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칭호 - "메시야"論
목 차
Ⅰ. 서 론 ........................................................ 1
A . 문제제기 ................................................... 1
B . 연구범위 ................................................... 1
Ⅱ. 본 론 ......................................................... 2
A . 유대인의 메시야 개념 ....................................... 2
1 . 유대 역사속에 나타난 메시야 대망사상 .................... 2
2 . 유대인의 시각에 비친 예수 ............................... 3
B . 메시야론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 .............................. 4
1 . 복음서에 나타난 보도와 증언의 구분 ...................... 4
2 . 객관성의 문제에 대한 검토 ............................... 5
3 . 예수의 메시야적 특성에 대한 사도적 증언 ................. 6
C . 메시야로서 예수의 자기증언 ................................. 7
1 . 복음서에 나타난 자기 증언의 역사성과 그 신빙성 .......... 7
2 . 예수의 자기 주장과 그 내용 .............................. 8
Ⅲ . 결 론 ..................................................... 10
* 참 고 문 헌 ........................................... 11
Ⅰ. 서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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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문제제기
예수의 칭호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용을 보인것은 그리스도 즉 메시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메시야로 불리워졌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과정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위성은 역사적으로 인정되는가. 그것은 객관성의 문제에 있어서 여러 비판적 관점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또한 그가 메시야라고 불리워졌을 때,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야적 특성에 대하여 개관적이고 순수한 단순역사 속에서 그 과정과 실제의 형태를 편견없이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가능한가에 대하여 많은 비판적 이론이 있고{{) G. Bornkamm, Jesus von Nazareth (Stuttgart, W. Kohlhammer, 제2
판,1957), 강한표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p.177.
}}, 이러한 시도를 위하여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의 객관성과 그 사료적 가치가 의심받는 가운데 있는 점은 가장 큰 쟁점이며, 뛰어넘어야 할 난관 중의 하나이다.
B . 연구범위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현대신학의 주종을 이루는 케리그마 신학의 입장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학의 타당성은 어디까지 인지에 대해서 충분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러한 신학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되겠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에 있어서 양식비평학적, 역사비평학적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관건이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적 관점은 흔히 신앙고백적 입장에 서서 역사적 사실성을 뛰어넘어, 섣불리 결론을 내리려는 조급성과 주관성을 숨길수 없기 때문이다.{{) Ibid.,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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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 론
A . 유대인의 메시야 개념
1 . 유대 역사속에 나타난 메시야 대망사상
메시야 사상은 유대인의 사상 중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메시야는 히브리말의 마챠(Machach), 곧 기름을 붓는다는 데서 온 말로 기름을 부음받은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 - 예언자, 제사장, 왕에게 기름을 부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바라고 기다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메시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하고 서로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 언젠가는 명예롭고 영예로운 번영의 시대가 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메시야는 반드시 오실터인데 그는 그 민족의 운명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대리라고 생각하였다.{{) W. Barcly, Jesus as they saw him, [예수의 칭호연구], 성문학사,
1979,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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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들의 메시야를 대망하는 초기의 요소는 분열된 왕국을 연합시키는데 있었다.{{) Ibid., pp.39-43.
}} 곧, 민족통일에 기대를 걸었다. "그날이 오면 유다 가문과 이스라엘 가문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북녘 땅을 떠나 조상들이 유산으로 받았던 땅에 함께 들어가리라"(렘3:18). 이와 관련하여 에스겔은 그의 사명이 완성되었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두 왕국의 이름을 기록한 두쪽의 나무를 합쳐 놓은 일을 하였다. 이와같이 그들의 손으로 나누었던 두 왕국이 처음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겔37:15-23) 황금시대의 꿈이 두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는 불화를 없이하는 희망까지 갖게 함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째,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은 경이적이요, 기적적이며, 풍요한 시대를 기대함에서 오는 것이었다.(암9:13; 사35:1-2)
세째, 메시야 시대의 꿈의 또 하나는 전쟁과 분쟁의 끝나는 날, 곧 세계의 평화적 지배가 오는 날이다.(사2:4; 슥9:10)
네째, 메시야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묘사는 인간과 동물간의 새로운 우정으로 그 사이의 지금까지의 적대행위의 없어짐이다.(사11:6; 65:25; 호2:18)
다섯째, 메시야 시대에는 모든 슬픔과 고통과 피로와 또 죽음까지도 영원히 사라지리라는 꿈이 있다.(렘31:32; 사65:19-22) 이것은 메시야 시대란 인간에게 모든 눈물이 없어진 때를 말함이다.
