이름을 붙인 것인지 예수 당시에 이것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생각한 거여요.  그래서 이 해석도 옳지 않아요.  사실은 마가가 우리에게 이 예수의 성전시위가 무슨 뜻인가를 해석하도록 열쇠를 여기 주고 있어요.  지난 번에도 애기한 바와 같이 어떻게? 그의 샌드위치 기법으로 보시는 바와 같이 지금 마가의 이야기들을 쭉 분석해 놓았는데 예루살렘을 입성한 뒤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그랬더니 무화과나무가 말라 비틀어 죽고 그것에 이어서 예수께서 믿음에 대한 강론을 한 것으로 되어 있죠.  그래서 이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인데 성전시위 사건으로 중간에 끼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야기로 되어 있어요. 

  성전시위와 그 성전시위에 대한 성전시위 때문에 산헤드린의 대표단이 예수에게 와서 너 지금 성전에서 제사를 방해하는 아주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는데 네가 무슨 권세로 그따위 짓을 했느냐고 시비하죠.  성전시위와 성전시위 한 것이 무슨 권세로 했느냐의 심문은 하나의 이야기가 지금 무화과 이야기로 갈려 있어요.  이렇게 마가복음에 샌드위치식으로 두개의 이야기를 이렇게 사이 사이 끼어서 하는 기법인데 그런 경우는 마가가 왜 그렇게 하느냐면 이 상징행위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는 거여요.  이것을 무슨 뜻으로 이야기 하라?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이 상징행위로 해석하라는 말이어요.  지금 무화과 이야기가 뭡니까? 저주하고 말라 비툴어진 죽음.  그러니까 어떻게 해석하라는 말이어요.  성전시위 사건을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고로 이해하라는 말이어요. 

  이 제사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아요.  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더 이상 받지 않아요.  이것은 파괴되기로 작정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조금 있다가 이 성전이 파괴되리라고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이 성전 사건은 예수께서 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리라는 예언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벌하심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예고이고 둘째로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할 것임을 예고하는 거여요.  이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파괴될 것이고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할 것임을 예고하는 하나의 시위였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행했던 상징적인 행위였어요.  이 산헤드린의 제사장들은 어느 정도의 예수의 시위의 의미를 감지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에게 와서 심문을 하는 거여요. 

  심문 내용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죠? 예수께서 뭐라고 그럽니까? 나도 질문할 것이 하나 있다.  당신들이 요한의 세례를 어떻게 보느냐? 요함이 참 선지자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느냐? 아니면 요한이 제가 스스로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지도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받은 선지자라고 그러니까 거짓선지자이냐? 그러니까 여기 본문에 본 바와 같이 산헤드린의 대표단이 이렇게도 답하지 못하고 저렇게도 답하지 못해서 모르겠다고 답을 피함으로 예수도 나도 나를 답을 하지 않겠다 하죠. 

  그러나 예수는 실은 이어서 나오는 악한 농부의 비유로 답을 하죠.  그들이 요구하는 직설적으로는 답을 하지 않지만 비유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답을 하죠.  비유의 내용인즉 포도원을 가꾸는 포도원의 주인과 포도원의 그림은 구약에서 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유명한 그림이죠.  특히 이것은 이사야서에 있는 그림을 여기에 그대로 쓴거여요.  이사야서 5장에 나오는 그림을 그대로 쓴거여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포도원을 잘 가꾸도록 농부들을 세웠어요.  그러니까 현대말로 하면 소작인들을 세운 거여요.  사실은 이것이 당시 갈리리에 경제상태와도 비숫해요.  그러니까 거기 농부들은 누굽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어요.  지금 산헤드린 대표단은 예수를 심문하는 산헤드린 대표단.  그런 너희들 같은 놈들 이런 말이어요.  성전 대제사장을 위시한 성전 하이라키(서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성전의 제사장이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그러나 그들이 잘 가꾸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의 열매를 많이 소출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되었으나 어쨌다고요?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이 주인이 종들을 보내서 소출을 좀 얻고자 했으나 종들을 그러니까 선지자들을 말하겠죠.  그런데 보내는 선지자들 마다 이 패역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몹시 때려 가지고 빈손으로 돌려 보냈다 이 말이어요.  그래서 어쩐다고요?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라.  그런데 어쩐다고요? 이 농부들이 이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데리고 가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다 치지할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 그런 것으로 끝날 줄 아느냐? 예수께서 예수께서 경고를 하지요. 

  10절 11절은 시편 118:22-23절의 인용이어요.  여기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된다.  건축자들은 농부들과 같은 뜻이어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하나님의 집 ‘집’이란 말이 건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가문이라는 뜻도 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이죠.  민족의 뜻도 있고 집이란 말이 여러가지 있는데 이 이스라엘을 세우는 사람들 지도자들 농부들이나 마찬가지여요.  돌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에벤이어요.  아들이란 말은 관사를 붙여 가지고 하벤이어요.  그래서 여기 비유 속에서 농부들이 죽인 아들은 시편 118편에서 돌에 해당하는 거여요.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말의 유희라고 그러는데 예수께서 즐겨 쓰는 거여요. 

그러니까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 것이나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돌을 버린 것이나 지금 예수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어쩐다고요? 이 돌을 들어 올려 모퉁이돌로 삼는다.  무엇의 모퉁이 돌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는다.  하나님의 집의 모퉁이 돌로 삼는다.  그래서 예수가 일단 자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죽임당할 것임을 예고하고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높여질 것임.  부활을 예고하고 셋째로 성전이 그렇게 해서 건축될 것임을 예고하는 거여요. 

  그런데 성전청결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렇게 한다 이 말이어요.  그러니까 네가 성전에서 그렇게 소란 피움이 무슨 권세로 그렇게 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 비유로 무엇이라고 간접적으로 답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했다고 답하는 거여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인정을 하지 않고 그를 죽일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 높여서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예수께서 말하는 것이어요.  그래서 예수는 사실은 체포되어요.  아래의 성전에서 시위를 벌여 가지고 소란을 피운 죄 그런데 그것에 이은 예비심문에서 이런 엄청난 주장을 함.  성전파괴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을 새로 짓겠다는 주장을 은근히 했다는 것에 의해서 사실은 체포되요.  그래서 재판에 회부되죠.  그래서 재판장면이 14장에 나옵니다. 


  14장 55절 부터 몇 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공회는 산헤드린이어요 70인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기관 동시에 사법기관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증거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하더라.  어떤 사람들이 가로되 드디어 죄목을 갖다 대는 거여요.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후에 지으리라 하더라 이것이 죄목이어요.  이 예루살렘 성전을 때려 부수고 자기가 새 성전을 짓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않더라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지금 이 증인들의 증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느냐? 이 사람의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기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이제 사형선고를 내려서 빌라도에게 넘기는 거여요

  그러니 예수가 체포되고 재판받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성전 죄목이라고 간단이 말할 수 있지요.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주장했다는 것 그러나 그 죄목에 대해서 예수께서 묵묵 부답함으로 대제사장이 또 묻지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냐? 거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그렇다고 그래요.  최근까지도 학자들이 이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겠다는 죄목하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서로 연결되는 줄을 몰랐어요.  그래서 학자들에게 대 혼돈이 일어났어요.  왜?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냐 하는 심문에 예수께서 그렇다고 한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대제사장이 참람죄.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참람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죄여요.  그런데 신약시대 그 직후에 유대법 책들을 아무리 읽어 봐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주장했다는 것이 책망죄라고 하지 않아요.  아까 말한 대로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한 사람이 많이 나와요.  그것이 거짓 선지자일 망정 그것이 참람죄는 아니거든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는 아니거든요. 

  우리 사도행전에도 그런 자들이 많이 보고되지요.  행 5장에도 여러분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가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주장했다는 이유로 거짓 선지자 거짓 메시야라고 주장할 줄 몰라도 참람죄라고 하느냐? 그래서 학자들이 아마 이것은 마가가 재판 기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예수의 재판에 대해 이야기들이 여러 판들이 떠돌아 다닌 것을 어떤 것은 예수가 성전 죄목으로 재판받다가 어떤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주장했다는 것으로 재판받았는데 마가가 이 두 가지를 연결 시켜서 그랬는가 보다 라고 주석가들이 쓰기도 하고 그랬어요.  또는 어떤 사람들은 형편 없는 자가 지금 무력하게 산헤드린에 잡혀와 가지고 꼼짝도 못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무슨 하나님의 우편에서 인자라고 주장하고 그런 것이 하나님께 욕되게 함이라. 

  이렇게 억지로 하기도 하는데 이 1947년 부터 쿰란이라는 사회 팔레스티나에 유대 땅에 사회가 있지요.  거기의 언저리에  쿰란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 동굴에서 주전 150년-주후 70년 사이에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았던 유대인들의 문서들이 발굴이 되었어요.  우연히 발굴이 되었겠죠.  처음에는 그들이 거기서 항아리에 넣어 두었던 양피지에 썼던 고대 문서들이 발견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문서에 조그마한 문서가 하나 있어요.  그곳에 보니까 구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모아 가지고 주석을 해 놓았어요.  그래 가지고 곧 그 공동체가 곧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고대하면서 메시야가 오면 이런 일을 한다.  이런 일을 한다.  이렇게 모아 놓았어요.  그 문서에 아까 이야기한 삼하 7:12-14절 까지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것이 무엇이냐면 다윗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고 이방민족들을 다 정복시킨 뒤에 예루살렘 왕궁을 정하고 왕궁을 크게 짓지요.  그 왕조의 완정을 위해서 그리고는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을려고 노력을 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너는 하나님의 집을 지을 자격이 없어 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녀석이라 너는 성전 짓지 말라.  그 대신 무었을 약속해요.  네 수가 다하면 내가 너의 씨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네 왕위에 앉힘으로서  내가 너의 가문을 새우겠노라 다시 말하면 다윗의 왕조를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해요.  그리고 그를 내 아들로 삼겠다.  그가 네 대신 나의 백성 나의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아들로 내가 선언하겠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구를? 다윗의 씨를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게 하겠다.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약속이어요.  전에도 내가 몇 번 설명을 했습니다. 

  이 나단의 신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것이 솔로몬에 의해서 성취되지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윗 위에 일으켜서 다윗 왕위에 앉혀서 다윗 왕조를 세우죠.  그리고 솔로몬이 하나님 백성위에 하나님 대신 통치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훌륭한 성전을 지었지요.  그리고 대대로 이제 다윗의 씨가 다윗 왕위에 오르면서 이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서 통치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거여요.  정통성을 주장하는 거여요. 

  그래서 가령 시편에 등극시라는 것이 있지요.  이스라엘의 왕이 등극할 때 부르는 시 그 중에 대표적으로 시편 2편이 있어요.  그 시2편 7절에 이스라엘 왕이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 뭐라고 선언해요.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그럼으로 해서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정통 합법성을 가지고 통치하는 거여요.  그런데 오늘 우리 목사님이 열왕기를 강의하시지만 열왕기나 역대기를 읽으면서 무엇을 느껴요. 

다윗의 씨들이 한결 같이 실패하죠.  그러다가 드디어 무슨 일이 벌어져요? 주전 587-6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북쪽 이스라엘은 그 전에  망하고 남쪽 유다는 이때 완전히 망하지요.  그리고 유대인들의 다수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지요 그런 다음에 중동의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의 포로로 와 있는 유대인들을 다시 유대 땅에 돌려 보내면서 그 중에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자 스룹바벨을 리더로 삼아서 돌려 보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게 하지요.  그것이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 쓰여졌기도 하고 학개서나 스가랴서 같은 곳에 다 기록이 되어 있지요.  스룹바벨이 다윗의 씨로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두고 유대인들이 아 나단의 신탁이 다시 한 번 성취될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러면 스룹바벨을 왕으로 다윗 왕조를 재건해서 그 위에 앉히시고 다윗왕조를 세워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 번 다윗 때의 영광을 줄 모양이라고 기대를 잔뜩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 무산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다가 그리이스의 통치를 받다가 로마사람의 통치를 받는 이렇게 되었다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 나단의 신탁을 하나님의 종말의 약속으로 보고 방금 쿰란의 문서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고 다른 문서에서 많이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종말에 다윗의 씨를 또 일으킨다.  다윗의 아들 다윗의 가지 다윗을 또 일으킨다고 고대하는 거여요.  그래서 이 나단의 신탁에서 메시야 대망 종말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일으킨다 다윗의 씨를 일으킨다.  다윗의 가지가 돋아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당시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이었는데 이것이 나단의 신탁에서 나오는 거여요. 

  그 계시에 의해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뭐라고? 예수는 스가랴서에서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해도 유대인들은 뭐라고 소리 질러요? 다윗의 나라가 재건된다고 소리 질러요.  이 기대에 의해서.   그런데 예수는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기 보다는 성전에 가서 시위를 하는데 내용이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을 새로 짓는다는 시위여요.  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느껴요? 예수는 지금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다윗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기 보다는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한다고요?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요.  네가 무슨 권세로 그렇게 했느냐?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무슨 권세로 했다고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요.  왜?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엇 하는 사람? 성전 짓는 사람.  그러기 때문에 아까 그 대제사장이 너 성전을 때려 부수고 짓는다고 했어? 안 했어? 하는 말에 예수께서 묵묵부답함으로 다시 물은 거여요.  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한거야? 안 한거야? 왜? 이 두 죄목은 나단의 신탁에 의해서 두 죄목이 아니라 하나죠.  예수가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다면 이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산헤드린의 신학자들에게는 뭐라고 들린거여요?

  이 친구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한다고 주장한 친구이구만.  다윗의 씨로서 다윗의 씨가 무엇이라고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 그 소리여요.  그러니까 이것은 두 개가 아니고 사실은 하나여요.  너 성전을 때려 부순다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새로 짓는다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예수는 답을 하지 않아요? 왜? 예수가 스스로 성전을 때려 부순다는 것이 아니어요.  하나님의 신탁의 성전을 때려 부순다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성전을 새로 짓는 거여요.  그런데 그런 것을 지금 제사장하고 논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지금 답을 안 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지금 제사장은 다시 한 번 묻는 거여요.  너 지금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윗의 씨로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지 거기에 예수께서 그렇다고 함으로 드디어 죄목이 성립되는 거여요.  그런데 그 죄목은 참람죄. 

  왜? 아까 참람죄가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라고요.  신명기법에 의하면 여러분들 집에 가서 신명기를 자세히 읽어 보세요.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말에 성전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곳 그래서 성전을 공격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공격하는 거여요.  신학적으로 그러니까 지금 성전을 파괴한다고 그러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방해하고 제사를 방해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거여요.  그래서 참람죄가 성립이 되는 거여요.  왜? 예수는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을(메시야로 입성을 했어요)구약의 메시야의 test에 의해서 성전을 새로 짓는 것으로 보았나? 얼핏 보기에는 우리 생각에는 이상한 사고 아니어요? 왜? 메시야가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정치적 자유와 정의로운 사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기대를 했는데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까지만도 그 기대를 잔뜩 부풀었는데 예수는 그것보다도 성전을 새로 짓는다는 주장으로 자기의 메시야 됨 자기가 어떤 메시야 성전을 새로 짓는 메시야 아니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이 하나님 나라 다윗왕조가 뭐여요? 유대신학에 의하면 다윗는 누굽니까?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행하는 자여요.  그러니까 다윗왕조가 뭡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실체죠.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것이 다윗 왕조지 메시야 왕조를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가장 이상적으로 하나님 대신 펼치는 자가 메시야이고 그 메시야 통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당시 열혈당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메시야 왕국 재건된 다윗왕조와 완전히 일치시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재건된 다윗왕조 세계를 통치할 다윗왕조로 생각을 했던 거여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이 어떻게 해서 그런 길로 가지 않고 도리어 성전 건축에 의미를 부여했나.  그것을 이 다음 시간에 자세히 논하겠습니다만 오늘 이것 까지만 하고 넘어가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언어들을 보면 차이가 있어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많이 그리죠.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를 다스리다로 많이 그리지요.  그 대신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 잘 안 나온다고 그랬죠.  그런데 예수께서는 거꾸로여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수 없이 쓰죠.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왕으로 그리지 않아요.  그리고 그의 행위를 다스린다고 하지 않아요.  예수는 하나님을 뭐라고 그려요? 하나님 아빠 항상 아빠.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를 뭐라고 그려요? 집안의 가장 아빠가 자녀들을 위해서 베푼 것으로 상속을 주고 아이들을 돌보고 식탁잔치를 베풀고 가장의 아빠가 하는 행동 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는 집으로 많이 그려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뭐가 있어요? 문이 있죠.  어느 문으로 들어가라고요? 좁은 문으로.  문에 가서 뭐하라고요? 두드려라.  그러면 어쩐다고요? 열리리라.  그 문은 뭐가 달려 있어요? 열쇠가 달렸죠.  그 열쇠는 누구에게 주었어요? 베드로에게.   문 열쇠를 열고 하나님 나라 방에 들어가면 그 속에 뭐가 있어요? 방이 있어요.  내 아버지 집에 뭐가 많아요? 방이 많아요.  그 방에서 뭐를 베풀거여요? 잔치.  이것이 예수께서 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련의 그림이어요.  이 그림은 별로 안 쓰고 예수의 비유 중에 하나는 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한 두 개 나올 정도여요.  주로 이 그림 다시 말하면 집 하나님 나라를 집으로 그려요.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 뭡니까?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아오는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하는 곳이죠.  그 제사가 잔치 유월절 잔치 초막절 잔치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다는 언어.  이 들어간다는 언어가 성전에 들어간다는 언어와 이른 바 신학적으로 뉘앙스적으로 완전히 일치해요.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해요. 

