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1)
마 1장14-15 -천국복음 선포 -
김세윤 박사(미국 풀러신학대 교수,바울신학의 권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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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2)
막1장14-15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김세윤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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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8장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번에 이어서 우리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몇 번에 걸쳐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하는데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번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배경을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4가지 존재들을 살펴 보았어요. 간단히 요약하면 창조사상 그리고 타락사상 언약사상 종말사상. 구약과 유대교에 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 사상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 지난 번에 살핀 배경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으로 세상의 왕이었다.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여야 이 세상이 생명을 누리며 의롭고 평화롭고 축복가운데 산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힘으로 스스로 자기가 인간 자신의 왕이 되어서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 가지고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단의 통치속에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결핍이 생기고 악의가 생기고 고난들이 생기고 그런 것을 죽음이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데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줄 것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심으로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 그 언약사상 그런데 거기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제 오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권자인 메시야를 보내서 이 땅에 그의 통치를 세우심으로 이 땅에 평회와 샬롬을 이루신다. 그런 것이 4개의 존재들이 말한 바인데 4개의 존재들이 다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4개의 존재들이 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나 실제로 이 구약과 유대교에 하나님 나라라는 구절 숙어는 참 드물어요.
예수께서 쓰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자체는 참 드물게 나왔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것도 유대교의 중심사상인데 그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사상은 예수께서 상당히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새로운 언어였어요. 듣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죠.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사상이었어요. 4가지 사상으로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는 구약과 유대교에 근거해서 구약과 유대교와 계속성도 있고 예수께서 전혀 새롭게 구약과 유대교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새롭게 표현하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그 새로움도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의 메세지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의 메세지를 쉽게 이해하면서도 아! 새로운 가르침이다. 우리들의 랍비들이 가르침과는 좀 새롭다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늘 새로움. 더구나 예수께서는 랍비들과 같은 형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아주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어요. 전에도 제가 한 번 말씀을 드렸는데 전에 기억납니까?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 예수의 모든 가르침에는 엄청난 이 권위의식이 숨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예수의 권위주장이라고 그래요. 신학자들은 가령 αμην 이란 말 사용에서 우리가 그런 것을 제일 먼저 느낀다고 그랬죠. 우리는 아멘을 어떻게 씁니까? 아멘이라는 말은 확실하다. 진실하다. 그런 말이어요. 진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멘을 응답용으로 쓰지요. 하나님 말씀 끝에 아멘 이렇게 응답하지요. 그런 말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게 진리이다.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멘이어요. 또 기도 끝에 또 아멘 그렇죠. 내가 하나님께 하는 찬양과 청원이 확실히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진정으로 나의 청원이다 하는 뜻으로 아멘하죠. 그리고 대표기도 끝에 아멘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사람의 기도를 함께 하나님께 드렸다 하기 위해서 아멘 하죠. 이렇게 응답용어로서 유대인들도 꼭 그렇게 아멘 했어요. 응답용어로만 그런데 예수는 응답용어로도 썼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복음서에 보면 아주 독특하게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하고는 예언의 말씀을 선포해요. 그래서 이 아멘이란 말을 비 응답 용어로 문장의 제일 첫 머리에 쓰는 것이어요.
그런데 유대문서를 아무리 뒤져 봐도 아멘이라는 말을 그렇게 쓴 사람이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여 진 성경인데 우리 신약성경에도 이 아멘이란 말은 헬라어로 번역을 않고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만 해가지고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남겨 놓았어요. 왜? 예수의 독특한 어법이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말 성경 번역에도 그 정신을 살려서 그대로 놔 두어야지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에는 이것을 전부 진실로 라고 하여 번역을 해 놨어요. 그 뜻을 번역해 놨어요. 진실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요? 여러분들 성경 읽다 보면 공관복음에 뭐라고 무슨 말이 가끔 나와요?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진실로는 사실 전부 아멘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에는 성경 일독 하시고 이독하시게 되면 그 차이를 알게 되지요. 요한복음에는 어떻게 되어 있어요? 아멘이 두 번 되풀이 되지요. 요한복음을 우리 개역번역으로 읽는다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니까 요한복음에는 원래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어요?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렇게 되어 있는 거여요. 하여간 중요한 것은 아멘을 비응답용어로 쓰는 것은 오로지 예수만 이렇게 쓴단 밀이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속에 예수의 엄청난 권위주장이 담겨 있는 거여요. 이 예수당시에 랍비들은 가르칠 때에 자기 선생님들의 이름을 대대로 부른다고 그랬지요. 랍비ㅇㅇㅇ는 랍비ㅇㅇㅇ의 이름으로 랍비 ㅇㅇㅇ의 가르침을 가르치되 이런 식으로 . 그러니까 제가 랍비 김세윤이 자기 선생 랍비의 가르침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해 주는데 이 사람 선생은 ㅇㅇㅇ 이 사람선생은 옥한흠. 이런 식으로 3대 4대 선생 이름을 댔어요. 왜 그렇게 되었어요. 궁극적으로 그 가르침이 율법을 준 모세에게서 온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모세시대에서 부터 대대로 신실한 선생들에 의해서 이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된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 가르침을 이런 서문을 달아 가지고 가르칠 때는 여러분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려 가지고 제 선생 대대로 해서 궁극적으로 모세에게 호소함으로 제 가르침의 권위 그의 진리를 대대로 확보하려는 것이죠. 이것이 제가 사사로이 생각해 낸 진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세에서 부터 오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이 대래로 물려받은 위대한 가르침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이런 것 아닙니까? 또 구약의 여러분들 선지서를 읽어보면 선지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까 이사야서를 읽을 때도 뭐라고 그랬지요? 여호와의 말씀이다. 랍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에게 임했다. 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내게 말했다 라고 서문을 달고 그 다음에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지요. 그래서 선지자들도 청중들로 하여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 인간적인 말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이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나를 이렇게 영감을 해서 내가 지금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선포한 말의 하나님 말씀된 권위 진리를 확보하려고 서문을 달았어요.
그런데 이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께서 전혀 무슨 랍비 누가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의 가르침을 기르치되 그런 것도 없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다. 그런 것도 없어요. 누가 말해요. 내가 말하죠. 아! 그러니까 아멘이란 말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말게 되는 거여요. 꼭 구조가 이렇게 되는 거여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나의 권위로 말하는 것이다. 그 내가 가르치는 말씀이 진리됨 아멘됨 아멘은 무슨 뜻이라고 그래요. 진실하다. 확실하다. 진리이다. 그런 뜻이라고 그랬지요. 내가 기르침 말의 아멘 됨을 내가 보장한다.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에서 엄청난 권위를 주장하는 거여요.
그 다음에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모세의 율법에 대한 것에서도 예수는 엉뚱한 표현을 주장했다고요. 살인하지 말라. 옛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라고 십계명을 인용하면서 옛 사람들에게 선포된 임시적이라는 것. 그러나 이제 자신을 통해서 선포되는 종말의 완성된 계시는 그냥 남의 목을 치는 살인이 아니고 남을 상대로 미워한다든가 형제를 무시해서 바보 멍텅구리라고 한다든가 이렇게 전부 살인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것은 모세의 법보다 더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는 예수의 자기주장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과 유대교의 종교는 모세에게 궁극적인 권위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이고 사상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가르침을 전제로 하되 그것을 더 풍부하게 새롭게 종말에 완성된 계시자로서 구약과 유대교가 더 새로운 더 풍부한 더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분이어요.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은 한편 구약과 유대교의 연속성도 있으면서 다른 한편 항상 새롭고 더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어구에도 그래요. 자 그러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하셨는가. 예를 좀 들면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 그것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예수는 뭐라고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까? ‘당신의 나라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마땅히 왕으로 주로 군림하셔야 하나 이 땅에서는 그의 왕권을 찬탈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에 의해 그의 왕권이 무시되고 그의 뜻이 거스려 지듯이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더러 이 땅에 사단의 세력을 꺽고 그의(하나님) 통치를 세워서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빌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지요.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주로 역동적인 개념이다라고 알 수 있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하나님 나라가 주로 장소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통치하심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왜냐하면 당신의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하게 하소서.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죠. 마찬가지로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저 하늘이 아니고 하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의미로 땅에서와는 달리 땅에서는 사단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니까 그런 의미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장소적인 의미로 하늘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우선 여기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주로 역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통치. 이것이 곧 구원이어요. 구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하심, 사단은 우리에게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무엇으로 품삯을 준다고 그랬어요. 품삯은 죽음으로 그랬지요.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한 말이어요. 롬 6:23절 죄의 삯은 죽음이라.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주어요. 그것을 지난 번에 제가 여러 가지 그림들로 설명을 했지요. 그러니까 사단은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해요. 하나님은 의와 생명을 주어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덧입는다. 하나님은 어떤 분? 무한한 창조자 우리 생명의 원천 우리 생명을 지탱할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는 분 그 분이 우리에게 왕노릇해 주신다. 그러니까 이것이 구원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역동적이 된다.
둘쩨로는 여기서 무엇을 배워요. 그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와야 할 것이어요. 우리가 빨리 오도록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되어요. 그러니까 미래적인 것이 되죠. 미래적인 것.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을 선포하셨는데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문학전승과 연속된 것이어요.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다고 그랬던가요?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사상에서 그 세대 역사를 두 시대로 갈라 생각했다고 그랬지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대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서 이 세대를 심판하시고 사단의 세력을 꺽고 하나님의 통치 다스리심을 이루시는 오는 세대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구원의 시대라고 그랬지요. 오는 세대.
그러니까 예수도 일차적으로 이 땅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이 구약과 유대교의 이 둘을 수용하셔서 하나님께서 빨리 사단의 통치를 꺽고 통치를 땅에 이루셔서 이 땅위에 의와 생명이 기득 차는 그런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기도하라. 그렇게 가르치고 그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곧 임한다고 여러 곳에서 가르쳤어요.
한 번 그 예를 보겠습니다. 막 9:1절 같은데 가령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미래에 임한다는 것 곧 임한다는 것 눅 21: 3절도 막 1:15절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이 구절은 이렇게도 해석이 되고 저렇게도 해석을 되어 엇갈리는데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하나님 나라가 거의 당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거의 모퉁이만 돌아오지 않았지 하나님 나라가 모퉁이에 돌아온 셈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가 가르쳤다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임할 것인데 미래에 임해도 곧 임할 것으로 그렇게 가르쳤어요.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인자’라는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여요. 그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을 인자가 오리라 그가 심판과 구원을 위해서 오는 것으로 그런데 그 옴이 하나님 나라여요. 함께 미래적인 것인데 임박한 일로 곧 온다고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것도 가면서 하나 해결해야할 문제여요. 재미있는 현상이어요. 이 우리가 복음서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와 인자라는 문구는 분명히 내용적으로는 연결이 되요. 그런데 이것이 같이 나오질 않아요. 거의 항상 분리되어서 나와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쓸 때에 인자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왜 내용적으로는 같은데 또는 연결되었는데 이렇게 분리되어서 나타나느냐? 그것도 우리가 해결해야 되어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요. 특히 인자 예수께서 자기를 인자로 불렀느냐 이것이 무슨 뜻이냐? 정확히 번역하면 문자적으로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란 말인데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왜 예수께서 자기를 그렇게 불렀는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을 해결해야 되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이것이 내용적으로는 일치하고 연결되었는데 같이 나오질 않은가? 그런 것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여요. 여기서 일단 내용적으로는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곧 온다. 이런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의 심판이 있고 구원이 있을 것을 여러 곳에서 말하지요. 막 12:32절에서도 그렇고 마 24:41,50절도 그렇고 여러 곳에서 말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관심을 가지고 묻기도 하고 즉시 임할 것을 생각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죠. 다음, 자,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임한다고 예수께서 가르쳤다. 그런데 그 미래라고 하는 것은 임박한 미래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둘째로 그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가르쳤나? 예수께서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양 모습을 가진다고 가르쳤나? 이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예수가 가르친 구절 생각납니까? 여러분들 이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예수께서 가르쳤나요? 주로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흔히 나오는 비유들이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주로 비유들로 가르쳤잖아요. 비유들은 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이 비유들을 자세히 보면 주로 잔치 베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그의 자녀들로 맞아들여 식탁을 배설하고 잔치를 베품 특히 잔치들 중에서도 흥겨운 혼인찬치를 비유로 많이 그렸죠. 또는 가끔 상속의 비유들도 가르쳤죠. 그럼 하나님 나라의 귀중함. 그것이 말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나라가 우리가 생각하고 계산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갑자기 임할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 도적의 비유로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가지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하나 다만 그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서 일체 그리지 않아요. 이것은 이 당시 유대교의 묵시문학이나 나중에 유대교 기독교 전승을 이어받은 이슬람 코란과 비교해 보면 예수의 가르침의 독특성이 금방 두드러져요.
