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무엇인가?
김재성 교수(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서론
신학은 너무나 중요한 학문이요, 교회를 위해 일하고자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딤후2:3-4)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일생동안 열심히 닦아야 할 훈련과목이다. 신학은 교회의 존재방식을 좌우해 왔으며, 미래를 결정짓는다. 신학은 성경해석, 설교와 신앙생활의 궤도를 규정하고 각자의 신앙 속에 담겨있어서 시대를 움직이고, 바꾸어 놓는다. 따라서 목회자로서, 전도자로서, 선교사로서,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그 준비과정인 신학생시절 뿐만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서 끊임없이 신학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요즘 한국 기독교계에서 신학을 별로 중요시 취급하지 않는 경향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의 책, 「별세의 목회」에 나오는 고백을 보자. 그는 신학교 재학시절에 수강과목 중 60점을 넘은 과목이 전체에서 3분의 1이 조금 넘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제일 공부 못했던 학생이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공부를 못해야 목회를 잘한다는 이상한 철학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학교 재학 중에 신비적으로 주님과 대화하는 중에, 신학은 교수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하는 감동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주님없이 저는 못 삽니다. 주님은 저의 생명이십니다. 나의 전부이십니다. 나의 행복이십니다.” 복음에 목말라있던 신학도가 자유주의 신학에 젖어있는 신학교 교수들에게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던 형편이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후에 이중표 목사는 성경에서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감격을 확신하게 되었다. 즉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바른 신학에 접목된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신학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학생 시절에 바로 배우지 못했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시절에 복음의 핵심을 꿰뚫는 학문적인 정립과 개인적인 체험을 비롯한 중대한 가치관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
1. 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 신학은 마치 정글과 같다. 너무나 다양한 정의들이 서로 뒤엉켜 있어서 어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설명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간단한 개념정립도 없고, 연구하는 대상도 모호해 지고 있다.
신학이란 단어의 의미를 사전적인 뜻풀이로 간단히 정의해 보면,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론 체계”라고 풀이할 수 있다. 신학(theology)이란 라틴어 theologia에서 왔는데 이 말은 헬라어 ‘θεολογειον’ 의 번역이다. 즉, 하나님 (theos)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 혹은 말하는 것, 혹은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이 주어로서 (subject)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원래 학문이란 (logos) 논리적인 진술, 설명, 해설이다. 이런 용어는 이미 플라톤의 철학강좌에서 정립되었던 학문 방법론이었다. rogia는 그 본래 뜻이 ‘말한다’ (speaking)는 것이며, 여기에 ‘탐구한다’(investigating)는 개념이 들어간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A.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tr. J. Hendrick De Vries (Grand Rapids: Baker, 1898; 1980), 229. Plato, "To teach a thing rightly is necessary first to define its name."
따라서 헬라어를 사용하던 고전적인 시대에 있어서 규정된 전통적인 신학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논리적인 진술,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설명 (speaking of or about God)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학은 종교학의 분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종교라는 말은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라고 생각되었지만,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더 이상 종교라는 말을 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신학”은 매번 새롭게 채색되고 풀어되어졌다. 반틸 박사 역시 당대의 신학변화에 깊이 주목하면서 바르트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을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이단”이라고 비판하고, 에드워드 카르넬 (Edward J. Carnell)의 신복음주의를 역사적 개신교의 신앙을 부정하였다. 또한 동시대의 화란 신학자 벌카워 (G. C. Berkouwer)의 조직신학 전체에서 인간중심의 성경관이 드러난다고 비판하였다. 반틸 박사는 조직신학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대한 질서 있는 진술을 제공하려고 힘쓰는 학문이다”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adelphia: Westminster Seminary, 1971), 9.
고 했다.
하지만, 신학이 하나님에 관해서만 알기를 힘쓴다는 말은 아니다. 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또한 성경은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신학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설명을 기본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J. G. Sikes, Peter Abailard (New York: Russell & Russell, 1965), p. 179: "in the case of theologian the problems of soteriology are usually found to be the basis from which he built up his other doctrinal views."
그러나 인간이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중심 하여야 하고, 우리의 신학도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특히, 이 접근과 시도와 작업을 인간이 한다는 데 있어서 흥미와 매력적인 호기심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을 한다는 사람은 매우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분의 길과 안목을 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신학을 한다는 말이나, 신학이란 학문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과학적, 객관적 지식에 대한 신뢰가 높아가면서 신학은 저급한 학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더구나 너무 많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신학에 대해서 천시하는 경향마저 발생하였다. 과거 중세시대이후로 신학은 최고의 학문이었고, 모든 학문은 신학의 시녀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학은 모든 학문의 정상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신학자들의 사회적 영향력도 줄어들고 말았다.