  가령 시편 15편 24편에 보면 성전에 누가 들어갈 수 있어요? 누가 시온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느냐? 시편 15편에 그렇게 시작하죠.  그럼 뭐라고요? 마음이 정하고 십계명을 다 지킨 녀석이 들어올 수 있다고요.  예수도 마찬가지여요.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어린 아이여야 되고 다윗은 누구보다 더한 의인이어야 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 이런 것들이 전부 성전에 들어가는 언어에 맞추어서 그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 자체도 성전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분이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루는 실행하는 단계에서 지금 성전에서 중대한 일을 하는데 그 일이 나단의 신탁에 메시야적 예언의 성취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로운 성전을 짓는 의미로 했다.  이 말이어요. 

  이 다음 시간에 이것은 사실 뛰지 않고 한꺼번에 해야 여러분들 기억에 잘 남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 버려서 여기서 끊을 수 밖에 없는데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왜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인가? 그것은 다윗왕조의 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사도들의 복음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것을 이 다음시간에 계속 할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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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10) 마8장5-13 성전과 하나님나라2-김세윤

 

 

  성경 말씀 마8:5-13절 까지 입니다.  제가 사무실에 여기 주보에 나온 대로 막14:17-25절 까지로 불러 드렸는데 한 주 앞서 가버렸지요.  이 다음 주에 그렇게 되겠고 오늘은 마 8:5-13절입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지난 두 주에 걸쳐 우리들은 예수께서 이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성전으로 생각을 하셨다는 것을 살펴보고 또 그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그리시면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파괴될 것과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인해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이 되었다는 것을 살펴 보았어요. 

  그런데 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파괴될 것을 예언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충분히 이해가 되나 자신이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했고 그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이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과업이다고 했는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마가복음11장 12장 14장에 있는 예수의 산헤드린에서의 재판기록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은근히 그러나 당시의 산헤드린의 신학자들에게는 의심의 여지없이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적 대망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삼하 7장12-14절 까지의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니까 메시야로서 자신이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전을 짓는 메시야라고 나타내 주었다는 것을 보았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성전으로 예수께서는 그렸다 또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을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지난 번 두 시간에 걸쳐서 생각을 해 보았어요.  그래서 조금 더 탐구를 해야겠는데 왜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을 성전건축으로 보았는가?


  이 질문은 왜 예수께서는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자신의 메시야적인 과업을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주는 군사적 정복자 정치적 왕으로서의 과업으로 보지 않고 성전건축으로 보았는가? 그것이 우리가 오늘 이시간과 오는 시간에 걸쳐서 생각해 볼 문제여요.  지금까지 제가 지난 시간에 우리 두 시간에 걸쳐 공부한 바와 오늘 과 이 다음에 걸쳐서 공부할 바를 간단히 소개하는 동안에 여러분들 마음 속에 아마 질문이 하나 자꾸 솟을 거여요.  도대체 예수께서 의미한 성전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을 성전건축으로 보았는데 무슨 성전을 건축한다고 그러는가? 우리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전건축했다는 말이 있어요? 또 사도들의 선포에 예수께서 무슨 성전건축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 말이 일체 없는데 예수는 엄연히 성전을 새로 건축하는 메시야라고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것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보았어요.  무슨 성전을 건축했다고요? 당장에 이 성전의 뜻이 무엇인가가 여러분들에게 제기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잠깐 지난 번에 보았던 그 본문들을 보겠습니다.  막 14장 58절 산헤드린에서의 주님의 재판장면을 다시 보면 그 증인들이 일어나서 뭐라고 했느냐면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예루살렘이 지금 있는 서 있는 이 엄청난 성전을 내가 부수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지으리라고 했습니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앞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은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죠.  분명히 사람들이 손으로 지었지요.  사람들이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지요.  예수는 그 막13장 2절에서 본 바와 같이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될 것을 예언했죠.   그러나 이 증인들이 예수의 죄를 더 크게 할려고 예수께서 파괴한다고 스스로 위협했다고 말을 돌려가지고 거짓증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여간 그 다음 그러면 예수께서 자기가 짓겠다고 하는 성전은 어떤 성전이냐?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 여기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이라는 말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것은 하나의 숙어여요.  우선 사람이 짓지 아니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 편에 속한 분에 의해서 지어지는 성전이다는 말이어요.   둘째는 이 속에 아마 2차적인 의미로 건물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의 성전을 말한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어요.   그 다음 또 예수께서 성전을 어떤 성전으로 의미했는가에 힌트를 주는 말이 “사흘만에”라는 문구여요.  이 문구는 호세아서 6장 2절에서 왔는데 여러분들 호세아서 6장 2절을 보시겠습니까? 1절 부터 읽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쫓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면 제 3일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 서리라”

  이것이 무슨 예언입니까?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찢김 당할 것임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실 것.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백성이 살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이어요. 

  바로 예수께서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사흘 만에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거여요.  그러니까 이 지금 막 14장58절에서 예수께서 의미하는 자기가 세운다는 자기가 건축한다는 성전이 돌과 나무로 짓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앞에 다시 회복되는 하나님의 백성 그래서 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 영생을 누리는 그런 백성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그런 성전을 짓겠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런 종말의 새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세우시겠다.  창조하겠다.  일으키겠다.  모으겠다.  그런 뜻으로 예수께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하시지 않았겠는가? 일단 그런 짐작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과연 그런가를 우리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면 첫째로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복음서들 우리 사도들의 선포를 담고 있는 사도행전 이후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무슨 성전 건물을 지었다는 말이 없어요.  예수께서 종말에 그가 다시 오실 때 성전 건물을 지으리라는 미래적인 예언도 어느 곳에 없죠.  사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그 종말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써 놓았어요.  그러니까 건물성전으로서는 전혀 예수께서 당시 짓겠다든지 미래에 짓겠다든지 그런 예고를 전혀 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어요. 

  또 하나의 이유가 우리가 이 관계에서 생각해 볼 것은 이 다음시간에 우리가 생각을 집중적으로 하겠습니다만 마침 또 교회력으로 고난절 수난절에 임하게 되니 시기 적절함도 있습니다만 예수께서 이 자기의 죽음을 제사로 해석을 해요.  그런데 크게 두 카테로리로 해석을 애요.  이 대속 죄인들의 죄를 덮고 씻어서 죄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내는 그런 제사로 그리고 또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해석을 해요.  그래서 자꾸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는데 자기 죽음이 하나의 제사라.  죄인들이 죄의 용서함을 확보하고 그 죄인들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새 언약의 제사라 그런다고요.  그런데 이 제사라는 것이 사실은 어디에서 이루어 져요.  구약에 의하면 제사가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제사라는 것이 성전의 고유기능이죠. 

  성전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언약을 상징하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을 자기 백성 삼아서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언약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의 거처지로 삼은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  그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상징하는 것이 성전이라.  그래서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어요.  집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그런데 예수께서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하니 그 속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부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 죽음이 속죄의 제사라는 말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무슨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지냄이  의미가 없음.  더 이상 제사가 속죄를 이루는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예고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부인하는 부정하는 함축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것을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제사를 방해하는 행위로 시위하는 거여요.  그것이 이른바 성전청결 사건의 의미 중의 일부여요.  둘째로 뭘 부인합니까?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뭘 부인하고 있어요? 이 속에 함축되는 의미가? 또 다시 건물이 지어 졌어요.  그러면 헤롯이 세운 건물을 다 헐어 버리고 쿰란 같은 곳에 은거했던 에센파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새로운 건물을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답게 지어서 거기서 또 짐승들로 제사 바칠 것.  그런 일도 있을 수 없을 것임.  그것을 부인하는 거죠. 


  전에도 제가 말씀드리지만 B.C.153-4년 그러니까 어림 잡아서 B.C.150년에서부터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민족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민족공동체가 완전히 망하는 주후 70년 이 사이에 이 쿰란 같은 곳에 유대 땅 사해 언저리에 있는 동네 쿰란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에 은거해 살았던 일단의 열성 율법수행자들을 에센파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또는 에센파라고도 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 살았던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신학적으로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율법에 대한 헌신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문자 그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세히 지키려는 하는 경건운동인 바리새파와 신학적으로 많이 같은데 몇 가지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그 가장 큰 차이가 뭐냐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했어요.  그 예루살렘 성전이 사두개파 제사장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가지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좀 마땅치 않은 바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져버리지 않았어요.  그 곳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그 곳에 가서 제사하고 이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에센파 사람들은 이 무렵에 예루살렘 성전이 엉터리 정통성이 없는 대제사장과 그의 패거리들에 의해서 장악이 되고 타락해서 하나님이 거기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  그 제사는 일체 무효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일체 부정하고 자기들의 공동체에 철수해서 자기들 끼리 금욕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았어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과는 완전히 절교하고 제사도 않고 완전히 절교하고 이 사람들은 종말에 자기들인 빛의 자녀들과(자기들을 빛의 자녀라고 보았어요) 이 어둠의 자녀들(어둠의 자녀들이란 물론 로마 이방 통치자들도 거이 속하겠지만 그들과 타협한 예루살렘 거짓 제사장들과 그의 패거리들 심지어 바리새파 까지) 과 거룩한 전쟁을 벌여 가지고 종말에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 빛의 자녀들이 결국 승리를 해서 성지를 회복하고 온 세상을 점령하고 그 때에 예루살렘에 거룩한 성전을 문자 그대로 건물 성전을 지어서 타락하지 않은 거룩한 깨끗한 이 제사를 구약의 율법이 원래 의도한대로 순수하게 드리리라고 보았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남긴 문서들이 아주 중요한데 그 문서들 중에 조금 늦게 발견된 문서 하나가 쿰란의 11번째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해서 11Q라고 하는데 그 문서이름이 긴 문서여요.  성전이라는 문서.  종말에 자기들이 성전(거룩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지고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새로 지을 성전 성전이란 말이 의미가 다르게 두 번 나와서 온동이 됩니다만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이겨서 예루살렘을 탈환 뒤에 지을 건물 성전 그리고 그 안에서 이를 타락하지 않은 깨끗한 제사에 대해서 그러한 새 성전과 그 곳에서의 제사에 대한 것이 수록되어 있는 문서여요.  상당히 긴 문서인데 그래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부인하면서 종말에 새로운 건물 성전을 지을 것과 그 곳에서 아주 깨끗한 제사를 드릴 기대를 가지고 살았어요. 

  그러나 우리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어떤 점에서는 쿰란 공동체 사람들과 아주 비슷해요.  예루살렘 성전을 부인하는 점에서는 비슷해요.  그것이 곧 파괴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데에서는 비슷해요.  또 어떤 점에서 같아요? 정확하게 말 합시다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것에서도 같아요. 

  어디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요? 쿰란 공동체는 건물 성전을 짓고 짐승제사를 깨끗이 드린다고 그랬는데 예수의 가르침에는 건물 성전을 짓고 짐승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어요.  제사는 이미 예수가 자기 죽음으로 드리는 거여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예수는 건물 성전과 그 속에서 짐승제사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전을 짓는다고 할 때 그 성전은 건물일 수 없다.  그렇잖아요? 좀 더 확실히 정의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성전을 무엇을 두고 성전을 짓는다고 했는가? 조금 더 정의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무엇을 하시려 했나를 한 번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접근해 봐요.  무엇을 의도하셨나?

  아까 지금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그렸다.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성전을 새로 짓는 행위로 보았다.  성전건축 행위로 보았다 하는 것인데 지금 여기까지는 부정적인 결론을 하나 내렸어요.  예수는 성전을 건물로 보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으로 보았느냐? 긍정적으로는 무엇으로 보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무엇을 의도했는가? 그것을 좀 보면 좋지 않겠어요? 그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 성경을 여러 곳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만 막 2장 17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거기서 한 마디로 예수께서 오신 목적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한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을 했죠? 막 2장 13절 부터 읽읍시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 가시다가 알페오의 아들 ········”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전에도 우리가 다 보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주로 잔치로 그리면서 선포했다고 그랬죠? 그 선포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무엇을 베풀었어요? 잔치를 베풀었다고 그랬죠.  그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하나님의 부요함의 잔치를 벌써 맛보게 함으로 그들이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확실히 참여해줄 것을 보증하는 일을 하셨다고 그랬죠. 

  지금 막2장을 읽은 장면이 그런 장면이어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서 예수께서 먹고 마심.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한 죄인들과 세리들과 먹고 마심.  그것에 대해서 이 신학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신학적으로 시비를 할 때에 대답하시기를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도가 뭐라고요? 죄인들을 부르기 위한 초대하기 위함.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 이 말이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누구입니까? 사단의 나라에 있는 사람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잖아요? 사단의 나라에 사단의 주권에 사단이 강요하는 힘에 죄짓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으로 불러내는 일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의도여요. 

  다시 말하면 사단의 통치영역 아래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 하나님 나라로 믿음으로 들어오라고 부름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이고 그렇게 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했느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려는 것 사단의 백성노릇 그만두고 사단의 종노릇 그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하늘과 땅의 지으심의 그 부요함을 상속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죠.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 구원의 축복을 이런 그림을 써서 잔치의 그림을 써서 또는 상속의 그림을 써서 설명을 해 주고 너희들이 사단의 나라에서의 삶이 어떤 것이고 결과가 어떤 것이고 결론이 어떤 것이니까 열심히 예수께서 선포를 해요. 

  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잔치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잔치와 상속의 그림으로 설명할 때에 그것이 빈말이 아니고 지금 벌써 구원의 힘을 나타냄을 예수는 무엇으로 시위했다고 그러죠.  치유로 시위했어요.  거의 모든 치유행위로.  문둥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혈루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손마른 자를 고치기도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우리 각색 병든 자 옛날에 명색이 대학생으로서 성경을 읽을 때 그 각색 병이 무슨 말인지 몰라 가지고 가지가지 병이란 말이죠.  난 각색병이란 병이 있는 줄 알았어요.  하여간 가지가지 병 꼭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고 심리적인 병 사회적인 병 까지 다 포함해서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여러분들 삭개오 같은 병든 사람 세리같이 병든 사람 예수께서 다 치유하심으로 그 구원의 힘을 시위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부른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게 했죠. 

  그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그 메세지에 응하면 그들에게 완성될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 구원의 잔치에 확실히 참여할 것임을 보증해 주는 의미로 그들에게 너희들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로만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극적으로 아주 물질적으로 시위를 주셨어요.  그것이 예수께서 그들과 먹고 마심의 잔치를 베풂이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 주었어요.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천국잔치의 참 맛을 볼 수 있음.  곧 종말에 완성될 잔치에 확실하게 참여하게 될 것임을 가르쳐 주었어요.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여러분들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된 하나님의 종말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고 잔치를 베풀어서 그 잔치를 시위하고 할 뿐만 아니고 여러분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하나님을 이제 아빠! 라고 불러봐라.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누구라고 가르쳤어요? 아빠! 라고 부르라고 가르쳤어요.  예수 자신만 하나님을 아주 독특하게 불렀다고 그랬죠.  어느 유대인도 그렇게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른 예가 없어요.  문서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께서만 아주 독특하게 불렀는데 그의 하나님 나라에 초대에 응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불러봐라.  아빠! 부를 때 뭐하라는 거여요. 

  하나님이 아빠 노릇해주실 것임을 확실히 믿고 그 아빠에게 청원할 것을 하라 말이어요.  여러분들이 아빠! 부르면 뭐하는 거여요.  청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요? 첫째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며 이른 바 주기도문의 첫 마디가 아빠!라고 했죠.  부르고 뭐하라는 거여요.  우리 모두 필요한 것을 인해서 청원하라는 거여요.  우리 죄를 용서 우리 일용할 양식 필요하죠.  아무리 영적인 사람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죠.  우리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청원하죠.  죄 용서를 위해서 청원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도록 청원하고 벌써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청원하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선포에 응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기도라는 것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 구원의 힘을 체험하게 하도록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으라는 거여요.  기도하라는 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 아니어요.  그러니까 종말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되는데 지금 벌써 왔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인간만사를 지배하신 하나님 그 무한한 하나님의 부요함을 그에게 아빠! 응석 부리면서 나아가서 어린아이가 마치 사탕을 달라고 좋은 구두를 사 달라고 졸라대듯이 그렇게 하라 이 말이어요.  그렇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어요. 

  하나님의 백성 그렇게 해서 궁극적인 의도가 뭐라고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같은 말이어요.  자 그런데 거기에 누가 응합니까? 여기 지금 막 2장에서 본 바와 같이 죄인들 세리들은 많이 응해요.  그런데 꼭 그들만 응한 것이 아니고 우리 복음서에 보면 상당히 그 당시 위세 당당한 바리새인도 응하고 고관들도 응하고 그래요.  우리 그런 사람 여럿 알죠.  예수의 장례를 치를 때 도운 아리마대 요셉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고 요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도 상층부에 속한 사람이고 예수께서 이런 또 전에도 제가 한 번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잔치 이야기 할 때 강조해서 다시 되풀이 하지 않겠는데 예수께서 부요한 추종자들에게 사실은 많이 의존했어요. 

  그래서 여러 곳에서 예수의 떠돌이 선교여행에 동참했던 제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팔레스티나 여러 곳에 붙박이 제자들 또는 붙박이 동조자들이 있었는데 예수 스스로 예수께서 나중에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보낼 때에 제자들이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어떤 파벌적인 것이 아니어요.  부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중산층만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민중신학자나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플로레타리아 가난한 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여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남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하되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뭐 믿을 만한 것이 있는 사람들은 응함이 적어요. 