2 . 유대인의 시각에 비친 예수
이와같은 유대인의 메시야적 환상속에는 새로와진 인간들이 살기위한 새로 창조된 환상의 세계가 있다. 그러면 예수는 이 환상에 적합한가? 그렇지 않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유대인의 메시야적 개념과 예수의 행적과는 다분히 이질적인 것을 고찰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불트만(Bultmann)의 대답을 빌면 "공관복음서의 전승은 예수의 생애와 그 활동이 전통적인 메시야관으로 생각한 것 같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G. Bornkamm, op,cit., p.240.
}}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시각에 비친 예수를 찾아보아야 한다.
유대교의 기대에 맞서는 예수 사역의 특이성은 현저하게 나타난다. 예수는 결코 자기민중의 민족적 희망을 보증하거나 갱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민중 가운데서나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그는 이런 희망에 당면케 한 것은 확실하다. 그의 예루살렘 입성 때 민중의 환호는 이것을 말해준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복이 있으라"(막11:10). 십자가 위의 "유대인의 왕"(막15:26)이란 명패가 이를 말해준다. 이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로마인에게는 반역자에 불과했던 수많은 메시야 왕위 참칭자들 중의 하나로 처형시켰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 바로 그 분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요"라고 엠마도 도상의 제자들도 말하고 있고(눅24:21; 19:11), 다른데서는 제자들이 묻기를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세우실 때가 이때 입니까?"(행1:6)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 기대를 환멸로 돌린다. 그의 말씀은 결코 권능과 영광중에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나 자기 원수를 진멸시킬 메시야 왕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Ibid., p.190.
}} "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공격하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점령한다"(마11:12)라는 모호한 말씀은 아마도 열심당의 메시야 정치운동에 대한 분명하고도 예리한 거부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의 메시지는 그 시대의 묵시문학적 우주적 기대에 더 가깝다. 예수도 갑자기 나타나는 세계 심판날에 대하여, 세계의 종말에 대하여, 과거의 대홍수의 날과 같이 세계가 겪지 않으면 안될 재난에 대하여(눅17:26; 21:34), 세계 심판자로서 인자의 오심에 대하여(막8:38; 13:24), 세계의 대추수에 대하여(막4:26; 마13:24), 그리고 하늘 식사의 기쁨에 대하여(마8:11)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도 예수의 메시지와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과의 거리는 철저하고도 본질적인 것이다. 방자한 공상으로 그려진 묵시문학적 상징들에 대립해서, 그리고 "주님, 언제까지입니까?"(시80:5; 74:10; 단9:4-19)라는 예언자와 경건한 자들의 옛 물음을 우주적 역사적 사건의 관찰을 통하여, 공상적인 숫자의 사변을 통하여, 또한 세계 시기적 구분을 통하여 해답하려는 끝없는 시도에 대립해서, 예수의 사역은 대단한 침착성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다.{{)Ibid.,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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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메시야론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
1 . 복음서에 나타난 보도와 증언의 구분
예수의 메시야적 칭호와 그에 대한 확증과 전승은 그의 부활사건을 비롯한 많은 이적에 기반을 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로 부터의 부활사건과 그의 생애와 그의 영원한 지배는 인문주의적 역사학에서는 수용될 수 없다. 역사학은 이것들을 다른 과거의 사건들처럼 확인하거나 "사실로 확정"하기에 난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학이 미칠 수 있는 그 역사의 최후 사실은 처음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이다. 이 신앙에 기초가 되는 메시지와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하여 신약성서는 이를 비밀로 해두지 않는다.
이 신앙은 몇몇 열광주의자들의 특수체험이거나 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행히 자리가 잡히며 획기적인 시기를 마련하게 된 몇몇 사도들의 신학적인 특수견해는 아니다. 그뿐 아니라 원시 그리스도교의 증인들과 교회들이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또 그들의 메시지와 신학이 아무리 여러가지로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부활하신 자에 대한 신앙과 고백에 있어서 하나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장 인상깊게 말했는데 - 그는 여기서 원시 그리스도인 전체를 대표해서 말하기를 "나나 그들 (즉 다른 사람들) 이나 다같이 이렇게 전파하고 여러분도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고전15:11)라고 한다.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가 없이는 신약성서의 복음이나, 단 하나의 설화나 서신도, 그리스도의 신앙도, 교회도, 예배도, 기도도 오늘까지 존속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절 메시지의 명백성에 대하여 부활절 보도의 애매성과 역사적인 문제성은 부정할 수 없는 긴장관계에 있다.{{) Ibid.,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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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데, 마가복음의 분위기 속에 극도의 억제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은 묘사되어 있지 않은 점(막16:8), 복음서 기자들의 부활절 기사의 상세한 점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를 나타내는 점, 부활절 메시지는 어떤 경우에나 부활절 역사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 역사 가운데 매우 여러가지로 다르게 반영된 점들이다.
