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하나님의 형상론

하나님아들 2023. 8. 11. 22:46

하나님의 형상론
(Human Beings in God`s Image)




문제의 핵심:
 인간에게만 고유한 존재 및 능력이라는 맥락에서 인간의 본질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행위 및 그 결과, 그리고 우주 및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보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높은 표현인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를 위해서도 핵심적인 질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지금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성경의 드라마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인간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활동의 정점인 인류에게 특별한 존엄과 명예를 부여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조성하셨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우는 인간이 행복한 벌레보다 낫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경험은 인간은 그 자신에게와 타인에게 하나의 수수께끼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인간의 행태와 행동은 빛나도록 훌륭함과 동시에 타락의 모든 범위를 다 포괄하는 존재임이 또한 현실이다.
예컨대, 파스칼(Pascal)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천함 내지 사악함 사이의 이 모순을 지적하였다: “인간은 이 무슨 기형이란 말인가! 얼마나 고귀한가, 그리고 얼마나 괴물 같은가, 얼마나 혼돈되어 있으며,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리고 얼마나 경이적인가! 만물의 판관이요, 연약한 지렁이요, 진리의 보고요, 의심으로 기진맥진하며, 우주의 오류요 거절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주제에 있어서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건져준다. 그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의미와 존엄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보다 먼저 강조해야 할 하나님의 실재의 빛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신뢰할 만한 데이터인 성경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성경이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에 관하여 논한다고 보지 않으며, 인간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진술은 단지 그리스 합리주의를 기독교 신학에 도입한 결과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또한 일부 현대 사상가들은 인간의 존재와 본질 대신에 인간의 실존적 상황, 즉 인간의 자기이해, 결단, 죄책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일정한 본질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제제도 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에 달려있다. 시편기자가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시 8:4; cf. 욥 7:17)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성경에 답을 주셨다고 기독교는 믿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으로부터 나온 대로의 인간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을 탐구할 때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적 입장을 따라갈 것이다.
기독교 인간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이 인간을 그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창조했다(창 1:26-27)고 하는 명제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현대의 비기독교적 견해는 인간을 진보된 동물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묻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 보다 낮은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현대 사상들이 제안하듯이, 우리는 인간을 나눌 수 없는 통전적 존재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차원과 비물질적인 차원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가? 성경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일원론적인지, 이분법적인지, 삼분법적인지를 말해주는가?
만약 인간은 영혼(soul)이라 불리는 독립된 실체를 갖고 있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본 장에서 우리의 과제는 인간의 본질을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지성의 차원에서, 윤리의 차원에서, 정서의 차원에서, 의지의 차원에서, 그리고 관계의 차원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대 세계의 많은 중대한 문제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예컨대, 인간의 생명은 언제 존재하기 시작하는가? 태아는 인간인가 아닌가? 태아가 언제 인간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낙태 논쟁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의료 기술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은 시급한 윤리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병든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의 생명은 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 하에서 종결시켜야 하는가? 기독교의 봉사활동과 선교에 있어서 교회는 엄격하게 인간의 영적인 차원, 즉 불멸하는 영혼에만 국한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는 인간의 영적 궁핍과 물질적 궁핍을 모두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인가?