당시의 유대 묵시문학이나 나중에 랍비들이 신비문학 더 나중에 이슬람 코란 같은데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굉장히 현란하게 그려저 있어요. 그 모습을 여러분들은 우리 요한 계시록에서도 일부 볼 수 있죠. 하늘의 궁전의 모습 금 은이 번쩍이고 무슨 촛불들이 번쩍이고 천사들이 굉장히 많이 거기 운집해 있고 그런 모습들. 그것이 묵시문학이나 신비문학이나 나중에 이슬람 코란에 있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런 기술이 예수께는 없어요. 다시 말하면 유대 묵시문학이나 신비문학에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것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귀중한 가치들로 생각하는 것들로 하늘에 전부 모여 있는 걸로 하나님 나라를 그려요. 그래서 굉장히 물질적인 인상을 줘요. 현란한 찬란한 그런 보석 금 은 보화가 번쩍이는 궁궐의 모습을 우리가 상상하게 한다든가 그 곳에서의 삶이 만족하고 이런 굉장히 물질주의적인 인상을 주는 그림을 많이 그려요. 예수께서는 그런 그림을 엄격히 억제하고 그 하나님 나라가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주로 일반적으로 천명하는데 그쳐요. 그 구원을 물질적인 그림들로 그리는 일을 삼가해야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든 것 종말의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대에 땅의 소출이 어떻게 된다고 해야 맞다고요. 포도 한 송이가 장정 몇 명이 들어도 못 들 정도로 커진다고 이런 그림으로 그렸다고 그랬죠. 그리고 우리 얼굴들이 광채가 빛나게 현란하게 된다고 그런 그림들로 그려놓았다고 그랬었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잃었던 6가지를 다 회복한다고 봐가지고 그걸 그림으로 그린 거여요. 얼굴들이 태양보다 빛나고 우리의 육신이 장대해지고 장성해지고 먹을 것이 풍부해진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 땅의 열매 나무의 열매들이 엄청나게 많이 커지고 이런 그림들을 많이 그렸지요. 예수께서는 이런 그림들을 일체 삼가했다는 거여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아주 현란하게 그려주어야 기분이 좋잖아요. 우리가 그런대로 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서 재능 있는 부흥사들이 그렇게 많이 그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을 절제하셨다는 것. 그것은 왜 그러느냐면 나중에 보겠지만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워넝에 대한 굉장한 강조가 있어요. 예수의 가르침에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들이 확대된 모습으로 자꾸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그림으로 삼아서 자꾸 그리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굉장히 이 세상적인 가치로 물질적인 가치로 오해하기 쉬어요. 그것을 예수께서는 피 할려고 그래요. 그것은 예수께서 상당한 절제된 모습 속에서 주로 두 그림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그렸어요. 둘 다 그림이 똑같은 그 실제를 말하고자 하는 바여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잔치의 그림은 예수께서 아까 우리가 마8:11절도 하나님 나라에 어떤 답니까? 동과 서에서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의 식탁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 함께 앉는다. 잔치를 나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많이 비유하시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어떤 비유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푸는 주인으로 종들을 시켜 가지고 세상의 큰 길 골목길 다 가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다 불러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쨌다고요? 잘 안 올라고 이 핑계대고 저 핑계대고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어요. 유대인들을 두고 하는 소리여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면서 유대인들에게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는데 유대인들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쨌다고요. 원래 초대되지 않은 사람들 절름발이들 이런 사람 다 불러 오라고요. 무엇을 말하는 것이어요. 우선 일차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야 되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을 원래 초대했다는 자들이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행하지 않으므로 이방인들이 먼저 잔치에 들어왔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함. 이것을 다시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죠. 잔치의 비유는 이 잔치라는 것이 우선 여러분들이 잔치를 머리에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라요. 풍요로움. 음식의 풍요로움. 그러면 잔치의 경우에는 뭐가 있어요. 만족함이 배불리 먹고 만족함 만족함이 있으면 뭐가 있어요. 기쁨이 있죠. 잔치의 기쁨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잔치를 하면 꼭 노래 한 자리씩 하는 아주 재미있는 풍습이 있지 않습니까? 잔치에는 산해진미 이런 것이 여러분들 잔치를 하는 그림이 금방 머리에 떠오르기도 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이 말이어요.
그럼 지금 우리가 사단의 나라 사단의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의 우리의 실존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요. 지난 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결핍. 우리의 피조물적 제한성에 갇혀 가지고 우리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장소적으로 제약이 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제약이 되어 있고 이런 결핍성이 있어요. 여기서 뭐가 와요. 욕구불만이 오죠.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쌓일 수 있는 불만 그래서 뭐가 있어요. 슬픔과 아픔이 있지요. 인생의 슬픔과 아픔 왜? 슬픔과 아픔이 고난으로 가득차 있으니까 아무리 능력이 부족해서 지혜가 부족해서 그러죠. 영원에 참여하면 그런 변화의 노예가 되겠습니까? 쇠약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사회가 어떤 사회여요? 악의가 가득찬 사회이지. 서로 어떤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고 그래서 좀 더 많은 안전과 행복을 쟁취하려고 만인이 만인을 대항해서 싸우는 이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늑대 노릇하는 것이 인간사회지이요. 그래서 다윈의 법칙이 적용되는 약육강식하고 적자생존하는 엄청난 생존경쟁이 벌어진 것이죠. 이것이 지금 우리 인간사회가 사단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참여하는 무엇이냐? 그 무한에 들어감 . 그러기 때문에 무한에 참여함. 그 속에 만족과 기쁨과 사랑이 있다. 그것을 잔치에서 표현한 것이어요.
이것은 예수께서 처음이 아니고 구약에서 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보통 잔치에 표현했어요. 구약에서 부터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도 그렇지 않습니까? 끝이 어떻게 되어요. 내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베푼다고요? 잔치상을 베풀어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앞에 상을 베설하시고 어쩐디고요? 내 잔이 넘친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 품에 앉고 나를 그 쫓던 사단의 세력에서 부터 나를 보호하실 뿐아니라 그들 앞에서 내게 상을 베풀고 내 잔이 넘치게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그렇게 잔치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에서 부터 오는 아주 중요한 숙어 메타포여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인들이 종말에 있을 그 메시야 시대 종말에 있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의 통치를 꺽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이루실 것을 잔치로 많이 그렸어요. 그것을 예수께서 이어 받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해요.
그러나 다만 가령 유대 묵시문학 같으면 그 잔치상이 어떻게 생겼고 그 잔치상은 어떠하고 뭐 많이 그렸을 것인데 예수는 일절 그런 것을 그리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우리가 참여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심. 그것은 뭘 말한다고 그럽니까?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 그러니까 피조물의 제한성 한계성 피조물성을 극복하고 어떤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피조물의 한계성에서 결핍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나옴. 이 고난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그랬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가 사단의 자리에서 우리의 피조물적 제한성 한계성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죽음인데 여기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럼 그런 생명은 어떤 생명이겠어요? 여러분들. 우리같이 결핍된 제한된 인간적인 자원들로 이루어지는 삶을 그런 삶을 삶이라고 그래요? 삶이라고 해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랬지요? 왜? 고난들 죽음의 증상들 죽음병 있는 삶. 이것을 우리는 인간적인 삶. 그런데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 하나님의 초월을 통해서 무한한 지혜에 참여함으로 불안함이나 무한한 능력에 참여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를 일으켜서 괴로운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적인 삶 하나님적인 삶 하나님의 무한으로 이루어진 삶. 인간의 죄악 된 자원으로 이루어진 삶을 인간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진 삶이 하나님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성경에서는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는 오는 세대에서의 삶이라는 말이어요. 아까 유대인들은 이 역사를 두 세대로 나누어서 보았다고 그랬죠?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를 찬탈해서 우리를 죄악 된 세계에 갇히게 만들어 가지고 죽게함. 다시 말하면 죄와 죽음으로의 통치에 반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오는 세대에서의 삶을 영생. 영생이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오는 세대의 삶이다. 그 말이어요.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해서 얻은 삶 이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이무런 결핍이 없는 삶. 아무런 고난이 없는 삶. 긍정적으로 말하면 온전한 삶 그러니까 신적인 삶을 가지는 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어요. 하나님과 같이 됨.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이어요. 인간이 피조물이 피조물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함으로 하나님과 같이 됨.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됨의 궁극적인 구원이 품위 있는것 같이 보임. 아담이 취한 길. 스스로 하나님께 대항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함. 요새 말하면 인본주의의 길 인간 스스로의 지혜와 선행을 계속 계발해 나가면 인간이 자기자신의 문제들을 다 극복하고 전혀 결핍이 없고 고난이 없는 세상을 만듬. 그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유토피아 세상이라 그러죠.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상상을 하지요. 그것을 성경은 무엇이라 합니까? 교만이라 합니다. 그 길은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어쩐다고요? 비인간화. 인간을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인간의 모양에서 타락하게 만들어서 인간 이하로 떨어지게 됨. 그래서 사단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하고 죽음에 떨어지게 하는 것. 반면에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해서 우리에게 좋은 길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감.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하고 그 통치속으로 들어감. 그러니까 역설이죠. 이것이 첫 아담의 길은 하나님이 필요 없음.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이다고 자기 주장함.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하로 떨어뜨리고 죽음으로 떨어뜨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기는커녕 죽음에 떨어 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선포하는 길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 노릇해주심에 스스로 나아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함 하나님의 무한한 부한 잔치에 참여해서 신적성장을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됨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이란 하나님과 같이 된다.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두려워해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런데 우리 가령 예수의 이 가르침을 여러가지 표현을 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됨. 곧 상속이라는 뜻. 바울이나 사도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 하나님의 형상으로 옴. 하나님의 영광을 얻음. 이런 것들도 다 똑같은 말이어요. 전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됨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우리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느냐? 옛 아담의 길로 되는 게 아니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종국적으로 우리가 그에게 의존하는 피조물로 우리를 인정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참여해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것은 은혜죠. 그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 그것을 말하는 거여요.
자 그래서 예수께서 잔치로 구원을 잔치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설명하는 거여요. 상속이라는 의미도 마찬가지여요. 이것은 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께서 이 아까 아멘이라는 말을 예수께서 독특하게 쓰셨다고 그랬지요. 예수께서 득특하게 쓴 말 한마디는 하나는 아빠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마디가 뭐여요? 아빠. 하늘에 계신 이 아니고 우리 어순 때문에 그런다고 그랬지요. 원래 어순에는 아빠 하나님 아빠 이것은 유대인들이 감히 하나님께 쓰지 못하는 언어라고 그랬지요. 예수만 하나님 아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뭐가 되는 거여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지요. 예수께서 너희들이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할 때 2차적인 의미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결하고 견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2차적인 의미가 무엇이라 했어요. 하나님을 아빠 부르는 자들이 되라. 왜? 아빠는 어린아이 언어이거든요. 가정내에서의 어린아이언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들이 되라는 것. 예수께서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그랬지요. 주께서 가르쳐 주신 첫 마디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죠.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스스로의 상속자된 우리가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어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등 청원.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를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이거든요. 기도라는것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고자 하는 것이지요. 잔치와 똑같은 그림이죠.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상속받고자 함. 그래서 우리의 제한성 결핍성으로 부터 해방되어서 풍요로움을 얻고자 함.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상속의 그림으로 많이 그렸어요. 상속의 그림과 잔치의 그림이 합쳐져서 나오는 아주 가장 유명한 비유는 탕자의 비유여요.
여러분들 탕자의 비유 전반부는 무엇을 그려요? 아담적 인간의 모습. 하나님으로 부터 어느 정도 자원을 받은 인간이 마치 아버지로 부터 자기 분깃을 주장해 가지고 멀리 아버지로 부터 가 버리는 자 그래서 자기의 제한된 분깃으로 자원으로 자기가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누리고 자기 멋대로 스스로 주인 노릇 하면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자. 아담적 인간의 모습. 우리 죄인을 사단의 통치아래서 사단의 꼬임 속에 빠져서 있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뭐라고요? 죽음이라고요. 그에게 구원은 무엇이어요. 아빠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 감히 더 이상 상속을 바랄 수 없어요. 그래서 나를 아들로 취급하지 말고 종으로 취급해 달라. 예수의 비유여요. 하나님께서 그 탕자를 다시 아들로 회복시키시고 상속자로 회복시켜요.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상속자로 회복시켜요. 그리고 뭐합니까?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고 그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모습이어요.
그래서 이 잔치와 상속을 두 그림으로 합쳐서 아주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이 뭡니까? 탕자의 비유죠. 이 안경을 쓰면 책이 보이는데 여러분의 아름다운 얼굴이 안 보이고 이 안경을 쓰면 여러분의 빛나는 얼굴은 보이는데 태초의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의 그림이 보이는데 글씨가 안보이고 그래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데 이 상속의 그림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 이런 하나님 나라에 오라. 예수께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어요.
자 오늘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이어요. 오늘은 미래 올 하나님 나라의 한 면을 봤어요.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나? 이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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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3)
눅11장14-22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
김세윤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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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4)
막2장13-17
-치유와 하나님나라 -
김세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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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번째 공부로서 지난시간에 우리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미래에 종말에 완전히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지금 벌써 예수를 통해서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어요. 치유로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힘을 시위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룬 구원을 가져다준다. 지금 벌써 이런 구원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종말에 그런 구원이 완전히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항상 치유로 뒷받침하고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지요. 치유가 항상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같이 가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보내면서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라고, 하나님 니라를 선포하고 치유하라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는 항상 같이 가요. 하나님 나라 선포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 구원을 약속하는 것인데 그것을 치유로 시위하고 현실이 되게 하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이 치유활동을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라. 그렇게 신학자들이 말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실제화라. 그렇게 말씀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손에 쥐어주는 그림이어요. 삽화(illustration). 오늘은 그런데 주로 예수께서는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다. 4복음서들이 똑같이 한꺼번에 증거를 해요. 그런데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또 유대신학자들은 서기관들은 안식일 날 병 고치는 것이 아주 못마땅해 가지고 예수를 그 이유로 죽이려 달려들지요.
먼저 예수와 유대 신학자들과 맨 먼저 갈등을 일으키는 issue가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어요. 유대 신학자들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일을 고집하시는지를 오늘 좀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웠어요.
