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4. 4. 17. 16:23

 

신학이란 무엇인가 - 1 (02 중세와 르네상스)

 

1 부: 시대, 주제, 인물로 본 기독교 신학

 

핵심 내용:

1. 기독교 사상이 형성된 지리적 위치

2. 신학적 논쟁과 쟁점

3. 신학적 쟁점에 대한 학파들

4. 시대별 주요 신학자와 관심사들


02 - 중세와 르네상스 (700-1500)

중세의 정의:

중세는 애매한 시대이다. 중세는 서유럽에서만 발달한 특정한 시기이다. (동로마의 멸망이 1453년이라고 기록되고, 이것을 우리는 비잔틴 제국이라고 한다). 중세라는 개념은 사실 현대인의 기준에서 과학 혁명 (근대) 이전과 고대 시대 이후의 어중간한 시대(시대의 중간)을 의미한다. 보통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종교 중심적 시대를 무시하는 표현이다. 7세기경 이슬람 군의 진군으로 유럽의 지표가 바뀌면서, 이전에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땅을 3개의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서쪽 빨간 점 (로마) , 동쪽 빨간 점 (콘스탄티노플)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리된다. (9-10세기) 서방 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온다고 해석했고, 동방 교회는 서령이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서방 교회는 라틴어를 동방 교회는 그리스어를 쓰는 문화적 분리도 점점 심해졌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중요성과 로마의 교황의 대립도 교회의 분리에 기여했다. (여기서 가톨릭과 동방 정교가 나뉩니다). 동서의 교류 단절을 원인으로 꼽는다.

서부 유럽의 특징:

중세의 시작은 역사 학자의 정의마다 달라진다.

1. (529년) 아카데미아의 해체와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의 설립 (아카데미아: 고대의 유산 - 몬테카시노: 중세의 상징): 학문의 중심지의 전환

2. (410년) 게르만족이 로마를 정복한 일 (이 여파로 프랑스 대성당들의 학교, 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으로 사람들이 몰림): 정치적 중심지의 변환

이것을 통합하여 샤를마뉴 대제 (카롤링거 왕조) 때 신학이 번성했던 것을 기준으로 중세를 정의한다.

(지금의 프랑스, 독일, 스위스, 약간의 영국 -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땅은 교황청)

1. 카롤링거 르네상스

신학 갱신운동, 앨퀸 (735-804). 요크 성당 학교 교장 + 생 마르탱 수도원 수도원장.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유럽에 2가지 교육기관 설립한다.

(1) 수도원 (수도사의 소명을 지닌 사람들을 교육)

(2) 대성당 학교 (폭넓은 교육을 목적으로 주교가 세운 학교, 주일학교 + 대학교)

744년 독일의 풀다 대수도원은 신학, 그리고 세속 학문을 교육하는 곳으로 유명해진다. 정치적 이유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힘을 잃지만, 샤를마뉴 때 지어진 위의 조직들은 살아남는다. 훗날에 르네상스 혁명에 큰 역할을 기여한다 (12세기).

2. 수도원, 대성당 -> 신학교

교부시대 수도원은 시리아 동부, 산악지방에 있었다. (속세를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며 수도원을 설립한 자들도 있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베네딕트 수도원"이다. (수도원 프랜차이즈의 시작). 6세기의 '베네딕트 수도회 규범'( 무조건적 순종과 기도와 성서 읽기 )가 형성된다. 중세의 수도원의 특징은 신학을 가르친 교육 기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샤르트르대성당, 노르망디, 베크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 역시 중요한 신학자를 배출한다.

수도원 시대에 또 다른 특징은 여성 저술가들이 교회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빙엔 힐데가르텐, 시에나 카타레나 등이 있다). 그러나 여성 저술가들은 수도원 밖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노리치의 줄리안, 메히트힐트 등이 독립적 행보를 보인 여성 저술가이다). 또한 12세기에 랑 대성당의 랑 안셀무스 역시 그곳을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후 세워진 생 빅토르 수도원은 가장 중요한 신학의 장이 된다).

3. 수도회와 신학교들

이후 수도회가 설립되는데, 그중 시토 수도회가 유명하다. (유명 프랜차이즈 수도회: 수도원과 수녀원을 600여 개 보유). 이후 독특한 3개의 수도회가 발달한다. (이때 다른 교복을 맞추는 것이 성행함)

(1) 도미니크 수도회: (검은 외투): 스페인에서 만들어짐. 교회의 지적인 삶과 교육을 강조. 대표 인물: 대 알베르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타랑테즈의 페르투스

(2) 프란체스코 수도회: (짙은 회색 외투): 프란체스코가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만듦. 가난과 청빈을 강조. 대표 인물: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오캄의 윌리엄

(3)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대표 인물: 로마의 질스, 스트라스부르의 토마스, 이후에 마틴 루터

4. 대학교 설립

센 강기슭에 여러 학교들이 설립 (소르본 대학 = 훗날의 파리 대학교). 대표 인물: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 대 알베르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중세 시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존 칼뱅 (개혁 시대). (그냥 유명한 학자는 거의 다 여기서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5.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4권의 명제 집"

중세 신학의 특징은 성서와 교부들의 자료 축적, 모순 찾기, 해석 방식 찾기: 명제 만들기.

