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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하나님아들 2013. 1. 23. 14:46

자료제공/배종부목사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서론:성경이 말씀하는 5가지의 축복........................................................................2 P

새성교회 부흥의 축복..............................................................................................7 P

1.비전과 환상의 축복(성령님으로부터 받은...)

나는 죄 짓기 싫다.............................................................................................15 P

2.행복해지는 축복(목사도, 성도도, 개인도,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사회생활도, 대인관계도, 건강도, 나라도, 환경도, 기후도...)

어떻게 행복할까?...............................................................................................25 P

3.예배의 축복(목숨을 걸어라, 많이, 진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39 P

4.기도의 축복(시간의 벽을 넘어 가라, 영계를 열어라)

중보기도의 중요성과 위력.................................................................................50 P

5.말씀의 축복(多讀, 말씀에 젖음-최권능 목사:예수 천당, 불신 지옥)

말씀 묵상의 원리와 실제...................................................................................75 P

6.찬양의 축복(하늘의 비파가 꼭 있어야...)

찬양의 능력과 은혜.........................................................................................105 P

7.성령 충만의 축복(동행, 은사, 능력 충만...)

성령 충만.........................................................................................................120 P

8.헌금의 축복(물질 축복의 바로미터)

.................................................................143 P

9.전도의 축복(하늘의 제일 상급)

........................................................................000 P

10.건강의 축복(가장 중요, 영 혼 육의 건강, 신유)

............................................000 P

11.사랑의 교제의 축복(4가지의 사랑-가족 사랑(스톨게), 이성적 사랑(애로스), 우정적 사랑(필레오-주님은 베드로에게 필레오의 사랑을 물으셨다.), 주님의 사랑(아가페), 당신은 사랑하는 이가 있는가?)

.............................................................................000 P

12.세상 형통의 축복(존재감, 직업, 부귀, 지위, 명예...)

.....................................000 P

13.고난의 십자가의 축복(소명, 순교의 길...)

......................................................000 P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신명기 1:10-11절 (10)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繁盛)케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11)너희 열조(列祖)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現在)보다 천 배(千倍)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許諾)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福) 주시기를 원(願)하노라.

 

서론:성경이 말씀하는 5가지의 축복

 

2배, 4배 5배, 30배 60배 100배, 1000배, 5000배...

성경이 말씀하는 축복에는 2배, 4배 5배, 30배 60배 100배, 1000배, 5000배의 5종류의 축복이 있다.

1>.2배의 축복: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축복을 잃어 버린 배반자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 오고, 잃었던 은총을 다시 입을 때에 받는 가장 기초적인 축복이 두 배이다.

가장 기초적인 두 배의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 차고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두 배를 우습게 여기면 아니된다.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월급이 두 배로 오른다고 생각해 보라. 욕심을 버리고 정직하게 축복의 문을 열어 갈 줄 알아야 한다.

(사40: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慰勞)하라. 내 백성(百姓)을 위로(慰勞)하라. (2)너희는 정(情)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告)하라. 그 복역(服役)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罪惡)의 사(赦)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罪)를 인(因)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사61: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祭司長)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奉事者)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列邦)의 재물(財物)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榮光)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7)너희가 수치(羞恥) 대신(代身)에 배(倍)나 얻으며, 능욕(凌辱) 대신(代身)에 분(分)깃을 인(因)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故土)에서 배나 얻고, 영영(永永)한 기쁨이 있으리라.

(슥 9: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 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여러분의 월급이 두 배가 되시기를 바란다. 두 배의 축복을 먼저 받기 바란다. 자녀의 축복이 2배, 부동산이 2배, 통장의 은행 잔고가 2배, 돕는 사람도 2배나 일어 나기 바란다.

2>.4배,5배의 축복:부당하게 당하거나, 빼앗기거나, 잃었을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면 최소 4배, 5배의 축복이 있으니, 믿음과 선한 마음과 인내심과 은혜의 마음을 잃지 말고 기다리라. 원수를 저주하거나 이를 갈지 말고, 축복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라. 선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라.

(출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 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간암에 걸린 000 를 위하여 51일 간을 목숨을 걸고 금식하며 기도했더니, 돌아 온 것은 차디 찬 멸시와 천대 뿐이었다. 41일 금식이 끝나고 나서 병원 판정을 받았는데, 간이 낫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 어머니 권사가 전화를 하면서“이제 어떻게 할 거냐?”면서 10 초 간격으로 30여 번을 나를 질책을 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더니,“이 상급은 네가 받을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전적으로 내가 가져 갈 선물이며, 훗날 너의 사역으로 갚아 주리라.”하셨다. 그리고 말씀을 주셨다.

(시35:11) 불의(不義)한 증인(證人)이 일어 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詰問)하며, (12)내게 선(善)을 악(惡)으로 갚아 나의 영혼(靈魂)을 외롭게 하나, (13)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禁食)하여 내 영혼(靈魂)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祈禱)가 내 품으로 돌아 왔도다.

(마5: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怨讐)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怨讐)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逼迫)하는 자(者)를 위(爲)하여 기도(祈禱)하라.

지금 그 딸은 살아, 강건하다.

나는 다른 곳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을 선물로 받았다. 교회 부흥, 부흥 사역, 물질의 축복, 성령의 종이 되는 축복...

잘 인내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를 잘 깨달아 반드시 4배, 5배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란다. 과거에, 또는 오늘 잃었던 것을 4배, 5배로 되찾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한다.

3>.30배, 60배, 100배의 축복: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 만이 이렇게 결실을 맺는다.

마음 밭이 좋은 땅이어야 한다. 상처 받은 마음, 치유되지 않은 마음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다. 좋은 땅이란 말씀을 받았을 때에 그대로 심겨 자랄 수 있는 마음 바탕이다. 거부감이 없고, 심성이 곱고, 자아의 고집이 없고, 잘 수용하며, 아름다운 심령이다. 30배, 60배, 100배의 차이는 그릇의 크기 차이이다.

마음 밭이 너무나 중요하다. 영분별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 밭을 다 보여 주신다. 그런데 하나같이 성령의 생수가 메말라 있다. 마음 밭이 쩍쩍 갈라져 있다.

(마13:23)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者)니, 결실(結實)하여 혹(或) 백배, 혹(或) 육십(六十)배, 혹(或)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길가”란 성도를 빼앗기는 목사이다. 새가 쪼아 먹어 버리듯이...

목사가 길가 땅이므로 씨가 땅 속으로 푹 들어 가지 못하는 것이다. 시험 들어 빼앗기고, 이단에게 빼앗기고, 큰 교회에 빼앗기고, 왔다가 가 버리고...

목사의 목회가 그러면 다른 일 하지 말고, 자기를 갈아 엎어야 한다. 길가 땅 목사는 자기 자신의 실상을 모르면서 남만 원망한다. 교인 다 빼앗아 간다고 신천지 원망하고, 큰 교회 목사 원망하고...

아아! 내가 길가 밭이었다.

교회 장로, 권사, 교구장, 구역장도 마찬가지이다. 길가 땅인 사람은 교인들 다 잃어 버린다.

“돌밭 땅”은 탕탕 튕기는 목사이다.

교인들이 목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니나 잘 하세요.”한다.“목사님부터 좀 하시죠!”한다.

교인들을 품으라. 신뢰를 받는 목사가 되라.

목사가 목사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한다. 탕탕 튕기기 때문이다. 평가나 하고, 판단만 한다. 언제나 부정적인 눈으로 본다. 목사의 믿음이 가장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목사가 대범하지 못하고, 수용적이지 못하다. 은혜 받을 자세가 안되어 있다. 그러니 그 교인들도 은혜를 받지 못하고 탕탕 튕기는 것이다.

“가시덤불”같은 목사는 자기 걱정에 얽매여 정신이 없다.

목사는 오로지 성도 위해 걱정하고, 성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자기 일에 얽매여 정신이 없고, 자기 가정에 문제가 있고, 자기 자식이 문제가 있고, 자기 돈 문제로 근심 걱정이면 무슨 목회가 되리!

아아! 얼마나 찔리는 말씀인가?

100배의 축복을 필히 받는 비결

(창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100배의 축복을 어김없이 받는 비결 - (막10:29)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福音)을 위(爲)하여 집이나 형제(兄弟)나 자매(姉妹)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子息)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者)는, (30)금세(今世)에 있어 집과 형제(兄弟)와 자매(姉妹)와 모친(母親)과 자식(子息)과 전토(田土)를 백배나 받되, 핍박(逼迫)을 겸하여 받고, 내세(來世)에 영생(永生)을 받지 못할 자(者)가 없느니라.

이삭의 100배의 축복

(창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農事)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福)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昌大)하고 왕성(旺盛)하여 마침내 거부(巨富)가 되어, (14)양(羊)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奴僕)이 심(甚)히 많으므로,

4>.1000배의 축복:사역의 제 1 축복 - 개인적으로는 이 축복을 구할 필요가 없다.

(신1:10)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繁盛)케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11)너희 열조(列祖)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現在)보다 천 배(千倍)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許諾)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福) 주시기를 원(願)하노라.

“개인적으로 이미 풍성히 받은 복에다, 사명과 사역을 위하여 덤의 복을 더 받으라.”는 말씀이다.“형통함에 형통함이 더욱 더 넘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가진 자에게 더 부어 주신다.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욱 더 부으신다.

성령 충만을 받은 자에게 더욱 더 놀라운 영적 세계를 열어 가신다. 제가 성령의 경지에 어느 정도 오르니, 달려 가는 속도가 얼마나 가속도가 붙는지 모른다. 여러분 모두 성령의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를 축원한다.

(대상4:9) 야베스는 그 형제(兄弟)보다 존귀(尊貴)한 자(者)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受苦)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願)컨대 주(主)께서 내게 복(福)에 복(福)을 더 하사 나의 지경(地境)을 넓히시고, 주(主)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患難)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求)하는 것을 허락(許諾)하셨더라.

5>.5000배의 축복:사역의 제 2 축복 - 오병이어의 축복, 기적 중의 기적의 축복이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 인물로 말한다면 대통령 이명박 장로, 조용기 목사 정도가 받은 축복일 것이다. 말세에 나 순명(殉命) 배종부 목사가 그 축복을 마지막으로 받으리라. 계11장의 말세의 모세와 엘리야 같은 두 증인이 되리라.

5000배의 축복이란 오병이어의 축복을 말한다. 이것은 역사상 거의 없는 전무후무한 기적이다. 나는 나의 사역에 이 기적이 일어 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늘 설교할 것이다.

성경은 중요한 사건은 두 번을 기록한다. 구약의 사무엘상하, 역대상하, 열왕기상하가 바로 그것이며, 신약의 복음서가 바로 그것이다. 복음서가 4번이나 반복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성경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기록 중에 정말 중요한 사건은 3번을 언급한다. 그런데 성경에 오병이어의 사건 만이 유일하게 4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14:17) 제자(弟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 오라 하시고, (19)무리를 명(命)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祝謝)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弟子)들에게 주시매 제자(弟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女子)와 아이 외(外)에 오천명(五千名)이나 되었더라.

(막6: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祝謝)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弟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男子)가 오천명(五千名)이었더라.

(눅9: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祝謝)하시고 떼어 제자(弟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17)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요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數爻)가 오천쯤 되더라. (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祝謝)하신 후(後)에 앉은 자(者)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願)대로 주시다. (12)저희가 배부른 후(後)에 예수께서 제자(弟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3030장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2012.12.30.송년주일-2013.1.11.금.총 13회 새성교회 신년축복성회>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서론:성경이 말씀하는 5가지의 축복

새성교회 부흥의 축복

(하박국3:2) 여호와여! 내가 주(主)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主)는 주(主)의 일을 이 수년(數年) 내에 부흥(復興)케 하옵소서. 이 수년(數年)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震怒) 중에라도 긍휼(矜恤)을 잊지 마옵소서.

전도 대축제)영혼 초청의 날

일시:2012.8.26.오전11:00 주일오전예배

초청 대상자:가족, 친지, 친구, 지인...

예배 진행:10:30-11:00 새벽이슬찬양단 찬양

11:00-12:30 열린 예배

노래,찬양,설교,기타 예배순서...

만찬의 시간:12:30-13:30 풍성한 뷔페식 잔치

선물 나눔의 시간:13:30-14:30

각자가 자기 전도자에게...

전도 대축제 <영혼 초청의 날> 기도 내용:

종과 종의 새성교회가 진정으로 “전도”하여 영혼들을 챙기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지금이 6월 말이니, 2개월 후 8월 26일 주일에 전도 대축제로 <영혼 초청의 날>을 만들어,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을 초청하여, 열린예배로 드리고, 점심도 뷔페로 풍성하게 잔치를 나누고, 내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전달하며, 내 평생에 잊지 못할 영혼 초청과 구원의 날로 기념하게 하여 주옵소서.

앞으로 매년 1회 실시할 계획입니다.

주일 오전에 예배 순서도 신나게, 재미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찬양과 건전가요도 부르고, 새벽이슬찬양단을 옷을 단장하게 하고, 설교도 열린예배로 드리고, 풍성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자기 전도대상자에게 선물도 정성으로 포장하여 주고... 특별히 큰 것 아니어도 좋은 것입니다.

이 날이 진정 우리의 기쁨의 큰 천국 잔치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새성교회가 세워진지 15년이 지났고, 고통의 7년 세월이 지난 후, 나머지 8년 간을 오직 “성령” 하나를 모토로 일심으로 달려 왔고, 부흥사가 되기 원했던 나에게 하나님이 마침내 길을 여셔서 한국교회를 위한 부흥사역을 돌고 돌아, 오늘에 이르러 내리는 하나의 뚜렷한 결론은 “자기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의 부흥이 없다면 아무리 탁월한 부흥사역도 결국 하나의 사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의 교회 부흥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부흥”을 시작할까?

어떤 프로젝트? 아니다. 수단 방법이 아니라, 본질에서 진정한 “부흥”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결국 “목사의 성도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돌봄”이다. 진짜 사랑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창의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모든 안되는 일은 진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도 주변의 강요로,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허세로, 껍데기로 하는 사람이 있고,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다.

교회 일도 진짜로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낸다.

목회도 진짜로 하는 목사는 반드시 그 교회를 부흥시킨다.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자이다.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자이다. equiper(하게 하는 사람)이다.

“갖추다, ┅에 설비하다, 장비하다(with); (배를) 의장(艤裝)하다. SUPPLY. ┅에게 가르쳐 주다, ┅에게 갖추게 하다(with), 몸치장시키다(in; for)”

목사에게, 성도들에게, 청년들에게 열정적 영성이 있어야 한다.

열정적 영성:목표는 분명하고, 가슴은 열정에 불타고, 머리가 아닌, 발로 뛰는 목회 만이 성공한다. 행동 없는 목회는 열매도 없다.

1>.불 붙은 성도:자기의 교회를 위해 기쁨과 열정으로 헌신과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을 키운다. 부흥과 성장을 말하면 교인을 도구로 이용하고, 사람이 머릿수로만 보이므로,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성도를 오직 사랑하고 돌본다. 진정 그 한 영혼을 위하여 사역한다.

2>.기도 목회:기도 시간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감 있는 기도생활이 중요하다. 아침 1시간, 저녁 2시간,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한다.

이성적 판단과 지혜는 성령의 뜻과는 다르다. 사람의 말은 참고로만 한다. 방언기도로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기도하여 알고, 통역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확인한 후, 성령의 뜻에 따라 목회한다. 성실한 기도생활의 본으로 성도들의 영적 사정을 기도로 미리 살피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목회를 한다.

3>.기도 운동:전 교회 운동으로 확산시킨다.

4>.기도 부장:수십 명, 수백 명의 기도 부장을 키운다. 주일오후예배 후 정기 모임을 갖는다.

나는 여러분이 빨리 자기의 일을 찾아, 진짜로 그 길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기 바란다. 이 “자기 일을 찾는다(소명, 오직 나 만의 가치)”는 것이 말은 쉽지만, 실제는 쉽지 않다.

나는 이 점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근거를 찾는다. 시련과 연단과 고난과 인생의 연륜을 거친 후에, 성령 하나님의 때가 되고 인도하심이 있어야 비로소 자기 인생, 자기의 길, 자기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원칙이 몇 가지가 있다.

1.교회는 이성적인 똑똑함이나, 인간적 판단의 설침으로 절대 부흥되는 것이 아니며, “교회 부흥은 오직 성령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교회는 철저히 성령 하나님의 주도 하에 나아 가야지, 인간의 그 무엇에 절대 바탕해서는 아니된다. 모든 일을 성령으로 하고 성령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기본적 자세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첫 임지인 부산 용호제일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행했던 지식과, 인간적인 판단과, 그로 인하여 교만하고, 잘난 척 하고, 담임목사를 무시하고, 교인들을 우습게 알았던... 그 철부지 자세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돌아 보고 회개하는 결론이다.

의식화(意識化 consciencerization)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을 세뇌시키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특정한 의식을 갖게 하는 일. 특히, 계급의식을 갖게 하는 데에 쓴다. 의식화 교육, 운동권을 통하여 의식화 된 학생 등의 뜻이다.

김일성 주체사상은 하도 논리적으로 완벽하여 빈틈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진리는 가짜임이 이미 드러 났다. 한국 대학생들에게서 어느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권에 세뇌된 사람들이 지금 한국 정치계의 야당의 두루 요직에 포진해 있다.

교인들을 인간적으로 의식화하면 안된다. 교회에서 사람을 인간적으로 의식화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심히 경계할 일이다. 성령으로 의식화 해야 한다. 성령화 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오랜 시간을 거쳐 성령훈련이 되어진 교회이다.

2.교회가 부흥하려면 먼저 그 바탕에 고통과 피를 토하는 눈물의 기도가 깔려 있어야 한다.

목사의 눈물, 사모의 눈물, 중진 교인들의 눈물... 진짜 기도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부산 수정교회 시절 내 목회의 마지막 날들에 강분귀 집사가 와서 중보기도를 해 주었다. 그녀는 그렇게 기도하다가, 내가 교회를 떠난 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신다.

그리하여 권능의 기도가 있어 사탄의 전략을 즉시로 간파하고, 분별하며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정말 이 교회에서 복을 받고, 중진이 되고, 일군이 되어 복을 받기 원하거든 피를 토하는 기도와 인생을 바친 헌신의 삶이 있기를 바란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청년들도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영월영락교회 안봉엽 목사님의 사모님 이야기이다. 사모님이 처녀 시절 어느 큰 회사의 회장님 비서로 있으면서 다니는 교회에 청년들이 30여 명 있었는데, 목사님이 자나 깨나 순교를 강조하며 사명의 삶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중에 대부분의 청년들이 목사가 되고, 사모가 되었다고 한다.

나의 첫 임지가 부산 명륜제일교회였다. 23세에 부임하여 처음 교육전도사 생활을 했는데, 고 3년 아이들과 불과 4살 차이였다. 그 때 가르친 학생들 중에서 지금 목사들이 많이 나왔다. 인천 서부제일교회 김영진 목사는 당시 중3년 학생회장이었는데, 목사가 된 이유가 나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성교회는 기도가 훈련되어진 교회이다.

3.말씀이 좋아야 한다.

목사의 설교는 정말 중요하다. 이런 말이 있다. “설교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부흥된 교회는 담임목사가 설교를 잘 하는 교회이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설교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해야 하고, 간결해야 한다. 초점을 계속해서 강조해야 한다. 은혜, 재미, 감동...

4.전도해야 한다.

이 일도 절대 억지로 못한다. 지금 우리교회에는 전도의 불길이 일어 나고 있다.

필요 중심적 전도:인과관계 전도를 최우선한다.

1>.관계전도 목회:모든 성도가 전도자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이미 갖고 있는 관계 속에서 전도하도록 유도한다. 구역예배를 관계전도의 핵심적 고리로 만든다.

2>.풀뿌리 전도목회:교회는 신자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책임 뿐 아니라, 불신자의 영혼에 대한 강력한 책임을 져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고통으로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타 교회 교인을 빼앗아 오는 수평이동은 하늘나라 건설이 아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 전 교인으로 하여금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갖게 하며, 교역자들은 전도에 직접적으로 선봉대로 투입되어야 한다. 훈련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발로 뛰면서 전도하고,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며, 교회를 성장시켜 지교회들을 세우되 충분히 자립할 수 있도록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여 계속적으로 교회를 개척해 나아가야 한다.

3>.지역 구심체의 교회:지역사회에 교회를 개방, 문화 강좌를 개설하여 사회교육과 취미 활동사업, 구제사업, 봉사사업, 관공서 지원 등을 실시함으로 장기적 전도의 포석과 지역사회 중심기관으로서의 교회상을 세운다.

5.온 교인들이 자기의 일을 찾아 매달려야 한다.

8대 성장지향형 교회론(사.은.열.기.영.전.필.사)

裵順命 牧師

1.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영적인 사랑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돌봄으로 목사의 제자가 아닌, 예수님의 제자로 일군을 키운다.

1>.사역자 양성:목사 혼자 일하지 말고, 사역자를 준비시키고,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훈련한다. 절대 꾸중하거나, 부정적으로 지도하지 않는다.

2>.교회 개척:3년 마다 부목사를 키워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해 내보낸다.

3>.양육 목회:생활 훈련과 제자 훈련으로 성도들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과 평안, 형통하심이 늘 함께 하도록 한다.

2.은사중심적 사역:나의 은사는 설교, 기도, 찬송에서 오능복음과 회심의 말씀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남이다. 진실로 이를 위해 기도하고, 훈련하고, 개발해 가야 한다.

1>.은사 사역:성도가 자신의 은사에 맞게 사역하도록 잘 조정해 준다. 이 때에 성도는 가장 행복하며, 개인의 삶과 교회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2>.성령 목회:오직 성령으로 나아간다. 건전한 성령 운동의 기치를 올린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보다 절대 앞서 나가지 않는다. 절대 미래를 말하거나, 예단하지 않는다.

3>.방언 기도의 확산:모든 성령의 은사의 기본이 되는 방언 운동을 확산시켜 나아 간다. <365일 성령집회>는 열광적인 찬송과 방언의 축제가 되게 한다.

4>.성령의 청지기: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며, 교회는 성령님이 담임목사님이시다. 목회는 성령님이 하시며, 나는 오직 그 분을 수종 드는 청지기 목사일 뿐이다.

3.열정적 영성:목표는 분명하고, 가슴은 열정에 불타고, 머리가 아닌, 발로 뛰는 목회 만이 성공한다. 행동 없는 목회는 열매도 없다.

1>.불 붙은 성도:자기의 교회를 위해 기쁨과 열정으로 헌신과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을 키운다. 부흥과 성장을 말하면 교인을 도구로 이용하고, 사람이 머릿수로만 보이므로,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성도를 오직 사랑하고 돌본다. 진정 그 한 영혼을 위하여 사역한다.

2>.기도 목회:기도 시간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감 있는 기도생활이 중요하다. 아침 1시간, 저녁 2시간,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한다. 이성적 판단과 지혜는 성령의 뜻과는 다르다. 사람의 말은 참고로만 한다. 방언기도로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기도하여 알고, 통역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확인한 후, 성령의 뜻에 따라 목회한다. 성실한 기도생활의 본으로 성도들의 영적 사정을 기도로 미리 살피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목회를 한다.

3>.기도 운동:전 교회 운동으로 확산시킨다.

4>.기도 부장:수십 명, 수백 명의 기도 부장을 키운다. 주일오후예배 후 정기 모임을 갖는다.

4.기능적 조직:기능성을 살려 조직을 총력 가동한다. 개별 조직과 전체 조직은 계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한다. 개인의 기능을 극대화하게 한다.

1>.생명 조직:부서장의 원리를 잘 지켜, 기능적으로 일할 사역자를 양성해 낸다. 생명력 있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창조성의 지름길이다.

2>.민주적 행정 목회:목사가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인 독주를 함으로, 교회가 쓸 데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지양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와 장로의 갈등임을 명심하고 대처한다. 교회 행정을 집행함에 있어서 언제나 장로들과 교회 중진들과 화합하고 공명정대히 처리하여, 모든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수납할 수 있도록 열린 행정을 펼친다.

3>.기능 조직:구태 의연한 조직 들을 청산하고, 제자 조직, 영적 조직, 양육 조직, 기능 조직으로 바꾼다.

5.영감 있는 예배:철저한 준비로 최고의 감동과 은혜와 재미와 축복과 치유의 예배를 드린다.

1>.하나님의 임재 예배: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임재가 있을 때, 예배 절차, 분위기가 달라지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기대되고 즐거워진다. 지루하지만 충성심으로 억지로 오는 예배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참석하는, 영감 넘치는 역동적인 예배가 되도록 한다.

2>.최고의 예배:잘 준비된 예배, 최고의 설교, 멋진 수준의 예배, 진지하고 경건한 예배를 만든다. 설교, 기도, 찬송의 최고의 앙상블을 만든다.

3>.설교에 생명을 건 목회:월, 화 2일 간의 기도, 수, 목 2일 간의 묵상, 금 설교 완성, 토 원고 암기, 주일 원고 없는 설교 형식을 고수하며, 철저한 성경 말씀 그대로 설교하고,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 속에 성육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항상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설교하고, 성령 감동을 따라 설교한다.

4>.축복 선포 목회:예배 시간마다 성령으로 치유와 축복을 선포한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 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치유와 축복을 소유할 것이다.

6.전인적 소그룹:예배와 기도와 사랑과 교제에 있어서, 바위처럼 단단한 10명 이하의 소그룹을 재생산한다.

1>.Q.T.공동체 운영:목사의 설교 메시지를 매일의 삶에 적용시키는 전인적 Q.T.공동체가 계속적으로 번식해야 한다. 제자도는 삶을 나누는 것이며, 리더는 소그룹을 잘 이끌어 교회 예배보다 더 친밀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소그룹 안에서 리더는 자기 교회를 만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2>.평생 교육 시스템 확립:장로로부터 집사, 평신도, 초신자에 이르는 전 성도들의 체계적 10여 단계 평생교육 시스템을 확립한다.

7.필요 중심적 전도:인과관계 전도를 최우선한다.

1>.관계전도 목회:모든 성도가 전도자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이미 갖고 있는 관계 속에서 전도하도록 유도한다. 구역예배를 관계전도의 핵심적 고리로 만든다.

2>.풀뿌리 전도목회:교회는 신자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책임 뿐 아니라, 불신자의 영혼에 대한 강력한 책임을 져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고통으로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타 교회 교인을 빼앗아 오는 수평이동은 하늘나라 건설이 아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 전 교인으로 하여금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갖게 하며, 교역자들은 전도에 직접적으로 선봉대로 투입되어야 한다. 훈련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발로 뛰면서 전도하고,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며, 교회를 성장시켜 지교회들을 세우되 충분히 자립할 수 있도록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여 계속적으로 교회를 개척해 나아가야 한다.

3>.지역 구심체의 교회:지역사회에 교회를 개방, 문화 강좌를 개설하여 사회교육과 취미 활동사업, 구제사업, 봉사사업, 관공서 지원 등을 실시함으로 장기적 전도의 포석과 지역사회 중심기관으로서의 교회상을 세운다.

8.사랑의 관계:영적 친교를 연구, 개발, 정착한다. 금기 사항과 권장 사항을 철저히 주지시킨다.

1>.식사 공동체:구역 단위로 서로 자주 식사에 초대하고, 차를 마시며, 교회를 칭찬하고, 웃음이 있는 교회를 만든다. 웃음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

2>.산행공동체, 여행공동체, 부모님공동체, 부부공동체, 아기공동체, 찬양공동체...를 계속 양산, 교체하며, 업그레이드해 간다.

이상으로 성도 개개인이 진정한 영혼육의 축복을 받고, 누리며, 행복하게 평생을 살아 가기 바란다.

그리하여 새성교회가 창대하게 부흥하기를 바란다.

2012.12.30.송년주일-2013.1.11.금.총 13회 새성교회 신년축복성회>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서론:성경이 말씀하는 5가지의 축복

새성교회 부흥의 축복

1.비전과 환상의 축복(성령님으로부터 받은...)

“나는 죄 짓기 싫다”

* 이 개인의 고백 같은 간증의 말씀을 2013년 신년축복성회의 첫 설교로 하리라.

이 원고는 15년 전 새성교회 개척 초창기의 원본을 다듬은 것이다.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은혜가 되고, 아직도 내 삶의 근본은 변하지 않은 사실을 보고, 가슴 아파 하며, 회개하며, 설교한다.

진정한 축복이란 무엇인가?

회개(悔改)요 회심(悔心)이다. 참된 부흥이란“거룩한 내적 변화”이다. 성령 하나님이 깊이 만지고 지나 가심이다.

* 이 말씀을 일주일 내내 전하고, 생활하고, 간증토록 하라.

성령께서 하실 말씀을 주시리라.

말씀이 역사 하옵소서. 성령께서 말씀의 영으로 역사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설교 준비”라는 논리로 가려서 혼잡케 하지 말라. 오직 기록된 말씀에서만 영감을 찾으라. 그리고 성령이 하게 하시는 말씀대로 선포하라.

설교하지 말고“그 말씀을 원색적으로 그대로”선포하라.

주여! 오늘도 이 죄인이 주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나이다. 나를 붙드소서. 죄악과 방황의 늪을 지나 여기 섰나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주님의 전권대사입니다. 지금은 말씀이, 주님의 그 말씀이 역사하실 시간입니다. 치유하시는 시간입니다. 새롭게 하시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타 나는 시간입니다. 깨달음의 시간입니다.

성령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역사 하옵소서.

설교 하려고 단에 설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떨려야 한다. 성령님이 오늘은 나를 붙들어 무슨 말씀을 하게 하실까?

1.나는 성적(性的)으로 정결하고 싶다. 간음하거나, 음행하거나, 음란한 마음을 버리고 정결케 되기를 원한다.

고전 6:18-20절-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돈, 섹스, 권력은 마귀의 최고의 최음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구원 받은 몸이니, 하나님의 성전을 음행(淫行)으로 더럽히지 말라.

카페 http://cafe.daum.net/HolySpiritArmy의“038.음란의 영, 간음의 영(2011.6.23.배종부 목사)을 참고하라.

2.나는 거짓말 하기 싫다. 진실을 좋아하니, 진실하고 싶다.

골3:7절-10절-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범사에 언제나 진실로 사람을 대함으로, 진정으로 하나 되라.

거짓말은 거짓됨 삶에서 나오니, 먼저 거짓할 필요가 없도록 삶을 바로 잡으라. 그러면 거짓말을 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3.나는 속이기 싫다. 신뢰하고, 신뢰 받고 살고 싶다.

