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스크랩] 종말론 강해 강의:서 철 원 교수

하나님아들 2012. 11. 27. 16:37

종말론 강해

강의:서 철 원 교수


제 1 강


요한계시록 20장 1절에서 6절 입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비도 오고 한데 이렇게 많이 오신 것 감사하고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제가 이런 강의를 할 것으로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작은 학교에서 작은 학생들 앞에서만 강의를 해서 그런지 학교 밖에서 강의를 해 주기를 바라는 그와 같은 요구가... 그래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을 하고 제가 마침내 한번 이 일에 봉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2월 부터서 강의하면 좋겠다는 요청이 많았지만 장소 문제도 어렵고 해서 2월 부터 못하고 3월 부터도 못하고 이렇게 4월 중순에 와서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저녁 비가 오고 해서 오시기도 불편했을 텐데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오신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환영합니다. 이 강의를 시작하도록 작정을 하고 이 일을 주관하시는 분들하고 의논을 할 때에 무슨 강의를 하면 좋겠는가? 조직 신학 전부를 다하고 현대 신학까지 하는 것이 좋겠다. 거기다가 변증학도 강의를 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까지 부탁을 했습니다마는 첫 학기는 종말론을 강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서 제가 이번 학기는 종말론을 강의하기로 생각을 하고 광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증상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나라들은 정말 그들의 생존을 지켜 내는 문제가 큰 문제여서 거기에만 정신이 다 팔려 있겠지만 그래도 좀 잘 사는 나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 현세에 있고 또 현세에서의 잘된 것들에 우선하고 모든 생각이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또 다른 면으로 주님의 재림의 긴박성을 말하고 이를 위하여 교회가 준비해야 될 것을 아주 강하게 선전하고 호소하고 그런 현상을 우리 눈 앞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 보면 어떤 것들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회가 점점 부가 팽창하고 잘되어 가니까 사람들이 현세에서의 부요한 생활과 그리고 더 나은 생활의 향상을 위해서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종말의 세계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거의 다 잊어버리고 있는 그와 같은 때에 한쪽에서는 주님의 재림의 긴박성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준비하도록 외치는 것은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의 종말에 대비해서 살도록 하는 그런 경종으로 우리가 받아야 되고 또 그것에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특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모든 삶이 종말에서 부터서 주님의 재림으로 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이 자기들의 지상의 생존기간 동안에 이루어질 걸로 믿고 또 그들이 매일 매일 삶을 살 때에 주님이 오셨을 때에 그 앞에 나타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준비하는 거룩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저녁에 잠을 자면 내일 아침에는 틀림없이 주님이 오시겠지 하는 그와 같은 막연한 기대와 소망이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대와 소망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 자고나면 분명히 내일 주님이 오실 것이다” 그와 같은 확신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인들로서 거룩한 삶을 살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는 다 사회가 변화되고 또 새로워지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몰트만이 “소망의 신학”이란 책을 1964년에 출판했는데 그 1964년에 나온 “소망의 신학”의 서론 부분에 제가 했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개괄적으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적인 정말로 그냥 생각으로만 아니고 자고만 일어나면 주님이 꼭 오실 것으로 믿는 그와 같은 확신 속에 살므로 죄악을 버리고 사회를 개선하며 언제든지 주님 앞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설 수 있는 그와 같은 마음가짐과 자세로 살았고 그리고 주님을 맞기에 참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맞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주님의 재림을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기다리고 기다려 왔어도 주님의 재림이 초대교회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이루어지지 아니했고 지금 이천 년이 다 되어가도 주님의 재림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러나 언제든지 올 수 있을 것이고 또 언제든지 종말이 가능한 때에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 구속을 다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종말의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받을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미 받게 됐고 그리고 성령을 받아 가지므로 그 생명이 우리의 확실한 소유이고 우리의 것임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 받은 생명은 종말에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생명인데 우리가 지금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종말의 생명이 현 세계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의 통치가 현 세계에 들어와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종말의 세계가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 가지고 있는 생명이 종말에서 살 영원한 생명이고 그렇게 살 보증으로 우리가 종말에 가면 다 영으로 살터인데 그 영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있으므로 종말의 새 생명과 하나님의 통치가 현실세계에 이미 실제가 되었고 들어와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종말이 가장 현실적이고 지금 우리가 종말세대에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미 죄로, 사망으로 지배되어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도입되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시작하셨으므로 실제로 종말의 세계가 우리에게 도입된 것으로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종말의 세대는 옛 세대가 다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워진 그와 같은 새 세계가 아니라, 옛 세대가 계속되고 있는데 새 세계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옛 세대는 옛 세대로 있으면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새 생명이 지배하는 종말의 세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는 옛 세대와 새 세대가 겹치는 교차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스위스의 신약학 학자인 오스카 쿨만이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 속에 도표로 표시를 했습니다. 오스카 쿨만의 책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이름으로 전통적인 우리의 신학의 입장에서 오스카 쿨만의 책에 전개되는 내용들을 다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되시고 모든 역사의 중심이 그리스도이고 거기에서 또 거기에로 모든 시간이 목표하여 오고 다시 거기에서 출발해서 다시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잘 표현한 면에 있어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이해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이 죄로 인해서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대가 지금까지 계속 되었다면, 종말의 세대에는 죄와 하나님의 저주가 다 벗어지고 사망이 완전히 제거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케 되는 그런 세상인데 그런 세상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사는 이 옛세대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옛세대에 도입됐어도 엣세대를 다 대치하고 도입된 것이 아니라, 현 세대에 있는 대로 두고 하나님의 새 생명이 지배하는 새로운 종말의 세대가 도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 세대가 겹치는 세계에 교차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교차시대에 우리가 살 뿐만 아니라 특히 여기에 제일 중요한 점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사망이 무너지는 그와 같은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고 죄를 무너뜨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들이 완전히 청산되고 없어질 때는 종말의 때여서 그때는 죄와 사망이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온 인류에게 넘쳐나고 하나님의 지배가 완전해져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될터인데 그것이 지금 이 세대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미 우리가 종말 세대에 살고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주님이 재림을 약속하고 가실 때에 자기들의 생존 당시에 주님이 다시 오실 걸로 기다린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나 2천년 후에 사는 우리들이나 주님의 종말이 곧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도식에 의해 합당하고 바른 이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종말은 지금 우리 세대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님의 재림은 사건으로 그냥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것이 종말시대를 도입하게 되었느냐?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경륜에서 살펴봄으로 우리가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이야기가 종말이야기 보다는 조금 인류역사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그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이루심으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서 사는 그와 같은 백성이 되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리고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 체결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을 생명과 사망의 법으로 알고 사는 그와 같은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 섬김에서 또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섬김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도록 하는 그와 같은 작정을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므로 그와 같은 일을 진행하시고 경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서 인류역사의 시작 부터서 창조를 이루시므로 가지신 경륜은 자기 나라를 이루실려고 하는 그와 같은 경륜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악한 자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섬기는 자리에서 자기가 법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을 죽고 사는 생명의 법으로 하는 자리에 자기가 선악을 결정해서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와 같은 반역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처음에 했던 언약이 파괴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어렵고 또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사망을 결정하는 법이므로 그 말씀대로 살면 생명이려니와 그 말씀을 어기면 사망이 되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 처음 하나님의 계명에 하신 말씀대로 그들의 사망을 선고하셨습니다. 거기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과 사망의 법으로 하고 살고 그 말씀 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표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시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그것이 선하고, 그것을 범하면 악이 되는 것을 분명히 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으면 선이어서 생명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그러뜨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갔기 때문에 악이 되어 사망에 이르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길은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계명을 죽고 사는 절대적인 법으로 하고 쓰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하는 이 순종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므로 자원적으로 순종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는 그러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대하신 때는 절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하여 절대적인 순종 그 길 외엔 다른 길이 없지마는 그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적인 필연적인 그와 같은 순종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굽히사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므로 약정을 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생명과 사망의 법으로 하는 데서 자기가 선악을 결정하는 데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이 계명을 파괴하므로 언약이 파괴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 언약 당사자인 인간에 의해서 파기 되었어도 그 언약의 파기를 인해서 그 언약을 그냥 파기시켜 버리고 말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도 언약의 체결로 그 언약의 조건들에 법적인 제약 속에 자기도 매셨기 때문에 이 언약이 성취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그냥 인간에게만 언약을 맺으시므로 책임 사항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셔서 명령으로 하셨어도 일단 인간은 언약의 당사자로 삼으시고 자기도 인간에 대해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 언약의 약정들은 쌍방의 구속하는 그와 같은 법적 구속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얽어매시는 그 약정 속에 자기도 얽어 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에게 요구된 그 순종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이루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일이 하나님에게도 책임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언약을 맺으실 때에 그 언약의 약정, 법적인 제약들 속에 자기도 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언약이 다시 회복되고 성취되도록 역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일단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저주와 사망의 선언 아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와 같은 언약을 회복하는 일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시 이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처음 언약에서 약정하신 인간에게 부여한 요구 조건들을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게 하셨는데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그 순종의 요구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서 이루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첫언약을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인류의 조상으로 해서 맺은 언약을 통상 행위언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행위언약을 다시 회복시키기로 하셨어요. 그 회복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해야 할 순종을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으로서 순종의 조건들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언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인간이 순종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순종의 요구를 이루시고 그 순종의 요구를 이루신 다음에 그 순종의 의의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 그것이 바로 우리인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허락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다시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 순종하도록 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하는 일을 이루셔서 인간에게 선물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義이고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의지입니다. 아담이 순종해서 이루어진 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義이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 1장에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을 위하여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하는 그 요구를 이루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그 의를 인간에게 선사하시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시고 그의 나라를 이루실려고 하는 그의 경륜을 성취하시므로 사탄의 궤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처음 가지신 창조의 경륜을 이룰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의 자리에서 순종을 이루셔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입어 오셔야 만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죽음에 까지 이르는 순종을 요구하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죄 값으로 십자가에 죽게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소명입니다. 왜 아브라함의 소명이 하나님의 큰 구속 사건을 이루시는데 도구로, 봉사자로 선택 되었는지는 우리가 전혀 말할 수 없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체적인 구원의 계획을 가장 구체적으로 계시하신 이가 계시 받은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 때도 아담과 하와에게 저들을 구속하실 구속주가 오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이 약속이 자기들 당대에 실현될 것으로 소망과 기대 속에 살았습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있느냐? 성경에 있어요. 하와가 이제 첫아들 가인을 얻고서 가인을 낳고서 하와가 외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습니다. 가인의 스펠링이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가인은 본래 “카나”라는 “얻다” “획득하다”라는 언어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드( )가 들었으니까 수동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얻은 것이 아니라, 얻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리라”고 하신 이 약속이 첫아들을 얻으므로 하와는 벌서 여기서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는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낳은 첫아들이 자기를 구원할 구세주로 믿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가인”의 뜻도 “얻음”이란 뜻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다. 그 말은 결국 우리를 구원할 구속주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은 계속된 인류의 역사에서 늘 소망거리였고 그리고 자기들 당대에 이루어지는 줄 믿었습니다.