  다시 말하면 돈이 있다든지 권세가 있다든지 또는 자기가 바리새인으로서 서기관으로서 신학적인 지식도 많고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경건생활 한다고 자기 의를 믿는다든가 하여간 이 세상에서 뭘 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응하지 않아요.  그 응함이 적어요.  아까 이야기한 예들도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뭐라고 한탄하는 거여요? 맘몬이라는 우상이 어쨌다는 거여요? 그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 이른바 예수가 말한 것처럼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부자들이죠.  그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어요.  왜? 이 세상에서 믿을 만한 그것을 믿고 그것이 부든지 권세든지 자기지식이든지 무슨 종교적 경건성이든지 그런 것에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 하고 자신의 구원자체를 확보하려하면 그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로 초월적인 영원한 구원을 줄 수가 없죠.  줄 수가 있는 것으로 환상을 하고 돈에서 권세에서 지식에서 종교적 경건성에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기의 이런 것에서 자기 부를 확보하려 하니 이것은 사실은 속이는 일인데 이런 것은 이 사람이 요구하는 것만큼  되는 거여요. 


  요구하는 것만큼이 뭐여요? 이 세상 내에서 시간 내에서의 안전과 행복만큼만 줘요.  시간 저편의 영원한 이 세상 저편의 무한한 삶은 주지는 못한다.  이 말이어요.  그런데 바로 이 세상의 내재적인 제한적인 것이 마치 구원인 냥 착각을 하니까 그러니까 우상숭배가 멸망으로 이끄는 거여요.  그러니까 첫 계명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거여요. 

  그런데 그러니까 그런 것을 미리 아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 이 세상에 믿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 스스로 죄인들이라고 자각하는 사람들 세리들 병자들 자기의 아픈 자기의 문제들을 절실히 아는 사람들 또 세상에서 겉보기에는 무엇을 좀 가지고 있지만 돈이 있든지 권세가 있든지 하지만 그것으로서 자기의 안전과 행복과 구원을 궁극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고 깨닫게 된 사람들 아까 아리마대 요셉이라든지 니고데모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예수에게 응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응함 가운데 어떤 사람들도 있어요? 아까 읽은 본문 마8장에 가끔 누구도 있어요? 이방인들도 있어요.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포하지 않고 자기의 선포를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시켰는데도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덧 입을려고 믿음으로 예수에게 나와 오는 거여요.  마 8장에 있는 백부장 같이 그것을 예수께서 누구와 대조합니까? 제일 유대인들의 유대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열성 바리새인들 자기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 함으로 자기들은 됐다고 생각해서 예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지 않은 사람들 그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 대조해서 여기 보세요.  마 8장 11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과 서로 부터 그러니까 세상 사방으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모든 민족들을 말해요 숙어여요)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둘러 앉아 잔치를 나누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지금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의 비젼이고 예수께서 의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젼이어요. 

  종말에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믿음으로 응해서 이 백부장 같이 믿음으로 나아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식탁에 둘러 앉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  그때에 어쩐다고요? 12절 그 때에 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먼저 불림 받은 특원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 가지고 자기 의를 주장하느라고 이 세상에서 자기가 뭐 기댈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예수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하지 않은 이 사람들은 쫓겨 나기지고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 거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의도였어요. 

  이렇게 말합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이 뭐냐? 그 구원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함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음.   그것이 예수께서 약속하는 구원이어요.  전에도 제가 설명을 했어요.  그것이 왜 구원이냐?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 피조물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창조주의 초월에 참여하는 길 아니겠습니까? 그것만이 구원아니겠어요? 여러분들! 우리의 피조물의 제한성 결핍성 가난함 우리의 시간적으로 제한된 장소적으로 제한된 지혜의 부족함 능력의 부족함 사랑의 부족함.  이런 것에서 모든 고난이 온다고 그랬죠.  이 고난들이 뭐냐면 우리가 죽음아래 있음의 증상이죠.  이런 상태로 있는 한 우리 제한된 자원을 아무리 개발해 보았자 그 제한성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시켜줌.  그의 통치아래 들어가서 그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의 왕노릇해 주심.  그의 아빠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살도록 그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여기서는 뭘로 그렸다고요? 잔치라는 비유로 그렸어요.  그의 풍요로움 그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무슨 그림으로? 상속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  그것이 예수께서 약속한 구원이어요.  그 구원을 한 마디로 말하면 뭐라고요? 영생이라 이 말이어요.  시간이 다가서 한 구절만 읽고 마칩시다. 

  눅 12장 32절 거기서 예수께서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을 주님은 뭐라고 설명하는가? 눅 12:29절 부터 읽읍시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그 다음 가장 중요한 말 왜 그러느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여기서 무리라는 말은 양떼라는 말이어요.  양떼는 구약에서 무엇의 그림이라고요? 하나님의 백성의 그림.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의 양떼라고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목자 노릇해 주신다는 그림과 너희들에게 아빠 노릇해 주신다는 그림이 겹쳐 있어요.  아빠노릇헤 주심이 뭐냐? 우리에게 베푸심.  우리에게 상속주심.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늘 걱정하는 결핍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어요.  이것으로 부터의 해방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하는 구워니어요.  그 구원을 어떻게 이른다고요? 우리가 그의 부름 그의 초대에 응해서 회개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때에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의도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창조 하나님의 백성모음이었단 말이어요.  자 그러면 여기 지금 예수께서 아까 여기까지는 성전을 예수께서 건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께서 성전을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로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그랬어요.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이 성전건축한다고 그랬다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살펴 보니까 하나는 백성의 공동체로 짓는다고 그랬다고요.  그래서 여기서 금장 우리가 아 예수께서는 성전을 하나님의 나라의 성전으로 그리고 이 성전은 곧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지칭했나 보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아 다 마쳐야 되는데 여기서 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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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11) 막14장17-25 성전과 하나님 나라3- 김세윤

 

 

막 14:17-25절 까지 입니다.  교독합시다. 

 

“막 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성전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런 말을 했고 지난 주에는 이 성전이 무슨 성전인가를 살펴 보았어요.  그래서 이 성전은 건물의 성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말했던 것 같다.  그것을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 보았어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고 자신이 새로운 심판을 손으로 만들지 않는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호세아서 6장 2절에 예언을 빌려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으로 말한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어요.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쿰란 공동체 사람들과는 달리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했던 쿰란 공동체는 종말에 건물 성전을 지을 것을 약속하고 결의하고 그랬는데 예수의 가르침은 그런 건물 성전을 짓는다는 약속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사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 성전의 기능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함으로서 더 이상 건물의 성전이 필요 없고 건물의 성전이 필요한 것은 짐승제사를 위해서 필요한데 더 이상 그 짐승제사가 필요 없음.  이런 것을 다 볼 때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의도는 사람들을 이 사단의 통치 영역에서 불러내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데 있었다.  이런 것을 전부 종합해서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새롭게 창조하고 모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표현했다.  거기까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이 성전이란 말이 문자대로 성전건물에 대해서 쓰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이런 말이 쓰일 수 있느냐? 그런 의문이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생겼을 거여요.  그런데 바로 지난 번에 소개한 쿰란 공동체가 아주 우리에게 좋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요.  쿰란이란 곳을 지난 번에도 설명했죠.  사해 유역에 있는 사막에 사해에 연한 사막지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데 그 마을에 동굴에서 1947년 이래 처음에는 아랍 목자들이 우연히 옛 문서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쿰란문서라고 그러는데 또는 사해문서라고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1947년 이래 옛 문서들이 발견되었어요.  그래서 그 뒤에는 전문 고고학자들이 자꾸 그 지역을 발굴해서 더 많이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 문서들을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까 아 이곳에 주전 153년-54년경에 예루살렘 성전과 절교한 일단의 아주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런 곳에 은거해서 살았구나 이런 쿰란 같은 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구나 하고 발견하게 되었어요.  보통 그렇게 쿰란 공동체에 은거해서 산 사람들을 에센파들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주후 1세기 후반에 로마에서 유대역사를 쓴 요세푸스라는 사람에 의하면 유대 땅에 크게 4개 학파가 있다고 기술했어요.  잘 아는 바리새파가 있고 또 하나는 사두개파 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우리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파죠.  그 다음에 에센파가 있고 그 다음에 열혈당이 있고 이 네 부류의 네 종류의 신학과 종교관행에서 다른 부류가 있었다.  요세푸스라는 사람은 상당히 높은 지체의 귀족출신의 유대인으로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주후 66-70년 사이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란에 앞장서서 동참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유대전쟁의 장군이었다고 소개를 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전쟁 초기 반란 초기에는 그 반란이 상당히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다시 깨끗이 하고 그래서 로마 황제를 위해서 제사하는 것 기도하는 것 다 없애 버리고 상당히 승승장구였다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로마에 베스파시안 장군이라고 베스피시아누스라는 장군이 그의 아들 디도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부장으로 삼아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어요.  그때 이 요세푸스는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그래요.  동굴에서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 포위된 상태로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거여요. 

  그 계시의 내용이 뭐냐면 이 유대전쟁은 실패하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된다.  그러니까 5대 6대 네로 다음 네로가 5대이고 네로가 암살된 뒤 베스파시아 누스가 황제가 된다.  천하가 그때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항복하는 것이 좋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하들을 설득을 해야 되는데 그러면 자기 부하들이 자기를 죽일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부려요.  어떻게 꾀를 부리냐면 우리가 이제는 다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기 저 원수 더러운 로마 사람에게 죽기 보다는 우리가 서로 죽이자 자살하자 자살 협박을 하는 거여요.  그래서 서로 죽이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그러면 제일 마지막에 누가 남겠어요.  자기만 남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만 살아 가지고 적장 베스파시아누스 한테 가서 당신이 황제가 된다.  이것은 내가 섬기는 야훼 하나님의 뜻이다고 선언을 했어요.  그러니까 베스파시아누스가 기분이 좋아 가지고 아 그 녀석 좀 데리고 오라고 그래 가지고는 잘 모셨다죠.  아니나 다를까 네로가 그 학정을 하다가 그 친위대에 의해서 암살된 뒤로 지금의 불란서 저 쪽 골 지방에 있던 로마의 군대가 팔레스티나에서 유대인들을 지금 무찌르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어요.  그러니까 베스파시아누스가 놀랬어요.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다.  신의 사람이다.  무슨 대성교회의 무슨 장로가 당신이 국무총리 된다고 하고 놀라 가지고 거기 목사를 뭘로 했다고 심문에 그렇게 났습니다.  거짓말인지 참 말인지 몰라도 하여간 엊그제 우리 읽었죠.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을 체험한 거여요.  그래서 요세푸스를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로마에 데려 가지고 자기 이름을 주어 가지고 로마 신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궁정에서 아주 우대했어요.  예루살렘은 자기 아들 디도에게 맡겼어요.  디도가 드디어 포위하다가 70년에 불화살을 이용해서 난공불락이라 생각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해서 성전을 다 불태워 버리고 성벽이고 뭐고 건물이고 진짜 예수가 예언을 한 그대로 돌이 돌 위에 하나도 얹히지 않을 정도로 다 갈아뭉겼어요.  서쪽 벽만 하나 남겨 놓았어요.  얼마나 어렵게 전쟁을 치렀는가 기념으로 서쪽 벽 하나만을 남기고 성전의 모든 제물들을 전부 노획물로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가지고 자기 아버지가 황제가 된 로마에 개선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 번에 말씀을 드렸지만 로마에 가면 포럼 로마룸이란 곳에 디도의 개선문이 지금도 서 있어요.  양쪽에 디도가 개선하는 장면을 부조해 놓았어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보화들을 군대가 메고 행진하고 뒤에 유대 노예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지금도 있어요. 

  그런데 요세푸스가 베스파시아누스 궁전에 앉아 가지고 많은 책을 썼어요.  그래서 유대교를 이방인에게 설명하는 그런 책도 썼고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유대 사람들의 눈에 볼 때는 완전히 역적 짓을 하는 것 아닙니까? 배신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삶을 정당화하는 변명서도 썼고 특히 유대 전쟁의 역사를 썼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역사와 유대전쟁의 역사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을 썼는데 그래서 오늘 우리가 신약성경을 연구할 때 요세푸스의 그들은 아주 중요해요.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그 당시 신학과 그 당시 사람들의 사상 그 당시 사람들의 신념.  뭐 삶의 모습 이런 것을 그러니까 신약성경의 배경 연구에 아주 중요해요.  그런데 하여간 그 요세푸스가 다만 이 요세푸스가 바로 이런 자기 개인적인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원래는 열혈당의 반란에 참여해서 장군 노릇을 했다고 해 놓고는 거기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 유대전쟁의 핵심노릇을 한 열혈당을 하나의 강도쯤으로 격하하고 그래서 좀 왜곡된 역사를 보인다 해서 학자들이 요세푸스의 글을 읽을 때는 상당히 비판적인 눈을 번쩍 뜨고 읽어요.  어느 정도 사실이고 어느 정도 왜곡된 모습이 나타났을까? 가끔이 아니고 최근에 요세푸스의 책들 중에서 몇 권을 대중적으로 번역을 해 가지고 신문에 광고를 많이 했습니다.  뭐 이것을 읽어야 성경을 이해한다는 광고를 많이 했는데 여러분들 그런 책도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 책들이 얼마나 잘 됐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잘되었다고 전제하고 잘 번역이 되었다고 전제하고 잘 번역이 되었을 경우에도 요세푸스를 읽을 때에 그냥 거기 뭐라고 써 있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고 좀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읽을 줄 알아야 해요. 

  하여간 요세푸스에 의하면 1세기에 우리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이런 당들이 있었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우리 신약에는 이 세파(사두개파 바리새파 열혈당)는 등장하죠.  그런데 에센파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두개파는 신학적으로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주로 모세오경에 의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모세오경과 구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상은 될 수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가령 부활과 내세에 대해서 구약에 잘 나타나 있지 않으니까 그런 것을 안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천사 이런 것들 안 믿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이른바 중간시대의 복잡한 정치상황 때문에 (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어요) 우리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들이 사두개파에 속했어요. 

  반면에 바리새파는 중산층 평신도들로서 구약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 율법대로 살려고 하고 특히 가령 출 19:5-6절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사장 왕국이다.  우리 말 번역에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제사장들의 왕국이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레위족속들만 제사장이 아니고 모든 이스라엘이 제사장들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들의 왕국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레위기법에 원래 성전에서 제사에 종사하는 제사장들만을 위해서 정해진 모든 정결의 법들을 자기들 평신도들은 자기들에게도 적용을 했다.  손도 씻고 그릇도 닦고 음식가리는 일 모든 일을 철저히 했어요.  그런 하나의 운동이어요.  그런 성화운동을 한 사람들이어요.  이 중산층 사람들로.  그러니까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되 어떤 이상 아래서 그러느냐면 이스라엘의 전체가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평신도들도 성전에서 제사에 종사하는 제사장들과 같이 거룩해야 된다.  깨끗해야 된다.  정결해야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모두 지킬려고 했어요.  율법을 법대로 다 지킬려니까 특히 이 사람들이 표 나는 율법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킴 십일조를 철저히 함 그래서 이 사람들은 모두 십일조 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좀 비꼬죠.  박하.  마다의 채소와 박하.  모든 것을 다 십일조 했어요.  그리고 쉬는 일은 아주 편안한 거룩의 상징들 아닙니까? 이런 것들을 아주 철저히 할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우리 구약의 정경이 끝난 뒤로도 발달된 신학들을 많이 받아 들였어요.  우리 구약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데 그 뒤에 더 자세히 설명된 지리라 생각이 되면 가령 부활을 굉장히 강조했고 오는 세상을 굉장히 강조했고 천사론 같은 것을 굉장히 강조했고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면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이어요.  사두개파 사람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들이고 그러나 또 삶의 태도에서는 정반대였어요.  사두개 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여당이어요.  집권층 사람들로서 로마 세력과 많이 결탁을 하고 삶의 방식도 헬라적 삶의 방식을 많이 도입을 해요.  바리새파 이 사람들은 헬라 로마 세력에 대해서 상당히 등을 돌리고 이스라엘의 순결을 짓밟는다고 더럽힌다고 보았고 될 수 있으면 헬라적 영향을 안 받으려고 했고 삶의 태도를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주 극단의 보수죠.  사두개파 사람들은 아주 요새 말로 하면 국제주의자라 할까 헬라화에 상당히 적극적이었어요. 


  에센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상당히 신학적으로 비슷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있느냐면 주전 153년 무렵에 예루살렘 성전이 대제사장이 그 전에 주전 168년 터 당시의 유대민족의 지배자였던 시리아의 안디옥에 본거지를 두었던 셀루키드 왕조에 아주 악독한 왕이 있었어요.  아주 악독한 왕이 누구냐면 안티오쿠스 4세라는 왕이었는데 이 친구는 자기가 신이다.  제우스신의 현현이라 해 가지고 자기 이름을 에피파니우스라고 불렀어요.  헬라말로 현현이란 말로 신의 현현이란 말이어요.  이 친구는 처음에는 주전 172년부터 유대교를 말살하기로 마음을 먹고 우선 그 때까지 정통 대제사장 가문으로 생각되었던 사독가문의 정통한 제사장 호니 3세를 때려치우고 처음에는 그의 동생을 제사장으로 잠깐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호니가와 사독가와 라이벌관계에 있었던 다른 가문의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세우기 시작했어요.  물론 뇌물을 잔뜩 받고 그런 짓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사독 가문은 솔로몬이 성전을 처음 지었을 때부터 그 성전의 대제사장을 했던 정통 대제사장 가문인데 유대신학에 의하면 이 제사장 가문에서 제사장이 쭉 나와야 되는데 여기서 깨진 것이어요. 

  그래서 마카비 형제들의 반란이 주전 168년에 일어난 거여요.  이렇게 안티오쿠스가 유대교를 휘어잡기 위해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만들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의 성전으로 탈바꿈을 시켜버렸어요.  그리고는 할례도 못하게 하고 안식일도 못 지키게 하고 돼지고기를 먹이게 하고 아주 유대교를 말살해 버렸어요.  그래서 마카비 형제들의 반란이 일어 나 가지고 그 반란이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헌정했어요.  그것을 기념하는 그 명절을 하누카라 하는데 그것이 12월 초에 벌어져요.  우리 크리스마스 보다 2,3주 전에 벌어져요.  그래서 오늘날 까지 유대인들이 하누카 명절을 지키는 이유가 거기서 유래해요.  이 마카비 형제들이 그랬어요. 

