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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윤정의 자귀나무 이야기] 밤이면 잎을 오무려…부부 금슬 상징

하나님아들 2024. 6. 28. 01:03

[차윤정의 자귀나무 이야기] 밤이면 잎을 오무려…부부 금슬 상징

입력2024.06.27. 
 
팔색조 같은 꽃향기…여름 정원의 왕
자귀나무는 상대적으로 꽃이 적은 여름에 잎의 무리에 맞먹을 만큼 많은 양의 꽃을 피워 곤충들의 허기를 채워 준다.
 
달콤하지만 오렌지꽃만큼 달지는 않다.
꽃향기가 나지만 재스민처럼 녹색은 아니다.
살구향 또는 복숭아향이 나지만 희미하고, 수박의 하얀 속껍질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페르시안 실크 트리, 자귀나무다.
꽃향기에 대해 이처럼 섬세하고 애정 있는 설명을 본 적이 있는가.

밤이면 잎을 접는 습성 때문에 부부간의 금슬을 기원하는 자귀나무.
핑크빛 비단 꽃술이 아름다운 자귀나무,
여기에 덧붙여야 하는 덕목이 하나 더 있으니, 꽃의 향기다.
자귀나무꽃에서는 감귤류, 코코넛, 향신료, 히아신스와 장미 향 등을 표현하는
30여 가지의 아로마 프로파일이 식별되었다.

자귀나무Albizia julibrissin는 콩과Fabaceae 자귀나무속의 낙엽성 활엽교목이다.
이란에서부터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자생한다.
아담한 크기로 어디서든 잘 자라 공원이나 정원에 흔히 심어졌다.
자귀나무의 '자귀'에 대한 이런저런 설이 많음에도 딱히 대표적인 정설을 꼽기는 어렵다.
영어식 이름의 기원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자귀나무의 속명인 Albizia는 18세기 유럽에 처음으로 이 나무를 소개한 이탈리아 귀족 필립포 델 알비치Filippo del Albizzi의 이름을 땄다. 종명인 julibrissin은 비단 꽃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Gul-Abrisham ("flower"+ "silk")을 딴 것으로 전해진다. 페르시안 실크 트리Persian silk tree, 자귀나무의 꽃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 실크 꽃이 좀 복잡하다.

자귀나무의 꽃은 핑크빛 실크 부채를 닮은 아름다운 모양과 더불어 여름 장마철에도 비를 뚫고 번져가는 다채로운 향기를 가지고 있다. 사진 이원규 시인.
하나 이상의 꽃이 꽃대에 배열되는 방식을 화서花序라고 하는데, 흔히 우리말로 '꽃차례'로 불린다. 전체적인 꽃송이의 모양은 작은 곁 꽃대들이 중심 꽃대를 따라 달리면서 우산 모양(산형화서)이나 촛대 모양(총상화서, 원추화서)을 이루는데, 하나의 곁 꽃대들 끝에는 15~20개의 돌기들이 공 모양의 다발(두상화서)을 이루고 있다.

두상화서를 이루는 돌기 하나하나는 대부분이 암술이 없는 수꽃 한 송이로, 핑크빛의 길고 부드러운 수술 다발이 연두색 꽃받침에 싸여 있다. 수술은 길이 3cm 정도로, 윗부분이 붉고 밑으로 오면서 흰색으로 변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을 보여 준다. 수술 끝에는 노란 꽃밥이 달려 있다.

몇몇 두상화서에는 수술과 암술을 함께 가진 양성화가 섞여 있다. 똑같은 길이의 돌기들(수꽃들) 가운데 돌기 머리만큼 위로 솟아 있는 꽃송이가 바로 양성화다. 수분과 수정을 해야 하는 양성화는 꿀을 많이 담아야 꽃가루 매개자를 유인할 수 있으므로, 수꽃보다 화관이 길고, 수술대가 모인 통 부분도 수꽃보다 길게 나온다. 암술은 끝에 꽃가루가 없으며 아래쪽부터 위쪽까지 일관되게 흰색이다.

자귀나무는 수술로만 이루어진 수꽃 무리 중에 암술을 품고 있는 양성화를 함께 가지고 있다. 수꽃 봉오리 길이만큼 길게 나와 있는 꽃봉오리가 암술과 수술을 함께 가지고 있는 양성화다.
자귀나무와 같은 꽃의 성별 구성을 수꽃양성화한그루Andromonoecy(웅성양성동주)라고 한다. 하나의 꽃차례(화서) 안에 수꽃과 암꽃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수꽃과 양성화가 달리는 방식이다. 수꽃과 양성화는 꽃술이 피기 전에는 구분이 쉽게 되지만, 핑크빛 꽃술이 펼쳐지면, 치렁치렁한 꽃술 때문인지, 아름다움에 혼이 나간 탓인지 양성화를 찾는 일은 어지러운 일이 되고 만다.

자귀나무를 마당에 심는 이유는 부부간의 정을 기원해서이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잎을 마주 오므린다. 때문에 자귀나무를 합환수合歡樹 또는 야합수夜合樹라고 부른다. 꽃보다 잎인 것이다. 자귀나무의 꽃은 실크 트리라는 영어식 이름에 익숙해지고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복잡 오묘한 향기를 알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밤이면 꽃잎이나 잎을 오므리는 현상을 식물학자들은 '식물의 수면운동Nyctinasty'이라 부른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밤낮에 따른 태양광의 변화, 온도변화 등에 대해 반응하는 생체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식물의 거의 모든 조직 속에는 '피토크롬Phytochrome'이라는 광光수용체가 존재하는데, 적색광과 원적색광의 상대적인 양에 따라 밤과 낮을 구분을 한다.