그 후에 가인이 타락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을 때 아벨이 났습니다. 아벨이 아담과 하와의 가르침을 좇아 하나님을 성실하게 정말 진실되이 섬길 때에 이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펴실 줄을 아담과 하와는 기대했어요.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비통함이란 말할 수 없었죠. 그럴 때 셋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저자가 아담이 자기 형상을 좇아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형상을 좇아 난 아들이므로 셋이 자기들을 구원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해준 메시야인줄 구속주인줄 그들은 기대했습니다.
이 약속은 계속해서 진행되어서 므두셀라가 노아를 낳았을 때에도 이 약속이 자기들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믿었습니다.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아들로 우리를 안위하려 하심이라고 므두셀라가 말하므로 노아가 자기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구세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부모들의 그 신앙과 그 기대는 노아에게 일면 성취되어서 노아가 제 2의 인류의 조상이 되고 인류를 다시 계승하는 그와 같은 큰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 약속했던 이 세상의 구속주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질 걸로 보편 인류의 역사에 기대되고 소망되며 그리고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죄악이 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여기에 바벨탑을 쌓는 역사가 나타나는데 바벨탑의 역사로 인해서 우리의 타락이 아주 급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 보편 인류 특히 그 중에서 셋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려고 하는 경륜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하나님께서 셋의 후손에게서 한 사람을 선택하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그 이유가 아브라함을 부르기 전에 그가 아브라함의 셋의 족보 데라의 족보를 길게 말한 이유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아브라함을 부르기 전에 길게 아브라함의 족보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셋의 후손에게서 바로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려고 하는 분명한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소명하기 전에 아브라함의 조상들의 족보를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데라의 역사를 일부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역사를 말하고 12장에 이제 아브라함을 구체적으로 부르셔서 가나안으로 옮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보통 3장에서 11장 까지를 “인류의 보편 역사”라 그렇게 말하지요. 거기에는 정말 보편역사인 것이 인류의 시작의 기원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해서 인류 사회에 죄가 들어오고 이렇게 저주가 생기고 고통이 생기며 그리고 사망이 들어오고 자연이 이렇게 황폐하게 되고 저주를 받게 되고 전쟁이 있게 되며 그리고 이렇게 심판이 왜 있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3장 부터 11장 까지가 인류 역사를 가장 보편적으로 잘 다룬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인류 역사 전체로써 자기의 구원경륜을 진행하셔서 이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다시 되돌리신 일이 어렵게 될 때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가장 구체적으로 계시 받은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이전의 역사에 있어서 그 어떤 사람도 아브라함 만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계시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가장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아브라함에게서 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경륜을 가지시고 세상을 구속하실려고 하는 경륜을 가지시고 진행하실 줄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복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경륜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옮기신 후에 참 많은 신앙의 훈련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데라의 아들들 중에 나홀과 아브라함과 하란이 있는데 나홀은 그냥 하란에서 살았고 그리고 하란은 데라와 함께 아브라함과 함께 지금의 하란 지역으로 왔는데 하란은 일찌기 롯을 낳고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무자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옮기시면서 하신 약속이 “네 친척 본토와 네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복을 내려서 네 후손으로 바닷가의 모래처럼 그리고 하늘의 별처럼 많게하며 그리고 네가 갈 그 땅을 네 후손에게 영구한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 나이가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75세인데 옛날이니까 아직 건장할 때이지마는 그래도 75세가 되어도 아직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이전의 족보들을 보면 한 30세이나 25,6세가 되면 벌써 다 결혼해서 자녀들을 가졌는데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도록 자녀를 낳지 못했으니까 상당히 오래도록 자녀가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가 깨달은 것은 자기 아내 사라, 또 본인 자신도 자기가 불임인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부부에게서 자녀가 나올 수 없는 것이 확실하고 믿어지지 않는 약속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10년을 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셨어요. “네 몸에서 아들이 낳으리라”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사라가 불임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와도 정상적인 법적인 부부인 자기들에게서 아들이 이루어 나올 수 없는 줄을 둘 다 알고 있는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서 이스마엘이 낳기 전에 “아니라. 사라에게서 나올 씨가 네 아들이라 하리라”고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으면 참 간단하지요.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데 그때 당시에 지금도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우리나라 풍습에 나이가 많도록 본처가 아이를 못낳으면 그저 후처를 얻어서 본처도 같이 살면서 아들을 낳는 것이 바른 법은 아니어도 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묵인하는 그와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 옛날이야 본처가 애기를 못낳으면 후처를 얻는 것이 당연한 그와 같은 상황이었지요. 그러니까 자기의 여종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첩으로 주므로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하갈을 통해서 낳았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1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이스마엘이 얼만큼 커서 이제 아브라함의 이름과 재산을 상속할 수 있을 만큼 되니까 하나님께서 또 간섭하셨어요. “내가 네게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 “아니 이미 아들이 있는데요.” “그 아들 말고 사라를 통해서 나온 그 아들이 네 아들이라 하리라” 그러나 이제 나이가 99세가 되고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자기는 남자로서 모든 기력이 다 끝나고 정말 사라도 본래 불임인데다가 여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생리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끝이 났는데 아들을 낳아주리라 하니까 이게 보통 시험과 시련이 아니라. 아니 주 앞에서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니까 보통 해서는 자기들에게서는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이렇게 하시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고 큰 시련인 줄을 금방 아브라함의 고백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주 앞에서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제 무슨 아들을 또 주시겠다고 하십니까? 이미 주신 아들 이것도 내 아들인데...” 그래도 아니라고 사라에게서 날 아들이 네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러한 때에 사라에게서 날 네 아들과 네 씨와 언약을 맺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99세가 되었을 때에 아들을 낳는다.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에 아들을 낳는다. 본래가 불임인 것이 분명한데다가 90이 되었으니까 여자로서의 모든 기능을 행사할 수 있을 때가 끝이 났는데 아들을 낳으리라. 이 보통 시련이 아니지요.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어 사라도 어쩔 수 없이 하갈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냥 데리고 그래도 같이 살려고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얻어서 같이 사는 것이 익숙해졌는데 다시 아들을 준다고 하니까 이게 보통 시련과 시험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복이고 큰 축복인 것 같아도 아브라함에게는 보통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가정의 불화가 어떻게 될지 아브라함은 이미 벌써 알고 있었어요. 두 부부간에 싸우는 싸움을 계속 보고 왔기 때문에 이제 이것이 보통 큰 시련이 아닌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또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번 약속해서 안되니까 자주 나타나셔서 반복적으로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못 믿는거죠. 내가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아들을 낳는다. 