우선 예수의 안식일 날 치유활동과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왜 예수는 그 치유가, 그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시위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 실제화라고 그랬는데 왜 그것을 특별히 안식일 날 해야 의미가 있다고 보았는지 그것을 오늘 살펴보고 그것을 살펴보다 보면 안식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게 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더 지켜야 되는가 그런 것도 알게 되어서, 오늘 그 공부를 할려고 작정을 했는데, 자꾸 2시 까지 성경공부가 마쳐야 성가대를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안식일 문제를 다룰려면 1시간을 꼬박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중에 잘리면 아주 고약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다음 주로 그 문제를 미루고 오늘은 하나님 나라와 치유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일반적인 서론을 하고 여러분들이 혹 질문할 일이 있으면 질문하면 좋겠어요. 먼저 막 2:17절을 한 번 펴 봅시다. 거기 막 2:13절 부터 17절 까지 한 번 읽어보십시다.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이 경건하고 스스로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그 회개하여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잘 응하지 않아요. 그런데 도리어 죄인들과 세리들은 많이 응한다 이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그 선언을 하나의 증거로 주기 위해서 그들과 늘 먹고 마시는 잔치를 행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늘 잔치의 비유로 많이 설명했다고 그랬지요. 종말에 완성될 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부요한 잔치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인간의 한계성 결핍성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 영생을 얻게 된다. 그것을 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이 비유를 설명을 했는데 바로 종말에 지금 여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한 죄인들은 바로 종말에 그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 그 영생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보증해 주고 그 잔치를 미리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항상 죄인들과 잔치를 베풀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항상 잔치를 베풀었다고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이지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로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대적자들이 예수에게 뭐라고 별명을 붙였습니까? 마11장을 제가 읽겠습니다. 11장 18절 부터 읽어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세례요한은 아주 금욕주의자였지요.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고 사막에서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양식으로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까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늘 이렇게 잔치를 베풀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창기의 친구로다. 예수의 별명이 3가지여요. 탐식하는 자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께서는 뭐라고 정당화해요? 우리가 아까 읽은 막2:18절 이하에 쭉 정당화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볼 것이 아니고 17절에 예수께서 자기가 온 것은 자기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렇게 표현하지요. 그런데 죄인을 부른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병든 자를 불러 그들을 치유함. 막2:17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이 병과 죄가 동일시 되어 있고 병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요. 그래서 우리가 2장1-11절 그 이야기를 잘 알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읽지는 않겠습니다. 중풍병자를 그 친구 넷이 들 것에 들어다가 아주 예수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음으로 길을 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들것을 내리니까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선언합니까?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5절에 저희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선언하는 것이어요. 이 사람은 중풍병자여요. 중풍병자.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준다. 너는 이제 온전케 되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아 있는 신학자들이 시비를 걸어요.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최후의 심판관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아! 이 사람이 죄를 용서해 준다고 선언하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침범하는 자로구나. 이것을 참람죄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기가 죄를 용서해줄 권세가 있음을 설명하는데 여기서도 중풍병과 죄가 동일시되어 있고 중풍병 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될 수 있고 그래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시편 103편을 보십시다. 시편103편을 예수께서 즐겨 부르는 18번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가르침을 공부해 보면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마찬가지 이지만 시편 103편의 사상이 곳곳에 드러나요. 그래서 예수께서 특별히 이 시를 사랑하시고 많이 부른 것을 우리가 확인하게 되요. 시 103편을 보시면 3절 4절 보십시다. ‘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여러분들 시의 병행 구조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바로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읽고 있는 막 2장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어요. 중풍병자에게 죄용서를 선언하고 그것에 대해서 여기 시비가 붙자 예수께서 2장 17절에 자기의 오신 목적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불러 그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할 수 있고 병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치유한다고 할 수 있고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어요.
가령 이렇게 선포할 때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특별히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세리 하나 있지요. 이 삭개오 이야기. 눅 19장의 삭개오 이야기 알지요. 이 사람에게 삭개오가 예수의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가 그를 알아 보시고 이 삭개오는 사람들 틈에 가지도 못하지요. 세리로서 하도 사람들을 압제하고 못된 짓 하고 아주 죄인으로 유대 공동체 안에서 낙인 찍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를 좀 보고 도움을 얻을려고 하지만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해서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예수께서 은혜로 구원의 손을 내밀지요.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고 내가 네 집에 가겠다 하니까 이 사람이 예수의 은혜에 감동이 되어서 여기 뭐라고 말합니까? 완전히 회개하지요. 그래서 구약의 정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보상한다고 보상하겠다고 자기 회개의 열매를 실제로 보여주고 여기 눅 19장 8절을 보십시다. ‘삭개오가 서서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사오면 4배나 갚겠나이다’ 완전히 회개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가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오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온전케 하는 힘이 이 집에 실현이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지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하지요. 그래서 이 세리들을 죄를 용서해줌은 병을 고침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몇 구절들은 여러분들에게 계획에 없었던 공부로서 몇 구절들을 방금 소개한 이유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냐면 치유란 개념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유란 개념을 많은 사람들은 꼭 육신의 병만을 고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병고를 치유하는 것으로만 보지를 않았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포괄적인 의미로 우리의 실존의 모든 면에서 전체적으로 치유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여요.
죄라는 것이 우리 모든 문제를 낳잖아요. 죄가 낳는 문제들은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갈등관계로도 나타나고 삭개오가 토색하고 억눌러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그래서 원수지고 거기에 고난이 있지요. 죄가 그렇게도 나타나고 방탕 아예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술 담배 향락으로 소진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죄가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고난들을 주어요. 그 고난들이 전부 죄로 부터 나온 곳이어요. 죄가 모든 고난들의 원천이지요.
그러나 죄와 고난들이 1:1로 성립하지는 않아요. 가령 지금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중풍병을 앓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어요. 전에도 제가 예를 들었는데 예수도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해서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소경이 된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입니까? 그것이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한다는 아주 원시적인 신학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지요. 우리들도 많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아요. 1:1로 성립될 수도 있어요. 전에도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만 제가 술을 많이 마시고 운전하다가 전신주 가로수를 받아가지고 다리가 부러지면 그것이야말로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20살 먹은 녀석이 술이 취해가지고 내 차를 받아 제 다리가 부러지면 제가 죄를 지어 가지고 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니지요. 이웃의 죄로 다만 우리들이 인간들의 공동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주고 남의 선한 행위가 나에게 유익을 주고 그래요. 그래서 항상 죄라는 것이 1:1로 성립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누구의 죄든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고난이 있지요. 그런데 그 고난이라는 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심리적인 병으로도 나타나고 관계에서의 고난으로도 나타나고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지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치유하는 것인데 그 치유는 그러기 때문에 죄가 나타나는 다양한 고난들을 다 없애는 것이어요. 꼭 육신의 병고만이 아니고--. 그러니까 치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얻는 치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를 온전케함이어요. 모든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함. 그것이 치유여요. 그러니까 이 치유가 어떤 때는 육신의 병고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서 그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빈곤도 엄연한 고난 아닙니까? 빈곤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리적인 질병으로 부터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부간에 늘 싸우던 갈등관계에서 오는 고난으로 부터 해방되기도 하고 정치적인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오늘 같으면 환경의 공해의 제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치유는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면에서의 온존케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어요. 그 치유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요. 구원을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어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되어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성령의 역사로 지금 우리 안에 실현이 되었는데 그것은 꼭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항상 두개의 극단의 오류가 나와요. 하나는 완전히 카리스마틱한 오순절 신학의 오류가 나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난다고 말하지 않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치유로 나타난다.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사고는 그것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그런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라는 것으로만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을 체험하려고 거기에 몰두를 해요. 그래서 다른 방면으로의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나타남을 경시해요. 상대적으로 아니면 무시해 버리든지.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발생해요. 아 믿음이 좋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육신적 병고가 안 나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은 그것을 기법을 개발해요. 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육신적 병고의 제거 그쪽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함으로 어떻게든지 그것을 체험하려고 온갖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점차 신앙이 미신화 되어 가지요. 우선 여기에 과장된 주장이 많이 발생해요. 그래서 신앙이 점점 미신화 되어가요. 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우리 실존의 모든 면에 나타나야 된다는, 모든 영역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자적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리적 갈등의 해소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빈곤의 퇴치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적 평화의 확대 이런 것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이렇게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한 것 모든 아름다운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의 통치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어 우리 삶을 온전케 하는 것은 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다. 구원의 힘이다. 이렇게 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안수하고 기도하고 뭐해서 뭣 나은 것에만 치유의 의미를 부여하니까 이 사람들의 신앙이 많이 균형을 잃고 그것에 몰두하다 보면 과장된 주장을 많이 하게 되고 환상을 많이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신앙이 굉장히 미신화 되어가요. 그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이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아까 말한 대로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함, 모든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 하나님의 통치의 열매여요. 구체적인 열매, 그러기 때문에 첫째로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둘째로 그 치유의 힘이 인간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음, 보통 그렇게 나타나요. 인간들을 통해 나타나는데 꼭 안수니 기도니 이렇게 만이 아니고 의사를 통해서도 훌륭한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약전문가를 통해서도 훌륭한 영양사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나타나요. 어떤 의사가 암 환자를 잘 수술해서 나았다. 하나님의 나음이지요.
지금 수능 시험이 어려워 가지고 낙담한 친구들이 있어요. 혹시 자살한다고 덤벼드는 친구들도 있을 거여요. 또 요즘 금융실명제로 파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요. 일생동안 양심적으로 사업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도가 나서 감옥에 가고 실망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욱 하는 상황속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어요. 죽음 직전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아 여기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잘 설교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용기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하게 했으면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치유가 아니어요? 네? 아이 어떤 권사님이 아주 못된 젊은이 하나 못된 길로 빠지는 젊은이 하나를 계속 몇 년 동안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고 counselling해서 돌이켜 가지고 그 사람이 자기 가족에게 이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게 하면 그것이 치유가 아닙니까? 죽음 가운데 생명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여기 삭개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많이 끼친 삶이어요. 압제하고 뺏고 강탈하고 도둑질하고 그래서 이 삶이 예수에게 치유함을 받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므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그를 통해서 남에게 전달되었어요. 이것이 치유하는 것이어요. 온전케 함. 한국의 목사님들은 대대로 독재자들에게 아부를 했는데 아부하지 말고 그 독재자들 앞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해 가지고 그 독재자들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통치하도록 했으면 이 나라에 사람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애매한 사람 감옥에 집어넣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회정의가 사회 자유가 인권이 평화가 확대되어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이어요. 그것이 죽은자 가운데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까? 이 기도해서 암환자 나은 것보다 더 큰 생명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첫째로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되고 둘째로 이 치유는 꼭 기도하고 안수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복음선포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counselling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음악에서 한 사람이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새롭게 치유가 일어나요.
이렇게 이런 전제에서 둘째 오류는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전통 보수 장로교회에서 많이 범하는 오류인데 바로 치유는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로만 의미한다는 그런 전제하에서 이 사람들 균형을 잃고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그 사람들 신앙이 자꾸 미신화 되고 과장된 주장을 하고 그래서 신앙이 아주 한 마디로 볼품없다 그 말이어요. 걸레 같아요. 균형을 잃고 미신화 됨.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전통보수 개혁신학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이런 의미로의 치유는 예수와 사도시대에만 그랬고 이제는 더 이상 없다고 그러는 것이어요. 그것이 유명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아주 유명한 B. B. Warfield가 처음에 제창한 이론인데 그것이 우리 한국의 보수장로교의 일반적인 이론이 된 것이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성령의 역사로 실현이 되는데 더 이상 육신의 치유나 이런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요. 그것이 틀렸어요. 왜 틀렸느냐면 이 전제가 틀린 것이어요. 치유라는 것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치유라는 것이 아까 말한 대로 심리적 문제의 해소 관계의 해소문제 빈곤 등 모든 고난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도 엄연한 고난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 육신의 병고의 제거가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정신과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서도 음악 시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특히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선포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런 카리스마틱한 사람들의 과장된 주장 헛된 주장에 너무 반발을 해가지고 그런 것은 이제 없다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아요. B. B. Warfield가 그렇게 이런 것이 없다고 한 이유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 굉장히 발생하면서 이 분이 조사를 해 보니까 자기가 조사한 모든 case가 거짓 말이었어요. 이 분이 이 이론을 제시한 책 이름이 “거짓말 기적” 이라는 책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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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5) -
막2장13-17 치유와 하나님나라2- 김세윤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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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두 번째로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치유활동의 관계를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치유하심으로 구원의 실제가 되게 했다. 그때 우리는 치유라는 것을 아주 폭 넓게 생각을 해서 모든 면에서 우리 삶을 온전케 함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인데 그것이 먼 훗날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그런 것만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벌써 우리에게 구원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구원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냐면 치유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 치유라는 것이 육신의 병고의 치유로도 나타나고 절망 가운데서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새로운 용기를 얻도록 하는데도 나타나고 늘 갈등 속에 있는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올발라짐으로 해서 이웃과 더 평화가 있고 자유가 있게 하는 면으로도 나타나고 정치적 압박, 경제적 빈곤 이런 것의 제거로도 나타나고 하여간 모든 점에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 말씀을 지난 번에 드렸죠. 그 점을 예수께서 특별히 효과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쳤어요.
