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인경과 알렉산드리아
-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는 말
칠십인경 욥기 42장 14절에는 뜻밖의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말테이아’(욥의 셋째딸, 히브리어 성경에는 ‘게렌합북’)라는 욥의 딸 이름이다. ‘아말테이아’라는 이름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를 젖먹여 키운 염소 또는 요정의 이름이다. 이스라엘 종교의 구약성경에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꽤나 낯선 일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성경 번역-혹은 주석과 문화-과 문화 간에 모종의 함수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일은 한편으로는 헬레니즘이 헤브라이즘을 만날 수 있도록 빗장이 열린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스라엘 종교가 세계화되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넓은 세상에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물꼬를 트는 준비 단계였다.
2.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이유
알렉산드리아의 역사적 배경에 앞서 먼저, 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첫째는 알렉산드리아 유대 회당에서 의전적(liturgical) 목적,
둘째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알렉산드리아 거주 2세대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셋째는 알렉산드리아 왕립 도서관에서 유대 율법 소장 목적이다.
2.1. 알렉산드리아 유대 회당용
ㄱ. 의전적 필요
테크레이(Thacheray)에 의하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성경을 읽어야 하는데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잊어버려 헬라어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회당에서 경전이 필요했다면, 적어도 오경이나 시편 전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ㄴ. 신앙교육 목적
브록(Brock)은 이집트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과 전통을 가르치기 위해서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려고 했지만, 이들이 히브리어를 몰라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2.2.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보관용
주전 2세기경 쓰여진 아리스테아스 서신은 칠십인경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이 서신에 의하면, 모세 율법의 번역은 알렉산드리아 왕립 도서관에 비치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서신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장이었던 데메트리오스가 도서관 보관용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에게 유대인들의 율법서 법역을 제안하며,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도서관에 비치하기 위하여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를 번역하기 원한다고 밝히고 번역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편지를 보낸다. 대제사장은 열두 지파의 각 지파에서 6명씩 뽑은 번역자 72명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낸다. 이들은 유대 학문에 능통할 뿐 아니라 헬라 문화를 잘 아는 자들로서 율법서를 가지고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예루살렘에서 온 번역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방파제로 연결된 파로스 섬에서 번역을 하여 72일만에 번역을 완성한다.
앞서 언급한 유대 회당용과 도서관용이라는 주장은 모두 실제로 존재했던 알렉산드리아라는 고대의 국제 도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제 알렉산드리아의 문화, 사회적 환경과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공동체의 모습을 알아봄으로써 칠십인경의 번역 목적과 그 배경을 알아 보고자 한다.
3. 칠십인경과 알렉산드리아
3.1. 역사적 배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칠십인경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있다. 주전 332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331년 그의 이름을 본따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다. 원래 이 자리는 ‘라코티스’라는 조그만 부락이었다.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부하 장수였던 ‘라고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는 306년 왕으로 등극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주인이 되어 새 왕조를 일으켰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리아에 화려한 궁전, 신전, 등대, 박물관 등 많은 건축물을 세웠다. 알렉산드리아는 상업으로 굉장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당시 지중해 연안과 구 페르시아 지역의 모든 생산물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주전 320년에서 198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했는데, 이 기간에 유대인들의 이집트 왕래는 꽤 잦았고, 이후 안디옥의 주인 셀류쿠스 왕조의 지배 아래서도 이러한 교류는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주전 30년에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에게 정복되어 로마 제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하게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로마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을 때, 이 도시의 인구는 9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3.2. 사회적 배경: 이집트 이주 유대인
유대인과 이집트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음을 구약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접촉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시작되며, 요셉의 가족들이 이동하였고, 몇 세대가 흐른 후 이들은 큰 집단을 형성하여 모세의 지도하에 박해를 피해 이집트를 빠져 나온다. 북이스라엘을 건국했던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정책에 반대하여 이집트에 일시적으로 망명을 가 있기도 하였고, 남왕국 유다 또한 이집트와의 관계는 지속하였다. 그리고 열왕기서나 예레미야서 등에서 전하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집단적 이주가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아리스테아스 편지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이집트에 십 만의 유대인이 있었고, 이중에서 삼 만 명이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에서 군인으로 일했다고 한다. 주전 170년에 오니아스 4세는 대제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오니아스 3세가 암살된 후에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이 때 프톨레마이오스 6세(주전 181-145)는 그에게 나일강 하루 델타 지역의 남쪽 혹은 서쪽에 오니아스 영지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특정 거주지가 있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5개의 지역구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알렉산드리아 제4구로서 바닷가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배가 드나드는 항구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자치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고, 법률적 재정적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 공동체가 독자적인 사법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법률은 헬라어로 번역된 토라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공동체는 장로들로 운영된 위원회에 의해서 운영되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장로 위원회는 ‘게루지아’라고 불리었고, 71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위원회는 ‘에뜨나르크’라고 불리는 책임자가 있었는데, 이 책임자가 유대 공동체를 위한 사업을 위해서 재정적 지원을 구성원들에게 요구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기도 했지만, 최초의 반유대주의 운동이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기에 이집트의 그리스 종교 성전의 제사장이었던 ‘마네톤’이 헬라어로 편찬한 ‘이집트의 역사’라는 책에는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감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이집트 거주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퍼져 나가기도 했다. 이는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이집트 사회 내에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민족적, 종교적 이유로 인해 타민족과 융합되기를 꺼려하는 이들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비록 아람어를 사용하고, 히브리어로 된 경전을 읽는 이도 있었지만, 주전 3세기부터 헬라어에 많이 동화되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플라톤이나 스토아 사상은 그들의 선호 대상이기도 했다.
