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삼위일체 교리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3. 7. 30. 22:39

삼위일체 교리란 무엇인가? 

2013-11-07 02:31:00

 


  우선 삼위일체론의 이단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론에는 크게 두가지 이단이 있는데 삼신론과 일신론이 그것이다. 일신론에는 종속론, 양태론, 양자론이 있다. 삼신론은 하나님이 세 존재라는 것이데  사실 초대교회에서 삼신론이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에 교회 역사상 삼신론이 이단으로 크게 이슈가 된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일신론 이단이야 말로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논쟁을 일으켰던 이단이고 지금도 현대교회는 일신론 이단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자들이 삼신론이 이단인 것은 아는데 일신론도 이단인 것을 잘 모른다. 교회사에서 삼신론 보다 일신론이 더 큰 이슈가 된 이단이었다.

 

  일신론 이단의 첫번째가 종속론 이단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고 하나님만 참 신이고 예수님은 신이 아니고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현대의 대표적인 종속론 이단이다. 역사적으로 이 종속론 이단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격렬하게 논쟁을 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등한 신이라고 주장하였고 아리우스는 하나님만이 신이고 예수는 하나님에게 종속된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이겨서 종속론이 이단으로 규정이 되었다. 아타나시우스가 인용한 결정적 성경 본문이 빌립보서 2장 6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워서 낮추시고.." 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가르치는 핵심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신적인 본질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만 삼위가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한 분은 아버지로, 한분은 아들로 한분은  영으로서 삼위간에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이다.

 

 일신론 이단의 두번째가 양태론이다. 이 양태론은 특별히 서방교회에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 서방교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양태론이 정통적 삼위일체 교리인 줄 알고 있고 서방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에서 '위'란 어떤 역할을 의미하는 상당히 양태론적인 표현이다. '위'에는 한 분이 세가지 가면을 쓰고 세 가지 역할을 하는 그런 느낌이 있다. 그래서 양태론을 일명' 가면 이단' 이라고 한다. 이 양태론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가면을 쓰고 예수님 역할을 한 것이라면 예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지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양태론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일신론의 또 다른 이단이 양자론이다. 자유주의 자들이 주로 주장하므로 '자유주의 이단' 이리고도 한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만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자는 인간인데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아들 곧 양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능력이나 에너지 정도로 치부한다.

 

  이 세가지 일신론 이단은 공통점은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잘못된 신관으로 정죄하였던  것이다.

 

  현대 신학자중 칼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대단히 중시하여 자신의 '교회 교의학'의 뼈대로 삼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 즉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 판넨베르크이다. 그는 '기독론의 기본 구조(Grundruge der Christologie)" 라는 책에서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역사를 추론해 들어갔는데 초대교회가 에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부활사건이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거기에서 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시라는 중대한 신앙고백이 등장하며 이어서 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는가?라는 물음에서 속죄론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과거 자유주의자들의 신학 방향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비록 로고스 신학에서 출발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파악하면서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삼위일체의 구조를 eins person drei seinsweise 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개의 존재양태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바르트는 또한 하나님은 자기를 세번 반복하신다( drei Wiederholum) 이란 표현도 자주 사용하였다.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세 번 반복 하시는 그런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주권자인 신은 자신을 세가지 존재 양태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구조가 이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현대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을 복구한 것은 대단히 중대한 작업이었지만 그가 복구한 것은 양태론에 대단히 가까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았던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삼위일체를 una substantia tres persona 라고 표현을 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한 실체와  세 인격체를 가진 분이라고 의미이다. 그런데 인격체라고 번역한 persona( 페르조나)란 단어의 뜻은 그 당시에 가면이란 의미였다. 그러니까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구조의 의미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가지 가면을 쓰고 역할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적 경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태양, 빛, 열로 혹은 샘,하천 강으로 비유하였는데 이런 비유 자체가 대단히 양태론적 특징을 보여준다. 칼바르트는 터툴리안을 깊이 연구하면서 터툴리안이 사용한 persona( 페르조나)가 독일어로 번역하면 person(페르존) 이 아니라 seinsweise(자인스바이제) 즉 존재양태라는 것이다. 결국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과 완전히 일치한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정의는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을 라틴어로 옮겨 놓은 것인데 이것이 옮기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구조인 ' 뮈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세이스" ( 한 본질 세 인격) 라는 희랍어를 " 우나 서브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조나"(한인격 세 역할) 라는 라틴어로 옮긴 것이다. 희랍어 '휘포스타세이스"는 독립적인 인격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독립적 인격을 갖지 않은 라틴어 ' 페르조나"로 옮겨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방교회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이 세 분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서방교회로 넘어오면서 한 분 하나님이 세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할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서방신학의 기초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면서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 달리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대전제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서방교회의 정통 신학자들은 터툴리안에서 어거스틴 아퀴나스 칼빈, 칼바르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양태론적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각인되어 있는 것도 우리가 서방교회 전통에 속하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의 전통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대전제를 굳게 붙들고 이 한 분이 어떻게 세 역할을 하는지 밝혀내려는 것이었다.그러나 초대교회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전부 동방교회에서 나온 것이고 위대한 신학자들이 다 동방교회에서 나왔지 서방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진정한 정통성은 동방교회로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동방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세 분 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방교회는 세 분 하나님이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이 세 분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시는가를 설명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였다.

