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이단성! 사이비성!

[스크랩] 신론(1) - 삼위일체 개관

하나님아들 2013. 1. 24. 11:40

 

신론(1) - 삼위일체 개관 (이인규 권사 정리) | ♡ † ...신론
JaxHopes 조회 7 |추천 0 | 2010.05.18. 09:29
 

삼위일체

1. 믿음의 종류

(1) 은혜, 체험에 의한 믿음: 뜨거움
(2) 교리, 신학등 지식에 의한 믿음: 차거움

이단에 대한 세미나나 강의에 초청받아, 삼위일체에 대한 강의를 해보면 항상 이런 두가지의 공통된 질문이 나온다. 첫 번째는 “인위적으로 사람들이 무슨 공의회같은 곳에서 만든 삼위일체같은 교리나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 같� 곳에서는 “삼위일체란 용어는 성경에 없다”고 주장하며,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든 교리라고 주장한다.
또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이 주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데, 그들이 입을 모아 “삼위일체론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그들 나름대로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물론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이론 자체는 분명히 성경적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체계화시키고 정리한 것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가 만들어진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오해가 갈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한 자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은 뒤에서 하게될 것이다.

두 번째 질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는데, “삼위일체같은 차가운 교리와 신학따위를 몰라도, 얼마든지 주님만 믿고 뜨거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믿음이란 두가지의 조화와 균형에 의한 믿음이어야 한다.
너무 뜨거운 은혜만을 강조하면 이단이나 다른 영에 미혹될 수가 있으며, 교리와 신학만을 강조하면 신앙이 아니라 차가운 학문이 되어 버리며, 자신이 소속한 단체만의 폐쇄적인 교리에 의한 믿음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뜨거운 은혜만을 사모하는 맹목적인 믿음도 바람직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의 대상을 정확히 알고, 말씀에 근거한 균형있고 분별있는 믿음을 갖어야만 한다.
체험과 은혜가 말씀을 벗어나면 이단에 미혹되어지며, 너무 기적이나 표적같은 가시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다보면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버뱅크는 기독교의 심장은 삼위일체로부터 시작되어진다고 말하였는데,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신 자신의 특별계시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아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자.

그렇다면 왜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와 신학이 왜 필요할까?
그 이유는 아래 네가지로 압축되어진다.

1)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2) 자신의 신앙성숙을 위하여
3) 교회의 표준을 위해서
4) 불신자에게 올바른 전도를 하기 위하여

2. 이단이란 무슨 뜻일까?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처음과 중간은 같은데 끝이 다르다는 것(異端)이다.
원래 성경적인 용어로서는 "하이레시스"이며 이 단어의 뜻은 "선택"이란 의미로 "당파. 종파"를 가르킨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의 당파(행5:17) 바리새파(행15:5)에도 사용되었고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행26:5)라는 구절에도 사용되었다. (하이레오마이: "자력으로 취하다"에서 파생된 단어임) 이단이란 뜻은 교회의 전통적인 의미로 "어긋나는 가르침"을 말하며 "다른 교훈" 혹은 "다른 복음"을 말한다. 즉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유1:18)를 말한다.
초대교회의 이레니우스는 정통이란 말을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하여 믿어진 바"라고 정의하였고, 이단에 대해서는 "올바른 교리의 표준에서의 이탈"이라고 정의하였다. 20세기 이단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윌터마틴은 "어떤 특정인의 그릇된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집단"이라고 정의하였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즉 초대교회때에도 거짓교사나 거짓선지자가 있었으며, 다른 교훈과 다른 복음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성경을 가감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요한은 그것을 경고하였고(계22:18-19), 베드로는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는 자들은 멸망을 받는다고 책망하였다(벧후3:16)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으며(갈1:6-9), 예수님 자신은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고를 말씀하셨다(마24:23-24)
예상외로 성경은 다른 복음과 미혹,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그도에 대한 경고를 상당히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들의 특징은 언제나 "가만히 들어 옴"에 있으며 말씀을 변질시켜 왜곡시키는 데에 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
      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다른 예수가 있고, 다른 영이 있으며, 다른 복음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란 양을 양육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한다. 울타리는 양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도 하지만, 다른 짐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은 언제나 부분적인 한 측면만을 확대, 강조하려고 한다.
성경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뜻보다는 자신들의 주장과 유사한 한 구절만을 찾아 오직 그 구절만을 인용하기를 즐겨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잘못 오해하기가 쉽다.
창세기만을 강조하거나, 계시록만을 지나친 풍유로 해석하며, 종말론, 구원론의 한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하고, 마귀론만을 강조하기도 한다.
천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하고, 표적이나 이적같은 가시적인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
아홉 마디의 일반적인 진리를 외면하고 한마디의 부분적인 구절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일반적인 진리를 특수한 의미로 바꾸어 버린다.
우리는 나무와 숲의 관계에서 나무만을 보고 숲을 보지 못하거나, 숲만을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하는 경우를 배제하여야 한다.
올바른 교리와 신학은 성경에서 비롯되어야만 하며,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으로써, 울타리의 역할을 한다.