 
교회 안의 다양한 해석들
 
 
하나님의 본질이 다양하게 해석되어 온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인 인간의 본질이 교회의 역사 안에서 광범위하게 토론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간에 제시된 다양한 해석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초대교회의 관점
(Early Church View Emphasizing Rationality)
 
 
많은 초대교부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영향 하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주로 이성(reason)과 자유의지(free will)라는 인간의 타고난 기능의 맥락에서 정의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이해력과 진리를 선택하는 능력과 올바르게 행동하는 능력을 부여했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는 인간의 특유성을 이렇게 확인했다: “...인간의 본질은 지성의 소유를 포함하며, 이 지성은 합리적 판단에 관여하는 것이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하나님의 형상을 체계적으로 논한 첫 번째 신학자다. 그는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창 1:26)을 구별했다. 그는 ‘형상’을 합리적 지성과 자유의지라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유지되고 있으면서 태어날 때부터 소유하는 자연적 기능이라고 정의했다. ‘모양’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의하여 부여되었던 ‘성령에 의한 삶’인데 아담의 타락 시에 상실되었고 은혜를 통해서만 다시 회복되는 그런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정의로써 이레니우스는 인간의 태어날 때부터의 천부적 기능과 추가적으로 덧붙여지는 의의 선물,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중세기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이런 구별로써 이레니우스는 암시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이분법적이다(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내주하는 성령에 의하여 생명을 갖게 된 신자는 삼분법적이 된다(몸[body]과 혼[soul]과 영[spirit]으로 구성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완전한 인간은 성부로부터 영(spirit)을 받은 혼(soul)과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조성된 육체적 본질의 혼합물이며, 이 양자의 연합 안에서 그는 존재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도 비슷하게 ‘형상’과 ‘모양’을 구분했다. ‘형상’은 이성과 자유의지의 능력을 의미하고, ‘모양’은 도덕적 탁월성을 의미하는데, 이 후자는 자랄 수도 있고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지성에 위치시켰다. “인간의 형상은 이성을 사용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것 안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발견한다.”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추론하며 사고하는 영혼” 또는 “마음과 자유의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 관념주의자인 고든 클라크(Gordon Clark)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과 동일시한다. 그는 욥기 32장 8절, 이사야 33장 6절, 요한복음 1장 9절(여기서 phos는 “논리의 빛”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골로새서 3장 10절과 같은 성경구절들에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식”, 또는 “학습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라고 해석한다. 클라크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올바른 도덕적 행실, 인격적 책임감, 그리고 동물들에 대한 지배, 이 모든 것은 사고력과 이해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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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이냐 아니면 삼분법이냐의 문제에 있어서 암브로스(Ambrose), 제롬(Jerome), 어거스틴(Augustine) 같은 대부분의 서방 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이분법으로 보는 것을 선호했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통일체라고 하였다: “인간의 본질은 일반적으로 불멸적 영혼과 창조 시에 이 영혼에 입혀진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클레멘트(Clement), 오리겐(Origen), 닛사의 그레고리 같은 지도적인 그리스 교부들은 플라톤을 따라서 삼분법(trichotomy)을 지지했다. 인간은 불멸의 영(spirit)과 이성적 혼(soul)과 물질적 몸(body)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삼분법의 이론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를 정죄한 후로는 인기를 상실했다. 왜냐하면 아폴리나리우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삼분법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이단적인 기독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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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은 인간 영혼의 기원에 대하여 상세히 토론하였다. 오리겐은 플라톤의 선재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아담을 조성하시기 전에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인간의 영혼들을 또는 이성적 본질들을 다 창조했다고 하였다. 이 영혼들은 하늘 영역에서 죄를 지은 후에 구속을 추구하였으며, 그래서 일상적인 출생을 통하여 물질적인 몸과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9세기에 스코투스 에리게나(Scotus Erigena)는 이 영혼 선재설(theory of the soul`s preexistence)을 채용했다.
동방교회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서방교회의 약간의 신학자들(예컨대 Hilary, Ambrose, Jerome)은 하나님이 각 사람의 몸을 창조하실 때 [그 때마다] 그의 영혼을 동시에 창조하신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이름하여 창조설(creationism)을 지지했다. 힐러리는 “각 영혼은 모두 하나님이 [그 때마다] 직접 창조하신 작품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일반적으로 터툴리안의 저술들의 영향으로 전이설(Traducianism), 즉 몸과 영혼은 모두 [모태 속에서의] 자연적 출생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받아들여졌다. 터툴리안은 주장하기를 영혼의 씨와 몸의 씨, 이 두 씨가 결합됨으로써 하나의 전체적인 인간이 자연적인 과정을 통하여 번식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터툴리안은 그래서 [임신 8주의] 태아(embryo) 또는 [임신 9주의] 태아(fetus)도 진정한 인간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의 에세이 「영혼에 관하여」(On the Soul)에서 그 당시 의사들이 흔히 행했던 낙태수술 과정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그는 낙태를 “모태 안에서의 살인”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낙태하는 의사를 태아 살해자라고 불렀다. 그는 모든 의사들이 “무릇 생명체는 잉태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래서 모태에서 살해될 수밖에 없는 그 태아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관점
(The Traditional Roman Catholic View)
 
 