2 . 객관성의 문제에 대한 검토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볼 때, 사도들의 증언은 다분히 주관적 요소가 있으며,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트만 학파에서나 현대신학의 흐름 속에서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보도의 성격으로 보기를 거부한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증언의 차원에서 씌여진 기사라 하여도 그 내용은 객관적인 권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후기 불트만의 학파에서도 예수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가 믿는 교회의 산물에 불과한 것일 수는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확실한 것은 부활하신 자의 현현과 그 증인들의 말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 신앙을 기초 세웠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하다.{{) Ibid., p.186.
}}
3 . 예수의 메시야적 특성에 대한 사도적 증언
예수의 메시야적 특성과 그의 생애의 의미와 죽음과 부활의 기적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어느 누구에게도, 그 당시에는 이해될 수 없었고 예측될 수 없었다. 오직 예수 자신의 인격, 즉 하나님께서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행2:36) 이 인간 나사렛 예수에게 있어서만 이러한 메시야적 구상은 분명하게 존립해 있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자 자신이 비로소 그의 역사와 그의 인격의 비밀,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밝혀 주는 것이다.{{) J.S. Stewart,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
의 생애와 교훈], 김득중 역, 컨콜디아사, 1990, p.147.
}} 이것이 엠마오 제자들의 역사에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눅24:13), 그들이 길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자가 그들에게 부지중에 동행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의 마음속에 꺼진 불을 새로 일으킨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식사 때에 그의 임재를 경험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증인들로서 형제의 무리에게 돌아가며 그 무리 가운데서는 벌써 그들에게 저 환희의 고백이 들려온다. 즉 "주께서 확실히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눅24:34).
그의 메시야적 특성과 부활의 내용과 그 의미에 관한 많은 신약성서의 증언들 가운데 여기서는 베드로전서의 서두만을 말해두기로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의 크신 자비로 ...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산 희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벧전1:3). 이 서신을 받은 교회는 나그네의 집단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부활하신 자에 대한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시민권을 하늘에 둔(빌3:20) "흩어진 나그네들"(벧전1:1)이 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다. 이 생명이 그들에게 '산 희망'을 채워주며 이 희망은 결코 세상의 희망과 같이 하룻밤 사이에 환멸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Ibid., p.149.
}}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땅위의 생활의 어려움을 숨기지 아니하면서도 그들에 관하여 "여러분은 ...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벧전1:5)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부활하였고 그는 창조를 초월하여 생명을 공급하는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C . 메시야로서 예수의 자기증언
1 . 복음서에 나타난 자기 증언의 역사성과 그 신빙성
현대신학의 조류는 예수의 메시야 자의식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즉 예수 자신이 자기를 메시야로 주장하였는가. 또한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면 어떤 의미로 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전술하였듯이 복음서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점 즉 "신앙이 전승을 형성했다"는 시각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 G. Bornkamm, op.cit., p.180.
}} 곧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로 생각하였는가. 또 메시야 주장을 스스로 내세웠는가 하는 원초적 질문을 사뭇 진지하게 제기하는 관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제가 신앙고백적 차원에서는 원초적이며 유치한 질문이라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학술적이고 역사적인 입장에서는 보통 생각하듯이 그렇게 경솔하게 또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고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학문적인 입장에서 변증할 필요가 있으며, 신앙고백적 차원에서도 선교와 설득의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주관적이며 비역사적이라는 맹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이런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 가지의 큰 시험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이 지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광야의 시험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확실히 그 지식은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도 그에게 있었다. 어쨌든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그가 자기 자신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J.S. Stewart, op.cit., p.144.
}}
그러나 가이사랴 사건 때 까지는 그 지식이 상당히 감추어져 있었다. 메시야에 관해 은폐하고 침묵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세상에 널리 선전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병을 고쳐준 사람에게 그 일을 알리지 말도록 당부했다. 그는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고의적으로 수수께끼 같은 "인자"란 명칭을 택해 사용하였다. 이 명칭은 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에게만 예수의 메시야적 위엄을 암시해 줄 수 있는 그런 명칭이었다(단7:13). 그러나 그 명칭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들을 귀"를 가진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진리가 완전히 계시되었을 때에도 예수는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16:20).
