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초기 기독교

하나님아들 2023. 7. 22. 13:53

초기 기독교              

 

1. 초기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물

 

갈리오의 델피 비문 -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답서를 포함한 비문의 일곱 개 단편이 그리스의 델피에서 발견되었다. 클라우디우스의 26번째 황제 선언은 A.D 51년 말과 52년 8월 1일 사이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당시 갈리오는 아가야의 총독이었다. 사도행전 18:12의 의미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은 갈리오의 관직 인수 직후인 51년 여름이나 가을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무덤 도굴을 금하는 나사렛 비문 - 이 법령은 기독교에 대해 전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무덤 도굴에 반대하는 상고시대의 정상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인들에게 보낸 클라우디우스의 편지 - 이 편지는 헬라인과 유대인들관의 불화에 대한 처결에 관한 것으로, 1세기 유대 역사와 관련하여 큰 중요성을 가진다.

 

기독교의 파피루스들 - 파피루스들은 기독교 문학상 가장 초기의 유물들을 제공해 주었다. 현재 신약 성경의 부분들을 포함한 것으로서 그 연대가 3세기까지의 여러 파피루스들이 있다.

 

2. 초기 기독교의 고고학적 유물이 존재한다는 주장

 

예루살렘 교외의 탈피옷 주변에 있는 무덤 단지에서 발견된 납골당들은 기독교가 탄생한 나라에서, 기독교에 관한 가장 초기의 증거를 제공한다고 여겨져 왔다. 납골당의 대부분의 이름들은 흔한 유대인 이름들이므로 그들을 신약 성경의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의 바실리카의 밑에서 발굴된 것들과 베드로의 것이라고 주장된 뼈들의 발견으로 인해 방대한 참고 목록이 만들어졌다. 그 뼈들은 베드로의 것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문학적이며 고고학적인 증거는 네로 통치 때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각각 별개의 죽음을 당한 것과 그들에 의한 사역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3.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교도들의 태도

 

2세기 초에 로마 상류층의 문학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언급하면서 미신이라고 서술했다. 그 단어는 “정신 경향”이란 뜻을 내포했지만, 전통적인 공중 종교와 관련해서 사용한 렐리기오란 의미와 대조적으로, 특히 동쪽에서 온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종교들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A.D 64년에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 및 연이은 네로의 기독교인 탄압을 묘사했다. 타키투스는 방화죄라는 죄목을 믿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배타적인 관심에서 볼 때, 기독교는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이었고, “매우 위험한 미신”이었다.

비티니아의 총독 플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기독교를 “완악하고 터무니 없는 미신”으로 알았지만, 사실 반란의 중심이 될까 염려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플리니의 관심사는 배교를 부추기는 정책에 있었다. 아테나고라스는 기독교인들을 고소한 내용들을 간결하게 진술한다:

“우리들을 대적하여 세 가지가 말하여지는데, 그것은 무신론과 인육 요리의 향연들과 근친상간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놀라운 것이 될지 모르나, 무신론이라는 비난은 종교가 아닌 미신을 비난하는 특별한 형태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신들과 유명한 이방신들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교도인들은 단지 “몸을 먹는 것”과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애찬” 그리고 “형제 자매”에 대해 말하는 것만을 듣고서 그릇된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에 대해 에피쿠로스파, 스토아 학파, 그리고 플라톤의 관점들을 그의 『명상록』에서 언급했다. 그의 스토아적 신조는 자살을 허용했으나, 그는 기독교인들이 기꺼이 순교하려는 태도와 자살을 뚜렷이 대조했다. 갈렌은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가장 호의적인 보고를 전해 주었다. 그는 에픽테투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바와 일치하는 생활 방식과 윤리관을 가르치고 실행하는 것을 보았다.

 

4. 기독교의 법적 지위

 

유대인들이 유서 깊은 종교를 가졌고, 과거에 로마의 독립적인 동맹이었기 때문에, 로마는 자신들의 신앙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것을 허락했다. 처음에 로마 정부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법적인 보호(종종 사회적인 비난)를 공유했다.

기독교도들을 다르게 다루어야 하는 집단이라고 로마 당국을 설득하는 일에 유대인들이 성공한 것으로 보인 첫째 증거는 네로의 집권 때로 보인다.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의 처사에 대한 타키투스의 설명은 로마 제국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공식적으로 탄압을 받았다는 최초의 보고이다. ‘방화죄’라는 죄목은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단체에 책임을 돌리기에 그럴듯한 것이었다.

 

5. 기독교 수용을 방해한 것들

 

이교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주된 장애물은 전통의 힘과 사회구조였다. 기독교인의 법적 지위는 상황의 외부 증세에 불과했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것 등이 다신교적 전통과 함께 섞여 있었다. 이교도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요소들 - 배타성과 촌사람들 - 이 기독교에 가장 저항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독교가 처음 성공한 곳은 항상 새로운 사상과 변화에 개방적이던 도시 주님들 사이에서였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조항 중 어떤 것들은 외부인들이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듯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배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육신의 부활이라는 교리는 내세에 관한 소망들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내세를 가장 강력하고 생생하게 주장한 자들은 영혼의 불멸성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육신은 영혼이 그 연약함에서 탈출해야 하는 방해물로 여겨졌다. 소망을 “육적인” 존재로 돌아간다는 관점으로 정의하는 것은 교육받은 이교도들로서는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6. 종교적 경쟁 상대들

 

유대교에 대한 이교도의 부정적인 태도들(배타주의, 안식일, 할례 등)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이교 개종자들을 만드는 일에 기독교의 경쟁 상대로 계속 존재했다. 개종자에 관한 한 기독교가 승리했으나, 유대인들을 예수께로 회심시키는 그 자체의 기대는 좌절되었다.

