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요한 계시록의 개요

하나님아들 2024. 3. 24. 23:14

요한 계시록의 개요

 

 

요한계시록은 가장 중요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외면당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상징적인 내용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이유를 든다면 이미 이단에서 분탕질을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깨끗한 개울물에 들어가 보고 싶은데 누군가 물고기를 잡는다고 물을 흐려놓아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00년 여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계시록이 신약성경에 포함된 것을 싫어했으며, 칼뱅은 요한계시록의 주석을 아예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신뢰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적인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5백 년 전의 상황에서 '종말'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생소하게 여겨졌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위치

성경의 모든 책이 중요하지만, 요한계시록은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계시록의 권위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는 구약의 성취, 즉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에 언급된 모든 내용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이 신약으로 인하여 권위를 갖듯이,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는 계시록으로 인하여 더 큰 권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계시록은 성경 전체의 결론일뿐 아니라 인류의 결론입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은 믿거나 말거나 많은 생각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분명한 기승전결과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성경을 품지 못해도 성경은 세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난 그 어떤 시도라도, 예컨대 아무리 화성 탐사를 계획하더라도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계시록의 결론이 이 세상의 결론'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계시록의 목적은 마지막 때에 두려움이 아닌 확신과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단들이 두려움을 조장했기에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계시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즉 영원한 천국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말은 불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이자 끝이지만, 신자들에게는 희망이자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단지 어렵다고 멀리할 책이 아니라 수시로 읽고, 듣고, 지켜야 할 책입니다(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서신서로서의 목적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대체하며,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가 임박하였습니다. 게다가 지구온난화와 핵 무장으로 인한 핵 전쟁과 같은 3차 대전 등으로 인한 지구 종말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지구 종말'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는 관심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즉 '종말의 시기'와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두 가지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해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말의 마지막 때(말세지말)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종말은 초대 교회 즉 바울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이 세상에 종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는 이미 교회에 대한 박해(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극심하였고,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었던 주후 313년까지 교회에 대한 박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당시 성도들이 회람하며 읽으면서 격려를 받고 소망을 품게 했던 편지입니다. 즉 말세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자기 두루마기를 빨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책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도전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태도

지난 2천 년간 교회는 크고 작은 환난을 거쳐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다만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면, 폭포가 가까울수록 물살이 세져서 헤어 나올 수 없듯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때를 두려워하며 그때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언제 오시든 맞이할 준비가 된 신부처럼 두려움보다 오히려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내 생애에 지구의 종말이 올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육체의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어떠한 모습으로 종말을 맞이하냐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철학과 사상과 이념에 따라 좌우로 나뉘었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오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좌우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 중에서 양과 염소를 분리하실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부류에게는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라고 하실 것이며 마7:23, 다른 한 부류에게는 '내가 너를 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마10:32.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는 하나인데 왜 예수님은 누구는 안다고하시고 또 누구는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구약에서 신랑은 하나님을, 신부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신부는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큰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구체적인 신분은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와 같습니다(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종말을 대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오실 신랑을 맞이할 기대감에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예컨대 약혼한 여자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뭇 남자들과 즐길 생각을 한다면 정신나간 여자 아닙니까? 그러한 여자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모든 것이 들통이 나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와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일곱교회의 비유의 말씀은 신랑되신 주님 오시기 전에 신앙에 바람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자 동시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교회라는 신부의 들러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욕심에 기웃거리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복음으로 준비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즉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계22:14). 이러한 자가 복된 자라는 것이 계시록의 결론입니다.

"무관심한 일은 없다. 무관심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체스터튼의 말처럼 요한계시록은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관심을 갖지 않을 뿐입니다. 종말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인생의 종말을 대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눅 12:16-21, 16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종말은 나이가 들어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그 순간부터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날을 기대하며 정결한 신부로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라나타 신앙입니다.

 

앞서 요한계시록의 권위와 기록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의 성취이며 성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또한 계시록의 기록 목적은 마지막 때에 두려움이 아닌 확신과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단지 어렵다고 멀리할 책이 아니라 수시로 읽고, 듣고, 지켜야 할 책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과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어떤 신학적인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음악도 장르를 이해하고 작곡가와 시대적인 배경을 안다면 훨씬 곡에 대한 해석과 감흥이 달라지듯이, 요한계시록의 성격과 구조를 이해한다면 이 시대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좀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성격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시록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서두에서 책의 성격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직접 기록한 것이며, 기록한 형식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계시는 헬라어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에서 나온 말인데, 이것은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감춰진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발가벗겨진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면 마귀의 실체가 드러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삶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대한 강해를 들었는데, 헷갈기만 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 생겼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먼저 계시는 '예언서'와 '묵시록'의 성격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특정한 인물을 통해서 현재의 상황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보여주십니다. 첫째는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고, 둘째는 환상과 꿈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직접 선포하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에스겔, 요엘과 같은 선지자들에게는 여러 환상과 꿈으로 장차 있을 일에 대해서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다니엘서 7장부터 12장까지는 다니엘이 꿈과 환상을 통해 받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깝게는 다니엘의 때에 일어날 일부터 멀게는 수백 년 후인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한 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때에 먼 미래에 있을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그 시대의 사람뿐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자들에게 깨우침을 주시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다니엘서가 없다면 요한계시록 13장에 기록된 '일곱 머리 열뿔달린 짐승'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확신을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또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과 환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묵시록의 성격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묵시(默示)란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묵시록의 내용은 주로 환상과 은유, 상징적인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앞서 다니엘서의 예를 든 것처럼 같은 형식입니다. 하지만 묵시록은 일반적인 예언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침묵기라고 할 수 있는,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 400여 년의 기간 중에 등장한 나라가 알렉산더에 의한 헬라제국이었습니다. 헬라제국 초기에는 비교적 종교적인 안정이 있었으나, BC 167년 안티오쿠스 4세 때에 종교적인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율법책을 읽으면 무조건 사형이었고, 할례를 주면 주는 자와 받는 자를 함께 묶어 썩혀 죽이기도 했으며, 성전에서 돼지 피로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일으킨 독립전쟁이 마카비 혁명(BC 165)입니다.