그 웃을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니까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 명령에 순종해서 부부관계를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서 버렸는데도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네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이 낳으리라” 그러니까 순종하는 길 밖에 없어요. 다 죽은 마른 막대기와 같이 된 부부가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부부관계를 시작을 해요. 이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이 끝났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도저히 아들을 얻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안될 때에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아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아들이지 자기들의 정상적인 육체의 힘으로 낳을 수 없는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아들의 약속에서 세상의 구속주를 함께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시고 그 아들에다가 세상 구속주를 함께 묶으셨어요. 그러니까 이 아들의 약속을 받고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 아들은 자기들의 육체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아들이지요. 그러니까 이 아들은 일면은 자기 아들이지만 일면은 자기 아들이 아니지요. 자기들의 육체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고 우리가 아들과 딸을 낳는 방식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이 아들은 자기들의 몸으로 부터 왔으니까 자기들의 아들이 분명하지만 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왔기 때문에 자기들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속하실 구속주가 인간의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임을 아브라함으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출생한 이 아들이 바로 자기들의 이름과 재산과 종들을 이어 받을 그와 같은 상속자 만이 아니라 세상을 구속하실 구속자를 낳게 할 아들임을 아브라함이 이삭의 약속에서 분명히 안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그거예요. 이 아들은 세상 구속주를 출생하기 위해 은혜로 주신 아들이라. 그것이 이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역사임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한 10여년이 지났습니다. 아마 이삭의 나이가 13,4세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기 전에 신약에 비추어서 보면, 한 말씀 더 해야 될 것은 이삭이 출생했을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의 출생에서 자기들의 육체적인 생명을 계승할 그와 같은 계승자이고 그리고 자기들의 이름을 이어갈 그런 계승자일 뿐만 아니라 그가 본 그 아들의 출생에서 세상을 구속한 구속주의 출생을 본 것이죠. 그러니까 신약의 요한복음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이 내 때를 바라보고 즐거워 하였노라고 했는데 그것이 언제 이루어졌냐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출생했을 때 그 출생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출생에서 자기 아들로 뿐만 아니라 자기를 구원할 구속주의 출생을 넘어다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생 후에 하나님은 계속하여 아브라함을 신앙으로 단련하시고 기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이삭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허락하겠다고 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살 때에 가나안의 중심부에 살지 아니했습니다. 저 변방 지금 네게브 사막 이스라엘 남부에 사막이 있는 지역 그러니까, 이스라엘 가나안이 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지역이 끝이나고 사막이 진행되는 지역 소위 브엘세바에 내려와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백성들이 마음대로 번창할 수 있게 잘 살 수 있는 그 가나안 중부지역에 그 기름진 지역에 살았던 것이 아니고 지금의 네게브 제일 이스라엘 남쪽 지역 살기 힘든 지역, 그러니까 정상적인 인간적인 생활, 생존 생업이 가능한 지역하고 사막이 있는 경계에 와서 많이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하셨어도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었기 때문에 늘 위협이 아브라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과 같이 섞여 산 것이 아니라 일면 떨어져 살았어요. 떨어져 살므로 가나안 족속과 전혀 교제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죠. 아브라함도 왕 같은 족장이어서 318명의 군인이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방어할 군대를 가졌으니까 군인이 318명이며는 종들이 얼만큼 많았는지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존과 아브라함의 아들을 그리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318명의 군사가 필요했으면 아브라함에게 붙어서 일하는 종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리기 어렵죠. 318명에 다섯 사람의 가족만 붙는다 해도 1,500명 약 2,000명이 됩니다. 아마 그들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종살이 하며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는 족장이었어요. 아브라함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듯 텐트 몇개 쳐놓고 혼자 사는 것이 아니예요. 그 수천 명을 거느리는 왕 같은 족장이기 때문에 이 재산과 자기들의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왕들하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음에도 아론이 저 땅 끝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리고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직까지 한평의 땅도 자기의 소유로 인정된 곳도 없고 소유된 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이삭이 나서 한 14,5세 될 때까지 훈련을 시켜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이를 통해서 지금 구원의 경륜을 펴시고 계신 줄 깨달았습니다. 구원하실려 하는 구속 경륜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것에 봉사해 드리는 것이 그의 생애 전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어떤 분이 설교하듯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가지고 그를 안전하게 하시고 또 그렇게 금은 보화도 많이 갖게 하시고 또 좋은 음식도 먹게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제가 성경을 보고 이해한대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많은 재산을 주신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많은 재산을 가졌어도 아브라함의 생애는 그것들이 전혀 없는 것처럼 하고 살았어요.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재산이 없었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만을 전부로 하고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허락하셨느냐?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많은 재산을 아브라함의 손에 붙이심으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를 위하여 봉사하고 수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자집에 가 보십시요. 부자들만 밥 먹는데가 없습니다. 지금 도시에서 부자들의 생활은 다른지 몰라도 옛날 시골을 보면은 조금 부잣집에는 식솔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계속해서 손님들이 와가지고 밥을 먹고 살아요. 제가 한번 대학교 때에 저 구례에 갔는데 친구가 의과 대학을 다니는데 옛날에 진사를 했던 집인데 그러니까 뭐 일제 때를 거치고 다 했는데 그 진사라는 것이 그 전에 했던 일 아닙니까? 나라가 망하기 전에... 그런데 그때 진사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데도 집에 사람이 바글바글 합니다. 식솔들이 끊이지를 안해요. 그래서 참 기이하다고 대학 때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맡기심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봉사하게 함으로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적으면 쉽게 아브라함의 생명을 해할 수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위해 일하고 그걸 지키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아브라함에게 접근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생명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많은 재산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안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죠.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는 사라가 너무 미인이라 그 옛날부터 말이 있죠. “미인은 만인이 것이지 개인의 소유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미녀를 데리고 사니까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죽여 버리면 다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자구책으로 “너는 내 누이라고 해라. 나는 너의 오빠고” 그래 가지고 서로 오누이라고 산다. 그러니까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왕이 사라를 데려갔어요.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간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누이를 데려가는거야 뭐 좋은거죠. 처남이 되니까 그 바로 왕실의 처남이 되니 얼마나 큰 세력을 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때도 개입하셨어요. 아브라함의 많은 종들과 군대 가지고는 그때 당시의 세계 최대의 제국의 왕의 권세를 어떻게 해결하겠어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에게로 다시 사라를 돌리시게 하셨죠.

