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의 개요
요한계시록은 가장 중요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외면당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상징적인 내용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이유를 든다면 이미 이단에서 분탕질을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깨끗한 개울물에 들어가 보고 싶은데 누군가 물고기를 잡는다고 물을 흐려놓아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00년 여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계시록이 신약성경에 포함된 것을 싫어했으며, 칼뱅은 요한계시록의 주석을 아예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신뢰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적인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5백 년 전의 상황에서 '종말'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생소하게 여겨졌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위치
성경의 모든 책이 중요하지만, 요한계시록은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계시록의 권위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는 구약의 성취, 즉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에 언급된 모든 내용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이 신약으로 인하여 권위를 갖듯이,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는 계시록으로 인하여 더 큰 권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계시록은 성경 전체의 결론일뿐 아니라 인류의 결론입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은 믿거나 말거나 많은 생각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분명한 기승전결과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성경을 품지 못해도 성경은 세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난 그 어떤 시도라도, 예컨대 아무리 화성 탐사를 계획하더라도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계시록의 결론이 이 세상의 결론'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계시록의 목적은 마지막 때에 두려움이 아닌 확신과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단들이 두려움을 조장했기에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계시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즉 영원한 천국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말은 불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이자 끝이지만, 신자들에게는 희망이자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단지 어렵다고 멀리할 책이 아니라 수시로 읽고, 듣고, 지켜야 할 책입니다(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서신서로서의 목적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대체하며,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가 임박하였습니다. 게다가 지구온난화와 핵 무장으로 인한 핵 전쟁과 같은 3차 대전 등으로 인한 지구 종말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지구 종말'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는 관심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즉 '종말의 시기'와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두 가지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해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말의 마지막 때(말세지말)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종말은 초대 교회 즉 바울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이 세상에 종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는 이미 교회에 대한 박해(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극심하였고,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었던 주후 313년까지 교회에 대한 박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당시 성도들이 회람하며 읽으면서 격려를 받고 소망을 품게 했던 편지입니다. 즉 말세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자기 두루마기를 빨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책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도전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태도
지난 2천 년간 교회는 크고 작은 환난을 거쳐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다만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면, 폭포가 가까울수록 물살이 세져서 헤어 나올 수 없듯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때를 두려워하며 그때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언제 오시든 맞이할 준비가 된 신부처럼 두려움보다 오히려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내 생애에 지구의 종말이 올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육체의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어떠한 모습으로 종말을 맞이하냐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철학과 사상과 이념에 따라 좌우로 나뉘었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오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좌우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 중에서 양과 염소를 분리하실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부류에게는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라고 하실 것이며 마7:23, 다른 한 부류에게는 '내가 너를 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마10:32.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는 하나인데 왜 예수님은 누구는 안다고하시고 또 누구는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구약에서 신랑은 하나님을, 신부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신부는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큰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구체적인 신분은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와 같습니다(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종말을 대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오실 신랑을 맞이할 기대감에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예컨대 약혼한 여자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뭇 남자들과 즐길 생각을 한다면 정신나간 여자 아닙니까? 그러한 여자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모든 것이 들통이 나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와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일곱교회의 비유의 말씀은 신랑되신 주님 오시기 전에 신앙에 바람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자 동시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교회라는 신부의 들러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욕심에 기웃거리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복음으로 준비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즉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계22:14). 이러한 자가 복된 자라는 것이 계시록의 결론입니다.
"무관심한 일은 없다. 무관심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체스터튼의 말처럼 요한계시록은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관심을 갖지 않을 뿐입니다. 종말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인생의 종말을 대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눅 12:16-21, 16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종말은 나이가 들어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그 순간부터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날을 기대하며 정결한 신부로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라나타 신앙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시록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서두에서 책의 성격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직접 기록한 것이며, 기록한 형식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상징적인 언어,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 등에 대한 추상적인 표현으로 인하여 복잡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핵심 구조는 간단합니다.
계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은 4-22장 내용으로, 세상 종말까지 일어날 일들을 요약하여 보여준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언급된 재앙들, 즉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의 특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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