  처음에는 종교적인 자유를 얻어요.  셀루키드 왕조로 부터 나중에는 정치적인 독립을 얻어요.  상당한 독립을 얻어요.  그러자 자기들이 부패해지기 시작한 거여요.  그래 가지고 유대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이라는 자가 통치자 군대의 최고 사령관만 된 게 아니고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어 버린 거여요.  그것이 이 무렵이어요.  그러자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제 마카비의 반란으로 성전이 정화되어 가지고 이제 사독가문의 정통 제사장을 다시 모시고 율법에 따라 옳은 제사를 바칠 줄을 기대했던 제사장의 일부가 반란을 하죠.  이 유다 마카비는 하스모니아가였어요.  하스모니아가는 사독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는데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니까 자기들이 대제사장이 되었어요.  스스로 대제사장을 만든 거여요.  그러니까 이 무렵에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 왕에 의해서만 더럽혀진 것이 아니고 심지어 성전을 정화하고 바로 잡겠다고 한 하스모니아 가문의 통치자에 의해서 더럽혀짐을 우리들이 이제도 이상 복구할 길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일당의 제사장들이 아주 능력 있는 제사장 의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제사장의 인도로 그의 리더십 아래 예루살렘 성전과 절교를 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타락해서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곳에 계시지 않는다.  자기와 동조하는 제사장 무리와 평신도들을 이끌고 이런 쿰란 같은 사막에 공동체를 이루어 은거하게 된 거여요.  그것이 에센파였어요.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부활이나 내세를 이런 것을 믿는 점에서는 바리새파와 신학적으로 같아요.  그런데 이 바리새파는 유대 공동체에 섞여 살면서 그 곳에서 경건운동을 한 반면에 에센파는 이제 저 대다수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사회는 더 이상 어떻게 할 길이 없다.  저것들은 다 암흑의 자식들이다.  저건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고 그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고 따로 공동체를 이룬 그 점에서 큰 차이가 있어요.  바리새파는 사두개에 의해서 장악된 성전에 계속 참여해서 다만 이 사두개파와 타협을 이루었어요.  당신들이 제사장들로 성전을 장악한 것은 좋은데 다만 성전에서의 제사는 우리가 해석하는 율법대로 행하라.  사두개파도 타협을 했어요.  바리새파의 법 해석에 따라 제사하고 뭐 하기로 그래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싸우면서도 성전에 계속 나갔어요. 

  그런데 에센파는 소용이 없다.  에센파는 바리새파 이놈들도 썩은 놈이다.  그래서 에센파 쿰란 동굴에서 나온 문서들을 보면 사두개파와 대제사장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바리새파 에게도 욕을 많이 한다구요.  그래서 에센파는 보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죠.  그것과 아무 관계없게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기 시작했냐? 그런데 이 에센파의 원래의 시작이 누구냐면 제사장들이 시작했단 말이어요.  에센파의 쿰란 공동체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공동체를 조직을 어떻게 했느냐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조직과 똑같이 했어요.  성전에서의 제사 여러 등급의 제사장들 그리고 평신도들 이렇게 여러 조직을 그대로 성전 공동체의 조직과 똑같이 하고 여기서 더 이상 증거를 조사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사상이 발달 하냐면 이 공동체 자체가 성전이다. 

  왜 그러느냐면 성전이라는 곳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거처지란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버렸다 떠났다 그러면 어디 계시느냐? 이스라엘 중에 계신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무엇이냐? 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다수 공동체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다.  타락한 사람들이니까 하나님께서 벌써 떠났다.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다는 말은 그 성전을 중심한 유대 공동체에서 떠났다.  하나님은 자기들 중에 계신다 왜? 자기들이 진짜 이스라엘이다.  자기들이 참 이스라엘이다.  자기들만 언약에 신실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뭐냐?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공동체가 이스라엘인데 저 지금 예루살렘 성전 타락한 성전 하나님이 버린 성전을 중심한 저것들은 언약을 파괴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에게 계시지 않는다.  자기들이 언약에 신실하다.  자기들의 언약에 신실함이 무엇으로 나타나뇨? 율법연구와 율법준수로 나타나요.  자기들이 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성전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이 속에서의 율법연구와 율법준수 활동 예배 기도 찬양 목욕 이런 것들이 전부 제사와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율법에 따라 살려고 하는 행위 전체가 제사행위다.  이렇게 본 거여요.  그러니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성전이란 것을 더 이상 건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이라고.  왜?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심으로.  어떻게? 영으로 거하심으로.  그리고 제사라는 것을 더 이상 짐승의 피를 뿌리고 짐승의 살을 불태우고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행위가 제사다.  그러니까 성전이나 제사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쓴 것이 아니고 이른 바 영해해서 쓴 거죠.  문자 건물이 아니고 제사가 문자 짐승을 바친 것이 아니고 영적인 뜻으로 해석을 해서 썼다 이 말이어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쿰란 공동체의 문서에 보면 이 면과 또 하나의 면이 뭐냐면 종말에 빛의 자녀들인 참 이스라엘인 자신들과 저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저 암흑의 자식들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로마세력 이방인들과 거룩한 전쟁이 벌어진다.  그때 자기들을 천사장들이 하늘의 군대를 몰고 와 가지고 자기들의 거룩한 전쟁을 지원하게 되는데 그때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된다는 긴 문서가 있어요. 

  그 문서를 보통 1Q이라고 하는데 그때 종말에 전쟁이 날 때에 자기들이 빛의 자녀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어디로 치고 이런 긴 문서가 있다고요.  이 분서와 함께 지난 번에 이야기한 11Q 성전이라는 긴 문서가 있어요.  그 문서에 보면 이렇게 종말에 성전을 치러서 자기들이 결국 시온 예루살렘을 탈환을 해요.  암흑의 자식들을 전부 무찌르고 그러념 예루살렘에 새 성전을 짓는 거여요.  그래 가지고 정통 제사장을 세우고 정통 제사장에 의해서 율법대로 순수한 타락하지 않은 더럽혀지지 않는 짐승제사를 드리게 된다.  종말에 문자적인 심판과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린다는 사상도 겸하였어요.  종말에 그때까지는 자기들의 공동체가 성전이고 그 공동체 내에서의 모든 하나님 말씀 연구와 그 말씀에 따라 살려는 것을 제사라 한다. 

  자 여러분들 제사와 성전이라는 말을 이렇게 영해해서 해석하는 것은 쿰란 공동체가 이렇게 했다고 그러는데 이것은 우리 신약성경과 아주 비슷하죠.  고전 3장에서 바울은 뭐라고 그래요.  고린도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왜? 주의 영이 너희 가운데 거하니까.  쿰란 공동체도 하나님의 영이 자기들 가운데 거하니까 또는 하나님이 영으로 자기들 가운데 거하니까 바울은 한 술 더 떠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니까 .  그래서 우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이거죠.  고린도의 음행하는 자들에게 뭐라고 경고해요? 너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또 가령 롬12:2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몸을 성전의 짐승 제사 바치듯이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몸이란 말은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라.  그 때의 제사는 문자적인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바침.  도리어 이 사람들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살라.  구체적으로는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인 이웃을 사랑하고 이런 것이 다 제사라 이 말씀이어요.  하나님께 찬양하고 이런 것이 다 제사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약과 아주 비슷하죠.  쿰란 공동체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면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 갑자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 그런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 부터 그런 가르침이 있어요.  우리가 한 번 시편 114편 :22절을 한 번 읽어 보세요.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지금 성소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 말이 여호와의 집이라는 말이어요.  집을 성소라고 번역을 했는데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리라” 지금 유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의 집이라 이거여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영토라는 말은 나라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인 것.  유다와 이스라엘이 동의어이듯이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 요즘 지금 개역번역에는 성소와 영토라고 번역하는 말이 원래는 집과 나라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집과 나라가 같은 뜻이죠. 

  지금 여러 시간을 들여 가지고 예수의 성전에 대한 가르침을 아마 여러분들 처음 들었을 거여요.  아마 신약신학에서도 학자들도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안 가졌어요.  최근에야 상당히 중요하구나 관심을 갖게 된 거여요.  그래서 내가 일부러 시간을 들여서 예수의 성전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데 왜냐면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중요한 일부였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께서 지난 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산헤드린의 최종 재판도 받고 처형되기도 하고 얼마나 중요한 주제입니까? 그래서 좀 자세히 하는데 하여간 여기 보세요.  우리는 무슨 관점에서 부터 시작했어요? 지난 2-3주간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성전의 언어로 선포했다. 

  그런데 예수가 처음 그런 줄을 알았는데 시 114편에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여요.  그런데 집이란 말은 우리 말에도 집이란 말이 얼마나 뜻이 여러 가지여요.  家, 건물의 뜻도 있고 가족의 뜻도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뭐라고 약속했어요? 내가 너희 집을 세우겠다.  무슨 소리? 너의 왕조를 세우겠다.  이렇게 집이란 말이 여러 가지 뜻이 있죠. 

  구약에서 집이란 말이 그렇게 말해요.  하나님의 집이라 했을 때는 일차적으로는 무슨 뜻이죠.  성전 건물을 두고 그러지요.  성전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죠.  거기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이고 하나님이 거기 앉아 계시니까 또 하나님의 집이라 할 때는 무슨 뜻? 이스라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집이라 했어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집이라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이죠?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그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가운데 계시니까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을 물리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성전이고 그 성전의 지성소고 지성소의 언약궤의 뚜껑이 하나님의 어좌라.  이렇게 집이란 말이 건물성전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이중의미를 갖는 것을 우리가 구약에서 부터 쭉 살펴 볼 수가 있어요. 

  바로 그러한 사상에 근거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집 노릇을 못 할 때에 하나님의 집은 그러면 뭐냐? 하나님이 하늘에 하나님의 집이 있듯이 땅위에다 하나님의 거처지가 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지가 아니면 그러면 뭐가 하나님의 거처지냐? 진정한 참 이스라엘의 공동체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처지다.  이렇게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 구약에서 부터 오는 가르침에 근거해서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인데 지금 그 점에서 예수가 쿰란 사람들과 같아요.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 사도들 지금 우리가 아까 바울에게서 예를 들었습니다만 그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어요.  다만 뭐만 달아요? 이 사람들은 종말에 건물을 지을 것을 생각했는데 예수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슨 점에서 같아요?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 성전이 아님 하나님께서 더 이상 거기 거하지 않으심.  그러면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뭐냐? 쿰란 공동체는 자기들이 공동체라고 주장했는데 예수는 자기가 새로 세우는 새로운 공동체를 성전이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런데 이것을 예수는 어떻게 세워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서 사람들을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통치로 불러들임으로 초대로 초대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새로 구성하는데 그것이 성전이다.  왜 그것이 성전이냐? 그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데 언약의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거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을 선물하고 순종을 요구하는 주님으로 거하신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구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신뢰하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런 관계에 놓이게 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의 의도였고 그것을 예수는 성전이라는 그림언어로 그리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런 성전을 짓는다고 그랬는데 자기가 사흘만에 새로 짓는다고 그랬는데 그 성전을 어떻게 짓느냐? 성전을 짓는 수단 그것은 전에 오늘 읽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 말씀 이전에도 제가 간단히 설명을 했는데 그 잔의 말씀을 보면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라는 거죠.  많은 사람을 살리는 그 말은 어디서 왔다고 그랬어요?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극으로 자기 제자들에게 해석을 주었어요.  그런데 뭐라고 해석을 주었어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다.  피의 제사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이 말은 이사야 53:10-12절에서 왔다고 그랬죠.  그것은 뭐냐면 죄 아래 주의 종이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로 자신을 내어 줌으로 그 하나님의 백성을 의롭게 한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아 그들을  의롭게 하는 대속의 제사다.  언약의 피다.  그 소리는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말이어요.  이것은 출애굽기 24:8절과 그 외 여러 곳의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언약을 세우는 제사 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벌어져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는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두 개의 범주로 해석을 했어요.  하나는 대속의 제사로.  대속의 제사로 초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가 용서되어서 의롭게 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  또 하나의 범주는 언약의 제사로.  그것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고 선언함.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함.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 살게 되는 그런 백성이 창조됨.  이렇게 자기 죽음을 설명하는데 여러분들 보세요. 

  자기 죽음이 제사라고요.  제사는 뭐여요?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제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죽음이 마지막 제사여요.  그래서 새로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제사.  그러니까 그 위에 제사가 더 필요 없는 거여요.  그러니까 성전 건물이 더 필요 없는 거여요.  그 건물 성전에서 다시 짐승제사가 필요 없는 거여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가 성전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성취함으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말이어요. 

  시간이 가서 여기서 마치겠는데 이 다음시간에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성전의 의미를 성취하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어떻게 성전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인가 이것부터 시작을 해서 아마 우리 가운데 있는 질문들 다윗왕조와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의 복원이라.  동일시했는데 예수는 다윗왕조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았는가 그 질문에 답을 해야겠고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이 막 14: 25절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마실 때 까지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신 날 까지는 마시지 아니 하리라.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된 그때에 하나님 나라의 그 사이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어떤 의미로 하나님 나라라 할 수 있나?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할 수 있나? 이런 문제들을 이 다음 시간에 우리 토론하기로 합시다.  오늘은 역사적인 배경을 좀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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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12) 막14장17-25 예수의 죽음과 하나님나라-김세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은 지난 번에 두어 차례 벌써 읽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막 14:17-25절까지를 저와 여러분이 교독합시다.  “저물매 열둘을 데리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는 마시지 아니 하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벌써 12회째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결론에 도달해요.  사실 오늘은 결론을 맺으려고 두 가지 문제를 생각 하려고 그랬어요.  하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와 그의 죽음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가? 특히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라ㅡ하는데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 문제를 하나 다루려고 했고 또 하나는 지난 번에 두 주 전에 맺으면서 이 다음에 제가 하겠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던 다윗왕조의 재건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오늘 우리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오늘 다 다룸으로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몇 차례의 연구를 마무리 하려고 그랬는데 오늘은 짧게 하기 위해서 첫 번 것만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것은 이 다음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하려고 그럽니다.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쭉 공부를 따라 오셨다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지난 번 마지막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거라고 했죠.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다시 한 번 전체를 요약하면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오라고 우리를 불렀다고 그랬죠.  의와 생명을 약속하면서.  이 초대장에 예수께서 무엇을 쓰셨다고 그랬어요? 우리에게 너희들이 사단의 통치 아래서는 사단이 우리로 자꾸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월급을 주고 품삯을 주고 한다고 그랬지요.  그것이 어떻게 된다고 그랬지요?


지난 번에 사단이 우리에게 자꾸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네 스스로 네 자원으로 네 능력으로 네 지혜로 너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가라 하는 자꾸 충동한다고 그랬죠.  원래 사단이 아담에게 했던 충동을 우리에게 자꾸 한다고 그래요. 


  우리가 자꾸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의지함이 없게 하나님께 순종함이 없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주로서 그의 피조물인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거부하고 우리의 능력대로 우리의 지혜대로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죄악이라고 그랬죠.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의 제한성 속에 갇히니까 우리의 제한성 결핍성 속에 갇히니까 거기서 무엇이 온다고요? 고난들이 나온다고요.  그것이 죽음의 증상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우리로 죄를 짓도록 사주하고 지으면 죽음으로 댓가를 치르는 그런 상태로 우리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 무한하신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고 순종해 살라.  그것이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고 의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그러니까 무한한 부요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적인 신적인 삶을 얻게 된다.  이것을 성경의 숙어로는 영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약속을 예수께서는 무슨 그림으로 즐겨 그렸다고요? 잔치의 그림으로 즐겨 그리고 간혹 상속의 그림으로 많이 그렸다고 그랬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음.  그래서 하나님의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그런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얻게 된다.  그것이 생명이라.  그것이 구원이라.  이 말이어요.  그런 구원을 약속하면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초대한 거여요.  그렇게 한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려고 하나님의 백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려고 다시 말하면 우리 피조물로 하여금 아담 이래로의 창조주와의 분리된 창조주에게 등 돌림으로 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받지 못하는 상태를 극복하고 창조주와 다시 연결시킴으로 우리가 우리의 피조물성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초월과 무한에 참여함으로 피조물의 제한성 결핍성에서 고난들을 다 극복하도록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란 말이어요. 

 

  이것을 예수는 또 어떻게 표현했다고요? 새 성전건축이라는 것으로도 표현을 했다고 그랬죠.  예수께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고 주장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시고 자기가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고 한 것인데 이때에 예수께서 짓는 새 성전은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고 인간이 지은 것도 아니고 돌과 나무로 지은 것도 아니고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이라고 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살펴본 것이 그것이어요.  예수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이라고 했고 그것을 건축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새 성전건축의 사명은 예수가 스스로 자기의 메시야적인 사명이라고 예수가 규정을 했는데 그것은 어째서 그런다고 했어요?


  삼하 7:12-14절 까지 나오는 나단의 신탁에 의지해서 그랬다고 그랬죠.  이 나단의 신탁이 유대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데 여기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올려서 다윗왕조를 건축하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게 하리라 하는 예언 그 예언에 따라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주장을 하는 거여요.  그런데 여기서 지금 유대인들과 의견이 엇갈리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특히 열혈당 유대인들은 예수 당시 다윗왕조의 재건으로 보았다고요.  왜? 다윗왕조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일을 했거든 또 성전도 건물 성전으로 보았다고요.  그런데 예수는 다윗왕조와 하나님 나라를 일단 분리해서 생각을 하고 이 다음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래서 막 12:38절 이하에 왜 서기관들이 당시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다윗 스스로가 시편 110편에서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고 예수께서 당시 신학자들 서기관들과 신학 논쟁을 벌이죠.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재건되는 이 지상의 다윗왕조와 동일시 할 수 없음.  나단의 신탁에 의해서 재건되는 다윗왕조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 제도일 수 없음.  또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 단순히 돌과 나무로 지어서 다시 짐승제사가 이루어지는 그런 성전일 수 없음을 말해요.  대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함을 말한다고 예수께서 여러 가지로 직관적으로 가르쳐요. 