1140년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파리 대학교에서 어거스틴의 1000개 구절을 모아두고 명제를 찾게 가르쳤다. 모순점을 찾아 신학적인 올바른 해석을 하는 싸움을 시킨 것이다. 그의 책은 일종의 교과서 역할을 하며 16세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6. 스콜라주의

스콜라주의는 중세 시대에 고전 신학과 철학 문제를 토론한 학교들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관념들을 철학적 도움을 통해 완전하게 하려고 했던 시도이다. 1200년대부터 1500년대 사이에 꽃 핀 중세의 운동으로, 종교적 믿음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고, 믿음들을 체계를 제시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스콜라주의는 신학 밖의 또 다른 믿음이 아니라, 신학을 행하는 독특한 방식 중 하나를 의미한다. 이성과 논리가 신학에서 행할 수 있는 부분을 극대화 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오캄의 윌리엄 등이 있다.

7. 이탈리아 르네상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인간을 군집이 아닌 개인으로 판단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요인은 아래와 같다.

(1) 중세 이탈리아 대륙에 지적인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 (지적인 갈망)

(2) 이탈리아 대륙에 로마의 찬란한 문명이 남아있었다는 것 (지적인 자극)

(3) 비잔틴 제국 (동유럽 -터키)이 무너지면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지성이들이 이주한 것, 더불어 그리스 고전의 자료들도 넘어온 것. (지식의 충족)

이는 스콜라주의와 기독교에 싫증을 느낀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반작용적으로 고대를 위대하게 보고, 중세의 학문을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 (기독교적 개념은 낮은 것, 고대의 철학은 위대한 것).

8. 인문주의의 발흥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와 같다. ( 예를 들면, 복잡한 신학 체계가 아닌 신학 성서 원문으로 돌아가서 보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는 기독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싸움이었다.

동부 유럽의 특징:

비잔틴 신학은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며 발생한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225) 때 비잔틴 신학은 지성적인 면에서 부상하기 시작한다. 서방과의 분리와 신화적 관점으로 구원을 해석하게 된다. (서방의 연옥 교리 등을 못마땅하게 여긴 까닭이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오류에서 출발한다). 아무튼 이렇게 동서양의 교류가 분리되고 나누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1. 비잔틴 신학의 등장

그들은 신학의 체계화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미 주어진 신학을 설명하는 것에 애를 썼다. 조직 신학이 아닌 신학적 주석을 다는 방식을 발전을 했으며, 교부들을 성인으로써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2. 성상 파괴 논쟁 (725-842)

황제 레오 3세가 유대인과 이슬람의 개종을 성상이 방해한다고 여겨 파괴하라고 명령한다. 이 논쟁의 쟁점은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으로 나타내는 것을 성육신 교리가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고 한다).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는 물질세계는 영적 세계를 예시하고 중개할 능력이 있다는 논증을 펼친다. (물질도 영적인 것만큼 중요하다 이거지).

3. 헤시카즘 논쟁 (14세기)

헤시카즘은 내적 고요를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종의 명상법이다. 옹호자들은 이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로 보았다.

이러한 비판은 팔라미즘이라는 사상을 만든다. 팔라마스는 신의 본질은 볼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지만, 신의 '활동'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고 헤시카즘을 옹호한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낀다는 것과 같다).

4. 콘스탄티노플의 멸망 (1453)

터키의 이슬람 군대가 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비잔틴 시대의 끝을 맞이한다. 이때 대부분의 정교회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래서 지금도 그리스와 러시아의 종교는 동방정교다). 그리스가 1829년 터키의 지대에서 해방되고 정교회 신학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주요 신학자들:

1.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 (676-749)

동방 교회 사상가. 성상 파괴 논쟁 때 성상을 옹호하는 교리를 펼침. 성육신을 근거로 하나님의 물질을 통한 자기 계시를 좋아함을 밝힌다. 대표 저서는 3부작으로 쓰인 "지식의 원친"이다. 1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기독교의 관계. 2부는 에피파니우스가 이단에 관해 쓴 글에 개정. 3부는 그의 기독교 초기 사상에 대한 논평이 담겨있다. (이는 훗날 페트루스 롬바르투스의 "4권의 명제집"과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인용된다).