중세기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레니우스가 제시한 ‘형상’과 ‘모양’의 구분에 근거하여 상세한 설명을 전개함으로써 독특한 인간론을 창안하였다. 그들은 ‘형상’을 이성과 자유의지라는 타고나는 능력이라고 보고, ‘모양’은 그 위에 덧붙여지는(donum superadditum) 義(righteousness)라는 부여물이라고 보았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타락 이후에 원래부터 있던 자연적 기능[이성과 자유의지]은 흐려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나, 그 위에 덧붙여졌던 초자연적 부여물인 의(義)는 파괴되어 사라졌다고 하였다. 죄인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지적 능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할 수 있으며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 안에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육적인 욕망들을 억제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생을 상으로 받을 수 있는 자질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과 ‘모양’의 일반적인 구분법, 또는 자연적 부여물과 초자연적 부여물의 구분법은 자연과 은혜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분법을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넓은 범위에 이르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가톨릭 교회는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함으로써, 비록 하늘로부터의 축복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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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위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뒷받침했다: “인간은 기억력, 지성의 능력, 사랑의 능력 면에 있어서는 ‘형상’에 따라서 지음을 받은 것이고, 합리적 지성 안에 자연적으로 있는 순결과 정의의 차원에 있어서는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은 것이다. 또는 달리 말하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형상’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고, 덕을 사랑하는 것은 ‘모양’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인 보나벤투라(Bonaventure)도 비슷하게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모양’인 한에 있어서는, 그는 “그 ‘모양’에 주입된 선물[=초자연적 부여물]에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모든 피조물은 ‘형상’이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모든 피조물은 ‘모양’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마찬가지로 ‘형상’과 ‘모양’의 구분을 주장했다. ‘모양’은 “형상의 어느 정도의 완전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그는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형상’은 주로 인간의 지성적 본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사고능력 속에는 덕의 능력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능력도 내재해 있다고 그는 보았다. 모든 인간은 본질상 자기 자신 보다는 하나님을 더 충만하게 사랑한다고 아퀴나스는 대담하게 주장했다. 인간에게 공통으로 있는 그런 능력들은 상실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모양’은 “은혜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부여된 것”을 의미하고, 그 내용은 하나님을 실제로 사랑하며 하나님께 실제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이 은혜는 [에덴에서의] 타락 시에 상실되었는데, 세례에 의하여 회복되며, 이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로적으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게 해준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명백히 자연과 초자연의 이층 구조적 신학을 견고하게 하였다.
새 가톨릭 백과사전(the New Catholic Encyclopedia)은 이와 동일한 입장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 존재의 전체는 피조된 것이다. 그의 영혼은 직접적인(첫 번째) 창조에 의하여 피조되었고, 그의 몸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계시되지 않은 방법, 즉 진화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 그런 방법으로써 피조되었다. 이에 더하여 인간은 은혜와 덕이라는 초자연적 선물을 받았다. 이 초자연적 선물은 인간을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이외에도 일상적인 인간의 본질을 초월하는 특권들과 능력들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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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비물질적 부분과 물질적 부분으로 나누는 서방교회의 이분법을 지지한다. 안셀름(Anselm)은 어거스틴을 따라서 실제적인 인간은 몸 없는 영혼이 아니라, 물질적-육체적 부분뿐만 아니라, 영적-지성적-의지적-정서적 본질도 포함하는 합성된 존재라고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플라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인간은 몸과 영혼의 복합적인 통일체인데, 영혼은 그 ‘틀’로서의 몸에 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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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기원에 대하여 전통적 가톨릭 교회는 창조설(creationism)을 지지한다. 즉, 안셀름, 롬바르드, 아퀴나스, Humani Generis(인간의 기원)라는 가톨릭 교회의 회람, 그리고 여타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각 개인마다 그의 영혼을 창조하여 그의 몸에다가 주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루터교의 의와 거룩의 공리
(Lutheran Postulate of Righteousness and Holiness)
 
 
종교개혁자들은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경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을 구분하는 방식을 거부하였는데, 루터교파 사람들은 ‘형상’이라는 것은 그 핵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도덕적으로 닮은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창세기 1장 26절을 주석하면서, 형상이라는 것은 ‘기억, 지성, 의지’라는 삼중적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어거스틴의 가설도 거부하고, 또한 자연적 기능과 초자연적 기능으로 구분하여 보는 중세기의 이분법적 구조도 거부했다. 그런 이론들은 죄 아래에 있는 인간에 대하여 너무 낙관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루터는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루터는 그런 이론들을 거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이런 기능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사단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피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사단도 기억력과 또한 우리 인간의 것보다도 훨씬 우수한 지적 능력과 단호한 의지력과 같은 자연적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하나님의 형상 정의 밑에 깔려 있는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즉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문제를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imago)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셨던 의와 거룩과 지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세 가지는 아담의 타락 시에 상실되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나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아담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았으며 믿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전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었다. 