그 다음에 다시 돌아와 가지고 다음에 아비멜렉에게 살 때 불레셋 군대의 아비멜렉에게 가서 살 때 그때도 하나님께서 거기 가서 살 때도 또 오누이라 하니까 그곳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또 아내를 오누이라 하니까 빼앗아 가서 자기 아내를 삼을려고 했죠. 그럴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브라함의 생에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생명의 위협을 없게 하셨지마는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는 아브라함 혼자 살며는 그저 목숨 빼앗기는 일이 쉬운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종, 재산을 그에게 붙이므로 많은 재산을 관리하려니 많은 사람이 필요하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맡기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므로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래도 아브라함이 위험하니까 신변의 위협이 있어 아비멜렉에게 뭐라고 답했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라” 그러기 때문에 저 가나안 남쪽 끝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셨는데 그것이 인제 정말 자기 아들을 바칠 수 있도록 까지 하나님이 훈련시키셨어요.


창세기 22장에 보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 독자 사랑하는 아들을 내가 지시하는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 키에르케고르 그의 유명한 책 “공포와 떨림”이라는 책에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참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적게 사랑했기 때문에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죠. 정말 그 이상 더 사랑할 수 없도록 사랑했기 대문에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보편적 윤리 가지고는 이 특수한 상황, 이 신앙의 영웅의 일을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다. 윤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되이 적용할 수 있는 법이 윤리 아닙니까?


