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성경신학에서 본 성경의 중심사상 / 성경의 역사성

하나님아들 2024. 4. 27. 14:38

 성경신학에서 본 성경의 중심사상 / 성경의 역사성

 

    1. 성경신학에서 본 성경의 중심사상

 

      * 성경의 역사성 *

 

  성경의 대체적인 성격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를 훑어볼 때(지혜서, 시

가서 제외)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천

지 만물을 창조하신  역사에서  계시록의 마감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

다. 역사의 성격 중에 첫째로, 성경은 하나의 관념이나 사상을 이야기하기 보

다는 옛 시간과 공간에  뿌리박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

다. 역사라할 때 대개 전제되는  것이 '시간'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

건들의 연속성을 역사라 하는데 이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역사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는데, 어떤 이는 '역사는 순환적이다

'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계가 주기적으로

순서를 따라 반복되듯이, 어떤 사건이  반복되는  순환적인 것으로 보는가 하

면, 어떤 이들은 '역사를 주기성이다'라고 합니다.  즉 역사는 일정한 주기를

따라서 쇠퇴와 생성  그리고 발전을 되풀이 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역사의 성격에 대해서 다양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특별

히 성경에 기록된 역사성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성경의 역사관 *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20:31에서  구약을 가리켜  즉, 창조로부터 이스라

엘의 멸망과 회복  속에서 가리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역

사의 근본적인  전제와 가장   핵심적인 사실이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성격이고, 두번째 성격은 "예

언과  성취"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예언과 성취라 고하

는데, 구약은 예언이며,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라고만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예언하는 역사요, 신약은 성취되는

역사라 했을 때에 '구약 책  자체가 예언이다' 함과, '구약역사 자체가  예언

역사다' 함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흔히 구약을 예언하는 역사라 할 때, 구약

자체는 별 의미가  없고 신약만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가질 수  있게하여, 이것이 그대로 목회나 설교에도 반영이 되어서 대개

목사님들은 구약은  약간 제쳐놓고 예화정도만을 들고서  신약 중심으로 교리

설교를   하거나, 복음의 핵심  내용이 신약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신약만

이야기하는 편향적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약의 역사

와 신약의 역사  자체만을 놓고 볼 때, 결국  구약의 역사는 예언의 역사만은

아닙니다. 구약 내에도 수 많은 성취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도 순전

히 성취 역사만은 아니어서 수 많은 예언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등의 신약에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면서, 이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이러 이러한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라'는 표현이있

는데, 대개 이러한 표현들을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구약은 순전히 예언의

책, 예언의 역사요, 신약은  성취의 역사라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사실 그 '이러 이러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언한 그 예언의 성취

'라고 하는 어법이나  표현도 신약에만 나타나는 고유의  표현은 결코 아닙니

다. 열왕기하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계속 패역하는 중,  하나님은 선지자

를 보내서 계속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계속 완악하게 굴어 망해버리는  역사를

보고 성경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

에서 제하셨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

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표현에서 단순히 "구약은 예언

이요, 신약은 성취"라고하는 신약 편향적인  해석을 제할 수 있습니다.  여기

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함은 곧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라하는 것은 하나님

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같이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서 뜻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선지자를 통해 알리시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성

취되었다'고  하는 표현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

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두번째의 성격은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

의  실현이요, 말씀의 실현이며  이는 곧 하나님께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시

다'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성격은  "역사는 종국(완성)을   향하여 진전(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구약의 역사나, 신약의 역

사나 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역사이기에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의 역사나

신약의 역사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실현이라는 관

점에서 보면 둘다 똑 같은 성격의  똑  같은 동질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무언가 구약의 역사

자체로는 불완전한 면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면이 있기 때문에 더우

기 마태복음과 같은  표현들과 사건들 '이것은 구약에서  말씀한 것을 이루게

함이라'와, 히브리서의 '신약의 그림자와 같다'라는 표현이 생겨나게  되었습

니다. 신.구약 역사는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이라는 똑같은  성격과

질(quality)을 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구약역사는 똑같은 성격과 질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역사를 비

