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교리의 중요성

하나님아들 2023. 9. 10. 20:28

교리의 중요성

 

 

 

C. E. Hocking

 

성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영원히 하나님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시대(時代)의 왕이시며, 불변하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교리의 개요가 아니며, 교리들이 체계적으로 배열되어 있지도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비천한 의무에까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가장 고상한 진리를 거의 저절로 알 수 있게 말씀 안에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다(빌 2:5-11).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다양한 문맥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의 기초가 놓이는 여러 장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겸손한 영혼들에게 신성한 계시의 영원한 보물을 보여주셨으며(요 7:17),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교리의 의미와 중요성

 

권위역 신약성경에서 교리(doctrine)로 번역된 세 단어가 있다. 이 중 하나가 로고스(logos)로서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단 한 번 교리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의 난외 번역은 “말씀(word)”으로서, 이 단어는 원어에 상응하는 보다 일반적인 영어 단어로 채택되었다. 말이 내적인 생각을 전하듯이, 이 단어는 구두(口頭)로 전해진 말씀을 가리킨다. 다른 두 단어(디다케, 디다스칼리아-역자주)는 모두 같은 어근에서 유래하며, 가르치는 실제 행위를 가리키거나 객관적으로 가르친 주제, 곧 그 가르침의 실체(實體)를 가리킨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교리에 유익하다는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삶과 사역에서 완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려면, 하나님의 서고(書庫)에 담긴 주제를 의지해야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딤후 3:16-17). 그러나 디모데가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권면을 받았을 때(딤전 4:3), 우리는 그 말씀을 디모데가 신자들을 가르치는 공적 행위에 헌신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교리들”은 그러한 가르치는 소재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해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진리의 범위는 선포자들이나 복음의 사자(使者)들이 전했던 영역을 넘는 것이다. 선포자[케룩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케르그마]에 자신을 드려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했다(롬 16:25)(고전 1:21).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사[디다스칼로스]는 모든 오래 참음과 가르침[디다케]으로(딤후 4:2) 가르치는 일[디다스칼리아]에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야 했다(롬 12:7).

 

성경에서 가르치는 일이 언급되는 곳은 무언가 그 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아이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들을 배워야 했다(신 29:29). 그리고 부모는 자기 아들이 실행에 관해 물을 때마다 알게끔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했다(출 12:26, 27)(신 6:20-25). 선포자는 지혜로우므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으나(전 12:9, 10),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을 들으려 함께 모였을 때, 그들로 하여금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했다(느 8:8).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켰으며, 백성들은 제사장의 입에서 율법을 구해야 했다(말 2:7). 신약에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마 28:20). 바울 역시 에베소 장로들에게 집에서 집으로 다니며 공중 앞에서 가르쳤던 일을 상기시킨다(행 20:20). 왜냐하면, 그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행 20:32). 지역교회의 장로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 반박하는 자들을 건전한 교리로 능히 권면하고 확신시키는” 자가 되어야 했다(딛 1:9). 성경의 가르침은 선한 자, 경건한 자,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로 세우는 하나님이 주신 기초이며, 또한 은사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것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영역에서 섬기도록 철저히 갖춰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다.

 

가르치는 소재와 방법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자신은 고린도에서 심었고, 아볼로는 심은 것에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고전 3:6).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가 어떠한 보장을 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심으로 세우신 인간 그릇을 통한 사역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역 모임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아래 심겨졌으며, 이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들이 물을 주고 키우는 것이 필요했다. 한 번 심은 후에는 계속해서 물을 주어야 했다. 그때 준 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에 다양하게 기술되어 있듯이, 단 한 번 전달된 믿음, 경건에 따른 진리, 말씀, 경건에 따른 교리가 주어졌다.

 

여기에는 구약성경 안에 있는 체계적인 가르침이 포함되었다. 유대인 신자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 수 있었던 반면에, 사람의 죽은 명령들에 불과했던 서기관들이 추가한 가르침들은 그들이 잘 아는 많은 가르침을 헛되게 했다(마 15:9)(막 7:7)(골 2:22). 또한, 주님께서 보여주신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은 종래의 방식을 뒤엎는 매우 획기적인 것으로서(눅 24:27, 44, 45),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현재의 다루심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할 경우,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깨끗이 버리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지역 모임들 안에는 성경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많은 이방인도 있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그로 인한 모든 잔존하는 문제들로부터 돌아선 자들이었다. 초대교회의 교사들은 이러한 상황에 전념하면서 구약성경을 사용했다. 사도행전의 설교에서 그리고 주로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서에서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고전 10:1-11)(고후 3:7)(갈 4:21-31)(롬 9-11장).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명백하다(롬 15:4). 심지어 사도들이 성경기록을 영감받은 것으로 언급할 때, 본질에서 그들이 가리키는 것은 구약성경이다(딤후 3:16)(벧후 1:21).