신학이란, 실용적이지 못하고, 실제적이지도 못하고 낭비적이다는 냉소가 퍼부어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일부에서는 극단의 체험을 내세우면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경향이 있는 신학을 경시하고 무시한다. 어떤 분들은 기도에만 매달리고, 어떤 분들은 성경통독이나 속독을 통해서 백번 이상 읽으면 되는 것이지 그 어려운 신학을 공부해야만 하느냐고 “신학 무용론”을 외친다. 한국교회에 극단으로 치우친 나머지 혼란을 초래하는 여러 부류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이런 매우 단편적이요,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무지함과 경솔함이 불러오는 폐해들이다. 바른 신학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고, 성경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유익을 주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이 세상과 국가와 교회와 가정을 섬기는 균형잡힌 성도로서 나아갈 지혜를 갖추게 해준다.
1.1. 신학의 분과들
신학은 여러 과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초대교회 신학자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다양한 주제들과 분야가 발전되어왔음을 볼 수 있다.
오리겐은 첫번째 원리 (first principle)을 추구했고, 어거스틴은 ⌈Enchiridion⌋(핸드북이란 뜻)에서 wisdom(지헤)를 추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Summa⌋에서 체계적인 신학의 전체 구성과 종합, 즉 신학대전을 추구했다.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주로 해석에 치중하여 견해서, 또는 의견서(sententiae) 을 내 놓았다. 피터 롬바르드의 「강해서」(Exposition)는 종교개혁자들의 저술이 나오기 까지 신학의 유일무이한 교재였다.
루터파 종교개혁자 필립 멜랑톤은 최초의 조직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통합된 주제별 연구서, 「신학총론」(Loci Communes)을 발간하였다. 1525년 간행된 이 책은 ⌈서로 연관된 주제⌋(topics of shared concern)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후에 요한 칼빈은 기독교 교훈집의 형태로 성경의 기초교리를 간략하게 진술하면서, 개신교회의 신앙을 변호한 ⌈기독교강요 (Institutio)⌋를 집대성했다.
17세기 개신교 신학자들은 신학의 근본 뼈대를 추구하면서 교회가 믿고, 고백하고,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교리 (doctrine) 중심의 명확한 체계를 시도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이 좀더 세분화되었고, 다양한 부제들을 중심으로 신학이 발전되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과 근대 구미,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계몽주의이후로 영향을 입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면서, 분석적인 방법을 통해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는 학문을 구성하였다.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학문적 노력과 실용성 때문에 점차 다음의 내용으로 세분화되고 정립되어왔다. 이런 분류방법은 19세기부터 시도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성경해석의 고려를 통해서 나온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거룩한 신학의 원리⌋라는 책에서 다음으로 신학의 분과들을 나눌 수 있다고 정의하였다. Richard A. Muller, The Study of Theology, Foundations of Contemporary Interpretation, vols. 7 (Grand Rapids: Zondervan, 1991), p. 25.
첫째는 성경신학이다. 여기서는 신구약의 본문과 그 배경, 문맥, 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에 해당하는 학과목들은 신약개론, 총론, 구약개론, 총론, 신약신학, 구약신학, 각 성경 권별 연구이다.
둘째는 조직신학이다. 신학이 통합교과의 성격을 띄고 있을 때는 사실 조직신학을 말하였다. 가장 중요한 신학의 분야로 주제를 중심하여 체계화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연구분야를 보면, 사도신경의 주제를 근간으로 다루고 있다. 즉, 신학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변증학, 종교철학, 현대신학 등이다.
셋째 분야는 역사신학이다. 신약 성경이 완결된 뒤,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와 성도들의 역사를 다룬다. 즉 교회사, 초대, 중세, 종교개혁, 근세, 현대, 한국교회사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네 번 째 분야는 실천신학이다. 목회현장를 위한 구체적인 적용이 연구대상이다. 목회학, 예배학, 전도학, 설교학, 상담학, 기독교교육학 등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선교신학이 새로운 독립분야로 인식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여겨지고 있다.