교해  볼 때 '신약 역사가 우월하다(표현에 어패가 있긴 하지만) 구약 자체는

불완전하여서 분명히 구약은  신약이 없으면 안되겠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

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반된  사실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하는 문제

가 생기는데,   이것은 역사가 종국(완성)을 향하여  진전하는 역사라하면 두

가지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말씀의 성취 역사이지만 그것이

어떤 종국(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할 때,  그 전(前) 단계는 그 다음 발전 단

계가 없을  때 그 자체는  불완전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체가 완

성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종국의 예수 재림을  치닫기 때문에 우리 역사 자체만을 볼

때는 무언가 불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성경의 중심 사상 *

 

  또한, 역사관 자체에  이미 암시되어 있지만 성경의  역사가 어떤 시작점을

갖고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할 때,  그것은  중구난방식의 역사이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서로 다양한 여러가지 역사 흐름이 교차하고 서로 상호 연관성이

없이 진행되고 있는가? 아니면, 역사  전체를  꿰뚫어 본 중심적 흐름이 있는

가?하는 것을 검토해 보는 것이   의의가 있겠습니다. 구약의 역사가  중구난

방의 역사가 아니고,  여러가지 서로 교차하고 제각기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면, 그 역사  중심과 핵심적인 흐름이 무언가  있겠는데,  바로 그 역사 전체

중심을  꿰뚫는 것을 '하나님의 계획'이라 하겠습니다. 우선 이를 제일  먼저

암시하는 것은 성경에서 첫번째 성격으로 뽑았던, '구약의 모든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말에서 이미 암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가 한 인격을 지시하며  증거하는  만큼 '그 역사는 동일성'을 갖

습니다. 그런데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막연한  말 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중심 사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을 두고 볼  때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예외:시편의 메시야 시,  직접 예언하는 선지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이 '구약 역사는 자신을 증거한다'고 하신 말씀) 무엇을 매개로, 어떤 방

식으로 구약의 역사가 예수를 증거하는지 관심을 가져봅시다.

 

  마태복음 1장을  살펴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하나의

족보를 보여주는데,  족보란 하나의  단순한  역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근원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 감을 볼 수 있

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세기 12:1-3절에서  하나님께서

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

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떤 땅에 어떤  큰 민족(nation)으로서 나라를

건설하시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대조

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의 나라 건설은 노아  이후의  도시 건설로

서, 저주와 멸망으로 마쳐지는데, 창세기  12장의 또 다른 나라는 온 세계 민

족의 축복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이 두 나라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사건

에서 세워진  나라는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건설된 인간  왕국이며, 창세기

12:1절의 왕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내가 네게  지시하

는 땅으로 가서' 세우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이 세우시는 나라입니다. 이는 매

우 의미가 깊은 내용으로서, 이 두  왕국을 대조시킬 때 그 둘의 운명은 11장

의 인간 왕국은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어 다 멸하여 온  땅에 흩어지게 하는

심판과 저주로 끝마치는 나라인데, 12장은 그 흩어진 인간  세계에서 한 사람

을 불러서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이 나라는  축복의 나라가 될 것이요, 온 세

계  민족의 복의 매개체로서 복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구약 역사)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할  때 어떻게 구약 역사와

관련이 되는가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근원은 다윗입니다. 다윗과 관련된 하나님의   역사 계획을 살펴보면 이는 하

나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때 마태복음 1:17절에서 족보

에 대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구약 역사를   다룬 의미와 일치합니다. 즉

아브라함-다윗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며  선언하신 이스라엘

왕국 성립시기이고, 다윗-포로시대까지는 그 나라의 실패 역사이며, 포로시대

-예수 그리스도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시작되며

그 회복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는 곧, 마태복음 첫 부분에서의   예수님의 족보 자체가 '성경 역사는 하

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더욱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예비사역자인 세례  요한의 외침으로서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최초로 선포하신  메시지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

다"였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을  통하여 다윗에게서 건설된 그 나라가 불완

전하고, 실패로 끝난 나라를 하나님의  은혜 약속에 따라서 다시 회복하고 완

성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역 자

체가 하나님 나라 건설임은 공관복음에도  역시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사도

행전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과 사도의 사역

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예는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 아브라함과 족장 역사 *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로 시작됩니