기독교의 이천년 역사는 끊임없이 이단과의 싸움이었다.
삼위일체론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리도.... 모두 이단과의 싸움으로 야기된 논리였으며, 정경이라는 오늘날의 신약성경도 결국은 영지주의자와 마르시온이라는 이단들의 무분별한 성경의 채택을 대항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구교는 신교라는 현재의 우리들과 싸움으로 분리되었다.
즉 이단과 정통의 싸움은 항상 누가 성경적인가로 분별하여야만 하며, 그것은 영적전쟁으로 비유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3. 삼위일체론(신론)

AD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AD 325년에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는, 성자는 어느 순간에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성자는 성부와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즉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인가 동일본질인가 라는 문제가 대립되어진 것이다.
장로 아리우스와 감독 알렉산더의 두 사이에서 시작된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으로 교회 분열의 문제가 대두되자, AD 325년, 318명의 감독들이 모이게 된 니케야회의가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회의 도중 알렉산더 감독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당시 서기이며 집사였던 청년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로 계속되었으며, 황제의 비호와 많은 감독들의 정치적인 동조가 있었던 아리우스에 비하여 청년집사 아타나시우스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토론이 계속되어진다.
결국 니케야회의는 힘이 없었던 아타나시우스 집사가 아리우스 장로와의 토론을 승리하게 됨으로서 "성자는 피조된 것이 아니며 성부와 동질이다"라는 니케야 신조가 계승되어지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장로와 논쟁 끝에 무려 다섯 번을 유배당하였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돌아올 때마다 지지자들에게 열렬히 환영을 받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결국 아리우스장로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타나시우스는 말년에 자신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존경을 받으며 평안한 시간을 갖게 된다. 
당시의 유명한 유행어는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을 반대하고, 세상은 아타나시우스를 반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타나시우스의 어려운 토론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항상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가 승리한 것은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명백히 논리적으로 주장하지 못하였고, 여러번 자기 주장을 번복하기도 하고 말을 바꾸면서 오직 외부적인 정치적 공세로 아타나시우스를 압박해 나갔던 것이다.
니케야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와 대결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을 확립하였고, 콘스탄틴노플회의에서는 양태론자 사벨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함으로서 양태론을 비성경적인 논리로 확정짓게 되고, 에베소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양성론자)와 단성론자가 대결하게 되었는데, 네스토리우스가 추방을 당하게 되며, 유티케스(단성론자)가 예수는 신성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버렸으나, 500여명의 각 지역의 교회 감독들이 참여한 칼케톤회의에서는 그리스도는 변화와 혼합이 없이 두 (인성과 신성의) 본성을 한 위격안에 연합하여 갖고 있다고 확인하게 되므로써,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리가 매듭되어진다.
즉 325년 니케야 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 에베소 회의,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결론이 150년이란 시간을 통해 일단락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2000년동안 이 논리들은 숱한 이단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으나, 단 한번도 성경적인 논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요, 참 인간으로서 신성과 인성은 혼돈치도 않고 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고, 가를 수도 없다."