2. 신() 신학자 시메온 (494-1022)

20세 때 영적인 체험 이후, 스투디오스 수도원에서 자신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과 같이 시메온으로 바꾼다. 근대 정교회 신학적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 비잔틴 교리의 주제 (성육신 교리를 강조, 신화(deification)로서의 구속)을 설명한다.

3.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1033-1109)

그는 프랑스에서 배운 논리학을 통해 (1) 하나님 존재 증명, (2)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합리적 해석에 기여한다. 프로슬로기온 (그는 앞서, 모놀로기온을 썼는데 - mono 하나의, logo 계시, 로고스 /이런 뜻을 것 같다. 이에 불만족하고 추가로 적은 책이 이 책인데, 아마 의미는 Pros - 더하여, 마주하여, Logos 계시 로고스, 이런 뜻이겠지)에서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논증한다. 신학과 철학의 접목으로써 "이해를 추구하는 신학"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이후 그는 노르만족 침략 이후 캔터베리 대주교로 초빙되어,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를 기록한다. 이 논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인간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나타낸다. 그는 스콜라주의의 대표 저자 중 하나이다.

4. 토마스 아퀴나스 (1125-1274)

1244년에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가족들은 베네딕트 수도회에 보내려고 했다. 아퀴나스의 고집은 그의 별명인 "벙어리 황소"에서 잘 드러난다. (몸도 뚱뚱했겠지만) 파리에서 재학 후, 마태복음에 대하여 3년간 강의한다. "이교도 논박 대전"을 저술한다. (이슬람, 유대교 선교사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노증을 제시한다). 그의 대표 저작은 1266년에 쓰인 Summa Theologiae이다. (내가 알기론 10.000 페이지는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건 벽돌이 아니라 그냥 벽이다). 이 책은 기독교 핵심 교리와 신학의 핵심 요소들을 깊이 연구한다.

1부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2부에서는 2파트로 나누어 인이 하나님께 회복됨을 다룬다. 3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이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방식을 다룬다.

그의 공로는 아래와 같다.

(1) 다섯 가지 길: 신 존재 증명의 5가지 방법

(2) 유비의 원리: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신학적 기초

(3) 신앙과 이성의 관계

5. 둔스 스코투스

그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가르쳤다. 그는 "명제 주해서" 3권을 지필 했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 옹호자였다. 중세 흥행했던 조명성 (하나님이 인간의 지성을 비춤으로 인식이 생긴다)에 대한 비판을 했다.

(2) 신적 의지가 신적 시정을 우선하는 주의설을 펼친다. 아퀴나스는 신적 지성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반면, 스코투스는 신적 의지가 앞선다는 가정을 기초 삼는다. (알아차리고 행동하는가, 행동하고 알아차리는가)

(3) 마리아의 무흠 수태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할 때 죄가 없어짐) 교리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아퀴나스는 마리아도 죄로 더럽혀졌다고 했지만, 스코투스는 완전한 구속을 위해 하나님이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먼저 거룩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6. 오캄의 윌리엄

오캄의 주장 등을 주의설(하나님의 신적 의지, 하나님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이나 공로에 얽매 이 필요가 없다)를 옹호하며 신적 지성보다 신적 의지를 우월하게 여겼다. 그는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 오캄의 면도날: 불필요한 수식과 복잡한 것들을 제거한 가장 단순한 공식이 진리에 가깝다. (신학이든 세속적 학문이든 굳이?라고 느끼는 것은 다 잘라내겠다는 것). 이 과정에서 청의를 아퀴나스가 말한 '창조된 은총 습성' (인간 안에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오감을 이를 거부함으로 개혁 시대의 칭의적 개념을 가능하게 한다.

(2) 유명론의 옹호자였다. 그는 보편(universal)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는 "하나님의 두 능력 변증법"을 세운다. (유명론은 간단히 보편적 개념 - 나, 너, 철수, 영희를 정의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의 존재가 실제로 있다는 실제론에 반대하는 개념이다. 보편적 개념이 실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라는 단어의 소리와 추상적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유명론이라고 한다).

(범우주적인 하나님의 교회라는 게 실제하고, 그다음에 개개인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 실제론이라면,

유명론은 범우주적인 그런 건 없고, 개개인의 실제 하는 교회 속의 추상적 개념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7.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중세의 인문주의 사상가이다. (출판사 사장님으로 이해하면 쉽다. 또는 유명 유튜버? 이자 학자). 헬라어 인쇄본을 펴내고,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위한 지침서"로 인기를 얻는다. 이 책은 규칙적 독서로 평신도들 신앙의 성숙과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주장한다. 그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철학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적인 도덕적 가치(독서 등을 통한)가 먼저 개인을 변화시켜야 할 것으로 보았다.