  그래서 이 다음시간에는 우리가 예수의 그와 같은 나단의 신탁과 그 전승에 나오는 메시야 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얼마나 타당한가.   유대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 까지도 끝까지 이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와 동일시하는 것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가령 우리가 행1:4-6절 까지 보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승천하시는 예수를 붙들고도 뭐라고 제자들이 호소 겸 부탁을 해요.  하나님 나라가 뭐라고 그럽니까? 거기 행 1:4-6절을 보면 이들이 뭐라고 그래요.  4절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이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좀 더 가르치니까 6절에 그들이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나님 나라를 유대 다윗왕조의 재건쯤으로 생각하는 당시의 유대 민속 메시야 사상에 꼭 고정되어 가지고 그 기대를 끝까지 갖는 거여요. 

  그래서 우리가 평가를 해야죠.  왜 예수께서는 그러한 기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보았고 그것을 새 성전으로 보았는가? 지금도 이스라엘의 정통 신학자들은 메시야가 오면 다윗왕조를 재건하리라고 보는데 그것이 더 합당한 진리인가? 예수의 가르침이 더 합당한 진리인가? 우리가 살펴보아야겠어요. 

  우선 그것은 이 다음시간에 하기로 하고 우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의도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창설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을 예수는 새로운 성전 건축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했고 결국 새 성전건축 한다는 주장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는 거여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는 주장을 예수는 성전에서의 제사제물들 사고파는 행위를 금하는 시위 행위를 해서 사실은 자기 죽음을 유발하는 거여요.  그래서 예수가 성전에서 시위를 해서 데모를 해 가지고 체포되는 거여요. 

 

  그랬을 때 지난 번에 우리가 막11:27-12:11절에서 본 바와 같이 자기가 바로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자로 시위를 했다고 한다고요.  무슨 권세로 네가 이 일을 했느냐 하니까 예수께서 무슨 권세로.  세례요한의 세례 때에 하늘로 부터 임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일을 했다고 말을 하고 그래서 그 예비 심문에 의거해서 산헤드린의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네가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 성전을 건축한다고 했느냐 하는 질문에 그 질문의 다른 표현인 네가 메시야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는 질문에 그렇다고 함으로 이제 사형이 판결이 되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지금 성전에서의 재물의 사고파는 것을 금함이 아주 중요한 죄목이어요.  자기에 대한 체포와 자기에 대한 처형이 임박함을 알고 지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유월절 만찬 무렵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방해하는 시위를 했어요.  그러니까 성전 관리들이 예수를 붙들고 예비심문을 해서 그들이 감을 잡았어요.  아 이 친구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고 주장하는 구나.  그래서 그를 체포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때에 예수도 그 사건이 일어날 줄 알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싯점으로 기회를 삼아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의 의미를 여기서 설명을 해요.  미리 해석을 해요.   전에도 제가 한 번 설명을 했는데 예수의 하나님의 선포의 전체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하니까 일부 중복됨이 있는데 여러분들 양해하시기 바래요.   그래서 이 최후의 만찬은 3중 4중 5중의 상징성이 있다고 그랬지요.   우선 만찬의 시점이 유월절 만찬의 싯점이어요.   정확히 유월절 우리 공관복음에 의하면 이 만찬이 유월절 만찬의 싯점에 이루어져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하루 전 날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어요.   그것 조금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여러분들 아마 설명이 필요 없을 지도 몰라요.  하여간 알아 두실 것은 공관복음을 따르던 요한복음을 따르던 유월절 잔치의 context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런데 유월절은 무슨 날이어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종말에 있을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염원하는 절기죠.  그래서 메시야로 말미암아 모세와 같은 선지자 또는 메시야로 말미암아 빨리 있어야할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간절히 염원하는 그 시점이어요.  그 시점에 만찬을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굉장히 의식하는 절기여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장이 우리가 애굽에서 노예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어떻게 구원했는가 라는 첫 출애굽의 이야기를 쭉 하게 되어 있어요.  식탁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기념하고 빨리 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야를 통해서 또 출애굽의 구원이 있어야 할 것을 열망하는 그 때에 이루어지는 거여요.  둘째 연극의 재료들이 굉장히 상징성이 있다고 그랬지요.  먹고 마시는 것 예수께서 먹는 밥과 마시는 포도주를 재료로 삼아서 연극을 하는데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뭐하는 거여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내일 다가오는 사건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임.  유월절 무렵이라는 시간이 그것을 상징해요.  둘째로 그런데 그 구원은 뭐냐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거여요.  먹고 마시는 것이 상징하는 바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사건임.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자기 몸의 부서짐과 피흘림으로 이루어짐.  잔인한 죽음으로 이루어짐.  그 상징성을 우리가 다 알지요. 

  떡을 부수고 빨간 포도주를 붇고 하는 상징성 .  그런데 그것이 누가 주느냐? 자기가 내어 주어요.  자기 자신을 내어줌.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 이루어짐 이런 상징성으로 이루어 져있어요.   그것이 어떻게 덕을 입느냐? 떡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포도주를 마심으로.   이런 것이 지금 3중 4중의 상징성이 있는데 그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거기다가 떡의 말씀 잔의 말씀 해설의 말씀을 붙었어요.  연극의 제스츄어 몸짓 상징성의 몸짓에 해설을 덧붙였어요. 


  잔의 말씀을 보면 21절은 만찬의 제목이어요.  인자는 자기의 기록된 대로 간다.  내일 다가오는 것이 자기가 인자로서의 죽음인데 그것은 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2중 3중 4중의 상징성을 가진 제스츄어와 몸짓과 그것의 해설의 말씀들로 구성이 되는데 그 중에 잔의 말씀이 제일 풍부하게 되어 있으니까 잔의 말씀을 분석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이란 말과 ‘언약의 피라’는 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그랬지요.  이 잔의 말씀이 언약의 피다.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이 말은 이사야서 53장 10-12절의 인용이라고 그랬지요.  21절에 예수는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인자로서의 성경의 예언대로의 죽음이라는 것인데 성경의 예언이 어디 성경이어요? 이사샤서 53장의 예언이어요.  ‘주의 종이 패역한 불의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자기 몸을 대속의 제사로 내 The는다’ 는 예언이어요.  흘러버린다는 예언 그러니까 주의 종이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대속의 제사로 바쳐서 그 하나님의 백성의 죄가 덮어짐으로 그들을 의롭게 한다는 예언이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내일 피흘리는 잔인한 죽음이 이사야서의 주의 종의 역활을 감당하는 또는 이사야서의 예언대로의 죽음임 곧 대속의 제사임.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의롭게 하는 사건임.  이렇게 미리 제자들에게 해설을 해 준거여요. 


  이 언약의 피라는 말은 여러 가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출애굽기 24장 8절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시내 광야에 모아놓고 모세가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그 언약의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회중에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외치지요.  그래서 그 언약의 피에 따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이 되는 거여요.  왜? 언약이란 것이 뭐라고 그랬지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가 내 백성이다.  그것이 언약의 형식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아서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함이어요.  그것이 언약이어요.  그래서 이 시내에서의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복 주시고 그들에게 가나안의 유업을 주시고 이것이 다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되어요? 내가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가 내 백성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쪽에서 그 언약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되어요?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여 살아야 되거든요.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고 순종해서 살아야 되는데 이 친구들이 안 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목사님이 열왕기를 열심히 강의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것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역사여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언약이 파괴된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렘 31장 33절 이하에 뭐라고 예언해요? 새 언약.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무엇을 약속해요?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해요.  옛 언약은 그러니까 시내 모세를 통한 시내 언약은 어디에다 새겨 졌어요.  돌판에 새겨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장이 돌같이 딱딱해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은 어디에다 새긴데요? 우리의 심장에 새긴데요.  부드러운 심장 살에 새겨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내면에서 부터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이 우리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사상과 감정과 의지의 출처인 심장에서 부터 우러나오도록 하겠다는 새 언약이어요.  그런데 이사야서 42:6절이라든지 49:8절 같은데 보면 또 이 새 언약을 누구를 통해서 세우냐면 주의 종을 통해서 세운다고요.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9: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사42-53장 까지는 다 주의 종의 노래들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이방의 빛으로 내세울 뿐 아니라 백성을 위한 언약으로 내세운다고 예언을 해요.  이방의 빛으로 내세운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다 준다고요.  빛은 무엇을 가능케 해요? 앎을 가능케 하지요.  지식을 가능하게 하지요.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빛을 가능케 함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말이지요.  주의 종의 역활이 그것 뿐 아니고 백성에게 언약을 세운다.  언약의 중보자 노릇을 하게 한다.  이런 예언들을 지금 염두에 두고 인자는 어쩐다고요? 성경의 예언대로 간다.  죽음. 

  그런데 언약의 피라는 말은 이런 예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예수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어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어요.  새 언약을 세우면 무엇이 초래되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 되어요.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예수는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두 범주로 크게 해석을 한 거여요.  대속의 제사의 범주로 해석을 해서 곧 새 언약의 제사의 범주로 해석을 했어요.  그것이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인 한 무슨 효과를 가져 온다고요?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덮어 버리고 그들에게 용서가 일어나고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연결되게 하는 의가 초래되는 것이고 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고 두 개가 합쳐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무슨 사건이라는 거여요? 새로운 그리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란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은 로마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했다는 반란범으로서 정치범으로서 죽었어요.  그러나 유대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메시야라고 주장했다는 것이고 그런데 그 주장이 헛주장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위협하는 참람죄로 말미암아 신명기 21:23절이 선언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거여요.  왜냐면 신명기 21:23절이 당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자라는 선언이여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지금 이 시점까지 예수의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예수를 따라 온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의 입장에 여러분들이 한 번 서 보세요.  그들의 마음 속 깊이에는 예수가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로마제국을 압도하고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주고 그래서 더불어 자기들도 좀 어떻게 한 등 해볼까 하는 민속 메시야 사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지금까지 따라 왔는데 자기들이 하나님 말씀 자체로 하나님의 법 자체로 인정하는 신명기 21:23절에 예수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거여요.  왜? 예수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거짓 메시야로서 백성을 오도한 자로서 하나님을 참람되게 한 자로서 그러니 이들이 다 도망갈 것 아닙니까? 그들이 뭐 비겁해서 도망가기보다도 그들이 신학적인 이유로 이들이 다 도망을 간 거여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의 부활이 일어났어요.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어요.  바로 이런 신명기 21:23절 같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아까 목사님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이 지연할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변증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도 제자들이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부활했다고 이야기를 지어낼 수가 없어요.  유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가 저주받은 죽음이어요.  하나님의 저주받은 거여요.  그래서 제자들이 다 흩어진 거여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지어냅니까? 지어낼 수 없는 거죠.  신학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런데 하여간 예수께서 부활해서 그들에게 나타났어요.  그러면 여기 지금 요한과 야고보와 베드로의 입장에 여러분들 서 보았어요.  여러분들에게 지금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어요.  그러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제일 먼저 무엇을 깨달아요?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닫게 됩니다.  뭐가 옳다고 인정한 거여요? 어제 그제 2-3일 전에 자기 다가오는 죽음이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의 제사라고 설명한 것이 옳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거여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 신명기 21:23절이 선언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이 사실인데 그것이 자기 죄에 대한 저주가 아니고 우리를 위한 대신 대속 대표로 우리의 죄 짐을 지고 그 죄에 대한 징벌을 받고 한 제사구나.  그것이 확인된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하고 하나님의 그 구원을 치유로 시위한 것이 전부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한 거여요.  그러니까 이 제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그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고 초대하고 그러면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구원의 힘이 있음을 치유함으로 시위하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한다고 하고 그것을 새 성전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다 옳다는 말이어요.  그러고 보니까 예수의 대속의 제사다.  새 언약의 제사라는 것이 뭐여요? 아 그것이 새로운 성전건축하는 사건 아니어요.  성전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어요? 성전이라는 것이 무슨 근거로 예루살렘에 있는 거여요? 언약의 근거에 의해서 있는 거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 주심의 상징이죠.  그래서 성전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어좌가 있는데 그 지성소에 하나님의 어좌가 무엇입니까? 언약궤 아닙니까? 언약을 담은 상자 뚜껑이 하나님의 어좌다.  원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기로 작정하시고 그것이 성전인데 그 언약궤 위에 계신 것을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언약에 근거한 거죠.  죄라는 것이 뭡니까? 그 언약에 대한 위반이 죄여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그 관계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것이 죄거든요.  그 죄를 덮고 그래서 그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내는 수단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여요.  속죄제사라는 것이 언약의 법에 대해서 어긋남을 덮어 버리는 것은 죄를 덮고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언약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제사의 기능이어요.  속죄의 제사의 기능. 


  언약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의라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  피조물들이 다시 한 번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의 관계로 회복하는 것이 의여요.  그것을 확보하는 것이 뭐라고요? 제사란 말이어요.  그것이 성전의 제사기능이어요.  그런데 예수가 자기 목숨을 바로 언약과 대속의 제사로 바침으로서 예루살렘 성전과 건물 성전과 그 곳에서 타락한 제사장들의 부복한대로 그 짐승제사로 늘 확보하려했던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올바른 관계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성전이 가리키려고 했던 그 실상을 예수께서 성취한 거여요.  그래서 예수께서 어쨌다고요? 은근히 자기가 성전의 기능을 성취한다고 가르쳤다고 그랬죠.  죄의 용서를 성언하기도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하다고 선언하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가리킬려고 했던 바를 죽음으로 성취함으로서 성전을 성취해 버림으로서 이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간에 적어도 예수의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피조물 간에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언약의 관계 원래 창조 때와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여요?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하시고 옛날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듯이 그들 안에 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함.  

  성전이 뭡니까? 성전의 원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처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구 안에 거하시는 거여요.  예수의 언약과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들어간 그 사람들 안에 거하신다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뭐여요? 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성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로 성전을 건축한다고 그래요.  예수께서 그것이 진짜 구원이다는 말이어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한 번 멋들어지게 짓고 그것이 다 짐승제사 드리는 것.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다윗의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을 해 가지고 인간이 왕노릇 하고 좀 더 정의롭고 좀 자유롭고 풍요롭고 한 그런 정치 펴는 것이 구원도 아니고 궁극적으로 인류를 하나님의 창조주와 연결시켜서 그 창조주가 우리 안에 거하죠.  우리가 그 창조주에 힘입어 살게 됨.  그것이 구원이라는 말이어요.  그 구원을 이루었다. 

  자 이제 그럼 여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에 참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그의 죽음 언약을 세우는 제사 대속의 제사로 성취하는 거여요.  그래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사역을 마무리 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그것은 다 깨달은 제자들 예수의 부활 후 그것을 다 깨달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뭐가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예수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만들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버렸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까?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후자가 중요하죠.  이것이 구원의 사건이죠/죽음이 구원의 사건이죠.  예수의 가르침.  선포는 그 구원의 사건에 대한 예고요 약속이죠.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되풀이 하지 않고 어디에 집중했어요? 그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설명하는데 집중한 거여요. 


  그래서 고전 15장 3-5절 까지 누차 본 본문에서 사도들이 한결 같이 선포한 복음이 뭐라고요?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 그가 장사되었다는 것 그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 그가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다시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 죄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라는 것 죄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은 죄가 뭐라고요?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등을 돌리고 사단의 사주속에 자기의 내재속에 갇혀 그래서 죽음에 이르었음.  그 문제를 해결했음.  어떻게? 성경의 언어로 말하면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 만들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존해 살게 했다고요.  다시 또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것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말이 무슨 말이라고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해 살게 되는 관계속에 들어갔다고요.  그림으로 말하면 우리 생명의 근원인 우리 창조주에게 뿌리를 박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의 생명력을 힘입어서 살게 된 거여요.  그 생명력이 언제 완성이 되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이 될 거여요.  그런데 지금 벌써 우리는 그 생명을 덧입어 살 수 있어요.  단편적으로나마.  어떻게? 우리 신앙생활로.  더 구체적으로 우리 기도생활로.  기도라는 것이 뭡니까? 기도의 첫 마디가 뭡니까?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하나님을 무엇이라 불러요? 아빠! 아빠 부르면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요? 나의 지금 삶의 구체적인 고난들을 해결해 달라는 청원이죠.  그것이 다 뭡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행위는 뭐여요? 우리의 내재자원 우리의 자원으로 문제를 해결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를 빌리고 그의 능력을 빌리고 그의 사랑을 힘입고 그러려는 행위가 기도죠.  우리가 기도로 벌써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어 사는 관계에 들어갔죠.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단편적으로나마 지금 누려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맛을 보게 되는 관계에 들어갔죠. 

  이 다음 시간에 마지막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를 마칠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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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13) 막12장35-37 하나님나라와 다윗 왕조 1-김세윤

 

 

  오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해서 결론을 할려고 그러는데 제목은 지난 번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미 예고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다윗왕조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막 12:35-37절 까지 읽고 공부를 하십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우리 이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기관들 그러니까 당시 신학자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권위 있게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했던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다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가르친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 그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어요.  시편 110편 1절을 예로 들어서 예수께서 이 시는 다윗이 노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다윗이 시편 110편 1절에서 메시야를 부르되 나의 주라고 부른다.  메시야가 다윗의 주가 되는데 어떻게 해서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고 당시 유대인 학자들의 메시야 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질문을 제가하는 것으로 본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잘 나타난 바와 같이 당시의 신학자들이 메시야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보았을 때에 메시야가 가져올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의 재건 다윗왕조의 회복으로 생각을 한 거여요. 