즉, 그는 죽음이나 어떤 다른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도 없었고, 하나님의 총애에 대하여 만족하였다.” 이러한 지혜, 도덕적 올바름, 의지의 자유, 영원한 삶에 합당함(이런 것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이다)은 죄에 의하여 완전히 상실되었고, 이 지상의 삶에서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복음에 의하여 회복되었다(고전 15:48; 엡 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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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히톤(Melanchthon)도 아담이 원래 부여받았다고 하는 지혜와 의가 하나님의 형상의 구성내용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 속에 놀라운 지혜의 빛을 붙여 놓았다. 그들은 이 지혜의 빛을 통하여 하나님, 숫자, 질서, 덕, 악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과 지체들은 순수했으며 참된 질서 속에 있었고, 이해력 속에 있는 빛에 순종하였고, 그들의 가슴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으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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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에게 주어진 원래의 의와 하나님을 아는 능력에 있는 것이라고 루터교의 신앙고백문들은 일치하여 주장한다. 협정신조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처음에는 흠이 없었고, 거룩했으며, 죄가 없었다.” 루터교의 교의학자 크벤스테트(Quenstedt)는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첫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며 사랑하며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함께 창조하여 넣어 주신 바 하나님의 지혜와 의와 불멸성과 존엄에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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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교의 인간론은 일반적으로 본질에 있어서의 이분법(essential dichotomy)에 찬성한다. 루터교의 창조론, 구원론,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교리들은 인간의 인격적 통일성 안에 물질적 부분(즉, 몸=body)과 비물질적 부분(즉, 혼/영=soul/spirit)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본질에 있어서는 이분법을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는 삼분법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 지성소와 성소와 바깥뜰의 삼중구조로 되어 있는 것에 비유하면서 인간도 기능적으로는 영(spirit: 하나님을 이해하는 기능)과 혼(soul: 이성과 감정들이라는 도구적 기능)과 몸(body: 비물질적 자아를 담고 있는 물질적 그릇)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델리취(Delitzsch) 및 일부 현대 루터교 신학자들은 본질에 있어서의 삼분법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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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soul)의 기원에 관하여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영혼전이설(traducianism)을 선호했다. 영혼전이설이라야 원죄 개념과 가장 잘 일치하며, 또한 각 개인의 죄된 영혼을 하나님이 그 때마다 창조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예컨대 크벤스테트는 이렇게 가르쳤다: “첫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브의 영혼은 유전에 의하여 생산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인간들의 영혼들은 ... 그들의 부모들에 의하여 전이의 방법을 통하여(per traducem) 유전되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 소시니우스주의자들, 및 이들과 유사한 사상가들의 기능적 관점
(The Functional View of Pelagians, Socinians, and Others)
 
 
교부시대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 종교개혁시대의 소시니스주의자들, 17세기의 합리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그리고 현대의 중재적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적으로 해석하여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행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이런 해석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하나님이 주님으로서 우주를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러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땅을 통치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으로서 이성(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한다), 자유의지(이로써 인간은 선을 행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인간 보다 낮은 피조물들에 대한 통치 능력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이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임무를 성취하기 위하여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강조했다.
소시니스주의자들은 아담에게 원래 있었던 原義(original righteousness)는 에덴에서 상실되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행사를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라코비안 교리문답(the Racovian Catechism)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원래 인간의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며, 인간 이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지배력은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과 판단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홀란드의 합리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또는 항소자들(Remonstrants)도 이와 유사한 관점을 취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과 닮은 모양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격, 또는 인간의 자유로운 자아, 또는 존엄성, 또는 도덕적 능력의 자유로운 활용 등과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구약학자는 인간의 부여받은 임무 또는 사명에 초점을 맞추었다. 폰 라트는 고대의 세계에 있어서는 왕이 자신의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제국의 곳곳에 자신의 상을 세웠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창세기의 저자는 selem(닮은 모양)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의미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으로서 이 땅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을 창세기 저자는 이 단어로써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권 주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소명을 받은 실로 하나님의 대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인간 이외의 피조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기능인 것이다.”