임마누엘 칸트가 보편성을 아주 정립을 잘했는데 이런 보편적 윤리의 법으로 도저히 이 특수한 신앙의 영웅의 일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부모나 처자가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줏어 들을 때에 대부분 미워한다는 말이 나보다 더 적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제까지 주석가가 주석해 왔는데 키에르케골은 바로 그 주석을 들어가지고 말해요. 도대체가 성경의 법에 맞지 않다. 조금 더 적게 사랑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느냐?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 이상 더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고 그것이 가능했다.


그 미워한다는 말을 부모와 처자와 자기 목숨을 주님보다는 조금 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결코 바르지 못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제 그 동안 신앙으로 많이 자랐기 때문에 좀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 드릴 때에 아무런 고통과 어려움 없이 제사를 드리는 걸로 우리가 이해하고 그렇게 읽어갑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보면 아브라함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아브라함, 그래요. 나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인류의 역사상 아담의 후손으로 아브라함 만큼 큰 고통과 고뇌를 겪은 사람은 없다. 자기의 친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되니까 그 고통과 고뇌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차라리 늙은 나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또 그것도 종들이 데려다가 이삭을 자기가 안보는데서 번제로 드린다면 얼마나 그래도 조금 낫죠. 친히 자기가 자기의 아들을 양을 이제까지 제사 지낼 때처럼 잡아가지고 목을 따서 묶어놓고 그리고 나무를 해서 장작을 피워놓고 불을 피우고 제단을 쌓은 후에 그 위에 이삭을 묶어놓고 피를 쏟은 다음에 그 얼마나 아파서 뒤척거리며 정말 신음하고 그럴 때에 그걸 지켜보고 서서 “아들아 거룩한 순종을 하라” 그러면서 제사를 지내야 되니까 이런 고통을 누가 견디어 내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랬는지 탈무드에 보면 이삭을 제사지내고 산을 내려올 때에는 눈이 멀었다.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눈이 멀었다 그래요. 그것은 탈무드의 랍비들의 해석이기 때문에 그걸 맞다고 진의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랍비들이 아브라함을 이해할 때에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를 이해하는 눈이라 그런 말이예요.

이제는 이삭이 얼만큼 상속받을 만 하니까 이삭을 약속을 하셨는데 이삭이 이제 상속을 받을 만 하니까 이스마엘을 내쫓아 버리고 집에 없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에도 이스마엘에게 아브라함이 재산을 상속해서 내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물 한부대 떡 몇 덩어리 고기 몇 점 내주어서 보냈어요. 그리고 사막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네게브가 사막이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이 사는 곳으로는 갈 수 없고 사막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그렇게 내보내면은 죽으라고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그 이후에는 이스마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아브라함의 관심사가 못되도록 하나님이 하신 다음에 이삭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했으니 보통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명령에 순종을 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이 그를 훈련시키셔서 신앙이 자라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신 것이죠. 바로 이 아들이 지금 제사 지내는 이 아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이 되게 될 자손들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아들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일면은 일치되었는데 이 아들을 번제로 불태워 죽이면은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로 가느냐?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것을 해석을 하기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걸로 아브라함이 믿었다. 부활을 믿었다고 했어요.