개혁신학의 대표적인 연구기관 가운데는 미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칼빈신학교, 리폼드신학교, 카번넌트 신학교를 꼽을 수 있다. 좀 더 폭넓게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면서 신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장로교회들은 프린스톤, 핏츠버그, 콜럼비아,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웨스턴신학교가 있다. 초교파적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시카고의 트리니티, 보스톤의 고든 콘웰, 로스앤젤레스의 풀러신학교, 그 밖에 침례교, 루터파, 감리교, 오순절파, 달라스와 탈봇 등 세대주의 학교들도 이 네 가지 분야로 나뉘어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점도 있다. 각 분야의 전공자들이 자신의 분야에만 치우쳐 연구하므로써, 모든 신학의 분과 상호간의 연관이 결여되고 있는 점이다. 총체적인 연결이 없이 각기 자기 제 분야에서만 목소리를 내고 있으므로서 다른 분야에서는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 특히 조직신학의 약화로 인한 신학의 정체성 실종이 초래되었고, 여전히 통합적인 안목이 결여되고 있다. 이점을 주목하면서 신학을 바르게 정립하도록 노력할 일이다.
성경신학은 구약과 신약성경의 내용들, 성경의 각 절에 대한 주해에 근거하여 이를 각기 다른 계시의 시대 따라서 추적해 들어간다. 이것을 서술적 접근방법 (Krister Stendahl), 규범적인 접근법 (Johann Philip Gabler)으로 나눈다.
역사신학은 신약 성경 이후로 여러 세기의 교회 역사를 통해서 발전되어온 신학에 대한 연구이다. 동시적은 접근 (the synchronic approach, 예Jaroslo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과 통시적 접근 (the diachronic approach, 예, Louis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s)로 나눌 수 있다.
조직신학은 매우 광범위한 신학의 내용을 포괄한다.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해 보려는 학문이다. (as a whole, as a unified system) 따라서 4분과의 주된 분야가 있다하더라도, 신학의 통합된 연구는 조직신학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신학은 이 성경적 진리의 체계를 어떻게 선포하고 가르칠 것인가를 현장위주로 제시한다. 따라서 다른 범주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게 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
1.2. 신학사에 나타난 특징들
신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신학의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신학의 모든 것은 당시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으 떠날 수 없으며, 성경적 교훈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어떤 신학자들과 주제들이 있었던가를 분석하므로서 신학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에 교리사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Roger E. Olson, The Story of Christian Theology: Twenty Centuries of Tradition & Reform (Downers Grove: IVP, 1999). Gillian R. Evans, The History of Christian Theology: vol. one, Science of Theology, ed., Gillian R. Evans, Alister E. McGrath, Allan D. Galloway (Grand Rapids: Eerdmans, 1986).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vol. 1-5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1-1989). Hubert Cunliffe-Jones, ed., A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Edinburgh: T. & T. Clark, 1978). George Park Fisher,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New York C. Scribner's sons, 1896).
초대교회시대에 직면한 신학의 주요 쟁점은 당시 가장 위험한 신학경향을 보인 영지주의 (Gnosticism)와의 논쟁과 싸움에서 드러났다. 초대교회의 신학은 이들을 분리시켜 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초대 교회의 신학은 체계화된 신학대학이나, 교단을 배경으로 형성된 신학교들이나, 도서관이나, 각종 단체들이 세운 연구소에서 전문인들이 집중적으로 연구에만 매달려서 신학의 체계를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매우 제한된 성경 사본을 가지고, 이교도가 지배하는 제국에 살면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다시 말하면 신학은 절실하게 그 필요성이 대두된 문제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즉, 초대 교회가 이교도의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하고 살아남는가의 문제를 숙의하고 논의했었다.
이 시대에 가장 자주 논의된 주제는 삼위일체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인간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논의였다. 이 시기에는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시작해서 여섯 차례의 중요한 종교회의가 소집되었고 여기서 신학의 주제들이 토론되었으며, 정립되었다.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등이 손꼽히는 신학자들이자, 주요 지도자들이었다.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58). James Franklin Bethune-Baker, An Introduction to the Early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to the Time of the Council of Chalcedon (Cambridge: 1949). Robert Voctor Sellers, Two Ancient Christologies: A Study in the Christological Thought of the Schools of Alexandria and Antioch in the Early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London: 1940).
