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마르다 도마의 신앙고백과 기독교
(김승연 목사)
현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총회 파송 독일주재선교사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기독교
어느 신학교에서 시험이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한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드는 순간 앞이 깜깜해지더니 정답은 고사하고 시험지에 쓰인 문제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답을 쓰긴 써야겠는데 큰일이었습니다. 시험 시간 내내 끙끙 거려도 문제고 정답이고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험 종료 시간 전에 동정 점수라도 얻을까 하여 간단하게 한 문장을 써서 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교수님이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별 희한한 답안지를 보았습니다. 그 답안지가 얼마나 희한하든지 지난 수십 년간을 신학교에서 가르쳤지만 예전에 단 한 번도 그런 답안지를 본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교수님은 도대체 이 학생에게 몇 점을 주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학생이 쓴 답안이 전혀 틀리지 않는 정답이긴 한데, 그렇다고 100점을 주자니 만일 그게 소문이라도 나면 이젠 그 학생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시험 전에 공부는 하지 않고 시험지에 그런 답을 쓸 것 같으니 100점을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0점을 주자니 그 학생보다는 하나님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준 점수가 “하나님은 100점, 너는 0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역시 항상 시험을 치러야 하고, 또 그 시험은 통과해야만 합니다.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시험을 치렀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시험문제를 제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제자들은 앞을 다투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 제자들이야 그동안 예수님을 수행하면서 군중들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의해 가장 정확한 답이라 확신했겠지만, 제자들의 중구난방식 답변이 예수님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첫 번째 문제에서 정답이 나왔으면 두 번째 문제를 내지 않으셨을 텐데, 그렇지 못하셨기에 두 번째 문제를 제출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그렇다 치고 너희들은 그동안 나와 2년 이상 동고동락하면서 내가 한 말을 다 듣고 내가 한 기적을 다 보았으니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랬더니 다른 제자들이 손들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며 숨넘어가듯 외쳤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적인 답을 들으시고 대만족하시며 주신 점수가 바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숫자로, 아니 천문학적인 수로도 표현할 수 없는 대 축복이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결국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무식한 베드로, 다혈질인 베드로가 이번에는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절대 진리인 성경에 의해 시작된 유일한 종교이지만 그 종교를 믿는 신도들의 신앙고백의 기초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같은 자기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역시 베드로의 신앙고백 같은 고백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 시간이라도 자신의 팡세와 같은 신앙고백을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뿐 아니라, 베드로와 같은 복을 받읍시다. 아멘.
마르다의 신앙고백과 기독교
예수님은 3년 동안 열두 제자와 함께 남방 유대와 북방 이스라엘을 오가며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일정한 거처를 마련해두고 사역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갈릴리 지역 가버나움은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의 고향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없었지만, 기타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 예루살렘 지역에서는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산에서 쉬는 식이셨습니다(눅 21:37).
딸린 식구만 해도 장정 열둘이니 우선 숙식이 문제였을 것입니다. 매식을 할 경우, 한 끼니 식사 값만 해도 한두 푼 아니었을 것이고, 숙박비 또한 장난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3년 동안의 모든 경비를 어떻게 충당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더욱이 안타가운 일은, 복음서를 읽어보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예수님의 독백이 나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마 8:20)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기독교인으로서 그 독백을 읽노라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저며 옵니다.
베다니라는 촌 동네에 사는 귀감이 될 만한 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 가족은 구약 엘리사 선지자를 위해 ‘담장 위에 최초의 옥탑 방을 만들고 침대와 책상과 촛대를 진설하여 영접’(왕하 4:10)했던 수넴 여인처럼, 지나가는 행인과 나그네를 영접한 아브라함과 사라처럼(창 18:1~8),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뜻하게 영접하여 음식을 융숭하게 대접한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가정에 갑자기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나사로의 누이들이 생각나는 분은 다름 아닌 만병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마침 예루살렘 지경에서 사역을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마르다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죽을병에 걸린 나사로의 긴급한 사정을 SOS 하면 열일을 제치고 달려와 병을 고쳐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계획된 일정을 다 마치신 후에야 오셨습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어 장사한지 나흘이나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친 동기간처럼 여기고 지내왔기에 얼마나 원망스럽고 섭섭한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불평불만을 터뜨립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제 오십니까? 이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 그동안 불만으로 심기가 뒤틀린 마르다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틀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그간의 모든 섭섭함과 불평, 불만을 일소하고 마음을 바꾸어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예수님은 곧바로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 서셔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셨습니다. 장사 지낸 지 나흘이 된 지라 썩어 냄새 나는 나사로였지만, 얼굴과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병든 나사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의심과 불평, 불만의 산물이 아닌 믿음의 산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도 이처럼 마르다의 신앙고백과 나사로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도마의 신앙고백과 기독교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그런데 “열 손가락은 한 손에 붙어 있으나 그 길이와 굵기가 각기 다르다.”는 말들을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역시 사명과 사역으로 볼 때는 다 같으나, 개성으로 볼 때는 각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3년간 사역하실 때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부활신앙의 지각생 도마의 신앙고백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3년이라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에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그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소 엉뚱한 데가 있었는가 하면, 부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시기 전 사역의 의미를 말씀하실 때에 다른 제자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는데, 도마는 나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0)고 했던 제자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 천국을 예비하기 위해 승천하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역시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요 14:5)라고 반문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데, 그리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다른 제자들은 염려되고 불안해서 한 데 모여 있을 때인데, 도마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외출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성경을 살펴보면,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요 20:24)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자신의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을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요 20:20) 그런 일이 있은 후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던 도마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도마를 반갑게 맞이하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사실과 부활하신 육체를 보여주신 뉴스를 이구동성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도마의 개성대로 그의 반응은 전혀 의외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다른 제자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을까요? 제자들은 불신한 도마로 하여금 주님의 부활 사실을 인식시키고 믿게 하기 위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헛수고였습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신앙고백은 성령이 아니고는 안되는 모양입니다.(고전 12:3) 그리하여 도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숱한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회의론자, 실증론자, 현실주의자, 부활신앙의 지각생 등등.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다시 집안에 모여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들을 두려워함으로 굳게 문을 닫고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이 방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다짜고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때 도마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맙니다.(요 20:25~29) 그래서 도마는 늦게나마 불명예를 회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도마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도다”는 말씀처럼 우리 모두 신앙고백을 통해 믿음의 복을 받읍시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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