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의  의미와,  또 아브라함에 대한 그 선언

이후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브라함이 롯과

사라를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인 가나안  땅에  왔는데  이 땅은 창세기

12:6절의 그 땅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땅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족

장사를 대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롯과 헤어지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표면적 이유는 가축이었으

나,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고  떠난 뒤에 즉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곧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롯이 제하여

짐을 의미합니다. 이 외에 평생을 아브라함에게 충성한 청지기 엘리에셀도 제

외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사라는 경수가 끊어져 생산할 능력이 없자,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으나 교만해진  하갈은 좇겨나고 이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돌아가서 사라에게 복종하라고 명합니다.  이는 곧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예시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하갈-노예, 사라-자유한 여인이라  표현했고 이렇듯

어머니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묶으면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확정하였으

며, 오직 상속자는 이삭임을 말해줍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서 이미  태중에서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결정되어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족장사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곧 누가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

의 약속을 상속, 참여하는 자로서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삼을 것

인가?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사람의   혈통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주권적인 행하심과 약속에 의해서만이 유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

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이 가장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 두 형제는 육신적으로나 혈통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었으나,  이미 태중에

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로 야곱이 상속자로 인정되었습니다.  바울의

선택교리는 로마서 9장에서 이삭과 야곱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였고,  갈라디

아서 5장에서는 이삭은   성령을 따라난 자,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난 자로

표현하였습니다. 성령을 따라난 자란 다음과 같은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는데,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족장사의 최종적인 확정은 누구에

게 돌아갑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후에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 약속을 상속  받을 자로서 그 백성은 이스라엘이며, 야

곱의 12아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족장사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상속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음에는 요셉의 역

사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이주하게된 경위를 다루며 드디어 출애굽

기에서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을 다룹니다.

 

      * 종합 *

 

  성경은 근본적으로 역사를  예언한다고  했고, 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이고, 하나님이 철저히

주관하시는 역사입니다. 또한, 역사는  종국을  향해 진전하는데 여기에는 그

중심을 꿰뚫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직결되는 하나님의 뜻

과 계획의 구약역사를 연결시켜 보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역사였습니다. 또

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회복,  완성하시는 분으로 오셨으므로 진

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실 분은 예수님뿐이신 것입니다.

 

 

 제  목 : 2. 출애굽의 의미 / 애굽으로의 이주

 

 

              2. 출애굽의 의미

 

      * 애굽으로의 이주 *

 

  출애굽기의 서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인데,

이는 창세기 46:9절의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

.."과 서로  연결된 암시의 구절입니다. 창세기  46장에서도 출애굽기 초두와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전의 사건이 있었는데,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해가며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묻는 말이 있습니

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 내가

거기에서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

려 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

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에게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애굽으로 이주시키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곳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하리

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중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그 약속이 애굽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며, 45장에서 요셉

은 형들에게 '형들이 모함해서 억울하게 팔아 넘긴 것으로  생각치 말고 많은

생명을 하나님께서 구하시려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나를 이곳에 내

려보낸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 보내신

목적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함임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출애굽기 1장

초두에서 특히 숫자에 관해서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그 하나는 "70인이 내려

가서 셀 수 없을만큼 중다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

엘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신 목적이  달하였음을 이야기하며, 그  다음 단계인

하나님의 역사가  기대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표현은 출애굽이 하

나님 나라 역사 건설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 별의 셀 수 없을만큼의 중다한 백성의 약속을 지키신 또 다른

배경은 요셉을 알지 못사는  새 왕조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박해하리라는 것

입니다.