중세시대는 신학의 절정기라고 불리지만, 교회가 세속적으로 권력을 갖게 되므로써, 일반 학문에게는 암흑기이자, 쇠퇴기였다. 이 시대의 주요신학자들이 깊이 심취한 신학들은 모두 다 헬라사상의 영향하에 있었다, 특히 스콜라주의 신학이 형성되었는데, 이성과 신앙이 혼합된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기독교의 신학이 헬라철학의 삼단논법과 논리를 따라서 분별되었고,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혼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e Theoligiae)에는 이성과 신앙, 자연과 은총이라는 이원론이 근본을 이루고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첨예화하게된 신학의 원리다. 여기에 성경과 전통이 서로 양립되고 있다. 믿음과 인간의 행위가 서로 협동해야만 되었다. Justo Gonzá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2, From Augutine to the Eve of the Reformation (Nashville: Abingdon, 1987). B. B. Price, Medieval! Thought: An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1992). Etienne Gilson, History of Christian Philosophy in the Middle Age(N.Y.: Random House, 1955).
종교개혁시대 (1500-1650)에 들어서서 이런 원리와 개혁주의 원리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오직 성경만이 (Sola Scriptura) 최고의 권위로 강조되면서, 교황의 권위와 전통의 권위를 대치시켰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론에 깊은 연구를 하게 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와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만)를 강조하였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서 그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신앙과 행위의 복합산물이 아니다고 주장되었다. 루터파와 쯔윙글리, 칼빈주의가 모두 이 근본교리에 동의했다. 성만찬에 대한 해석과 기독론에서 서로 갈라지므로서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삼위일체론, 칭의론, 카톨릭 전통과 성자숭배에 대한 거부, 자유의지에 대한 반론, 미사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거부 등 주요 교리에서는 전적으로 일치하였다. 1549년 스위스 동맹으로해서 쯔윙글리파는 칼빈주의에 가담하므로서 결국 루터파와 칼빈주의자들로 대별되었다. 이때부터 같은 개혁주의라도 루터파와 재세례파에 대한 세밀한 주의와 분별이 요청되었고, 후기 개혁주의 시대에는 자연스레 정통신학의 형성을 둘러싼 논쟁이 가속화되었다. Lewis W. Spitz, The Protestant Reformation, 1517-1559 (New York: Harper & Row, 1984). Timothy George, Theology of the Reformers (Nashville: Broadman, 1988).
신학의 제4세대는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과 계몽주의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신학의 등장이다. 18세기 초엽, 전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신학이 지배하던 로마 카톨릭에서 조차도 데카르트의 영향을 입은 부세트 (Bossuet)에 의해서 시들해지고 말았다. 독일에서는 라이프니츠와 볼프가 위세를 떨치면서 신학의 내용이 매우 달라졌다. 따라서 정통루터파의 시대가 지나가고, 경건주의와 합리주의가 함께 병행하면서 영향을 미쳤다. 합리주의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의 철학에 근거하여 판명성과 수학적 확실성을 제일원리로 삼고자 했다. 성경은 고대 셈족의 종교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취급하였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화론의 영향으로 참된 종교와 거짓종교의 구분법은 고등과 열등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이런 영향을 깊이 받은 교회들은 분열되었고, 화란과 미국을 제외하고는 개혁신학이 교회내의 신학으로 위축되어갔다. James M. Byrne, Religion and the Enlightenment: From Descartes to Kant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6). G. Hefelbower, The Relation of John Locke to English Deism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18).
차디찬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순수이성이 잃어버린 것을 실천이성을 통해서 회복하려했던 임마누엘 칸트가 나왔으나, 이성에 대한 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순수이성의 한계 내에 있는 종교’로 취급되었다. 계몽주의를 거부한 또 다른 반응은 감정을 중시하는 F. Schleiermacher에 의해서 제기되었으나 주관주의에 입각한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문호 활짝 여는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인간의 자율주의에서 모든 신학의 출발점을 정한 이들은 이성을 제한한다는 구실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의 종교경험을 최고 기준으로 의존하였다. 루터파 신학자 A. Ritschl은 초대 교부들의 신학과 종교개혁자들의 고백을 거부하고, 도덕종교로 전락하였다. Willard B. Gatewood Jr. ed. Controversy in the Twenties: Fundamentalism, Modernism and Evolution (Nashville: Vanderbilt University Press, 1969).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Grand Rapids: Eerdmans, 1985).