그래서 오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의미를 주로 생각해 보려고 그래요. 우리가 4복음서 들을 다 읽어보면 공통되게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치시죠 바로 그런 이유로 아주 초기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사역의 초기부터 유대 신학자들의 시비를 받아요. 큰 적대감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해요. 왜 그러느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이 무엇인가 부터 생각을 하게해요. 안식일은 원래 창2장에 무슨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이 심히 좋은 상태였죠. 그러니까 창조를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창조가 완전케 되었을 때 다시 말하면 심히 좋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할일 하셨으니까 안식하셨다는 거죠.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창조를 즐김이에요. 그게 안식일의 뜻이어요 원래. 그래서 가령 십계명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우리가 한 번 출애굽기 20장 볼까요? 십계명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는 제4계명을 주신 이유가 거기 있죠. 출20장 11절 한 번 보시겠읍니까? 8절부터 읽읍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을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함이니라. 11절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그 마치고 완전한 창조를 즐김의 의미가 있었어요. 또 한 번 보시겠읍니까? 신5:15절 너는 기억하라. 애굽 땅에서 14절부터 읽읍시다.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는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신5장15절에서는 안식일을 지킨 의미가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게 출20장에 보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신5장15절에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도 얼핏 보면 2가지 다른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 설명 같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기원에 대한 아주 참 좋은 설명이어요. 이 2가지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 전에도 제가 여러 번 설명했지만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에서는 항상 구원은 태초의 회복이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서의 구원은 출애굽이어요. 출애굽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요. 가령 이것을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많이 표현했다고.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라든지 광야에서 공급받은 므리바의 물 이런 것이 아담이 타락 전에 낙원에서 누렸던 축복의 회복 재현으로 보았어요. 시내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 그 얼굴에 빛났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이런 식으로 출애굽이 바로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심히 좋은 상태의 창조를 기념하는 것인데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사단의 꾀임에 빠져 가지고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고 죄와 죽음아래 놓이게 되었지요. 그런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구원은 무었이냐 하면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함이어요.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이 되면 안식이 있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출애굽이 첫 구원의 사건으로서 태초의 완전한 상태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출애굽 이후의 안식일은 원래의 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출애굽의 구원 즉 재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그렇게 설명이 되는 것이어요. 하여간 이렇게 출애굽은 그것이 첫 창조에 완성된 완전한 창조에 대한 기념이든 아니든 그것의 회복으로서 구원의 기념하는 것이든 항상 안식일은 무슨 뜻을 가지냐면 하나님의 완성 되고 완전한 창조를 기념함 이것이 안식일의 기본의미여요. 그러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아담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지죠. 사단은 속이는 자여요. 이렇게 아담에게 사단이 속임수를 썼어요.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창3:5절에. 그래서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지요. 그래서 아담이 결단한 거여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됨. 스스로 자기에게 하나님이 됨. 하나님 같이 됨.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그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 없이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아담이 다시 말하면 자기 속에 내재하는 힘, 지혜,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 자기의 안전 자기의 행복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하는 행위여요. 그것이 죄라는 것이어요. 그것이 죄의 본질이어요. 그것을 신학에서는 교만이라고 해요. 왜 교만이라고 해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자기의 피조물성을 무시하고 부인한다는 말이어요. 자기가 기껏해야 피조물인데 하나님으로 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전, 행복 모든 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인데 그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최종적으로 책임질 수 있고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환상에 빠지는 것이죠. 교만한 것이죠. 그것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 해서 뭐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인간이 그렇게 하겠다고 부득불 등을 돌리니까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포기해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지요. 요새 속된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했단 말이어요. 그러면 한 번 잘해보라 ---란 말이지요. 예수의 탕자의 비유로 말한다면 무슨 이야기여요. 탕자가 아버지로 부터 내 분깃을 주세요.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고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아버지께 등을 돌리고 멀리 가버린 거지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아담이 진짜 하나님과 같이 됩니까? 하나님같이 되지 않죠? 그때부터 자기가 하나님이니까 자기의 자원으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 되니까 아담은 무엇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어요. 일을 하는 거여요. 농사를 시작해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첫 시작이 무엇이냐면 농사여요. 땅을 파고 씨를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 자기일의 댓가로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이어요. 더 이상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공급받지 않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니까 스스로 자기가 일해서 이제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이죠. 그래서 일하게 된 것이어요. 그런데 일하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확보가 됩니까? 되는 것 같죠. 되는 것 같아요 일해 먹고 살잖아요. 일 안하면 누가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지난시간에도 제가 작년 이맘 때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우리 권사님 한 분이 질문해 가지고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가? 참 좋은 질문을 하셔서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해서 한 번 특강한 일이 있죠. 그래서 예수는 무슨 메시야인가 그때 제가 상세히 설명을 했는데 그 녹음된 것을 글로 옮겨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책자 뒷면에 나왔어요.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 작년에 들었던 강의가 새롭게 이해가 되고 더 자세히 이해가 될 것이어요. 하여간 작년에 무엇을 강조했느냐면 인간이 일을 해서 얻는 열매는 항상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동전과 같은 것. 이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의 이면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껏해야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실제를 얻는다고요. 일한다는 말에서 인간이 일함. 일해서 얻음. 이것이 문화라는 말이어요. 문화란 말이 일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해서 얻은 것 그것이 문화여요. 그래서 인간의 문화 문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 준 것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일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확대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죽음을 그만큼 또 확대해요. 어려운 말로 말하면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실제 그것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를 들자면 자주 드는 예지만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인간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서 이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자는 것이어요. 지혜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가령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관찰 자연과학적인 관찰 이런 것이 과학기술 문명을 이루어 가지고 산업생산수단의 개발로 연결되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났지요. 산업혁명이라는 생산수단의 발달로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소비에서 엄청나게 풍요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삶이 얼마나 확대되었어요. 엊그제 보리고개를 앓았던 한 30년 40년 전까지만해도 보리고개가 심각한 위험이었는데 이 땅에 농업혁명으로 쌀이 남아돌고 배고품이 없어지고 생명이 확대되었지요. 이 공업화로 우리의 옷 입는 것 쓰는 것 누리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와졌어요. 삶이 그만큼 확대되었지요. 아 그런데 삶만 확대되었습니까? 삶만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산업화의 길을 갔어요. 가봤더니 지금 어떻게 된 거여요. 서울에 지금 숨도 못 쉴만큼 공해가 있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공해 자원고갈 이런 형태로 죽음이 그만큼 --- 그것만 입니까? 또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의 존재 의미 삶의 의미가 소유에 있고 소비에 있다라는 인생관 가치관으로 우리가 세뇌되어 가지고 우리 인간성이 황폐화되어 버렸지요. 인간미가 없어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다시 말하면 그만큼 죽음이 확대된 것이죠. 그래서 소유가 소비가 팽배한 구미의 소비사회 한 번 가보세요. 거기 인간성의 황폐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땅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항상 인간이 일을 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일을 하면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그만큼 온다. 이 말이어요. 이것은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지요. 지난번에도 예를 들었지만 교통통신수단의 발달로 우리에게 장소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어요. 우리의 자유를 그만큼 확대함으로 우리의 생명을 확대한 거죠. 그러나 바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해서 생명을 확대한 그 교통통신수단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해요. 그 첨단 통신 장비로 정부가 우리를 감시하고 또 범죄인들이 그 수단으로 우리를 도청하고 그래서 안방에서도 자유롭게 말 못하게 만들어요. 얼마나 속박인가? 그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일을 해서 자기의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명 낙관론이지요. 그래서 그런 줄 알고 한참 가다보니까 죽음의 힘이 더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어요. 그러면 문명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무슨 운동이 벌어지느냐 하면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삶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까 문명을 때려 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인 운동이 벌어져요. 낭만주의가 주기적으로 일어나요. 전 세계적으로. 마지막 낭만운동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히피운동으로 일어났지요.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50-60년대 문명 낙관론에 따라 많은 것을 생산해 내서 소비재가 풍부하면 삶이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해 보았는데 그것이 전쟁의 수단으로 월남전쟁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죽음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연공해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원고갈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젊은이들이 이런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거기 구원이 있습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려고 할 때 이것을 뭐라고 그래요. 인본주의. 일을 해도 삶과 죽음에 변증법적인 실제의 쇠사슬에 묶어 있어요. 일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확대되지 않고 그냥 죽음만 있겠죠. 자연으로 돌아가면 다 굶어 죽음만 있겠죠. 그러니까 일을 해야죠. 일을 해도 항상 죽음의 인연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생명 죽음병에 든 생명을 얻는 거여요. 그것이 왜 그래요? 사단의 나라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어요.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에게 충성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여요. 그러니까 사단의 통치아래 아담과 세상이 떨어짐으로 이 사단의 통치아래 죄악과 죽음의 통치아래 떨어짐으로 이 세상 속에 뭐가 있어요. 죽음이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일을 해 보았자 죽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 타락한 질서 속에서 아까 말한 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없이 일을 해야되요. 뭐하기 위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일을 하면 죽음이 없는 생명이 아니고 항상 죽음을 동반한 생명. 이런 상황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안전하고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인 양 생각을 해서 어떻게 해요? 우리 한국말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지요. 그래서 한국의 40대가 가장 많이 죽는다지 않아요. 전 세계적으로. 왜 그래요? 죽어라고 일을 하니 죽지요. 그런데 왜 죽어라고 일을 해요? 그만큼 생명이 확대할 줄 알고 더 나은 안전 더 나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양 환상이 우리 앞에 있는 거여요.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많이 벌면 더 많이 안전하고 더 많은 자유와 쾌락을 누릴 수 있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어요. 그런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놓인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시작하신 거여요. 하나님의 구원사가 시작이 되는 거여요. 이 세상이 다시 말하면 죄악과 죽음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심히 아름답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거여요. 무슨 일을 ? 구원의 역사 구원의 일을 하신 거여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으려다가 깜빡 잊고 안 읽었는데 요한복음 5장 이야기 알죠. 예수께서 안식일 날 베데스다 못가에 누어 있는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그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시비를 하고 왜 안식일 날 일을 하느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해서 일을 하게 하느냐? 이렇게 시비를 하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답을 해요. 1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아요? 안식일에 일하신다 이 말이어요. 유대 랍비들 간에 토론하는 신학적인 주제 하나가 창세기 2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했으니 진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시니 안식하느냐? 이것이 토론의 주제였어요. 그런데 안식일 날도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안식일 날도 아이가 태어나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안식일 날도 일하신다.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거두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안식일 날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일은 다 쉬고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대권 생명을 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 이 일만을 하신다. 이런 식으로 타협하는 그런 대답을 했어요. 그러나 예수는 훨씬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요. 무슨 일을 ? 생명을 주시는 일 구원의 일을 계속하셔요. 왜? 이 세상이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일을 하시느냐? 죄악과 죽음의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그의 나라 그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폄으로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임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창조주께서 하나님 노릇 해주심으로 더 이상 자기 스스로가 자기 하나님이라고 환상하고 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 살도록 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했어요. 그래서 이 고장 난 창조를 고쳐서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을 계속하신다. 이말이어요. 그것이 언제 완성이 되냐면 종말에 완성이 되어요. 이 종말은 그러니까 구원의 시대죠. 이때에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완전히 종결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다시 한 번 온 창조가 심히 좋은 상태가 되는 거여요. 이것을 재창조라고 해요. 그 때 진정으로 안식이 있죠. 그 때는 온 피조물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차죠.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없는 거여요. 거기에 하나님과 그의 피조세계가 전체 안식이 있는 거죠. 그래서 안식일은 종말론 태초적 개념이면서 종말론적인 개념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온 세계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게 될 때 거기에 안식이 있는 거여요. 온 피조세계가 다시 한 번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덧입어서 살게 되는 때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과 그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상태가 될 때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는 거여요. 하나님께서 그 종말에 안식을 위해서 계속 일하라는 거여요. 계속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 사단의 통치를 꺽고 자기의 통치를 세워 가신 거여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세요. 자 그러면 여기 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의미는 무엇이겠어요? 이것이 한 편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에 안식일을 소망하라 그런 말이어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그리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 됨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그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하라 그런 말이어요. 우리가 일하는 행위를 뭐라고 해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행위죠.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죽음의 이면이 있는 생명 밖에 가져다 주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말이어요. 그것은 다른 말로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때 까지는 우리는 사단의 통치아래 타락한 질서속에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엿새 동안은 우리가 일을 해야죠. 이것이 타락한 창조의 질서여요. 그러니까 우리가 엿새 동안 일을 해요. 일을 해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밖에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해야지요. 그러나 일을 한다고 해서 항상 생명만 오느냐? 그렇지 않고 항상 죽음이 같이 옴으로 우리가 안식일을 망각하고 안식일이 없이 살면 바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가 내 스스로 일을 해서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그런 환상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데 하죠? 그 환상에 젖어 있으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일을 해서 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을 하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그러나 아까 이야기한대로 죽는다고요 죽어.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 4계명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 살기 때문에 일을 해서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로 해서 항상 죽음이 없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이죠. 엿새 동안은 그렇게 살더라도 하루는 그렇게 사는 삶의 태도를 쉬고 지양하고 일을 중단하고 생업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으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을 하라는 말이어요. 그전에는 또 무슨 소리냐면 그 엿새 동안만의 하루 그렇게 신앙고백하면 그 다음 엿새 동안을 그 신앙고백아래 살라 그 말이어요. 다음 엿새 동안도 안식일을 지킨자로서 살라 그 말이어요. 