 

  첫번째는, 이스라엘은 중다해지고 이에 애굽은 그렇듯 중다해짐을 막으려고

고역을 맡기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  뿐만 아니라, 애굽에 필요한 큰 건축

을 위해 괴롭혔고, 두번째는,   산파를 매수하여 아이들을 죽이려  했으나 실

패하자 온 사내를 강물에 던지라고까지 합니다. 이와같은 바로의 조처는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을 중다케 하시는 일과 더불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애굽을 이

세상이라 하였을 때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때 하나님의 세력과 그것을 억누르

려는 반대 세력이 충돌함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고, 애굽 뒤에는 흑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애굽의 핍박은  단순히 정치적인

핍박이기 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흑암 세력과의 대결이고, 직접적

인 충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중다한 민족으로   커지고 강대해져간 하나님 나라의 모

습에서 세상은 이를 달가와하지 않고, 항상 이 둘 간에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

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모세 *

 

  바로는 모든 사내아이를 강물에  던지라는 명령을 하고, 이러한 조처에서도

모세는 죽음의 강물에서  살아나고  애굽의 심장부인  바로 궁에서 자랍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세력과의   투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의문

에서, 세상 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모세

는 바로 궁에서 자라며 학술을 다  배우고 행사에  능했다'는 표현을 받고 있

는데, 이렇게 모세가 애굽에서 자란  과정을 '교육'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왕

자로서의 교육은 지도자의 통치 교육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을 멸하려는 바

로의 조치를 통해서 모세는  애굽의 심장부에서 최고의 지도자 교육을 받습니

다. 그리고 모세가  백성의 고통 장면을 보고  살인하는 행위는 바로(애굽=세

상)의 교육이 무엇인가를 암시합니다.

 

  당시 세상 나라의 통치란 무력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이를 행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실패하고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양치던 모세는 비록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이 교육하셨고, 모세는 변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

겠다 할 때, 극구 사양하는 모세의  모습은 과거  자신의 힘으로 백성을 구하

려했던 모세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수

행할 통치의 대리자, 중보자인 모세를  때가 차매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시는

데, 그것은 자유(해방)의 사명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짓누르고  멸하려는 세

상 세력으로부터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처음에 바로의 이스라엘에 대한 박대

의도, 즉 자신이  지배하고자 했던  그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적 번성에

대하여 완전히 멸할려던  것 보다는 자신이  control할  수 있을 만큼의 수로

줄여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세상 세력이 하나님의 나라

인 교회를 자기의  이용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상 세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가나안에 정착시키

려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있어서의 자유는  항상 부정적,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가 아니어서, 즉 '...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으로

부터 벗어나서 ...으로 향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가나안 땅을 향한

자유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임을 의미

하고, 이는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죄에서 벗어나 해방된 우리를 하나

님을 향해 의의  병기로 살게 하시려는 목적이요,  이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의지임을 볼 수 있습니다.

 

      * 10재앙의 의미 *

 

  사명을 부여받은 모세와 바로의   대립 장면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흑암 세

력의 대리자와의 투쟁으로  시작이 됩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애굽의 풍요와 생명의 근원이라 믿었던 그 모든 것들(나일강, 토지 ...)

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

시는 분은 누구인가? 너희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이 누구에게 달려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모든  우상까지도 완전히  파괴하셔서 하나님만

이 이 세상의 온전한 통치자이심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출애굽기 전체의

흐름이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간의  투쟁, 하나님과  흑암 세력과의 투쟁 역

사라 할  수 있는데, 이  투쟁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 유월절과 홍해 사건입니

다.

 

  이 둘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유월절에서는 애굽의  장자들을 치는 것으로

서, 시편에서는 이것에 관해 말하기를 '애굽의 기력의 시작을 치셨다'고 표현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적  세력인 애굽의 세력을 꺾으신 것

'이라고 말합니다. 홍해 사건에서는 애굽의 군대를  모두 수장시킵니다. 이는

한 나라의 세력은 군사력으로 대변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유월절과 홍해 사

건은 하나님 나라를 멸하려는 세상 세력에 대하여 쳐부수심이요, 그 공통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역시  죽음 직면의  위험에 처했으나 유월

절에는 양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홍해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중보자인 모세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영역인 바다 속을 통과합니다. 그러므

로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역시 죽음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렇듯 유월절과

홍해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옛 애굽 생활의 종결이요, 옛 이스

라엘로서는 죽었다는 의미이며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

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홍해 사건을 세례로 비유합니다. 이

세례의 의미는 로마서  6장에서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존재가  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홍해 사건에 대응하는  신약의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십