신학의 제5세대의 흐름은 제1차대전의 패망과, 이로 인한 서구유럽의 낭만주의가 사라진 시대에 나온 신정통주의에 의해서 새롭게 대두되었다. 칼바르트는 개혁신학으로 복귀하는 듯 했으나, 결코 종래의 개혁신학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고, 계시의 증거로서만 인정하려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계시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방법론과 고등비평 등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이 깊이 반영된 혼잡한 신학이 아닐 수 없다. Cornelius Van Til, The New Modernism (Philipsburg: Presbyterian & Reformed, 1946). Stanley J. Grenz and Roger E. Olson, 20th-Century Theology: God and th e World in a Transitional Age (Downers Grove: IVP, 1992). L. Harold De Wolf, The Case for Theology in Liberal Perspective (Philadelphia: Westminster, 1959).
1960년대 이후로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제2차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에큐메니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세계교회협의회 (W.C.C.)가 추구하는 종교박람회가 시작된 것이다. 사신신학 (death of God theology), 흑인신학, 1970년대에는 여성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이 위세를 떨쳤고, 198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과정신학 등이 새롭게 시도되고 있다. David Willis and Michael Welker,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Tasks, Topics, Traditions (Grand Rapids: Eerdmans, 1999). David S. Dockery, ed., The Challenge of Postmodernism (Grand Rapids: Baker, 1995). Michael S. Horton, ed., A Confessing Theology for Postmodern Times (Wheaton: Crossway Books, 2000).
2. 신학의 방법론
신학자들마다, 각 교파마다, 각 신학사조마다, 가장 다른 것은 신학의 방법론이다. 19세기의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챨스 핫지(Charles Hodge)시대까지만 해도, 신학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선험적 방법론 (a priori)이요, 다른 하나는 후험적 방법론(a posteriori)이었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 p. 3.
이를 다시 한번 세분화 하여, 사변적 방법(the speculative method)과 신비적 방법 (the mystical method), 연역적 방법 (the inductive method)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서로 개념이 달라지므로서 혼란이 오게 되었다. 우선 선험적인 것이 주도하는 합리주의적 방법 (a rationalistic method)은 그 자체로써는 철저히 실증적 (an empirical)이거나 후험적인 방법론 보다 나쁜 것이 아니다. 만일 기독교적인 선험과 후험의 개념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두 방법 모두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신학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신학을 정립하는 것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전제, 혹은 종교적인 전제가 달라지면, 그로부터 다양한 신학이 쏟아져 나오게 되고, 반대로 분석의 방법이 다름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신학이 전개되기도 한다. 문제는 객관성의 확보에 달려있게 된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방법론에 치우치게 되면 신학이 달라지고 만다. 물론, 연구 대상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역시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신학의 연구대상은 하나님, 계시, 성경, 인간과 그의 종교적 경험 등이다. 이것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이 다르다. 따라서 신학이라는 이름하게 쓰여지거나, 선포되거나, 가르쳐지는 내용이 천양지차가 발생한다.
신학연구방법에서도 중립적인 것은 없다. 연구하는 사람이 이론을 세우는 전개방식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신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유형론은 신학의 역사와 현재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신학방법론의 해설이다. 신학을 세우는 각자의 학문적 방법론에 대해서 모두가 한가지 방법에 동의하지 않고 있기에 나타나는 지류들이다. 이 방법론들은 개혁신학의 방법론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개혁신학에서 채택하는 방법론은 선험적 측면을 매우 중요시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현대신학의 흐름을 이해하고자 할때에 간단하고도 유익한 방편이라고 본다.
피터 버거(Peter Berger)의 신학 유형론을 근거로 해서 영국 성공회 신학자인 피터 툰(Peter Toon)박사는 다음의 네 가지 유형으로 신학방법론을 대별한다. Peter Toon, The End of Liberal Theology: Contemporary Challenges To Evangelical Orthodoxy(Wheaton: Crossway, 1995), pp. 177-209. Peter L. Berger, The Heretical Imperative (Garden City, N.Y.: Anchor, 1979).
첫째는 연역적인 접근방법 (the Deductive approach)이다. “현대 세속적인 표면 중에서 종교적인 전통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Peter Berger는 정의한다. ibid., p. 61.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 즉 현대사회 이전의 시대에 기준으로 제시된 것들을, 종교적인 확신으로 다시 재생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한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사대” ”교회가 가르친다“ “전통이 선포한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것은 모두다 연역적인 형태의 신학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을 권위의 최고봉으로 놓는다는 측면에 그러하다.
