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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사회의 희망상실증과 기독교의 역할

하나님아들 2013. 2. 14. 23:12

한국사회의 희망상실증과 기독교의 역할

 

 

심영규
김천 신일교회 목사

 

 

우리사회는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비관층’이 급증하고 자살, 이민이 늘어나는 등 우리 사회의 ‘희망상실' 증세가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 통계청은 “작년 9월 전국 15세 이상 7만 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20.4%에 불과했다”고 밝힌 반면에 ‘불만족스럽다’는 응답은 28.3%, ‘보통이다’는 51.3%로 국민 10명 중 8명이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층에선 만족한다는 응답이 15.9%에 그쳐 다른 연령층보다 많았으며, 미래의 꿈을 키워가야 할 15-19세 청소년층에서도 만족한다는 응답은 25.5%에 불과했고, 아래 도표에 나와 있듯이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부정적, 비관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국민들의 생활은 불만족하고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은 절망적인데,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이 민족 속에 얼마나 희망을 주는 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천만 신도를 자랑삼는 기독교가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하는 유명무실하고 유야무야한 허장성세의 종교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과연 그 종교적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늘 세계역사 속에서 삶의 정황에 구체적으로 반응하며 개인과 사회를 변혁시켜 왔다. 예컨대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위로나 치유의 역할을 해 왔으며, 실패한 사람에게는 재기의 길이 있다는 것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살 길이 있다는 기쁜 소식으로, 급격한 사회변동을 경험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안정감을 마련하는 것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계급을 타파하는 것으로 희망과 소망의 종교였던 것이다.

우리 사회를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 범죄, 부정부패, 윤리와 도덕의 타락 등의 현상들을 바라보며, 기독교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자책감과 더불어 이러한 사회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갈 과제로 여겨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는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에 기여해야 한다. 기독교는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와 규범의 근거를 확립하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집합의식과 정감을 마련해 줌으로써, 사회가 하나의 도덕 공동체로서 질서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사회안정과 현상(status quo)유지에 공헌하지 못함은 분명 문제가 있다. 더 나아가 기독교는 사회적 일탈행위를 억제하고 예방하는 사회통제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음에도, 기독교의 윤리적 계명들이 우리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를 초래하여 태도와 행위의 변화를 유발시키는 기독교의 가장 강점인 사회변형(social transformation)의 기능 역시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부패와 타락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하고,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 등을 외면하지 않고 수행하는 예언자적 기능의 사회비판 기능이 있다. 기독교가 죄를 책망하지 못하는 종교가 된다면 작금의 우리 사회가 암울하고 혼탁한 상태에 빠진 비난과 책임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하는 해석적 틀인 복음의 역사가 우리 사회 속에서 그쳐가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아프리카 땅 최남단에는 봉우리 같은 만이 있는데 옛 사람들은 이곳을 폭풍의 벼랑, 죽음의 벼랑, 절망의 벼랑, 심지어는 악마의 벼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최남단을 넘어 동쪽으로 가면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세기 포루투갈의 ‘V. D. 가마’라는 사람이 여기에 도전하였고, 마침내 그는 동쪽으로 달려가서 맑고 깨끗한 인도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그곳은 죽음의 벼랑이 아니라 희망봉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던 것인데,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그 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곳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데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여기고는 Cabo da Boa Esperana(희망의 곶)라고 개칭, 그것을 ‘희망봉’[喜(希)望峰, Cape of Good Hope]이라고 이름지었다. 인도 항로를 찾는 희망을 북돋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우리 한국사회는 그 봉우리와 같은 많은 폭풍과 죽음과 절망의 일들을 만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바로 희망봉임을 기독교인들이 보여 주어야 할 때이다.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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