아까 내가 이야기했죠. 안식일을 모르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는 삶이어요. 왜? 일을 해서 자기가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것으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 어떻게 하겠어요.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려고 할 것 아니어요. 즉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면 그만큼 생명이 더 확대될 것 같은데 그만큼 확대될 만큼 죽음이 더 확대 되요. 그래서 계속 죽음 속이어요. 더 큰 죽음 아래 빠지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엿새 만에 하루씩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뭐라고 그럽니까? 나의 안존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신앙고백을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 의미여요. 그런 신앙고백을 엿새 동안에 한 번씩 하는 사람들은 그 다음 엿새 동안을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을 하면서도 어떤 태도로 일을 해요.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로 일을 해요. 다시 말하면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를 사랑하심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달렸다. 그런 자세로 엿새를 일을 하면서 사는 거여요. 그런데 일을 하면서 안식일을 모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는 그런 자세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산다고요. 죽어라고 일을 해요. 왜? 그 사람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어요? 소비와 소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더 안전한 것이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행복한 것이라는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어요. 인간성은 더 황폐되고 이웃과의 관계는 더 파괴되고 건강은 더 나빠지고 그래서 스스로 죽고 그 사람은 죽음을 더 퍼뜨려요. 공해의 상태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고 이런 상태로 죽음을 더 퍼뜨려요. 반면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로서 엿새를 산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세로 엿새를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내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일하며 나의 안전과 생명을 얻어야 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나의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내 일의 열매가 아니고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우선 자신의 일 자신의 힘을 절대화하지 않아요. 그것을 상대화해요. 그러기 때문에 우상숭배로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일을 선택할 수 있죠. 이것이 더 생명을 북돋우는 일인가 아니면 죽음을 북돋우는 일인가? 일의 종류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수 있죠. 그냥 산업화만 한다고 해서 생명이 더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다 죽게 되었어요. 도대체 인간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타락한 질서속에서의 안전과 행복을 최대로 확보하는 것일까? 벌써 60년대 70년대부터 여러분들 로마클럽의 이름으로 모인 지혜로운 자들이 뭐라고?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 보다 더 성장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더 갖다 주고 안전과 행복을 더 많이 갖다 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많이 가져 오니까 이제 어떻게 하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아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삶의 스타일을 변화하고 무조건 많이 갖는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안전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뭐하자고요? 좀 단순한 삶을 개발하고 여러분들 나 지금 회의가 많아요. 스스로도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이 엄청난 독가스를 마시면서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여러분들 회의 안 납니까? 차라리 저기 어디 시골에 사는 것이 서울에 살아서 돈 많이 버는 직장 애들 교육하기 좋고 뭐 어쩐다고 해서 다 서울에 살지요. 서울에 살면 삶이 확대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우리 독가스 마셔서 내일 모래 죽는다면 무슨 확대여요. 차라리 시골에 살아서 맑은 정신으로 연구를 하면 내가 학교 대학이라는 직장 안 갖는다고 해도 그래서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는 적어지더라도 나도 건강하고 인간성이 더 풍부해지고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도 생명 확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엿새 동안 살면서도 일의 종류에 대해서도 선택할 여유가 있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비판적으로 생각할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해서 이 타락의 질서 속에서도 그래도 죽음 보다는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삶의 방식인가? 일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역하는 자가 되요.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려는 그런 운동에 동참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킴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서 그냥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가 일을 해서 내 힘으로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런 삶을 사는데 그런 삶은 결국 생명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죽음에 의해서 압도되는 거여요. 그것이 올바른 삶의 방법이 아니라는 거여요. 그래서 적어도 하루는 그런 삶의 방식을 지양하고 그러니까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라고 그랬어요? 첫째로 생업을 쉬라고 그랬어요. 자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 행위를 멈추고 나의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하는 것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로 부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하나님의 역사의 주되심 하나님의 구원자 되심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그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거여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요새 우리가 쓰는 재충전이라는 말로도 괜찮겠죠. 일생을 그러니까 일하는 다음 엿새 동안도 그런 신앙고백으로 살라는 말이어요. 안식일을 지키는 자 곧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 달렸다는 그 신앙고백으로 그 자세로 살라는 말이어요. 그 자세로 살면 어쩐다고요? 거꾸로 그 자세가 없으면 어쩐다고요? 한마디로 죽어라고 일해서 죽음. 그런 자세로 살면 이 타락의 질서속에서도 우리가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죽음 보다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일을 하면서 그런 자세로 일을 하면서 살게 되는거여요.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여요. 그러니까 구약에 뭐라고 그랬어요? 안식일을 안 지키면 어쩐다고요? 죽지요 죽어. 그래서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 거여요. 자 그런데 예수는 뭐하러 오신 거여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 분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에 우리 구원이 완성이 되어요. 그래서 심히 좋은 상태가 되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안식을 갖게 되는 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이 무슨 대목입니까? 예수는 자기와 함께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기 의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 벌써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거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뭐라고 그랬죠?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동댕이쳐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롬1:18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아담이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내버린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내버리지 않았어요. 기쁜 소식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전체 내버렸으면 거기에는 더 이상 구원과 생명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바울의 복음이 뭣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 주셨다. 그것이 기쁜소식 아닙니까. 그것이 바울의 신학언어로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바울은 롬1:16절에 뭐라고 그럽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 그 복음은 뭐라는거여요? 무엇이 복음이라는 거여요.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기본적으로 관계론적인 개념이어요. 관계의 신실함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신실하게 지키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세상을 창조하실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한 거여요.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들을 지어 가지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정할 때에 이 피조물들에게 약속한 거여요. 무슨 약속을?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슨 의무를 증거해요? 그 창조주에 의지하고 순종해 살도록 그런데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 의지하지 않겠다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는데 하나님께서 나도 몰라 해버리면 하나님도 불의한 거여요. 의란 말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 관계에 신실함.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창조 중에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함으로 인간은 불의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말이어요.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는 거여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뭐라고 선언하는 거여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다 그것을 신학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기쁜소식이 창조주 그러기 때문에 초월자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바울의 언어로 롬 1:18절의 언어로 나 몰라라고 내동댕이 쳐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이 창조 때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셨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복음이라는 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 피조물 전체에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기쁜 소식이어요.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 거지요. 이제 우리에게 창조주 초월자의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 바로 그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시행하는 거여요. 그것을 예수께서 선포하고 복음이라고 하나님이 통치하심 그래서 우리를 사단의 통치에서 건져내심.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 우리를 내동댕이 친게 아니고 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꾀에 인간의 뜻에 내버려두면 죽음 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운데 오셔서 그의 구원의 통치를 폄으로 우리에게 끝까지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이 복음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이 통치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심으로 시위했는데 실제가 되게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어요? 안식일의 범주로 말하면 태초의 안식일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병든 세상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자 이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의 형태로 시위하시되 특히 안식일에 하셨는가를 우리가 알게 되었어요. 자 이제 여기 지금 안식일 날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뭐 하러 모였어요.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더불어 있을 그 안식을 고대하는 의미로 그것을 간절히 바래서 기도하는 의미로 여기 모였어요. 그런데 지금 손마른 자가 앉아 있어요. 또는 중풍병자가 앉아 있어요. 이것은 지금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의 극적인 표현이어요? 안식일이 더 이상 없음 다시 말하면 빨리 하나님의 통치가 사단의 통치를 꺽고 완성이 되어 종말에 안식이 있어야 될 것임을 절규하는 거여요. 그 상황에서 예수가 그 사람을 고쳐준다고 그랬어요.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어요.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는 자로서 곧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분으로서 바로 이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병든 세상을 고쳐서 죽음아래 놓여있는 피조세계에서 죽음을 몰아냄으로서 이 죽음의 힘이 손마름으로 나타났는데 38년 중풍병으로 나타났는데 또는 삭개오 같이 도덕적인 병듦으로 나타났는데 이 죽음의 힘을 몰아냄으로서 종말에 안식을 가져오는 자임을 거기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dramatic하게 표현하는 거여요.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자기가 안식을 가져오는 분 진정한 안식일이 안식이 되게 하는 분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사단의 통치로부터 건져내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데려옴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을 있게 하는 분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주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친 거여요. 예수의 많은 가르침과 그 행위들은 상당히 드라마 극에 대한 센스를 가지고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어요. 그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극을 상징행위를 많이 하시고 요새말로 하면 데모를 많이 하셨어요. 안식일 날 병고친 것도 하나의 데모여요. 오늘 우리가 하는 최후의 만찬도 하나의 극이어요. 효과적인 메세지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연극. 자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주로 병자를 고쳤다. 이 초대교회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그 제자들은 한 동안 유대인들의 안식일 오늘 우리의 월력으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 해짐으로 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어요. 유대 관례로 말하면. 그 안식일과 그 다음날을 주일이라 해서 예수의 부활의 안식일 다음이었으므로 부활한 예수를 만남을 기념하는 안식일 다음날 양일간 예배 모임을 했던 것 같아요. 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는 나중에 안식일의 의미가 안식일 다음날 주일로 합류되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을 지키는데 그것은 신약적으로 참 잘한 일이어요.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종말의 구원의 성취에요. 그래서 아까 출애굽후 안식일은 무슨 의미를 갖는다고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의미를. 출애굽의 구원은 무슨 의미로 해석이 된다고요? 첫 창조의 회복으로 해석이 된다고 그러지요. 신약성경에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설명을 하고 이것을 뭘로도 설명을 해요? 첫 창조로도 설명을 하지요. 그래서 가령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누구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하는 고전 5:17절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에게는 새창조가 일어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새 창조라고 그래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새 창조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역사이해에서 그래요.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역사의 원칙에 따라 그래서 출애굽의 구원을 첫 창조의 회복으로 보고 곧 안식일이 바로 태초의 안식일의 회복으로 의미를 가졌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주의 날. 부활하신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 ‘주’란 말이어요. 주라는 칭호는 가장 기본적으로 무슨 뜻이냐면 부활하시어 하나님께 높임 받은 분으로서 예수를 주라고 지칭해요. 주라는 말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다 상호교환 용어로 쓰는 칭호들이 아니고 다 의미가 좀 달라요. 쓰임세가 달라요. 그런데 주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았다는 말 그래서 세상을 통치하는 분으로서의 예수를 주라 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주의 날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태초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뭐라고요? 창조라는 category를 쓴다고요. 곳곳에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쪽에서 완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이미 일어남 미리 주어짐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 그리고 그 때에 있을 안식이 미리 주어짐 그래서 요새 한국 신학자들이 지어낸 새 줄기 새 신학언어가 ‘선취함’ 이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나온 말 이어요. 한국말 번역으로 미리 취함 선취함 저도 한동안 한국에 와 가지고 신학을 안 해서 신학 용어들이 참 생소해 가지고 선취란 말을 쓰기 어려웠어요. 잘 안 써 지더라고요. 선취 그래서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종말의 구원의 성취로서 그러기 때문에 종말에 주어질 안식의 성취로서 이해가 되는 거여요. 그래서 주일에 부활을 기념하는 것과 원래 안식일을 합류해서 우리가 주일날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자 그러면 지난 번에 우리가 안식일에 대해서 토론했지요. 지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왜 병자를 많이 치유하셨는가 순전히 역사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만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그러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안식일의 원칙을 올바르게 지키는가? 그런 질문들이 다 있을 거여요. 지난 번에 다들 질문하고 토론해서 아주 간단히 한 마디만을 하고 지나면 어떻게 지켜야 되겠어요?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있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종말에 이 구원이 성취되어서 우리에게 안식일의 축복이 그만큼 더 확대되어 체험되게 되었다는 것. 예수의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심.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함이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치유로 나타남. 치유가 뭐라고요? 우리를 온전케 함.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온전케 함으로 나타남. 그것을 우리가 기념하고 그것이 빨리 완성되기를 고대하는 모임이 오늘 우리의 모임이어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가 그 주권이 빨리 완성되도록 그래서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빨리 종결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완성되도록 예수께서 모든 원수들을 다 극복한 후에 어쩐다고요? 바울이 고전 15:25-28절에 그때에 그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린다고 그때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것 위에 궁극적인 의미로 존재하게 됨. 그때에 완전한 구원 완전한 치유. 인류와 세상의 온전케 됨. 안식이 있죠. 그것을 빨리 오시기로 기도하는 모임이 첫째 우리 모임이지요. 그래서 초대교회에 그런 기도가 뭐였다고요? 마라나타 주여 오소서! 그 다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으니 구원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의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도 하고 그런 말로 표현하는 말에 대한 체험. 그것에 대한 확신을 다시 받고 확신을 어떻게 받아요? 설교로 받고 성경공부로 받고 지금까지 성경공부를 뭐하러 합니까? 바로 그것에 대한 새로운 확신 그 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 확신에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거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그의 전능함으로 그의 전지함으로 그의 온전하신 사랑으로 끝까지 하나님 노릇 해 주실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그 분께 의지하고 순종해 살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해야겠죠. 우리가 하루의 생업을 쉬고 다음 6일을 생업에 종사하면 살되 그 신앙고백의 자세로 산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내게 달렸다. 내 손에 달렸다. 내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 내가 죽어라고 일을 해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내게 안전이고 행복이다. 이런 자세가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 그에 뜻에 따라 그 일을 해야 할까? 저 일을 해야 할까? 악을 도모하고 죽음을 도모하는 일 보다는 그래도 생명을 도모하는 일을 해야 되고 일을 하되 어떤 자세로? 죽어라고 일을 해서 죽은 자세가 아니고 과연 정말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생명을 북돋우는 길인가? 를 비판적으로 생각을 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신앙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비판하게 만들어요. 그런 자세로 살아야죠. 그것이 안식일을 지킴이죠. 안식일을 지킴이 무슨 말이라고요? 아무 것도 안한다. 그런 말이 아니어요. 지난 번에 그것에 대해 충분히 토론했으니까 아무 것도 안한다고 생각하면 유대인식으로 무엇에 빠져요?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 가지고 위선에 빠져 가지고 신학적인 의미는 모르고 우리 삶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보다는 도리어 얽어매는 일만 한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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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6) 눅12장22-32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내재성 - 김세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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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내재성