Athanasian Creed와 개신교의 여러 신앙고백을 근거로해서 삼위일체 교리에 가장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Thomas Aquinas는 좀더 경험론적인 유형의 자연신학을 이용한다. 순수 이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런 유형의 대표자로는 Karl Barth의 "Church Dogmatics" 등 신정통주의, 형태는 다르지만, 희랍 동방 정교회 (Greek, Russian, Antiochene)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도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의 신학방법론이자, 요즈음 초교파주의를 표방하는 복음주의 진영의 기독교 대학에서 주로 교재로 사용하는 Charles Ryrie의 Basic Theology (1986)와 Millard J. Erickson의 Christian Theology (1986), Carl F. H.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1979-83)도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방법론은 귀납적인 접근방법 (the Inductive approach)이다. 아래로 부터의 진리를 체계화하는 경험적인 방법이다. 인간의 경험을 종교적인 해석과 명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오늘의 현대신학이 거의 대부분 이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Schleiermacher는 종교적 체험, 신앙의 경험을 중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자의식 (human self-consciousness)이상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는 점이다. 모든 판단의 중심에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우선으로 제기된다.
따라서 유대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도, 먼저 그리이스 로마 문화를 먼저 설명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변화하는 역사와 상황 안에서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역사와 상황을 점검한다. 이들의 시조인 Schleiermacher의 방법론을 기조로 하여, 점차 ‘종교사’ ‘history of religion' (Religionsgeschichte) 방법으로 발전되었고, 이는 후에 종교현상학 (Edmund Hesserl 1859-1938, Rudolf Otto)이라는 비교종교학으로 번져나갔다. 이러한 자유주의 종교사학파의 결정체가 Adolf Harnack, "What is Christianity"(1901) 이며, 20세기 거의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채택해온 방법론이었다.
이런 방법론은 여성신학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지난 10여 년 간 영국 성공회의 설교에서 맹위를 떨쳐서, 급기야 1994년 3월 여성의 안수를 허용하기까지 각 시대의 문화와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풍조로 나아갔다. 현대 설교자들은 먼저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려든다. 오늘의 여성들은 우리 어머니들의 시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는 교육받았고, 의사, 변호사, 수상, 각종 뛰어난 기술자들이 나오고 있다. 왜 성직자만 안되는가? 이제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동등하다--다르지만, 그러나 차별이 없어야 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와 교회 안에서도 동등해야한다는 식이다. 사도 바울의 설명은 유대 랍비적인 권위주의와 관계가 많으니, 이제는 문화적인 상대주의로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다.
Paul Tillich의 실존적 조직신학, Wolfhart Pannenberg의 계시로서의 역사 접근등도 모두 이 방법론에 속한다. 로마 카톨릭 쪽에서는 Hans Küng, David Tracy, the Dutch theologian Edward Schillebeechs 등은 현대 세상과 기독교 전통의 하나님과를 상호 연결시키고자 한다. Karl Rahner이 주장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논의와 Bernard Lonergan, SJ.이 내세우는 ”Theology in its new Context"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Theology was a deductive science in the sense that its theses were conclusions to be proven from the premises provided by Scripture and Tradition. It has become an empirical science in the sense that Scripture and Tradition now supply not premisses but data. It has to be interpreted in the light of contemporary techniques and procedures. When before the step from premises to conclusions was brief, simple, and certain, today the steps from data to interpretation are long, arduous, and at best, probable." (1974, 58). Schbert Ogden, W. N. Pittenger, John Robinson의 “Honest to God", "The Human Face of God" Moltmann, "Trinity and Kingdom" 등의 저술들이 모두 다 이런 방법론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가 환원론적 방법론(the Reductive approach)으로 연역적인 방법론의 정반대의 개념이다. 현대 인간들의 인지적인 도전 (the cognitive challenge)을 토대로 과거 전통이나 진리체계를 종합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로 이 방법이 주목을 받았다. 특히 Nietzsche가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하므로, Thomas Altizer와 William Hamilton이 이를 신학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사신신학’ (Death of God Theology)을 제창하였다.