자가 부활입니다. 유월절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인 세상 세력을 가장

결정적으로 꺾으신 하나님의 전쟁 승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십자가는 하나

님의 백성을 노예로 삼고자하는 죄의 세력을 꺾으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광야 생활의 의미 *

 

  홍해사건 이후 애굽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

가? 이는 자유로운 삶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삶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는 옛 존재를 벗어버리고 새로이  시작된 이스라엘 삶의 목적은 하

나님을 섬기기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삶의 실제 모습은 광야

여행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된  후 이제는 자유로운 삶이라 여

겼는데 실제 맞부딪힌 상황은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굽의 노예 생활로 되돌아감이 낫다고 여길만큼 고생스러운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우선,  하나님의 임재 표시였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하

나님과 함께하는 여행(생활)이었고, 이  여행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여행이

었습니다(가나안). 이 죽음의 땅을 어떻게 여행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적적

인 능력, 은혜 베푸심을 통해 살 수 있었던  여행이어서 먹을 것이 없는 곳에

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셨고, 도저히 물이 없었던 곳에서는 반석에서 생

수를 내게하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신약에서  상응되기를 히브리서에서 신자

의 생활을 광야 생활에 비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 앞에 선 신자

의 삶이란, 특히  악한 세상 가운데서 자연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성령의 생활입니다. 출애굽기  25:25절 이하에서 광야

생활의 또 다른 의미는  시험기간으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시험하여서 연약

한 신앙을 단련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광야 여행이 시작된 다음 도달

한 것은 시내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사 19

장 1-4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

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

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

습니다.  즉, 애굽에서 구해내셔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우선, 이스라

엘의 독특한 위치의 특권으로서  "세계가 네게 속하였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

고 너희는 나의 특별한 소유물로서 세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위치로서, 구체적

으로  너희는 나에게서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

다.  이때 제사장의 의미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는 특권과 하나

님의 축복을 백성에게 선포, 전달하는 중보자의 역할 수행입니다.

 

  이 제사장의 의미를 이스라엘  전체에게 여타의 민족과 관련시켜서 마치 제

사장이 일반 백성과 다르듯이, 이스라엘이 다른 세계의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

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지닌 백성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특권

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한 특권이라기 보다는,  이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세계

(민족)에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매개

자, 전달자로서의 의무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무를 감당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에서의 제사장 나라로서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격은 "성결

의 삶, 거룩한 백성의 삶"입니다.  특히 19장 이후에 나오는 십계명과 구체적

율법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제사장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이루려 함인데, 그 뒤에 율법이 나오는 이유는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 율법의 의미 *

 

  신약에서 바울이 너무 부정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소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실 율법도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살

아야하는 삶의 도리로서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

도 율법은 분명히 신령하고도 선한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

간의 능력과 악한  의지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고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심판과 정죄가 되는  것이요,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하는 당연한  삶의 도리라 한

다면, 이는 삶의 원칙이며, 구속 받은 자(출애굽 경험),  새로운 삶을 시작하

는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을 섬기는 원칙이며,  성도가 하나님의 섬김법도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확인하기를 "나는 먼저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한 여호와라"는 말에서 해방된 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다시 말해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구원이란 다른 말로 '카나', 즉  '사다'라는

의미로서 고린도전서에서 피값으로 산 성도를 이야기함과 동일합니다.  즉 애

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해방시킨 하나님으로서의 첫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

을 두지말라', 즉 여호와만이 너희의 유일한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구원을 통

해서  이스라엘에 절대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마치  로마서 1장을 상기시키는 말인데, 피조물의  형상을

앞에 놓고 절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  끌어 내린다

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전혀 다르며,  비교될 수 없는 초월

된 존재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의미는 그 당시의 종교 상태를 생각할

때 매우 놀라운 말씀으로서  어떤 것이든지 가시(可視)의 상태로 형상화 말라

는 것은, 하나님은 너희 이해  범위를 초월한 자이심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

니다. 이방 나라의  우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

다.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나라의 신  숭배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의식을 행하면서

신을 섬기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섬기라 하셨음에 매우

독특함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로 구별되면서, 계

명을 지키는 그 동기를 감정적  차원까지 깊이 파고들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

합니다. 이에 상응하는 신약적인 표현은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 등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의무적인 것,   자기 의(Self-Rightneousness)를 이루기   위한 동기로서의

계명 준수란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고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요, 진정하게 하

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러난  계명 준수야 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초월자

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고 절대적 섬김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며, 이 방식은  이

방 종교와 달리 그의 계명  준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

해야 합니다.