  그래서 우리 신약성경이 쓰여진 전후의 시대의 문서들을 보면 메사야를 다윗의 혈통에서 나는 다윗의 아들로 생각을 하고 그 메시야는 바로 다윗왕조를 재건할 분으로 그렇게 많이 그려 놓았어요.  우리 신약성경에도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이런 곳에 그리고 그 외 여러 곳에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었어요.  가장 우리가 손쉽게 아는 것은 행 1:6절 한 번 보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붙들고 제자들이 뭐라고 아주 희망적인 질문을 합니까?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다윗왕조를 회복해서 이스라엘을 외세의 통치로 부터 해방하고 이스라엘에게 정치적인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정의 평화 이런 것을 가져다 줄때가 이때냐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 까지 예수의 제자들마저도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에 집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가령 우리가 막 11장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그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스가랴서의 예언대로 평화의 왕 메시야로서 겸손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과 그와 예루살렘의 많은 추종자들은 예수께서 에루살렘에 입성해서 로마 세력을 물리치고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왕으로 등극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줄 모양이다.  그래서 종려 가지를 끊어서 호산나 다윗의 아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여 하고 찬양하고 굉장히 메시야적인 열망으로 굉장한 것을 우리가 막 11장 같은 데서 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여러 시간을 들여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보았는데 예수께서는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의 재건과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해방 그러니까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의미로 해석을 하게 하는 어떤 가르침도 주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다분히 정치적 개념을 그의 가르침의 중심으로 삼으면서도 좁은 의미로의 정치권력을 취하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다스리고 하는 이런 일에 있어서는 별로 예수께서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도리어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갖는 제자들에게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말리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지난 번 시간 동안 우리가 공부한 것을 요약한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두드러진 사실을 몇 가지 요약을 하면 이 하나님 나라를 주로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하면서 그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을 통해서 지금 벌써 여기 펼쳐지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벌써 임하여 와서 하나님의 초월적 행위로 하나님의 통치가 벌써 우리 가운데 임해서 지금 그 구원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예수께서 주로 강조해해서 가르쳤다고 그랬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  온 증거를 무엇으로 삼았어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서 그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올라른 관계속에 들어갔음을 선언하고 그래서 그들과 잔치를 같이 나눔으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음.  그래서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그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보증을 받았음을 예수께서 강조했다고 그랬죠.  그래서 예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많이 했다고. 

  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그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벌써 우리에게 이루어짐.  주어짐을 어떻게 시위했어요? 병자를 고치고 병자를 고쳐서 사람을 온전케 함.  구체적인 고난으로 부터의 사람을 해방시킴으로서 또는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함.   또는 삭개오 같이 죄로 말미암아 이웃과의 단절 속에서 이웃에 대한 공포 속에서 어려움이 있는 자들을 그런 어려움으로 부터 건져냄으로서 그가 다시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이루게 하고 이웃과 평화의 관계를 이루게 해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하고 또 그가 그동안 착취하고 압박했던 사람들이 또 평화를 맛보게 하고 자유를 맛보게 하고 이런 식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를 통해서 지금 벌써 임했고 그 임한 것이 이렇게 사람들을 온전케 함.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꼭 육신적인 병고침만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또 육신적인 고난으로 부터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케 함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을 실제로 시위를 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입는가?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을 것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병자들이 또는 어려움에 있는 자들이 병자들이 문둥병자들 혈루병 앓는 여인이 또는 삭개오가 죄인들이 예수께 믿음을 가지고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통치를 대행하는 분이라는 그 믿음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그 믿음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의 요구가 곧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께서 바로 하는 행위가 곧 하나님의 행위인 것을 믿도록 그렇게 요구를 했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도록 요구를 했단 말이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가 자기 제자가 되라고 요구를 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종말에 구원을 약속하죠.  그런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종말에 심판이 있을 것임을 대표로 한 절만 읽으면 막 8: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종말에 오셨을 때에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할 것이고 지금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거부한다는 말이어요.  거부한 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하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종말에 심판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의 행위가 곧 하나님의 행위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를 했어요. 

  그리고는 또 하나님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로서의 삶을 어떠해야 하느냐의 가르침에 있어 사단을 왕으로 섬겼던 삶을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이제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서 하나님이 다스리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되느냐? 예수께서는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고 여러 번 강조했죠.  그것이 뭐여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만 예수께서 유구했어요.  왜 두 가지만 요구했어요? 모든 율법이 사실은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있는 거라구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은 무엇에 대한 반대말이라고 그랬어요?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말이라고 했죠.  이 십계명에 1-4계명 까지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거여요.  전적인 헌신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와 하나님으로 부터만 생명을 얻어 살려고 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  이런 것을 다 포함하는 말이죠.  그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 개념인데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우상숭배가 뭐라고 그랬어요?

  맘몬이즘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 그런데 맘몬이즘의 우상숭배 속에는 보다 더 본질적인 우상숭배가 있죠.  그것이 무엇이냐면 자기 자신의 힘을 믿는 것 인본주의적 우상숭배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이어요.  그것이 우상숭배여요.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 우상숭배여요.  첫 아담의 교만이라고 그려죠.  바울신학적으로 말하면 육신을 신뢰함.  우리 인간이 자기 육신을 신뢰함.  인간이 자기 육신을 신뢰하면 자기 힘 자기의 자원을 신뢰하는 그것을 의존하면 무엇만 얻어요? 자기 육신의 힘만큼만 얻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육심이 자기 인간의 지혜 인간의 능력 인간의 시간 이런 것이 확보할 수 있을 만큼만 얻는데 그것은 항상 결핍된 것이고 부족한 것이고 그래서 항상 고난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그런 거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 그것이 이제 돈에 대한 우상숭배로 가장 흔하게 돈에 대한 우상숭배로 표현이 되어요.  맘몬이즘으로 표현된다는 말이어요. 

  그것을 하지 말고 오로지 우리의 삶과 행복과 안전이 창조주 무한한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달렸다고 확신하고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어요? 나를 사랑한다.  나의 아빠! 내가 아빠로 부를 수 있을 만큼 내게 친근하고 내게 사랑을 베푸는 그런 하나님인 것을 믿고 그것을 믿으라는 말이어요.  믿어.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 우리의 복을 위한 거다.  그 하나님이 무한한 하나님이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어요.  나의 앞길 까지 전부 내다보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이 길로 가라고 할 때에 아 내가 그길로 가면 손해 볼게 없어요.  그러니까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표현 되어야 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거여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에게 뭐가 먼저 눈에 띄여요? 우리 스스로의 지혜로 헤아리는 그 길이 우리에게 안전을 더 보장하고 행복을 더 많이 가져다 줄 것으로 우리 눈에 띈다고요.  그것이 뭐여요? 사단의 유혹이다.  아담을 유혹했던 사단이 우리를 이렇게 유혹하는 거여요.  그런 시험에 들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라.  부자 관원의 이야기 그것도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죠.  그 부자관원이 어려서 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주장하는데 예수께서 그 계명을 다 지켰다고 주장하는 자에게 뭐라고 불러요? 그러면 네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것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 것을 보이라.  그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일 수 있어요? 이 사람이 전적으로 진짜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아니면 자기 재물을 .   하나님으로 부터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얻을려고 하는지 아니면 자기의 큰 재물이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지 예수께서 너 결정하라고 하는 거여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 속에는 뭐가 들어 있었어요? 그 요구에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맘몬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그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요.  다 팔아서 이웃에게 나눠주라 그랬더니 이 예수의 도전 앞에서 무엇을 결정해요.  무엇을 결단해요.  선택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거냐? 재물을 의존할 거냐? 하나님을 믿을래? 맘몬을 믿을래? 할 때에 이 사람은 어느 것을 선택했어요? 맘몬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어디로 갔어요? 슬픔으로 들어갔다고요. 

  그 맘몬이 확보할 수 있는 안전과 행복이라는 것이 결국 슬픔과 고난이라는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을 못해요.  그 인간의 내재의 제한된 자원이 보장하는 만큼만 보장해 주는 거여요.  그것은 무한한 것이 못되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한한 거죠.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거니까.  그래서 바로 예수께서 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된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살아야 된다.  그렇게 요구를 했어요. 


  여기서 잠깐 쉬고 그런 삶을 하면 정말 하나님의 다스림의 구원의 실제가 나타날까?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전적으로 헌신하고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으로 살면 정말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그만큼 더 우리에게 절실하게 나타날까?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일단 문제로 넘기고 넘어 갑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여간 그렇게 요구를 하는 거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이고 그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모으려고 예수께서 노력했다고 그랬죠. 

  그래서  사단이 네 힘으로 네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사단의 속임수 아래 빠져 가지고 우리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지혜와 능력을 개발해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고 자기의 삶의 의미를 확보하려는 그런 삶을 하려는 것을 중단하고 그런 삶의 자세에 등을 돌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런 삶의 자세로 돌아서는 어때야 돌아서요? 믿음이 있어야 돌아서죠.  그런 사람들을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모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무엇을 약속 했어요 구원을 약속했어요.  그 구원이 종말에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 속으로 들어가는 구원이다.  그것을 예수께서 주로 잔치와 상속의 그림으로 설명을 하면서 그 구원을 줄테니까 네 힘으로 너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런 사단의 통치 아래의 삶을 중단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네 몸과 같이 사랑의 삶의 자세로 들어오라고 예수께서 불었다고 그랬죠.  그런 예수께서 자기 죽음을 바로 이 약속한 바를 성취하는 사건으로 설명을 해 주셨다.  자기 죽음이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이기 때문에 자기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인들의 죄가 용서되게 하고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되고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버려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속으로 회복시키고 그러니까 하나님과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속으로 회복시켜서 창조주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계속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 피조물은 우리 생명의 원천인 창조주로 부터 계속 그 생명의 지탱에 필요한 힘을 얻어 살 수 있는 그런 올바른 관계속으로 우리를 집어넣고 그것을 다른 근거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함. 

  다시 말하면 상속의 그림이라고 그랬죠.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그의 죽음으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말이어요.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로 약속한 바를 성취했다는 말이어요.  성취해서 지금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이 되게 했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에 예수가 그러니까 어떤 분입니까? 아까 하나님의 대행자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밝히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우리에게 베푼 분이라고 했죠. 

  이 뜻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서 우리가 뭐라고 고백하느냐면 예수가 주이시다 라는 고백으로 표현한 거여요.  바로 예수가 주이시다.  하나님이 주이시죠.  창조주 그런데 예수께서 그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권 또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신다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화해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가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자들은 아까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 그랬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법이어요. 

  그런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함이 어떻게 이루어 지느냐하면 그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그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우리가 주 예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서 그의 뜻을 헤아려서 행하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이란 말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말이어요. 

  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런데 아까 진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 또는 자기 자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고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요구했다고 그랬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고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구원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고 그러는데 그 반대의 모습은 사단의 나라는 뭐라고 그랬어요? 자신에 대한 신뢰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의 뜻을 좇고 이것이 가장 어떻게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맘몬이즘으로 나타나난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자연히 이웃사랑이 없죠.  이런 삶의 자세는 그러면 반대로 구원이 아니고 죽음의 삶이다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거여요.  그런데 이것이 진짜로 맞는 말인지 진짜로 맞는 말입니까? 진짜로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해 전적인 헌신을 하라고 맘몬이즘 하지 말라고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고 우리 성경 전체가 그것을 가르치잖아요?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는 거여요. 

  그것의 반대말이 뭐냐면 자신을 의지하고 바울신학적으로 말하면 육신을 신뢰함.  육신에 따라 삶.  그것 사단의 나라 사단은 우리에게 속임수를 쓰는 거여요.  그것이 삶의 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죽음의 길이어요.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넓은 길이어요.  이것이 좁은 길이어요.  이제는 알겠죠.  우리 눈에는 이것이 삶의 길인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제가 자꾸 질문하니까 당황하지 않아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고 살면 자아가 없어져 버리는데 아까 그 부자관원도 다 팔아 가지고 불쌍한 사람 주어라.  여러분들도 그런 도전을 받았다고 해 보세요.  아 이것이 나 죽으라는 소리 아닌가.  그것이 왜 구원의 길일까?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고요.  부자관원이 무엇을 질문했어요? 영생의 길이 무엇이냐고? 어떻게 영생을 얻느냐고? 예수께서 영생의 길이 뭐라고 했어요? 자기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헌신해라.  맘몬에 의지함을 거부하고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그 사람 눈에는 지금 자기 삶을 지탱하는 것이 자기 맘몬이어요.  자기 지혜고 자기 능력이어요.  그런데 그것을 부인하라고 하니 죽음으로 간거죠.  그런데 예수는 그것이 삶의 길이라는 거여요.  영생의 길 구원의 길 한 번 곰곰히 우리가 생각을 해 보아야 해요.  여기서 .  전에 제가 작년엔가 제 작년엔가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를 특강할 때 이런 문제를 많이 다루었어요.  이것이 우리 눈에는 삶의 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께서도 그것이 상당히 우리 눈에 보인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것이 넓은 길이라고요.  믿음의 눈에만 이것이 삶의 길인 것으로 보이고 이성의 눈에는 이것이 삶의 길이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이런 삶을 하면 지난 번에도 본 바와 같이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구원할려고 부단히 노력합니까? 자기 지혜와 자기 선행을 개발해서 부단히 자기의 삶을 확보하고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려고 그런다고 그랬죠.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일면은 우리의 지혜의 개발이 우리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래서 그만큼 삶이 확대하는 면이 있다고 그랬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과학을 하고 그 과학을 기술로 응용해서 전에도 우리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농업혁명도 해서 풍요로운 양식도 얻고 산업혁명을 해서 소비도 풍요롭게 해서 우리 삶을 그만큼 확대한 면이 있죠.  우리 눈에는 그것만 보이는 거여요.  그래서 이것이 삶의 길인 줄 알고 열심히 가는 거여요. 

  그러나 그 길은 항상 죽음의 이면을 동반한다고요.  그래서 공해 문제가 나오고 그 보다 더 큰 문제가 인간성의 황폐화 문제가 나오고 인간의 지혜를 계속 개발해도 삶만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그만큼 확대되어요.  장소와 시간적인 제약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자유를 그만큼 확대하는 교통통신의 발달이 그만큼 우리에게 우리의 자유를속박하는 힘으로 나타난다고요.  첨단통신 장비가 얼마나 우리의 자유를 확대해요.   그만큼 우리의 삶을 확대하죠.  그러나 그 첨단통신 장비가 얼마나 우리의 자유를 또 속박해요.  첨단통신 장비가 발달이 되어 가지고 안방에서도 부부간에 자유롭게 대화하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 머리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도 자유롭게 못하게 되는 거여요.  왜? 어떤 기계가 발명이 되어 가지고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낸다고 해요.  그러니까 사고의 자유도 없어져 버린 거여요. 

  이렇게 인간의 지혜의 발달이 소위 문명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궁극적으로 죽음의 이면이 없는 삶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어요.  항상 삶과 죽음 삶이 확대되는 곳에 그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그런 삶과 죽음의 이중성을 가진 변증법적인 실제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기 때문에 이 길이 궁극적으로 구원의 길이 못되는 거여요.  사회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내 삶과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을 하면 내가 가진 자원을 어떻게 총동원해서 쓰겠어요.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자원을 늘리는데 총동원해서 쓰겠지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곳에 쓰겠지요.  그렇게 돼서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이리떼 늑대 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해방시키지 못해요.  그래서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늑대노릇을 하기 때문에 거기 항상 착취와 착취당함이 있고 불의가 있고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공포가 있고 다 죽음이죠.  그래서 이 길은 우리에게 삶의 길인 것 같아요.  자기의 것을 자꾸 모아야 자기가 더 행복해 지고 더 부요해 지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죽음의 길이어요.  지금 우리가 적어도 모르겠어요.  문명사적으로 처음부터 그러는지 아담이래로 계속 그러겠지만 특별히 산업혁명 이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른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중심적인 인본주의적인 관점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면서 부터 과격히 우리의 문명이 인간의 문명의 위기를 가는 거여요.  그래서 이 모든 병리 현상이 나타났다고요.  그런데 이것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한 편 우리에게 삶을 확대하고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확보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을 확대하는 것이 없다면 그래서 한꺼번에 이것이 죽음의 길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쉽게 우리가 버릴 수가 있겠는데 우리를 굉장히 유혹하는 면이 있어요.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에 놀라와 하니 그 찬란함에 놀라와 하는 면이 없잖아 있어요.  인간의 과학문명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확대했습니까? 그 면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길이 삶의 길인 줄을 알고 열심히 가는 거여요. 

  그러나 그 길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 인제 그런데 이 길이 죽음의 길이라면 이 길이 삶의 길임에 틀림이 없어요.  그런데 이 길이 삶의 길임을 아는 것은 금방 이 사회적인 사회학적인 관계속에서 금방 우리가 이해를 해요.  아까 이 길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적으로 그래서 불의가 일어나고 불평등이 일어나고 착취가 일어나고 그러니까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싸움 갈등이 일어나고 정말 고난이 일어 난거죠.  반면에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안전과 행복을 얻을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그냥 확보할려고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자기주장을 할 필요가 없는거죠.  그러면 돈이라는 것을 상대화할 수 있고 돈을 이웃을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을 할 수 있고 내가 만일 돈을 많이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나에게 대한 축복인데 그것은 나로 하여금 더 많이 이웃을 섬기도록 내게 맡긴 그러니까 내가 청지기다.  이런 자세로 우리가 돈을 쓰면 사업주와 노동자간에도 거기에 평화가 확대되고 정의가 확대되고 자유가 확대 되요.  사업주는 노동조합을 무서워할 필요 없다.  노동자는 사업주에 대해서 무서워할 필요 없고 그것이 자유와 정의와 평화 샬롬이 확대 되는거죠. 