 

  판넨베르크의 정신이 더 발전되면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저술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몰트만은 사변적인 사상에 기대지 말고 철저하게 성경의 계시에 입각해서 삼위일체를 언급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의 계시의 역사가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세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고 세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삼위일체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동방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이며 몰트만도 그런 면에서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세 분 하나님이 어떻게 일체가 되는가? 그것이 동방교회가 삼위일체에서 추구한 내용이다. 서방교회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전제를가지고 셋이 되시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다면 동방 교회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되시는가를 추구한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일신론과 삼신론 둘 중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더 가까운 신론은 일신론 보다는 삼신론이라고 한다.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삼신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세 분 하나님이 어떻게 일체가 되느냐?  여기에 대해서도 몰트만은 사변을 하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를 그대로 따라가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은 초대교회가 만든 사변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경이 계시하는 대단히 중대한 기독교의 신관인 것이다. 요한 복음 10:30에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는 중요한 본문이 나오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이 깨지는 듯 보인다. 여기서 '하나' 라는 의미는 요한복음 8:16,'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요한복음 8:29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는 본문에서 실마리가 풀린다. 그러니까 '하나' 라는 말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과 항상 '함께' 계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라는 의미이다. 동방교회는 '안에' 혹은 '함께' 라는 말은 세 분이신 하나님이 상호 침투되어 있는 즉 서로가 함께 있고 서로 침투되어 있는 존재 양태라고 설명하면서 이 독특한 존재 양태를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 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세 분이시지만 언제나 하나로 계시고, 하나로 행동하시는 것을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 것이다.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거하시며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이 거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아버지의 영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령안에 성부와 성자가 거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이시지만 페리코레시스로 계신 분이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거하실 때 우리는 성령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는데 그래서 우리는 아들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지 삼위 중의 어느 한 분께 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일체로 계시므로 우리는 성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성부의 창조를 먼저 언급하는데 성부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틀림없지만 성부께서 혼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창조에는 아들과 성령의 영광이 함께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 자체가 삼위일체적 사역이다. 예수님의 구속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슨종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성육신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쫒아내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리셨다. 이렇게 구속 사역도 삼위일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을 보면 세 분 하나님의 영광을 동시에 보게되는 것이 삼위일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부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아들 안에게 계시면서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믈론 고난의 양태는 다르다. 아들은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고난을 당했고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는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성부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미의 성부수난설은 잘못된 것이지만 십자가에는 명백하게 아버지의 고통이 들어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삼위일체적 고난을 나태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서 아들을 살려낸 사건이며 오순절 성령 강림은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 사건이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 교회가 만들어 놓은 사변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그 깊은 차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단히 중요한 교리이며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는 가장 근본적 표지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언제나 함께 계시고 함께 일하시며 삼위일체적 역사를 이 세상에서 만들어가고 계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유념하여야 한다.

 