딤후3:13-15절-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속이는 자는 스스로 속을 뿐이다. 하나님은 속지 않는다. 다 보고 계신다. 누구도 속지 않는다. 결국 남을 속여도 자기가 자기를 속일 뿐이다.

속이고 속는 인생! 이 무슨 비극인가?

진리를 알고 깨달았으니, 이제 그 위에 굳게 서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라.

*조용기 목사는 설교 시마다 몸이 30Cm 정도 붕 뜨는 것 같은 성령 충만함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가슴이 떨린다. 하나님이 오늘 저녁에는 무슨 말씀을 주실지...

가슴 설렌다.

*신뢰함으로 진실로 사랑하고 살자.

요일4:7-8절-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서울대 박동규 교수는 어릴 때 짝지가 겨울에 손등이 얼어 터져 벌겋게 된 것을 보았다. 손을 깨끗이 씻으라 했더니, 같이 있던 여자 친구는 흙장난이 심해서 그렇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한번은 시장을 지나 가는데, 짝지가 엄마와 함께 야채를 줍고 다듬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누른 군용장갑 한 켤레를 선물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언제나 남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할 때가 많다. 신뢰와 사랑으로 사람을 얻으라. 어떤 사람을 대하든 진실과 사랑과 신뢰로 대하면 사람을 얻게 될 것이다.

2>.교통사고를 내고 불구가 된 사람을 보험처리 하고, 병실에 한 번도 나타 나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다.

반대로, 휴가 길에 차가 뒤집혔는데, 승용차와 봉고차 기사가 달려 와 구조하고, 병원으로 데려다 주어, 더 큰 신체 장애를 막아 주고 생명을 건져 주었는데, 소식을 알 길이 없어 인사도 할 수 없었다.

인간 세상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너의 삶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반대로 힘든 일이 생겨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충 넘어 가라. 우리에게는 해답이 없어도 하나님은 이유가 있으시다. 삶의 범사에 잠잠히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물처럼 바람처럼 허허롭게 살아 가라.

3>.한 육사 수영교사는 각막염으로 실명하여 한쪽 눈이 남았는데, 수술비가 1만불이나 필요했다. 아내가 2만불을 틈틈이 모았다가 주어, 병원에 수술 신청을 했다.

며칠 만에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의 장기를 기증한다고 하여, 수술을 이식 받고 완쾌되어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신다.

(롬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者),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者)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느니라.

4>.태어 날 때부터 소경인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이름 없는 아가씨의 기증으로 눈 수술을 받고 시력을 되찾아,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사랑할 수 없었다. 우박 맞은 잿더미 같은 아내의 얼굴, 주먹 만한 들창코, 허공으로 뻥 뚫린 콧구멍 두 개, 눈썹이라곤 없고 그 자리에 지렁이 같은 흉터가 있던 아내, 뭔가 멍한 눈동자, 신혼 첫날 밤 나이가 무려 40세는 되어 봄직한 모습에 기겁을 하고 신방을 뛰쳐 나간 그였다.

평생을 정 없이 얼어 붙은 마음으로 살았다. 아내를 구박하고, 괴롭히고,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다소곳이 변함 없는 아내였다.

인생의 중반, 다 자란 딸에게“내게 각막을 주신 분의 무덤에라도 한번 같이 가자.”했더니, 참다 못한 딸이“엄마! 엄마 눈 빼서 아빠 주었다고 어서 말해!”했다.

아내의 어깨를 붙잡아 홱 돌려 앉혀 보니, 돌아 앉아 있는 아내의 왼쪽 눈이 흐릿해져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소중한 내 남편이잖아요!”

4.나는 숨은 은밀한 삶을 살기 싫다. 광명정대하기를 원한다.

고후4:1-2절-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낙심하지 말라.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라. 남이 없을 때 떳떳하게 살라.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이중성을 버리라.

네 삶 속에서 말씀이 진정 삶의 말씀이 되게 하라. 말씀이 그대로 드러 나게 하라. 말씀이 능력으로, 불로, 방망이로 화하여 던져지게 하라.

(렘23:29)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磐石)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5.나는 보복을 두려워 하며 살기 싫다. 어떤 장소, 어떤 자리, 어떤 사람을 만나도 떳떳하고 담대하고 싶다.

요일4:18-19절-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 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사랑하셨음이라.

어떤 아내가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연애를 했다. 핸드폰 메시지에 애인의 음성이 들어 왔는데, 남편이 듣고 말았다.

“그 놈에게 가자!”함께 가다가, 도중에 남편이 돌아 섰다.

잠바 쟈크를 열고 식칼을 꺼내 내던졌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남에게 쫓기는 두려운 일은 하지 말라. 진실로 깨끗하게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다.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라. 불안하게 살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깊이 깨달아야, 진정한 사람 사랑이 나온다.

주님이 직접 저를 통해 말씀 하십니다.

내 병을 고쳐 주소서.

내 마음을 고쳐 주소서.

내 삶을 고쳐 주소서.

6.나는 낭비하여 경제에 쪼들리며 살기 싫다.

눅15:12절-14절-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 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재산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

작은 아들은 동기가 방탕하다. 악하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이들은 반드시 삶이 무너지는 댓가를 지불해야 정신을 차린다. 아아! 경제 운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다 불행해진다.

하나님은 다 알고도 주신다. 모든 것을 허락하신다.

나는 부산 00교회에서 마귀 같은 장로, 권사가 없으면, 목회 잘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하나님은 다 이유가 있으셔서 나에게 그런 사람, 그런 환경, 그런 질병, 그런 여건을 갖다 붙이신다.

남편의 핍박이 없으면 예수 잘 믿을 것 같지만, 천천만만의 말씀이다. 언제 낙심의 마귀가 찾아 올지 모른다.

환경이 안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장애물이 있는 것은 우리 믿음을 키우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의 손길이다.

죄악으로 달려 가는 발걸음은 신속하고도 신속하다.

설상가상이다. 1998년 IMF와 함께 시작한 새성교회와 배종부 목사는 10여 년의 고난의 터널을 통과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성령 충만의 축복을 받았다. 아직도 우리는“도상(道上)의 영성”가운데 있다. 아직 이룬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벌어지고 있다. 놀라운 일이 일어 나고 있다. 기적의 하늘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계속 달려 가야 한다. 성령 안에서 쉬지 말고 계속...

7.나는 아내에게 고통을 주며 살기 싫다.

골3:19절-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외쳐라. 외쳐라.

정절로, 돈으로, 폭언으로, 폭력으로, 자녀에게 무책임함으로... 아내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

아내들이여! 남편들이 여러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하도록, 그 마음을 움직이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

8.나는 자녀를 방치하며 살기 싫다.

골3:21절-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방치하지 말라.

자녀를 강압하지 말라. 친구가 되라.

아아!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함이 가슴 아프도다.

9.나는 하나님의 사람들 외에는 만나기 싫다.

고전5:11절-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詬辱)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사람은 사귀고 만나는 대로 물들어 간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라.

옳지 않은 사람을 끊으라.

학생들! 친구를 잘 사귀라.

청년들! 함부로 이성을 사귀지 말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주여! 죄 짓자는 사람의 얼굴이 미워지게 하옵소서.

박영문 장로는 술 먹은 사람이 뱀으로 보였다.

지나 온 삶의 경험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으라.

모든 것 속에는 내 삶의 온갖 것이 다 포함된다.

선은 좋은 것을 말한다.

새성교회 초창기에 도적이 들어 카메라와 아동부 문구용품 20만원 어치를 훔쳐 가 버렸다. 3돈짜리 금반지 3개를 훔쳐 가 버렸다. 컴퓨터를 훔쳐 가 버렸다. 10여 회 도적 맞을 때마다 교회 안의 모든 귀중품들을 싹 다 털렸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저주하는 마음의 죄도 많이 지었다.

금요 아침 기도회 시간에 통성기도시 집사들이 기도하지 않아, 교회에서 쫓아 내어 버렸다.

이 모든 것들도 교훈이 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는다.

아아! 유치한 시절이 목회여!

어찌 목사가 그렇게 유치할 수가 있었을까?

내 지난 시절이 부끄럽도다.

10.나는 무리하게 살기 싫다. 잠을 적게 자고, 죽도록 일하고, 몸을 혹사하고, 피곤에 절어 살고...

전2:22-26절-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먹고 즐거워 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

택시 운전기사의 변-“그저 손님이 오는 대로 태우고 갑니다. 손님 찾아 다니면 힘들어 못해요.”

잠을 푹 자라.

마더 테레사는 제자를 선발할 때 3가지 기준을 보았다.

1.인상이 좋은가?(전도의 요건)

2.밥을 잘 먹는가?(건강해야 하나님께 영광)

3.잠을 잘 자는가?(심령의 평안) - 심령의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적당히 일하라. 삶을 정리하라.

쫓기며 살지 말라.

건강을 지켜라.

피곤을 풀어라.

내 것을 빼앗기지 않는 축복을 받으라. 하나님이 모아 주시는 축복을 받으라.

11.신앙생활을 양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교회 일 많이 하고...

아니다.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갈5:16-17절-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24절-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직도 못 박지 못한 것을 모조리 못 박게 하소서.

양적 사고를 버리라. 영육의 짐에 눌려 허덕이는 인생이 되지 말라.

신중하고, 탐욕을 버리라.

교회 일 많이 하려 말라. 언제나 은혜, 덕, 하나님 영광에 초점을 맞추라.

직분이 높다고 중요한 게 아니다. 은혜의 샘이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신임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모든 것이 바로 잡힌다.

나의 말, 행동, 충성, 봉사, 헌신이 하나님, 교회, 목사에게 유익한가 늘 물으라.

12.나는 사람들을 마음으로나, 돈으로나, 말로나, 만남으로나, 인간적인 사랑으로나 어떠한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

마26:6-10절-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름 없는 한 여자이다. 주의 일은 이름 없이 한다.

최고의 것을 드렸다.

제자들이 분을 내었다. 동기가 틀렸다.

많은 값을 생각한 것은 탐욕이다. 순수한 헌신의 보물을 돈으로 환산하는 사고는 마귀의 탐욕의 사고이다. 이들에게 가난한 나를 생각한다는 말은 구호에 불과하다. 이웃 사랑이 없다. 한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사람을 괴롭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최선의 삶이다.

<복된교회>의 최온유 목사는 단에 올라 갈 때 성구 몇 개만 가지고 올라 가서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한 설교를 한다고 한다. 무슨 말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알아서 하시도록 위탁하고, 최후의 시간까지 전적 모험으로 설교하고 목회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 삶을,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메모지를 두고 성령님의 음성을 기다린다고 한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하게 하시는 대로 말하고...

그러면 말씀의 역사로 심령이 뒤집어지고, 불치병이 떠나 가고, 귀신이 쫓겨 나고, 삶이 변하는 역사가 일어 난다고 한다. 전 성도들이 전도인이 되고, 생활로 신앙하며 살게 되고, 교회에 불이 활활 붙는다고 한다.

위의 내용은 오는 한 주일의 내 설교 내용이다.

나도 그렇게 해 보리라. 해 보고 정말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리라. 정말 설교는 그렇게 해야 맞을 것 같다.

*목사가 말씀을 받들고, 살고, 순종하고, 전하면, 그 말씀이 불이 되어 타오르리라.

2012.12.30.송년주일-2013.1.11.금.총 13회 새성교회 신년축복성회>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서론:성경이 말씀하는 5가지의 축복

새성교회 부흥의 축복

1.비전과 환상의 축복(성령님으로부터 받은...)

나는 죄 짓기 싫다

2.행복해지는 축복(목사도, 성도도, 개인도,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사회생활도, 대인관계도, 건강도, 나라도, 환경도, 기후도...)

어떻게 행복할까?

이사야 58:11절(물댄동산)

(11)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恒常) 인도(引導)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靈魂)을 만족(滿足)케 하며, 네 뼈를 견고(堅固)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금식이 응답되지 않음

(1)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百姓)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罪)를 고(告)하라. (2)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行)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規例)를 폐(廢)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義)로운 판단(判斷)을 내게 구(求)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 하며, (3)이르기를 우리가 금식(禁食)하되 주(主)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主)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禁食)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보라. 너희가 금식(禁食)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惡)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禁食)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上達)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禁食)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悅納)될 날이라 하겠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6)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壓制) 당(當)하는 자(者)를 자유(自由)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者)에게 네 식물(食物)을 나눠 주며, 유리(流離)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者)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骨肉)을 피(避)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治療)가 급속(急速)할 것이며, 네 의(義)가 네 앞에 행(行)하고, 여호와의 영광(榮光)이 네 뒤에 호위(護衛)하리니, (9)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應答)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萬一) 네가 너희 중(中)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虛妄)한 말을 제(除)하여 버리고, (10)주린 자(者)에게 네 심정(心情)을 동(動)하며, 괴로워 하는 자(者)의 마음을 만족(滿足)케 하면, 네 빛이 흑암(黑暗) 중(中)에서 발(發)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恒常) 인도(引導)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靈魂)을 만족(滿足)케 하며, 네 뼈를 견고(堅固)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네게서 날 자(者)들이 오래 황폐(荒廢)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歷代)의 파괴(破壞)된 기초(基礎)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蓚補)하는 자(者)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蓚築)하여 거(居)할 곳이 되게 하는 자(者)라 하리라.

안식일

(13)만일(萬一) 안식일(安息日)에 네 발을 금(禁)하여 내 성일(聖日)에 오락을 행(行)치 아니하고, 안식일(安息日)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聖日)을 존귀(尊貴)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尊貴)히 여기고, 네 길로 행(行)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求)치 아니하며, 사사(私私)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祖上)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의 제일 순위가 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주부 중 종교를 갖고 있는 주부들이 그렇지 않은 주부들보다 가정에 대한 행복감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월 2백만원 이상의 고수입 가정 보다 월 1백40-2백만원 수입의 가정이 상대적으로 행복감을 더 느끼는 것으로 나타 났다. 즉 소득액이 행복감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경희대 가정대 대학원 강사인 어은주 씨가 1996년 3월 초․중․고생 자녀를 둔 주부 282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하여 작성한 「도시가족의 건강성 및 관련요인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밝혀졌다.

남편 소득이 월 1백40만-2백만원인 주부들의 행복도는 170점 만점에 134,2점을 기록하여, 월 2백만원 이상 고소득 가정의 행복도 133점보다 높았다. 월 1백40만 미만 소득의 가정 행복도는 127,9였다.

또한 종교를 갖고 있는 주부들의 가정행복도(만족도)는 170점 만점에 132,9점으로 종교가 없는 주부들의 가정행복도 128,8점보다 높았다.

오늘 아침(2013.1.1) 방송에서 얼핏 본 기억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는 가족, 건강, 돈, 직장 사업, 지위 명예 순위였다.

1923년 미국의 황금만능 시대에 세계에서 제일 성공한 재벌가들이 미국 시카코의 에지워트 비치Edgenater Beach) 호텔에 모여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한 대부호들로서 그들 아홉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 최대의 강철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쌉(Charles Schwab), 세계 최대의 가스회사 사장 하워드 홉슨(Haward Hopson), 밀 회사 사장인 아더 커튼(Arthur Cutten), 뉴욕의 증권회사 사장인 리차드 휘프니(Richard Whipney), 내무부장관이었던 앨버트 폴(Albert Fall), 월가의 맥주회사 사장 제스 리브모어(Jesse Livemore), 세계 최대의 전매회사의 사장이었던 이반 크레브거(Ivan Krevger), 그리고 국제은행의 은행장이었던 레온 프레이저(Leon Fraser)들이었습니다.

이 세계의 부호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헤어진 지 꼭 25년 후가 되는 1948년에 그 부호들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느냐를 조사해서 발표한 글이 있었습니다.

강철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쌉은 결국 파산을 해서 5년 동안 남의 빚을 지고 살다가 죽었고, 전기회사 사장이었던 사무엘 인설은 최후에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국외로 도망해서 결국은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가스회사 사장이었던 하워드 홉슨이라는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고, 밀회사의 사장이었던 아더 커튼은 파산 당했으며, 증권회사 사장이었던 리차드 휘프니는 싱싱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에 죽었습니다. 내무부 장관이었던 앨버트 폴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사면을 받은 후, 무직으로 살다가 죽고 말았고, 맥주회사의 사장이었던 제스 리브모어는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전매회사의 사장이었던 이반 크레브거는 불의의 객사를 당했고, 국제은행의 은행장이었던 레온 프레이저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 내촌감삼은“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다.

책은 살 수 있지만 두뇌는 살 수 없으며,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으며,

장식품은 살 수 있지만 미는 살 수 없으며,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은 살 수 있지만 교양은 살 수 없으며,

유흥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으며,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는 살 수는 없으며,

종교의 사원은 지을 수 있지만 하늘 나라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벤자민 플랭클린은(B.Franklin)은“돈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 올 줄 알지만, 아무런 행복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돈은 많이 벌수록 더 큰 돈을 벌려고 합니다. 돈은 공허를 메우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공허를 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죤.디.록펠러(J.D.Rockefeller)는 말하기를“가장 가난한 사람은 돈 밖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세와 명예에다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둡니다만,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면 태평양이 바라 보이는 산 언덕에 미국의 신문왕이었던 허스트 가에서 건설한 허스트성이 있습니다. 허스트 가에서는 미국의 신문을 34개나 경영한 어마 어마한 부자로서 지금부터 100년 전에 약 1,500만평의 땅을 사서 여름에 서너달 동안 피서하기 위한 별장을 건설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마 어마한지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서, 한번 다 구경하려면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해야 한답니다. 모든 장식품-조각미술품-은 2,000년, 3,000년 전의 희귀한 것들이고, 야외수영장은 눈 같은 흰 대리석으로 깔고, 주위에 둘러선 기둥은 로마에서 사다가 세우고, 실내 수영장의 바닥은 22금으로 깔았는데, 지금도 계산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에 시작한 집인데, 집을 짓는 공사비는 빼고 세계 각국에서 사 들인 물건 값 만도 50년 간에 매년 백만불 이상 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허스트는 그 집에 와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허문한 일입니까?

스페인 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신앙과 물질의 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흔히 콜롬부스(Columbus), 콜테즈(Cortez), 피자로(Pizarro) 등의 신세계 탐험의 이유를 기독교를 전한다는 데에 두어 왔습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그들의 진짜 목적은 황금에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이 오랫 동안 지니고 온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황금에 대한 욕심으로 퇴색하여 나라를 멸망케 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피자로는 잉카 국민들에게 위협하기를, 방에 7피트 높이로 황금을 채우면 왕을 놓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국민들이 그 만한 황금을 전국적으로 공출하여 바쳤더니, 황금을 받고는 약속은 어겨 아타활라 왕을 불법으로 재판하여 사형에 처한 것입니다. 처형의 이유는 아타활라 왕이 황금을 숭배하는 이교도였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왕은 풍습대로 화형을 받았는데, 불에 타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전설 때문에 그는 죽기 전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입신하여 처형을 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스페인의 죄악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디아나폴리스에서 한 부자 과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5백만불의 현찰이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발견 되었는데, 심지어 쓰레기통에도 돈이 잠겨 있었다.

마죠리 잭슨이란 이 할머니는 돈으로 꽉 찬 넓은 집에서 혼자 죽었다. 77년 2월 10일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 사실을 두고 인디아나폴리스에서는 물론 화제가 만발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소학교 아이들은 이 여자를 불쌍하다고 말하고, 고등학생들은 대체로 잭슨 부인을 어리석다고 멸시한 데 비하여, 오히려 어른들의 입에서는 부러운 느낌이 많이 들었다는 통신의 흥미 있는 보도였다.

탈세로 고발 당한 빌 휴즈 씨의 이야기이다.

그는 50세인데, 지난 30년 간 조선창에서 직공으로 일해 왔다. 그러면서 16,800파운드를 저축했다고 한다. 적은 봉급생활로 이 만한 저축을 하기 위하여 그가 살아 온 길을 보면, 과자를 산 일도 없고, 담배나 술도 안했으며, 여자를 데리고 데이트도 안했고, 면도는 형의 면도기를 사용하고 친할머니에게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요구했으며, 밤 일을 나갈 때는 아버지의 구두를 신고 갔고, 꽃은 평생에 사 본 일이 없으며, 매식도 안하고, 영화 구경은 평생에 꼭 한번만 갔었다고 한다.

만일 그가 돈이 아닌 보다 가치 있는 인생에 투자했다면, 얼마나 멋진 인생을 살았을까? 생명을 받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은행의 저금통장 한 개 만이 그의 인생이었으니, 허무한 한 평생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인전을 많이 쓴 필립 구아델라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인간이 어떤 생애를 보냈는지를 알려면 그의 수표장(수표장)을 보면 알게 된다.”

행복 순위 4위

런던 타임스(신문)에 가장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를 독자로부터 모집한 내용이 소개 되었는데, 1위부터 4위까지를 획득한 행복의 정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위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

제2위 아기의 목욕을 다 시키고 난 어머니,

제3위 세밀한 세공품 장을 다 짜고 휘파람을 부는 목공,

제4위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고 막 한 생명을 구한 의사,

상위로 뽑힌 이 정의들을 보면 백만장자도, 영국의 황제나 귀족도 전혀 들어 가 있지 않습니다. 대정치가나 혹은 인기 있는 직업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빠져 있습니다.

재물의 부요가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최고급 저택에서 수 천만원을 호가하는 침대에서 밤새도록 고민하며 몸을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있는 부자와 오두막 집에서 다 떨어진 메리야스를 입고 배꼽 내놓고 코를 골아 가며 늘어지게 자고 있는 가난한 사람과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

(시127:2)너희가 일찌기 일어 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受苦)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者)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돈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노이로제 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 중에 더 많다.

부호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웃음을 가진 부자는 거의 없다. 내 경험으로는 부가 웃음을 몰아 낸다."고 했다.

물론 하나님을 떠난 부자들을 의미한다.

존 D 록펠러 경은 33세에 1백만 달러를 벌었고, 43세에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최대 규모의 독점 기업인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만들었다.

53세 때 그는 어땠을까?

그 때 그는 원인 모를 소화불량에 걸려 머리칼은 다 빠지고 눈썹도 겨우 형체만 알아 볼 정도만 남고 다 빠졌다. 뼈에 가죽만 간신히 걸친 몰골이 되어 사람 젖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500달러를 들인 은빛 가발을 죽을 때까지 쓰고 다녔다.

마침내 록펠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벌어 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중단하기로 했다. 대신 자기 돈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살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즉 돈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교회에 돈을 기부하면, 전국의 모든 교회들이 벌떼처럼 달려 와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는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재정난 때문에 폐교 위기에 처한 미시간의 조그만 학교를 오늘날의 시카고 대학으로 키워놓았다.

또 전 세계의 질병과 무지를 추방하기 위해 일하는 국제적인 재단을 만들었는데, 바로 록펠러 재단이다. 그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페니실린의 발명을 비롯한 수 많은 기적들이 가능했다. 결국 록펠러는 행복해졌다. 53세에 죽음의 위기를 맞았던, 그는 98세까지 살았다.

돈에 관한 긴 이야기들의 결론은 돈은 행복한 삶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돈에 매여 허덕이며 살지 말자. 돈을 사랑하지 말자. 돈의 노예로 살지 말자.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대로 돈을 다스리며 살자. 건실한 돈에 대한 인식과 건강한 경제생활로 아름답게 나의 인생을 풀어 가자.

어떻게 행복할까?

1.마음이 가난하면 행복하다.

(마5:3)심령(心靈)이 가난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천국(天國)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누구나 이 말을 알고 있지만, 그 뜻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자신이 영적으로 빈곤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 자기 처지를 알고 겸손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작가 한윤수 씨가 알기 쉽게, 생활 속의 교훈으로 풀이한 <생활 속의 산상수훈>(형제 펴냄)이 나왔다. 지은이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산상수훈의 가치를 발견하고 난 뒤, 이를 일반인에게 전하기 위해 쓴 책이다.

1부는 이러한 지은이의 경험을, 2부는 산상수훈의 명구들을 정확한 뜻과 우리의 생활 지침으로 정리했다.<한겨레신문>

삶을 비워야 한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 때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그의 배와 부딪혔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람이 탄 것을 발견하고는 당장 비키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질러도 그 배에서 아무 기척이 없자 더욱 큰 소리를 지르고, 그래고 기척이 없으면 또 지르고, 그러다가 핏대를 올리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엔 배가 비어 있었고, 이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질과 욕심의 배를 비우고 허허롭게 인생이라는 강을 흘러 갈 수 있다면 그 누가 우리를 거스리고, 그 누가 우리를 해하랴?(장자 제 20편 2절)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 방법에는 「채우는 방법」과 「비우는 방법」이 있다. 채우는 방법이란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이다. 돈을 모으고, 권력을 잡고, 명예를 얻는 등 자기를 채우고 확대함으로 소위 남보란 듯 살아 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예수님은“자기를 버리고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헛된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참 자아를 발견하라는 가르침이다. 에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기를 비움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예수님식 스타일을 나의 인생관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2.만족하면 행복하다.

(시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시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81:16) 내가 또 밀의 아름다운 것으로 저희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하셨도다.

(시 90: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 91:16)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 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 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사 58: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영국의 종교가로 유명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로우(Law, Wi- lliam 1686-1761)는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빠르게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지 그 사건에 대해서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얼른 보기에는 불행한 재화같이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가운데서 그것이 도리어 축복의 결과가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도를 특별히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금식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구제품을 많이 내어 주는 사람도 아니고, 절제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할 줄 알고, 무엇이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두고 기도하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선의의 사실로 알고 받아 들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라고...

범사에 감사하는 일, 그것은 언제나 행복과 만족을 가져오고야 마는 비결이다.

3.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행복하다.

(사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인생의 종말에서 나폴레옹이 한 말이 있습니다.“인생이 헛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했지만, 나의 왕국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사랑의 왕국은 날로 날로 번져 가지 않는가? 그와 우리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그는 영웅들과도 다르며, 성자들과도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리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5-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옛날에 구두 수선하고 다니던 어떤 사람이 일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너무 기뻐서 구두 수선하던 궤짝을 내버리려고 한강에 갔습니다. 속 시원히 내던져 버리고는 집에 가서 보니까, 그 궤짝 속에다가 당첨된 복권을 집어 넣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충격으로 죽어 버렸습니다. 행운이 그렇게 너무 한꺼번에 들이 닥치면 죽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십년동운은 드문 것”입니다.

돈은 있어도 정신이 비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처럼 세상이 줄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변덕스럽습니다. 사정이 늘 달라집니다. 건강이 상실될 때도 있습니다. 계획과 소원이 좌절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행복은 그러한 조건에 좌우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행복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입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

스위스의 법률가, 철학자인 C.힐티(1833~1909)는 "생명이 없는 사상"을 지적하고,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을 실천하는 데서 온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증거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잠 못이루는 밤을 위하여.."에서 그는 "잠 못 이루는 밤은 인생과 인생의 방향을 성찰해 보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말하며, 그 시간에 성경을 보며 변화를 받을 것을 권면한다.

잠 못 이루는 밤, 그 "일대 전기"에는 성경을 읽으라.

1973년 전도집회 관계로 내한했던 빌리 그레함 목사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기념 강연을 했는데, 그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캐라비안 섬에서 얼마 동안 지낼 때 세계에서 손꼽히는 어느 부자의 점심 초대를 받았는데, 그 부자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눈 다음 그 부자는 느닷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나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영혼을 잃어 버렸습니다. 나에게도 소망이 있습니까?"라고 호소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시간 후에 빌리 그레함 목사는 역시 75살의 한 가난한 노안을 만났습니다. 그는 말하기를“나의 손에는 단 1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나는 자마이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생에 대한 자신과 기쁨이 넘쳐 있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렘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無窮)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仁慈)함으로 너를 인도(引導)하였다 하였노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

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

음 13:1)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38,39)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영원”이라는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 세상적인 육적 욕심을 포기해야 한다.“영원”이란 이 무한대의 시간은 실상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리 실감나지는 않지만, 하루살이의 삶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욕심과 욕망을 내려 놓으라. 그리고 주시는 선물을 받으라.

집착과 헛된 수고로 인한 피곤에 더 이상 시달리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 행복자의 삶을 살지 않겠는가?

4.사랑하고 살면 행복하다.

버나드 교수 (Jessie Bernard)는 그의 명저 "내일의 결혼상"에서 부부의 행복을 위하여 몇 가지를 권고하였다.

첫째, 피차 자기의 특색, 재질, 취미를 계속 발전 시켜 나가며, 그것을 서로 인정할 것,

둘째, "나를 받들어 달라"는 태도 보다, 피차의 발전을 격려할 것,

세째, 상대를 평가하는 자세 보다, 피차가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 것,

네째, 괴로움, 기쁨, 고독, 부끄러움, 즐거움을 과감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것,

다섯째, 피차의 견해, 사상, 신앙의 차이점을 존중할 것,

여섯째, 자기를 되도록 많이 가능하면 밑바닥까지 상대에게 알게 할 것,

일곱째, 화날 때, 의심스러울 때, 대립될 때, 일을 다물지 말 것.

이상과 같은 부부생활의 7대 요소는 결국 한 마디로 하면, "피차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개발함으로써 서로 성장하는 하모니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사랑이 깊고 신뢰할 만한 것일수록 엔돌핀이 샘 솟고, 깊은 행복감에 젖어 든다고 한다.

그럴 때는 몸과 마음의 모든 상처가 치료된다. 비로소 참된 의미의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미국의 위마 의과대학에서 실시한 실험의 결과이다.

“대학 병원에 한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다. 이 강아지는 사람들로부터 무척 사랑을 받았다. 누구나 이 강아지를 귀여워 했고, 가까이 오면 쓰다 듬어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 의사가 이 강아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 병원 내의 모든 사람에게 부탁하여 일주일 동안 이 강아지에게 쏟던 사랑의 표현을 중단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사람들은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반가이 다가와도 모른 척 하고, 이상히 여긴 강아지가 더 반가이 따라 다니면 귀찮다는 듯이 발길로 툭 차버리기도 하는 등 애정을 끊어 버렸다.

일주일 후에 의사는 이 강아지의 혈액을 검사하였는데, 놀라운 결과를 밝혀 냈다. 강아지의 혈액이 탁하고 아드레날린이 증가하여 질병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후 의사는 사람들에게 일러서 이전보다 더욱 사랑해 주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였고, 일주일 후 강아지의 혈액을 다시 검사한 결과 아드레날린의 양이 현저하게 줄고, 질병도 떠나고, 건강한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이상구 박사의 강연 중에서-

5.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행복하다.