폰 라트를 따르는 클라인스(D.J.A. Clines)는 인간은 여러 구성요소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통전적 합일체’(a psycosomatic unity)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복음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구성요소 가운데 어떤 보다 더 높은 요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그는 인간이 인간 이하의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관점에서 하나님 형상의 의미를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존재론적으로 보다는 오히려 실존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능과 활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기능은 피조세계에 있어서 인간 보다 낮은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대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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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신학자인 레오나드 버두인(Leonard Verduin)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이외의 나머지 피조세계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고 정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세계에 대한 ‘지배자’요 ‘정복자’로 임명을 받았다고 그는 본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기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권을 가졌다’라는 개념이다. 인간이 지배권을 갖도록 의도된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의 조물주의 형상 안에 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창세기 창조기사의 핵심 내용이다.”

 
신정통주의 및 유신론적 실존주의 신학의 관계적 관점
(The Relational View of Neoorthodox and Theistic Existentialists)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하여는 실존주의적 무관심을 따르며, 그보다는 오히려 실존으로서의 인간이 갖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analogia entis(analogy of being=존재의 유비)에 관한 것이 아니라, analogia relationis(analogy of relation=관계의 유비)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닮았다는 것은 주로 ‘타(他)를 위하여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경험’(the experience of being free for the other)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는 데 있어서 자유로우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는 세 가지 자유를 누리고 있는 존재이다. (1)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자유로운 존재다. (2) 인간은 동료 피조물과 관계하는 데 있어서 자유로운 존재다. 이 점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범례적인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자유로운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인간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둘이 같이 있는 존재다. ‘둘이 같이’라는 것은 타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인간의 피조성이 있는 것이다.” (3) 인간은 낮은 피조물에 대하여 자유를 누린다. 인간은 우주에 종으로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인으로서 우주를 다스릴 수가 있다. 본훼퍼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을 위하는 자유와 다른 인간을 위하는 자유와 피조물을 지배하는 가운데 다른 피조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첫 인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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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본훼퍼의 이러한 배아적 사상에 자극을 받은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 주제에 대한 그 자신의 성숙한 사상을 그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제3권에 피력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는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복수적 대명사, 즉 “우리, 인간을 만듭시다”라는 표현에 있다고 본다.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끊임없이 상대방과의 일대일의 대면적 관계 안에 존재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나’와 ‘너’ 사이의 심오한 구별 및 관계”가 존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본질의 관계를 말하는 이 유비가 인간 편에 적용되는 경우, 바르트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공존과 협동(coexistence and cooperation)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복사되듯이] 반복되고 있다”고 본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기사에 곧 이어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는 사실(창 1:27; 5:1-2)을 보고 바르트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구별 및 관계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그리고 인간끼리의 관계에 대한 전형적인 범례라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성(性)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극이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해석한다. 즉,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나란히 있음(juxtaposition)과 하나 됨(conjunction)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있는 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는 동료 인간끼리의 관계에까지 확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보았다. 아무튼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 상대방에 대한 일대일의 대면적인 관계가 인간의 인간됨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본다. 즉, 인간은 은혜의 관계라는 것 안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너”라고 부르시는 존재요, 하나님에게 “나”로서 응답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이러한 관계의 본질은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갖는 관계 안에서 볼 수 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참된 인간 나사렛 예수는 선택된 자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관계로 정의되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 상대방이라는 사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섬기는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러한 관계를 포기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을 사는 것은 인간임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궁극적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준다. 이런 식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형상론은 만인구원론(universalism)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첫째 의지요 자비로운 의지, 즉 그들을 구원하며 무(無)의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가 하나님의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그런 영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넓은 범위의 “나와 너의 관계”를 유지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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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하게 브룬너(Emil Brunner)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존재론적 정의는 관계적 정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질의 일부로서의 무엇, 즉 본질적인 것(substance)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관계(relation)로 해석해야 한다.”
브룬너는 그의 모든 신학적 진술에서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즉 요한복음의 로고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인간됨이라고 하는 것은, 심지어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로고스와 “나와 너”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형식적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관계는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그런 관계이다. 인간은 그가 빛, 즉 로고스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에 이해력(understanding)과 자유(freedom)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self-determination)과 도덕적 책임성(moral responsibility)을 부여받았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지고의 “당신”이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다. 이런 사실을 브룬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의 피조물로서의 존재의 핵심은 자유, 자아, ‘나’로서의 자기정체성, 인격이라는 것이다. 오직 ‘나’로서의 존재만이 ‘너’에게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는 자아만이 자유롭게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인간 본질의 ‘형식적인 측면’은 그의 주체로서의 존재, 즉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에게만 특별한 그 인간됨을 차별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관계,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a point of contact)을 형성하는 이런 관계는 보편적인 것이며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고 브룬너는 주장한다.