삼위일체(Trinity) 교리

2015-04-17 18:48:42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속에 둘러싸여 있다. 찬송에서 삼위일체를 찬양하고 사도신경으로 삼위일체를 고백하며 세례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는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상가장 논란이 많고 어려운 주제가 삼위일체 교리이며 그 결과 논쟁끝에 교회가 분열하기도 하고 다양한 이단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심위일체 교리를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로 강조하고 고수해 왔다. 삼위일체(Trinity)는 삼위(Three Person)이란 용어와 일체(One Substance)라는 용어가 합쳐진 것이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 없는 단어이지만 성경에 나타나 있는 있는 하나님 개념을 잘 표현하는 적절한 용어인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용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용어가 담고 있는 개념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삼위일체 교리에는 중요한 세가지 개념이 담겨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된 신이라는 고백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대단히 근본적인 신관이다. 둘째는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한 경우들이 있고(창1:26) 또한 복수의 하나님을 동시에 언급한 경우도 나타난다.(시110:1) 신약성경에 오면 세 분의 하나님이 좀더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다.(마3:16-17) 사도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하였다.(벧전 1:2) 그렇다면 이 두가지 진술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닌가? 이런 모순을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상 나타난 대표적인 것이 양태론인데, 양태론은 하나님인 한 분이신데 세가지 역할을 수행하신다는 것이다. 양태론은 삼위 하나님이 구별된 진정한 인격이 아니고 한 존재의 다양한 존재 양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세번째 명제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세분 하나님이 모두 동등하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별개의 인격적 존재라는 고백이다.

 

  요약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다음 세가지 명제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이시다.

2.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3. 세 하나님은 모두 동등하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학자들은 대체로 다음 3가지 방식으로 세분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존재론적 설명인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삼위 하나님 사이에는 어떤 서열이 없고 신적 속성이나 성품에 있어서 완전히 동등하다는 것인데 이것을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한다.  둘째는 경륜적 설명인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이 그 사역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신다는 것이다. 창조사역에서는 성부는 창조를 계획하셨고 성자는 창조의 명령이 이루어지게 하셨으며 성령은 창조의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 사역에서는 성부는 구원을 계획하시어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는 성부에 순종하여 세상에 오심으로 구속계획을 실행하셨으며 성령은 성자가 성취하신 구속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역의 측면에서 보면 성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성자와 성령은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삼위 하나님 간에 어떤 위계질서가 있는데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종합하면 삼위 하나님은 각기 완전한 신으로서 본성과 성품에서 동등하시지만 그 사역의 역할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삼위 하나님간의 관계를 상호내주, 즉 페리코레시스로 설명한다. 상호내주란 삼위 하나님이 서로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인데 성부가 성자와 성령안에, 성자는 성부와 성령안에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안에 완전하고 총체적으로 내주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상호내주 한다는 것은 존재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되어 있으며 또한 사역에서도 서로 의존하고 협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이 하나이며 하나가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고 자연적, 심리적, 사회적 유비들이 동원되어 왔는데 자연적, 심리적 유바는 "하나(Oneness)"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셋(Three Persons)"에 대하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반면에 사회적 유비는 "셋"은 설명하나 "하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유비로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 교리가 모순이라거나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다. 차라리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에 속하는 영역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일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자존성과 독립성을 잘 드러낸다. 하나님의 신비가 피조물의 이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실천적 의미

 

  삼위일체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에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니이 삼위일체로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예배하고 신앙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분이 하나를 이루신 분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어느 한 분을 예배하거나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가 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의 부름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은 성부만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을 힘입어 성부께 나아가는 부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든 찬양하든 감사를 하든 우리의 모든 예배행위는 하나님 어느 한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되심은 하나님이 세분이시면서 하나로 연합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완벽하게 구비하신 완벽한 공동체의 모델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주 만물도 각각의 다양성과  독특성 가운데 함께 연합하여 하나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각각 부여받은 독특한 역할을 하면서 전체의 공생이라는 통일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개개인은 개성, 취향이 모두 다르지만 그 다양성 가운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존재로 지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독특성과 다양성 그리고 개별성이 존중되면서도 그것이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고 공생을 추구하는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목적에 합당하다 할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었지만 그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의 은사는 다양하므로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동시에 한 몸으로서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되심을 본받는 교회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삼위하나님이 일체를 이루시는 연합을 설명하는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는 삼위하나님은 각각 완전한 신이시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어니라 언제나 상호내주하시는 연합체 혹은 공동체로서 존재하시며 또한 항상 함께 협력하여 일하신다. 하나님이 그러히시듯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도 그러한 것이다. 사람도 하나님의 상호내주를 닮아서 상호의존 관계로 지어졌다. 사람은 개별적인 인격이므로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아렇게 사람은 자연과 사회속에서 관계를 맺는 존재로 만들어졌고 존재는 이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하려는 것이나 개인의 독립성와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의 존재방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페리코레시스의 실제가 가장 잘 나타나야 할 곳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페리코레시스의 관계를 회복하는 모델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모습을 반영한다. 교회는 상호내주와 상호의존이라는 페리코레시스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인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이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창조된 이 세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비록 죄로 말미암은 반역은 창조물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반영을 파괴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삼위일체적 모습을 다시 회복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