그는 메시야 개념을 그 당시의 정치적인 이해로부터 해방시켜야 했다. 고난 당하는 메시야 사상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첫 목적이 사람들을 영적으로 고무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일을 하기 전에는 메시야에 대한 선포가 오해만 일으킬 뿐이고 그가 전혀 동정하지 않았던 그런 종류의 세상적이고 열광적인 소망, 즉 결코 성취될 수 없는 소망만을 자극할 뿐이었다.{{) Ibid., p.141.
}} 예수께서 침묵을 지키셨던 또 다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진리들이 말과 선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활과 사람에 의해서만 계시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Ibid., p.142.
}} 어느날 예수가 성전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 거하실 때, 그의 동족 유대인들이 다가와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요10:24)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진리들이 그런 식으로 말해질 수는 없다.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신이 생겨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로다"라고 말로써 선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본성과 그의 이름을 자연히 배우게 된다.{{) Ibid., p.142.
}}
2 . 예수의 자기 주장과 그 내용
예수는 분명히 자신을 메시야라고 주장하였으며, 과거와 현재의 어떠한 인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마11:27; 10:37; 24:35; 요10:30; 14:6). 우리는 이 점을 그가 사마리아성의 우물가에서 여인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녀의 마음을 비수로 찔렀다.
본디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도 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을 때, 쏜살같이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요18:34)라고 도전하였다. 그는 간접적인 의견이나 대리적인 판단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인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Ibid., p.146.
}}
이러한 질문 뒤에 나타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충격적인 감동으로 받아들인 예수의 언급은 중요하다.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여기서 예수는 수년 동안의 모든 인내에 대한 엄청난 보상이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결국 그의 심령의 노고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이렇듯 메시야 의식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 이유는 메시야란 기름부음자, 승리자, 구속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명에다가 또 한가지 새로운 뜻을 덧붙였다. 그것은 궁극적인 승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 이었다.{{) W. Barclay, op.cit., p.62.
}}
예수는 자기를 고난의 종이라고 생각하여 치욕을 당하고 비극까지도 각오하였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도 확신하였다. 종의 묘사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명과 사람의 인식에 의하여 승리로써 끝을 마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예수는 죽음을 넘어서 생명을, 십자가를 넘어서 면류관을, 부끄러움을 넘어서 영광을, 비극을 넘어서 승리를, 거부를 넘어서 왕위의 보좌를 보았다.
예수의 메시야 의식의 중심에는 구약성서의 고난의 종의 묘사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위하여 괴로움과 죽음을 당하였다가 하나님의 변명으로 승리하는 인간상이다. 예수는 이 종의 형상의 완전한 성취자이다.
결 론
메시야 성(性)에 대한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예수의 전언은, 그의 이러한 메시야 은폐의 의도속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는 요한이 보낸 두 제자들에게 -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거가 분명한 모습을 목격한 그들에게 메시야임을 주장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만 했다.
예수는 요한에게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는 그 선구자의 생각을 알았다. 그는 요한의 당혹감과 회의를 간파하였다. 그는 그의 방법들이 - 그의 독특한 메시야적 사역이 요한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구자는 메시야의 길을 잘 닦아 놓았지만 지금 그는 넘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메시야는 이에 대해 동정했으며 비판하지 않았다. 가장 고상한 이상들도 때로는 흐려질 수 있고, 한 때 분명한 약속과 함께 멋지게 시작했던 대의명분도 약해지고 흔들릴 수 있는 법이다.{{) D.Guthrie, [메시야 예수], 정광욱 역, 아가페출판사, 1989, pp.135-137
}}
이처럼 요한과 비슷한 맥락에서 현대신학의 사조도 예수의 메시야적 특성을 의심하며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의 원저작설은 유치한 이야기처럼 매도되었다. 적어도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와 성령의 권위는 위협받고 있거나, 또한 그 반동으로 지나친 보수주의적 경향을 형성하는 폐해를 금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신학의 사조 속에서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흔들림없는 논점을 유지하며 분명한 객관성과 역사성을 창출하는 태도은 중요하다. 진실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그에 대한 의지는 오늘날의 신학의 과제이며,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 논고를 하나의 도전적 시도이며 출발의 선상에 둔다.
참 고 문 헌
G. Bornkamm, Jesus von Nazareth (Stuttgart, W. Kohlhammer, 제2판,
1957), 강한표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W. Barclay, Jesus as they saw him, [예수의 칭호연구], 성문학사,
1979.
J. S. Stewart,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 김득중 역, 컨콜디아사, 1990.
D. Guthrie, [메시야 예수], 정광욱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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