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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의 가정

하나님아들 2013. 1. 19. 16:34

사랑의 가정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엡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이어령의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사랑을 음료수의 성질로 바꿔 본다면 우유와 포도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유의 사랑은 영양가만 있어 그냥 맹숭맹숭하게 살만 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담그자마자 마셔서는 안됩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묵힐수록 제맛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시간과 함께 발효하게 됩니다. 포도주는 우리에게 기다림과 참을성을, 그리고 한방울의 가장 값진 한순간의 그 도취를 위해서 오랜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유는 짜내는 그 순간이 가장 신선한 것입니다. 조금만 묵혀 두어도 변질되고 썩어 버리고 맙니다. 보자마자 마셔 버려야 불안하지 않은 것이 우유의 특성입니다.
미국 문화로 상징되는 현대의 우유문화는 빨리 소비해 버리는 것, 먹어 없애는 것, 발효를 거부하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란서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포도주의 문화는 소비보다 발효되는 창조의 그 시간이 더 길고 묵을수록 완전하다는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요즈음의 인스턴트 러브는 우유의 문화, 녹기 전에 먹어버리는 아이스크림 문화의 대표적인 풍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을 구경하던 미국 관관객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석굴암의 부처는 과연 파란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자비의 극치를 나타낸 <기적의 돌>로 비칠 것인가? 나는 호기심을 품고 그들의 말을 몰래 엿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닙니다. 무엄하게도 말입니다. 금발의 파란 눈의 한 여인은 부처의 엉덩이쪽을 손가락질하면서 킬킬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투 패트!(too fat, 야! 너무 살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투 패트--. 지금도 나는 그때의 충격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상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불상은 너무 살이 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당신도 생각해 보십시오. 연화대에 앉은 부처를 십자가에 매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 뚱뚱한 예수, 배가 나온 예수, 체중이 레슬러처럼 100kg이 되는 예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에서 보듯이 그 분은 뒤틀린 철사처럼 야위어 있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자비와도 또 다른 것입니다. 자비는 연민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희열만이 아니라 위험과 비탄과 어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것은 편안함보다 <야윈>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입니다.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초상집을 잠시 들여다 보십시오. 제일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이야말로 생시에 그 고인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입니다. ..... 나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는 원죄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가 초상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였습니다. 고통의 못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손바닥에 찍힌 그러한 못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의 것보다도 작고 희미할 망정,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의 상흔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마굿간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같은 괴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편안한 삶, 살쪄가는 삶, 부유한 삶을 원한다면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그 못자국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서로의 마음을 열어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머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준 그 분이 이따금 예고없이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 중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는 말씀에 기초되는 것은 바로 남편이 아내에게 나타내 주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랑은 첫째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게서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위해 그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은 사실이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결코 폭군과 같이 통제하지 않는 사랑과 아내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한 남자가 50세에 재혼했습니다. 신혼 여행 때 가게의 진열장에 진열된 진주 목걸이를 구경하며 부인이 "저렇게 예쁜 목걸이는 굉장히 비쌀텐데,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 진열하겠지요?" 하고 불쑥 말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났을 때, 이 부인은 불치의 병에 걸렸으며 의사는 남편에게 그녀가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상황를 알려주었습니다. 마침 결혼 10주년 기념일이 되어, 이들 부부는 자기들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아 주었던 포터 목사를 집에 초청했습니다. 남편은 이미 60세인데 실제로는 70세 정도로 늙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농사꾼, 그것도 몹시 가난한 농사꾼이었습니다. 조촐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이 남편은 부인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숨겨 두었던 진주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부인의 목에 걸어 주었습니다. 목걸이를 본 부인은 몹시 놀랐습니다. 그것을 살 돈이 남편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훔쳐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때 남편은 설명했습니다. 그는 결혼 당시 아내에게 진주 목걸이를 사 줄 결심을 하고 좋아하던 담배와 맥주를 끊었고, 심한 노동을 하면서도 콜라 한 병 마시지 않았으며, 푼돈을 10년 동안 모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What made you do it?)"라고 묻는 아내에게 백발이 된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포터 목사는 "그 큰 남자가 유난히 작은 부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함께 울던 장면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라고 술회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1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 인내와 절제와 희생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단 하나의 동기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깨끗이 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고전 학자인 버랄(A.W.Verrall)이 말하기를 고대문명이 사멸한 중요한 병폐의 하나는 여성을 낮추어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성을 매우 낮추어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아침 기도문 가운데는 유대인 남자들이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만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여성에 관한 유대인의 모든 율법을 저하시킨 것은 유대인의 법에서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한 것 때문입니다. 여자는 아무런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전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었으며 남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혼도 남편의 마음대로였습니다. 