 

  흔히 이웃간의 계명이라 일컫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의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  기본이요, "탐내지 말라"는 계명 역

시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근본 동기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

의 생명을 도적질하는 것이 살인이요,  생명보다 귀한 다른 남편,  부인을 도

적질하는 것이 간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식 영역을 언급하며 이웃

계명과 관련된 대인관계(21장), 예를 들어  남의 삶의 권리를 침해 말라는 원

칙으로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1장은 노예에 관한  원칙들로서,  대개 남에게 빚을  지거나, 경제적인 이

유로 인해서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7년만에 놓아 보

내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 절대적인 소유권

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 즉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노예를 너희  형제라 이야기하면 그의 자

립할 근거도 마련해 주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여기에서 종의 경우를 언급했느냐를 보자면, '종을 놓아 주라'는 의미는

결국 종의 경우라도 삶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으며,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7년만에 어떤 이유든지 종을 자유롭게 풀어줌은 종도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권리 보장을 의미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현격한 신분의 차이 중

가장 낮은 계층이 노예이므로,  말하자면 노예까지도 벡성으로서의 근본 권리

를 보장해줬다 함은  그 위의 모든 계층도 물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권리를

보장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여종의 경우에는 대개 첩으로  취해지는데 만일 아들에게 줄 경우에는

며느리처럼 대접했습니다. 당시 이방 풍습은 여자 노예에 대하여 완전히 물건

취급을 하였기 때문에 집안의 모든  남자가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

들이 먼저 취했을 경우에 며느리  같이 대접함은 여자 노예도 인간이며 또 같

은 형제, 자매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삶의 권리를 보장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방 풍습에서는 싫증이 나면 노예를 다시 팔아버

렸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만약 싫증이 나면  최소한 3가지 즉  먹을 것, 입을

것, 부부생활을 보장해 주도록 했습니다. 이는 아내로서의 권리  보장의 의미

입니다. 당시 이방  사회 윤리에 대해 이런 윤리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

다. 그러므로, 노예라는 가장 낮은 계급을 언급함으로써 예증적인 성격을  갖

게 되어서 모든 신분의 상하적인  차이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어떤 계층이

든지 너희는 한  형제이다' 임을 이야기 합니다.

 

  22장 25절에서 돈을 꾸이다가 옷을   저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 보내

라고 합니다. 이때까지의 이웃간의 윤리는   어떤 의미에서 상호 대등한 관계

로서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하며  보장하고, 침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데 돈을 갚지 못한다면 나는  그 옷을 돌려주지 않아도 무방한 법적인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밤에  그가 춥게 잘까를 우려하여서 돌려준다 함

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윤리 수준이 그저  give and take식의 '나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너도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윤리적 차원 이상의 것이어서 불쌍한

자를 불쌍하게 여기며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차원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해도 좋고 안

해고  좋은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했을 때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신약의 산상수훈의 윤리 수준

과 모세의  윤리 수준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24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핵심은 "나는  너희 하나

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벡성이

왕과 그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 언

약으로서 이 관계에는 하나님의 백성된  삶의 도리를 지키는 전제가  되는데,

이 언약은 피를  흘린 의식을  통하여서  확정지어집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순종 요구를 맹세함으로써 시내산 언약을  맺습니다. 25장부터

는 성막 건설을 통한 헌금을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고, 31장에서

33장은 헌금을 받아서 성막 짓는데, 출애굽기는 성막을 지음으로 끝나집니다.