'자귀나무이'는 막 피어나기 시작한 새잎의 줄기에서 수액을 빨아먹어 어린 잎이 낙엽지게 한다.
접히는 잎의 대표 식물 미모사

자귀나무의 수면운동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피토크롬이 해가 기우는 것을 인식하면 식물은 세포 속의 물을 빼내 팽압을 떨어뜨리고, 날이 밝아오면 세포 속으로 수분을 채워 팽압을 회복한다. 팽압이 떨어지면 세포가 위축되어 잎이 힘없이 쳐지고, 팽압이 올라가면 세포가 팽창되어 잎이 힘을 받아 펼쳐지게 된다. 자귀나무의 잎자루 밑에는 잎 세포로부터 빠져나온 물을 담아두는 물주머니 조직이 두툼하게 발달해 있다.

잎의 운동으로 치면 미모사가 자귀나무보다 훨씬 유명하다. 그래서 흔히 자귀나무를 미모사 트리Mimosa tree라고도 부른다. 물론 미모사는 자귀나무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자잘한 잎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선 모습이나 밤이면 잎을 오므리는 성질이 서로 닮아 있기는 하지만.

미모사의 잎 운동은 수면운동 외 자극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곤충이 미모사의 잎을 먹기 위해 뛰어오르면 미모사는 즉시 잎을 오므린다. 연하고 맛난 잎을 보고 날아온 곤충은 순식간에 사라진 잎들에 적잖이 놀라고, 드러난 억센 잎줄기에 식욕을 잃게 될 것이다. 일종의 방어전략으로 이 역시 잎 세포 속 팽압 변화에 의해 일어난다. 오므린 잎을 원상복귀하는 데는 15~30분 정도가 걸리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식물을 돕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피토크롬이 빛뿐만 아니라 온도변화에도 반응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광합성을 하는 데 필요한 빛 조건과 생육 시기를 결정하는 온도변화에 대한 인식은 식물의 생존과 생장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콩과식물인 자귀나무는 뿌리에 공생균이 기거하는 혹을 가지고 있다. 뿌리혹 속의 공생균들은 공기 중의 질소가스를 이용해서 아미노산이나 유기화합물을 만드는데, 식물이 가스 상태의 이산화탄소를 이용해서 탄수화물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체로 뿌리에 단백질 비료를 만드는 공생균을 가지고 있는 식물들은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조직 내 질소함량도 높다.

질소가 풍부한 콩과식물의 잎은 동물들에게 매력적인 먹이다. 자귀나무 잎은 소가 좋아해서 소쌀밥나무 혹은 소밥나무라 불린다. 잎 속의 높은 질소함량은 낙엽이 질 때도 그대로 유지되어, 콩과식물이 자라는 곳에서는 좋은 흙이 만들어진다. 한때 자귀나무를 비료목肥料木으로 심기도 했다.

자귀나무는 밤이면 잎을 오므리고 잠을 잔다. 사람들은 자귀나무의 이런 모습을 보며 부부의 금슬을 기원하며 마당에 자귀나무를 심었다.
꿀 풍부해 곤충들의 축복이라 불려

자귀나무는 동방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북미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미국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버지니아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인 몬티첼로의 땅에 32개의 자귀나무 씨앗을 뿌렸다. 자귀나무는 미국 남동부지역의 척박한 토양에 이로움을 주는 나무로 여겨졌다. 최근 들어 너무 잘 자라고, 야생지로 번지는 탓에 침입식물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그 비단 같은 분홍 꽃과 향기에 대한 찬탄은 동양의 신비와 맞물려 개인의 정원에서 한참은 더 사랑받을 것 같다.

자귀나무는 '자귀나무이'와 '자귀뭉뚝날개나방'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달고 있는 해충을 가지고 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어린 잎이 노랗게 마르면서 낙엽 지는 것은 나무이가 자귀나무의 수액을 빨아먹어 생긴 단풍잎이다.

자귀뭉뚝날개나방의 피해는 참으로 난감한데, 유충은 실을 토해 잎들을 서로 엮어 그야말로 떡진 상태를 만들어낸다. 손을 대면 누렇게 마른 잎들이 쌀알처럼 바스라진다. 가을이면 수관 전체가 떡진 잎들로 채워질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귀나무는 해마다 새잎을 내고 비단 같은 꽃을 피운다.

정원에서 자귀나무는 가장 늦게 잎을 틔운다. 봄 늦게 깨어난 자귀나무는 꽃이 귀한 장마철에 부드럽고 섬세한 꽃을 한가득 피운다. 아래쪽 꽃송이부터 차례로 피어나 꽃을 피우는 기간도 꽤 길다.

짙은 습도에 숨 막히게 터져 나오는 자귀나무의 향기는 꽃의 춘궁기를 보내고 있는 곤충들에게 대단한 축복이다. 자귀나무의 잎자루에는 꿀샘이 있어 꿀도 풍부하다. 물론 꿀을 먹기 위해서는 비단실 스크린을 통과하고, 긴 꽃대까지 닿아야 한다. 나비에게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일 테다.

비 내리는 여름 정원, 사람들은 창 너머 빗물에 오므린 잎을 보며 사랑을 소망하지만, 자귀나무꽃의 향기에 이끌린 나비 무리는 내리는 비도, 사람들의 눈길도 아랑곳없이 사랑을 나누느라 분주하다. 꽃을 제대로 즐기는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차윤정 산림생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