눅 12장 22-3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바보부자에 대한 비유를 하시고 곧 자기 소유의 넉넉함에 만족해서 곳간에 잘 곡식을 많이 쌓아놓은 것을 두고 이제 19절에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니라’ 하는 부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뒤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렇게 맘몬을 숭배하면서 맘몬을 의지하고 맘몬에게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는 이런 우상숭배의 삶을 경고하시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서 하나님께 바라고 사는 삶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2절 부터 교독합시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가르치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홥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세상 백성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하겠어요. 그런데 중간에 쉼이 있어 가지고 벌써 지금까지 생각했던 점들이 무엇이었는가 잊어버린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아서 간단 간단이 제목만 요약을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고 선포했다는 것. 미래에 오는데 곧 온다고 선포했다는 것. 그런데 곧 오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구체적으로 세상적인 이해를 비유로 삼아서 자세히 그리기 보다는 그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함이어서 하나님의 그 삶을 얻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신적인 삶을 얻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 결핍이 없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 없는 것이다. 고난들이란 죽음의 증상들인데 그런 것들이 없는 삶이다. 그렇게 주로 가르치시면서 그 점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쓰신 아주 많이 쓰신 비유들이 하나는 잔치의 비유이고 하나는 상속의 비유를 많이 쓰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잔치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풍요로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더 이상 결핍이 없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 없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짐이다. 또는 하나님 아빠의 무한한 부요를 상속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같은 그림이죠. 같은 진리를 말씀하고자 하는 그림이죠. 창조주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부요함을 나의 아빠의 것으로 상속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결핍속에서 그 결핍으로 부터 오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결핍과 고난으로 부터의 해방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삶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삶을 성경적인 숙어로 말한다면 영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은 곧 그 영생 신적인 삶 하나님의 삶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주로 설명을 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오고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와 같은 영생의 축복이 곧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미래적으로만 설명을 하지 않고 지금 현재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기서 벌써 실재가 되어 간다고 설명을 했다. 지난 번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벌써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듣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벌써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와서 우리에게 주어지리라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벌써 실현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이런 일들을 많이 하셨다. 그것은 특히 안식일 날 그 일을 많이 하심으로 태초의 안식의 온전함.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풍요로움 에덴동산의 낙원의 그 풍요로움 삶을 누리게 됨.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초의 원래 안식일이 회복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주로 안식일 날 병 고치는 일을 많이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이 태초에 온전한 상태로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는 것이다는 것을 시위하려고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지금 문제가 하나 발생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 그랬는데 또 벌써 지금 실현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금 벌써 실현이 된다고 했는데 시간적으로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또는 조화 되는가 미래에 온다고도 가르쳤고 지금 실현된다고도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한동안 많이 토론을 했어요. 금세기 전반부 까지는 많이 토론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 하는데 있는가 아니면 현재 실현이 된다고 하는데 있는가 이런 것을 많이 토론을 했는데 1950년대부터 금세기 중반부터는 학자들이 대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어서 일치를 보았어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도 가르쳤고 현제 실현이 된다고도 가르쳤는데 미래에 온다는 것은 미래에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를 통해서 지금 현재 실현된다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가 이제 출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범! 그래서 출범과 완성이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 된다. 그래서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올 것이며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미 출범했다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다고 할 수 있고 지난번에 우리 본 바와 같이 눅 7장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 가운데 이미 임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원래 유대인들의 종말론을 그리스도께서 더 자세히 가르쳐줌이지요. 유대인들은 원래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에 의하면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통치하는 이 세상 그러니까 사단이 죄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이 세상 끝에 하나님이 오신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를 보낸다. 그래서 오는 세상이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출범시킨다. 이렇게 봤어요. 그래서 두 세상 두 세대로 나누어서 생각을 했어요.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죄악과 고난으로 통치한다. 그래서 이 세대는 사단을 우상들을 통해서 실제로는 사단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득세하는 세상.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고 못살게 구는 세상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셔서 이 역사속에 오셔서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그러니까 이 세대를 종결시키고 오는 세대를 출범시켜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이 된다. 의와 생명의 통치가 이루어 진다.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언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의 통치를 이룰까 빨리 좀 그러셨으면 지난번에 우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 공부할 때 유대인들의 그 기도하나를 제가 소개했죠. 우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내용적으로 많이 연결되어 있는 기도라고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에 유대에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하나 소개했지요. 주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의 생애에 너희의 날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곧 세우시기를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간절히 묵상했던 것과 같이 이 이방인들을 통한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까지이니이까?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를 지체하셔서 우리를 이 고난 가운데 두시렵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렵니까? 하고 하나님께 탄식했죠. 시편과 선지자들이 그것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렵니까? 라는 탄식으로 가득 차 있죠. 십자가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는 기쁜소식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언제까지나이까 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알마나 기쁜소식이어요. 하나님의 통치가 곧 온다. 사단의 죄악과 고난의 통치가 금방 꺽고 의와 생명의 통치를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이어요. 곧 오는 것만이 아니고 지금 벌써 왔다. 지금 벌써 출범을 했다. 나의 말씀선포를 통해서 그리고 나의 말씀대로의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나를 통해서 실현됨이 어떻게 나타나요. 병자를 고치고 치유함으로 나타난다고 그랬죠. 죄악과 고난의 통치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 실증된다고 그랬지요. 삭개오 같은 사람이 온전해 지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손마른 자가 문등병자가 깨끗해지고 혈루병자가 깨끗해지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그 통치가 언제 완성이 되냐면 미래에 완성이 된다. 지금 현재 실현되기 시작했어요. 출범을 했어요. 미래에 완성이 된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어요. 이것을 우리가 다음에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겠는데 우선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그리스도께서 흔히 쓰는 동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동사여요. ‘오다’ 아주 독특한 어법이어요. 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여기 오늘 읽은 본문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주신다고 하죠.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하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 이것도 예수의 독특한 어법이어요. 이런 어법이 구약이나 유대교의 문서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어법이. 그러니까 또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고 그래요. 인간이 하는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또 하나님 나라를 받아요. 반면에 이것의 의미 어법의 함축 의미를 더 확실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법과 비교나 대조를 해보면 좋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말을 많이 쓰죠. 우리 기도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루기 위해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해야 된다고 하죠. 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선교사를 보내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고 이런 말을 우리가 많이 하죠.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런 말을 일체 쓰지 않아요. 복음서들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든지 확장하다라든지 하는 말을 쓰지 않아요. 왜 그런가? 우리가 금방 알 수가 있지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동사들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여요. 그리고 그것의 은혜성에 대한 강조여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에 대한 강조 하나님 나라가 인간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그들의 힘으로 그들의 재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에요. 초월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어요. 우리 인간들이 이루면 그것은 내재적인 것이지요. 이 우주의 내제적인 현실 그것이 아니고 이 우주 밖에 계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초월자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에요. 여기서 주신다 받다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느냐하면 그 말이 그래요. 이 말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느냐면 상속의 뜻이 들어 있어요. 우리가 그 상속을 받는다.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거여요. 우리가 이미 여러분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의 탕자의 비유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 다시 아들로 회복되고 아들로 회복이 되면 그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회복이 되는 거여요. 그래서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들어감. 탕자의 비유가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데 대한 아주 훌륭한 비유지요. 이렇게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했어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룬다든지 또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확장한다든지 이런 언어를 일체 안했다고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인간들의 내재적인 산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언어를 일체 안했다고요. 왜냐하면 이것이 전에도 한 번 설명했지만 구원의 조건들이어요. 이 두 가지를 갖춘 것이 구원이어요. 거꾸로 말합시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초월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것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어요. 전에도 한 번 설명을 했지만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전체를 한 번 더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마당이니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는데 이른바 세상의 고등 종교들의 신관 신론들과 거기에 따른 그들의 구원론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비교해 보면 이 진리를 우리가 금방 깨달아요. 인도종교들은 원래 인도의 힌두교라든지 아주 쉽게 말해서 개혁 힌두교라고 볼 수 있는 불교라든지 이런 종교들의 신론을 뭐라고 그래요. 범신론이라고 그래요. 범신론이라고 그러죠. 범신론은 그러니까 힌두교나 불교는 범신론을 가진 종교여요. 그 종교에서는 신의 초월성을 부인해요. 하나님의 초월성. 우주 밖에 무슨 초월하는 신이 있는게 아니어요. 우주가 신이어요. 우주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합일신이다 그렇게 보는 거여요.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하나의 신의 표상들이어요. 이 표상들은 사실은 그 신 우주의 본질적인 신의 다양한 나타남의 형상들이기 때문에 그 형상들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다만 그렇게 나타날 따름인 그러니까 환상에 불과한 것이어요. 불교용어로 말하면 삼라만상이라는 것이 실제가 아니고 실제신의 다양하게 나타날 따름인 표상들이고 그러기 때문에 환상들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뭐 이렇게 아름다운 것과 추함 이렇게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다 헛된 나눔이어요. 선이라는 것도 악이라는 것도 없고 무슨 추악함이라는 것도 없고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없고 그런 것이 다 하나의 신의 다양한 표출 나타남에 불과한 거여요. 그러니까 무슨 나무 사람 소 돼지 이런 것들이 다 하나의 신의 다양한 표출 나타남이다. 이런 신론을 가진 그러니까 신의 초월성을 부인한 신을 가진 종교는 자연히 구원론이 어떻게 설정이 되냐면 자력구원론으로 설정이 되어요.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해야 됨. 왜냐하면 우리를 우리 밖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무슨 신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가 그 신의 하나의 표출이어요. 그러니까 우리 밖에 우리 보다 크신 이로서 문제를 해결해줄 그런 신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문제가 있다면 자기 힘으로 해결을 해야 되는 거여요. 자력으로 해결해야 되는 것이어요. 어떻게 해결을 하느냐 지혜 깨달음이죠. 깨달음을 터득을 해서 우주의 본질인 그 신과 다시 합일됨을 통해서 또는 선행을 통해서 주로 이 두 가지를 구원의 방도로 삼지요.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신비적 요가라든지 참선이라든지 이런 심신의 단련을 통해서 우주의 본질과 합일되는 신비적 체험을 하는 것이죠. 그런 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그러는데 자력으로 입니다. 자기 힘으로 이런 자력구원론이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자력구원이 가능하다면 인간이 원래 구원받아야할 이유도 발생하지 않죠. 우리가 제한 된 존재이고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고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고 하기 때문에 고난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시간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우리의 제한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자력구원론이란 구원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여요. 이것 인본주의 사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거지요. 반면에 또 이슬람교는 이런 종교들의 신론을 이신론이라고 그래요. 이신론은 신의 내재성을 부인해요. 그가 은혜로 우리 가운데 오심 내재성을 부인해요. 그러니까 이신론은 신의 초월은 있으나 신의 은혜로 이 세상에 오심. 내재성을 부인해요. 이슬람 신관에 의하면 알라가 세상을 창조한 분인데 그림으로 말하면 저 하늘 꼭대기에 혼자 고고히 앉아 있는 거여요. 그래서 이 타락한 세상 속으로 오시지 않아요. 그래서 이슬람 나라 가보세요. 회교나라 가면 하루에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회교사원의 높은 탑 있지요. 미나베트라고 하는데 거기에 이 사람들 기도하러 오라고 불러요. 그런데 그 부름이 아라비아어로 이슬람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을 시작한다고 그래요. 그것이 뭐냐면 두 마디여요. 알라는 전능하시사. 둘째로 그 다음은 제가 모하멧이 그 선지자이다. 이슬람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이 두 마디여요. 알라는 전능하다 위대하다. 그리고 모하멧이 그의 선지자다. 그런데 알라는 전능하시다는 말은 신의 초월성이 더 강조. 그것이 너무 강조되어 가지고 그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 속으로 오시느냐? 오실 수 없다. 그래서 이 내재성을 부인한다. 이런 신관을 가진 종교는 그러면 구원론이 어떻게 성립이 되냐면 아주 숙명론으로 빠지든지 창조주 알라가 우리 모두를 창조할 때 원래 모두를 결정한 숙명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짐. 결정론이지요. 운명론이지요. 그래서 구원받기로 한 사람들은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니고 이렇게 아주 숙명론으로 빠지든지 그래서 이슬람 사람들이 말끝마다 하는 소리가 알라의 뜻대로 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주 깊은 숙명론에 빠져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든지 그런데 깊은 숙명론에 빠져 있으면 인간의 위로가 없다고요.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구원에 대해서 논해야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사람들도 자력구원론을 논할 수 밖에 없어요.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얻어서 또는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감. 왜? 이신론에 의하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초월자는 계시는데 그가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여기서도 구원이 인간이 스스로 이루어 가야 되는 거여요. 아까 여기 범신론의 신론에 있어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자력구원론으로 빠져들듯이 반면에 이신론에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있으나 그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지 않으므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야 되요. 그렇게 되는 것이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그러나 자력구원론이란 사실은 불안한 이야기라 구원이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여요. 보다시피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그 신은 초월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어야 하며 그 분이 이슬람 같이 혼자 저기 한 꼭대기에 앉아서는 소용이 없어요. 그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야 되요. 내재성과 초월성 또는 신의 초월성과 은혜성과 내재성 이것은 그러니까 진정한 구원이 있기 위한 조건들이에요.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여요. 이것이 복음이라 이 말이어요. 이것이 왜 기쁜소식이냐? 아주 쉽게 말하면 초월하셔서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다.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그 무지함 속에 우리의 그 죄악스러움 속에 우리의 고난 속에 우리의 죽음 속에 방치해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오셔서 그 분이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통치로 베푸신다. 이것이 기쁜소식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로 시작해서 막 1: 15절에서 마가는 그리스도의 선포를 무슨 말로 요약해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가 복음 됨이 기쁜소식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제한된 우주속에 우리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그냥 방치되어 버린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지요. 