‘내용적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 관계는 첫 번째 관계가 믿음 안에서 실현되는 곳에, 즉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 곳에 있다. 브룬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적 측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존재함’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이다. 이 관계는 아담의 타락 시에 상실되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경험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관계는 오직 믿는 자에게만 특별히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죄인에게는 ‘내용적 하나님 형상’이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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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철학에 의하면, 인간을 추상적으로 다루는 것은 인간을 객관화하는 것이고, 이것은 인간을 실로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학파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자아로서의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스코틀랜드의 실존주의 신학자 존 매쿼리(John Macquarrie)는 몸에 이식되었다가 사망 시에 몸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하는 영혼이라고 하는 일종의 본질적 자아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인간론은 오히려 본래적 자아[=진정한 나]를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는 보는데, 이 본래적 자아라는 것은 그에 의하면 결단과 헌신의 개방적인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이미 만들어져서 결정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하는 과정 안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 출발 시에 주어져 있는 것은 이미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아로 되어가기 위한 가능성이다.” 따라서 매쿼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질 보다는 일종의 실존의 기능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일종의 고정된 ‘장치’나 ‘본질’이라고 보기 보다는 인간에게 실존이 주어질 때 그 실존과 더불어서 주어진 실존의 가능성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인간은 하나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실존하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개방성을 갖고 있으며, 그는 밖을 향하여 그리고 위를 향하여 움직여서 이 개방성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존재다.” 맥쿼리가 볼 때, 진정한 자아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개방성 이외에도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포용성도 이 구성요소들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안에서 “자신의 참된 존재를 획득하며, 창조주의 의도가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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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신정통주의 신학자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 그리고 소위 “성서신학자들”(biblical theologians)은 인간을 정신과 몸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통전적 존재(a psychosomatic unity)라고 본다. “영”(spirit), "혼“(soul), “마음”(heart), “육”(flesh), “몸”(body)이라는 단어들은 비전문적인 용어들이며, 이들은 각각 전체로서의 인간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용어들이라고 그들은 본다. 킷텔 사전(Kittel`s Wordbook)에 기고한 에드몬드 제이콥(Edmond Jacob)은 그리스의 사변적 사고방식이 기독교의 표현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분법과 삼분법을 구분하는 과거의 방식은 구약성서의 인간관에 관한 한 포기해야 마땅하다. 이스라엘의 인간관은 단일론적(monistic)이다. 언제나 인간을 단일한 생명에 의하여 살아 움직이는 단일체로 보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쿨만(Cullmann)은 한 인간 전체가 부활에 의하여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 전체가 죽음에 의하여 소멸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통전적 인간관을 견지했다. “창조에 대한 유대교의 그리고 기독교의 해석은 몸과 영혼(body and soul)을 나누는 그리스의 이분법을 전적으로 배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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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J.A.T. Robinson)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통전적 인격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로 본다. 그는 히브리적 사고방식은 가멸적 몸과 불멸적 영혼을 상호 대립적 관계로 보는 그리스적 사고방식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육신(sarx), 몸(soma), 영(pneuma), 혼(psyche)과 같은 성경의 용어들은 서로 구분되는 여러 요소들의 이분법적 또는 삼분법적 관계를 지지하는 용어들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몸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은 상호간에 구분된다든지 또는 서로 구분되는 가운데 관계성 안에 있다든지 하는 관점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통전적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측면들을 의미하거나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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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카우어(G.C. Berkouwer), 무디(Dale Moody), 붑(Richard H. Bube)도 마찬가지로 단일론(monism)을 주장하면서 인간 안에 본질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어떠한 구성요소들도 없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과 일부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관점
(The View of Augustine and Some Reformed and Evangelical Authorities)
 
 
어거스틴은 인간을 영혼과 몸이 결합된 통일체(a unity of soul and body)라고 본다. 여기서 영혼은 “몸의 생명”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피조된 고귀한 존재이다. 이는 그가 가멸적 몸을 입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영혼이라는 (선물로 받은) 능력으로 인하여 야수 보다 우월하다는 점에 있어서 그런 것이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진술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합리주의적 관점을 가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체론적(holistic)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적이며 합리적인 능력을 그의 정서 및 의지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생각하며, 느끼며, 의지하는 존재다. 이 세 가지 능력은 인간 영혼의 기능들인데, 이 기능들은 상호간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가 상호간에 분리되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그는 보았다. 그래서 지성은 정서와 분리되어서 기능하지 않으며, 의지도 지성과 분리되어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1) 영혼의 사고 능력은 불변의 지혜(sapientia)를 아는 직관적 인식능력인 지성(intellectus)과 사실(scientia)을 아는 합리적 인식능력인 이성(ratio)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그는 보았다. (2) 사랑을 그는 영혼의 무게(weight)라고 보았는데, 이 사랑은 긍정적으로는 피조물 보다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는 것이며, 부정적으로는 창조주 보다 피조물을 더욱 열망하는 죄된 정열(libido)이다. (3) 의지는 스스로 움직이는 또는 스스로 결정하는 영혼의 능력이다. 의지의 사용은 기쁨, 두려움, 슬픔 등과 같은 정서를 생산한다. 인간의 의지는 피조된 상태 그대로였을 때 선과 악 가운데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윤리적 상태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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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본 바와 같이 어거스틴은 인간을 본질상 이분법적인 존재로 본다. 각 인간은 “한 인격 안에 몸과 합리적 영혼을 하나로 결합하여 가지고 있다.” 영혼은 몸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에, 영혼이 몸 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영혼 없이는 몸은 존재하기를 중단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보다 더 높은 일련의 능력들(spiritus)과 몸에 연결되어 있는 보다 낮은 일련의 능력들(animus)을 섬세하게 구분했다. “인간의 본질 전체는 영(spiritus)과 혼(anima)과 몸(corpus)이다.”