Bultmann의 기독교의 비신화화라는 신약원문비평 방법론도 역시 이런 환원론적 방법론의 대표적인 실례라고 본다. 신화는 사고의 한 방식이라고 간주하고, 거기에는 초자연 세계가 실재 세계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를 잘 분석하고 꿰뚫어보면, 그 속에 고대 시대의 세계관이 있고, 3층 구조의 우주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인간은 더 이상 고대 신화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세기 조직신학자인 Augustus Hopkins Strong도 “합리적 직관”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의 관념이 첫 번째 진리라고 생각한다.
역시 1960년대에 ‘흑인신학’ (Black Theology)이 나왔는데, 미국의 흑인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이 크다. 이 신학의 대표로는 James Cone으로 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 (1970), Black Theology and Black Power (1969)를 저술하였다. “The task of black Theology is to analyze the black man's condition in the light of God's revelation in Jesus Christ with the purpose of creating a new understanding of black dignity among black people, and providing the necessary soul in that people to destroy white racism." (1969, p. 42).
이런 연속적인 자극을 통해서, 1970년대에는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나왔다. Gustavo Gutierrez of Peru, Leonardo Boff and Hugo Assmann of Brazil, Jose Miranda of Mexico, Juan Luis Segundo of Uruguay, John Sobrino of El Salvador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고, 한사람의 감리교 신학자, Jose Miguez Bonino of Argentina가 있다. 이들 신학자들의 방법론이 대부분 환원론자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며,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연역법적인 방법론과 환원론적인 방법론을 혼합한 자들임에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정치, 경제적인 분석에서 비롯하여 성경과 전통을 해석하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여성신학이 대두된다. Pamela Dickey Young, Schussler Fiorenza, "In Memory of Her: A Feminist Theological Reconstruction of Christian Origins" (1983). "Bread Not Stone: The challenge of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 (1984). 한국 신학계에도 Feminism theology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현대 여성론이 신학에 침투하여 기독교 여성주의, 종교적인 여성주의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일치된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전통신학은 모두 다 가부장적이다. 족장시대의 신학이다. 남자에 의해서 주도되고 작성되었으며 남자를 위한 신학이다.
나. 전통신학은 여성의 경험과 여성을 무시하고 왜곡했다. 여성은 오직 남자의 그늘 속에 존재하고 있다.
다. 서구전통은 사회와 교회 속에 모두 다 여성의 종속에 공헌했다.
라. 여성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고, 성직자가 되어야한다.
네 번 째로 규범적 접근법 (The Regulative), 혹은 설명적 (Narrative approach) 접근법이다.
성경 각 권의 내용을 볼 때에 근본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설명적이거나 혹은 이야기 (story)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야기로서 설명한 것이라고 본다. 먼저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다음에는 예수님의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이 관계는 역사적 사건들과 인간성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야기를 가진다. 날마다 자신의 일상생활은 이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개인의 역사와 개인의 정체성의 설명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이야기를 가진다. 지역교회나 교단의 이야기가 있더라도, 이것은 들려지거나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나에게 결정적인 규범적인 의미, 설명이 주어진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받아들을 수 없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볼 때에 이문열의 소설이나 박경리의 토지 같은데서 과연 신앙적인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는가? 성경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계시라는 차원을 생각해야만 한다. 단순히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야기 신학‘의 대표적인 주창자는 예일대학의 George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1984)을 저술하였다. 그는 성경의 이야기에서 문화간의 상호적인 교섭의 차원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내세우는 “intratextual theology"라는 개념은 성경이 사람들을 말하기에 앞서서, 현재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의 의미를 살려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가 성경에 파묻히지 말고, 성경이 세상에 의해서 (혹은 나의 세계로), 너의 세계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신학의 접근방법은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내게 되므로 매우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신학의 방법론들은 마치 일반학문을 이성으로 세워나가듯이 각자의 체계를 세워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을 물리학이나, 생물학, 사회학이나 심리학처럼 같은 학문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이는 매우 경계해야만 할 일이다. 신학은 경험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진 일반학문의 도식자체가 신학에서는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분별하게 경험과학적인 방법론을 신학에 차용해서는 신학의 문제를 풀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지난 이 백년동안의 서구 자유주의 신학은 잘못된 방법론에 의한 연구를 지속하므로서 개혁신학의 유산을 송두리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신학에는 신학적인 준거, 기준이 채택되어야만하고, 신학적인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론 역시 신학적으로 주어지는 독특한 방법론을 사용해야만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면, 그것은 마치 그가 원하는 곳으로 전혀 그 사람을 인도할 수 없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과 같다“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 p .3.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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