그러나 하여튼 자기의 목숨보다 더 사랑한 아들 저 모리아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제물 드릴 때에 종들은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왜? 종들이 올라와 버리면은 제사 지낼 때에 가만히 있겠어요? 이 노인이 노망을 했느냐고 얼마나 방해를 놓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제사가 못돼요. 그러면 마음이 찢어지고 또 상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바른 제사가 못되는 거예요. 그래서 종들은 못 오게 한거예요. 그럼 옛날 그때에 나귀에다가 짐을 실어가지고 올라가면 이삭이 덜 고생할 것 아닙니까? 나귀도 자기 집에서 키운 동물인데 주인이 아들을 가지고 지금 제물을 잡고 그러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그것도 튀기고 광음을 울리고 보통이 아닐거요. 그러며는 이 또 마음이 상하고 찢어져서 거룩한 제사를 온전한 제사를 못하게 하기 때문에 나귀도 밑에다 내려 놓았습니다. 둘이만 간거지요. 칼을 들고 그리고 횃불을 들고 그리고 나무를 지우고 그리고 올라가서 모리아산 꼭대기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이지요. 여기까지 오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신앙이 얼마나 크게 자랐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란의 17세기 유명한 화가가 램브란트 입니다. 램브란트. 종교개혁으로 종교개혁이 산출한 2대 예술가를 화란의 램브란트 하고 독일의 요한 세바스챤 바하를 꼽습니다. 르네상스 때 로마교회가 산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 미켈란젤로, 이런 등에 대응할 만한 큰 예술가가 요한 세바스챤 바하이고 램브란트인데 램브란트가 성경도를 그림으로 그린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성경에 보면 옷을 다 벗기고 밑만 가리우고 뒤로 묶으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턱을 잡아올리고 우리처럼 부엌에 쓰는 그런 칼이 아니고 아주 뾰족한 칼로 이렇게 칠려고 하는 그런 그림을 그렸어요. 자기 아들을 자기가 목을 쳐서 피를 흘리고 그리고 그 아들이 다 재가 되도록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일로 무엇을 계시하셨냐 하며는 “바로 네 아들이지만 네 아들이 아니고 내 아들” 하나님께서 바로 이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구속의 법이 속죄의 제사가 희생의 제물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길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한 10분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첫시간이 너무 오랜 시간 강의가 되어서 지루하시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본래 하나님이 소명할 때에 그 경륜이 어디에 있는줄을 알게 됐으므로 참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봉사해 드리는 것을 그의 일생에 전부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우리 한국교회에서 이 아브라함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많이 성경이 본래 말하고 가르치는 것 하고 이탈되어서 이해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속경륜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거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이 번제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많이 반복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번제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속죄 문제들을 다 이미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마지막에 자기 아들 사랑하는 독자를 이제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바쳐 드리게 되었으니 참 이 아들에게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시고 또 그들이 살 땅으로 지금 아브라함이 들어와 있는 가나안을 약속하신 그런 귀한 아들인데 번제로 바치게 함으로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실려고 하는 하나님의 그 구속의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중에서 나올 구속주를 바로 아브라함이 번제드린 그 방식으로 죽게 함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이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요. 아브라함이 제사장으로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쳤는데 바로 그 순간 제물이 된 이삭의 자리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양이 대신했습니다. 아까 까지는 아버지는 제사장이고 아들은 제물이었는데 이제 둘이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삭으로 대변 되면서도 이삭과 구분되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어린양으로 세상이 구원될 것임을 하나님이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 성경을 읽어보나 그 다음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한가지 일로 끝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속경륜을 다 계시하셨어요. 참 은혜로운 아들 그 방식으로 세상에 구속주가 오실 것이고 그리고 모리아산에서 번제가 되신 그 방식으로 세상이 구속될 것임을 하나님이 분명히 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 분명하고 확실한 구속경륜을 계시 받고 가르침 받은 아브라함이 할일은 그 바로 이삭으로 장가들어 이제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이어지게 함으로 구속주가 오시는 것을 에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24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들게 하는 그 일로 아브라함의 일이 다 끝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한 6,70년 더 살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정말 나홀의 자기의 형제의 후손중에서 정말 신앙 좋은 리브가를 택해서 결혼시키므로 아브라함은 자기의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구약이 50장까지 갈려며는 한참 진행되는데도 아브라함의 일이 다 끝난 것처럼 성경이 끝나고 맙니다. 물론 그 이후에 그두라를 첩으로 얻은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들이 조금은 이야기를 했지마는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있어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아브라함으로서는 이미 할일을 다 했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므로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는데 이것도 세상적인 관점으로 세상적인 자녀의 번창 그래서 아브라함이 재미를 보는 그와 같은 그런 의도가 결코 아니고 구속주가 오실 수 있도록 마련하는 길 그거지요. 그 일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 책임이지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서는 신앙 족장들의 신앙 영웅들의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도 전부가 다 이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지 그 신앙의 조상들 족장들의 일이 아닌 걸로 성경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셔서 다시 구약을 읽어 보십시요.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하고 야곱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 고리 역활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그저 평화로운 사람으로 하고 별로 많은 기사가 없어요. 그러나 야곱에 와서는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일을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정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12자녀를 얻게 하시고 그러니까 참 얼마나 괴롭습니까? 한 남자가 자기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어서 아내로 삼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외삼촌이면서도 장인 어른의 이 자꾸 장난질로 인해서 아내가 넷이 되었으니까 네 아내 사이에 얼마나 싸움이 많이 벌어집니까? 참 괴로운 생을 야곱이 계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야곱이 꾀가 많아서 자기 삼촌의 재산을 다 자기에게로 끌고 올려고 했지만 성경을 조금 다시 읽어 보며는 야곱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라반도 보통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재물에 탐욕이 너무 많고 또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이 야곱을 데릴사위로 해서 자기의 대를 이어가게 할 사람이게 하고도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나오니까는 이제 계속해서 자기 재산 야곱에게 못 가도록 계속해서 술수를 쓴다. 그래서 열번이나 내 삯을 바꿨다고 야곱이 자기 아내들에게도 말하고 라반에게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라반이 그와 같은 행사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산이 야곱에게로 대폭 옮아 오도록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 야곱이 꾀를 부려가지고 양들이 물 먹으러 올 때에 서로 올라타고 그럴 때에 이 버드나무를 세우고 껍질을 벗겨가지고 그 물 먹을 때 그렇게 올라타게 함으로 양들이 나오게 했다 하지마는 간혹 감응유전이라고 하는 것이 있긴 있습니다. 감응유전, 그것도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령 한 남자가 아내를 둘 얻었는데 전혀 아내의 생김 모양이 달라도 두번째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 많은 경우에 감응유전에서 큰 엄마를 닮아 나온다. 첫 아내를! 그런 감응 유전이 있지요. 그러나 지금 이와 같은 꾀를 야곱이 부린다고 해서 감응유전으로 지금 이렇게 얼룩무늬 있는 것이 생겨나온 것이 아니지요. 분명히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로 재산이 옮아 가도록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야곱이 자기 자손을 기를만한 재산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또 재산이 많아지므로 야곱에게도 많은 종들이 일하게 했지요.