영혼의 기원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교리적으로 논하지는 않았지만, 전이설적 가설(the traducian hypothesis)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설이 성경의 원죄설과 비교적 잘 일치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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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은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의 범위는 모든 종류의 생물적 피조물들 위에 인간의 본질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그 우월성에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인간의 몸에서도 빛난다고 인정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한 자리는 영혼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한 자리는 지성과 마음, 또는 달리 말해서 영혼과 영혼의 능력들 안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부분에서도, 심지어 몸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조금이라도 빛나지 않는 부분은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적 요소들에는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들과 초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들이 다 포함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기능들이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회복된 하나님 형상에서 볼 수 있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3장 18절, 에베소서 4장 24절, 골로새서 3장 10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의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들이란 ‘완전한 지성’, ‘올바른 판단력’, ‘자유의지’, ‘건전한 정서들’, 및 ‘올바로 정돈된 감정들’이라고 말했다. 칼빈은 아담이 이러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이런 기능들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올바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위에 언급한 바울의 텍스트들로부터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의 구성요소들 가운데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기능들이란 ‘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의’, ‘거룩에 대한 열심’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세계를 지배하는 기능적 능력으로 정의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의 능력으로 정의하는 쪽을 선호했다. 이러한 정의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하며 살도록 의도하신 그 대로의 인간을 올바로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지성의 빛과 마음의 올바름과 모든 구성요소들의 건전함에서 볼 수 있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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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의 신앙고백문들은 칼빈의 설을 재확인하였다.
‘벨기에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조성하셨으며, 범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도록 조성하셨다”(제 14 조)고 진술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그의 형상에 따라서, 즉 의와 진정한 거룩 안에서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이 그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영원한 복락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함이요, 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주일 3; 6번 질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실 때, 이들에게 이성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주시고, 지식과 의와 진정한 거룩을 부여해 주셨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주시고, 이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제4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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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연적 기능들과 초자연적 양상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칼빈의 설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낮은 피조물들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하나님의 형상에 첨가하였다. 예컨대 존 월립(John Wolleb)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는 자연적 선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천사들의, 그리고 인간 영혼의 단순하며 불가시적인 본질, 생명, 지성, 의지, 불멸성이다. 그리고 또 일부는 초자연적 선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원래의 지복, 올바름, 지성과 의지의 존엄성,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위엄과 지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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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넓은 차원과 좁은 차원을 구분했다. 넓은 차원은 죄인들의 경우에도 남아 있고, 좁은 차원은 죄인들의 경우에는 상실되어 없다고 그들은 보았다. 예컨대 바빙크(Bavinck)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의 세 가지 측면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1)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영적 본질(spiritual nature) 내지 불멸하는 영혼(immortal soul)을 갖고 있다. 이 덕분에 인간은 땅을 초월한다. (2)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특징을 갖는데, 이 자의식은 사고하는 것과 의지하는 것과 느끼는 것(감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3) 심지어 몸(body)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들 가운데서 제외되지 않는다. “몸이 영(spirit)의 도구요 기관으로 사용되는 한도 내에서, 몸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어느 정도 닮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방법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좁은 차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의, 거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초월적으로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된 인간에게 내재적인 것이라고 바빙크는 보았다. 바빙크는 이원론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의 넓은 차원과 좁은 차원을 통전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했으며, 그는 이런 관점을 하나님 형상의 “유기적 관점(organic view)”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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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코프(L. Berkhof)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다섯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1) 영적 형상(spiritual image): 인간은 영적 존재다. 이것은 인간이란 단일성(simplicity), 영성(spirituality), 불멸성(immortality)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2) 합리적 형상(rational image): 인간은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존재다. 인간은 지적 능력과 의지의 자유와 자연적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도덕적 형상(moral image): 인간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긍정적인 거룩 안에서 피조되었다. 이 기질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믿는 자들 안에서 회복되어 가고 있다. (4) 육체적 형상(corporeal image): 성경은 영혼만이 아니라 전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피조되었다고 말한다. 몸은 영혼의 고유한 기관으로서 기능한다. (5) 기능적 형상(functional image): 인간 보다 낮은 피조물들에 대한 지배는 인간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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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신학자들은 삼분법적 이론(trichotomous theory)을 지지하지만,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이분법(dichotomy)을 선호한다.
