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성전신학

하나님아들 2023. 9. 6. 15:40

성전신학             

 

1. 성전신학이란 무엇입니까?

 

 성전신학이란

  성서의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나타난 성막과 성전,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성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장소를 신학적인 입장에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성막과 성전은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 예언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는 성전제도는 불완전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불의를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성전예배에 몰입했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는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대속과 부활 사건을 통해 상징과 예언의 성전제도를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새로운 성전제도로 완벽하게 성취하셨다. 이제 올바른 성전신학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스데반의 희생이 있어야 했고 스데반이 없었으면 사도바울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사도바울을 따라 세계 선교에 앞장선다는 한국 교회가, 무심코 또는 의도적으로 예배당을 ‘성전’이라 즐겨 부른 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무효화하고, 스데반을 두 번 죽이는 행위가 될 것이다.

 

2.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성전신학

 

구약과 신약에서 성전과 관련된 연관성을 나타네고 있는데 복음서에서 성전에 관련된 내용을 보겠습니다.

 

1) 요 2:19 ~ 2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만약 누군가가 “이 청와대를 파괴하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안보기관으로부터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당시 성전 관계자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 행 6:9

 스데반은 이른바 ‘자유인의 회당’에서 예수의 성전에 관한 급진적인 주장들을 설파했다(). 그 결과 그는 신성모독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전모독죄로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갔다. 서슬이 시퍼런 공회원들 앞에서 스데반은 성전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설교했다.

 

3) 행 7: 47-49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으신 집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이 매일 성전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급진적인 논리를 편 것은 사형선고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후 6년 유대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후, 유대의 당국자들은 사형을 선고하는 권한을 박탈당했고 그러한 권한은 총독이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한 분야에서는, 산헤드린 공회는 여전히 사형선고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성전의 신성을 모독하는 사건이었다.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는데, 스데반에 대하여 바로 그 형벌이 집행되었다.

 

4) 히 9:11 - 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5) 계 21:21 - 22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6)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이라고 칭하셨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실 때 그것은 성전 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 - 21)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터 큰 이’라고 하셨다(마 12:6). 이러한 말들은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말로 인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오늘날 우리는 구약 성전의 모형적이고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전은 모형과 상징으로서의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7)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첫째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그 어떤 제사장보다 뛰어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한다(히 7:28).

둘째로 그리스도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장막이 아닌, 즉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장막은 성막(성전)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존의 불완전한 성전(성막)은 결국 폐기되어야만 하며, 오직 모형과 상징으로써만 존재 의미가 있어온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온전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히브리서는 나아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요 그 본체의 형상이심을 증거한다(히 1:3). 이 얼마나 놀라운 점진적 계시요 구약의 완벽한 성취인가! 다시 말해서 성전(성막)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하나님의 의’ 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고 완성되고 대체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장차 도래할 천국의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성전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국 땅에는 어찌하여 그리도 성전이 많은가!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성전 모독 즉 진정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다. 구약에서 성전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과 예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전을 짓고, 성전을 소유하고, 성전 예배를 향유하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미신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성전처럼 여겨, 교회를 짓고, 교회에서 기도해야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시고, 어떻게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해야 복을 받는다는 생각 역시 미신이다. 내가 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다녔는데, 내가 교회 건축을 위해 얼마나 헌금을 했는데... 교회건축을 위해 성전건축을 인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8)스데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의’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만 했다(마 28:19-20, 행 1:8).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성전제도가 완성되고, 낡은 성전신학도 올바른 성전신학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신학이 바뀌었다고 해서 신앙이 곧바로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낡은 성전신학에 젖어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이에 스데반은 자신의 성전 설교(행 7:2-53)를 통해 성전의 가변성과, 하나님의 주도성과 인간적 한계를 지적한다. 모세-여호수아를 통해 완성된 성전은 다윗-솔로몬에 의해 발전되었다. 성막제도나 성막제도는 가변적인 것이다. 불변적인 하나님이 가변적인 공간에 억류될 수 없다. 또한 성막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주어진 것이라면,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양자의 주체는 모두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막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만드신 창조물에 얽매일 수 없다. 그리고 결국 성막과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작품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설교의 결론을 지었다(행 7:48).2)

  그는 이 설교로 인해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낡은 성전신학도 죽었다. 그리고 세계선교는 낡은 성전신학이 죽으면서 비로소 생겨나게 되었다. 스데반 사후에 대 박해가 일어나 제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때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지극히 협소한 세계에서 행해지던 복음 활동이 비로소 국지성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좁은 예루살렘에 갇혀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밖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갔다. 우리는 낡은 성전 신학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감금하고 세상을 향한 그분의 선교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스데반의 성전 설교는 부지불식간에 바울을 크게 감동시켜, 마침내 그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선 세계선교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출처 ; 성서주석, 성경사전, 성서(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