이혼법은 신명기 24:1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신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유명한 샴마이가 주동이 된 엄격한 랍비들은 "수치되는 일"이란 구절이 오직 간음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그 아내가 이세벨과 같은 악처라 할지라도 간음한 사실이 아니고서는 남편이 그 아내를 이혼시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보다 더 우세한 자유주의적 학파의 아키바라고 라는 랍비는 "기뻐하지 아니하거든"는 구절을 만일 남편이 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그는 자기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율법을 더욱 더 악화시킨 것은 다음과 사실들입니다. 첫째, 아내는 그 남편이 문둥이나 배교자나 아주 흉한 직업을 가지게 되거나 하지 않는 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유대법에 의하면 남편은 어떤 이유로든지 아내와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이유로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결혼법에 있어서 여자는 아무런 힘도 없으며 보호받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로, 이혼 수속은 비참할 정도로 용이합니다. 어떤 남편이 그 아내와 이혼하기를 원하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기만 하면 됩니다.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아내가 가져왔던 지참금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될 당시 결혼제도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헬라의 형편은 더욱 더 심각했습니다. 헬라인의 생활에서 불가결한 요소가 바로 매춘행위였습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자녀를 얻기 위해 아내를 얻었고, 또 모든 집안 일을 충실히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아내를 얻었습니다. 헬라 상류 사회의 부인들은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부인은 절대로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절대로 혼자서 거리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식사시간이나 사교적인 모임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헬라에는 법적인 이혼 수속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헬라에 있어서는 가정생활이나 가족생활이 거의 소멸될 단계에 있었으며 절개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바울 당시의 로마는 어떻했는가? 로마의 가정생활은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세네카는 부인들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며,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의 분위기는 간음으로 꽉차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순결은 증대하는 사치 문명 속에서의 하나의 조난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가정의 참된 사랑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이들 말고는 여자들처럼 그리스도께 신세를 진 사람들이 또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인들 하나하나가 신앙고백을 할 때 물로 씻어 주는 것으로 교회를 깨끗케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세례의 물로 씻고, 신앙고백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자신에게 합당하게 깨끗하고 흠이 없고 성별된 것으로 티도 없고 주름잡힌 것도 없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사람을 끌어내리는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거짓된 사랑입니다. 인격을 순화시키는 대신 거칠게 하는 사랑, 거짓을 말하게 하는 사랑, 도덕적인 기질을 약화시키는 사랑, 인간을 더 악한 인간으로 만드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생명을 깨끗케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돌봐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 하여야 합니다. 참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봉사를 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육체적인 위로를 보증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자기의 편의를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남편이 아내를 단지 밥을 짓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집안을 청소하는 사람,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일종의 영원한 종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중이 돌봐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옵니다. 거실에는 아이들의 옷이랑 장난감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습니다. 부엌에는 아직도 씻지 않은 접시와 컵들이 쌓여 있습니다. 피로한 남편은 불쾌한 낯으로 소파에 몸을 던집니다. 남편은 자기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에 아내이자 아이들 엄마인 부인이 하루 종일 낮잠을 자거나 TV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엄마는 무척 바빴습니다. 한 살, 세 살, 다섯 살난 세 아이를 돌보며 32회 기저귀를 갈았고, 71회 숟가락을 아이들 입에 대주었으며, 화장실 변기에서 노는 아이들을 13회 밖으로 끌어냈고, 우는 아이들의 눈물을 49회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습니다. 상처난 아이들의 손가락에 9회 반창고를 갈아 붙였고, 32회 손을 씻어 주었습니다. 속옷, 겉옷 등 옷을 입히고 벗기고 한 것이 64회였는데 세 아이가 18회 옷을 더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네를 밀어준 것이 623회입니다. 남편이 돌아올 무렵 엄마는 무척 지쳐 있었습니다. 평화스럽게 잠든 아기의 얼굴만이 땀에 대한 유일한 보상인 이 젊은 아내에게 남편이 찌푸린 얼굴로 돌아 앉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행동입니다. 아기 엄마의 작업량에 대한 위의 숫자는 교육학자 쿠즈마 박사가, 젊은 엄마로서 직접 세 아이를 키우며 어느 날 통계를 내 본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세 아이를 18세까지 키울 경우, 엄마가 이 아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시간은 1만 8천 시간입니다. 코넬대학의 두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이 둘을 키우는 가정의 경우 직장을 가진 주부는 하루 평균 4시간을 가사와 양육에 할애하고 있었고 남편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시간당 노동의 가격을 8달러로 치면 어머니는 두 아이와 청소, 부엌 일 등을 위하여 연간 1만 2천 달러의 일을 자기의 직업 이외에 하고 있는 셈입니다. 못 아버지들이 고개를 숙일 만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니콜리 교수는 "두 아이를 18세까지 양육하는 어머니는 그녀의 전생애의 3분의 2라는 시간을 바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란 이름은 과연 희생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아내를 돌봐주는 남편의 마음이 참사랑인 것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남편과 아내의 모든 관계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주님 앞에서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있을 때 참사랑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가정을 사랑의 눈동자로 바라보시며 가정의 평화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신 가정들이 되시므로 건강한 가정, 건강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알베르트 카뮈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기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카뮈를 낳은 지 1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카뮈를 키웠는데 그녀는 거의 평생을 알제리에서 가정부로 일을 했습니다. 아들 카뮈는 세계 정상을 달리는 지식인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교육도 받지 못한 노동자였으며, 더구나 남편이 죽을 때쯤부터 완전히 귀가 먹어 아들과의 대화조차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카뮈는 다음과 같이 어머니를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없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랑의 눈동자는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에게 만족과 용기를 주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출처 : 둥근달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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