4. 잘못 해석한 난해한 성경구절의 예

 이단들은 주로 부분적인 성경이나 그 해석에 있어서 난해한 성경구절만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교리에 짜맞추기를 시도한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성경구절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성경구절이 예수의 신성을 부정케 하였는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이 문장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예수가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다. 즉 부활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고 부활 이후에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으며, 예수가 30세가 되고나서부터, 즉 세례를 받은 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바로 앞 문장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1:3)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육신으로 볼 때에는 다윗의 혈통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신(사륵스)과 성결의 영(프뉴마)은 대조되는 단어로서, 육신으로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났고, 영으로 보면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신성은 일반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셨고(예견된 메시야라는 의미), 영으로 보아도 부활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정되다"는 단어는 헬라어 "호리조"로서 "공표하다, 선언하다. 결정하다"는 해석이 보다 분명하다.
영어로는 "be declared"(NIV, KJV)와 "to define correctly" 의 뜻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보아도 다윗의 혈통으로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으며, 영적으로 보아도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눈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문제가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이단들은 항상 보편적인 성경구절 대신에 특수한 구절이며 부분적인 구절만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이 구절만을 강조하여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 장자라는 "프로토토코스"(First born)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말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신분적인 지위와 신성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어진다. 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앞구절은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도리어 황당한 주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오히려 15절 바로 다음의 16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17절에 보면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라고 언급하고 있다. 참고(요1:1-3, 롬9:5. 요8:56-58-출3:14,)
오래전부터 고대국가의 왕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졌는데, 그러한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이 낳으신 분이라는 생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지위와 신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단들은 부분적인 단어 하나만을 확대시킨다.

5. 삼위일체의 세가지 명제 :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으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논리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해가 어렵다.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이다.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유는 한 인격의 세가지 양태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을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다. 다시 말하여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또 삼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세분의 신(하나님)이 각각 분리되어 계시다는 주장인데, 이러한 주장은 삼신론이 되고 만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분의 분리된 하나님이 아니며,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또한 단일신론은 오직 성부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가 이에 속하며, 구약성경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되고만다.
물론 이곳에서는 사이비 이단들의 엉터리 삼위일체는 논외로 한다.
통일교도 삼위일체가 있으며 몰몬교도 삼위일체가 있으며, 더욱이 사이비적인 이단들도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교주나 지도자를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집어 넣는데, 이러한 엉터리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시간을 낭비하며 논리적인 공방을 할 가치조차 없다고 본다.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이 포함되어지지 않으며, 신적 존재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을 말한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때로는 한 물방울이 셋으로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로 합하여지는 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삼위적인 양식을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욱 혼란만 가증시킬 뿐이며, 양태론적인 자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물에 대한 비유 외에도,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비유하여 삼위일체를 동일한 수박의 다른 형태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혹간은 삼각형의 세 내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의 어떤 물질에 대한 유비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위의 여러가지 유비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도움은 줄수 있을지언정, 바람직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가지 명제는 아래와 같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인간의 논리적인 이해를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이해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일단 기록된 그대로 정리하여, 삼위일체라는 논리에 도달했던 것이다.
즉 아래의 세가지 명제는 가장 성경적인 사항이다.
즉 세가지 명제를 만족하는 삼위일체가 정확한 삼위일체가 되어진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시며, 각 삼위는 상호관계적인 면에서 서로 구별되어짐으로서 인격적인 교통을 나눌 수 있지만, 하나님은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유일한 한분이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세 위격은 인격적인 구별은 되지만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삼위일체를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하나의 신성을 공유하는 세 인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동등함과 질서적 종속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며,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혹은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으로 설명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일체"라는 말이 히브리서의 "본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성부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도록 구별되어진다.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란 성경적인 근거를 통하여 위의 세가지 명제조건을 만족하며, 성경적인 언급을 요약하고 체계화 시킨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삼위의 인격은 각각 다르지만, 그 삼위의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관계가 가능한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그 삼위는 같은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삼위는 상호관계가 가능하며 상호구별되는 독립적인 인격이지만 삼위는 하나의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한 하나님이시다. 

삼위를 하나의 인격으로 주장하는 양태론은 비성경적이며, 삼위를 부정하고 오직 성부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단일신론도 비성경적이다. 또 분리된 세 본질의 세분 하나님은 삼신론이 되고만다.
그러면 정통신학자들이 말하는 삼위일체의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것을 알아보려는 이유는 본인이 설명하는 삼위일체가 과연 정통신학인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가페 성경사전 776쪽)
삼위일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성경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신)으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세 위격들 가운데서 각각 구별된(distintion) 모습으로 나타난다.

