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믿음의 본질(갈2:16)

하나님아들 2024. 3. 28. 00:07

믿음의 본질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 찬송가: 260장, 251장

종교개혁은 어떤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의 신앙을 되찾는 운동이었습니다. 즉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중 세 로마 천주교회의 변질을 안타까워하여 본질로 돌아가고자 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슬로건 중에 하나는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한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교부들의 신학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부들은 사도들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을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를 지키며, 교리와 신학을 정립한 분들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내적 갈등이나 이단과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바른 가르침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했고, 외적으로 박해가 임할 때에는 순교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의 생생한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세 천주교회는 이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있었습니다. 마리아 숭배, 성자 숭배, 성물 숭배 등 온갖 미신 덩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10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중세교회 는 점차 부패하여 성경의 권위는 상실되고, 사람이 만든 전통에 집착하였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 대신에 면죄부를 발행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고 교부들의 신학에도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 이지 중세교회의 전통이 아닙니다. 칼빈도 그래서 성경을 원어로 많이 연구했고, 교부들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본질로 돌아가는 것 중에 하나가 ‘오직 믿음’(sola fide) 이었습니다. 왜 ‘오직 믿음’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중세의 로마 천주교회가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오직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질을 왜곡시킨 변질이었습니다. 이런 공로주의는 비성 경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강요』에 보면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의(義)가 믿음과 행위의 협력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수많은 증거들은 거짓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중세 로마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인간의 행위적 공로가 더해져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비성경적 생각을 가르친 것입니다. 오직 믿음입니까? 아니면 믿음에 우리의 인간적 공로가 첨가되어야 합니까?

 

무엇이 복음인가

이것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의 주제와 같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은 율법주의적인 이단이었습니다. 그 이단에 대해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 ‘복음의 변질’이라고 하며,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1:6-8).

 

그 율법주의적인 이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데 여기에 율법 준수를 더하는 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불의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며,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는 말씀은 율법을 지켜서 즉 우리 자신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기록된 의를 다 행할 수 없는 근본적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웅변적으로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뼛속까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선행을 할 수 없습니다. 도르트 신조에는 “모든 사람이 죄악 중에 잉태되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구원의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며 죄의 노예다.”라고 했습니다. 또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았고, 누구보다 성화를 많이 이루었던 바울 사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바울의 인생 후반기에 기록한 디모데전서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현재형 동사가 쓰였습니다.

그렇게 평생 거룩한 삶을 추구한 바울 사도조차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서도 생각과 행위가 완전히 성화되지 못했습니다. 대사도인 바울이 그러했다면 평범한 우리야 얼마나 더 깊은 죄성을 가진 존재들입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는 저의 마음도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죄인 중에 괴수요, 괴수 중에 괴수임을 고백합니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유아기 젖 먹던 시절의 죄까지 회개합니다. 유모가 아이들 젖을 먹일 때 보면, 먼저 먹고 배부른 아이를 내려놓으면 이미 배부른 아이가 다른 아이가 젖 무는 것을 보면서 째려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라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앞에는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사오니 이 세상에서 하루를 살았던 어린아이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죗값을 치르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얻습니다. 오직 믿음 외에는 구원의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이단은 십자가 전부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도 필요하지만 율법준수를 통한 공로도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반율법주의(半律法主義, 구원의 조건의 절반은 율법준수라는 주장, semi-legalism)라고 부릅니다. 또 갈라디아 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일어났기에 갈라디아주의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인간의 공로를 덧붙이는 것은 누더기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다 이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이단의 주장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것이 ‘다른 복음’이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보다 연장자이며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자기 멘토인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성도와 식사를 하다가 유대주의자들(할례파들)이 오니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떠나자 베드로와 바나바를 책망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만큼 복음이 변질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장을 쓴 바울 사도가 이 부분만큼은 아주 단호하였습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사랑할 것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사탄의 공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율법주의가 중세시대 로마 천주교회에 나타났습니다. 즉 그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거기에 인간의 공로까지 포함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른 복음이고 거짓 복음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sola fide)은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다섯 가지 솔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칼빈은 이 믿음이 인간의 결단으로 보이지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주된 역사는 바로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합니다. “신실한 성경 해석자인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를 믿는 믿음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하셨고 또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고 하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두 사람이 듣는데 한 사람은 멸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일으킴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멸시하는 사람은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일으킴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 덕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의 말씀처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복음을 깨닫고 믿게 도와주셔서 우리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넓게는 성경 그리고 좁게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므로 구약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절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복음을 믿을 때 누구라도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구원받은 자의 확신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하게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인간이 감관(感官)으로 아는 이해나 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감관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엡 3:18-19) 능력으로 멋지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그분의 뜻을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골 1:26, 2:2). 즉 믿음은 복음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참된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참된 신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친절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시라는 든든한 확신을 갖고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약속들을 의지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의지하고 사망을 확실하게 이기는 사람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신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여부를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기준을 둔다면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약속에 둔다면, 즉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믿으면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것을 다시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 솔라 피데’(sola fide)입니다.

둘째, 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와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셋째, 이 은혜가 너무나도 크기에 우리 생애를 그분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C. T. 스터드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었다면 그분을 위한 어떤 희생도 결코 위대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와 헌신을 하고 난 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자기 헌신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아는 ‘오직 믿음’의 사람은 ‘나의 헌신은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넷째, 현대판 반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인 안식교와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 등 십자가를 믿는 것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배격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교리적 순결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제1문)

 

박성규 목사(부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