마릴린 몬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이 많습니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 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 일일까요?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합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행복을 찾고 찾고 또 찾았지만 완전한 행복을 잡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행복은 살짝 지나 갑니다. 무지개처럼 지나 갑니다. 붙잡으면 현실이 아닙니다. 모래처럼 새어 나가 버립니다. 그것은 환상이고 환영(환영)이었습니다. 솔로몬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인간이 배워야만 할 지혜입니다.

영국의 아프리카 개척자 중 2명의 탐험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한 명은 로오드(Rhodes)이고, 다른 한 명은 리빙스톤(Livingston)입니다.

로오드는 남아프리카에서 소위 황금전쟁(Boer War)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영국에 벌어 들임으로써 애국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제도와 자기 조국인 영국의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식민지 압제정치를 비판하면서 싸워, 그 당시는 조국의 반역자라는 칭호를 권력인들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로오드는 무덤조차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으며, 리빙스톤은 영국의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아비(Westminster Abbey)에 안장되어 있는데, 영국 국민이나 관광객들로부터 제일 많은 인파가 모이는 묘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황금 추구의 결과는 허무하고, 그 이름에 모욕의 딱지가 붙으며, 이웃이나 조국에까지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남깁니다.

필라델피아 템플 침례교회 주일학교에 한 가난한 집안의 소녀가 찾아 왔습니다. 당시 교회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기관은 거의 없는 형편이어서 좁은 방에 많은 아이들이 복작거리고 있었습니다. 교실이 너무 좁아 새학생을 받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 소녀도 교회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이 소녀는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죽은 소녀의 베개밑에는 짧은 편지와 동전 57센트가 나왔던 것입니다. 이 편지는 그 교회 목사님에게 쓴 것입니다.

“목사님, 더 넓은 교회를 짓도록 제가 모은 헌금입니다. 넓은 교실도 지어 주세요.”

목사는 소녀의 편지를 장례식에서 소개 하였으며, 이 감동은 기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이 교회 교인들은 큰 성전 뿐만 아니라, 병원 Good Samaritan Hospital과 명문대학 Temple University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의미가 없으면 사람은 그 일을 할 이유도, 의욕을 가질 이유도, 투쟁하고 싸워야 할 이유도, 헌신 충성하고 사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 만의,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시 한 편”을 소개함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무엇을 위한 수고요, 무엇을 위한 바쁨일까?

종일 쉬지 못하고 애씀이

어두운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영혼은

마시고 또 마셔 취하도록 마신 고배의 잔

그러다가 갑자기 깊은 잠 들어 버리면

그 때는 어떤 셈을 할까?

엄벙 덤벙 살아 버린 세월 앞에...

주여! 도우소서.

내세를 위한 준비도 없이

허우적이는 손,

방황하다 찾으면

기다리는 손이시여.

-함정숙-

내 삶의 의미를 돌아 봅니다.

의미를 만들며 2013년 새해를 살아 갑시다.

돈은 행복이 아닙니다.

1.마음을 비우고, 마음이 가난하면 행복합니다.

2.범사에 만족하고 살면 행복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과 동행하고 살면 행복합니다.

4.사랑하고 살면 행복합니다. 사랑하십시오.

5.삶의 의미를 발견하면 행복합니다. 나 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길에 매진하십시오.

2012.12.30.송년주일-2013.1.11.금.총 13회 새성교회 신년축복성회>

신자가 받아야 할 13가지 축복

서론:성경이 말씀하는 5가지의 축복

새성교회 부흥의 축복

1.비전과 환상의 축복(성령님으로부터 받은...)

나는 죄 짓기 싫다

2.행복해지는 축복(목사도, 성도도, 개인도,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사회생활도, 대인관계도, 건강도, 나라도, 환경도, 기후도...)

어떻게 행복할까?

3.예배의 축복(목숨을 걸어라, 많이, 진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

(요한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禮拜)하는 자(者)들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自己)에게 예배(禮拜))하는 자(者)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禮拜)하는 자(者)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지니라.

명절이 되면 우리는 고향으로 부모님을 찾아 갑니다. 빈 손 들고 가지 아니하고, 정성으로 선물을 준비해 갑니다. 명절에 고향에 한번 다녀 오려면 아무리 가난한 서민도 요즈음 경기로 볼 때에 그 경비는 최소한 100여 만원은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너무 가난한 서민들은 할 수 없이 부모님을 찾아 뵐 수도 없는 불효자가 되고 맙니다. 비교해 볼 때, 저는 오늘날 너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말씀은 예배자들이 예배하는 대상이 우리의“아버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예배”만이 참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한다”,“예배 본다.”,“예배 드린다.”는 말이 각각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예배 보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따라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은“예배 보는 것”입니다. 비신자가 어쩌다가 교회에 와서 앉아 구경하는 것도“예배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문제는 오늘날“예배 보는”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강남의 주일 낮에 5,000명이 모이는 교회가 오후예배가 되면 150명이 모입니다. 그 교회는 사실 150명 성도를 가진 교회입니다.

오늘날에는“예배 보는”교인들로 교회가 꽉 차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은 예배를 받지 아니 하시는데, 예배 보는 자들은 예배를 잘 드렸다고 착각한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배 드린다'는 말은 어떻습니까?

이 말은 잘 준비된 선물(제물)을 거룩하신 하나님께 공손히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예배'보다는 '제사'에 더 걸맞을 것입니다. 단지 '드리는' 예배 시간은 하나님께 우리의 빚진 것 만을 겨우 갚는 시간 이상이 되기 힘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배한다'라고 할 때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여기에는“적극적인 나의 예배 행위”가 들어 갑니다.“내가 예배하는 것”입니다.“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 속에 있습니다. 예배란 예배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공부나 연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만남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실제적으로, 현장에서 알게 되는 사귐의 시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모든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배 시간 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그 분은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지금 서로 만나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바로 예배 시간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진짜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기대를 품고 예배하게 됩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때 무슨 일이 일어 났습니까?

출애굽기 3:4-6절에 나오는 모세의 반응을 보십시오.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저는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강단 앞의 맨 바닥에 맨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제 기억에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 기억은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가장 진실하고, 간절하고, 경건한 자세가 신을 벗는 것입니다.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祖上)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욥기 42:5-6절의 욥의 반응을 보십시오.

(5) 내가 주(主)께 대(對)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主)를 뵈옵나이다.(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 뵌 것입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영안을 여신 결과입니다.)

(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

사도행전 9:3-9절의 사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3) 사울이 행(行)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忽然)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逼迫)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對答)하되 주(主)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逼迫)하는 예수라. (6)네가 일어나 성(城)으로 들어 가라. 행(行)할 것을 네게 이를 자(者)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 가서, (9)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이들은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전율하며, 경외하며, 떨며, 꿇어 엎드립니다. 여러분은 예배할 때 이러한 경외감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초신자인 자매가 교통사고로 온 몸의 뼈가 다 부러졌습니다. 목발을 짚고서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데, 예배 시간마다 웁니다. 언제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교도소를 다녀 온 청년이 예배 찬양 시간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참다가, 마침내 목을 놓아 오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멀거니 풀린 눈동자로 예배 시간에 멍청하니 앉아 있다가, 맥없이 돌아 갑니다.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그냥 돌아 갑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전율과 경외감과 충격과 은혜와 깨달음과 각성과 성령 임재의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삶이 너무 평안해서일까요? 어떤 삶의 충격이나 자극이 없어서일까요? 목사님이 예배를 잘못 인도하고, 설교를 잘못해서일까요? 어제나 오늘이나 늘 습관적인 일이어서 그럴까요?

저는 지금도 15-6년 전의 부목사 시절의 기억이 생각납니다. 예배 시간에 장로님이 기도하는 시간이면 저는 빈 자리를 파악하기 위하여 맨 앞자리로 갑니다. 그리고 앞에서부터 뒤로 자리를 하나 하나 파악하며 지나 갑니다. 그러면 반드시 서로 눈길이 마주치는 남자 집사님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절대로, 죽어라”하고 기도 시간에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눈길을 돌립니다. 저는 늘“저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는 60대 초반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죽을 때 숨이 멎기 직전,“안돼! 오지 마! 이리 오지 마!”그러면서 병원의 묶어 놓은 그 무거운 철제침대가 1미터나 이동해 가도록 저쪽으로 피했다고 합니다. 저는“맞아! 그는 귀신에게 잡혀 지옥으로 갔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마땅히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우선적인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양심이 찔리움을 받고,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을 살찌우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생각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에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윌리엄 템플-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예배 하였습니다. 아담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희생제물을 통하여 대신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끊임없이 짐승들의 피를 강 같이 흘려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피가 강을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희생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이 다시 직접적으로 예배할 수 있는 영원한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스스로 예배할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벧전2:9 - 오직 너희는 택(擇)하신 족속(族屬)이요, 왕(王)같은 제사장(祭司長)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所有)된 백성(百姓)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奇異)한 빛에 들어 가게 하신 자(者)의 아름다운 덕(德)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1:6 -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爲)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祭司長)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榮光)과 능력(能力)이 세세(世世)토록 있기를 원(願)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이제부터 당신의 예배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당신의 예배에 있어서 예배의 내용이 되고, 예배의 근원이 되며, 또한 예배의 전부가 되십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일 때에 예배의 참된 의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예배의 형식과 교회의 사역을 위한 프로그램의 진행 만이 강조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의 모습과 그 본질은 어떤 것인가요?

1.신령(神靈)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WORSHIP)란 최상의 존재인 하나님에게 최상의 존경과 경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의 최상의 것은 마땅히 예배로서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in sprit and truth)으로 예배 드리는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禮拜)하는 자(者)들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自己)에게 예배(禮拜))하는 자(者)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禮拜)하는 자(者)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지니라.

"신령으로 예배한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23절)

사람이 할 일이 있고, 주님이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은혜 받고 최선의 영적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실 일은 이러한 갸륵한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아, 삶의 모든 일을 오직 성령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은“영 안에서(in spirit and truth)’...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성령님께 붙들려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께 붙들린 예배생활을 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내 속에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범사를 행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아십니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의 기름 부음이 충만하십니까? 성령으로 행하십니까? 진정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주여!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옵소서.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하나님의 신이 충만했다.(삼상16:13절 하-“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하니라.)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중심으로 역사가 전개된다. 승리와 부흥의 역사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크게 받는 이 길 외에는 없다. 오직 크게 성령에 감동하여라.

1>.성령이 기름 부으시면 비전이 주어진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각자 사명의 길을 간다. 성령이 부어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비전이다. 거룩한 환상이다.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이 임하면...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이 부어 주신 거룩한 환상대로, 비전대로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져 간다.

꿈을 꾸라. 비전을 가지라.

성령이 부어 주신 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 마귀의 미혹의 역사에 끌려 가지 말고, 깊은 기도와 깊은 말씀 묵상으로 오직 성령에게 이끌려 가라.

2>.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면, 성령님께 붙들린 대로 그 삶이 인도되어 진다.

사람은 자신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성령에 강하게 붙들려야만 한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성령에 강하게 붙들리게 하시고, 그 다음 길로 인도하신다.

네 뜻대로 가지 말고, 성령의 이끌리심 대로 가라. 항상 긍정적, 희망적, 적극적, 소망 가운데 나아가라. 네 뜻대로 행치 말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여 오직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가라.

네 생각과 마음을 지켜라.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생각의 조그마한 틈이라도 마귀에게 내어 주지 말라. 너의 생각과 마음을 성령님이 온전히 주장하시게 하라. 네 자신이 온전한 성령의 감동 덩어리가 되라.

3>.성령의 기름부음 받음으로, 비로소 사명과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 만을 쓰신다. 보는 눈이 성령의 눈이 되고, 보는 관점이 성령의 관점이 되고, 사람됨이 성령님이 쓰시기 좋은 그릇이 되어야 한다.

불순종, 불복종, 마음 닫음, 자기 주장, 거역, 대적, 패역, 강퍅으로 흘러 가는 심령은 성령님이 쓸 수가 없다. 마음이 굳어짐은 이미 마귀의 역사이다. 성령이 기름 부으시면 부드러워진다.

언제까지나 자기 생각, 고집, 경험, 이론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쓸 수 없다. 성령으로 녹아져야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라.

<1>.영적 시각:성령의 눈으로 보다. 성령의 방법으로 행하다.

<2>.말씀의 시각:성경 말씀으로 풀다.

<3>.기도의 시각:현실적, 이성적 판단이 아닌, 기도 응답으로 풀다.

<4>.교회의 시각:교회 중심으로 범사를 보다.

<5>.믿음의 시각:믿음으로 범사를 판단하다.

<6>.사랑의 시각: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다.

<7>.은혜의 시각:언제나 은혜를 배경에 깔고 바라 보다.

4>.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진실로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

2.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진정”이란“진리 안에서(in truth)...”란 뜻입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말씀 안에서”예배하라는 뜻입니다.

(시86:11) 여호와여! 주(主)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主)의 진리(眞理)에 행(行)하오리니, 일심(一心)으로 주(主)의 이름을 경외(敬畏)하게 하소서.

또한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뜻은 “진심으로, 전심으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시51:6) 중심(中心)에 진실(眞實)함을 주(主)께서 원(願)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智慧)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自己)에게 간구(懇求)하는 모든 자(者), 곧 진실(眞實)하게 간구(懇求)하는 모든 자(者)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예배 이후에 나타난 하나님의 반응을 보니 아벨은 진실로 예배 드렸고, 가인의 반응을 보니, 가인은 진실이 없이, 중심으로 예배 드리지 않았다.)

(시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성도 중에 가사도우미로 수고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그게 뭐냐?”물으니,“쉽게 말하면 파출부를 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체가 부자유하거나 정상적이지 못한 분들의 가정을 찾아 가, 부엌과 방 구석 구석, 변기 등을 닦아 주고 청소해 주는 일입니다. 제가“하기 싫고, 힘들지 않으냐?”물으니,“저는 제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잘 감당할 뿐입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정말 존경스러운 마음이 일어 났습니다.

천한 일도,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도 이렇게 성심으로 한다면,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는 마땅히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척교회를 하는 친구 목사님의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10년 전에 200평 되는 건물을 얻어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수 억원의 돈을 다 날리고, 15평 건물로 줄어 들었습니다. 여전히 교인은 오지 않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지나 온 10년 세월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며, 주일예배를 인도하며 나름대로 앞만 보고 달려 왔는데, 외적으로 아무 이룬 것이 없습니다. 빚만 수억 지고, 교인도 없고...”그 말을 하며 눈에 눈물이 글썽 글썽 했습니다.

그런데, 개척교회 하느라 가난하여 당시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도 시키지 못하고 방치하다 시피 키웠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둘 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 수석으로 졸업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이 나 대신 우리 아이들을 키워 주셨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녀들 둘 다 좋은 직장에 다닙니다.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목사님의 목회를 실패했다고 규정 하실까요? 그의 지나 온 10년 세월의 외적 성과 없는 예배를 외면 하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세상에 이런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 없이 섬기고 헌신함으로, 더욱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예배 자세는 마땅히 이렇게 진실하고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정성을 다하여, 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10년을 한결같이 새벽예배, 주일예배를 정성껏 드려 온 목사님이 주님 앞에 허송세월 한 듯 하여 돌아 보니 아니었듯이,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응답하심으로 영,혼,육의 축복이 넘쳐 나는 그러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다 예배를 드리나, 그 예배를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반열에 선 예배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인은 예배를 드리다가 열을 받았습니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배 드리다가 귀신의 영을 받아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가장 신실한 예배자를 죽였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가인 자신의 동생 아벨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예배 드리다가, 시험에 듭니다. 하나님께 가장 지극 정성으로 바쳐 복을 받아야 할 헌금을 드리다가 시험에 듭니다. 듣고 은혜 받아, 복 받고 살아야 할 원천인 설교를 듣다가 그만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고, 난리 법석을 떱니다.

제가 아는 교회는 최근에 담임목사를 쫓아 내고서 부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설교 도중에 중단을 시키고 사임 시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아! 정말 이런 교회는 하나님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 주동자들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얼마 전 장경동 목사가“유혹”이란 설교를 하면서,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술을 마시며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술잔을 휘감고 있는 뱀의 혓바닥이 보이지 아니하느냐?”고 촉구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은 너무나 많은 엉터리 신자, 엉터리 예배자들로 교회가 넘쳐 나고 있습니다. 그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목사들을 매도하고 내쫓고 있습니다. 듣기 좋은 꽃노래만 설교 시간에 하라고 합니다. 예언자의 소리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에는 예배 시간마다 통회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메아리치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 눈물로 헌신을 결단하는 주의 종들이 구름같이 일어 나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을 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충성된 종들이 끊임없이 양육되고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와 국가를 책임지는 2세들을 키우는 체계 있는 교육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3.반드시 예물을 드리며 예배해야 합니다.

(레 22:19) (너희가 예물을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레 22:20)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예배에 꼭 빠뜨려서는 아니될 것으로 예물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예배 시에는 반드시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그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 때문입니다.

조지 허버트는“나에게 많은 것을 준 자들은, 하나를 더 준다.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며 예배해야 합니다.

윌리암 세익스피어는“오. 주여! 나에게 진정한 삶을 주소서.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주소서.”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 한 중년의 성도가 대학병원의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 주사를 손에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읍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간호원, 조수, 견습의사들... 둘러 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 마디 언어만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남아 있다면 그것이 무슨 말일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환자의 입이 움직이며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흐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진정 우리가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할 줄 안다면 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정성의 예물을 준비하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독일에 대기근이 있었을 때, 한 부자가 가난한 아이들을 모으고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자루 속에는 너희들이 하나씩 가져 갈 빵이 들어 있으니, 꼭 한 개씩만 가져 가거라. 내일 오면 또 빵을 주마."

아이들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자루에 달려 들어 서로 큰 빵을 골라 들고,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 갔습니다. 그 때 그레첸이란 소녀는 한 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마지막 남은 제일 작은 빵을 집어 들고,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다음 날도 어제와 똑같이 아이들은 빵을 집어 들고 자기 집으로 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레첸은 맨 나중에 남은 제일 작은 빵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나누어 먹으려고 빵을 쪼개고 보니, 놀랍게도 그 속에는 50센트 은화가 6개나 들어 있었습니다. 대기근을 능히 이길 만한 큰 돈이었습니다. 지체없이 그레첸이 빵 속에 들어 있던 은화를 돌려 드리려고 가져 갔을 때,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돈은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는 것이란다."

주님 앞에 예배 시간마다 헌금하는 것은 만가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기본을 갖추는 일입니다. 기본이 안된 사람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헌금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구약 제사의 기본은 언제나 예물이었습니다.

(고후9:5) ... 너희의 전(前)에 약속(約束)한 연보(捐補)를 미리 준비(準備)케 하도록 권면(勸勉)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準備)하여야 참 연보(捐補)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者)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者)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각각(各各)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吝嗇)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者)를 사랑하시느니라. (8)하나님이 능(能)히 모든 은혜(恩惠)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恒常)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땅히 예배 시간 마다 감사의 마음이 넘쳐 예물로 보답할 줄 아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4.참된 예배의 대상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뿐이십니다.

“누구를 예배하느냐?”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참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무엇을 믿어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범신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명태 대가리를 놓고 그 앞에서 빌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앙은 맹목적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1)참된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 가라. 기록(記錄) 되었으되 주(主) 너의 하나님께 경배(敬拜)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2)참된 예배의 대상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者)가 없느니라.

3)참된 예배의 대상은 성령님이시며, 참된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과 정성의 예물로 예배하여, 영혼육의 만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과 위력

(겔22:30)이 땅을 위(爲)하여 성(城)을 쌓으며, 성(城)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滅)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31)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震怒)의 불로 멸(滅)하여, 그 행위(行爲)대로 그 머리에 보응(報應)하였느니라. 나 주(主) 여호와의 말이니라.

‘주님! 저의 앞과 뒤를 둘러 막으시고, 제 안에 정직한 영과 온전한 영을 창조하셔서, 저로 하여금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당신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새성교회 담임목사인 순명(殉命) 배종부 목사가 거의 매주 전국의 부흥성회를 인도하며,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성령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단 하나의 이유는 새성교회 내에 “목사와 교회를 위한 강력한 중보기도부대”가 있기 때문이다. 사모가 인도하는 이 중보기도부대는 새성교회 내의 가장 강력한 영적 조직이다.

목사는 이 중보기도부대의 강력한 위력을 사역의 현장에서 실감하고 또 실감한다. 죽음의 위기에서 건짐 받고, 말씀을 선포할 때에 성령의 권능을 실감하며, 미리 미리 중보기도함으로 모든 하나님의 일들이 예비됨을 본다.

새성교회의 모든 일들은 중보기도부대의 기도 속으로 다 들어 가, 충분히 기도가 되어진 후, 재생산 되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풍성한 영적 열매 들을 체험한다.

이제 우리는 영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중보기도만 있으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사역자와 중보자 -찰스 피니

19세기 미국을 뒤흔든 찰스 피니 목사는 1830년 뉴욕 주 로체스틱에서 그 도시 전 인구의 10퍼센트인 1천명을 단 몇 달 만에 구원하였는데, 이 역사는 찰스 피니의 중보자 아벨 클래리의 중보기도 때문이었다. 피니 목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클레리 씨는 나의 모든 집회를 위해서 기도했다. 내가 집회 장소를 떠난 후에도 남아서 기도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으나, 그는 전 삶을 다 바쳐 나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가 잘 아는 무디 목사도 마리안 아드라르드라는 중보자가 있었다. 장애로 인해 침대에 누워 살아야 했던 미라안은 시카고에서 무디 목사가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에 있는 그녀의 교회로 무디 목사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결국 무디 목사는 1872년 영국 런던에 와서 10일 동안 4백명을 회심시켰다. 그 기간동안 런던에 사는 마리안이 뒤에서 중보기도를 드렸음은 물론이다.

캐나다 선교사 조나단 고파스는 1909년 중국 만주에서 집회를 할 때, 성령의 특별한 능력이 그녀에게 임했다는 기록을 한 처녀의 기도 노트에서 발견하였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중보기도의 결과이다. 영적 지도자가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최전방에서 싸우는 하나님의 종에게는 반드시 이 이상 중보기도로 헌신하는 후방의 기도 동역자들이 있어야 한다.

사역자와 중보자는 하나이다.

김정미 자매가 2012년 마지막 예배를 드린 후에 기도를 받으러 왔다. 헌금을 100만원 드린 후에 기도를 받고 난 후. 이렇게 목사에게 말했다.

“2013년에는 주님이 목사님을 위대하게 들어 쓰시도록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도 하겠습니다.”

아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목사인가?

오늘 우리는 이 놀라운 “중보기도”에 대하여 배울 것이다.

중보의 사역

중보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신 싸워 주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중보는 우리 자신을 가장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활동이다. 중보자가 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 분은 중보하는 삶으로 일관 하셨다.[딕 이스트만]

중보기도를 하는 제사장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43;18-19]“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중보기도는 광야에 길을 내며, 사막에 강을 내는 일이다.

중보의 용사들

1990년 9월 아르헨티나의 마르 델 플라타 시에서 '중보의 용사들'이 한 모임의 중보자들과 함께 사역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그 지역의 강한 자, 혹은 악령 지배자들을 조정하고 있는 네 종류의 주요 지역적 영을 분별해 냈다.

중보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약 300명의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그 도시의 광장으로 모였다. 그 도시의 목사님들도 동석한 가운데 우리는 회개의 기도로 시작했다.

오후 4시 경, 그 도시를 지배하는 것으로 분별된 마녀의 영에 대항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4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마침 그 때 성당의 종이 울렸기 때문이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마녀에 대항하여 기도했다.

나중에 우리의 기도가 다 끝난 후, 지역교회의 한 목사님에게 우리가 4시에 무슨 일을 했는지 질문하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는 그 도시의 목회자들에 대항하여 2년 동안이나 다른 마녀들과 함께 주문을 외워 왔던 마쿰바라는 마녀가 바로 그 4시 경에 죽었다고 알려 왔다.

중보기도자의 주의점

* 중보자라고 해서 마치 매우 특수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큰 문제이다.

*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서두르시는 법이 없으시므로, 고통을 느낄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권위를 갖고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더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세우셨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 중보자로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혹은 상황을 기도로써 덮어 주어야 한다. 정죄하고, 치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 많은 중보자들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 기도하게 된다.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의 뜻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상처를 통해 알게 된 것들만을 근거로 기도한다.

중보할 때의 태도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取)하여 자기(自己)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 가서 아비의 하체(下體)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下體)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중보기도는 영적 옷을 취하여 다른 사람의 벌거벗은 부분을 덮어 주는 것이다.

[시139;1-4](1)여호와여! 주(主)께서 나를 감찰(鑑察)하시고 아셨나이다. (2)주(主)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鑑察)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行爲)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139;24]내게 무슨 악(惡)한 행위(行爲)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永遠)한 길로 인도(引導)하소서.

중보자로서의 기도:이 악한 세상에서 성도들을 위한 성령의 중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리즈 하윌즈]

기도와 중보의 차이

기도 - 하나님께서 어떤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청원하는 기도.

중보 - 하나님께 신적인 중재를 구하는 것과 사단의 일을 파괴하는 것.

[에스겔22;30]“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적들의 공격을 내 몸으로 막아 내고, 적들이 고안해 낸 영적 궤계를 실제로 부수어 버리겠다는 의미를 암시한다.

[고후2;11]“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함이 아니로라.”

[에베소서6;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히7;25]“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필요가 있을 때마다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 와, 그 분의 자비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갈 것이니라.

중보기도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1.성령의군대에 지원 하십시오. 주님께 당신이 파수꾼이 되겠노라고 말씀 드리십시오.

2.당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유지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영역이 어느 곳인지 적절하게 분별 하십시오.

3.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개발 하십시오.

매 순간 당신은 대기 중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계십시오.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 호출기를 차고 사는 의사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 때라도 우리는 응급 요청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던 중이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바꾸셔서,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기도하도록 경보를 울리실 수 있습니다.

4.하나님께서 경보를 울리는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시도록 기도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중보해야 할 사람의 절박한 필요를 알려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귀중한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만 가르쳐 주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마십시오. 많은 기도 모임이 영적인 잡담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른 사람의 약점을 알려 주시면, 당신은 다음과 같이 행동 하십시오. 당신이 정확하게 들은 것인지를 먼저 확인 하십시오. 잘못 기도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5.당신이 기도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확신이 들면, 당신이 알게 된 그 사실을 당사자 에게 말해야 되는지를 하나님께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6.당신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로 했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준비 시켜서 당신의 말을 그 사람이 잘 받아 들일 수 있도록 기도 하십시오.

7.많은 경우에 당신은 기도해 주는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 께서 그 분의 시간에, 그 분의 방법으로 당사자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기도해 주는 사람의 약점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변화의 필요를 직접 말씀 하실 때, 그 사람은 당황하지도 않고 거부 하지도 않으며 상처를 받지도 않게 됩니다.

8.지역 교회에 어떤 위험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경보를 울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염려하는 바를 나누십시오. 더 이상의 것은 그 사람의 손에 맡기십시오.

9.당신이 예사롭지 않은 기도를 하게 되더라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당신은 갑자기 전혀 만나 보지도 못한 남아메리카의 어떤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파수꾼들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들을 재난으로부터 벗어 나게 했습니다. 파수꾼의 기름 부음에 대한 좋은 예가 [눅22;31-32]절에 나놉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 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중보기도 응답의 형태

1.눈물의 기도:눈물은 액체기도이다.

2.웃음:[시편126;1]“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도다.”

중보 찬양

*“찬양 전투”라고도 부르며, 주님을 찬양함으로 사단의 역사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내가 존경하는 손태흥 목사님의 사모님은 기도 중에 영적 찬양을 하는 것을 들었다. 맑고 청아한 인간이 낼 수 없는 고음의 영의 찬양이 울려 나왔다.

[이사야 56;7]“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이는 내 집은 기도하는 만민의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기도”라고 번역된‘테필라’가 공식적인 예배 때 음악에 맞추어 노래로 부르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즉“내 집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되리라.”라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느헤미야8;10]“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사단은 중보자들이 그들이 기도하는 문제들에 대한 슬픔과 탄식을 통해서 무너뜨리기를 좋아한다.

찬양과 영적전쟁

[시편149편]“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어다. 이런 영광은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이교도의 열방에 보수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찬양이 왕들을 사슬로, 귀인들을 쇠고랑으로 결박하며 심판을 집행한다.

[삼상16;23]“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겔28;13]“...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루시퍼란 이름은‘기름 부음을 받은 그룹’이다.

루시퍼는 분명히 음악으로 섬기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중보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에게 대항할 때, 그의 능력이 무력화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단은 우리가 찬양하면서 [시편149편]의 말씀을 무기로 사용할 때, 그의 통치 체계가 묶이게 되고, 중보 찬양을 통해 자신이 쇠고랑을 차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찬양을 지극히 싫어한다.

[시22;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분은 우리의 찬양 가운데 들어 와 임재하심으로써 그 분의 능력이 적의 능력을 삼키게 되며, 그 분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사단은 그 분의 힘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찬양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어 오시게 되면, 빛이 어두움을 몰아 내게 된다.

[행16;25]“밤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중보 찬양은 그 자체가 보복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민감성을 증대시키는 역할도 한다.

[고후4;4]

중보 찬양은 강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을 계속 멀게 놓아 두는 것을 막는데 효과적인 무기이다. 경배는 중보적이며,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찬양”에 대한 히브리어의 표현

1]할랄;“우쭐”하는 흥분하는 찬양의 행위에서 나오는 엄청난 열정의 폭발.[할렐루야 라는 말은 할랄에서 유래하였음]

탈무드와 미드락에서는 이것이 악한 자를 던져 버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시117;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할지라.”

2.야다;감사함, 공공연하게 발표함, 손을 뻗침, 손을 들고 경배함.

[대하20;14-21](14)여호와의 신(神)이 회중(會衆)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臨)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子孫) 맛다냐의 현손(玄孫)이요 여이엘의 증손(曾孫)이요 브나야의 손자(孫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5)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居民)과 여호사밧 왕(王)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因)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戰爭)이 너희에게 속(贖)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贖)한 것이니라. (16)내일(來日) 너희는 마주 내려 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 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17)이 전쟁(戰爭)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行伍)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救援)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 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來日)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居民)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敬拜)하고, (19)그핫 자손(子孫)과 고라 자손(子孫)에게 속(贖)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甚)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讚頌)하니라. (20)이에 백성(百姓)들이 일찌기 일어 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居民)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信賴)하라. 그리하면 견고(堅固)히 서리라. 그 선지자(先知者)를 신뢰(信賴)하라. 그리하면 형통(亨通)하리라 하고, (21)백성(百姓)으로 더불어 의논(議論)하고 노래하는 자(者)를 택(擇)하여 거룩한 예복(禮服)을 입히고 군대(軍隊) 앞에서 행(行)하며 여호와를 찬양(讚頌)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感謝)하세. 그 자비(慈悲)하심이 영원(永遠)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3.바락;송축함, 머리 숙임, 무릎 꿇고 경배함.