우리보다 크신 우리를 지으신 무한하신 하나님 초월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다. 그 분이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통치를 베푸신다. 이것이 기쁜소식이어요.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기쁜소식.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제기한 질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첫 답은 뭐여요. 하나님 나라가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들은 다들 수동적인 의미이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부인하는 말이어요.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 나라가 표상하는 상징하는 구원이란 것이 인간의 자력에 의한 것일 수 없다. 그 말이어요. 그러므로 모든 인본주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은 모든 인본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라고도 볼 수 있는 거지요. 지난 번에도 설명을 했습니다만 모든 인본주의는 자력구원론은 항상 두 가지를 구원의 방도로 삼는다고 그랬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지식 하나는 선행 이것에 근본적으로 하나를 덧붙인다면 신비적 합일의 체험 심신의 수양을 통해서 신비적으로 우주의 본질과 합일한다는 그런 체험 이런 것을 주로 지혜와 선행을 구원의 방도로 삼는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많이 홀린다고 그랬어요. 왜 그러느냐면 인간이 지혜를 잘 개발하고 선행을 잘 개발하면 정말 삶이 확대되는 것 같고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전에 작년 이맘때도 특강으로 설명을 했지만 인간들의 과학의 발달로 자연에 의한 관찰로 얻은 지식 과학적인 지식 그것의 지식의 활용을 통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교통통신수단이 발전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확대되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고 우리가 얼마나 장소적 제약을 극복하고 우리가 얼마나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우리가 얼마나 삶이 확대되었어요. 그것으로 계속 지식을 개발해 나가면 우리의 문제들을 우리가 다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환상을 우리에게 주어요. 그러나 이 인본주의적인 방법은 항상 삶만 확대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또 그만큼 확대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산업혁명이 우리로 하여금 농업혁명이 우리로 하여급 배고품 그리고 소비적인 결핍으로 부터 해방을 가져와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확대했으나 그만큼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말미암는 인간성 황폐를 가져오고 그만큼 자원고갈 공해 이런 것으로 죽음이 확대되는 거여요. 교통통신수단의 발달이 우리로 하여금 장소와 시간적인 제약으로 부터 많이 해방을 해서 우리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풍부하게 확대했지만 동시에 그 첨단 통신수단의 방비가 우리를 시간과 장소의 제약으로 부터 자유롭게 하는 그 첨단 통신수단의 장비가 우리 모두를 속박하는 거여요. 우리 모두를 속박하는 죽음이 그만큼 확대되었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전화가 우리를 속박하고 첨던 통신수단의 장비가 우리를 일거수 일투족 감시함으로 인한 속박이 일어나고 이렇게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개발하고 선행을 개발해서 구원을 이루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과 죽음의 삶이 확대되는 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변증법적인 실제만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지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의 이면이 없는 온통 순수한 삶 덩어리만의 축복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력구원론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도대체 초월 온전한 자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루어야 된다는 강조하는 신학이 있죠. 이른바 요새말로 하면 해방신학이라고 하지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역사의 과정속에서 투쟁해서 자유를 확대하고 정의를 확대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어서 이렇게 해서 이 땅에 샬롬을 이루어야 된다. 그런 것을 우리는 해방신학이라 그러지요.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주신다는 언어를 쓰면서 동시에 제자들더러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너희들의 지혜를 너희들의 선행을 동원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는 것은 크게 말하면 인본주의적인 철학에 대한 선전포고이면서 좁게는 신학적인 맥락에서 말하면 해방신학에 대한 거부이기도 해요. 해방신학에 대한 것이 요새 나오는 것만이 아니고 예수 당시에 아주 절실한 신학이었어요. 왜? 열심당 열혈당의 신학이 사실은 해방신학이었어요. 자기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압제자 로마 사람들과 그들과 결탁한 집권층과 무력투쟁을 통해서 민족을 해방하고 거기에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있게 한다는 것이 예수 당시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열심당이었어요. 그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내세워서 그런 그 인간들의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야 된다고 그래요. 예수 당시 아주 절실한 대안이었어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주 인기 많이 얻고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얻었던 운동하나가 열심당이었어요. 거기에 반해서 지금 예수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누구와 누구의 죽음과 생명이 교차합니까? 바라바와 예수의 생명이 교차하지요. 바라바가 누구여요? 바로 이 열심당원이지요. 그러나 우리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가 어떻게 오느냐를 가르치면은 초월에서 은혜로 오기 때문에 해방신학과 같이 예수 당시의 열심당의 신학 같이 또는 오늘날의 해방신학 같이 인간들이 무슨 투쟁을 해서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해방신학은 틀렸고 우리 신학이 옳다. 이렇게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만족케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우리도 보수 경건주의자들도 해방신학 같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신학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여러가지로 많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공로신학으로도 나타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섬김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의 도에 맞게 반대 급부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다. 그런 신학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어요. 그것은 사실 해방신학은 사회구조로 개혁하고 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게 좀 큰 체제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경건주의자들은 그것을 개인의 삶 아주 개인주의적인 평면으로 줄여서 생각한다는 차원만 있지 사실은 똑같이 하나님 나라 구원을 자기 힘으로 얻어 내려고 하는 자력구원론으로 빠져있는 거여요. 또는 우리가 선교도 가끔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회에서 다분히 개인윤리 차원에서 우리가 거짓말 안하고 아주 개인윤리적인 차원에서 아주 소극적인 윤리에서 어떤 음식을 삼가하고 몇 가지 율법들을 잘 지키고 이렇게 해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게 하겠다. 이런 태도를 갖는다든지 이렇게 해서 우리 경건주의자들도 까닥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거슬려서 자력구원론에 빠질 때가 참 많아요. 우리가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아주 근본적으로 잊지를 말아야할 것이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확장한다는 이런 말을 전혀 쓸 수 없느냐 예수는 안 썼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그래도 쓸 수 있지 않겠느냐 아마 쓸 수 있을 것이어요. 어떤 맥락에서? 선교맥락에서. 가령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보내시고 70인 제자들을 보내시고 나중에 그의 교회전체를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하셨지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도록. 교회는 보냄 받은 자들의 공동체여요. 뭐 하러 보냄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사는 동네에서 또는 직장에서 먼 나라에 이르기 까지 보내고 또 우리가 가고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에 믿음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 생기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기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들이 사단의 주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주로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함. 그것이 그들의 사고와 그들의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나타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뭐한다고 볼 수 있어요. 이루어졌다고 실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의 복음전파 우리의 제자도의 삶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삶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 그런 영역이 확대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선교 우리 제자도의 삶 사랑의 행위 이런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여요. 이차적으로 그리스도는 그 말을 안 썼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이런 말을 쓰기는 쓰되 그때 염두 해 두어야할 것은 그것이 이런 해방신학이나 또는 경건주의자들 공로의 신학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서 써야한다. 어떻게 하면 변질되느냐. 하나님의 초월에서 그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신본주의적인 하나님 중심주의적인 신본주의적인 관점을 우리가 망각하면 우리는 이런 해방신학이나 공로주의신학을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적인 신학으로 전락을 해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것과는 동떨어진 생각을 갖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뒤틀리게 되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이루는 삶이 못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실현시키는 그래서 우리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온전함을 맛보게 하는 삶이 못되고 정반대로 죽음을 더 앙양하는 고난을 더 앙양하는 삶이 되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시간에 더 하기로 하겠어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 처음 조금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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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7) 마13장31-33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1 - 김세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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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3장31-33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오늘 같이 묵상할 말씀은 마 13:31-33절 까지 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두 비유를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 하도 오랫만에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어서 이전에 같이 생각했던 것을 다 잊어버렸을까봐 걱정이 되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없고 그래서 한 달 전에 했던 것만 간단히 간추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던 중이었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 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 이렇게 가르쳐 주셨는데 어떻게 오는가를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 그리스도께서 특히 강조했던 한 한 말을 지난 번에 살펴보았어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편에서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온다. 어떻게 오는가? 인간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바벨탑이라 그러지요.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초월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굉장히 강조했어요. 그 강조한 것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같이 쓴 동사들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받고 이렇게 온다. 주신다. 들어간다. 받는다. 주로 이런 동사들을 쓰셨지 인간들이 인간의 힘으로 지혜로 이룬다는 동사는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서 제일 먼저 우리가 강조해야할 것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그렇게 그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의 힘을 갖기 위해서 초월성과 은혜성이 두 개의 조건부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에게 도대체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인간들 밖의 인간들보다 더 큰 신에서 그러니까 완전한 자에게서 무한자에게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초월에서 와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속에 내재해 있는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 그것은 항상 제한된 것이어서 구원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초월에서 은혜로 밖에 올 수 없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온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의 모든 인본주의적인 사고 인본주의적인 문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요. 인간들이 항상 자기들의 현재 문제를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구원을 얻고자 동반하는 두 개의 방편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지혜 지식과 선행이라고 그랬지요. 이것들이 얼핏 보기에는 우리에게 상당히 그럴듯한 면을 가지고 있어요. 지식을 개발해서 우리의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선행을 잘 개발해서 또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인간들이 지식을 개발하고 선행을 개발하면 구원의 상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들은 결국 바벨탑 같은 것이어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어요. 그래서 구원은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점을 굉장히 강조하셨다. 오늘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두 번째 요점은 방금 요약한 지난 시간에 묵상한 것과 얼핏 보기에는 상반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어요. 그것은 우리의 역사속에서 우리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자라고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그런 가르침을 여기서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대 묵시문학가들은 하나님 나라가 일시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천지개벽과 같은 변혁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으로 그리기도 하고 예수 당시에 열혈당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를 재건하여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열혈당은 큰 정치적 사회적 혁명을 동방하고 하나님 나라가 올 것으로 보았어요. 우선 로마와 같은 외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고 다윗왕조가 재건이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정복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법대로의 통치가 펼쳐져서 자유와 정의가 평화가 일어나다. 이렇게 보았어요.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 그런 식으로 별로 가르침이 없어요. 예수의 재림 때에 예수께서 인자로서 하나님의 천사들과 임할 때에 세상에 큰 갱신이 있을 것을 말하기도 하나 예수의 강조점은 지금 여기서 예수를 통해서 오고 구원의 힘을 발휘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있었는데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큰 천지개벽 같은 변혁을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어떤 정치적 사회적 혁명을 이야기한 것도 아니에요. 한쪽에서 지금 A. D. 66년에 드디어 터지는 해방운동 해방전쟁 하나님의 통치의 이름아래 로마에 선전포고할 기세로 열혈당 운동이 지금 가고 있는데 예수의 활동을 한 30년쯤 본다면 여기에 하나님 나라 선포운동과 라이벌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운동이 열혈당 운동이라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로마에 대항해 항전해야 할 것을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는 거기에 등을 돌리고 그런 쪽으로 우리에게 해석하게 하는 어떤 사회정치적 경제적 운동의 프로그램도 그런 것은 조금도 제시하지 않았어요. 우리 복음서에 사화경제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서 별로 볼 수 없어요. 반면에 우리가 방금 읽은 이런 비유들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냐?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땅에 심겨져서 점차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많은 새들에게 깃들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냐? 큰 반죽덩이에 가미되는 누룩 같은 것이다. 가루 서말로 만든 반죽에 조금 가미되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밀 세 말의 반죽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비유에 하나의 비유를 덧붙이면 스스로 은밀하게 자라는 씨의 비유가 있지요. 스스로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자라는 씨의 비유 막 4: 26-29절 그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지금 우리가 본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와 같은 성격의 것이어요. 여기서 세 비유가 같이 가지고 있는 공통성이 무엇입니까? 은밀성이지요. 씨 겨자씨 보일랑 말랑한 씨 은밀성 그 다음에 점진성 점진적으로 자라는 거여요. 또 누룩이 점진적으로 발효해서 누룩덩이 전체를 변화시키죠. 그 다음에 강조되는 것이 무엇이죠? 필연성 . 그러나 겨자씨는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누룩도 필연적으로 온 반죽덩이를 부풀리게 되어 있어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도 마찬가지여요. 그 씨가 땅에 심기우면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왜 씨가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땅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작아서 보일랑 말랑한 미미한 것일망정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나라도 그런 것이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갈릴리 아주 피폐했던 이북의 착취가 심했던 곳에 몇 안 되는 제자들과 여자들을 예수께서 모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유대 땅 전체의 맥락에서 보나 더 크게는 당시 로마 제국의 맥락에서 보나 더 크게는 세계제국의 맥락에서 보나 진짜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의 하나님 나라운동이라는 것은 진짜 겨자씨만한 것이었지요. 서말의 반죽덩이에 비해서 조그마한 누룩 같은 것이지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점차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많은 새들이 깃든다. 많은 새들은 많은 민족들을 표현하는 랍비들의 상징이라고 그러지요. 많은 민족들이 구원의 안식처를 얻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은 복음선포를 통한 선교를 통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선교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지요. 누룩의 비유는 인간과 사회적인 변화 문화적인 변화를 많이 생각하게 하지요.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렇게 예수와 갈릴리 출신의 몇 사람들에 의해 시작이 되었지만 온 세상의 사상과 인간관계와 가치관과 윤리와 제도와 이런 것들을 완전히 변화시켜요. 그래서 그곳에 구원이 있는 더 많은 자유가 더 많은 정의가 더 많은 평화가 더 많은 풍요로움이 있게 변화시킨다. 그러니까 열혈당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사들로 스스로 생각하고 무리를 지어서 무기를 들고 로마제국에 대항해서 그리고 로마제국과 결탁한 자들에 대항해서 싸워서 거룩한 전쟁(성전)을 벌여서 다윗왕조를 건설해서 일단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노예문서 부채문서를 다 불질러 가지고 사회정의를 확보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법대로 통치함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본 거여요. 이렇게 본 거여요. 그러니까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히 정치적 사회적 혁명적 프로그램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반대로 그런 것은 별로 없고 틀리게 가르쳐요. 첫째로 지난 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초월성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은혜성을 강조했는데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은혜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그러면 지금 역사 속에서 어떻게 와서 어떻게 실현이 되느냐? 이런 것을 몇 개의 비유들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비유나 누룩의 비유나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같이 되기 위해서 요구하는 전제 조건들이 여기 있어요. 이렇게 말해요. 일단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당시 절실한 대안으로 제기 되었던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요. 그렇게 보아야 되어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 거여요. 예수께서는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말라. 그런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 그 대신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생각하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첫째로 부정적으로 말하면 당시의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 부정적인 비판을 담고 있어요.