그리고 이제 야곱이 가나안으로 옮겨온 후에 하나님께서 본격적인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간섭하시기로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야곱이 제일 사랑하는 자기 아내 라헬에게서 나온 요셉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꿈을 꾸게 했어요. 17살 된 소년에게 전에는 밀단들이 요셉의 단에 무릎 꿇게 한다. 괘씸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아버지의 밑에만 있고 자기들은 좋은 옷도 안입고 누더기 옷만 입고 양을 치느라고 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사람 노릇도 못하고 사는데 요셉은 때때옷 입히고 좋은 음식만 먹이고 아버지가 사랑만 하는데 그런 꿈 이야기 하니 얼마나 밉습니까? 또 그래도 야곱이 못 알아 들으니까 하나님이 꿈을 다시 만드셨다. 하늘의 열 한 별과 태양과 달이 자기 별을 향해서 무릎 꿇고 절을 하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에 무슨 일이 진행될 것인가를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가족을 기르시고 구원하실 것을 미리 보이신 것이예요. 아직 야곱이 눈치 못채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형제간들의 미움과 증오를 하나님이 이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셨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것은 형제간들의 미움 때문인 것 같애도 하나님의 경륜으로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이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이 차지할려면 그만한 백성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땅을 차지할 만한 백성이 되어야 땅을 차지하지요. 그저 소수 몇명 안되는데 광야같은 그 넓은 땅을 맡길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기를 자리를 애굽으로 정하신 것이예요. 왜 가나안에서 안하시고 애굽을 정하셨느냐? 가나안은 그렇게 비옥한 땅은 못됩니다. 애굽에 비해서!
그리고 가나안 7족속이 다 살고 있고 이미 불레셋이 상륙해서 와서 살고있기 때문에 이렇게 잡족속 속에서는 온전한 백성으로 자라나기가 어렵다. 그리고 백성이 마음껏 자랄려면 곡식이 풍부하고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항상 저 메소포타미아 지역하고 이 애굽 지역이 늘 교차지역이고 세력이 맞닿는 지역에서 늘 이 강대국들의 세력이 미치는 곳입니다. 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잡족이 섞여 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르며는 이방 족속들 하고 결혼하게 되므로 혼합과 혼잡이 생겨서 순수한 아브라함의 후손을 양육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백성이 기르기 제일 좋은 장소가 애굽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일강의 풍성한 그 생산력에 의해서 애굽이 그때 중동세계 전체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 였습니다. 그건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2천년 지나서 시이저가 로마를 세우고 로마를 통일할 때도 애굽이 로마세계를 먹여 살린 곡창지였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파스칼의 이야기를 듣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인치만 낮았어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는 그 유명한 파스칼의 팡세에 있는 말 때문에 그 안토니우스도 애굽에 내려가고 시이저도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지마는 물론 안토니우스는 그랬을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대로는 시이저가 애굽에 내려간 것은 결코 클레오파트라 때문이 아닙니다. 그때 까지도 애굽이 로마세계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창지 였습니다. 그 곡창지역을 확보해야 로마의 평화가 성립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이저가 군대를 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지요. 물론 시이저 같은 사람이 다 정복만 하고 평정만 해놓고 온 것이 아니고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와의 일도 생기고 해서 여러분이 영화를 보아서 다 아시는 대로 그런 일도 있지마는 또 시이저가 권력으로 나아가는데 인류 역사상 시이저 만큼 여자를 많이 이용하고 활용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자매님들이 계셔서 미안합니다마는 그러니까 그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훌륭한 곡창이어서 그 대 제국들을 이룰 수 있었고 애굽이 그렇게 풍성한 곡창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제국을 2천년 이상 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가장 강력한 고대국가로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도 물론 외적의 침입이 많이 있지마는 군대로 그렇게 방어하므로 외적의 침입이 빈번함이 가나안처럼 빈번하지 않으므로 애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양육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을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한 백성을 기르기 위한 장소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내려 보내셨어요. 왜 그렇게 하셨느냐? 그냥 들어가면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형들이 오니까 간첩이라고 하듯이 정탐이라고 간첩이라고 하듯이 그냥 들어가면 이 이방 민족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항상 적대감을 갖고 배척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미리 보내 가지고 요셉을 총리대신 되게 하고 흉년이 들게 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갈 명분을 허락하신 거지요. 그리고 애굽을 흉년으로 멸망해 갈 흉년에서 구출해 내는 의인의 가족으로 그들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400년 이상 마음 놓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창하게 하신 것입니다. 가장 풍성한 곡창지대,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백성의 양육에 어려움이 없는 대국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요셉을 미리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이 꾀부리고 역사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고 형제들이 미워서 그랬던 것 같아도 전부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택한 백성을 만드시게 한 역사이지요. 430년 동안 기르시니까 남자가 60만이었다. 그때 인구 계산이 남자 20세에서 60세가 60만이니까 이 보다도 밑에도 있고 이 보다 나이 위에도 있습니다. 이게 지금 장정들만 계산한 것 아닙니까? 이 60만에다 최소한 다섯명 가족만 붙이면 300만 입니다. 그때는 생산력이 더 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훨씬 더 300만 400만 이보다 더 많이 됐었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출하셨어요. 그때 당시에 애굽이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고 그리고 가장 강력한 고대 세계 제국인데 그들을 그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구원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을 시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그만한 강력한 군대가 아니며는 어떻게 싸워서 그 많은 수를 구출해 내겠습니까? 300만 해도 보통 인구입니까? 지금 인구가 하도 많아서 서울 인구가 천만이 넘으니까 뭐 이거 300만이 많은 것 같지 안해도 보통 많은 것이 아니죠. 300만이 더 된다고 보아야 맞을 것입니다. 한 400만 이상... 이런 많은 수를 어떻게 애굽의 군대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자기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전혀 인간의 손이 불가능한데 모세 한사람 지팡이 들고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출하려 보냈을 때에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하는 것 보니까 불가능해요. 그래서 모세는 정신병자와 같은 사람으로 이스라엘 눈에 보인거죠. 불가능을 시도하니까! 그 강력한 군대에 어떻게 대항해서 구해 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모세를 통해서 하신 것 같아도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봉사자일 뿐이지요.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신 것입니다. 기적으로, 큰 권능으로 구출해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게 하심으로 이제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시므로 율법을 허락하시고 속죄 제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구원 얻는 길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속죄제사를 통해서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길과 구원 얻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 죄과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 문제를 통해서지요. 이 둘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신 길이다. 바로 하나님이 이 율법을 통해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된 순종과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백성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리고, 속죄제사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시행하게 하므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해결, 속죄 문제의 해결, 죄과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께서 이 속죄제사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에게 교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지금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교육하시고 교훈하셔요. 그것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를 얻어서 살 수 있는데 율법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거죠.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스라엘이 깨닫는 바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 엄위로운 율법을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진행될수록 갈수록 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넘어지기 쉬워요. 그렇다고 제사제도가 없어진 것이 아니예요. 제사제도도 마찬가지로 힘있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제도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알게하신 것이 무엇이냐? 이 속죄제사가 지금 짐승으로 드리는 속죄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가지만은 이 속죄제사가 이스라엘의 죄과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진행될수록 악이 더 심하고 아주 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것들을 위하여 속죄제사가 열심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래도 가져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그 속죄제사로 이 죄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법이 가르친 바는 이 속죄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길로만이 죄과가 해결되는데 속죄제사로도 이스라엘의 죄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속죄제사에도 불구하고 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분명히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실 완성자를 고대하고 바라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계속 재촉하므로 우리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데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율법을 완전히 지켜줄 율법의 완성자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속죄제사가 계속되는데 이 길로만이 분명히 하나님과 화해되고 백성으로 바로 서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셨는데도 속죄제사가 그렇게 많이 진행되도 이스라엘의 운명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드리는 속죄제사는 아브라함이 드렸던 제사가 표현하는 완전한 제사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모든 죄과와 인류의 모든 죄과를 해결할 속죄제사가 오도록 하는 것, 재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이 속죄제사로도 마찬가지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이 율법의 순종과 속죄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율법은 못지킨다. 율법을 지켜야 사는데 못지킨다. 또 속죄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과 문제가 해결되는 데도 이스라엘이 드리는 이 희생제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한 속죄제사를 바라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끝에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 역사에서 짐승의 제사로 사람의 죄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에 도달합니다.
바로 이 법은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던 구원의 경륜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던 그 구원의 경륜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반복되고 실현되고 실행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어떻게 가능하며 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완전한 순종, 지킴과 그리고 죄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있느냐? 바로 하나님께서 이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이스라엘 자신과 세계 만방에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세계 만방에 어떻게 알게 했느냐? 우리가 보기엔 알게 한 것 같지 않지요. 그래도 이스라엘이 서 있는 자리가 항상 중동의 양대 문명의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언제든지 애굽 백성이 메소포타미아로 메소포타미아 백성이 애굽으로 갈려면 가나안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통의 통로, 요새인 것입니다. 이 통로 아니면 갈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 전에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서울로 정하기 전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애굽으로 통하는 통로와 요단강변을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서울로 올리고 부터는 그 신지인 예루살렘이 이제는 예루살렘을 통하지 않고는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이 통로를 가질 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 그들이 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제사장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는 것이지요. 그들이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바벨론의 포로되어서 586년 B.C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을 때에도 이들이 중동지역에 흩어지면서 이 구속경륜을 전파하고 알린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장 백성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중동의 고대 문명 지역에 사는 모든 민족들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바로 이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구세주를 보내시기 위한 그저 모태, 어머니, 어머니의 태반, 이걸 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출생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는 더이상 특별한 보호를 받는 특권 민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받아야 할 구속의 대상으로 있는 것이지 특별한 호의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의 구속으로 그들의 존재 의의를 존재 목적을 사명을 다 성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조성하시고 만드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 때문이지 이스라엘을 세계 만방에 높여서 이스라엘의 육체적인 이해대로 세계의 왕이 되고 메시야가 오시면 전세계를 통치하는 세상적인 다윗의 왕국을 재현하는 것을 결코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의 구속사건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70년에 디도장군을 통해서 로마에서 예루살렘 성을 헐었어요. 그때 죽은 사람이 110만 입니다. 지금은 인구가 많아 110만이 적은 것 같지요. 그때 예루살렘 성에서 죽은 사람이 110만 입니다. 보통 많은 수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의 제사제도가 끝나게 하시고 그들을 고토에서 내 쫓으셨습니다.