[시103;1-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4.자마르;현악기를 연주함. 하나님께 음악을 드림. 찬양의 음악적 동사.

5.샤박;높고도 적절한 말로 좋게 말함, 큰 소리로 말하면서 소리치고 승리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함.

[시117;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할지라.”

6.테필라;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간구, 찬송

[사56;7]“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7.토오다;감사함, 감사함으로 손을 드는 것을 포함함, 찬양의 제사를 드림.

[시50;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찬양의 또 다른 무기

1-행진:

[여호수아1;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2-밟기;

[시편108;13]“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눅10;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시44;5]“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 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3-노래하기

[이사야;30;29-30]“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와 같이 노래할 것이며, 저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 가는 자는 같이 마음에 즐거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4-손뼉 치기

[시편47;1]“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 다.”

5-소리 치기

[예레미야50;15]“그 사면에서 소리 질러 외칠지어다. 그[바빌론]가 항복하였고,”

[역대하;13;15]“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시32]“...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여호수아6;16]“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6-웃음

웃음의 무기는 매우 강력하며, 중보의 현상에서도 필수적이다. 중보 찬양에서 웃음은 두 가지 용도가 있으니, 첫째는 개인적 보호와 감정적 건강이고, 둘째는 사단과 그의 힘에 대항하는 직접적 전투이다.

[1-개인적 보호와 감정적 건강]

웃음은 중보할 때 오는 중압감에 대한 중요한 안전장치이며, 그것은 전쟁 가운데 당신을 억압하거나 우울하게 하는 적의 능력을 파괴한다.

[잠15;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2-사단과 그의 힘에 대항하는 직접적인 전투]

전쟁 중의 웃음은 적을 모독한다.

[시37;12-13]“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7-기쁨

[시편149;2]“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스바냐 3;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중보 가운데 오는 기쁨은 웃음에서부터 강력한 감정을 거쳐 조용한 평안에 이르기 까지 전 영역을 다 포함한다.

중보 찬양의 실제적 적용

성령님께는 여러 형태의 분위기가 있으시고, 그 분 자신을 표현하시는 많은 방법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중보해야 할지에 대해 그 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듣는 민감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문화 안에서 일하시며, 종종 우리의 신앙체계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태의 중보도 억지로 하려고 시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마11;28-30]“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 너무 집착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 자신들의 인간적 감정으로 기도하게 된다.

[마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100;4]“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 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 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일 때에라도 무거운 마음으로 오기 때문에,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주님의 성문은 그 분의 전략이 개발되는 장소이다. 중보 모임을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 분의 뜻을 계시 받는 세계 안으로 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모임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예를 들면 바락의 시간이 되면 여러분은 조용히 주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며, 다른 때에는 손을 높이 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은 선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선포는 하나님의 속성, 즉 그 분의 이름 성품 및 본성을 소리 내어 외치는 것이다.

[사60;18]“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원하신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찬양하는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경제적 필요가 있을 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경배하면 우리의 상황 가운데 들어 오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중보의 용사들

*사단은 무소부재하지도 못하고,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이 나라를 상대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가?

사단은 모든 나라와 모든 사역에 대해 전략을 가지고 있으며, 적의 군대는 결코 쉬지 않는다.

1]. 사단에게 대항할 수 있는 주님의 5가지 핵심 사항

1-어떤 한 단체나 사역기관도 모든 나라를 전략화 할 수 있는 계시를 전부 갖고 있지는 않다.

2-전투 계획이 모두 알려지기 위해서는 그 분의 몸된 교회 전체가 함께 나아 가야 한다.

3-사역자들이 함께 나와서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전략에 충실할 때,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 대한 그 분의 계획을 계시하실 것이다.

4-사역자들 간의 모임은 각 사역단체 간의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는 함께 전쟁을 수행할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5-전략을 짜도록 요청 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요 사역 안에서 기도 조정자로서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2] 모임의 기본 임무

1-우리는 우리나라의 건국 때부터 저질러 온 죄악에 대하여 기도하여야 했다.

2-우리는 요한복음 20;23절의 말씀을 사용하여야 했다.“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이 죄악 중에는 편견, 물질 만능주의, 배금사상, 살인, 혹은 우상숭배 등과 같은 것들도 있다.

3-이 죄들을 모두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사단왕국의 어떤 지배자가 그 높은 자리에서 끌려 내려 와 지금까지 다스리던 그 통치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알려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괴하는 것이다.

4- 우리는 예레미야 1;10절의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 뜨리고,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심고 건설하기도 해야 한다. 그 다음 단계로 우리나라가 과거의 경건한 유산을 되살릴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자녀의 마음이 열조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도록 기도를 심어야 한다.

5-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여러 나라에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시고 적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차이점이나 교리 보다 더욱 높은 목적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이 모임에는 교리적 일체감 이상의 것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모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조국이 기도를 필요로 하고, 예수께서 온 나라의 주가 되셔야 한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합심기도

[마18;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아모스3;7]“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합심기도는 기도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합심”이란 뜻은“조화를 이루다, 소리를 합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여러 형태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거룩한 기도의 화음을 연출하시도록 지휘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단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우시거나, 권위를 세우시지 않으신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준다. 우리는 또한 어떤 사람이 혼자 짊어지고 있는 과중한 기도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질 수 있다.

*각자가 나 한 사람 만이 그 기도를 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기도하기를 원하며, 나 한 사람의 신실함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고 믿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도로 부르시는 사람들의 수를 결정하는 일

1.어떤 종류의 견고한 진을 다루는가?

이것이 한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한 무리의 많은 사람들에 대항하는 권세인가?

저항이 강할수록, 지역적 영의 수준이 높을수록, 견고한 진을 파괴하는 데는 그만큼 더 많은 수의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2.기도하는 사람이 성령 안에서 어떤 수준의 영적 권위를 갖고 있는가?

이것은 모든 기도자가 중요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또한 어떤 사람이 다름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하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단지 어떤 능숙한 기도 전사들은 기도 응답에 있어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그들이 무너진 데를 막아 서면 신속하게 돌파구를 뚫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분의 뜻을 따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에는 권위가 있어서 하나님의 대적들도 기도 모임에서 이런 권위가 울려 나오면 자기들이 곤란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의 수 외에 결정적인 요소

기도와 함께 행하는 금식은 기도의 효과를 적어도 몇 배는 증강 시켜 준다. 금식은 기도 만으로 영향을 미치기 힘든 부분들을 건드리게 된다.

어떻게 필요를 가지고 오는 다른 사람과 실질적으로 한 마음이 될 수 있는가?

1.요구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예를 들면 병든 친척을 위해 기도하면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도록 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은 단지 그 사람에게 평안을 주시도록 기도할지 모른다. 기도 요청을 해 오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주님께서 여기에 대해 어떻게 기도하도록 인도 하셨습니까?’

그들이 기도하는 방향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내 기도가 그들이 기도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으면 차라리 그들에게 알려 준다. 그러면 언젠가 내가 인도 받은 기도 방향을 이야기 해 줄 수 있게 된다. 만일 그 사람들이 내 접근 방향에 동의하면 즉시 그들과 기도한다.

3. 하나님께서 이 필요에 대해 성경 말씀을 주셨는가? 당신이 다른 사람과 여기에 관해 일치하는가?

4. 서로 일치하게 되었으면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기도할 수 있다.

<기도>“아버지. 저는 오늘 제 친구가 당신께 구한 것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당신께서‘너희 중에 누구든지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시리라.’고 선포하신 그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이제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저희들의 기도가 응답 받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께서 즉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며,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철하는 기도

관철하는 기도란 하나님으로부터 그 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지속성을 말한다.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

1- 성령님께서 더 이상 반복적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생각을 없애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촉구하셔서 그 사람이나 상황이 계속해서 생각 나게 하실 것입니다.

2-우리가 어떤 일에 대하여 기도 하고자 하지만,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전혀 없을 때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기도하는데 필요한 성령님으로부터의 기름 부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완결된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시작할 때입니다.

4-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일이 끝난 것을 알게 하시든지, 혹은 현실에서 그 일을 다루시는 것을 알게 하실 때입니다. 어떤 사람의 병이 나았다든지, 혹은 온전케 되었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멍에 꺽기

[창27;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마11;28-30]“...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고후 6;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랴?”

사단의 멍에에 의해 노예가 된 사람을 위한 효과적인 기도

1-금식.

[이사야 58;6]“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2-매는 것과 푸는 것, 죄의 권세, 율법주의, 이단 사설 등 그 사람의 삶에 들어 와 있는 악한 것들을 매는 기도를 하십시오.

사단이 그를 손아귀에 잡고 있지 못하게 제어하는 것입니다.

3-그 사람에게 복음의 영광의 빛을 가리우지 못하도록 사단에게 명하십시오.

[고후4;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간음이나 간통의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가 무너지도록 기도 하십시오.

푸는 기도를 통해 그 사람이 잘못된 관계에서 놓여날 수 있도록,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그를 놓으라고 기도로 명령 하십시오.

[에스겔13;18-28]

이 흥미 있는 구절에서, 여인들이 마술을 통해 남자들의 영혼을 사냥하러 다니는 것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여 어떤 사람이 삼손과 같이 완전히 속고 있다면, 그 사람의 멍에를 꺽는데 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5-찬양

“찬양”은 시편 149편에 있는 것과 같이 포로된 자를 자유케 놓아 줍니다.“찬양”은 왕들을 사슬로, 저희 귀인들을 철고랑으로 결박하는 것입니다.

6-기름 부음을 받으십시오.

멍에를 꺽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는 기름 부음 그 자체입니다. 성령께서 중보 가운데 우리를 통해 역사하셔서 사단의 멍에를 조각 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10;27]“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멍에를 꺽는 기도의 한 예

아버지.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적이 [000]에게 지운 멍에가 이제 부러지는 것으로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사단아. 너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죄에 참여하게 할 수 없다. 주님. 그 죄에 대하여 000의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림이 즉시 벗겨지고, 하나님 말씀의 영광이 빛과 진리가 드러 나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견고한 진을 무너뜨림

[고후10;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견고한 진”이란 사단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계획에 대항하여 그 자신 만을 추앙하도록 강화한 곳을 말한다.

*“견고한 진”이란 신자들이 그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더라도 도저히 변화될 가망이 없는 것으로 받아 들이게 된 고정관념이다.

견고한 진의 종류

1-지역적 견고한 진

어떤 국가나 사회, 심지어 어떤 가족들을 조종하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사단 자신으로부터 전략적으로 임무를 부여 받은 어둠의 세력의 위계 제도를 말한다.

어떤 사악한 세력이 각기 다른 지역에 특수한 종류의 악의 구조를 강화해 놓고 있다. 어떤 도시는 우상숭배, 어떤 곳은 관능적인 죄, 또 어떤 곳은 특수한 종교의 영이 그 지역의 견고한 진이 될 수 있다.

2-사상적 견고한 진

이 영역은 어떤 문화나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철학을 통해서 그 곳에 속한 사람들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적인 창조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자연도태] 같은 것을 말한다.

[고후10;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

3-개인적 견고한 진

이것은 사단이 당신의 개인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으로 개인적인 죄, 생각, 느낌, 또는 태도나 행동방식 등이다.

간구

*간구는 하나님께 제발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사도행전1;14]“[모인 무리가]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간구와 도고는 매우 관계가 깊으며, 간구는“하나님께서 당장 들어 주셔야만 하는 형태의 기도이며, 이 기도는 종종 생사의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게 된다.

매고 풀기

[마18;18-19]“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영적전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무기 중 두 가지는 매고 푸는 것, 혹은 금하는 것과 허락하는 것이다.

“매는 것”으로 적의 공격을 멈추게 할 수 있다.

“푸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떤 상황에 개입하도록 허락하거나 풀어 놓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 가운데서 드리는 요청을 통해 그 분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매기”에는 긍적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1>.부정적인“매기”:

우리가 기도하며 사단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도록 묶거나 잡아 맬 때,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다.

우리는 사단이 문제를 일으키고자 하는 어떠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중보자로서 우리는 상황을 알아 채기 시작하면서 기도의 자리로 가게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밧줄을 갖고 기도의 말을 탄 채 사단의 궤계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사단아.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묶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든지 내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내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이 모든 상황에서 당장 그만 둘지어다.”하며 선포한다.

2>.긍정적인“매기”:

[잠18;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긍정적인 매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서 적을 약화시켜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저항을 점점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긍정적인 매기의 예는 예수님 지신이 광야에서 사단과 싸울 때, 예수께서 적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할 때, 예수님을 유혹하려던 사단의 능력은 무너져 버렸다.

주님이 필요한 상황에 있으면서 반항하는 어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가 사용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직접 말씀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 안에 살기 시작하면서 악한 친구들의 말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과 싸우게 된다.

“푸는 기도”의 효과

*“기도를 통해 푼다”고 하는 것은 적의 손에 갇힌 자를 풀어 자유롭게 하는 중보의 한 형태이다.

포로의 상태에서 신체적 석방을 받게 할 수 있다.

사단에 의해 질병으로 묶여 있는 사람을 질병으로부터 놓여 나게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선포하거나 풀어 놓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을 변화시키시도록 풀어 놓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알려 드린 요구에 대해 당신께서 개입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사59;19]“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약4;2]“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매는 것”과“푸는 것”의 요약

1-“매는 것”으로, 적의 공격을 멈추게 할 수 있다.

2-“푸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떤 상황에 개입하도록 허락하거나 풀어 놓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 가운데서 드리는 요청을 통해 그 분의 목적을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중보의 현상들과 잘못된 중보

1] 중보의 현상들

*우리가 중보할 때 그 분이 자신을 나타 내시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의 감정을 통해서이다.

1-“노고”라는 말은 헬라어로‘오디노’라는 단어로, 출산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갈 4: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노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종종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신음으로, [롬8;26]절의 말씀과 같이 들릴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소리 내어 노고하고 신음하며 큰 소리로 킁킁거리는 것처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움직이셔서 노고하게 하시는 것은 수도 꼭지와 같이 쉽게 틀거나 잠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고”는 때때로 당신이 기도하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기도했던 영역에서 그들의 기도 결과로 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당신을 택하셔서 마지막 기도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당신이 그 응답을 출산하는 사람이다.

중보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런 방법으로 사용하시도록 주님께 내어 드리지 않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자주 노고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을 그분의 목적을 위해 어느 시점에서 노고하도록 부르기도 하신다.

“노고”는 짧기도 하고, 오랫 동안 연장되기도 한다. 어떤 기도는 속히 이루어지지만, 어떤 것은 마치 출산 고통과도 같이 응답이 올 때까지 여러 번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사 53:11]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수고”도“노고”와 같은 말이다.

*예수님께서“노고”하셨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가운데 기도하시면서 땀이 변하여 핏방울이 될 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노고”가 너무 강해서 중보자를 삼켜 버릴 것 같은 때가 있다. 이런 때에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위하여 중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짐을 함께 나누며, 서로 도와야 한다.

“노고”는 출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고, 노고하는 사람을 도울 때는 마치 산파가 출산을 돕는 것이 하며, 우리는 또한 노고 가운데 끼어 들려는 적을 묶어 버림으로써 그것을 잘 지켜 주어야 한다.

*주의할 점

“노고”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함부로 좌우 되어서는 안된다. 중보자는 절제의 결실을 맺는 가운데 행해야 한다.

울음:우리가 중보 가운데서 울 때, 하나님께서 변화 시키고 온전케 하기를 원하시는 곳에 생명이 들어 오게 된다.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웃음:기도 가운데 웃음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을 의미하거나, 응답이 오고 있는 경우, 혹은 적의 계획이 좌절되었다는 표시이다.

[시 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웃음은 우리가 사단의 책략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주님의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적이다. 이런 종류의 중보를 통한 전투는 적에게 누가 우리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지 알게 해 주며, 이것은 우리가 그를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증거이다.

[시 37: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시 37:13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시 59:7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시 59:8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시 126: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웃으시게 해 드리면, 그 분은 마치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과 똑 같이 우리를 통하여 웃으신다.

느 8: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중보기도

중보기도는 궁극적으로는 믿음의 사역이다. 그 믿음은 들으실 만한 기도 만을 드리는 믿음이 아니라, 하늘의 실재들 가운데 역사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자신의 무익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곤란함을 겪지 않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소망을 감정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두는 믿음이다. 그것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며, 영적이고 천상적이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보이는 것을 완전히 값없이 희생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그 기도가 상달되었으며, 그래서 구한 것을 받을 줄로 아는 믿음이며, 응답이 올 때까지 간구 가운데 고요하고 주의 깊게 참아 목적을 이루는 믿음이다. 참된 중보 기도자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도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의 소원을 되풀이 하는데 소모하지 말고, 겸비하고 고요하고 확신 있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 그 분과의 완전한 연합, 그 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 감을 주장하라.

우리의 생명과 법이자 유일한 신뢰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 오는 자는 반드시 중보기도의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참된 중보 기도자는 자신의 마음과 삶이 온전히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에 드려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주님, 목이 마릅니다."

2차대전이 계속 되는 동안 나는 관례를 깨고 중국의 한 작은 마을에 있었다. 나와 동료 선교사는 다른 서구인들을 거의 볼 수 없었으며, 소화물이 배달될 수 없어서 책과 기독교 정기 간행물의 공급이 중단된 상태에서 갈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르치고, 설교하고 하는 선교사 생활의 반복이 나를 고갈시켰던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실의에 빠져 방으로 갔다.

"주님!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목이 마릅니다. 이렇게 나아 왔사오니..."

나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 할 말을 모두 다 했으나, 계속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어야만 함을 느꼈다. 그래서 내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키고자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나는 편지를 보낼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꺼내 들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약 30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 명단을 집어 넣고, 일어나 일상적인 일들을 계속했다. 아무런 특별한 변화도 없었고, 환희도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 남짓 지나자 나는 더 이상 갈급한 느낌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느끼지 못하는 새에 생수가 솟아 났던 것이다. 갈증은 사라지고, 나는 다시 잔잔한 기쁨을 지니고 맡겨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이후에도 수 없이 반복됐던 그런 경험을 결코 잊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의 시간은 때로 이런 "김 빠진" 느낌에 대한 치료제가 되는 것이다. -기도의 오솔길, 데이빗 헤인즈-

중보기도의 축복

크리스챤이 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행복과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를 위한 기도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세상은 크리스챤의 중보기도 없이 한 시도 살아남지 못한다.

"이 땅을 위하여...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하는 대도자를 찾지 못한 고로 하나님이 진노의 불로 멸한다"고 하셨는데(겔 22:30-31), 나라를 위하여, 국가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딤전 2:1-2, 삼상 12:23)

(겔22:30)이 땅을 위(爲)하여 성(城)을 쌓으며, 성(城)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滅)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31)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震怒)의 불로 멸(滅)하여 그 행위(行爲)대로 그 머리에 보응(報應)하였느니라. 나 주(主) 여호와의 말이니라.

(딤전2: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勸)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爲)하여 간구(懇求)와 기도(祈禱)와 도고와 감사(感謝)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地位)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爲)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敬虔)과 단정(端正)한 중(中)에 고요하고 평안(平安)한 생활(生活)을 하려 함이니라.

(삼상12:23)나는 너희를 위(爲)하여 기도(祈禱)하기를 쉬는 죄(罪)를 여호와 앞에 결단(決斷)코 범(犯)치 아니하고, 선(善)하고 의(義)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중보기도의 가치를 항상 재평가해야겠다. 기도 이상으로 생산적이고 역동적이며 현실적인 작업이 어디 있겠는가?

소돔성의 구원과 멸망이 아브라함의 기도에 달려 있었고, 모세와 엘리야의 기도 속에 민족의 생사가 좌우되었던 것을 기억하자.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숨겨진 역사의 모든 뚜껑이 열리고, 모든 과장과 왜곡과 가짜의 베일이 벗겨졌을 때, 기도한 것들 만이 가을 나목에 매달린 풍성한 열매처럼 알찰 것이다.

중보기도의 힘

어느 목사님은 1988년도 여수 총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오다가 진주 고속도로에서 차가 수십미터 언덕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죽는 줄 알았다.

함께 타고 있었던 10명의 목사님들 다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안 죽고 살아 났다. 경찰도 놀라고, 병원에서도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10명의 목사님 중에 정목사님의 어머니가 사고 나던 날 저녁 식사 도중에 아들 목사에 대한 불안한 생각이 들면서 기도하라, 기도하라는 소리에 식사하다 말고 교회로 달려 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시간이 목사들이 사고 나던 시간과 일치하였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10명의 목사님을 살려 주신 것이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십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선생님을 만나셨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친구, 기도하는 목사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힘이 없을 때, 서로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보기도가 없을 때

영적 무지가 중보기도를 제한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D. L. 무디 목사도 한 때 영적으로 무지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여자 성도 두 명이 그에게 찾아 왔다.

"저희는 목사님께 성령님의 능력이 더 충만히 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여자 성도들의 말이 끝나자, 무디 목사는 여인들에게 화를 벌컥 내면서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하십시오." 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도하는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디 목사는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 설교가 짐 베이커 목사와 지미 스웨것 목사는 한 때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지미 스웨것 목사에게는 버틴이라는 선교사 친구가 있었다.

스웨것 목사가 그 사건으로 비난을 받을 때 버틴 선교사는 "지미 스웨것 목사가 저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다. 내가 중보해 주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 그 자리는 혼자 기도로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회개했다.

그리고 스웨것 목사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자, "자네보다 더 큰 죄인은 바로 나야, 기도하지 않은 내가 죄인일세." 라고 고백했다. <중보기도 / 피터 와그너>

중보기도의 효과

영국의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 죤 뉴톤은 50세 때 까지 노예선장으로서 악한 일만 해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꾸준한 기도와 그 아내 메리의 30년 간의 단장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대서양의 태풍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는다.

그 후 그는 시인 쿠퍼와 만나서 찬송시 348편을 쓰게 된다. 그 중 281편이 뉴톤이 쓴 시다. 우리가 잘 아는 405장이 그 대표적 찬송이다.

1.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도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그는 80세에도 하루 3번씩 설교를 하고, 그의 비문에는 죄인을 용서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시로 그의 에필로그를 장식했다.

어머니와 아내의 기도, 그리고 온 교회의 기도는 당신을 변화 시킬 것이며, 당신의 삶을 소명으로 부를 것이며, 나아 가 이 사회와 악한 세상을 변화 시킬 것이다.

중보기도 하자. 눈물로, 가슴으로 중보기도 하자.

말씀 묵상의 원리와 실제

시편119:140-154절

(140)주(主)의 말씀이 심(甚)히 정미(情美)하므로, 주(主)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41)내가 미천(微賤)하여 멸시(蔑視)를 당(當)하나, 주(主)의 법도(法度)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주(主)의 의(義)는 영원(永遠)한 의(義)요, 주(主)의 법(法)은 진리(眞理)로소이다.

(143)환난(患難)과 우환(憂患)이 내게 미쳤으나, 주(主)의 계명(誡命)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44)주(主)의 증거(證據)는 영원(永遠)히 의(義)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145)여호와여! 내가 전심(全心)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應答)하소서.

내가 주(主)의 율례(律例)를 지키리이다.

(146)내가 주(主)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救援)하소서. 내가 주(主)의 증거(證據)를 지키리이다.

(147)내가 새벽 전(前)에 부르짖으며, 주(主)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148)주(主)의 말씀을 묵상(默想)하려고, 내 눈이 야경(夜更)이 깊기 전(前)에 깨었나이다.

(149)주(主)의 인자(仁慈)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主)의 규례(規例)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150)악(惡)을 좇는 자(者)가 가까이 왔사오니, 저희는 주(主)의 법(法)에서 머니이다.

(151)여호와여! 주(主)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主)의 모든 계명(誡命)은 진리(眞理)니이다.

(152)내가 전(前)부터 주(主)의 증거(證據)를 궁구(窮究)하므로, 주(主)께서 영원(永遠)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153)나의 고난(苦難)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主)의 법(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154)주(主)는 나의 원한(怨恨)을 펴시고, 나를 구속(救贖)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蘇醒)케 하소서.

2013년 새해에는 온 성도들이 그 무엇보다도 말씀 묵상에 깊이 들어 가기를 바라며, 성경을 많이 많이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개인적인 Q.T.생활이 정착되기를 바란다.

수년 전 영적전쟁과 몸부림이 한창일 때에, 자주 성령님이 주시는 영감의 꿈들을 꾸었었다.

“최근에 밤에 자다가, 꿈을 통하여 수 차례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

오늘 새벽도 핸드폰의 벨소리가 두 번이나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 나야 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금식으로 허약해졌다는 말은 핑계이고, 전적으로 이것은 정신력의 문제이다. 몸을 뜨겁게 구우려고 방바닥에서 자는데, 처음에는 몸이 풀리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몸을 더욱 더 늘어지게 만든다.

성령님이 주시는 꿈은 내가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데, 준비가 전혀 안되어 허둥 지둥 하는 꿈이다. 예배 인도 시간이 촉박한데,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당혹스럽고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로 형언치 못한다. 옷 차림이 엉망이라거나,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거나, 세수를 전혀 하지 않았다거나, 성구가 도무지 생각 나지 않는다거나, 예배를 인도해야 할 장소, 마이크, 시설 등이 전혀 예비 되어 있지 않다거나, 시간에 맞추어 예배 장소에 가지 못한다거나 하는 경우이다.

꿈을 통해 보여 주시는 성령님의 말씀은 아직도 나는 예배 인도자로서의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목사인 것이다. 아아! 언제나 준비가 될까?”

성도는 존귀한 자니, 축복하라.

모두 일어 서서, 통성 기도하라.

도대체 나는 무엇이 준비가 안된 채 예배를 인도하는 것일까?

1.예배 준비가 실제로 안된 것이다.

예배 순서 하나 하나를 위해 세밀한 준비가 철저해야 하는데, 늘 하고, 잘 하고, 아는 것이니, 대충 대충 하는 엉터리가 많은 것이다.

2.삶과 목회 전반 범사에 충분한 기도 준비가 안된 것이다. 정말 많은 기도, 깊은 기도로 준비해야 하는데...

3.전심을 쏟지 않은 것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아니다.

4.설교 말씀에 충분한 기도를 불어 넣지 않는 것이다.

설교는 충분히 기도하고, 바로 그 기도의 영력, 성령 충만으로 설교하는 것인데...

1.말씀이 무엇인가?

2.말씀은 위대한 창조성, 변화성, 이적성, 능력이 있다.

3.말씀은 살아 있다. 마음 정서 가장 깊은 곳을 만지신다.

4.말씀 묵상과 기도의 삶은 우리 삶의 양대 산맥이다.

5.말씀 묵상 없이는 말씀이 열리지 않는다. 말씀이 열리지 않으면 길을 인도함 받을 수 없다.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강사 자신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받는데, 비슷하게 은혜 받는 담임목사님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담임목사님은 말씀을 받지 않으며, 왠지 바쁘다. 그럴 때에는 마음이 아프다.

너는 말씀의 동역자가 있느냐?

6.깨달은 말씀 만큼, 영성의 깊이로 살아 간다. 그에게만 늘 말씀이 삶을 인도하신다.

7.네 속에 말씀이 살아 있느냐?

제 1은 기도의 삶, 하루 3시간 이상, 제 2는 말씀 묵상의 삶, 하루 2시간 이상이 목사에게는 꼭 있어야 한다. 거의 하루 종일 목사는 주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한다. 목사는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교회와 예배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졌다.

교회와 예배는 얼마나 소중한가?

목사가 먼저 깨닫고, 사람 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또한 말씀 묵상과 기도의 삶에 대한 탁월한 깨달음을 갖는다. 이 개인적인 은혜의 삶이 없으면, 그의 경건은 헛 것이다. 그는 영적인 힘이 없다.

성령님!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매일 밤 365성령집회!

오늘 밤도 가슴 설레는 말씀의 기적의 밤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이여! 말씀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배 전에 방언으로 간절히 기도하라. 그러면 바로 성령의 임재를 느낄 것이다. 기름 부으심이 임하고, 가슴이 충만해지고, 터져 나갈 것 같다. 이 은혜가 온 성도에게 번져 갈 때에 하나님의 성령의 폭탄이 터질 것이다.

주여!

“말씀 묵상”에 대하여, 제 생애에 가장 탁월한 설교를 하게 하옵소서.

저와 성도들이 말씀을 들으며, 정말 말씀과의 깊은 만남으로 들어 가게 하옵소서. 지겨워 하지 말고, 정말 깊은 깨달음을 가져라.

성령님이여!

기름 부어 주옵소서. 기름 부어 주시고, 하늘 문을 여시고, 역사 하옵소서.

주의 종이 성령에 취하여, 미친 듯이 설교하게 하옵소서.

행복하고, 평탄하고, 형통하고, 복 있는 삶을 바라고, 꿈꾸는가?

그 비결이 여기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 묵상의 삶이다. 목사는 매일 기도 동행 3시간, 말씀 동행 2시간 이상은 되어져야 한다. 일반 성도는 1시간 이상은 필히 되어져야 한다.

수1:8절-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시편1:1-2절-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만 순종하며 산다면, 당신 속에는 일체의 어두움, 공허, 상실감, 염려, 근심, 걱정, 아픔, 고통, 욕구 불만...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나날이 넘치는 천국의 감격 속에 살 것이다. 이 세상에 다시 없는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이 가열찬 삶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지 않은가?

말씀 밖에서 말씀을 보지 말고, 말씀 속으로 들어 가라. 말씀 속에 녹아져라. 온전히 말씀 앞에 복종하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요, 예수님이요, 성령님이시다. 이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으며, 인생을 변화 시켰으며, 축복과 행복의 원천이시다.

바야흐로 한국교회에 Q.T.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날 12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교회는 배 고픔과 가난과 전쟁, 역사적 불행 속에서 외형적인 성장과 기복주의, 치병주의, 경쟁주의를 지향했다.