(같은 책 788쪽)
삼위일체론 정립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한가지의 내용은 세 위격들 사이의 상호작용(그러므로 서로 구별이 가능하다)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예수님과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인 아버지(the Father)와의 상호작용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마26:39)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 366쪽)
왜냐하면 각 위격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각 위격 간의 차이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관계의 차이이며, 그럼에도 각 위격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같은 책, 347쪽)
양태론의 결정적인 결함은 성경 여러곳에 나타나 있는 삼위간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혹은 그것들을 단지 환상일뿐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이 입장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가 함께 계셔서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된다. 또한 예수께서 성부께 기도하신 모든 경우들을 환상이나 제스츄어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성자와 성령에 관한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양태론은 속죄의 핵심을 잃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대속의 희생제물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진노를 담당하셨으며, 삼위를 대변하는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만족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같은 책, 333쪽)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말은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리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세분이 각각 다른 인격체임은 앞에서 인용한 여러 성구에서 이미 살펴 보았으며 신약성경에는 그 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다.

(루이스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85쪽)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이성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분이시나, 이 한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들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책, 86쪽)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곧 성부는 성자를 발생하고,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발생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방출된다. 이 교리는 신앙의 위대한 신비들 중의 하나로, 인간의 이해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하지 조직신학 262쪽)
이 사실은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사벨리안 체제는 결코 어떤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에 의해서 보냄을 받고, 그에게서 오며, 그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명령을 받고, 그의 뜻을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 의해서 사랑받고, 그에게 기도를 하며, 당신이란 대명사를 사용하고 또한 그에 대해 언급할 때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칭호를, 아버지와 아들에 역시 포함되어있다.

아래 글은 제럴드 브레이의 인격(persons)과 개인(individual)이라는 용어의 설명이다. 우리는 인격과 개인이라는 용어의 차이점을 이해하여야만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용어적 설명이 아주 잘 되어있기 때문에 이를 소개하려고 한다.

사실상 인격(person)이라는 단어는 개인(individual)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이 정의는 그럴 듯한 선험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person은 분명 단수이며 구별되기 때문이다(singular and distinct). 그러나 여기에서 그친다면 두 단어의 저변에 흐르는 역동성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놓치게 된다. "인격"의 경우, 그 단위는 다른 동종의 단위와의 관계에서 성립된다. 그러나 개인의 경우, 그 단위는 다른 단위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됨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개인"은 person 의 분리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인격'은 관계적인 면에서 그 개인의 능력과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80쪽)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게 설명하고 있는지 소개하려고 한다.
본인이 양태론에 대해서 정통신학을 참고하려는 이유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많은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인 것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양태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가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성부하나님이 성자 예수와 같고, 성자 예수가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은 양태론이 분명하다.
그렇게 자신들의 주장을 당당히 내세우지도 못하며 위장하고 감추는 논리를 가지려면, 차라리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 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 347쪽)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양태론자들이 구별하는 삼위는 명목상의 이름뿐이며, 각각의 역활적인 이름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은 성부하나님이 육체를 입고와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셨다고 주장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구분함으로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삼위의 이름만을 구별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양태론은 성경에서 도처에서 언급되는 각각의 인격적인 교류와 교통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비성경적이다.
내가 회사에서는 사장이며, 교회에서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라고 할 때에, 사장과 권사와 가장은 명목상 명칭이 다르며 그 역할은 다르지만, 동일한 본인, 동일한 인격이 되는 사장과 권사와 가장의 인격적인 교류와 교통은 있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성령을 보내시는 성부와 성자, 성부에게 기도하는 성자, 때로 삼위가 함께 공존하는 성경상의 기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또 양태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을 동일한 인격이라고 정의할 때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자 곧 성부하나님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제물로 바쳐진 성자 예수와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성부하나님의 인격적인 구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즉 바치는 분과 받으시는 분의 구별이 없으므로 십자가 대속의 개념 자체가 애매모호하게 된다.
그래서 양태론은 성부고난설이라고도 불렸으며 언제나 비판을 받아왔던 것이다.
양태론 이단을 주장한 자 중에서 초대교회부터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벨리우스가 있으며, 양태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삼위일체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리신 신비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이해하거나 측량할 수는 없는 것이며, 우리는 오직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뿐이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145: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6. 이단들의 실제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단일신론
지방교회, 성락교회(베뢰아), 뉴예루살렘교회등: 양태론

  1) 양태론: 삼위를 동일한 한 인격으로 보는 주장, 혹은 명목상으로만 세 인격으로 구별하는 주장
  2) 단일신론: 삼위자체를 부정하는 주장
  3) 삼신론: 삼위를 세 분의 분리된 신으로 보는 주장
  4) 정통삼위일체: 하나의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한분의 하나님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세 위격으로 구별되는 하나님

출처 : 신들의 찻집
글쓴이 : 루디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