3.3. 문화적 배경: 박물관과 도서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주전 325-285)’는 통치 말년에 학문 연구 기관을 설립하였고, 세계 각지의 유수한 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이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각지에서 기하학, 천문학, 의학자, 역사가, 비평가, 언어학자 등의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속속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들었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왕립 박물관에 소속되어서 왕으로부터 직접 녹을 받았고, 왕이 제공하는 안락한 주거 시설에서 생활하며 박물관 내외의 시설물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세금과 모든 의무로부터 면제되었기에, 이들은 집단생활과 공동 식사를 하며 오로지 학문을 위하여 연구와 토론과 강의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건은 알렉산드리아가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축을 담당하는 데 있어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두 개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큰 도서관과 작은 도서관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큰 도서관은 왕궁터에 있었기에 왕립도서관이라 소개하였고, 다른 하나는 ‘세라피스’ 성전에 부속되어 있었기에 흔히 세라피스 도서관이라고 불렀다. 이 두 도서관은 소장도서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고, 왕립 도서관은 주로 학자들이 많이 이용했다면 세라피스 도서관은 일반 대중에게 자유롭게 개방된 도서관이었다. 왕립도서관은 벽 앞에 책장을 만들어서 책을 꽂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으로 책을 진열했고, 세라피스 도서관은 벽에다 공간을 만들어서 책을 정리하는 이집트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주후 2세기에 만들어진 도서관들은 모두 이집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3.4.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유대인 종교생활
주전 24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쉐디아’ 지역에 유대인을 위한 회당이 있었다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집트에는 열 몇 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큰 절기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였다. 두 도시의 유대인들을 형제 관계라고 한다면, 예루살렘은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던 형에 해당되며, 알렉산드리아는 동생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도망온 오니아스 4세가 있었언 레온토폴리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관계를 끊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이나스 4세는 이곳을 유대 종교의 새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성전을 세웠다. 이러한 행동은 유일 성전을 주장하는 신명기 전통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스스로 합법적인 유일 성전으로 생각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3.5. 언어적 배경
ㄱ. 아람어
아람어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유대 사회의 지배적인 언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대 문헌과 비문 등의 연구를 통해 주전 3세기 경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일상어가 아람어였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집트 이주 1세대 유대인들의 언어는 아람어였지만, 이후의 세대는 곧 헬레니즘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의 공식 언어였던 헬라어가 아람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ㄴ. 히브리어
칠십인경이 번역되었던 주전 3세기에서 주전 1세기까지 히브리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사용자는 소수였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기록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히브리어를 읽고 쓰는 사람은 식자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는 무시할 수 없는 언어였다. 이는 유대인들이 친숙했던 토라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집트 이주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사용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ㄷ. 헬라어
알렉산더 대왕의 지중해 연안과 근동 지방 정복 이후에, 헬라어는 그리스 문명의 문화적 매력과 함께 그 보급이 상당히 빨리 진행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헬라어 사용이 꽤 확산되어 시골에서도 아람어를 위협하는 언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비석이나 비문의 1/3 정도가 헬라어만으로 기록된 것은 이를 잘 증명한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였다. 1세대 이후 이집트 이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헬라어는 거의 일상어가 되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유대종교 전통 문헌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주 유대인들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능력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케 해 준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헬라어는 결국 신약의 언어가 되었다.
4. 나오는 말
초대교회에서 구약 성경으로 읽었던 칠십인경의 탄생은 알렉산드리아라는 사회, 문화와의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문명의 중심지로서 문화의 도시였으며, 도서관과 박물관을 운영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도시였다. 이런 배경 하에서 칠십인경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문화와 성경 번역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칠십인경은 기독교 복음이 헬라 세계에 전파되는 데 큰 역할과 기여를 하였다.
'성경 배경사! 형성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서의 사본과 역본들의 문제 (0) | 2024.11.29 |
---|---|
칠십인역(septuaginta)이란 무엇인가? (0) | 2024.11.29 |
성경의 구조 (0) | 2024.11.29 |
성경 66권 ‘배열 순서’가 중요한 이유. (0) | 2024.11.29 |
사해 사본 (0) | 2024.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