그러나 정작 내적인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에서 오는 내적 성숙과 충만함, 깊이를 채우지 못했다. 내적인 상처를 그대로 간직한 채, 내면의 공허와 상실을 해결함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채우려 하는, 그리하여 오히려 더욱 더 정욕적인, 참다운 신앙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해 왔다.

자기의 이기적, 정욕적,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빗나 간 신앙생활은 잘못된 것이다. 진정한 바른 영적인 삶이 부족했다. 이 땅의 1,000만 명의 크리스챤에게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보지를 못했다.

하나님 말씀이 임하기 전의 우리 심령의 상태는 혼돈하다.“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중에 있고...”했는데, 그야말로 내면이 무질서 하다. 짜증스럽다. 속에 뭔가가 있다. 돌이 있다. 상처가 있다.

그러나 그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 말씀이 살아 다가 와 깨달아지고, 은혜를 받고, 모든 것이 질서가 잡힌다. 무너진 삶의 질서가 잡힌다. 공허했던 세계가 충만해진다. 생명과 복이 충만해지고, 하나님과의 참다운 관계가 형성 되어지고, 삶과 심령에 내적 변화가 창조된다.

창조의 능력이 말씀 속에 있다. 그렇게 교회에 헌신하고, 충성해도 진정한 내적인 충만함, 내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던 과거의 신앙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정으로 변해져 가고, 충만해져 가는 내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기 마음 속에 하나님이 생생히 살아 계심을 본인이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양이 없다. 고대 근동의 종교는 형상화의 우상 숭배 문화였다. 태양 신의 애굽, 달신의 바벨론은 형상 문화이다. 이들 신들은 다 피조물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신인 하나님은 형상이 없다. 하나님은 당신을 형상화 하지 않으셨다. 말씀만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매일 매일 늘 바뀐다. 말씀이 임할 때마다 바뀐다. 혼돈에서 질서로, 공허에서 충만함으로...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행동이 바람 같다. 일정함이 없고, 오직 성령이 행하시는 대로 움직인다.

현대의 사람들은 내적 공허함으로 인해, 가만히 있으면 견디지를 못한다. 내면 세계에 재미가 없어 무료하고, 공허하고, 그래서 분주하고, 자존감이 없고, 쇼핑하고, 영화 보고, 머리 물들이고... 도무지 갈 바를 모른다. 향방이 없다. 어두움이 있고, 그늘이 있다. 하도 내면에 공허하다 보니,“심심해서 죽겠다.”라고 말한다. 몸부림을 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정말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하며, 어둠이 있고, 공허가 넘치게 된다. 그러나 그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늘 충만하다. 질서가 있다. 사명이 있고, 안정감이 있고, 평안과 목표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맞게 매일 매일 공급하신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말씀하시지 않는다. 3일째의 말씀을, 첫째 날에 말씀하시지 않는다. 우리 인생은 하루 하루 간다. 30대의 할 일이 있고, 50대에 할 일이 있다. 어릴 때 받는 은혜와 깨달음이 있고, 성숙하여 받는 은혜와 깨달음이 다르다. 성령님과 늘 동행하면 하루 하루가 다르다. 날로 깊어진다. 새로워진다.

아기에게 과일 깎으라고, 果刀(과도)를 주지 않는다. 중요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우리의 수준에 맞게 말씀하신다. 단계 별로, 영적인 성숙도에 따라서 말씀하신다. 막 믿기 시작한 초신자에게 대뜸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명령하지 않으신다. Q.T.하면 내 수준 만큼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 배목사는 철학을 좋아하나, 자기 아기에게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심으로, 우리 체질과 건강에 맞게 말씀하신다.

내게 주시는 은혜가 따로 있다. 나의 수준이 있다. 하나님은 내 수준에 딱 맞게 말씀하신다. 나를 나보다 가장 잘 아심으로 아버지로, 신랑으로, 목자로, 선생으로, 치유자로, 도우시는 보혜사로 말씀하신다. 그 분은 나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시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절)

이는 마리아의 말이다. <Q.T. 나눔방>의 책임자들은 얼굴이 다르다. Q.T.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므로 내면의 질서가 잡혀, 그 얼굴에도 나타 난다.

내면의 진정한 변화 없이 표정 관리 아무리 해 봐도 소용 없다. 다 폭로된다. 내면에 있는 것이 우러 나오기 때문이다.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영혼은 말할 때, 웃을 때 기쁨과 행복, 생명, 은혜가 우러 나온다. 속에 생명이 없으면 웃어도 쓴 웃음이다. 비난만 나온다. 냉소만 나온다. 부정주의만 나온다.

마리아는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첫 문을 연 여인이다. 말씀을 듣기 이전에 마리아는 아무 것도 아닌 여인이었다.“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하신 말씀대로 그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받아 들이는 자는 그 인생에 일대 소용돌이가 일어 난다.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 난다. 내 뜻대로 살지 못한다. 말씀을 받고, 잉태한 그리스도의 삶이 내 속에서 일어 난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내 속에서 일어 난다. 마리아가 말씀을 받아 들였을 때에 그 길은 현실적으로 위험하고, 가문이 무너지고, 패가 망신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그 길은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이었다.

은혜의 손길이 임하면 목숨을 걸고라도 감행해야 하는 모험의 역사가 벌어진다. 여기에는 죽음에의 각오, 모든 것에 대한 상실에의 각오, 온갖 상실과 모험에의 각오가 동반되어 진다. 현실에 갇혀 머뭇거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 내 생각과 주장에 얽매여 있으면, 그 말씀은 내 가슴에 잉태될 수 없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그것은 곧 사회적 매장, 추방, 사형 대상자의 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마리아는 더 이상 나사렛의 별 볼 일 없는 시골 여인이 아니었다. 말씀을 받은 그 순간, 그녀는 온 인류의 어머니로 부름 받고 있었다. 그 아기는 최고의 아기 예수였다. 말씀을 받는 순간, 최고의 역사가 일어 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면 인생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하나님의 영광, 권세, 능력이 그 삶에 간단 없이 나타 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옥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내 마음이 오직 옥토여야 한다.

“내게 말씀한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이 절대적 순종 앞에, 그녀 속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잉태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우리 속에 역사하기 때문에... 태초에 일어 난 천지창조의 역사가 바로 내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적이 일어 나는 것이다. 말씀을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말씀이 없는 사람은 다 자기 주장, 자기 고집, 자기 경험, 자기 이론, 자기 철학, 자기 중심을 따라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사람은 겸손하다. 자기가 없다. 그에게는 예수님 만이 나타 난다. 은혜가 있는 영광이 나타 난다. 진리의 영광이 임한다. 빛과 소금의 삶이 임한다. 예수님도 자기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하신다고 했다.

비천한 여인 마리아가 만세에 복 있는 여인이 되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창조적 능력 때문이었다. 내가 말씀을 받으면, 내 속에서 새로운 창조적 능력이 일어 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처럼 된다. 에덴의 삶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원래 우리가 회복하려던 삶이다.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았다. 권세와 능력의 삶을 살았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뱀의 소리를 들었다. 자의식으로 행하기 시작했다. Q.T.는 뱀의 소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가는 오솔길의 여행이다.

대학에서 들려 오는 지성의 소리, 과학의 소리, 박사 학위의 소리, 세상의 갖가지 말들은 사실 다 거짓말 들이다. 진리가 아니다. 이 소리들은 사람을 영악하게 만들고, 사악하게 만든다. 이기적이고, 현실적이고, 비영적으로 만든다. 창조의 원래 음성, 하나님의 원음을 들어야 영혼이 살고, 영혼이 회복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지식은 다 거짓이다. 하나님은 지식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만이 우리 생명을 살린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은 마음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 마음 깊은 곳에 심겨진다. 깨달음으로, 은혜로, 진리로... 그래서 변화된다. 생명과 복, 권세가 창조된다.

다윗을 선택하실 때 하나님은,“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하셨다.

외모는 인간적인 노력과 수고로 꾸밀 수가 있다. 그러나 마음 중심은 차원이 다르다. 이것이 진짜 내 모습이다. 이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깨달은 자 만이 바꿀 수 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은 그 마음 중심이다. 하나님은 교회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 위인들을 세우실 때에는 반드시 그 중심을 보시고, 세우신다.

30대는 화장, 40대는 변장, 50대는 무장, 60대는 포장이란다. 외모만 보는 이유는 사람은 외모 밖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외모가 사람을 미혹한다. 다리가 길다, 짧다, 키가 크다, 작다, 예쁘다, 못 생겼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윗의 가장 깊은 중심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신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우리 사람이 보는 관점과는 전혀 다르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자는 왕 같은 존재이다. 우리 마음 중심이 하나님의 뜻을 듣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카르디아”는 마음인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 중심 밭에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성에 뿌리는 것이 아니다. 지성에 뿌리면 성경공부는 되지만, 삶의 변화는 가져 오지 못한다. 말씀의 씨는 혼에 뿌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는 절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분주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다.

마음 중심에 씨앗인 말씀이 뿌려질 때 그 중심이 변화되고, 깨달음이 온다. 오늘날의 현대 문명은 우리를 분주하게 하고, 중심이 아닌 겉치장을 하게 하고, 재미와 향락, 허영을 추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그 마음에 뿌려지지를 못한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돌이 있다. 그래서 말씀이 뿌려져도 뿌리를 박지 못한다. 내적 상처, 열등감, 낮은 자존감 등이 마음 깊은 곳에 있어, 말씀이 뿌리 내리지를 못한다.

어떤 이는 즐겁게 들으나, 그 때 뿐이다. 돌밭이다.

가시덤불이 있다. 말씀을 들어도 어려움과 환란이 오면, 그만 포기한다. 말씀을 들어도 결실을 하지 못한다.

길가 땅은 짓밟힌 마음이다.“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해도 픽 냉소하고 만다.“씨도 안 먹힌다.”말씀이 튀어 나간다.

그러므로 옥토가 되어야 한다. 옥토가 아니면 헛 일이다. 이것이 마13장의“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마태복음은 5개의 모세 오경적 교차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 예수님의 탄생 임마누엘과 부활 임마누엘이 대칭된다. 성경 구절들도 각각 상호 대칭된다. 모든 것이 교차대칭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마13장의 천국 비유가 그 중심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인가?

씨 뿌리는 비유가 중심이다. 마음 밭이 옥토가 된 사람 만이 씨가 뿌려져 바로 자란다.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한다.

오늘날 성도들은 말씀을 그 가슴 깊은 곳에 심지 않는다.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말씀을 골수 깊이, 관절 깊이 받아 들여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영은 살리고, 혼은 고치고, 육은 회복 시키신다.

길가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말씀이 튕겨 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에 문둥병이 나은 경우,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이 옥토였다. 믿음대로 되는 것이다. 인생이 뒤집어진다.

어떻게 말씀을 듣느냐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 깊은 곳, 골수까지 찔러 쪼개게 하는 방법이 바로 Q.T.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날마다 경험하는,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방식이 Q.T.이다. 요즈음 우리 새벽기도회에 시도하는 방법이 초보적인 Q.T.의 원형이다.

천국 비유는 다윗의 왕권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천국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내 속에 천지 창조의 역사가 일어 난다.

Q.T.를 가볍게 시작하지 말고, 가볍게 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게 있게 여기고,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내 속에 세계 창조가 일어 나는 사건이다.

Q.T.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Q.T. 외에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길이 있는가?

Q.T.가 되지 않는 심령 들에게 설교는 건성으로 들릴 뿐이다. 목사의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깊이 있게 할 수가 없다.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Q.T.를 하고, 설교를 들으면 하나님의 들리지 않는 깊은 음성이 들려 온다. 목사가 원리적으로 말씀하고 넘어 가는 부분에도, 내 영혼은 스스로 더 깊은 말씀을 창조적으로 듣는다.

친구 목사가 나의 설교를 들으며, 영감을 받아 3편의 설교를 준비했단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아닌, 다른 씨앗이 심겨지니 문제이다. 곧 사람의 말이다. 첫째는 나의 말이요,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의 말이다. 이 잡다한 말들이 우리 뇌리 속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사람의 말에 영향력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나의 말, 사람의 말이 나를 움직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사람의 말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 갈 때, 인간은 비로소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사람의 말은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권세 있는 말씀이 사람의 말이다. 부모의 말, 선생의 말, 선배의 말이다. 전문가의 말이다. 좋은 말은 우리를 좋게 만든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자의 나쁜 말은 우리 인생을 망쳐 버린다. 부모의 부정적인 말은 자녀를 망쳐 버린다.

우리는 이렇게 신뢰, 존경, 사랑,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열등감, 박탈감, 낮은 자존감으로 전락하도록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말들을 주입 당했다. 우리의 자존감은 이미 패배적인 자존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 선지자, 백성이라 말씀하신다.

“너는 쓸모가 없어!”

이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듣고, 또 들은 말이다. 우리의 뇌리에 부정적으로 세뇌된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생전 칭찬 없는 부모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그 독소를 간직한 채 살아 왔는가?

여러분이 항상 무의식 중에 묵상하는 말들이, 의식들이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해악적인 말들과 의식들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살아 왔는가?

이제 긍정적, 적극적 말씀으로 새창조를 이룩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돌아 서라. 독생자 예수님의 지극히 긍정적, 적극적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그 갈급함을 채우지 못함으로, 살지 못한다.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고 몸부림 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리 속에 에덴이 이루어 지려면 골3:16절 말씀처럼,“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해야...”한다.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나를 살린다. 생명을 끼치고, 은혜를 끼치고... 그러나 반대로, 만나면 나를 죽이는 사람이 있다. 염려할 것을 주입하고, 믿음을 깨버리고, 우울함을 심고... 그는 나에게 염려를 체계적으로 주입시킨다. 세상을 주입시킨다. 두려움을 심는다. 믿음을 허물어 뜨린다. 이는 뱀의 소리이다. 이 뱀의 소리는 에덴을 다 잃어 버리게 한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음성을 듣느냐가 내 인생을 결정해 버린다. 다른 사람을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야 할 사명이 우리 속에 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면 3-4배를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풍성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전에 먼저 말씀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듣는다. 그 분이 씨를 뿌리면 우리는 열매를 키운다. 우리 마음 밭에 하나님의 씨앗이 임해야, 창세 전에 나를 향해 가지셨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대한 창조의 역사는 외부에서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창조되어져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창조는 내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동력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여, 만드는 것은 권세의 원천이 된다.

1.Q.T.란 무엇인가?

1>.QT란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매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이며, 광야와 같은 골방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출애굽이다.

세속적인 세계를 떠나는 것이다. 한적한 곳은 광야이다. 골방에 들어 가 문을 잠그고, 핸드폰을 끌 때, 그는 광야에 들어 가는 것이다.

2>.성경 말씀을 통하여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하나님의 임재,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듣는 것이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새겨져 있어야 내가 변하고, 생각하고, 움직이게 된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나는 다른 것을 따라 살게 된다.

너의 중심 가장 깊은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가? 그 곳에 성경 전체가 들어 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당신은 이제 비로소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자! 당신의 삶을 보라. 당신은 무엇을 따라 사는가? 그것이 당신의 가장 깊은 그 곳에 새겨져 있는 내용이다.

3>.말씀을 따라 묵상하라. 너의 생각을 따라 명상하지 말라.

선지서의 시작인 여호수아서 서두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묵상”을 명령하신다.“하가(묵상)”란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모세의 율법 책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것이다.

수1:8절-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모세 오경의 핵심이 십계명으로 돌판 안에 들어 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내 마음 판에 새겨 두어야 한다. 그리해야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이끌어 가신다. 매일 아침 몇 구절을 묵상하나, 사실은 성경 전체가 늘 내 가장 깊은 곳 마음에 들어 와 있어야 함으로, 매일 매일의 QT로 그 훈련을 지속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처럼 말씀 전체를 묵상하며 살면, 그는 여호수아처럼 된다. 그는 모든 이에게 샬롬을 주고, 안식을 주고, 해방을 주는 사람이 된다. 승리자가 된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하는 자가 된다. 엄청난 존재로 변하게 된다.

12제자가 바로 그런 사람들로 변한 것이다. 주님은 모든 성경을 자세히 풀어 제자들에게 다 가르치신 것이다. 12제자는 성경 전체를 마음 판에 새긴 사람들이다. 베드로가 성경 전체를 맥을 꿰뚫어 전할 때에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 왔다.

현대인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유약함으로 실용적으로 짧은 시간을 묵상할 수 밖에 없으나, 중요한 것은 성경 전체를 늘 마음 판에 새겨 두는 일이다. 성경 전체의 줄기와 맥이 내 속에 살아 있을 때, 묵상은 통전적으로 더욱 더 깊어지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우리 마음 판에 다 새길 수 있다. 우리의 기억력, 뇌세포는 무한정이다. 성경을 다 외울 수 있고, 전체를 꿰뚫을 능력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뇌를 1-2%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 악하다. 게으르다.

주님이 훗날 우리 뇌를 검색해 보시면 90% 이상은 텅 비어 있고, 그 나마 조금 입력된 부분은 온통 세상 쓰레기일 것이다. 얼마나 통탄하실까?

성문서의 시작 책인 시편 1편에서도 역시“묵상”을 말씀하신다. 시편1:1-2절-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묵상”하는 자로다.

“묵상”은 성경을 내 마음 가장 깊은 심층에 받아 들이는 유일한 비결이다. 하나님의 심장에 있던 그 말씀이, 묵상을 통하여 바로 내 심장에 새겨지는 것이다.

묵상하는 일에는 비밀이 있다. 성경은 묵상으로만 열린다. 오늘날 사람들은 깊이 묵상하지 않고, 정보를 취합하는 데만 정신이 없다. 그러니 영혼을 울리는 깊이가 없다. 목사들의 설교는 이 글, 저 글의 잡탕이다. 오직 묵상 이것 만이 우리 시대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묵상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풍성한 묵상의 삶 속에서 영적 거인으로 살아 가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그의 설교는 생수이며, 심금을 울리고, 나의 영혼을 뒤흔든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야 한다. 성경은 전체가 꿰뚫려 줄기와 맥이 잡혀 있어야 더욱 더 깊이 이해된다. 이 줄기와 맥을 알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 어마 어마한 세계가 열린다.

Q.T.를 신실히 하면, 성숙할 수가 있다. 성경 전체가 내 속에 들어 오게 된다.

4>.삶에 적용하라.

묵상한 그대로 살라. 묵상에서 주님 앞에 깨달은 그대로 실천하라. 매일 매일 계속해 나가라. 오늘 실패해도 내일 또 묵상하고, 또 시도하라. 어느 날부터 당신은 묵상한 말씀대로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5>.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루고자 하는 경건 훈련이다.

우리 시대는 무한경쟁의 시대이다. 정보의 취합 능력이 최고로 인정 받는 시대이다. 가만히 있으면 괜히 불안해서 남들처럼 분주해 지려 한다. 그냥 있으면 낙오자가 된 것 같다.

우리 시대는 그림자 같은 일시적 영광,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이 아우성 치고, 분주하고, 동요하고, 뛰어 다닌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며,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하신 말씀 그대로이다.

우리 시대의 삶의 분위기는 너무나 요란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의 소리이다. 아무리 멋진 계획도 허무한 것이다. 사람의 일은 단 하루 앞도 내다 보지 못한다. 아무리 멋진 계획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를 참으로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은 창조주이신 그 분 밖에는 없으며,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듣는 수 밖에는 없다. 이 확신이 있어야 비로소 안정할 수 있다.

나의 영적 레이다를 주께 주목하는 지성소의 시간을 필히 Q.T.시간을 통해 마련해야 한다. 피조물의 아우성을 피하여 오직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독대하고, 그 분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지성소의 Q.T.시간을 철저히 구분하라.

사실 현대인에게는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 하다. 모두가 정신없이 아우성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절제하지 못하고, 빠져 나오지를 못한다. TV 하나를 다스리지 못한다. 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죽어야만 가능하다. 어린 양 예수와 함께 내가 죽어야 한다.

“나의 소망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라는 절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한다. Q.T. 하려고 하면, 전화가 온다. 매일 매일의 이 영적 전쟁은 사실 불가능 하다.

“매일”이란 이 일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주일 날 눈물 흘리며 은혜 받아도, 일상성으로 돌아 가면 도로묵이다. 가정에 돌아 가면, 회사에 가면, 세상 사람들을 만나면 관례상, 사업상, 친구 관계상 다 허물어진다.

일상의 융단 폭격 앞에 주일 날 받은 은혜는 여지없이 망가진다. 매일 매일 만나는 일상성이 그렇게 중요하다. 매일 매일 만나면 변한다. 매일 매일 주님을 만나라. 일주일에 한번 주님을 만나게 하는 목사는 나를 변화 시키지 못한다. 일상적으로 늘 만나는 그 사람이 나를 변화 시킨다.

서생원의 <천생연분> 프로에 시골 부모님들이 나온다.“天生緣分(천생연분)”이란 말을 들으려고, 사회자가 물으니“아! 웬수, 평생 웬수”라고 동문 서답한다.

왜 최고 사랑해야 할 남편이“웬수”가 되었나?

일상성 속에서 애먹이고, 노름하고, 바람 피우고, 끊임없이 아내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번 지나 가는 사람이면 문제가 아니다. 일생을 함께, 일상을 함께 하며 살아야 하니,“웬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천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어도 스스로 내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 시킬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매일 매일 만나는 세상 사람과 벗하여 세상 사람이 되어 가지,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교회와 목사와 성도를 닮아 그리스도인의 형상을 갖추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을 만나야 한다. 매일 매일 그 분의 음성이 바로 바로 들어야 한다. 날마다 들어야 한다. 매일 매일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주님이 천둥처럼 말씀해도 들리지 않는다. 분별이 되지 않는다. 늘 젖어 살아야 한다.

일상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단지 프로그램일 뿐이다. 주님의 음성을 일상 속에서 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일상성이 확보되지 않은 경건 훈련은 소용 없다. 방향과 힘을 공급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임재, 예배적 깊이를 누리고, 그 분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영적 훈련이 매일 매일 있으면 그는 변화된다. 그것을 붙들어야 한다.

Q.T.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영적 걸음마를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는 것이다. 단체로 만나면, 변화되지 않는다. 공적으로 만나는 것과 개인적으로 만나면 전혀 다른 사람이다. 멋진 남녀를 개인적으로 만나, 깊이 교제해 보라.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떤 예쁜 여자가 산행 모임의 회장이 산행 중에 너무 멋있어 사귀려고 만났는데, 카페에서 다시 만나 보는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한번 만나고, 그만 헤어졌단다.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면, 그 주님은 전혀 다른 분이시다. 공적 자리에서 남을 통해 각색된 그 분이 아닌, 오직 나 만의 주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다가 오신다.

이제 당신은 그 분 앞에서 울며 불며 모든 것을 다 털어 놓고, 해결함을 받을 수 있다. 얼마나 결정적이며, 세미하시며, 이렇게, 저렇게, 얼마나 나의 모든 문제를 일일이 짚으시고,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신지 아는가? 만나 본 자 만이, 그 분을 만나 본 사람 만이 안다.

내 나이의 성숙도에 따라 만나는 주님의 모습이 다 다르다. 피조물은 절대로 나를 만족 시켜 주지 못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만족 시켜 주지 못한다. 오직 한 분, 주님 만이 나를 만족 시키신다. 주님은 내 양을 각각 불러 내신다고 하셨다. 한꺼번에 부르지 않으신다. 나의 목자의 음성이 내 귀에 박혀 있어야 한다. 주님과 나의 채널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나는 오직 주님의 음성 만을 듣고, 주님 만을 따라 가야 한다.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다 다르다.

주님은 나 개인에게 대한 계획과 뜻이 계시다. 남자로, 여자로 만드신 뜻, 오늘 여기 있게 하신 뜻, 한국 땅에 태어 나게 하신 뜻...... 우리는 바쁘고 분주하게 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이끌려 가야 한다.

세상의 사람들은 다 자기 주장만 나에게 강요하지만, 주님은 내 중심을 아시고, 나의 상한 마음과 삶을 아시고, 일일이 어루만지시며, 치유하시며, 갈 길을 인도하신다. Q.T.의 말씀 속에서...

Q.T.는 오직 말씀을 따라 간다. 만일에 어떤 신비적 현상이나, 누구의 예언이나, 사람의 말을 따라 간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미혹될 것인가?

우리 분별력의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이다. 계시된, 기록된 그 말씀 만이 유일한 Q.T.의 기준이다. 얼마나 안전하고, 든든한 기둥인가?

마귀는“기록 되었으되...”하신 말씀 앞에 무너진다. 마귀의 엉터리 말씀 인용을 무너 뜨리려면, 말씀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내게 주시는 말씀을 감당해야 한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그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외우고 암송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주어진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은 진심으로 터져 나오는 칭찬의 음성을 들으면 2개월을 살 수 있단다. 이런 주님의 음성을 Q.T.로 매일 매일 들으며, 풍성한 삶 가운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으면, 그 말씀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에 박히면, 그 영혼이 확 살아 난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그 말씀을 늘 들어야 한다. 지식은 공허하고 갈급하게 하지만, 주님의 그 말씀은 내 영혼의 배부른 양식이 된다.

목사님 들을 위한 중보기도:우리 목사님 들을 거짓 존경으로부터 구해 주옵소서.

Q.T.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지식적으로, 정서적으로, 실제적으로 다가 온다. 이는 아주 실제적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들으면, 사람의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정말 가치 없다. 영적으로 분별이 온다. 사람들의 말과 인기, 평가에 연연하면 그는 실패자의 영성 소유자가 되고 만다.

Q.T. 속에서 진정한 주님의 음성을 생생히 들으면 그 말씀은 시시각각으로 살아 있는 주님의 실제적인 음성으로 들려 온다. 두려움으로, 기쁨으로, 슬픔으로, 회개로... 그 말씀을 받은 자는 그 주신 살아 있는 느낌대로 나아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묵상하면 사람은 변화될 수 밖에 없다. 변화가 쌓여, 영성의 사람이 된다.

2.Q.T.를 왜 해야 하는가?

인간의 내면에는 두 마음이 있다. 갈5:17절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있다.“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마음 속의 욕구는 단순히 한 가지 만이 아니라 두 가지이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세속적인 경향으로 끌려 가는 소욕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죄된 본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 중립적인 본성이란 없다. 그런 우리 마음에 또한 성령의 소욕이 물결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갈등 없이 살아 갔으나, 예수 믿은 이후에는 내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이전과 같은 상태가 아니라, 육체의 소욕대로 살고 싶으나, 갈등이 일기 시작한다.

내 마음은 성령의 소욕으로 나아 가나, 육체는 여전히 세상으로, 죄악으로 간다. 너무나 오랫 동안 그 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다른 소리가 들린다. 가책이 온다. 마음의 눌림이 있다. 괴로움이 있다. 성령의 음성이 들려 온다. 내 마음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가로 막아 가지 못하게 막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 오면서 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 왔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을 떨치지를 못한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은 들리지 않으며, 육체의 소리는 예민하게 들린다. 아기들은 걷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여 겨우 겨우 걷는가? 마치 이와 같다. 걸음 걸이란 수년 간을 연습하여 익힌 것이다. 마라톤 선수는 달리기가 연습되고, 또 연습된 사람들이다.

육체의 소욕은 자생적으로, 저절로 연습하고 훈련 되었으나, 성령의 소욕을 따라 가는 훈련은 해 본 적이 없다. 우리의 편견은 오랫 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성령의 소욕은 오랜 묵상생활로 젖어 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그 분에 의해서 다스려지도록 하라. 묵상이 우리 속에 정착되고 새겨질 때, 필요할 때에 떠오르는 것이다.

나의 모든 새로운 삶은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삶이 되어야 한다. 말도, 행동도, 처신도, 마음도... 주님의 마음이 새로운 성품과 본능을 따라 내 마음처럼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이 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분의 성령의 열매가 내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내 삶에서 나타 나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면 말하고, 앉고, 가고, 움직이고, 행하고...... 새로운 본능이, 성품이,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죄된 본성이다. 이것은 평생을 연습해 온 것이다. 이것은 무슨 세미나를 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저절로 삶을 통해 다 배운 것이다. 드라마, 광고, 영화, TV, 문화... 등 등이 다 그렇게 우리를 세뇌 시켰다. 아기 때부터 세속적인 경향이 주입된다. 매일 매일 흡수하고 주입 당한다.

우리는 얼마나 조급하나? 분주하나? 영악하나? 매일 매일 이러한 것들을 흡수하고 살아 가니 얼마나 우리가 타락 하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거듭난 자가 되어, Q.T.를 통해 주님을 좇아 가는 삶을 훈련하는 것이다. 이 길은 육체의 소욕에 대하여“NO”라고 크게 외치며, 정반대로 가는 길이다.

가인은 예배를 거절 당했을 때에 두 가지 마음의 갈등에 시달렸다. 망령되고 사악한 그는 예배 마저도 자기 중심적으로 이용했다. 예배를 거절당한 그의 질투, 시기심이 너무나 강하여 갈등하는 그에게 주님은 경고하시고, 그 마음을 다스릴 것을 권고하셨다. 그러나 끝내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자기 육체의 소욕을 따라 분노와 시기, 질투, 미움을 이기지 못하여 동생을 돌로 쳐 죽였다.

Q.T.는 단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만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두 가지 마음의 갈등을 가질 때에 내 영성을 키워 성령의 소욕을 따라 가는 사람이 되도록 결단하고, 나아 가는 훈련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대로, 결단한 대로 살아 가지 않으면 헛 일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육체의 소욕은 강하게 나를 잡아 끈다. 이기지 못하면 진 것이다. Q.T.는 바로 이 주님의 음성을 따라 가는 존재의 힘, 영성을 키우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두 갈래로 흩어질 때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가야 하는데, 우리는 영성을 훈련해 본 적이 없다. 얼마나 유약하고, 어리며, 철 없으며, 영적으로 아기 같은가? 하늘의 원리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가련하고, 어리고, 불쌍한 모습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화되고, 성숙된 우리의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Q.T.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 분의 임재 속에서, 그 분의 형상으로 자꾸만 변화되어져 가려고 시도하는 것이 Q.T.이다. 30여 년, 40여 년을 그렇게 훈련하며 나아 가는 것이다. 주님을 뵈올 때까지,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령으로 따라 나를 쳐서 복종 시키고, 훈련하고, 또 훈련해 가는 것이다.

Q.T.는 점점 나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 시켜 가게 할 것이다. 성화 되어져 가게 할 것이다. 이것이 영성이요 경건이다. 하나님을 향한 성향을 기르고, 훈련하는 것이 경건의 훈련이다. 망령된 신화를 버리고, 경건을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연습”은 강한 단어이다.“연습하다가 죽을 정도로, 훈련하라.”는 뜻이다. 경건의 훈련은 영원의 세계로 이어지는 놀라운 세계의 개척이다.