 

초대교회 교사들은 이 견고히 세워진 정경에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하시면서 친히 하신 말씀을 더했다. 사도행전 20장 35절과 디모데전서 5장 18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23절 이후에 나오는 구절들이 이에 관한 분명한 예(例)가 된다. 유사한 암시를 주는 다른 구절들이 있다. 그러나 구전(口傳)으로 전해진 전통과 기록으로 전해진 전통은 하나님의 영속적인 승인을 받은 것으로서 모두 신약성경을 여는 사복음서의 기록 안에 영구히 반영되었다.

 

여기에 초대교회에서 필요가 생겨서 사도들과 대언자들에게 주신 계시가 반드시 추가되어야 했다. 전체 교회사를 통해 필요한 이들 말씀은 최종적으로 신약의 서신서들 안에 정경으로 기록되었다. 사도들에게 들은 건전한 말씀의 틀은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졌다(딤후 1:13; 2:2).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대언자들이 전한 말씀들을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주 곧 구원자의 사도인 우리에게서 받은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벧후 3:2). 시간이 흐르면서 바울의 서신서들은 “다른 성경기록들”로 분류되었다(벧후 3:15,16). 이제 우리는 손에 완성된 신약 정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단 한 번 성도들에게 전달된 믿음이 그대로 견고하고 변하지 않은 채 전해졌다(눅 1:1-4)(롬 6:17)(고전 11:23; 15:3)(살후 2:15)(딤전 4:6)(딤후 1:13; 2:2).

 

신약시대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딤전 6:20),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가르치는 일에 아낌없이 자신을 드렸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에서 만 일 년 동안 회심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데 헌신하면서 그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행 11:22-26). 고린도를 복 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목적에 관해 그분으로부터 격려를 받은 바울은 고린도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행 18:9-11). 바울 사도는 에베소에서 더 오랫동안 사역을 했으며(행 19:8, 10; 20:31), 더 큰 결과를 얻었다. 왜냐하면 “아시아에 거하던 모든 자들이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행 19:10),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자라고 세력을 얻었기” 때문이다(행 19:20). 수년 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면서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면했다(딤전 4:13). 그러한 일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들이 지역 모임을 방문함으로 이루어졌다. 각 지역 모임에는 가르치기를 잘하는 장로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했다.”(딤전 5:17)(RV).

 

그와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지역 모임들은 약해질 것이며, 은사들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을 것이며, 각 신자는 점점 냉담해질 것이다. 한 가지 관점에서 지역 모임은 학교와 같이 기능을 발휘해야 했다. 지역 모임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자들의 장기적인 필요와 단기적인 필요를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이 그러한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배우는 과정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행 20:20, 27). 오직 이것만이 능히 세울 수 있으며 영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행 20:32)(벧전 2:2). 물론 교실 같은 분위기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에 불과한 학문적인 지식을 개발하는 것도 아니다. 서신서의 저자들이 마음을 따스하게 하며 북돋우는 사역에 자신들을 드린 태도는 항상 실물교육이 된다. 교훈은 권면, 곧 의무를 수반하는 교리로 촘촘히 짜여져야 한다. 또한 가르침(교리)과 함께 반드시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딤후 3:16). 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최종 목적에 도달한 적이 없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이 모든 것을 단지 배우기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교육 계획서를 작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그 목적을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정의하신다(마 28:20). 성경의 교리는 “경건에 따른” 것으로서, 단지 지식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고안된 것이다(딤전 6:3).

 

“건전한(건강한) 교리에 역행하는” 것들(딤전 1:10), 곧 “마귀들의 교리들”이 널리 퍼져 있다(딤전 4:1).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닌다.”(엡 4:14). “배운 교리에 역행하는” 가르침을 통해서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다(롬 16:17).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딤후 4:3).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힘써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으며”(딤전 4:6),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며”(딤전 4:16),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며”(딤전 5:17), “건전한 교리에 합당한 것들을” 말하며(딛 2:1),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교리가 모독을 당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딤전 6:1).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의 교리를 빛나게” 하며(딛 2:10), 모든 일에서 선한 행위의 본으로 보이고, 교리에서 부패하지 아니함과 신중함과 성실함을 보이며, 비난받을 수 없는 건전한 말을 해야 한다(딛 2:7, 8). 우리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 안에 머물고”(행 2:42), 항상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요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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