이러한 모욕적인 박해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 묵시록입니다. 다니엘서와 같은 예언서는 저자가 명시되었지만 이 시대에 묵시록은 저자를 밝힐 수 없었고, 또한 박해를 피해 은유나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묵시록은 성경의 침묵기에 '드러나지 않은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당면한 현실을 절망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도록 함으로써 핍박받던 자들에게 용기와 위로와 소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도 비슷한 박해의 시기에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당시 핍박하던 로마제국의 멸망을 문자적으로 명시할 수 없었기에 '바벨론'이나 '음녀', '적그리스도'와 같은 상징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물론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시 교회의 성도들은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침묵기 시대의 묵시록처럼 당시 핍박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 아래에 놓였던 교회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뒤에서 계시록의 구조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예언서는 현재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 그리고 멀게는 종말의 때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과 꿈과 환상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첫째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며, 둘째는 훗날 이 예언서를 읽게 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다니엘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여기서 통치 원년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6년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았던 때가 주전 627년임을 감안한다면,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이 거의 100년 후에 다니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언서의 기록 목적은 현재의 당면한 어려움 가운데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 이유와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적 메시지를 가장 악용하는 집단이 이단입니다. 그들은 계시록에 나타난 예언의 사건들을 시간표처럼 짜 맞추어 앞으로 일어날 때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동시에 추종자들에게 맹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계시록은 우리에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려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어떤'일이 일어날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히려 다가올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은 당시 현존하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는 교회가 돌아가면서 회람하였던 것으로 그들에게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사건이 포함된 것입니다. 모든 서신서가 그렇듯이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중심다시 오실 예수님이며, 심판주인 동시에 새 예루살렘에서 영광의 주님으로 우리를 맞이하실 분이십니다.

물론 계시록의 최대 난제는 상징적인 표현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신비주의적이나 역사적인 것으로 억지고 짜 맞추려 하다가는 이단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이미 나와있는 건전한 주석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종교개혁가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은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시기에는 종말이라는 주제 자체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이해가 되는 범위 내에서 오직 복음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며 마음에 깊게 되새김은 물론, 시대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오는 절망과 고통 그리고 핍박의 상황에서 담대히 이겨낼 수 있는 기쁨의 책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상징적인 언어,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 등에 대한 추상적인 표현으로 인하여 복잡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핵심 구조는 간단합니다.

계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지금 있는 일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과거의 일들로써 1장의 내용입니다. 즉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로, 주님이 함께 계시며 교회의 사자들을 붙들고 계심을 본 것으로 환난 중에 담대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지금 있는 일'은 2-3장 내용으로, 환난과 핍박을 겪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실상을 보여주시며 칭찬과 때로는 책망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이기는 자들에게 영원한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지금의 교회 세대와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과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장차 될 일'은 4-22장 내용으로, 세상 종말까지 일어날 일들을 요약하여 보여준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언급된 재앙들, 즉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의 특징은,

첫째, 재앙의 연속성입니다. 일곱째 인을 열면서 동시에 일곱 나팔 재앙이 시작되고,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일곱 우레 재앙이 시작되며, 일곱 째 우레가 내림과 동시에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 즉 꼬리에 꼬리는 무는 것으로 재앙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볼 수 있는 것은 환상적 주제입니다. 서론(1:1-8)과 결론(22:6-26)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네 개의 환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환상 1:9-3:22은 '예수님의 일곱 교회', 둘째 환상 4:1-16:21은 '일곱 재앙 시리즈', 셋째 환상 17:1-21:8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 넷째 환상 21:9-22:5은 '새 예루살렘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

요한계시록은 다른 예언서와 달리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첫째, 일반 예언서는 지상에서 앞(미래)을 볼 때에는 앞에 가려진 산으로 인하여 그 뒤의 것을 볼 수 없듯이 먼 미래를 보는 것이 한정적이지만, 사도 요한은 하늘에 올라가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보았습니다(계 4;1). 정확하게 보았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계시록은 인봉된 책이 아닙니다. 인봉된 책을 열어볼 수도 없거니와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계시록은 열려진 책입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계 22;10). 다만 무조건 열려있는 책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필요한 만큼 열려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해석이 보편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의미합니다.

셋째, 계시록에 기록된 책은 일점일획도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계 22:18-19). 마지막 때 생명의 말씀이기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왜곡하여 미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계시는 상징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계시를 받은 자가 언어로 풀어낸 것이기에 원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자 즉 사도 요한의 관점에서, 숲을 보고 나무를 보듯이 전체적인 이해를 통해 부분적인 것을 이해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게 "선생님께서는 내일 종말이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을 먹고 오전에 약속된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을 것입니다. 오후에는 늘 하던 대로 심방을 하며 예수님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에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할 것입니다. 밤에 하루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는 모든 분들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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