이 세상의 연습은 아무리 아름다운 연습이어도, 70-80년을 살고 나면 소멸될 지푸라기와 같은 연습이다. 그러나 경건의 연습은 영원의 세계에서 누릴 우리의 분본이다. 참으로 귀한 것이며, 주님에게 인정 받을 영적 자산이다. 누구나 이 경건의 연습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영원히 사용할 나의 영적 자산이요, 그릇 됨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냐? 내 뜻대로 살 것이냐? 우리는 영원한 갈등의 존재이다. 경건의 연습 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 경건의 삶,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바뀐다. 변득스럽다. 그러므로 매 순간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냐? 내 뜻대로 살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이 너무나 예민하고, 발달하여 살짝만 건드려도 반응한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너무나 무뎌, 주님이 아무리 고함쳐도 듣지를 못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이 너무나 미약하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내면을 훈련해 가는 일은 너무나 무지하고, 가르친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다. 우리의 내면은 너무나 미숙하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너무나 예민하여 조금만 자극을 주면 금방 넘어 가 버린다. 반면에 내면의 강건함은 전혀 없다.

<친구>란 영화의 주제는 향수를 빌미로 한 과거의 죄악된 우정을 되새기며, 부추긴다. 그들의 폭력성, 대화,“내가 니 시다바리가!”하는 말을 보라.

그것이 왜 유행해야 하는가? 그런 쓰레기 같은 단어가... 이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강력하게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는 세포 하나 하나가 다 거기에 젖어 있다. 내 정서, 맛, 취향이 다 세상에 젖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갓난 아기와 같다. 끊임없이 넘어지고, 무너 진다. 얼마나 유약한지...

그러므로 경건을 연습해야 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한다. 우리의 내면의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진정한 영성을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Q.T.이다.

Q.T.와 성경공부는 다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성격이 틀리다. 말씀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능력으로 내게 들려 와야 한다. 이것이 Q.T.의 본질이다.

헨리 나우웬은,“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분석과 토론이 아닌, 생각과 묵상이 있어야 한다. 말씀에 대한 동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누구도 들어 가 보지 못한 내 심령 가장 깊은 곳에까지 내려 가서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때에서야 우리는 진정 깨닫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 그러나 자아와 세상과 거짓에 미혹되면 그는 하나님과의 임재가 끊어지고, 짜증이 나고, 우울해지고, 생명이 끊어진다. 보는 것 마다 짜증 난다. 육체적 피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내 중심 깊숙이 들어야 한다.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는 방황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가장 가슴 깊숙이 들어야 할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 그 말씀을 해 주신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가슴 가장 깊이 모시는 지름길이다.

3.Q.T.의 실제

1>.출애굽

성경 전체를 늘 나의 Q.T.속에서 반복해야 하나 불가능함으로, 출애굽 모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성경 전체를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출애굽기의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모든 여정이 Q.T.의 과정 그대로이다. 성경의 역사적 진행도 출애굽을 계속적으로 반복한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새 출발도 똑 같은 출애굽 도식의 반복이다.

이 패러다임이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 돌아 간다. 모든 성경을 이 원리로 풀어 가면 다 풀 수 있다. Q.T.도 이런 패러다임으로 해 가면 가장 잘 풀린다. Q.T.의 전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광야의 성막 체험, 가나안에 들어 가는 도식이다.

Q.T.의 골방에 들어 가는 일은 노예성, 세속성, 아우성과 분주성의 세상 애굽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섬길 광야의 지성소로 들어 가는 것이다.

애굽에 있으면 늘 일해야 하고, 채찍을 맞아야 하고, 불안하고, 두렵다. 퇴직하면 무섭다. 가만히 있으면 두렵다. 불안하다. 누가 쫓지 않아도 쫓긴다. 애굽에서는 시간이 있어도 불안하며, 늘 위협 받고, 악압 당하고,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함으로 절대 묵상이 안된다.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 불안하다. 할 일이 특별히 없어도, 뭔가 무의미한 분주함을 반복하지 않으면 불안하여 살 수가 없다. 의식주의 문제, 떡이 중심인 세상이 애굽이다.

애굽은 유행과 문명의 최고 발상지이다. 하나님을 떠난 이후의 인간이 쌓은 최고 절정의 세계가 애굽이다. 힘과 지혜를 다하여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며 살아 가려고 서로 생존 경쟁하며, 물고 먹으며, 발버둥을 치는 곳이 애굽이다. 필사적인 자구책이 필요한 곳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적 실존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다가 올 죽음과 현재의 생존을 위하여 신화 속에서 태양신을 섬기며, 부활을 꿈꾸며, 피라미드를 건설한다. 인간이 건설한 현대 애굽의 과학과 기술과 무기와 문화와 최고의 문명을 보라. 얼마나 놀라운가? 애굽은 나일강과 태양 신을 중심으로 돌아 가는 마귀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이다.

세속성에 파묻히면 우리는 그 허상의 세계 속에서 울고, 웃고, 진지하게 살다가, 진지하게 죽는다. 애굽의 사람은 정말 태양이 신인 줄 안다. 오직 그 속에서 지극히 만족하며, 아둥 바둥 산다. 열심히 산다. 윤리, 도덕, 종교에 진리의 목을 맨다. 그러면서 정작 이 모든 허상의 실체를 보지를 못한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자의 비극이 바로 이것이다.

이 세계는 아주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고, 조직되어 있으며,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물처럼 짜여진 실제적인 가상공간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허상 속에 속아 살다가 죽어, 그리고 지옥으로 간다. 죽어 지옥에 들어 가기까지 전혀 깨닫지를 못한다.

애굽에서의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백화점, 할인 매장, 영화, 전화 오고, 출근하고, 먹고, 마시고, 향락을 취하고, 보다 안락한 육신의 삶을 위하여 몸부림 치고...... 그러나 결국은 다 버려야 할, 떠나 가야 할, 내가 붙들 수 없는 세상이다. 그 곳에 파묻혀 있으면 Q.T.가 될 수가 없다.

현대는 물질을 섬긴다. 자본주의이다. 물질을 숭배하는 삶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는 변화의 삶으로 가려면 출애굽 해야 한다. Q.T.는 바로 그 장소로 옮겨 가는 것이다. 세상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와 성막이 있는 광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다. 세상에서 찾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성막 만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만 있다. 오직 하나님만 있다. 광야는 하나님과 나 만의 절대적 공간이다. 세상 눈으로 보면 너무나 삭막하고, 재미 없고, 할 일이 없는 곳이다. 육신을 위한 것, 혼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영을 위한 것들 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이 Q.T.의 골방에 들어 갈 수 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애굽의 세속적인 일상성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바로가 무서워 빠져 나올 수가 없다.

현실 속에서,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신다. 친구 전화 한 통이면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그러면 하나님이 버려지는가? 당신이 무너지는가? 이 어리석은 사람아!

노예는 스스로 애굽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유월절 양의 죽임과 함께 죽어야만, 애굽을 떠난다. 내가 죽어야 떠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하나님은 은혜로 나를 애굽에서 죽이신다. 이것이 시련과 고난, 연단, 환란, 죽음이다.

출애굽 하면 다 끝난 것인가? 아니다. 애굽 군대가 따라 온다. 끈질기게 따라 온다. 아이가 보채고, 핸드폰을 끊고, 골방 문을 잠그라. 하나님만 나를 붙드시도록 차단하라. 골방을 누가 두드리지 못하도록 시간을 바꾸라.

남이 다 잠자는 시간, 아무도 절대적으로 방해하지 않는 시간으로 바꾸라. 나의 경우는 밤 12시, 새벽 2시, 4시, 아침 7시, 8시, 9시...... 낮 시간의 절대적인 공간 점유...... 아직은 시간이 잘 정해지지 않는다.

새벽 오히려 미명, 한적한 곳 광야, 홀로... 이것이 주님이 Q.T.하신 유일한 골방이다. 하나님과의 단 둘 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귀한가? 일평생을 걸쳐 훈련하고 만들어야 할 절대적인 시간이다.

새벽에 딱 일어 나는 것이 죽는 것이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집을 나서는 일이 두 번, 세 번 죽는 일이다. 주님이 기다리는 그 장소로 가야 한다. 주님만 바라 보는 시간과 장소로 가라.

그러면, 골방에 들어 오면 다 된 것인가?

아니다. 잡념이란 애굽이 따라 온다. 온 세계가 사실은 골방에 앉은 내 마음 속에 다 들어 와 있다. 마음 속에 끝 없는 애굽 생각이 나를 붙들고 늘어진다. 애굽이 하루 아침에 나를 놓아 주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지난 날의 내 마음과 삶이 애굽에 온통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의 떡이 맛있었다. 내 육신과 혼적 사고는 광야의 삭막한 곳에서 한 곳 만을 바라 보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을 사모하나 하나님과만 있으면 심심하다. 몸부림이 나온다. 덩그러니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못 견딘다.

우리가 얼마나 감각적인가? 색채적인가? 얼마나 세상의 자극에 민감하게 무의식적으로 훈련 받고, 세뇌 되어 왔는가?

또한 우리 속에는 애굽에서 겪었던 두려움, 상처, 아픔, 불안, 공허, 욕구 불만이 여전히 가득하다. 마음이 정결치 못하다. 주님과의 만남의 추억이 없다. 온통 애굽의 것들만 가득하다. 그러나 그 곳 애굽은 왜곡된 세계이다. 가상 공간이다.

이제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세세히 성막을 말씀으로 계시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까지 얼마나 세밀하게, 정결하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나아 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는 데에 40년이 걸린다. 하나님의 세계를 주야로 40년 간을 묵상하게 하신다.

애굽의 피라미드는 왜곡된 세계의 표상이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간다. 성막의 원리도 똑 같다. 번제단의 죽음, 물두멍의 씻음, 지성소 휘장을 지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로...

40년 간 한 가지만 계속하면 도통한다. 12지파가 성막만 바라 보고 40년을 살다 보니, 왕 같은 제사장의 군대로 성장한다. Q.T.를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뀌어져 간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성막으로 인도한다. 내 생각과 판단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 간다. 주님만 바라 보고 3년 간 훈련 받으니, 제자들은 주님처럼 되었다. 성령이 임하니, 그들은 이제 주님과 똑 같은 사람들이 되었다.

지성소를 끊임없이 드나 들어야 한다. 수 없이 묵상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그 곳에서 이제는 주님만 바라 보아야 한다. 그 곳 광야의 지성소에는 엄청난 세계가 전개된다. 오직 주님만 바라 보는 삶의 훈련이 되어져야 한다. 오직 그 분만 바라 보고, 그 분의 음성 만을 듣고, 그 분 만을 따를 때 우리의 진정한 영적인 삶이 비로소 전개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2>.준비 기도

몸은 물리적으로는 고요하고 조용한 장소에 있으나, 마음이 잡념이나 염려에 시달릴 수 있다. 예전에 살던 방식으로 살려는 내적 심리는 집요하게 나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다. 애굽의 채찍에 힘들었지만, 힘들게 수고하면 그럭 저럭 먹고 살 수 있었다. 광야에서는 그런데 할 일이 없다. 성막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견딜 수가 없다. 지루해서 죽는다. 심심해서 죽는다.

이것을 극복하고 지나 가려면 내 내면 세계의 문제, 애굽의 모든 것을 바라 보는 나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 다시 한번 죽어야 한다. 육적인 나, 혼적인 사고로 물든 나를 다시 한 번 더 부인해야 한다.

나의 뿌리가 애굽이다. 인생의 모든 염려와 근심의 뿌리는 세상살이이다. 이것을 끊는 일은 결심해서 안된다.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술을 먹어도 안된다. 어떤 세상의 유희로 포장해도 안된다.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없음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써야 한다. 그것은 다시 한 번 더 나를 부인하고, 내가 죽는 일이다.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

흠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제물과 같이 죽어야 한다. 나의 육신이 출애굽 했으면, 이제 나의 내면이 다시 출애굽을 해야 한다. 죄의 출처는 세상이다. 세상을 바라 봄이다. 거기에는 상처, 실망, 상실, 소유치 못함... 등 등이 있다.

성막이란 하나님이 거하셨던 장소 전체를 말한다. 넓이 392평, 길이 50m, 폭25m, 높이 2,5m, 기둥 60개, 문 4가지 색깔, 울타리 흰 세마포 천, 안뜰, 바깥 뜰, 회막은 길이 10m, 폭 5m, 높이 5m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성막에는 뜰 문 휘장, 성소 휘장, 지성소 휘장, 뜰 문, 번제단, 물두멍, 떡상, 금등대, 분향단, 법궤 등의 기구가 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셨던 장소이다. 성막 전체의 넓이는 392평이다. 길이 50m, 폭 25m, 둘레 높이 2.5m, 기둥 60개, 둘레 문은 청색, 자색, 홍색실 등의 4가지 색 휘장, 울타리는 흰 세마포, 바깥 뜰, 안뜰, 회막 길이 10m, 폭 5m, 높이 5m 이다.

휘장은 뜰 문 휘장, 성소 휘장, 지성소 휘장 등이 있다. 뜰 문은 지나면 번제단, 물두멍, 떡상, 금등대, 분향단, 법궤 순서로 성물이 있다.

제단과 법궤까지 이동하는 것이 모든 인생의 걸음 걸이이다.

노예 생활, 죄의 얽매임에서 벗어 나는 길은 흠 없는 어린 양의 죽음을 받아 들여 내 것으로 소유하는 길 뿐이다. 나도 이제는 죽어야 한다.

조용한 골방에서도 끝 없이 세상을 방황하는 그 영혼은 십자가 앞에 가서, 제단 앞에 가서, 자기를 죽여 번제로 바쳐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부인되어야 한다. 나를 완전히 불살라 헌신하고, 자기를 버려야 한다. 자기가 각이 떠져, 죽고, 없어져야 하나님의 임재의 세계가 열린다.

번제로 나를 온전히 죽여 드리고, 속죄제로 회개하고, 속건제로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고, 화목제로 감사를 표현하고, 소제로 다른 제사와 함께 겸하여 헌신으로 드린 이후에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 자는 신앙생활도 자기 중심으로 한다. 자기가 무엇을 하려는 사람은 정말 힘들다. 이것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니다.

세례는 죽은 것이다. 죽고 또 죽어, 죽어진 만큼 계속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이다. 인생의 연륜이 더할수록 더욱 더 성숙해 가야 하는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언제나 초신자 들이다. 자기 부인이 안되면 성숙은 언제나 제 자리 걸음이다.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며, 세세토록 주님을 따라 가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또 부인하면서......

옛 사람인 자아의 죽음을 받아 들이고, 날마다 주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다가 가는 것이다. 자기가 죽는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는 수 밖에는 없다. 수양과 고행, 금식은 자기 중심적으로, 더욱 더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여 道人(도인)이 되게 하고, 자아를 더욱 더 극대화 시킨다. 더욱 더 문제가 된다. 더욱 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자기를 온전히 부인할 때 성령이 임하신다. 번제단을 거치면, 휘장이 열리면서 지성소의 법궤가 나타 난다. 제단에서 드리는 모든 문제는 십자가에서 주님이 직접 완성하셨다. 주님이 단번에, 한꺼번에 모든 제단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구약의 일년 속죄일에 대제사장에 의해 단 한번 열리던 휘장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휘장은 찢어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는 언제라도 그 휘장을 열 수 있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엄청난 복이다. 지금은 지성소의 복이 임하시는 시대임으로 조금만 노력해도 지성소가 열리며, 성령이 임하신다.

하나님 보좌가 지성소이다. 우리는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의 보좌를 거니는 복을 지닌 사람 들이다. 육적 신앙은 더 이상 안된다. 성령에 이끌려 가는 삶이 바로 지성소에 사는 삶이다. 우리의 살아야 할 집은 지성소이다. 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말씀을 받고, 주님과 대화하고, 누리기 위하여, 날마나 Q.T.로 주님 앞에 나아 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Q.T.를 통하여 날마다 지성소에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낄 수가 없고, 성령 충만함이 없다.

준비 기도는 십자가 앞에서, 놋 제단 앞에서 하는 것이다. 성막에 딱 들어 서면 햇빛에 번쩍이는 놋 제단이 떡 버틴다. 무섭다. 놋 제단은 죽음의 장소이다. 너는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죽지 않으면 통과할 수가 없다.

불 가운데 있는 놋 제단에 내가 죽어, 제물로 올려 져야 한다. 제단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자가 주님을 만났다면 그는 사이비요 이단이다. 십자가 만이 새롭고 산 길이다. 주님을 따라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내 속의 염려, 근심, 걱정은 다 애굽의 뿌리이다. 준비 기도는 세속적, 애굽적, 염려, 근심, 걱정을 다 뿌리 뽑고, 제단에 들어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받아 들이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갈 길이 없다.

거기서 나도 예수님처럼 죽어야 한다. 이 길 외에는 길이 없다. 주님이 걸어 가신 그 길이 아니면, 그 길은 참 목자가 가신 길이 아니다. 도적의 길이며, 삯군의 길이다.

나를 다 버리고, 나를 다 죽이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따라 나아 가야 진정한 묵상이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때 그렇게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듯이, 우리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죽음 같은 고통이 따른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가? 잘 안된다. 안되고 말고... 그래서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아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곧 죽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너 죽으라 하지 말고, 내가 온전히 죽어야 한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 교인들,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게 된다.

지성소 앞이 아닌 마당에서 말씀을 받으면, 그것은 성령의 말씀이 아니다. 인간의 소리, 사탄의 소리이다. 법궤는 지성소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그 곳에 가야, 말씀의 권능이 내 영혼을 뒤흔든다.

오순절은 지성소가 열린 날이다. 하늘의 모든 것이 열린 날이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이다. 교회속에서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다가 오고, 성도의 교제 속에서 서로 지체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땅에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하루 하루 가는 것이다. 애굽의 세력에 끝없이 지배 되어서는 아니된다. 이제 과거는 끝나야 한다.

Q.T.는 몸은 현실 속에서 살지만, 마음은 늘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주님을 좋아 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있으면, 주님의 말씀이 늘 내 안에 있으면, 주님의 임재가 나의 일상성 속에서 늘 동행하시는 것이다.

Q.T. 하며 듣는 말씀은 엄청난 말씀이다. 창조의 말씀이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말씀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으로 받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생애를 걸 만한 말씀 들을, 내게 Q.T.를 통해 부어 주신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가 바로 이 일들을 받지 않았던가?

Q.T.는 주님과 너무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함이다. 노아가, 아브라함이, 다윗이 이렇게 Q.T.를 했다. Q.T.에서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 설레며 그 받은 바 말씀을 기도하며, 현실 속에서 기대할 때, 나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경이 속에서 살아 가는 것이며, 이러한 Q.T.의 삶 속에서 살 때에, 나는 비로소 산 제사의 삶을 사는 것이 된다. Q.T.를 통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간다.

이렇게 사는 자 만이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삶이요, 성령이 동행하시는 삶이다.

3>.본문 읽기

지성소 안에서 본문 읽기를 할 때, 3번 정도는 찬찬히 깊이 읽어야 한다.

말씀을 읽다가 깨달음, 의문점, 머뭇 거림 등이 있으면 머물라.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님이 여기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광야는 길이 없다. 구름 기둥, 불 기둥이 머무는 곳이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다.

오직 주님만 따라 가 보라. 주님이 머무시게 하는 곳에서 멈추어라. 30분 간의 매일의 Q.T.로서는 주님을 따라 갈 수 없다. 하루 종일을 전폭적으로 따라 가야 한다.

인간적인 묵상은 인간성을 키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묵상은 하나님의 속성을 키운다. <생명의 삶>은 탁월한 Q.T. 교재이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3갈래이다. 왕의 대로는 3일 길, 불레셋으로 가는 길은 열흘 길, 광야의 길은 끝 없이 돌아 가는 길, 3갈래이다.

광야의 길은 끝없는 고난의 길이다. Q.T.는 바로 이 광야의 길이다. 오직 주님 만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다. 어떤 음성도 듣지 말고, 오직 주님 만을 따라 가라.

Q.T.에서 성령님이 말씀하실 때, 온 정서와 느낌으로도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죽은 소리는 글자요, 문장이요, 논리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므로, 정서적으로 다가 온다. 느낌이 있다. 성령의 음성은 내 정서적 코드를 다 훑고 지나 가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내 전 인격을 관통하고 들어 와, 휘젖고 지나 가신다. 나의 정서에 강하게 어필하신다.

여자가 임신하면 몸조심 한다. 함부로 말하지 않고, 먹지 않는다. 처신을 경계한다. 아기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제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심으로, 이 내적인 영적 감각으로 저절로 성령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게 된다. 성령님이 원치 않으시는 기도는 하지 않게 된다. 성령님이 원치 않는 삶은 살지 않게 된다. 성령께 붙들린 나의 내적 생리가 그렇게 만들어 간다. 만일에 당신이 성령의 사람이라면서 계속 완고하고, 자기 주장하고, 자기 마음대로 라면 당신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Q.T. 중에 이미지, 느낌, 환상, 영감 등을 다 주목하라. 성령님이 머물게 하시는 방법은 제한이 없다.

4>.묵상

Q.T.를 하는 목적은 현실 속에서 산 제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세상은 여리고의 전투가 있고, 아이 성의 전투가 있는 곳이다.

Q.T.의 세계에서 늘 묵상하며, 그 곳에만 늘 머물러 있으면 아니된다. Q.T.한 자는 이제 세상으로 나아 가 전투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하루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 속에서 하나 하나 이루어 가는 것이다.

Q.T. 이전에는 하루 하루의 삶이 공허한 자기의 삶과 남편과 아이들로 인하여 의미 없고, 짜증 나고, 지치고, 설거지를 하기 싫고, 낙심되고, 좌절되고, Q.T.는 하기 싫고...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기고 골방에 들어 가니, 이제는 잡념이 따라 오고... 그러나 몸부림 치며, 이기려고 고백하고, 주께 맡기고, 회개하고, 말씀에 주목하니, 눈물이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며, 깊은 지성소에 들어 간다.

말씀 첫 구절에 마음이 고정 되면서 눈물이 쏟아진다. 울면서, 감사하면서, 묵상하면서, 묵상하고, 또 묵상한다. 그리고,“이렇게 새롭게 살겠습니다.”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 온다.

현실로 돌아 오니,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어지러진 방, 흩어진 설거지, 그러나 설거지는 이제 더 이상 짜증의 대상이 아니다. 정결케 해야 할 대상이다. 저녁에 원수 남편이 들어 오는데,“나의 왕 남편이 오시는구나!”로 바뀐다. 아이들도 다시 보이고...

Q.T.는 하나님의 왕 같은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Q.T.가 잘 안될 때에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그 곳에 머물러 있으라. 이것이 우리의 일생 동안 계속해야 오래고, 지속적인 영적 起耕(기경) 작업이다.

5>.적용

하나님의 음성과 체험을 했다면, 그대로 지켜 행하여야 한다. 적용이 있어야 한다. 그리해야 그 길이 형통해진다. 행치 아니하면 공염불이다.

<1>.십자가 앞에서 준비 기도하고, 마음을 열고, 옥토를 기경하고, 가시 덤불을 제거하고, 내적 심리적 상태를 정지하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찬양도 좋다, 결단해야 한다.

제단에서 죽고, 이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나도 걸어야 한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다른 길을 찾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은 자기의 속성이다.

나의 원하는 것은 누구나 있다. 내 육신의 소욕, 세상에 물든 마음의 소욕은 아침에 눈을 뜨자 말자, 들 늑대처럼 나를 덮쳐 온다. 그것들을 제쳐 내고, 하나님의 더 깊은 음성과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제일 먼저 가져야 한다.(C.S. 루이스)

십자가를 연상하고,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으라. 주님 앞에 맡기는 것이다. 이 하루를 주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맡기는 것이 준비 기도의 중요한 핵심이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나, 미움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있다. 솔직한 마음을 주님께 토로하라. 그리고 주님의 진정한 음성을 들으라.

나를 부인할 수 있는가?

주님 앞에 나를 진실하게 토로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쇼할 필요가 없다. Q.T.는 진정한 나를 토로하고, 주님 앞에 선 적나라한 내 모습을 보아야, 내가 변화 되어진다. 진짜 내가 나를 느끼고, 표현해야 나의 모습을 보며, 나를 알게 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드러 내는 것이 가면을 벗고 죽는 것이며, 내가 나의 중심을 내뱉을 때 비로소 나는 죽는다. 헌금 때에 우리는 얼마나 진실치 못한가? 내 모습 그대로, 내 한계 그대로 나아 가라.

내가 그 분 앞에서, 나의 모습 그대로 느끼고, 진실할 때 그 분과 진실한 동행이 가능하다. 나를 열어라. 성령께서 나를 마음껏 인도 하시도록......

내 중심으로 하는 것은 아무리 탁월한 교회 헌신과 충성이라도 그것은 의롭지 못하다. 성령 안에서 해야 한다. 성령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도 그대로 받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한다.

부목사가 병원의 수련회에 갔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이 다녀 갔다는데, 부목사인 내가 가서 무엇을 하리?”

준비하며 Q.T. 하는데,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났는데, 그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이 전쟁은 내가 하는 거야!”하는 장면이다. 여호수아는 그 때에 담대함과 용기와 넘치는 힘을 얻는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든 그 검이 얼마나 놀라운 검인가? 여호수아는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부목사는 자기도 그 검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는데, 오랜 기도 후에 성경책과 그의 눈 사이에 뭔가 번쩍 번쩍 하는 것이 나타 났다. 검이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부목사는 으아! 하고 통곡하며 울었다. 옆 방에서 사람이 놀라 뛰쳐 나왔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의 검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의지하고, 내 실력을 바라고 있었구나!”그 통곡은 회개하는 자기 중심주의에 대한 회개의 통곡이었다.

말씀은 이렇게 살아 있는 상태로 듣는 것이다.

<2>.준비 기도 후, 본문을 읽고, 이제 깊은 묵상으로 들어 가라.

광야는 너무 뜨겁고, 재미 없고, 볼 것이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간을 훈련 받았기에 온 세계를 뒤흔든다.

<생명의 삶>을 사용하여 Q.T. 하라.

<3>.묵상이 무르익고 깊어지면, 결단하고, 그 결단을 삶에 적용하고, 적용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고, 공동체에 적용하여, 실천하라.

적용할 때,“주님 이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어떻게 적용할까요?”물으라.

3-1>.믿음의 분량 만큼만 적용하라.

김준곤 목사님은 엑스플로 74 때 믿음의 분량을 70만 명으로 잡았다. 남의 믿음의 분량대로 가면 아니된다. 남을 따라 가지 말라. 내 믿음의 분량이 있다.

3-2>.인내심을 갖고 적용하라.

성취될 때까지 가라.

3-3>.오늘 하루를 전폭적으로 맡기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준비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자기의 고정 관념, 주장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마음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자기 욕심은 온전히 맡겨야 한다.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태도가 되어 있는가?

분문 읽기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자세이다.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받는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조급함을 버리고, 온전히 맡겨야 한다. 오직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 어떻게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챌 수 있는가?

<1>.마음에 와 닿는 말씀

말씀은 씨이며, 밭은 마음이므로, 부딪치면 스파크가 일어 난다. 나의 말씀은 마음에 탁 와 닿는다. 첫 느낌이 탁 일어 나는 순간에 Q.T. 노트의 여백에 재빨리 써야 한다. 이것이 종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영감이며, 별똥 별이며, 직관력이 열리며, 통찰력이 생기며, 지성소로 들어 가는 문이다. 이 순간 성령님의 생명이 내 가슴에 부딪쳐 오는 것이다. 이것은“번쩍”하고 이내 사라져 버린다. 딴 생각을 하면 기억도 안난다. 여운만 남을 뿐이다. 이것이 분문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2>.마음에 깨달아지는 말씀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것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깊은 묵상이 없으면 다 잊어 버린다. 묵상해야 내 것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깊이 와서 닿아야 한다. 충격이 되어야 한다.

<관상기도>는 묵상의 깊은 차원이다. 오랜 시간, 오랜 묵상이 필요하다.

<3>.의문, 호기심, 질문, 동기를 유발하는 말씀

<4>.감성에 와 닿는 느낌이 있는 말씀

말씀은 반드시 감성적 느낌을 동반한다. 두려움, 경각심, 기쁨, 회개... 등의 정서적 반응을 동반한다.

6>.묵상

그대로 주신 말씀 들을, 그대로 묵상으로 가져 가라.

주석이나 전통적 해석을 얻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종자를 손 대지 말고, 그대로 묵상으로 가져 가면 하나님이 하실 말씀의 깊은 의미가 나타 난다.

묵상으로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어떻게 받고, 적용할 것인가를 성령님께 묻고, 기다리라.“제게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십니까?” 깊이 묵상하며, 물으라.

그 분을 사모하고, 기다리라. 그냥 기다리라. 조급함을 버리라. 반드시 만나 주실 것이다. 만나 주지 않으셔도 초조하지 말라.

적용 기도는 묵상한 말씀을 붙들고, 하루를 전폭적으로, 구체적으로 맡기고 사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적용 기도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현실적이어야 한다.“온 세계를 구원하게 하소서.”하는 기도는 너무나 추상적이다.

나눔은 <QT 나눔방>에서 나누는 일이다.

자기 의,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듣는 사람들이 은혜 받고, 영적으로 성숙하여야 한다. 만일 함께한 사람이 오히려 부러워 하고, 낙심하고, 좌절한다면 그 나눔은 잘못된 것이다.

찬양의 능력과 은혜

역대하 20:14~27절

(14)여호와의 신(神)이 회중(會衆)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臨)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子孫) 맛다냐의 현손(玄孫)이요 여이엘의 증손(曾孫)이요 브나야의 손자(孫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5)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居民)과 여호사밧 왕(王)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因)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戰爭)이 너희에게 속(贖)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贖)한 것이니라.

(16)내일(來日) 너희는 마주 내려 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 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17)이 전쟁(戰爭)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行伍)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救援)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 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來日)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居民)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敬拜)하고, (19)그핫 자손(子孫)과 고라 자손(子孫)에게 속(贖)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甚)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讚頌)하니라.