칼빈은 인간이 불멸하는 영혼(soul) 내지 영(spirit)과 물질적 몸(body)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영혼은 몸과 구별되는 비물질적 본질로서 인간의 구성요소 가운데 보다 더 고귀한 부분이다. 영혼은 몸을 생기 있게 하며, 몸의 많은 지체들을 잘 결합시켜서 조화로운 전체가 되게 한다.
개혁주의의 신앙고백들(예컨대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제 2 헬베틱 신앙고백[Second Helvetic])과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은 일관되게 인간은 영혼과 몸의 밀접한 연합체라고 보았다.
쉐드( W.G.T. Shedd)는 하나님이 비물질적이며 합리적 영(spirit)을 물질적 몸(body)에 주입함으로써 인간을 조성하셨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 7절에 의거하였다.
벌코프(L. Berkhof)는 “실제적 이분법(realistic dualism)”이라는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에 의하면, 영혼과 몸은 생명의 유기체적 연합 안에서 서로에게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스트롱(Strong)은 본질적 이분법과 기능적 삼분법의 이론을 선호한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는 비물질적인 영혼/영과 물질적인 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능적으로 볼 때 혼(psyche)라는 것은 인간의 수평적 관계에 있어서의 (예컨대 동물들과 공통적인 그런 능력들에 있어서의) 인간의 비물질적 부분을 말하는 것이고, 반면에 영(pneuma)이라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컨대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비물질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췌이퍼(L.S. Chafer), 스코필드 관주성경(The Scofield Reference Bible, 1909), 워치만 니(Watchman Nee) 및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삼분법을 지지한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적 구조에 관련시킨다. 영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예컨대 지식, 도덕성)의 자리이고, 혼은 자아에 대한 의식(예컨대 감정, 정서, 욕망)의 자리이고, 몸은 세상에 대한 의식(감각)의 자리라는 것이다.


영혼의 기원에 대하여는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칼빈을 따라서 창조설을 지지한다. 칼빈은 영혼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넘겨진다고 하는 생각은 근거 없다고 본다. 존 월렙(John Wolleb)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의 영혼은 정액의 전달에 의하여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창조되어서 몸 속으로 넣어지는 것이다.” H. Heppe, Hodge 父子, Kuyper, Bavinck, L. Berkhof도 영혼의 기원에 있어서 창조설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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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복음주의 신학자들, 예컨대 Edwards, Hopkins, Shedd, Strong, Buswell, Thiessen, G. Clark 등은 영혼의 기원에 있어서 전이설(traducianism)을 지지하는 근거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하여 Shedd의 논문이 제일 철저하게 다루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은 두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는 남자로 또 하나는 여자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안에 특별한 ‘영혼과 몸(psychico-physical)’의 본질을 창조하였다. 이 본질로부터 그 이후의 모든 인류의 각 개인들이 영혼의 차원에서도 그리고 몸의 차원에서도 태어난 것이다.”
Dabney는 이 어려운 문제의 해결은 창조설과 전이설 이 양자의 요소를 다 취하여 결합시키면 나올 것이라고 제안한다: “태아의 영혼의 존재와 속성을 발생시키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즉 존재의 본질을 무로부터 발생시켜서 존재하게 하는 능력)도 역사하고, 또한 인간적 원인도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진리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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