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러면 예수께서 무엇을 전제로 하고 말하느냐.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 이런 부름을 받아들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뭐라고 그래요?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그래요. 예수의 제자들은 순종을 전제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통치에서 순종하고 사는 것을 전제하고 지금 예수께서 이렇게 말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 죄를 회개하고 사단의 죄악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나라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예수의 부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말로는 받아들였다고 하고 실제로는 사단의 사주를 받아 사단의 뜻대로 살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면 지금 이야기한 대로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저절로 자란 씨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속에 오고 역사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실현되어 가고 그래서 그 속에 이미 들어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더 맛보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깃들 곳 안식처를 제공하는 구원을 얻도록 하는 그런 힘을 발휘한다 이 말이어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두 가지다. 막 12:28-34절을 보시겠습니까?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와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묻되 모든 계명들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첫째가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라’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두 마디여요.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이어요.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복잡하고 율법이 괜히 복잡해요. 우리 신약성경을 보면 가령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편지에서 이렇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이러지 말라하고 금하는 것도 굉장히 복잡한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자세히 보면 예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두 마디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두 마디여요. 두 마디가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적용되도록 다양하게 나타날 따름이지 복잡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 윤리를 생각한다든지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에 원리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내가 이것을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할 때 원리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 율법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복잡해지고 판단을 못하고 그래요. 우리는 구체적인 삶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는 뜻이 무엇이냐? 내가 하나님께 올바로 드려야할 순종이 무엇이냐? 성경에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어떤 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가르침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삶의 정황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저 때는 저렇게 해야 되고 가르쳐 주지 않아요. 옛날의 랍비들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그랬어요.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요.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인가? 아닌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수에 대한 사랑인가? 아닌가? 두가 지만 생각하면 되어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여요. 예수께서 특히 우상숭배는 뭐여요? 맘몬 우상 돈에 대한 사랑 특히 경계한 우상숭배 맘몬 숭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장 크게 훼방하는 것이 돈을 사랑함이어요. 우리가 왜 돈을 사랑해요? 돈으로 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것을 갖기 때문이죠. 돈이 우리에게 안전을 주고 행복을 준다는 생각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 맘몬 우상 돈을 우상으로 섬길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해요. 돈을 더 많이 벌면 할 수 없이 어떻게 되요. 이웃과 착취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갈등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자유가 없어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평화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아까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는데 사실 두 마디가 아니고 한마디여요. 한마디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어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은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그 속게 포함하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으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나의 행복과 안전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고 내가 전적으로 시인하지 않는 한 내가 내 지혜를 동원하고 내 힘을 동원해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고수할 수단을 얻어야 되요. 어떻게? 이웃에 대해 대항해서 나를 주장하고 착취하고 그것은 무엇의 반대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과 반대말. 그러나 내가 나의 모든 안전과 행복이 나의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초월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준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헌신한다. 하나님이 내가 이웃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해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한다. 이런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면 이웃에 대해서 자연환경에 대해서 너그러울 수 있고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두 계명들은 두개가 아니고 하나여요. 그런데 그 중에서 우선된 것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어요. 십계명의 제 2계명.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시대부터 우상숭배를 가장 큰 죄악으로 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이 두 가지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두 가지 길을. 열혈당의 길 예수의 길 이 열혈당은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악한자들을 징벌하는 복수전쟁을 통해서 억눌리고 짓밟힌 자들의 한을 푸는 복수전쟁을 통해서 그래서 거기에 좀 더 많은 사회정의를 확보하는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경제적 분배 기구를 만들어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풍요가 확보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게 가르쳤죠. 오늘날 그런 가르침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장 체계적으로 가르쳤고 실험했던 것이 공산주의이지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세속화된 형태지만 사실 공산주의가 열혈당의 이데올로기를 세속화한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무슨 사회주의적인 정의 사회주의적인 평등을 말했지만 거기에 무슨 정의가 있었고 평등이 있었고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었고 풍요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으로 힘 있는 놈은 힘없는 놈 억누르고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착취의 원칙으로 삶을 꾸려나가면 사회가 더 발달하고 부가 확대 재생산되어서 결국 가난한 자에게도 조금이라도 더 돌아간다. 이런 체제로 산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구원의 길이 있어요? 지금 자본주의 세계에도 내부적 병이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나타나 있어요. 그런 것을 길게 논의할 필요도 없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자본주의적 무슨 정치 사회적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고.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조금 피상적인 기독교인들이 손봉호 장로님이 들었던 예 같은 것을 들면서 아니 손장로님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아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 가보면 적어도 3대 부터는 잘 산다. 또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이 더 경제적으로도 낫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 나타나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것을 금방 그러니까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자본주의를 더 옹호하고 지지하는 그런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여야 된다. 이런 식으로 논리적 비약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께서는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라든지 사회제도라든지 무슨 정치적인 프로그램. 반면에 사회주의적 시계추가 한동안은 반대로 돌아 가지고 정말 기독교인이면 사회주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착취하는 꼴을 보고 어떻게 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자기 종으로 인권을 무시하고 부리는 일을 할 수 있느냐. 기독교인은 사회주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이것이 한동안 유행했어요. 지금도 상당히 유행해요. 가령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여러분들 독일에 큰 두개의 정당이 무엇입니까? 기민당 이들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에 강조점을 두지요. 사민당이 있지요. 이들은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요. 두 정당이 서로 다투지요. 그 속에서 이제 많이 토론해요. 누가 더 기독교적이냐? 기독교 민주당 기독교의 이름을 붙인 기민당이 더 기독교적이냐? 기민당은 원래 카톨릭 사회운동에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거기 카톨릭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고 또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요. 반면에 이 사민당 속에는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열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은 양심이 민감한 기독교인들도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이 사민당은. 어느 것이 더 기독교적이냐 하고 다투고 그러는데 그래서 정말 기독교인을 위해서는 정말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려면 사회주의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고 사회주의적이어야 한다. 이런 것이 한 때는 구호로 내세워졌는데 사회주의적 정치 경제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실현된다고 보지 않은 거여요. 지금 다시 강조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초월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그런데 지금 또 어떻게 둘째로 오느냐?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은밀하게 점진적으로 필연적으로 역사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할 때 그렇게 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예수의 부름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면 그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에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에 일어난다. 그런데 그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두 마디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모든 우상숭배를 극복하고 하나님에게서만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구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의 뜻에 완전히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태도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내 인간의 재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우리 선행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이런 맘몬인 우상숭배도 아니고 물론 무슨 다른 종교의 숭배대상이라든지 어떤 인간 무슨 카리스마 큰 힘을 가진 무슨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무슨 저기 주체 왕궁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이나 무슨 심지어 우리 김영삼 장로 인간에게서 무슨 저기 구원을 얻으려는 이런 태도는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서만 우리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 그러기 때문에 그의 뜻에 완전히 순종해서 살려고 하는 헌신 이것 하나. 그런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이것을 우리가 확대되면 그 두 가지를 갖고 살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요구하는데 그것에 순종해 살면 우리 주위에 우리가 아무리 미미한 존재일망정 점차 필연적으로 자유가 확보되고 더 많은 정의가 확보되고 더 많은 평화가 확보되고 도 많은 풍요로움이 확보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역사속에 실현이 된다 이 말이어요. 그 이야기여요. 그러면 아까 처음에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가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는데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에 순종하면 은밀하게 무슨 큰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난리 피우지 않고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은밀하게 한꺼번에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더 많이 자유가 확대되고 더 많이 정의로와 지고 더 많이 평화로와 지고 더 많이 풍요로와 지고 이런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 순종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것 .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면 앞에 강조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본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과는 모순된 것 같죠? 완전히.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왜? 아까 손장로님도 강조했는데 그래서 오늘 여러가지로 묵상하는 기도들이 잘 통하는데 도대체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이 땅에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서 할 수 있어요?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하는 것, 아까 린턴은 원수 김일성이도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랬는데 진짜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김일성이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한국전쟁을 일으켜 가지고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 조국을 초토화시켜서 엄청난 고난을 끼친 이 자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김일성이는 고사하고 나에게 따귀한대 때린 내 옆의 친구 어떻게든지 따귀 한대 때려줘서 따귀 한대 아니고 두 대쯤 때려 가지고 그래야 지금 속이 좀 시원히 한이 좀 풀리겠는데 그 놈의 한이 지금 여기 맺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힘 자체가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없는 거여요. 이것을 신학적으로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고 하죠.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한마디로 하면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더 사랑하고 같은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 휴머니즘 인간성을 도야하고 개발하고 이렇게 해서 부를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상대방의 인권을 존중해서 상대방에게도 더 많은 자유의 영역을 확보해 주고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과 지금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이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반대여요. 인간의 내재의 선함 선행을 개발하고 재능을 개발해서 이것에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그것은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공산주의의 형태로든 자본주의의 형태로든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과 내게 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 선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조금이라도 의존할려고 하고 내 힘으로 무엇을 할려고 하고 내게 선함을 자랑삼을려고 하고 바울의 말로 말하면 자기 육신을 자랑함. 인간의 우리속에 내재해 있는 힘으로 무엇을 할려고 함. 이것은 완전히 우상숭배여요. 이것을 철저히 부수고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어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하는 것 밖에 없어요. 어떻게? 구체적으로 내가 자꾸 우상숭배에 빠지려고 하는 거여요. 내 재능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나의 선행을 믿으려고 하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요. 교만해지고 독선해지고 도움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권력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려고 하고 하나님 나를 이런 우상숭배에서 건져주시고 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게 내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초월에서 그의 은혜로 내게 믿음이 주어지도록 기도하고 나는 이웃을 사랑할 힘이 전혀 없어요. 그것을 철저히 의식하고 의식한 만큼 하나님 제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초월에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곧 헌신의 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하나님의 그 구원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여요. 겨자씨같이 누룩같이 그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그 구원의 힘이 나타나고 사회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오는 거여요.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나타난다 이 말이어요. 이것을 우리는 개인윤리의 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고 사회윤리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의 개임적인 삶에서도 그러함 자세로 살아야 되겠지만 이러한 원칙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가 나의 삶의 영역에서 가치관으로 법으로 행동양식으로 문화적인 표현으로 표현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각계각층 모든 분야에 들어가서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그러니까 우상숭배에 반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 복수 앙갚음을 해서 정의를 확보하려는 내가 당한 만큼 되갚음으로 해서 발란스를 다시 이루려는 것에 반해서 그런 법칙이 아닌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또는 원수의 사랑의 정신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그렇게 나타나니까 그 가치들과 그 원칙들이 입법하고 정치하고 사법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제도로 더 많이 나타나게 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속에서 그것이 완벽히 나타날 수 없지만 최대한도로 많이 나타나도록 노력을 해야할 것이며 아까 린턴이 영화 이야기했습니다만 영화 만드는 사람 소설 만드는 사람 글 쓰는 사람 시 쓰는 사람들은 또 인본주의 우상숭배를 앙양하고 퇴폐 맘몬이즘 우상숭배를 앙양하고 이웃에 대한 복수를 앙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의 정신을 담고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실현시킨가 하는 것을 자꾸 표현하는 것을 해야할 것이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음악 하는 사람들 상거래 하는 사람들의 사업의 장에서도 각자의 장에서 물론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교육하는 사람들은 책임이 크지요. 설교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서 우리가 우상숭배에 반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이웃에 대한 자기주장 또는 원수에 대한 앙갚음에 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 또는 원수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그 다스림 하나님의 그 요구에 우리가 순종함으로서 개인윤리측면에서 아까 예를 든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오도록 은밀하지만 점진적으로 필연적으로 확대되어 가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거여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온다고 했어요?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게 하고 우리에게 우리로서는 도저히 갖지 목하는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힘을 주셔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이말이어요. 또 나중에 이 문제를 토론하기로 하고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토론을 일단은 이만큼으로 마칠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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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8) 막11장1-12장11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2-김세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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