상황에서 그런거지요. 디도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에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실질적으로 로마 사람의 손에 의해 죽은 사람 보다 자기들끼리 죽인 것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있을 것으로 다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 대비를 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므로 자기를 구해내시고 로마군대를 다 물리칠 줄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식량을 비축하는 일이라든지, 뭐 전혀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심지어 주님 말하신대로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들과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니까 나중에는 먹을 것만 감추어 놓으면 사람들이 와가지고 완전히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 먹고...


제가 아침에 읽은바에 의하면 어느 교양있는 훌륭한 부인이 먹는 것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다 빼앗아 가버린 거예요. 먹을 것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요. 있는거라고 자기 손 안에 있는 갓난아기 뿐이었어요. 너무도 견디다 못해서 반으로 아기를 짤라 가지고 구웠어요. 그래서 냄새가 나니까 다들 몰려 왔어요. 너무 희한한 냄새가 나니까 “내 놓아라. 네가 무엇을 먹었느냐?” 너무 기가 막혀서 그래도 할 수 없어서 내 놓았어요. “내가 내 아이를 이렇게 해서 반을 먹고 반을 남겨 두었다. 너희도 먹을려면 먹어보아라” 그래도 차마 못먹고 다 물러간 거지요. 그렇게 하고 자기들 패를 조직해 가지고 자기 패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은 막 죽였어요. 말할 수 없이 많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사람들을 디도 장군의 병사들이 잡아가지고 십자가에다 못을 다 박았습니다. 도망간 사람들이 많아 십자가의 수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이 박아 죽였다. 나중에는 예루살렘에 포위망이 이제 방어망이 뚫렸습니다. 디도 장군이 가서 불을 놓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예루살렘 성이 다 금으로 입혀져 있지 않습니까? 불을 놓으니까 금이 녹아 내린다 말이예요. 병사들이 그 금을 줍기 위해서 돌을 밀어뜨리고 금이 녹아서 돌 사이로 들어가니까 돌 하나 위에 돌이 하나라도 남지 않게 다 밀어뜨린 거예요. 그것이 A.D 70년 이예요.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건 이루 성취된 후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제사가 더이상 계속되지 못하게 할려고 예루살렘 성을 헐어 버리셨어요. 완전하게! 그리고 135년 바 코크바 전쟁이라고 이 마지막에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로마의 황제가 더이상에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완전히 다 내어 쫓았습니다. 유대인들을! 그래서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하셨어요. 그때 부터서 가나안 땅이 팔레스타인, 불레셋의 땅이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이 불레셋에서 왔어요. 팔레스타인, 그 필리스타인이 팔레스타인이 된 것입니다. 그 필리스타인의 땅 임자 불레셋의 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1948년 나라를 세우기 전까지는 완전히 여기가 이스라엘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근 1900년 기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니예요. 호의 보이신 것이 없어요. 가는 곳마다 핍박과 그리고 추방, 어려움 당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니예요. 그래도 그 모진 인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유대인으로 흔적을 남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약 1200만이 전세계에 산다고 그래요. 이제 팔레스타인에 약 300만, 러시아에 약 300만, 미국에 약 600만 그래서 약 1200만 해서 그 중에 600만이 2차대전 때 히틀러의 손에 죽었지요. 그러니까 2차대전 당시에는 약 1800만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이루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구속의 사건으로 그 사명과 본분을 다 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다시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피제사를 회복하고 그리고 다시 다윗 왕 같은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이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이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성취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내 버리셨느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이스라엘이 존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섭리가 어떤 섭리일 것이냐? 그러니까 그것은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자, 하나님께서 1500년의 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완전한 순종을 위하여 여건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후속으로 하나님이 인류의 죄과를 도말하시고 화해하시며 성령을 부으시므로 하나님이 처음에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인류 역사에 직접적으로 시행하시고 개입하셨습니다. 성령을 부으심으로 지금 우리가 받아가진 생명이 종말의 새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있고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시대에 산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는 모든 인류의 역사가 다 종말의 역사이고 종말의 때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한번의 재림 보편부활 그 다음에 보편심판 그리고 정화 후에 영원한 신천신지에 도입, 이것이 공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인데 우리가 이것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 덮어두고, 교파 나눌 때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니까 혀도 잘 돌아가지 않는 웨스트민스터란 말이 나오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하지요.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