 

      * 성막(회막)의 의미 *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하는 처소로서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곳이며, 출애

굽기에서 성막의 배열 모습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둘러 싸여지

는데, 이는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는

계시록 11장과 일치하여서 출애굽기  마지막에 성막의 완성 모습을 보여 줌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이

루어집니다. 그런데 성막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충 세마포   - 수양의 가죽 -

수달의 가죽의 세겹이고, 세마포 안장에는  그룹을  수 놓고, 전 벽은 금으로

둘러  싸여 있고 또 그룹들이  수 놓아져 있습니다. 법궤 덮개 역시 그룹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 주위에 천군 천사(Heavenly Being)로 둘러

싸여 있는 것으로 이것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온 우주 만물을 통

치하시는 통치자의 모습으로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의 성전 환상은

'만군의  왕'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막은  하늘의 보좌

(Heavenly Coat), 즉 모든 지상 역사를   통치하여 결정하는 하늘 어전의  모

습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성막을 하늘 성소의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겠습니까? 그 백성을 다스

리는 왕으로서 임재하여 계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모습에서 특징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이동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성막은   임시 처소로서 잠정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스데반은 이런 진영으로  이동하는 것을 광야교회라 부름으로써 오

늘날 교회가 어떤가를 시사해줍니다.  광야 생활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서만  생존이 가능하며, 이러한 악조건 가

운데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는 법을

철저히 단련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함께 진행

하시며 그들의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자유로

운 왕의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이후에는 성막에 관한

것으로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성막  건설을 위한 헌금,  26장은 건설

방법, 31장은 기술자와 실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막의 건립이 중시되는  가운데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렇

다면 성막이 세워지는 도중에 금송아지가   왜 등장하는가 하는 의문과, 성막

의 성격에서 금송아지에 대한 암시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살펴 봅시다.

 

  금송아지 사건은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후  빨리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지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적과 능력을 나타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가시적으로 하나님을 모세를 통

해서 봤으므로 모세가  빨리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며, 무언가

보아서 확인 될 수 있는 형상을  원했읍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 모습

을 보고 두  돌판을 깨뜨리고 백성들을 쳐 죽입니다.  그 후에 모세가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구한 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거두고 나서 두 돌

판을 다시 받게 됩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깨뜨린 이유는 두 돌판을  언약판, 증거판이라 성경에서

표현했으므로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성격이 제 1계명을 범했기 때문에, 이 언

약이 무효화 되었음을 이스라엘에게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

라엘이 깨뜨린  언약은 하나님께서  긍휼히여겨  용서하심으로 모세에게 다시

두 돌판을 깎아 오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언약 관계의  회복을 뜻합니다. 이

사건이 성막 건설의 한 과정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깨어진 언

약을 회복함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레위기에서는 속죄제 등 여러가지 제사 형

태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있는 성막에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왕으

로 임재해 계시되 법궤 위(그룹  사이)에 존재하시는데, 이 법궤 안에는 증거

판(십계명)이 있고, 십계명은 언약을 상징하며 이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 레위기 *

 

  우선 레위기를 진행하면서 출애굽을 살펴보면 25장 전체는 성막을 언급하여

성막 완성으로 출애굽이 종결됩니다.   흔히 레위기는 제사 직분과 관련된 여

러가지 규례라 여기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

님의 율법이 계속됨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레위기 내용은 성막 중심의 하

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가지 규

례에서 공동체, 사회 생활에 관한 모든 생활의  규례로 확대됩니다. 그러므로

의식 영역에서의 하나님을 섬기는 삶(Courtesy Life)이 제일 초두에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섬김의 삶으로  언급되었음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는 예배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섬김에서의 핵심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섬김의 삶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가볍게

드려서는 안될 줄 압니다.  특히 선지서에서 '온갖 제물보다 하나님을 순종한

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의 표현이 의식적인 예배를  상당히 소홀코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 자체는 의식적인 예배를 매우 중요시하며, 여기에서 드린 여러 제사 -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 들의  의미는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섬김

의 삶으로 항상 피(Blood)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성소에 임재

해 계시고 제사장이라는 중보자가  있다해도 예배드리는  자가 성막에 찾아와

야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에 피가 필요하다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이  되어졌습니다. 이렇게 속죄

의 필요성 때문에 성막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성막에서 속죄와 헌신, 감사,

화목제 등을 드리면서 제사장과 다른   사람들과의 서로 나누는 교제가  이루

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헌신, 감사 등은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또

한 실제로 이러한  헌신, 감사, 용서, 교제 등은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