  아 그것이 삶 아닙니까? 삶이 확대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한편 그래서 이 길이 삶의 길인 것을 사회적인 관계속에서 우리가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이 길이 삶의 길인 것을 .  우리에게 이 길이 삶의 길인 것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 지금 여기서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보장이 되느냐? 모든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의 자세로 살면 그럴 수 있겠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세로 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개발해서 은사를 개발하면 뭐하는 거여요.  삶이 확대되는 거죠.  그런데 그 은사가 무엇을 위해서 개발이 되요.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개발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섬기기 위해서 개발이 되는 거니까 만인이 만인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 은사로 말미암아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종노릇하도록 했다는 겁니까? 우리 주님도 그렇게 가르치고 바울도 그렇게 가르치고 정말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은사 지혜와 선행과 능력 그 은사를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섬기기 위해서 쓴다면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지혜를 개발해서 삶을 확대하는 것이 죽음의 이 면을 가져 오는데 자기중심적으로 쓰면 아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쓴다면 죽음의 이면이 없이 삶만 확대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의 실제 질서속에서 그것을 우리 성경의 종말론적으로 말한다면 이 세대 안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유혹하는 우리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라 너 중심적으로 살라는 우리를 유혹하는 사단이 완전히 박멸되기 까지는 누구도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어요.  누구도 완전히 할 수가 없어요.  사단 우리를 유혹한 사단이 완전히 박멸되어서 우리가 사단이 네 힘으로 네 뜻을 좇고 너의 이익을 위해서 살라 그 길이 삶의 길이다는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할 때까지는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하고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섬기면서 살려고 하면 그렇게 하는 사람만 손해를 보고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만큼 샬롬이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많이 손해를 보는 것이 우리 실제생활에서 많이 경험하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길을 가는 것을 주저하는 거여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요구를 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 살라.  그래서 교회사에서는 그동안 많은 실험이 있었어요.  아주 믿음이 철저한 사람들끼리 한 번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보자.  그러면 적어도 그 공동체 안에는 그만큼 삶이 확대되고 샬롬이 확대되고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이 실제로 나타날 것이 아니냐? 사실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런 종교집단의 삶의 모습에.  사실은 우리 교회가 그런 일을 해야죠. 

  자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난 번에 이야기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가 그가 오셔서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꺽을 때에 비로서 이 우리의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이 되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완전히 변화되는 거여요.  그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완성이 되는 거여요.  그때까지는 한 편 알곡과 귀리의 비유로 양과 염소의 비유로 이 이런 삶의 방식을 사는 자들과 그러니까 사단의 통치에서의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의 통치 방법과 하나님께 의존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살려는 자들이 공존함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 사단이 계속해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할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전대해서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뭐가 있어요? 핍박이 있고 그들에게 고난이 있을 것임.  그들에게 손해 보는 삶이 있을 것임을 예수께서 이야기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해요? 핍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사단의 뜻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사실은 죽음의 길인데 잠깐 이 세상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은 결국 죽음의 길이니까 그 길에서 나오라.  하나님 나라의 삶대로 산다면 사단의 적대가 있고 사단의 길을 좇는 사람들을 통해서 핍박이 있고 그래서 고난이 있고 손해 봄이 있지만 그것이 진짜로 삶의 길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어요.  요구한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사단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따를 때에 그만큼 삶이 부분적으로나마 완성이 되고 부분적으로나마 점점 화대됨이 있다.  그것이 겨자씨의 비유이고 누룩의 비유의 뜻이라고 그랬죠.  그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종말에 심판이 있고 갈라짐이 있고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종말의 구원이 약속이 되어 있죠. 

  그래서 이 역사속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와서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가 점진적으로 전진함.  역사속에서 완성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점진적으로 전진함.  사단의 통치아래의 핍박과 고난이 있지만 손해 봄이 있지만 그러나 점진적으로 그 구원이 전진됨.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사단의 뜻을 좇을 것이냐? 하나님을 좇을 것이냐? 사단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 것이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것이냐? 날마다 가치 판단을 하고 날마다 믿음의 선택을 하도록 부른다는 거여요.  우리가 이렇게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하고 이 말씀을 듣고 또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는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뭐하는 거여요.  날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위해서 하는 거여요.  사단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대로 살려고 곧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삶의 길이다는 말을 날마다 듣는 거여요.  사실은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모이는 거여요.  왜 그것이 필요해요? 한 번 들어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가 계속 사단의 나라에 굴러 떨어질 위험에 처해요.  날마다 그러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해요.  날마다 성도들이 모여서 서로 권면해야 되요.  뭐라고? 넓은 길 우리에게 삶의 길 같은 사단의 길을 갈 것이 아니라 좁은 길 그러나 그것이 진짜 삶의 길인데 손해 보는 길 고난의 길 그것이 진짜 구원의 길인데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하자.  그렇지 않고 사단의 길에 가면 맘몬이즘에 빠지는데 그것은 죽음을 확대하는 거다.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 단절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렇게 날마다 우리가 권면을 하는 거여요.  오늘 제직회도 있고 그만 해야겠어요.  이거 큰일  난네요.  중간에 또 끊어 가지고 아주 안 되는데 오늘 우리가 내건 질문은 하나님 나라와 다윗왕조와의 관계 그것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되는데 그것으로 가는 중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어요.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했던 다윗왕조의 복원 그리고 오늘 항상 성급한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적인 혁명 이른바 정치신학 해방신학이 말하는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함은 무엇을 뜻하고 어떻게 살아야 되고 이런 것을 우리가 좀 더 해야겠습니다.  중간에 끊어져서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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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14) 결론-다윗왕조와 하나님나라-김세윤

 

  

오늘 성경말씀은 막 12:35-37절 까지입니다.  교독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상당히 오랬동안 이모저모를 살펴 보았는데 지난 번 2주전 부터 결론을 하게되었어요.  그래서 이 본문을 지난 번에도 읽었고 이번에도 읽었는데 지난 번에 결론을 하다가 중간에[ 생략을 해서 오늘 이 결론의 두 번째 부분을 계속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연구를 결론함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를 시작을 했죠.  그것이 무어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실현한 하나님 나라는 다윗왕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구약의 다윗왕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은 전에 1년 반전에 크리스마스 때 제가 했던 특강.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와 연결되는 질문이어요.  그 당시 기억나십니까? 왜 유대인들은 예수 당시 지금도 예수를 메시야라 인정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가? 그 질문.  우리가 한번 다룬 일이 있었죠?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와 거의 동일시 하고 메시야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되 그 메시야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는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걸로 보았어요.  그래서 정치적인 자유와 사회정의 경제적인 풍요 평화 이런 것을 가져 올 것으로 보았어요. 

  우리 신약성경에서도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곳곳에 예수의 제자들도 바로 그와 같은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그런 메시야가 되어주기를 열망하는 것을 곳곳에서 보았지 않습니까? 또 예수께서 그와 같은 다윗왕조의 재건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기를 열망하는 것을 보지 않았어요.  대표적으로 우리들이 지난번에 행1:6절을 읽었어요.  다시 한번 우리가 토론의 틀을 설정하기 위해서 읽어 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그의 제자들이 모였을 때 예수에게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 질문에 메시야 예수가 다윗왕조를 회복해서 당시 로마제국으로 부터 정치적인 자유 독립을 확보하고 사회정의와 평등 경제적인 풍요 이런 상당히 물리적인 의미의 샬롬 원만한 삶 풍만한 삶을 가져올 것을 열망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난 열 몇 번에 걸쳐서 공부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에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분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예수께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하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려고 했다.  그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제가 요약을 했는데 여러분들 벌써 두 주가 지나서 다 잊어버렸을까봐 다시 한번 간단히 요약을 하면 예수께서는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로 사단의 나라 죄악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나라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의 와 생명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믿음으로 들어오라고 예수께서는 불렀다고 그랬죠.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부름이라고 초대라고 그랬죠. 

  하나님은 우리를 의와 생명으로 통치한다.  이 통치를 주로 예수는 무슨 그림으로 그렸다고 그랬죠.  잔치의 그림으로 상속의 그림으로 그리면서 지금 이 상태의 죽음의 상태에서 죄악과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초대했다고 그랬죠.  무슨 약속을 하면서 초대했어요? 바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겠다.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적인 생명 신적인 생명 영생이죠.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우리 피조물들의 제한성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으니까 하나님적인 삶을 얻음.  그것이 영생이란 말이어요.  그런 구원을 약속하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  그런 부름 초대를 했다.  그렇게 말했죠. 

  예수는 자기의 죽음으로 대속과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의 자기 십자가의 죽음으로 약속을 성취해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덮고 씻고 우리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새 언약을 세움 이것은 언약의 피라 그래서 자기 죽음을 설명했다고 그랬죠.  그래서 우리를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이 언약의 관계속에 들어가게 했다 이 말이어요.  예수의 죽음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속에 담긴 그 약속 우리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성취함.  그것을 예수의 부활 후 예수의 제자들이 깨달았다 이 말이어요.  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했음으로 부활의 이 쪽 편에 선 제자들은 아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한다고 주장하고 우리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해주겠다.  영생을 얻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의 성취로 자기 죽음이 속죄의 제사요 언약의 제사라고 했는데 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그의 죽음이 우리 죄문제를 해결한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죽음 문제를 해결해서 종말에 우리 구원을 가져올 종말의 구원자이다.  그것이 메시야이다.  바로 그의 메시야적인 행위는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이 나왔다고 했죠.  이렇게 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뭐가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의 종말의 새 백성의 공동체가 창조된 거여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어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어요.  이 사람들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는데 이들 위에 하나님께서 통치를 해요.  이들이 누구냐면 예수의 요구 부름에 따라 회개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 되서 하나님의 나라로 믿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죠.  그래서 이들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져요.  지금 현재 그런데 이 통치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면 예수가 대신 행사해요.  그것이 여기 지금 예수께서 인용하는 시편 110:1절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켜서 자기 우편에 앉혔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자기의 대권자 되게 했다.  그 말이어요.  그러므로 예수가 주이시다.  하나님이 주이시죠.  그런데 예수가 그 하나님의 통치권 대권 주권을 대행하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데 그 하나님의 통치를 예수가 대행했다. 

  누가 골로새서 1:13절을 읽어보세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의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된 우리가 어쨌어요? 사단의 나라 암흑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어느 왕궁으로 들어갔어요? 하나님의 아들의 왕궁으로 들어갔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갔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누가 대행하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서 자기 우편에 높이사 우편에 높이셨다는 말은 아까 뭐라고 그랬죠.  대권자 되게 했다고요.  그런 의미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아들의 기본의미가 뭐라고 그랬죠.  상속자란 뜻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자란 말이어요.  그러니까 골로새서 1:13절은 하나님의 나라를 아들의 나라라고 표현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백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는 백성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고 그래요.  자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공생애의 촛점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뭐가 초래되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의 백성이 창조된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가 주이시다고 우리가 고백을 하지요.  로마서 10:9절을 보면 우리가 세례 때 무엇을 고백하게 되었어요? 입술로 예수가 주이시다 그것이 롬10:9절은 세례 때의 고백을 지금 인용하고 있어요.  고백하면 어쩐다고요.  구원을 받았다.  세례 때 예수가 주라고 고백 세례는 뭐라고 그랬죠? 믿음의 공식화라고 그랬죠.  믿음과 세례는 같은 거여요.  그러니까 믿음이 뭐냐면 세례로 공식화하고 극화하는 믿음의 내용이 뭐냐면 예수가 주라고 부르는 거여요.  고백한다는 말과 부르짖다는 말은 같은 거여요.  그러면 구원을 받아요.  왜 그러냐면 이것이 무슨 행위냐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지금까지는 사단을 주로 섬겼어요.  그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고 이제는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하고 그 주로 부터 내가 모든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얻어 살겠다고 그에게 맡기는 행위가 부르짖는 행위이지요.  부르짖음으로 해서 바로 그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부르짖는 행위로 예수의 주권안에 들어오는 거여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는 거여요.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가 대행하니까 예수의 나라로 들어오는 거여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 속에 있어요.  이렇게 해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한 거여요.  제가 그러면 예수가 이렇게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실현한 하나님 나라 그래서 우리가 지금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으로 그 속에 참여하게 된거여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아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우리가 들어간 거여요.  하나님 나라가 여기 왔어요.  예수께서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하나님 나라가 왔어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어요.  현재 저기 하나님 나라가 있어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적 선포 그리고 그것의 기능적인 연장인 우리 교회의 선포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나라에 의해서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에서 깨달아 가지고 거기서 회개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서 더 많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도들의 선포와 오늘 우리 교회의 복음 선포 왜 그것이 복음 선포여요? 사단의 통치 아래서는 사단은 죄악과 죽음으로 다스린다고 그러지요.  여기 예수는 의와 생명으로 다스림이 예수가 주라는 것이 곧 기쁜소식이어요.  그것이 생명을 받은 기쁜소식이라고요.  그래서 그 복음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이 이제 공식적으로 세례 때에 고백이 돼요.  예수를 주라고 고백이 되요.  그렇게 해서 사단의 통치 아래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들어온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런 의미로 하나님의 나라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런 의미에서 뭐한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의 선포 선교를 통해서 확장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지난 번에 예수는 확장의 언어를 안 썼어요.  왜 안 썼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를 위해서 안 썼다고 그러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이 약화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확장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그랬어요.  기억 납니까?

  자 그러면 지금 하나님 나라가 우리 위에 실재로 와서 지금 현재 실현이 되어 가고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현재 예수의 공생애와 죽음과 부활  이것을 전체를 붙여서 신학자들은 전문 언어로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그래요.  유식한 신학적인 말이 자주 나오는데 그 말이 약자여요.  그리스도의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전체를 그냥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그래요.  그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왔어요.  그리고 온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도들의 선포와 오늘 교회들의 선포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통치 아래 많은 사람들이 들어옴으로 어떻게 들어와요?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들어옴으로 하나님 나라가 더 확장이 된다고 볼 수 있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실현이 되어 가는 거죠. 

  언제 그런데 완성이 된다고 그랬어요? 예수의 재림 때 완성이 된다고 그랬어요.  그 완성은 미래지요.  그리스도의 사건이래로 하나님 나라가 실현이 되어 거고 있는 거여요.  하나님 나라가 실현이 되어 간다는 말은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항상 뭐? 생명을 가져오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어요? 구원의 실체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실현이 된다는 말은 구원이 실현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미래에 있으므로 우리 구원의 완성도 미래에 있어요.  예수의 재림 때에.   그러면 우리 구원이 그 때만 있느냐? 그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구원을 하나님 나라가 지금 실현이 되어 가고 있는 한 그 구원이 우리에게 지금 실현이 되어 가고 있는 거여요.  이것을 내가 수 십번 강조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너무나 오래 동안 우리 기독교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를 했어요. 

  이 공간적인 이원론에 빠져 가지고 구원이란 지금 여기서의 이 아래에서의 삶과는 관계가 없고 저 위에 하늘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죽어서 가는 곳 죽어서 얻는 것 그것이 구원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와는 상관없는 거여요. 

  또한 시간적 종말론적 이원론으로 생각을 해 가지고 구원은 내세에 있는 것이지 지금 여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여요.  옳지 않아요.  물론 이른바 이것을 내세라 한다면 예수의 재림 때를 내세라 한다면 우리 구원의 완성은 그 때에 있을 거여요.  그러나 이른바 이미 내세라는 오는 세대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왔어요.   예수께서 뭐라고 했어요? 막1:15절에 거기서 부터 시작을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면서 귀신을 쫓아내면서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들 가운데 온 것의 증거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쨌다고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삭개오 같은 사람이 온전케 하는 우리 삶을 온전케 하는 힘으로 지금 시위되고 나타난다고 그랬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어요.  그러니까 왔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구원이 지금 여기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구원을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생각을 해서 완전히 추상화하고 관념화 해서 저 미래로 연기를 해버리든가 저 하늘 위로 관념화 시켜서 밀어버리든가 그것은 옳지 않아요.  너무 오래 동안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잘 몰라가지고 그런 식으로 가르쳐 가지고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머리 속에 꽉 박혀 있어요.  그래서 오늘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체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자 하나님 나라가 왔어요.  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요.  아까 골로새서 1:13절에 한 마디로 요약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실현되어 가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현재에 실현되어 가고 있는 거여요.  자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것을 무엇으로 표현했어요.  지난 번에 여러분들 누룩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로 표현했다고 그랬죠.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 같이 보일랑 말랑 하게 시작하지만 숲을 이루어서 누가 최근에 내가 어디 가서 우리 학생 하나가 그럽디다.  겨자 나무가 아무리 커봤자 큰 나무는 안 된답니다.  관목이라고 그럽니다.  모르고 큰 나무된다고 주장해 가지고 우수운 소리인데 숲을 이룬답니다.  하여간 그러나 새들이 깃들 그런 나무로 확장하는 것 그 다음에 누룩의 비유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침투해서 온 세상이 변화됨.  그런 비유로.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랬지요.  은닉성도 나타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점진성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필연성 이런 것들이 나타난다고 여러 번 설명을 했죠.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언제 실현이 되느냐.  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데 이 통치가 성령의 힘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주권에 의지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게 함.  이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이 소리가 다 들었다고 그랬죠.  의지와 순종이 고백한다는 말은 예배 때 주여 부르짖는 말과 같은 말이어요.  헬라말 한 마디여요.  그 말이 고백한다는 말도 되고 예배 때 부르짖는다는 말도 되는 거여요.  부르짖는다는 말은 주께 자신을 맡기고 그 주로 부터 자기 생명과 안전과 모든 것을 얻는다는 의지의 표현이어요.  동시에 그 주권에 내가 철저히 순종하겠다는 서약의 표현이어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게 하죠.  고전 12:3절에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의지하고 예수를 순종하게 우리에게 힘을 주어요. 