 

기독교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대중들의 지성적, 윤리적, 그리고 감정적인 충성심들에 관한 상당히 많은 종류의 존재는 기독교에 엄청난 경쟁 상대들을 주었다. 많은 요소들이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제시되어 왔다.

 

기독교의 주된 변형 형태들은 영지주의라는 일반적인 표제 아래 분류된다. 2세기에서도 교회 내에서 강력한 운동들이 발생했다. 마르시온주의는 구약 성경과 교회의 유대적인 근원들을 부인했고, 세상의 공평한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한 아버지라는 두 하나님을 주장했다. 또한 누가복음의 개정판과 편집된 바울의 10편의 서신서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몬타누스주의는 교리적으로는 정통이었으나 종말론적인 고찰 등에 의해, 결혼과 금식, 순교, 금욕주의적인 윤리성에 의해, 그리고 예언의 부활을 꾀함으로 교회들의 화합을 방해했다.

 

영지주의적 사상들은 일부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도 요한과 동시대의 사람 세린투스는 매우 유대적인 사상(천년설)을 주장했지만, 가현설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근본적인 하나님과 창조주를 분리했다. 2세기 초반의 엘카사이파는 번빈히 침례를 했고, 세심하게 씻은 음식만을 취했다. 3세기의 마니교는 엘카사이파 공동체에서 성장했다.

 

어떤 유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며 살면서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했으며, 그들에게 자신들과 같이 행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에비온파는 분파적인 경향을 보인 사람들이었으며, 요단 저편에 피난처를 마련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일부였다.

 

7. 기독교에 유리한 요인들

 

기독교에 방해물이 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기독교가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전파와 성장에 있어서 하나의 안정된 정부의 축복들은 중요한 외적 요인이었다. 이런 축복들은 특히 여행에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로마가 외적 평화를 유지하는 것과 아울러 해적들과 산적들을 진압하려 한 것도 여행길의 안전에 기여했다. 나아가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한 것은 육로 여행을 수월하게 했다. 로마의 평화는 상업을 증진시켰으며, 선교사들도 이익을 보았다. 기독교에 기여한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은 헬라어의 보급이었다. 헬라어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의사소통의 수단을 제공한 로마 제국의 범제국적 언어였다.

 

기독교는 진지한 정신을 가진 이교도들이 유대교에 매료되는 장점들 - 일신교, 높은 윤리적 기준들, 밀접하게 맺어진 사회적 공동체, 고대의 거룩한 성경의 권위, 이성적인 예배 등 - 을 제시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 있는 의무들 - 할례 의식, 안식일, 음식에 관한 법률 - 을 갖지 않았다. 기독교는 성경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를 주장함으로써 상고의 접촉을 제시했으며, 보다 새로운 종교적 갈망 - 개인적인 구세주를 통한 구원과 해방 - 의 충족도 제시했다.

 

초기 로마 제국의 종교적 경쟁에 있어서 기독교의 장점에는 여러 특징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독교의 창시자는 실제의 삶 이야기를 지닌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기독교의 성공에서 그리스도라는 인물 자체가 중요한 요인이었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한 확실한 승리와 행복한 내세를 제시했다. 또한 높은 도덕적 표준들과 종교적인 신앙을 결합했으며, 그 가르침을 옹호하는 세계관을 개발했다.

 

8. 기독교의 특징

 

기독교는 그 자체를 하나님이 인간의 일에 새롭게 활동하신 결과, 하나의 신적인 계시라고 제시했다. 기독교의 주장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인지의 여부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독창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역사적인 조사에 의해 직접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시작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며, 기독교의 핵심으로 존재한다. 프랭크 크로스에 의하면, 기독교의 특징은 고난을 통한 구속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속하시는 사역으로 이해되는 십자가 처형의 “사건”이다. 기독교 신앙을 결정하는 기초는 부활의 교리가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믿는 믿음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이미 오셨으며 앞으로 오실 메시아로서 다스리신다는 확신이다.

 

기독교의 진리 주장들은 예수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가와 같은 그분의 “인성과 사역”을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기독교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그분 - 하나님의 독생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그분에 대해 증언된 것들을 행하실 것으로 주장된 분 - 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은 이룰 수 없는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셨다는 점일 것이다.      

'세계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구약 중간사 간략한 연대표  (0) 2024.03.14
성경역사와 교회역사 도표  (0) 2024.02.29
현대사상사 요약  (0) 2023.07.18
초대 기독교의 상징  (0) 2023.03.18
성경 연대기 및 교회사  (0) 2023.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