(20)이에 백성(百姓)들이 일찌기 일어 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居民)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信賴)하라. 그리하면 견고(堅固)히 서리라. 그 선지자(先知者)를 신뢰(信賴)하라. 그리하면 형통(亨通)하리라 하고,

(21)백성(百姓)으로 더불어 의논(議論)하고

노래하는 자(者)를 택(擇)하여 거룩한 예복(禮服)을 입히고 군대(軍隊) 앞에서 행(行)하며 여호와를 찬양(讚頌)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感謝)하세. 그 자비(慈悲)하심이 영원(永遠)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그 노래와 찬양(讚頌)이 시작(始作)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伏兵)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子孫)과 모압과 세일산(山)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敗)하였으니, (23)곧 암몬과 모압 자손(子孫)이 일어나 세일산(山) 거민(居民)을 쳐서 진멸(殄滅)하고, 세일 거민(居民)을 멸한 후(後)에는 저희가 피차(彼此)에 살육(殺戮)하였더라.

(24)유다 사람이 들 망대(望臺)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屍體) 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者)가 없는지라.

(25)여호사밧과 그 백성(百姓)이 가서 적군(敵軍)의 물건(物件)을 취(取)할 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財物)과 의복(衣服)과 보물(寶物)이 많이 있는 고(故)로 각기(各其) 취(取)하는데, 그 물건(物件)이 너무 많아 능(能)히 가져 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取)하고,

(26)제(第) 사일(四日)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頌祝)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27)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여호사밧을 선두로 즐거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그 적군(敵軍)을 이김을 인(因)하여 즐거워 하게 하셨음이라.

찬양의 능력

예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던 스패포드라는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오랜 만에 가족들이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아내가 4 자녀와 함께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1873년 11월 15일 뉴욕을 떠난 배가 영국 근교 해협을 지나갈 때에 자욱하게 낀 안개 때문에 앞에서 오늘 배를 보지 못하고, 두 배가 충돌을 했습니다. 이 사고로 266명의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 때 스패포드 부인은 네 자녀를 물 속에서 잃어 버리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시카고의 대화재로 스패포드 자신은 재산을 몽땅 잃었습니다. 바로 이런 비극의 때에 작시한 곡이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470장 찬송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찬송은 슬픔을 이기고, 절망을 이기는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찬양의 권능은 성경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미 수 없이 입증된 사실입니다.

일본에서는 한 때 빵이나 음식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고전 음악을 도입해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발효 과정의 이스트균에 들려 준 결과, 빵 맛이나 음식 맛이 휠씬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식물 재배에도 음악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사운드 직배 하우스"에서는 모차르트 채소, 브람스 토마토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시끄러운 유행가나 포크송은 식물의 성장 촉진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음악 자체가 우리의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적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초등학생, 청소년들이 좋지 못한 음악에 빠져 공부도 하지 않고 방황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위기 가운데 서 있는 유대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는 여호사밧왕 때 에돔과 사해 근처에 있던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대왕 여호사밧을 치러 올라 오고 있었습니다. 이 군대들이 엔게디라는 골짜기에 진을 쳤을 때 한 병사가 찾아 와서, 이들의 침략 사실을 왕께 고했습니다.

이 때 여호사밧 왕은 두려워하며,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고, 기도했습니다. 또 온 백성들에게 금식할 것을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왕과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 새뜰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이 때 하나님의 신이 레위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하나님의 응답에 왕과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큰 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 나서 드고아 들로 나갑니다. 그런데 전쟁터로 나가는 백성들의 모습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백성 중에서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노래와 찬송이 시작 될 때에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심으로 그들이 패하였습니다. 같은 연합군끼리 서로 싸움으로 피차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정말 군대에서 밤에 작전을 할 때에 아군끼리 서로 충돌하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얼마든지 보아 왔습니다.

찬송은 미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가대원들, 찬양대원 들은 교회의 영적 파수꾼이요 영적전쟁의 전초부대입니다. 성가대원, 찬양대원 들이 믿음으로, 성령으로 충만해 있을 때, 그 찬양은 사탄 마귀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 말고도 찬송이 엄청난 하나님의 힘을 발휘한 것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악귀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수금으로 찬송할 때 악귀가 떠나 평안히 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감람산을 향해 갈 때 제자들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한 밤중에 찬양함으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찬송은 우리를 평안하게 합니다. 밤에 무서울 때 찬송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통해서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가대원들, 찬양대원들이야 말로 천사가 흠모하는 참으로 귀한 직분과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찬양하는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하는 직분을 신실하게 받들어야 합니다.“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는데,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로운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생전에 교회를 가장 신실하게 다닌 사람은 누구일까요?

미국 오하이오주 케오쿡에 있는 제일침례교회의 린퀴스트 여자가 가장 예배에 오랫동안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사람은 1888년부터 88년 동안 주일예배는 물론, 각종 절기예배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 했습니다. 88년 동안 교회의 목사가 15번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8,000번 이상의 설교를 들었고, 4,000번 이상의 기도회를 참여했으며, 2만 9천명 이상 취침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 린퀴스트 여사는 50년 이상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제자 가운데 수 많은 사람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영적 기록입니까?

“헌신과 충성”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큰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예배 시간, 예배 자리를 꾸준히 지켜서 일평생, 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이 진실한 헌신입니다. 변함없이 예배 자리, 찬양 인도 자리를 지키는 신실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이요 충성입니다.

겸손히 맡은 사명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십자가의 군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과 영적전쟁

[시편149편]“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어다. 이런 영광은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이교도의 열방에 보수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찬양이 왕들을 사슬로, 귀인들을 쇠고랑으로 결박하며 심판을 집행한다.

[삼상16;23]“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겔28;13]“...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루시퍼란 이름은‘기름 부음을 받은 그룹’이다.

루시퍼는 분명히 음악으로 섬기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중보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에게 대항할 때, 그의 능력이 무력화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단은 우리가 찬양하면서 [시편149편]의 말씀을 무기로 사용할 때, 그의 통치 체계가 묶이게 되고, 중보 찬양을 통해 자신이 쇠고랑을 차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찬양을 지극히 싫어한다.

[시22;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분은 우리의 찬양 가운데 들어 와 임재하심으로써 그 분의 능력이 적의 능력을 삼키게 되며, 그 분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사단은 그 분의 힘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찬양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어 오시게 되면, 빛이 어두움을 몰아 내게 된다.

[행16;25]“밤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중보 찬양은 그 자체가 보복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민감성을 증대시키는 역할도 한다.

[고후4;4]

중보 찬양은 강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을 계속 멀게 놓아 두는 것을 막는데 효과적인 무기이다. 경배는 중보적이며,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찬양”에 대한 히브리어의 표현

1]할랄;“우쭐”하는 흥분하는 찬양의 행위에서 나오는 엄청난 열정의 폭발.[할렐루야 라는 말은 할랄에서 유래하였음]

탈무드와 미드락에서는 이것이 악한 자를 던져 버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시117;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할지라.”

2.야다;감사함, 공공연하게 발표함, 손을 뻗침, 손을 들고 경배함.

3.바락;송축함, 머리 숙임, 무릎 꿇고 경배함.

[시103;1-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4.자마르;현악기를 연주함. 하나님께 음악을 드림. 찬양의 음악적 동사.

5.샤박;높고도 적절한 말로 좋게 말함, 큰 소리로 말하면서 소리치고 승리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함.

[시117;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할지라.”

6.테필라;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간구, 찬송

[사56;7]“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7.토오다;감사함, 감사함으로 손을 드는 것을 포함함, 찬양의 제사를 드림.

[시50;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찬양의 또 다른 무기

1-행진:

[여호수아1;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2-밟기;

[시편108;13]“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눅10;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시44;5]“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 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3-노래하기

[이사야;30;29-30]“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와 같이 노래할 것이며, 저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 가는 자는 같이 마음에 즐거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4-손뼉 치기

[시편47;1]“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 다.”

5-소리 치기

[예레미야50;15]“그 사면에서 소리 질러 외칠지어다. 그[바빌론]가 항복하였고,”

[역대하;13;15]“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시32]“...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여호수아6;16]“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6-웃음

웃음의 무기는 매우 강력하며, 중보의 현상에서도 필수적이다. 중보 찬양에서 웃음은 두 가지 용도가 있으니, 첫째는 개인적 보호와 감정적 건강이고, 둘째는 사단과 그의 힘에 대항하는 직접적 전투이다.

[1-개인적 보호와 감정적 건강]

웃음은 중보할 때 오는 중압감에 대한 중요한 안전장치이며, 그것은 전쟁 가운데 당신을 억압하거나 우울하게 하는 적의 능력을 파괴한다.

[잠15;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2-사단과 그의 힘에 대항하는 직접적인 전투]

전쟁 중의 웃음은 적을 모독한다.

[시37;12-13]“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7-기쁨

[시편149;2]“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스바냐 3;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중보 가운데 오는 기쁨은 웃음에서부터 강력한 감정을 거쳐 조용한 평안에 이르기 까지 전 영역을 다 포함한다.

중보 찬양의 실제적 적용

성령님께는 여러 형태의 분위기가 있으시고, 그 분 자신을 표현하시는 많은 방법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중보해야 할지에 대해 그 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듣는 민감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문화 안에서 일하시며, 종종 우리의 신앙체계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태의 중보도 억지로 하려고 시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마11;28-30]“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 너무 집착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 자신들의 인간적 감정으로 기도하게 된다.

[마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100;4]“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 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 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일 때에라도 무거운 마음으로 오기 때문에,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주님의 성문은 그 분의 전략이 개발되는 장소이다. 중보 모임을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 분의 뜻을 계시 받는 세계 안으로 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모임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예를 들면 바락의 시간이 되면 여러분은 조용히 주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며, 다른 때에는 손을 높이 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은 선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선포는 하나님의 속성, 즉 그 분의 이름 성품 및 본성을 소리 내어 외치는 것이다.

[사60;18]“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원하신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찬양하는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경제적 필요가 있을 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경배하면 우리의 상황 가운데 들어 오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아직 수도원에 있을 때, 존재론적 고독감과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여 대단히 우울하게 보낸 적이 있었다. 그는 작은 방에 틀어 박혀서 하루 반이 지나도록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럿이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 갔다. 그때 루터는 반쯤 죽은 것 같이 되어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눈을 부릅 뜬 채 창백하기 그지 없는 얼굴이었다.

친구인 루카스 에덴베루가 여러 명의 합창단 학생들과 함께 십자형 돔(Dome) 속에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은혜스러운 음악은 그를 훌륭하게 소생시켰다.

이 예화는 이른 바 '리듬이 있는 기도'로서의 찬양이 하나님 은혜에 의지하여 제작되고, 또 찬양의 생동하는 힘이 죽어 가는 영혼에 활기 찬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아빠의 인생을 변화시킨 딸의 찬양

한 집사님은 택시를 운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늘 자신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자신이 다른 사람 만큼 못 배웠다는 것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못 배웠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 나지를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늘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은 교회에 나오기는 하는데 늘 소극적입니다. 대화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할까! 이것 때문에 늘 고민합니다. 그런 생각을 갖으니까 자연히 사람을 피합니다. 교회 대예배 시간에만 나왔다가 사람과 마주치기가 싫어서 쏜살같이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리적인 상처는 점점 깊어 갔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를 멀리하면서 술과 담배를 더욱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술을 먹으면 이제는 필름이 완전히 끊겨 버리는 중독 상태에까지 갔습니다. 이렇게 되니 교회와 교인은 점점 싫어지는 것입니다. 자연히 교회와 신앙은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거기다가 도박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집을 나가면 몇 일이고 들어 오지 않습니다.

남편의 이런 모습을 지켜 보고 있는 아내는 몹시 답답했습니다.“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습니다. 울면서 기도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목사에게도 기도 요청을 해 왔습니다. 목사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남편을 권면 했습니다. 남편은 목사에게 와서 기도를 받을 때 뿐입니다. 기도를 받을 때에는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신앙으로 살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기도 받고 교회 밖에 나가면 또 그런 생활이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바로 인간의 가장 약한 점을 틈 타서 가정의 파괴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5학년에 다니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 모릅니다. 늘 자기 어머니를 따라서 저녁예배까지 나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피아노를 곧잘 칩니다. 하루는 아빠가 집에 있을 때에 교회에서 배운 복음성가를 칩니다.

[탕자처럼 방황 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부드런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 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다.]

딸의 반주에 맞추어 복음성가를 흥얼거리던 이 아빠는 마음이 크게 찔렸습니다. 마음 속으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가 왜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후회하는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그 길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회개 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노름판에 앉아 있을 때에 딸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또 그 가사가 들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에...]

결국 그 집사님은 몇 번 되풀이 되는 고통의 과정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 와서 건강한 가정을 꾸몄습니다. 그 가정은 딸의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하나님 앞에 찬양을 부를 때마다 감사가 넘치는 가정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신앙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것을 자신의 일순간의 타락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영적 찬송(하늘의 비파)

영의 세계를 잘 아는 목사님을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그냥 하지 않는다. 반드시 찬송으로 더러운 영들을 싹 걷어 내고 시작한다. 그 목사님 만의 영적인 찬송, 즉“하늘의 비파”가 각자 있는 것이다. 더러운 영들을 싹 걷어 내고 청소한 다음에, 말씀을 던진다.

설교 바로 하면 심령이 청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은혜 받지 못한다. 목사의 불, 강단의 불을 아래로 붙이려면 너무 힘들다. 성도들의 불, 강단 아래의 불을 위로 옮겨 붙여야 한다. 그러면 아주 쉽다. 은혜의 문이 그냥 열린다. 그 통로가 바로 찬양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자기 18번 찬양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하늘의 비파”가 있어야 한다. 찬양 중 후렴 부분에서 특히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신다. 기름을 넘치도록 부으신다.

“성령님! 제게 하늘의 비파를 주세요.”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느낀다. 삼림욕으로 몸의 피로를 말끔히 걷어 내듯이, 영혼은 성령욕을 할 때 새 힘을 충전한다. 성령이 온전히 덮기까지 계속하라.

자기 만의 하늘의 비파를 가져라. 후렴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1>.조용기 목사 - 2037장

아아! 아아! 주의 사랑 깊고 크셔라. 내 영혼에 파도처럼 메아리쳐 온다.

2>.베니 힌 목사 - 40장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2회)

3>.무디 -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4>.죤 웨슬리 -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5>.김홍도 목사 -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6>.전광훈 목사 - 3202장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 만이 나를 다스리네.

7>.배종부 목사 - 주님의 뜻 따르렵니다.(2776장)

“주님의 뜻 따르렵니다. 나의 영혼 지키소서.

주님! 암흑 속 빛을 주옵소서. 주님의 뜻 따르렵니다.

주님 지신 많은 고통, 헤아릴 수 없어도, 보혈 흘려 날 구원하셨네.

날 위하여 다시 빚으시옵소서. 주님의 뜻 따르렵니다.”

殉命의 사람 배종부 목사의 하늘의 비파 찬송

1.이사야의 입술에...(피아노 악보)

나의“회심의 말씀”과 직결된 찬송이다.

제단 숯불에 타야 한다.

“화로의 숯불의 환상”을 기억하라.

2.주님의 손길(3354)

나의 가장 사랑하는 은혜스러운 찬송이다.

3.이 세상은 나그네 길(2432)

나의 목표는“殉敎”이후의“天國”이다.

나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순교한다.

4.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2348)

진정 이 세상을 버린 인생관, 가치관으로 살리라.

5.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3007)

내게는“시온의 대로”가 열려, <16차선 하늘 고속도로>가 뚫렸다.

나는 주님의 채워 주심 만으로 산다.

내 사전에 더 이상 육의 것을 위하여 구하지 아니한다.

6.주님의 뜻 따르렵니다.(2776)

이것은 나의 광야 길의 결산이다.

7.예수의 이름으로...(2566)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 서리라.

8.주님 뜻대로...(2745)

성령 안에서, 오직 주님 뜻대로만 살아 가리라.

9.내 일생 다가도록...(3020)

내 일생 다가도록 주님만 의지하고 살아 가리라.

10.승리는 내 것일세(2436)

나는 언제나 성령으로 승리한다.

11.성도들아! 이 시간은(2410)

성령을 붓고, 은혜를 쏟으라.

12.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3030)

아멘. 내 생애의 응답의 찬송이다.

13.예수 나의 첫 사랑 되시네(3246)

성령의군대의 총사령관이신 나의 주 예수님께 바치는 충성의 첫사랑 고백이다.

하늘의 비파를 연주하면 성령이 임하신다. 말씀의 영이 임하신다. 사무엘의 사울 왕의 군대를 물리쳤던 라마 나욧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배목사여! 너도 하늘의 비파를 가져라. 어둠의 영을 물리치는 하늘의 비파를 꼭 소유하라.

예배 인도할 때에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 한다. 예배 공간에 성령의 힘이 덮고 있으면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순간 그 심령이 그냥 녹아 버린다.

하늘의 비파는 계속 바뀐다. 찬양의 능력은 후렴에 있다. 찬양을 통해 어둠의 영을 걷어 내고,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게 하신 후에, 말씀을 전하라.

설교 중간 중간에 찬양을 하라. 항상 반주자를 대기시키고...

부흥회는 절대 친구나 시시한 사람 데려다 하지 말고, 성령을 부을 사람을 세워라. 성령의 불을 붙일 사람을 세워라. 영에 젖어야 한다.

너의 교회를 사람들이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로 만들라.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 오는 교회로 만들라. 성령 목욕 하는 교회로 만들라. 다 배목사 너의 말씀과 기도에 달려 있다.

오직 성령 충만해야 해! 정말 성령님이 너를 통해 예배와 목회 현장에 나타 나셔야 해! 아멘.

너의 교회를, 예배를 성령님이 덮으시게 하라. 누리시게 하라. 교회를 온전히 바꿔라. 온전히 성령님이 덮으시게 하라.

교회를 성령으로 재창립 하여, 새 출발하라. 한 달 동안“성령의 나타남”부흥성회를 하라. 주일 낮에도 성령부흥성회를 하라.

사력을 다해 목회에 전념하라. 영혼들을 챙기고...

주님! 제 가슴에 눈물을 주세요. 제가 예배를 인도할 때마다 눈물이 넘쳐 나게 해 주세요. 백 마디 말보다 한 방울의 눈물이 귀합니다.

“신앙고백”은 나의 하늘의 비파이다.

1.신앙의 참된 의미를 알고 온 생을 주께 바치기로 했을 때

그 전엔 아무렇지 않던 사소한 일들이 무겁게 가슴에 와 닿네.

양심을 뜻을 따라 행하고, 사랑의 법을 지키게 하시어

내 생활이 편할 때도 고통 받는 이웃 있음을 늘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내 모든 결점과 내 모든 나약함을 주의 은혜로 채우시고

여호와 능력의 이름으로 내게 기름을 부으시어

나로 생명의 복음에 합당한 일군으로 쓰시어

주님의 뜻 이루어지이다.

2.연약한 제게 힘을 주시고 발걸음 마다 인도하여 주시며

굳건한 믿음으로 이 길 가도록 하심도 참으로 여호와 이레라.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고, 맘 편히 나의 길을 가고 싶지만

어느 새 당신은 나의 중심을 붙드시어 이 길을 가라 명하시네.

내 마음과 생각과 내 인생의 계획을 주의 뜻대로 이끄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내게 기름을 부으시어

나로 생명의 복음의 합당한 일군으로 쓰시어

주님의 뜻 이루어지이다.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이 찬양을 기도 중에 받고서, 새롭게 축복의 사람으로 거듭 났다.

중보기도(찬양)의 효과

영국의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 죤 뉴톤은 50세 때 까지 노예선장으로서 악한 일만 해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꾸준한 기도와 그 아내 메리의 30년 간의 단장(斷腸)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대서양의 태풍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는다.

그 후 그는 시인 쿠퍼와 만나서 찬송시 348편을 쓰게 된다. 그 중 281편이 뉴톤이 쓴 시다. 우리가 잘 아는 405장이 그 대표적 찬송이다.

1.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도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그는 80세에도 하루 3번씩 설교를 하고, 그의 비문에는 죄인을 용서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시로 그의 에필로그를 장식했다.

찬양의 용사들이 되어 새해를 영적전쟁에 승리하는 원년으로 삼으라.

성령 충만

에베소서 5:15-21절

*이 설교는 2004년 제 생애 첫 성령 충만의 경험을 받을 때의 기도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분들에게 혹시나 참고가 될까 합니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行)할 것을 자세(仔細)히 주의(注意)하여, 지혜(智慧) 없는 자(者) 같이 말고 오직 지혜(智慧) 있는 자(者) 같이 하여 (16)세월(歲月)을 아끼라. 때가 악(惡)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者)가 되지 말고, 오직 주(主)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醉)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聖靈)의 충만(充滿)을 받으라. (19)시와 찬미와 신령(神靈)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主)께 노래하며 찬송(讚頌)하며, (20)범사(凡事)에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恒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感謝)하며, (21)그리스도를 경외(敬畏)함으로 피차(彼此) 복종(服從)하라.

오직 성령님이 <성령 충만>을 마음에 담아 주옵소서.

올해 2004년에 들어 와서 계속하여“성령”설교를 하고 있다. 성령님이 나로 하여금 계속 이 설교만 하게 한다. 3월부터 성령 충만함 속으로 들어 왔기 때문이다.

오늘“성령 충만”주제로 설교하는데, 지난 3월 이후 오늘까지“성령 충만”주제로 설교를 3주간이나 계속했다. 오늘 다시 4번째 주간에“성령 충만”주제로 다시 설교한다.“성령 충만”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성령 충만”은 우리 삶과 인생의 제일 가는 단어이다.

신앙생활과 개인의 인생, 가정생활, 사회생활, 대인관계, 삶 전반에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들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성령 충만”이라고 대답한다. 성령의 모든 역사는“성령 충만”속에 다 들어 있다.

앞으로 저는“성령 충만”이란 대전제 하에 모든 성령 역사를 설교해 갈 것이다. 여러분의 심령이 성령 충만해지고,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 충만함이 넘치면, 모든 문제는 만사 형통으로 풀려 갈 것이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내가 성령으로 꽉 찬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성령님 안에 있고, 성령님이 내 안에 충만히 계신 상태이다.나는 항상 성령님을 주목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성령님을 바라 보고 있다. 성령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있고, 성령님이 원치 않으시면 무슨 일이건 즉시 중단한다.

제가 지난 주일 광고할 때, 여집사님 들에게“오늘 주일에 잔치를 열 것인데, 한 분이 반찬을 두 가지 씩만 해 오라. 서로 의논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감동대로 하라.”했더니, 금요일 구역예배에 모여 걱정 들을 했다. 반찬이 중복되면 어찌 하느냐고?

바로 이 점이 나와 우리 집사님 들의 차이이다. 나는 성령의 감동하심 대로만 하면 모든 일이 가장 합력하여 선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거기에 무슨 인간적인 염려나 걱정, 준비, 배려 다 필요 없다.

성령님이 가장 잘 알아서, 조화를 이루신다. 우리의 할 일은 오직 그 분을 주목하는 일이다. 성령님의 감동하심 대로만 하면 된다.

오늘 점심 식사 때에 한번 보도록 하자. 여종들이 얼마나 성령의 감동을 받고, 준비해 왔는지... 여러분들이 음식을 받아 보면 저절로 마음 속에 답이 나올 것이다.

여러분! 앞으로 모든 일들을 이렇게 하라.

당신의 모든 일들을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 대로만 하라. 당신의 생각대로 하지 말고, 성령의 감동하심 대로만 하라.

예배에 오거든 바로 내 영혼의 성령 감동하심을 위하여 간절히 준비 기도하라.

당신이 예배에서 성령님을 만나야지!

찬송할 때, 성령님을 만나도록 찬송하라.

기도할 때, 성령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하라.

말씀을 받을 때, 목사를 통하여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 단에 선 목사는 성령의 대변자이다. 그의 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색하고, 돈 아까운 사람은 헌금하지 말라. 그러나 성령이 감동하는 사람은 생활비를 다 바쳐라.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라.

지난 주간 기도원 집회에 하루 갔었다.

모두 3번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는데, 헌금을 한 푼도 하지 못했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앞의 꽃동산교회에 무슨 행사를 하면 무명 성도들이 이름도 없이 3,000만원씩 헌금을 하여 항상 행사가 넘치도록 은혜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치고 싶으나, 바칠 돈이 없는 불쌍한 목사와 성도!

빨리 복을 받아야지!

우리는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 왔으나,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 정말 영적, 육적, 물질적인 복을 다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있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여, 인색하고 믿음이 없어 바치지 못하는 인간! 그건 정말 불쌍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복을 받을 수 없지!

정신 차려서 예수 믿어야 돼!

범사를 성령의 감동대로 하라.

성령 충만한 사람, 그는 자기 주장이 없다. 자기 신학, 자기 철학, 자기 논리, 자기 신앙이 없다. 자아 자체가 없다. 그에게는 말씀 복종과 언제나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 만이 중요하다. 그는 철저한 성령님의 시종이다.

나는 성령님을 부를 때, 항상 이렇게 호칭한다.“나의 담임목사님이신 성령님! 저는 성령님의 시종, 청지기목사, 裵殉名(배순명)입니다.”

저는 제 과거의 이름 배종부를 기억하기도 싫다. 마귀에게 속아 사기 당하고, 다 빼앗기고, 오늘까지 죄란 죄는 다 지으며, 주변 사람 들에게 고통 고통을 주며, 만신창이로 살아 온 인생이 나 인간 배종부의 생애였다.

겉은 목사지만 항상 내 삶은 마귀 편에 서 있었고, 실패자의 인생이었다. 축복이 없는 인생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성령의 신앙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교회를 재창립 하기 위하여, 작정한 20일 금식기도를 마쳤다. 한 여집사님은 12일 동안 동반 금식을 해 주었다. 또 다른 집사님들이 함께 금식을 해 주었다.

그런데 성령님이 금식을 풀지 못하게 하신다. 차마 풀 수가 없다. 더 금식의 괴로운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오직 성령 충만함을 넘치게 받기 위하여...그것 뿐이다.

나는 지난 날 나의 지옥 같은 육의 생애가 싫다. 정말 싫다. 다시는 그 생애로 돌아 가지 않는다.

기도 중에,“성령님! 제가 다시 과거로, 육의 사람으로 돌아 가지 않도록,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가게 해 주세요. 저는 다시는 육의 사람으로 돌아 가지 않습니다.”다짐했다.

“성령님! 저를 인도하사 성령님의 깊은 곳에 도달하도록 인도하시고, 그 문을 성령님이 열어 주셔서 제가 들어 가게 하옵소서.”

지난 주간에는 처음으로 제 기도가 3시간의 벽, 4시간 벽을 넘었다. 내 생애에 4시간을 연속으로 기도하며 넘어 가 본 적이 없다.(주님! 5시간, 7시간 벽을 넘고서, 성도들에게 원고를 고쳐 설교하게 해 주세요.)

나의 설교 원고는 남에게 하기 위한 설교 원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삶의 고백이다.

성령 충만한 세계에는 온갖 좋은 영적 보화가 다 있다.

1.염려, 근심, 걱정이 없다.

2.세상이 멀어져 간다.

사람도, 돈도, 문제도, 해야 할 일도 저 멀리 꿈 속의 일 같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말 멋지게 열심히 살지만, 그의 영혼은 성령님과 함께 구름 위를 난다는 비유의 말씀이다.

3.육의 정욕, 사람 관계의 앙금과 갈등, 내 모든 지난 과거의 중요하다 생각했던 일들이 다 지나 간 꿈결 같다.

4.긍정적, 희망적, 소망적, 적극적 사고와 삶의 자세로 충만하다.

5.그 영혼에 안식이 있고, 기름짐이 있고, 평안이 있고, 알 수 없는 행복이 있다. 힘이 솟아난다.

(나에겐 알 수 없는 힘 어디서 생겨나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강하고 담대한 힘. 2473장)

6.기도가 즐겁고, 지겹지 않고, 힘들지 않다.

7.쓸 데 없이 돌아 다니고 싶지 않다. 교회에서 늘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된다.

禁足(금족)의 은혜이다. 성령 충만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성령 충만을 잘 유지하려면 禁足(금족)의 삶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있는 장소와 공간, 만나는 사람, 가정 분위기, 교회 분위기 등이 너무 중요하다.

이제 새성교회에는 성령님의 충만함이 늘 머물 것이다. 성령님의 압도하심이 있을 것이다. 기름 부으심이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 될 것이다.

8.형통하고 축복이 넘치는 삶의 나날이 계속된다.

그 외 얼마나 좋은 일들이 자꾸 자꾸 생겨 나는지 모른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 늘 염두에 두라. 성령 충만이 식지 않게 하라.

성령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 들에게 성령 충만함을 그냥 부어 주옵소서.

부어 주옵소서.

은혜의 강물이 임하게 하소서.

성령님! 오시옵소서.

2004년 7월 26일 월 금식 금족 성령 서원기도 14일째

지난 주간까지의 기도는 지난 날들의 일기 들을 읽으며, 회개하고, 반성하고, 돌이키는 시간 들이었다. 이번 주간은 정말 중요한 시간 들을 가져야 한다. 금식이 진행되어 가면서 몸의 상태가 악화되기 때문에 큰 무리는 할 수 없으나, 방언을 통하여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가려 한다.

1.방언기도로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갈 것

2.성경 묵상으로 말씀을 많이 상고할 것

3.세미나 유인물들의 정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감을 받을 것

4.영적 독서로 깊은 영적 세계에 접목을 받을 것

어제 주일에 전격적으로 강대상을 치우고, 정리했다. 깨끗이 정리하는데, 하루가 걸렸다. 방금 정리를 끝내고, 기도자리에 앉았다. 아침에 교회에 돌아 와 어지러운 것들을 싹 정리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여기에 앉았다.

하00 집사가 교회에 와서 함께 성경을 필사하며, 같이 있다.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가겠다고 한다. 이제 단에서 강대상 없이 설교할 것인데, 마이크가 싸구려들 뿐이라 마음에 들지를 않는다. 그 중에 제일 나은 마이크 들을 사용해 보고, 좋은 것으로 하나 바꿀까 한다. 가능하면 쓰던 것을 그대로 쓰려 한다.

주님! 남아 있는 금식 기간을 축복하시고, 은혜로운 기도의 열매를 거두게 하옵소서. 아멘.

성령님! 저로 하여금 성령님의 깊은 세계로 들어 가게 하옵소서. 저는 성령님의 깊은 것을 모릅니다. 기도를 깊이 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멀어지게 하옵소서. 돈 냄새가 사라지게 하옵소서. 돈에 대한 염려에서 이제는 벗어 나게 하옵소서. 저는 낭비와 가난의 영을 이미 추방해 버렸습니다. 이제 저는 물질에 있어서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유한 자요, 앞으로 부유할 자입니다.