(1) 최초의 헬라어 성경 출판. 원문을 직접 다룰 수 있게 해줌.

(2)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및 여러 교부들을 판본으로 펴냄.

주요 신학적 업적:

1. 교부 시대 유산의 통합 : 12세기 이후에 교부들의 원래 저작으로 돌아가, 신학적 통찰을 했다. 대표작 "네 권의 명제집"

2. 신학에서 이성의 역할: 스콜라주의.

(1) 신학의 조직화, (2) 신학의 합리성의 입증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고백은 합리적 이해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이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철학에 많은 도움을 받는다.

(1) 철학은 신학의 합리성의 도움을 준다,

(2) 철학은 신학의 체계성의 도움을 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에 큰 기여를 한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원리를 환원한 것이다).

(3) 옹호론(apologia = 변증법)이 발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동의하면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철학을 옹호하면 신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

오르비에토의 위골리노와 같은 비평가들의 입장:

철학에 너무 의존하면 기독교적 핵심 통찰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표적인 예: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하나님의 의가 각자 받을 권리를 나눠주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다. (훗날에 마틴 루터가 분노했다고 한다).

3. 신학 체계 발전: 대표작 "Summa Theologia, 신학 대전"

4. 성례전 신학:

초대 교회가 많이 다루지 못한 성례의 합의를 이루었다. 교회가 사회의 부흥을 이루어 내면서, 교회의 공적 예배 활동과 예배 이론 등의 통합이 생겨났다.

5. 은총 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은총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저자는 반박 과정에서 급하게 나온 것임으로, 단편적인 견해로 남아있었다. 중세 신학자는 이를 통합하여 은총과 칭의 교리들이 발전했다.

6. 구원 과정과 마리아의 역할

마리아의 원죄를 두고 무흠론자와 유흠론자가 논쟁을 버렸다. 이어서 마리아가 죄가 없다면, 그녀를 구속의 참여한 공동 구속자 (십자가 사역의 지분을 받은 자)로써 여길 수 있냐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7. 신학 원전으로의 회귀

고대 로마와 아테네로 돌아가는 이 운동은 시학의 기초자료와 시약 성서의 원전 자료들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라틴어 번역본, 대표적으로 붙가타(Vulgate) 성서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불가타는 한국으로 치자면 개역개정 본과 같은 위치에 있던 것이었다). 이러한 번역의 문제는 교리의 발전을 이끌었고, 그것의 중심에는 인문주의 학자들이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원문으로부터 오류적 해석을 지적하자, 일부 신학 이론들의 성서적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다.

8. 불가타 성서 비판

최초 그리스어 성경은 에라스무스가 1516에 출판하였다. 중세 교회의 설교와 관습들이 교회의 권위를 주었는데, 그 주장들을 에라스무스가 반박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1) 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불가타) -> 고해성사 (외적으로 스스로의 죄를 치는 것)를 해야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석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리스 원어) -> 이것은 심리적이고 내적인 돌이킴을 의미한다.

(2) (불가타) 눅 1:28 -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은혜가 가득한 사람, 은혜가 넘치는 존재)라고 인사한다. -> 이는 마리아가 언제든 은혜를 줄 수 있는 것처럼 교회가 설명했다.

(그리스어 원어) 눅 1:28 -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 - 마리아는 은혜를 베풀 능력이 없음

이는 번역본의 신뢰성의 문제를 제시하고, 신학을 개정하는 길을 열었다. 1520년부터 본격적이 성서학 연구가 시작된 까닭이기도 하다. (종교 개혁과의 상관관계도 있다).


소감:

중세는 신학적 입장에서 폐쇄적인 교육의 장이다. 신학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학문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을 공부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결과를 낳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는 시대인 것 같다. 물론 나도 스콜라주의 사람처럼 이성으로 깨닫는 하나님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의 시대는 그때와 반대로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철학과 신학의 우선순위에서 철학이 높아질 경우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것을 본다. 또한 나 역시 원어로 돌아가서 성경을 바르게 조명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권위와 대적하며, 우리가 그래왔던 예배의 질서를 무너지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경고가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컴의 윌리엄과 같이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본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상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단지 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싶을 분인데, 누군가는 그것을 “지식적이다. 인간적이다”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수도원들은 일종의 종교단체로써 엄청난 성황을 누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도원과 기독교 동아리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반대로 과도한 공동체와 과도한 금욕을 중시해서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중세는 어느 분야든지 선을 넘으면 어떠한 문제가 생기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이 원문을 찾는 것이든, 교회의 규칙이든, 절약하고 베푸는 삶이든, 공동체 중심이든, 이성이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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