  그런데 예수에게 의지하고 순종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예수께서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 계명이라 그랬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이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했죠.  사실은 구약의 율법들의 요약 십계명의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 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고 나머지 계명들은 전부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예수께서 이 두 계명을 요구했죠.  여러분들 생각납니까? 고린도 전서 8-11장에 걸쳐서 바울이 길게 무엇을 다루어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그 문제를 다루어요.  그 문제가 왜 복잡해졌어요.  고린도 교회에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거기서 무엇을 요약했어요? 바울의 결론이 무어여요.  두 계명에 비추어서 행동하라.  우상숭배 자체는 안 된다.  그러나 우상에 바쳐진 음식 그까짓 것 먹어도 괜찮다.  우상숭배 자체에 참여하지 않는 한 우상에게 바쳐진 물건은 먹어도 된다.  다만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생각을 해서 자기의 우상숭배 음식을 먹는 행위가 그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줄 것 같으면 먹지 말라.  반면에 바울이 이제 함축적으로 말하지만 약한 자들은 또 강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  이것이 뭡니까?

   이웃사랑 이렇게 철저하게 바울도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우리 그리스도의 삶을 이 두 계명을 중심으로 정리를 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무엇의 반대말이라고 그랬어요.  우상숭배의 반대말이라고 그랬죠.  그런데 우리는 우상숭배하면 돌 조각 나무조각 이런 것을 많이 생각을 하는데 예수에게 있어서 바울에게 있어서 정말 위험한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못하게 하는 우상숭배는 뭐였어요? 두 가지였어요.  사실 하나는 인본주의 인간 스스로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육신을 신뢰함.  인간 스스로의 힘을 신뢰함.  하나님으로 부터 전적인 구원을 얻을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육신을 신뢰함.  그것이 인본주의 요새말로 하면 그것이 뭘로 나타나요? 맘몬 물신주의 이렇게 말합시다.  인신주의 인간을 신뢰하는 인신주의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물신주의 맘몬 숭배를 예수께서는 강력히 경계하죠.  누구든지 하나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 

  자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어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 왔어요.  전환이 일어났어요.  그러면 지금 하나님 나라가 실현이 되어 가고 있는 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도 실현이 되어야 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이 되느냐.  성령의 힘으로 나타난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갖게 하고 그 믿음을 유지하게 하고 곧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성령이 힘을 주며 그것이 뭐냐면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  그러면 구원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이 여기 지금 나타나요.  그러면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 제가 지난 번에 삭개오 이야기를 드렸죠.  삭개오가 물신주의에 빠져서 물질로 자기의 삶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려고 하는 한 그는 어떻게 할 수 밖에 없어요? 이웃을 착취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곳에 뭐가 발생해요? 갈등 고난이 발생해요.  그것이 사단의 나라의 죽음의 구체적인 현상들이어요.  사단이 삭개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얻을려고 하지 말고 네 스스로 네 힘으로 네가 돈이라는 것을 많이 확보해서 너의 안전과 행복을 많이 얻으라고 자꾸 사주하는 거여요.  죄악을 지으라고 자꾸 사주하는 거여요.  죄악을 지으면 무엇으로 품삯을 주어요.  죽음으로 품삯을 준다는 거여요.  그래서 삭개오가 물신주의에 빠져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물신주의에 빠져 있는 한 이웃을 착취함.  그와 이웃의 관계를 착취의 관계로 만들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곳에 갈등이 생기고 고난이 생겨요.  죽음 아닙니까?

  반면에 삭개오가 예수의 복음 선포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듣고 회개해서 그와 같은 삶을 지양하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겠다.  그것이 뭘로 표현이 되었어요.  자기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자기가 지금까지 착취한 것의 4배나 갚았고 더 이상 난 물질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요.  이웃에게 다 나누어 주고 그러면 그 곳에 뭐가 일어납니까? 정의가 일어나고 자유가 확대되고 평화가 일러나죠.  이것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샬롬이라고 해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구체적인 표현이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실현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반면에 삭개오와 반대의 인물이 또 하나 있죠.  그 부자 관원 이야기 그 친구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 지켰다 그 말이어요.  계명대로 다 지켰으면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 사랑을 해야 할 텐데 그래서 예수께서 그 증거를 보여 주라고 했을 때는 그가 과연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하나님으로 부터 안전과 행복을 얻을려고 하느냐 아니면 맘몬으로 부터 확보할려고 하느냐 하는 도전 앞에서 그 부자 관원은 무엇을 택했어요.  삭개오는 하나님을 택했는데 그 부자관원은 맘몬을 택했어요.  그래서 그가 슬픔 속으로 들어갔어요.  슬픔이 죽음의 구체적인 표현이어요.  삭개오는 기쁨속으로 나왔어요.  생명 속으로 나왔어요.  삭개오를 통한 샬롬이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내가 예를 많이 들었죠. 

  지난 번에 특히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치유를 가지고 여러분들 여러 번 많이 설명을 했죠.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가지고 우리의 지금 여기서의 우리의 이른바 물리적인 육신적인 삶과는 관계없고 영혼이 죽은 후에 받는다든지 내세에 받는다든지 이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그랬죠.  구원을 어떻게 생각을 해요.  관념화하고 추상화해서 미래로 그냥 연기해 버리든지 저 하늘 위로 생각을  해가지고 전혀 추상화 시키고 관념화 시키면 안 된다고 그랬죠.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 나라 예수가 선포한 성경이 가르친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 걸친 총체적인 거라 그랬죠.  우리 실존을 온전케 하는 것 그것이 구원이라고 그랬죠.  그것의 완성은 미래에 있으나 이미 벌써 실현이 되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왜 이 소리를 여러 번 되풀이 하는 줄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까 우리가 설정한 질문으로 부터 시작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예수가 실현한 하나님 나라가 다윗왕조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 사람들이 쉽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면 아 다윗왕조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실체로서 물질적인 것이다.  육신적인 것이다.  그것에 반해서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영적인 것이다라는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포함되느냐면 지금 우리 삶의 다른 영역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무슨 애매하게 추상화하고 관념화하는 무슨 영혼에 어떻게 관계되는 것 애매하게 추상화해요.  그것이 뭐냐면 교회 담벼락 내에서 가끔 모여서 하는 활동 .  거기에만 어떻게 관계되는 것 그렇게들 많이 생각을 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육신과 대응하는 개념으로 풀라톤적인 헬라적인 이원론적인 영과 육을 갈라놓은 의미로 영적인 의미가 아니고 이때에 영적인 의미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존재라 그런 의미로 영적인 의미여요.  그래서 그런 의미로는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영적인 것에는 우리의 육신적인 물리적인 지금 시간 내에서의 삶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그것이 영적인데 그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작용을 하는 거여요.  아까 삭개오와 그 부자관원의 이야기를 드렸지만 어느 영역에도 작용을 하고 사회생활에도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경제적인 관계속에서도 작용을 하고 정치적 구조속에서도 작용을 하고 어디에도 작용을 하고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 몸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육신적인 몸에도 작용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성령의 힘으로 나타나는데 그 성령의 힘이 치유로도 나타나요.  그러니까 성령의 치유의 역사는 더 이상 안 타나난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편견이고 그렇지 않고 치유로도 나타나요.  그런데 그 치유가 어떻게도 나타난다고요? 기도하고 안수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의사들을 통해서도 나타나기도 하요.  그러니까 기도하고 안수하는 것만 성령의 역사라고 했습니까? 여러분들 여러 번 가르쳤어요.  의사들의 수술을 통한 치유도 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여요.  성령을 통해서 그 의사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고요. 

  모든 선한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와요.  모든 구원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  그것이 구원인데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와요.  그러니까 이 구원의 힘이 안수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의사의 수술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떻게도 나타나요? 우리의 삶이 온전케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요? 지난번에 우리 회중에 예술 하는 분이 있어서 예술 하는 분들 내가 굉장히 존경하기 때문에 그 예술의 은사가 어디서 나와요? 성령의 은사.  그 한마디의 노래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감동하는 힘이 있죠.  그 음악 요새 T.  V.  광고에도 가끔 나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끔 부르는 노래 천사들의 빵이라는 노래 그 노래를 들으면 어때요? 여러분들.  물신주의에 돌아서서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웃에 너그러울 수가 있어요.  그러면 이웃과의 관계에 무엇이 발생해요.  샬롬이 발생해요.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이 되요.  또 누구의 위대한 풍경화를 본다고 합시다.  그 그림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경외하게 하고 우리의 피조물 된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음.  오로지 그로부터 생명을 얻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의 뜻에 절대적으로 헌신하겠다는 동기를 부여한다면 그 그림은 어떻습니까? 제가 아니라 아까 박 목사님이 한국이 아니라 세계 제일가는 설교가보다 더 훌륭한 설교를 한거여요.  복음을 선포한 거여요.  그래서 거기에 뭐가 발생해요.  샬롬이 발생해요. 

  어떤 시인이 어떤 소설가가 이 복음을 시라는 쟝르로 소설이라는 쟝르를 가지고 우리를 설득했다고 합시다.  몇 사람을 설득했다고 합시다.  거기에 뭐가 발생해요.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샬롬.  정치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죠.  정치의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또는 대통령이 이 복음의 요구에 입각해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구체적으로 더 많이 체험되도록 입법을 하고 행정을 하고 재판을 해간다면 그 사회에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정의와 더 많은 평등 평화가 일어날 것이며 사람이 더욱 북돋아줄 것이며 그 속에 풍요함이 일어날 것이며 경제의 질서도 마찬가지죠.  어떻게 해서 어느 나라는 잉여 농산물을 바다에 내 던져야 되고 어떻게 해서 어느 나라는 수백만이 아사를 해야 하고 잉여농산물을 태평양에 던져야하는 곳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풍요가 없는 것이며 물론 수백만이 아사하는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 경제학도 경제제도 우리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통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 경제의 구조와 경제활동의 상황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나타나도록 하면 공정한 분배가 일어나요.  그런데 그 공정한 분배가 구체적으로는 난 모르지만 그리스도인 경제학자들이 과제로 삼아서 해야 해요.  공정한 분배가 일어나면서 그러나 그것이 공산주의식 산술적인 공정한 분배여서 가령 인간들의 동기를 약화시킨다든가 창조를 약화시킨다든가 그래서는 안 되겠죠.  그런데 어떻게 완전은 미래에 있겠지만 지금 현재 좀 더 그것이 잘 일어나게 어떠한 경제 모델이 개발되었습니까? 과연 공산주의가 실패하는 마당에 과연 자본주의식으로만 계속하면 되느냐?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본주의식으로 계속하면 한쪽에서는 내다 버리고 한쪽에서는 물질적인 풍요로 인간성이 황폐화되고 정신이 마비가 되고 마약으로 성범죄로 썩어가고 죽음 .  물질주의적인 풍요에서 죽음이 나타남.  한쪽에서는 그것이 없어서 굶주려서 죽음이 나타남.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 이 하나님 나라의 그것이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이 더 잘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되요.  그러한 경제모델.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현재 실현되어 가고 있는 거여요. 

  마지막 하나만 한 카테고리만 말하면 이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 우리가 지금식으로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의 원칙하에 문명을 계속해서 추진하면 문명발달 문면전개를 계속해서 추진하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인간성의 황폐화와 도덕적인 타락과 부의 재분배의 문제로 굶어죽은 아사의 현장이 계속 나타날 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사하라 사막은 계속 확대되게 되어 있고 오존층은 파괴되게 되어 있고 자원은 고갈되게 되어 있고 세계전체는 물과 공기는 다 오염이 되게 되어 있고 그래서 결국 뭐가 발생해요? 죽음이 나타나요.  바울은 롬8장에서 뭐라고 해요.  이 피조물 세계 전체가 무엇을 기다린다고요.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을 기다린다고요.  그때에 피조세계 전체가 함께 구원을 받아요.  그 구원이 이미 시작이 되었어요.  그 완성은 미래에 있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정치의 영역에서 경제의 영역에서 여러 분야의 학문의 영역에서 예술에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체화시킬 때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통치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순종을 할 때에 그때에 이것에 반한 인본주의와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그 병 죽음이 점점 극복해지면서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 샬롬.  우리를 보다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사회를 보다 더 정의롭게 하고 우리 가운데 보다 더 평화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는 샬롬이 확대되어 가죠.  그렇게 구원이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보수 신학자들이 맨날 토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해야ㅡ하느냐 안해야 하느냐 는 사실 너무 원시적인 토론이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치영역에서 경제의 영역에서 예술의 영역에서 개인 간의 관계의 영역에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야죠.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  그럴 때에 그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더 온전해짐으로 우리의 삶이 회복이 되고 그만큼 생명이 확대 되요.  생명이 더 풍성해져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어요.  예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한 거여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그리고 사도들은 그의 복음 선포 그들의 복음선포 그리고 이어받은 오늘의 우리의 교회가 그의 복음선포로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거여요.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를 잘못 이해를 해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생각을 해서 저 하늘에 있는 공간적인 이원론 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거나 종말론적 이원론으로 저 아래에 있는 것으로 해가지고 지금 여기서의 삶과는 아무 관계없는 애매하게 우리 영혼과 어떤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잘 모른다고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구원의 힘이 나타나지 않아요.  자 그러면 이제 우리 결론에 도달해서 예수가 선포하고 실현한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이라고요.  오늘 이 시간에 요약해서 설명을 한 지난 열 몇 시간에 걸쳐서 공부한 바를 요약해서 이것과 다윗왕조는 어떤 관계에 있어요?

  우선 다윗왕조 예수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바랐던 문자적 물리적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의 재건 시온을 하나님께서 높여서 그곳에 다윗의 자손 메시야를 통치자로 세워서 로마제국의 식민자를 몰아내고 사회정의를 일으키고 모든 이방민족을 굴복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섬기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그것의 관점의 한계성이 금방 눈에 띄죠.  그것은 순전히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한계죠.  반면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온 인류 뿐 아니고 온 인류와 무엇까지? 온 피조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관점이죠.  아주 빈약한 민족주의 예수는 그것에 대해 엄중히 경계했죠.  차라리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동서에서 불려 모아져 하나님의 역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과 잔치를 나눌 것이로되 그때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어떤다고요? 쫓겨난다고요. 

  또 하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다윗왕조의 재건으로 생각했던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생각과 또 하나의 차이가 뭐여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우리 삶 전체를 회복하는 것이죠.  그 속에는 무엇까지 포함한다고요? 정치적 경제적 하여간 모든 삶 반면에 다윗왕조라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만 그친 거여요.  이것은 우리 삶 전체를 온전케 함이 일어나지 않아요.  우리 초월자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올바로 회복이 되어서 우리 피조물이 창조주의 초월에 참여할 때에 비로소 온전함이 되죠.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내세의 실제로만 생각을 하면 그것이 구원이 될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는 그런 이유들로 하나님 나라를 문자적으로 다윗왕조 재건하는 것 정도로 생각을 안 한 거여요.  그것은 다시 말하면 구약의 다윗왕조는 예수의 눈에는 무엇으로 본 거여요.  자기가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물리적 그림이었어요.  어떤 위대한 실제를 다 그릴 수 없으니까 몇 개의 선으로 그려서 나타내 주는 것이 삽화죠.  그림 또는 그림자.  그러나 그 삽화 그림은 구원의 실제가 될 수 없어요. 

  예수는 구약의 다윗왕조가 종말에 올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 그림 삽화 그것을 가르쳐준 그것이 어떤 것일 거라고 우리로 하여금 짐작케 하는 것이어요.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제가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왜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가? 에서 유대교의 진정한 메시야 사상의 한계와 그것의 진정한 의미와 우리 신약에서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제가 설명을 해드렸는데 이렇게 해서 그것과 연결이 되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두 가지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는 해방신학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의 재건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우리가 피해야 되요.  그것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포괄성을 무엇으로 축약시키는 거여요.  그것도 축약주의죠.  그것을 피해야 되요.  반면에 우리는 사실 후자에 집착해야 되는데 보수주의자들이 이른바 하나님 나라를 영화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의의가 우리의 삶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아까 이야기한 영육의 이원론에 빠지든가 내세 현세의 종말론적인 이원론에 빠져 가지고 하나님 나라는 저 하늘의 저 미래에 나오는 거여요.  아니면 지금 현재는 우리 영혼과 어떻게 관계있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의 상황 구체적인 정치적인 과정 경제행위 이웃과의 관계 우리 예술 활동 이런 것과는 별로 아무 관계가 없는 거여요.  소위 영적이죠.  우리 보수신학자들이 너무 오랬 동안 이 오류에 빠져 있었는데 이것도 피해야 되요.  이것도 축약주의여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져야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어느 형태든 우상숭배를 배경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통치의 샬롬이 나타나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신체적 삶에서 아 그렇게 해서 환경이 좋아지면 우리 신체가 더 편해지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요.  예술을 통해서 정치를 통해서 물론 지난번의 설교 한마디로 자살하기 직전에 있던 사람이 삶의 새로운 동기를 얻었다면 죽음 가운데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이렇게 일어난다는 것.  자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느냐? 제자도.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헌신해야 된다고요.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오늘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구체적으로 이것을 의미해요.  내가 오늘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예수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나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했다는 소리가 무엇이냐? 아까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 아래로 넘어왔다가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사단을 주로 고백하지 않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구체적으로 그것을 말해요.  애매한 것이 아니여요.  추상화시키고 관념화 시킬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그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그러므로 그 선한 의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 그것이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결단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죠.  애매한 것이 아니여요.  어려운 것이 아니어요.  자꾸 신학자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해 가지고 어렵게 만들고 복잡하게 만드는데 아주 간단해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아래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이 똑같은 말이어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할 때에 그곳에 뭐가 일어나요?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요.  그만큼 더 확대 되요.  샬롬이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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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감사!

 

 

출처 : 십자가 이야기
글쓴이 : 시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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