오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령님의 깊은 세계로 인도해 주옵소서.

주님!

허리를 고쳐 주옵소서.

치질을 고쳐 주옵소서.

신유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게 하옵소서.

허리여! 강해질지어다. 고침 받을지어다.

痔疾(치질)아! 치유될지어다. 脫腸(탈장)이여! 원위치로 돌아 갈지어다.

성령님! 이미 신유의 능력을 주셨으니, 강하게 하옵소서.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기도의 깊은 세계, 오랜 세계, 무시간성의 세계 속에 들어 가게 하옵소서.

이 새성 성전에 성령님의 기름 부음이 넘치게 하옵소서.

이 강단의 강대상에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은 청지기목사인 저 만이 누리는 권리입니다. 어느 누가 강대상에서 감히 기도할 수 있으리요?

저 만이 여기 강대상에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제가 성도 들의 제사장입니다.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여 진심으로 기도해야, 성령님의 깊은 세계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금식으로 몸과 마음이 깨끗함으로, 훨씬 수월하게 성령님의 깊은 세계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문을 열어 주옵소서.

믿음은 커야 하고, 은혜는 깊어야 한다. 성령 체험도 깊어야 한다.

성령님의 깊은 세계의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은 성령님 당신이시다. 그러나 그 문을 간절히 두드리는 자는 나 자신이다. 간절함과 정성과 소원이 성령님께 상달될 때, 깊은 성령 세계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아버지! 저로 하여금 온전히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의 깊은 바다에서 遊泳(유영)하게 하옵소서.

제가 두려운 것은 다시 성령 충만함이 식고, 세상으로 돌아 가 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성령님께서 저를 깊은 세계로 데려 가시옵소서. 제가 앙망하나이다.

너무 피곤하고 잠이 쏟아졌는데, 기도하다 앉은 자세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 그 자세로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연속으로 자세를 풀지 않고, 두 시간을 꼬박 앉아 있었다.

금식이 끝나면, 사람 영혼 찾으러 갑니다.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는 사람의 영혼 전부!

그 동안 저는 사람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사람들이 왔다가, 다 떠나 가 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감당하나요?

1.성실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부터 밤까지...

2.영혼을 진정으로 챙겨야 합니다.

3.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4.성령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긍휼과 은총을 구하여 금식, 금족(禁足), 성령, 서원기도하게 되었다.

성령님의 더 깊은 은혜는 어떻게 해야 올까?

애써 간구하는 수 뿐이다.

내가 찾아야 할 영혼 들의 명단을 들고, 간구하라.

내가 챙기지 못할 영혼 들은 부디 다른 사람 들을 통하여 챙겨 주옵소서.

저는 이제 이후에는 악하고, 게으런 종이 되지 않겠습니다. 부지런히 잃은 영혼을 찾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겠습니다.

제게 권능 주신 성령님!

다른 권능이 아니라, 잃은 영혼을 찾는 권능을 주옵소서.

주님이 이미 권능을 주셨습니다. 성실성이 필요합니다. 성실성이 있어야, 영혼을 계속적으로 챙길 수 있습니다.

이제 저의 제 일의 임무는 잃은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주보에 이름을 싣고, 기도 하겠습니다.

강대상에 네온싸인 십자가를 세우기 원합니다. 세우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 차를 바꾸기 원합니다. 바꾸어 주옵소서.

고장을 신경 쓰지 않고, 운전하게 해 주옵소서.

교회 전화를 속히 풀어 주옵소서.

돈이 없어, 교회 전화 마저 죽어 있습니다.

교인수와 교회 재정이 속히 플러스로 돌아 서게 하옵소서.

이성적, 상식적, 사회적, 현실적으로 아무리 타당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기도해 보고, 성령으로 분별한 다음에 아니면, 그것은 절대 답이 아니다.

성령님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우며, 무리함이나 과부족함이 없으시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억지로, 불의로, 인간적 수단 방법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

부디 이제부터는 경상비가 해결되고, 돈이 계속 여유가 있어서 흑자 경제를 유지하며, 교회의 성장 사업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경상비, 기본 사업비, 전도비, 성장 사업비, 양육비...... 가장 중요한 성령 사업비는 예산의 50%를 배정하여 오직 성령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지출 하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교회 재정은 절대 음식비, 친교비, 공짜로 교인을 위하여 쓰는 돈은 일체 지출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교인과 교회 경제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제 저는 철저하게 잘 관리할 수 있는 청지기목사입니다.

2004년 7월 27일 화 금식 금족 성령 서원기도 15일째

이번 주일낮예배는 방언기도와 통역으로 예배를 시작하라.

“사랑하는 성도 들이여!

이 시간 성령님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성령님의 세계로 들어 오십시오.

여러분이 사는 곳은 육의 세계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 죄악된 것들, 분요한 것들이 가득한 혼란의 세계입니다. 마귀가 주장하는 세계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은 성령님의 품 안으로 들어 오셔서 그 분의 품에서 안식 하십시오. 그 분의 생기를 받으십시오. 그 분의 능력을 공급 받아, 다시 세상에 나아 갈 때는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

성령님이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이 시간 성령 세례로 성령님이 여러분을 온전히 덮어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 주목 하십시오. 그 분의 기름 부음을 받으십시오.

평안을 누리십시오. 지치고 피곤한 여러분의 마음이 깊은 은혜와 충만함과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오시옵소서. 우리가 기다리오니, 만나 주시옵소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님! 사모합니다. 기다립니다. 당신의 보좌에 좌정 하옵소서.

우리를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인도 하옵소서.

저는 돈이 모자라지만,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것 만으로 살고, 절대 빚내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저는 오로지 목숨을 걸고, 저의 제일의 사명인 잃은 영혼을 찾겠사오니, 부디 저의 자녀들을 축복 하옵소서.

저로 하여금 성령 충만하게 하사, 구령의 사명을 다 감당하게 하옵소서. 저의 제일의 사명은 잃은 영혼을 찾아 데려 오는 것입니다.

성령님! 이 사명을 감당토록 힘을 주옵소서.

아무리 큰 목사이며, 남 앞에 서는 목사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한 목사들을 상종하거나 가까이 하지 말게 하옵소서.

오직 성령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새성교회 당회는 각 기관 대표와 장로 들로 구성합니다.

새성교회 장로의 자격

1.새성교회 장로는 온전히 섬겨야 합니다.

2.새성교회 장로는 온전히 복종해야 합니다.

3.새성교회 장로는 죽을 때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해야 합니다.

4.새성교회 장로는 3년 시무, 1년 안식년, 3년 시무, 7년 임기 후, 시무 장로를 사임하고, 사역장로로서 교회가 지명하는 사역을 나가야 합니다.

5.새성교회 장로는 자기 주장을 하거나, 성령을 거스리면 즉시 징계합니다.

매 주일 설교할 말씀은 성령님이 직접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번 주부터는 두 달 동안 성령부흥성회를 합니다.

말씀을 주옵소서. 그 첫 말씀은 성령 세례입니다.

금식 기간은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날까지 갑니다.

주님! 저는 이제서야 성령님을 알고, 성령 충만을 덧입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기 시작한 성령 초보 목사입니다. 제가 성숙하고,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가도록 길을 열어 인도해 주시고, 그 문을 열어 주옵소서. 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오직 깊은 기도, 오랜 기도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금식하려고 합니다. 오래 금식하여 그 문으로 들어 설 수 있다면 너무 좋겠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함이 성숙해져야 하고, 은사가 깊어져야 합니다. 성령님의 깊은 곳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다시는 육적 세계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더욱 더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저의 담임목사님이신 성령님!

저는 교회 부흥은 자신도 없고, 정말 할 수도 없습니다. 영혼은 성령님이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만 바라 볼 뿐입니다.

저는 다시는 육의 세계로 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더럽고, 짓눌리고, 염려, 근심이 많은 세계로는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추잡한 세계로는 정말 갈 수 없습니다. 제 스스로의 느낌에 그 세계가 얼마나 추잡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다시는 과거로 갈 수 없는 몸입니다. 저는 온전히 죽었습니다. 제 옛사람 배종부는 이제 죽어 없습니다. 과거의 사람들도 없습니다. 저는 새사람입니다.

금식하며 성령의 대행진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성령님의 깊은 곳까지 가야 합니다.

매년 12월 1일부터 1월 10일까지는 반드시 40일 작정철야기도회를 합니다.

몸에 살이 찌고, 기름기가 고이면, 기도의 자세가 불편해 집니다.

기도의 자세가 가장 편한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저의 체질이 기도 자세가 가장 편한 자세로 바뀌게 하옵소서.

이제는 더 이상 기도원이나 세미나에 돌아 다니지 않아도, 제단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영적 독서하면 스스로의 성장을 완성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제단 기도에 깊이 힘쓰겠습니다.

새벽에는 의미 없는 설교하지 말고, 성경을 읽고 묵상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미리 줄을 그어 두고, 그 말씀을 간단히 멘트 하고 넘어 가는 것입니다.

당분간 시행해 보려 합니다.

주님! 이번 금식을 기본적으로 31일을 작정하고, 최고 목표는 51일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21일, 31일, 41일, 51일 다리가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모든 미성숙함, 지저분함, 거칠음, 육적인 냄새, 유치한 감정 놀이, 참으로 부끄러운 대인 관계 등이 다 성숙되게 하옵소서.

방언기도는 겹기도(이중기도)입니다.

저는 다시는 육으로 돌아 가지 않기 위하여,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갑니다.

성령님!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데려 가시옵소서. 100% 성령님께 복종하고, 성령님께 붙들린 시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사탄이 다시는 저를 까부르지 못하도록, 성령의 큰 종이 되게 하옵소서.

사탄의 마수를 완전히 끊어 버리려면, 31일 금식은 넘어 가야 할 것입니다.

금식 10일까지 병마가 물러 갔습니다. 20일까지 모든 갈등과 방황, 길을 찾지 못함이 사라질 것입니다. 20일이 지나면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이 깊어지고, 은사가 精練(정련) 되어지게 하옵소서.

오늘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처음으로 제가 기도가 3시간 벽을 넘어 섰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합니다.

내일은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 벽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인도해 주옵소서.

방언이 빨라지고, 정신이 총명해지고, 기도를 더 하고 싶고, 성령님의 영감을 더욱 더 넘치고...

성령님!

제가 성령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언제나 복종합니다. 성령님의 발 앞에 엎드려 계시를 받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제가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저를 인도해 주시고, 그 문을 열어 주옵소서. 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3시간을 연속 기도 했더니, 기력이 다하여 정신이 非夢似夢(비몽사몽)이 되었습니다. 문득 제가 7년을 목회하고, 열매인 교인이 15명인 것이 생각나 부끄럽습니다. 중고등부는 1명 밖에 없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성령님! 악하고 게으런 종입니다. 無知蒙昧(무지몽매)한 종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불충한 것을 용서 하옵소서.

2004년 7월 28일 수 금식 금족 성령 서원기도 16일째

어젯 밤에는 교회 강대상에서 혼자 자는데 산발한, 목 없는 얼굴에, 피칠을 한 여자 귀신이 자려고 누운 내 옆으로 오더니, 천정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두려움은 크게 없었으나, 마귀 장난인 줄 알고, 기도로 물리쳤다. 기도의 초보 단계에는 이러한 귀신 들이 자주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힌다고 한다.

이번 주에 할 일은 오랜, 깊은 기도로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에는 반드시 메모지를 앞에 놓고, 주요한 영감을 멘트 하면서 기도해 나갑니다.

오랜, 깊은 기도를 통하여 오직 성령님의 깊은 곳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권00 전도사와 함께 기도하면, 특히 나를 위해 중보기도 하면, 이상하게 혼란스러운 미혹의 느낌을 받는다. 나의 기도가 약해서 그런지, 그의 주제 넘는 교만의 말들이 거슬려서 그런지, 여자가 남자처럼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거슬려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방해가 된다.

기도 속에서 나타 나는 강한 남성적 이미지는 정말 싫다. 넘치는 혈기도 싫고... 아아! 나는 여자의 그런 모습에는 정말 질린다.

그녀는 확실히 영적 교만이 있다. 기도가 설교하듯이, 남이 들으라는 듯이 하는 태도는 고쳐야 한다. 진심으로 간절히 위하는 중보기도여야지 그런 식으로 훈계하듯, 설교하듯 하는 태도는 정말 잘못이다. 기도할 때는 항상 자기가 영적으로 위에 있어서 목사를 영적으로 누르려는 느낌이 있고, 자기가 먼저 겪고 간 세계를 가는 목사를 교도(敎導)하는 느낌을 받는다.

영적 친화력의 차이도 있어서, 뭔가 이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목사가 이 정도이면 사모나 다른 교인은 백번 기도의 방해를 받을 것이다. 주의를 좀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3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녀는 양신이 들어 있는 사람인 것을 환상과 영분별로 알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2개월짜리 신학교를 나와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 교회에서 내보냈다.)

우리 마음 속의 모든 악한 것들, 행실, 감정, 악습, 못된 것들은 성령 충만의 적이다. 마귀의 것들이다. 한 사람에게 보통 2 - 300가지 정도의 악습, 죄성, 악한 영의 귀신이 붙어 있다고 한다.

000 집사는 확실히 목사에 대하여 교만, 거역, 불순종, 주제 넘음의 영이 있다. 그의 속에 있는 다른 영들의 관계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영적으로 많이 고쳐야 할 것 같다.

사람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예전에 정00 전도사와 유00 전도사가 전도 작정서를 제출하라 했을 때, 사표서를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전격적으로 두 사람을 잘랐어야 했다. 이후 겪어 본 바로는, 두 사람은 전혀 나의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았었다. 사람은 기본이 안되면 결국 아니다.

나는 앞으로 사람의 그릇됨을 빨리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성령이 인도하시고, 감동하시는 사람 관계가 중요하다. 앞으로 나는 교인 챙김에 있어서 절대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영감대로 할 것이다.

새벽기도를 철저히 하는 것을, 성령님이 지시하신다.

성령 충만의 비결은 예배의 은혜와 영적 독서의 충만이다.

생각하지 말고, 기도하라.

침묵기도를 훈련하라.

“관상기도”는 말씀의 텍스트를 통하여 깊은 묵상으로 들어 가는 기도이니, 설교에 꼭 필요한 기도 방법 같다.

2004년 7월 29일 금 금식 금족 성령 서원기도 18일째

어젯 밤에는 천보산 기도원 철야 집회에 참석하여, 전00 목사님으로부터 3번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돌아 왔다.

“성령 충만”은 지속적인 영적 훈련, 기도 훈련, 금식 훈련으로 된다.

금식, 금족기도를 하는 중인데, 철저하게 수행해 왔다. 이번 만큼 나의 기도가 정결하게 주님 앞에 예물로 드려진 경우는 내 생애에 없었던 것 같다. 지난 날의 나의 금식 들은 예비 훈련 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날 금식하면서, 하나님이 제대로 받지 않으시는 행위들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도 계속 금식을 한 것은 은혜였다.

훗날 시간이 되면, 나의 금식일지를 한 번 만들어 볼 생각이다.

주님! 저의 걸음을 하나 하나 가르쳐 지도해 주옵소서.

2004년 7월 30일 토 금식 금족 성령 서원기도 19일째

하용조 목사의 테이프 중에서...

성령충만해지면 사람과 부딪칠 일이 없어진다.

사람과 부딪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고치시는 손길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성만찬에서 눈물이 있어야 한다.

찬송에서 은혜가 있어야 한다.

말씀에서 능력이 나와야 한다.

예배에 가슴 벅차 울어 본 적이 있느냐?

목사여! 예배를 인도하며, 그대의 가슴이 설교를 못할 정도로 가슴 벅차 본 경험이 있느냐? 목청이 터져라 울면서 성령님의 원음을 폭발적으로 쏟아낸 적이 있느냐? 그런 불타는 가슴 없이 어찌 설교자라 하리?!

인간적으로 만든 틀 속에서는 절대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온전한 자유의 영이시다.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차단하라.

사탄아! 물러 가라.

“또 마귀가 꼬리를 치는구나! 언제까지나...”

내가 다시는 과거로 돌아 가지 않으리라.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는 메마른 예배는 절대 아니된다. 성령 충만하여 예배와 설교가 살아야, 모든 교회의 영역이 다 살아 난다. 예배와 설교가 죽으면, 다 죽어 버린다. 예배와 설교에 눈물이 솟구치는 은혜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

성가대와 장로 기도 때문에 예배가 다 죽어 버린다. 목사의 목회기도로 바꾸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다. 인간이 살아 있고, 인간이 설치는 예배! 이것이 문제이다.

장로의 영성이 어찌 목사를 따라 오겠는가? 장로에게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을 기대하라.

찬양에서 손을 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처음에는 손을 들라 하면 벌레 씹은 표정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훈련했더니, 서서히 손이 올라 갔다.

어느 날 나는 가운을 벗어 던졌다. 옷 차림에서 자유해졌다.

“나의 오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성령님이 가장 잘 역사하실까? 어떻게 해야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가장 잘 임할까?”이것 뿐이다.

(하용조 목사님의 말은 어쩜 그렇게나 나와 똑 같을까? 성령의 종들은 항상 한 길로 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껍데기를 다 벗어 던졌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만 한다.

성령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라.

교인이 7년이 되면, 교회를 떠나라 한다.

나는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꿈꾼다.

1.성령님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2.평신도가 움직이는 교회

3.선교가 움직이는 교회

성령 충만은 뭐니 뭐니 해도 기도이다.

기도 충만하라. 자꾸 기도하려고 하라.

기도의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을 비워 두라.

4시간 연속 방언, 성령기도!

다음은 어제 4시간 연속 성령기도의 내용이다.

제단 기도보다 소중한 기도는 없다. 제단에 꿇어 앉아 오래, 깊이 기도한다. 기도의 벽이 5시간, 7시간을 넘어 가야 한다.

성령 충만으로, 성령의 생수가 넘치게 하라.

주님! 제가 성령의 샘을 깊이 파겠사오니, 생수가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솟아 올라 넘쳐 흐르게 하옵소서.

교회 부흥에, 예배 인도에, 말씀 선포에, 찬송 인도에, 기도 인도에, 동역자 동역에, 가족 건강에, 물질 축복에, 범사에 풍요의 성령님의 생수가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샘과 생수를 다시 배우고, 성령의 생수의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라.

저의 예배 인도 현장에 성령의 생수가 솟고, 성령님이 나타나 주시옵소서.

저의 말씀 선포 현장에, 찬송 인도 현장에, 기도 인도 현장에, 성령님! 나타나 주시옵고, 성령님의 생수가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우리 가족 모두의 건강과 안전에, 저를 통한 물질의 공급이 교회에, 사모에게, 자녀에게, 어머니에게, 형제 자매에게, 충성된 동역자 들에게, 성도 들에게 넘치게 하옵소서.

이번 주 설교는“성령 충만”입니다.“성령 세례”로 넘어 가려 했는데,“성령 충만”의 개념을 확실히 성도들에게 심어 주고, 넘어 가야 하겠습니다.

말씀 묵상을 어떻게 깊이 할까요?

매일 말씀 묵상의 시간을 따로 한 시간 이상 떼어 놓아야 겠습니다. 그 시간은 순수히 성경 말씀 만을 가지고, 깊이 깊이 성령님께로 들어 가, 성령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나타 나시기를 사모하고, 또 사모하라.

제가“성령 충만”해지고, 이제 바야흐로 축복의 문, 은혜의 문, 은사의 문, 권능의 문, 기도의 문, 말씀 선포 능력의 문, 찬송의 문이 열리려고 합니다.

성령님! 깊이 인도해 주옵소서. 내일로 작정한 금식 20일이 끝나지만, 금식 만료일도 성령님이 다시 정해 주시고...

금식은 일단 제 마음으로 31일을 작정해 보는데, 가능한지 가르쳐 주옵소서. 금식을 풀면 성령 충만함이 식을 것 같아 차마 풀지를 못하겠습니다. 아직 주님께 분명히 받은 것이 없는데...

8월은 계속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리하여 성령님의 모든 것이 나에게 터지고, 나타 나고, 얻어야 합니다. 9월부터는 잃은 영혼 찾기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잃은 영혼을 찾는 일은 성령님의 권능을 입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님! 제게서 이제 성령님의 모든 것이 터져야 합니다.

지금 터지려고 합니다. 끝까지, 깊은 곳까지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로 하여금 온전한 성령의 종 되어 영권, 인권, 물권을 다 소유하게 하옵소서.

풍부하게 소유하여, 만인을 유익하게 하옵소서.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님이 예비하신 모든 선물 들이 다 임하게 하옵소서.

내가 단돈 만원 여유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돈 사용을 연단하심이다. 나는 빨리 이 훈련을 끝내야 한다.

“성령 충만”은 겸비하게 구하는 자에게 온다.

내 가진 天品(천품), 性品(성품)이란 것은 정말 보잘 것 없다. 그나마 쓸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선물이다. 어디 내세우고, 자랑할 만한 것이 어디 있는가?

그저 겸손, 또 겸손해야 한다.

내가 겸손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겸손하라.

그러나 내게 있는 이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성령님께 붙들리면 놀라운 것들로 탈 바꿈 한다.

성령님! 권능을 부으시고, 생수를 부으사, 마음대로 쓰시옵소서.

저와 저를 위해 빚 보증을 서 준 이00 집사, 아들 진성이 빚을 속히 정리하게 해 주옵소서.

성령 충만은 전적 개인의 경험이다. 내가 직접 겪어야 한다.

성령님!

제게 성령님의 모든 것이 터지기를 원합니다. 받기를 원합니다. 깊은 곳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기도의 능력을 받지 아니하고, 어찌 남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습니까?

자기가 말씀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 가지 않고, 어찌 남에게 말씀을 은혜를 끼치겠습니까?

자기가 찬송의 영감 없이, 어찌 남이 찬송에 은혜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자기가 온전히 성령님의 깊은 곳에 도달하여 터지고, 받고, 소유치 않고서, 어찌 남에게 성령님을 나타 내겠습니까?

가라. 깊은 곳으로 가라. 온전히 성령의 강물에서 遊泳(유영)하라. 성령의 깊은 곳으로...

一心(일심)으로, 그 곳을 향하여 가라.

주님! 이번 주부터는 제가 온전히 예배를 다 인도합니다. 금식하지만, 찬송 인도는 음악마이크와 키보드 반주를 겸용하여 인도합니다.

내 속에 없는 것을 어찌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

주시옵소서.

저로 하여금 더 이상 이론을 말하고, 책을 말하고, 주워 들은 것을 말하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이제는 내게 있는 것을, 내가 받은 것을, 성령님을 통하여 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제 저의 인도하는 예배는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시고, 나타 나실 것입니다.

이제 이후, 제가 인도하는 예배는 항상 성령님이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이 점을 이제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그 확신이 분명히 왔습니다. 제가 할 일은 온전히 성령 충만하여 단에 서는 일입니다.

더 이상 육적 목회는 안됩니다.

영적 법칙 4가지

1.심은대로 거둔다.

금식, 기도, 헌신, 충성, 헌금, 진심...

새성교회에서 금식의 은혜를 받았다.

2.말씀으로만 역사한다.

3.사랑으로만 결실한다.

4.성령 충만한 만큼 되어진다.

저는 오직 성령님을 따라 행하기를 원합니다.

말씀 1장을 붙들고 한 시간 이상을 묵상하라. 그리고 깊은 성령님의 그 말씀을 받으라.

모든 집회 첫 순서에 방언으로 성령 기도하고, 영 분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역사를 선포함이 좋다. 그리하여 온 회중에 그 첫 기도에 온전히 성령님께 사로 잡혀 버려야 한다.

성령님과의 대화기도

성령 충만해지면 성령님과의 대화기도가 가능해진다.

방언기도 1시간 반 후에, 너무 목과 입이 아파 침묵 기도하며, 성령님과의 대화하여 받은 내용 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크게 들어 쓸 것이다.

네게 세계의 문이 열렸다.

너는 온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가 될 것이다.

배목사야! 온전히 성령 충만하여라. 조급하지 말라. 욕심 내지 말라.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내가 너를 인도한다.

내가 너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나, 너는 그 영광을 다 내게로 돌릴 것이다. 너는 겸손한 종이니까!

그러나 인간적으로 겸손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온전히 겸손해져라. 아멘.

네가 무엇을 받고 싶으냐?

가장 사모하는 것! 성령님의 깊은, 오묘한 말씀의 능력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 설교를 들으면 영적 눈이 뜨이며, 인생의 길이 보이는 바로 그 성령님의 말씀! 그것이 받고 싶습니다.

“내가 이미 주었다. 네가 이제 나타 내리라.”

“아멘. 믿습니다.”

가정과 자녀 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진정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제 자녀들, 저 가난하고 돈 없는 아빠에게서 자라는 불쌍한 아이 들을 주님께서 온전히 지켜 주옵소서. 건강으로, 안전으로, 주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침묵 속에서 계속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

묻고 대화하고...

“지금 금식 기도하고 있지 않니?

계속해! 중단하지 말고...

내가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돈에 대해 염려하니?

내가 다 알아서 채워 주마.

빚은 내가 해결해 줄께! 염려 안되지?

네!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너는 제 2의 조용기 목사이다. 조용기 목사는 엘리야요, 너는 엘리사이다. 네게 갑절의 영감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너를 엘리사처럼 쓸 것이다.

아멘. 제가 믿고, 감사 드립니다.

영감과 능력은 오직 주님 만이 주시는 것이다. 나는 사모하고, 부르짖고, 매달리는 것 뿐이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때, 모든 것이 완성된다.

성령님!

저와 성령님은 정말 가까우시죠?

그럼! 너와 나는 하나지!

너는 다시는 육으로 돌아 가지 않아!

너는 이미 내 품 속 깊은 곳으로 들어 왔어!

돌아 갈 수 없는 곳까지 온 것이지!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성령 충만은 마음의 깨달음으로 온다.

성령 충만은 마음의 확신으로 온다.

목사를 기쁘게 못하는 교인은 어찌할까요?

그냥 내버려 둬라. 사람은 다 그릇이 있단다.

너의 감정을 중요치 않아! 나 성령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너는 크고 좋은 그릇이다. 빛나는 그릇이다. 금 그릇이다. 네가 청년 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욥기 23:10절의 말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신 말씀이 이제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의 더러운 때를 다 지웠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정결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교인을 품고 사랑하되, 정 안되는 사람은 일군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

사모는 너의 피해자지. 너의 죄얼을 다 가져 갔다.

잘 해 주어라.

예.

동역이 가능합니까?

동역해야지. 동역자 들이 올 때까지만...

저는 기존에 물든 장로는 세우지 않습니다.

그래! 성령 충만하면 동역자가 온다.

이제 내가 아론과 훌을 보내 주마!

아론은 신앙과 인격이 너의 울이 될 것이다.

훌은 온전한 복종의 장로이다. 그는 큰 부자이다.

아론을 먼저 보내 주고, 훌을 보내 줄 것이다.

아멘.

성령 충만하면 풍요와 기쁨, 넘치는 형통함이 있다.

너는 가정과 아내와 자녀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가정과 가족의 동역을 맛볼 것이다.

이제 그만 묻고, 너는 오직 나만 따라, 성령의 길을 걸으라.

예. 주님!

저는 아무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주님께 다 맡겼습니다.”

주님! 제게 영 분별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충만케 하사, 영적 눈이 열려 보게 하옵소서.

분별력을 주옵소서. 제가 어리석고, 잘 속는 것은 주님이 아시지요?

감정에 흔들리는 약점도 주님이 잘 아시구요.

이제는 더 이상 마귀나 사람의 노리개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의 마음의 결심과 작정을 성령님은 귀하게 보시고, 그 위에 기름을 부으신다.

거룩한 결단을 많이 하라.

오직 성령으로 행하라.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고...

주님! 자녀로 인하여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성령목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내일부터 저의 과거는 끝났습니다.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전개됩니다.

고난은 이제 끝났습니다.

새역사가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나의 가는 길은 오직 주님 만이 아십니다. 나도 압니다.

그것은 성령의 길, 축복의 길, 주님 도움의 길, 은혜의 길입니다.

이제는 나의 죄나 개인적, 육신적, 인간적 문제로 고난 당하지 않고, 오직 주님 위하여 수고하고 고난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주님! 저를 온전히 드렸으니, 마음껏 쓰시옵소서.

오늘 5시간 기도의 벽을 넘어 가기 원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제가 오직 성령님의 외길을 걸을 때에, 성령님은 가장 아름답게, 풍성하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전도하게 된다.

전도의 은사, 인도의 은사를 충만히 부으사 사람 들을 인도하고, 잃은 영혼 들을 다 찾게 하옵소서. 건져 내게 하옵소서.

성령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목회적 영역에서 성령님이 다 부어 주셔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고, 나타나지 않으시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저와 함께 해 주옵소서.

저는 성령님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소용 없으니까!

사랑하는 주님!

이제 <성령의군대의 대행진>이 시작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온전히 인솔하여 주옵소서. 강단 전면에 글씨를 게재합니다. 동남풍이 불어도, 서북풍이 불어도 이 <성령의군대의 대행진>을 절대로 막을 수 없습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앞장 설 것입니다.

5시간 기도의 벽을 향해 가고 있다.

그제는 3시간의 벽을 넘었는데...

꿈과 비전은 성령님이 주시오니, 저를 인도 하옵소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 나의 생각, 미혹의 역사도 있을 수 있다.

바른 성령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힘쓰고 애써 노력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기도 4시간 돌파!

이런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방언기도는 때때로 무의미성에 빠지기도 하지만, 나는 내 영이 방언으로 성령님께 직고함을 굳게 믿고 의심치 않는다. 그 의미를 몰라 때때로, 어느 반성령론자가 말했듯이,“뜻도 없는 주절거림”같은 느낌이 들지만...

저는 잘 모르지만 방언 기도하면 영이 깨끗해진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저의 이성에서는 이러한 기도 들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 내용은 오직 방언기도, 성령기도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보화 들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온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주님께 오래 기도하면 그 만큼 많은 것, 깊은 것을 얻는다.

성령님! 저는 그저 기도하고 나아 가오니, 성령님이 그저 인도해 주옵소서.

오랜 기도는 할 수 있는데, 깊은 기도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인도해 주옵소서. 저는 단지 오래 기도 하겠습니다.

영적 독서가 너를 깊게, 넓게, 크게 만들 것이다.

그 속에 성령님의 깊은 세계, 영성이 다 들어 있으니, 영적 독서에 부지런 하라.

이제는 30분 기도는 마치 10분처럼 지나 가 버린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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