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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11; 5 -13 구하는자에게 주신다

하나님아들 2013. 2. 14. 17:50

 

누가복음 11; 5 -13 구하는자에게 주신다.| 누가복음
생수의 강 조회 18 |추천 0 | 2005.11.01. 21:52

 

 

  주일낮 예배/ 10월 17일 (주일)
성경: 눅 11:5-13                 제목: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서론> 기도에 대하여 본을 보이시고, 친히 기도가 무엇이라는 것,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가를 친히 가르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3년의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 식사하는 것과 전도하는 것 빼고는 기도로 사셨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기도로서 삶을 사신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를 통해 능력을 공급받아야 하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고자 하심이다. 12제자들을 택하실 때도, 먼저 그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밤이 맞도록 기도하였다. 주무실 때도, 기도하시다가 지쳐서 잠이 들곤 하셨다.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나감이 없다고 하신 분도 예수님이시다. 새벽기도, 산기도, 철야기도의 시작은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기도로서 살아가야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오해들이 참 많이 생겨났다. 어떤 성도들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한다. 또 40일 동안 금식기도로 매달리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잘 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매달리고 졸라대듯이 칭얼거려야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성도도 있다. 그래서 끈질기게 기도하는 성도도 있다. 그런데 본문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이러한 기도에 대한 생각들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기도란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복종시키려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뜻이 관철될 때까지 목숨을 거는 기도는 마치 기도가 강력한 무기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꺽고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옵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내뜻을 꺽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관철시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뜻이 먼저다. 하나님의 뜻이라도 내뜻을 관철시키고자 때를 쓴다. 이러한 기도가 과연 올바른 기도인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강요에 못이겨서 두 손들고 항복하시는 분이신가? 아니다. 내 뜻을 정해 놓고 이미 결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내 뜻이 이러니 하나님 내 뜻에 따라 주십시오 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는 말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오늘 본문에 비유는 바로 우리의 기도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준다. 기도란 무엇인가? 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다.
이제 비유의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 나라가 개화되기 이전에 우리 문화는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에서도 볼 수있듯이, 양반은 배가 고프다고 얼굴을 찡그릴수도 없었고, 급하다고 달려갈 수도 없었다. 쌀 한 톨없이 굶더라도 책을 읽는 것이 우리 문화였다. 이렇게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는 동양문화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의 특징은 개인중심보다 집단중심이며, 농촌같으며 마을 중심의 사회다. 한 집에 경사가 있으면 마을 전체의 경사이며, 한 집에 초상이 났으면 마을 전체의 초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공동으로 협력하고 서로 도와주었다.

이와 같이 고대 유대사회도 우리의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처럼, 개인보다 마을 중심으로 살았다. 그래서 한 가정의 결혼식, 장례식은 바로 마을 전체의 행사였으며, 한 가정에 찾아오는 방문객은 바로 마을 전체의 방문객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웃 마을이나 외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은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환대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어느 한 가정에 손님이 찾아와서 환대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마을 전체의 체면이 손상되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날 서구의 개인주의 중심의 문화로 예수님 당시의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한 친구를 가지고 있는데, 밤 중에 그에게 가서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친구여 떡 세 덩이를 빌려주게 나의 친구가 여행 중에 나에게 왔는데 내가 그를 위해 준비해둔 것이 아무것도 없네 라고 말할 경우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이 이미 닫혔고 나의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 있네
나는 일어나서 자네에게 줄수 없네 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라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문화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고대 유대사회에서 밤 중에 예기치 않게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밤에 여행을 다니는 일이 있었다. 더욱이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못하여서, 전화나 전보로 친구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한 밤중에 예기치 않게 친구의 방문을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는 여행자를위한 숙소나 식당이 발달되지 못하였으모,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목적지에 도달해 비로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대단히 허기가 진 상태로 친구 집을 찾아 왔을 것이다. 그러나 밤 중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 친구를 만나게 된 이 사람은 배고픈 벗을 위해 밤 중에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에게 빵 세 덩이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자리에 이미 들었고, 친구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빗장을 풀기위해 어두운 방을 환하게 켜기 위해 등을 찾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는 아이들과 부인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우리 같으면, 예의도 없는 놈이라고 욕하겠지만, 이 야심한 밤에 뭐 싸돌아다니다가 밥도 못 먹고 왔느냐고 오히려 꾸짖고 나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고대 유대사회에서는 한 밤중에 소님이 찾아왔을 때, 그를 환대하는 것은 마을 전체의 불문율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예수님은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들어주지 않을 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하였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하면, 바로 이 강청함이라는 단어를 강요하다, 끈질기게 요구하다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 해석을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마지 못해서, 귀찮게 하니 어쩔수 없어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으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강청함이란 단어는 그 의미외에도, 수치됨, 체면을 손상함이라는 뜻도 있다. 만약 이 해석을 따르면, 고대 유대사회의 문화적 배경과도 서로 일치되고, 하나님이 인간의 노력에 대해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 체면 때문이라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땅에서도 자신의 체면유지 때문에 찾아온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가 믿음을 가지고 구할 때 들어주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하나님되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면 구할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슴은 계속하여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신데,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응답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하면 응답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예수님게서는 같은 기도에 관한 비유를 연이어 하신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구하는 아들에 관한 비유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구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부모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을 달라 하면 알 대신에 전갈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악한 자라도 그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게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의 강청함 때문에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먹이는 자식이라도 자식이 요구하면 자신의 장기까지도 때어 주는 것이 부모이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께서 자식이 곤란을 겪고 있는데, 환난을 겪고 있는데, 모른체 하시겠는가? 계속하여 구하여 보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찾아보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두드려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감동해서 들어주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식의 요구대로 들어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의 노력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면, 기도를 그렇게 간절히 오랜 동안 하였어도 왜 응답이 없는가? 어떻게 하면, 얼마나 더 죽어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감동해서 들어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그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하였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와 공로때문이 아니듯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기도 응답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직 부자관계다.
이 시간 기도하다가 힘을 잃고 계시는 분이 있는가? 응답이 더디다고 낙심하는 자가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아무 때나 아무것이나 주는 분이 아니시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다.

성령은 우리 믿는 자에게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이시다. 그가 물건이 아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전능하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내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꺽고자 하실 때,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영외는 누가 알리요, 하나님의 깊은 사정도 성령께서 통달하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성령없이 구하는 기도는 내 이기심과 정욕을 채우기 위한 기도밖에는 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해야 한다. 내 문제,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성령께 맡기고, 그 성령께서는 성도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여러분은 그분의 자녀다. 여러분이 언제든지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노력 때문에, 공로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되심 때문에 기도에 응답하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출처 : 신들의 찻집
글쓴이 : 루디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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