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 박영선 목사
사도행전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To whom also he shewed himself alive after his passion by many infallible proofs, being seen of them forty days, and speaking of the things pertaining to the 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이 행사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룩하신 구원의 놀라운 일을 믿고 나아오는 모든 사람은 새로운 통치영역으로 옮겨져 들어왔다. 이 시간에도 중생과 성화의 역사를 통해 이 나라는 진전하고 있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듭니까?
성경에서 천국에 관한 메시지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를 아는 것이 이 공부의 중요한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요즘 사람들은 “천당 가려고 믿는다”고 하지 않고 다르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대답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분이 상당수 있습니다. “천당 가려고 믿는다”고 하면 너무 노골적이고 속이 들여다보이니까 하나 감추어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느냐?”고 하며 인격이 고매한 것처럼 멋지게 말을 만듭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결국은 천국 가는 것이 성경 메시지의 최고의 목표이고 주제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느 만큼 집요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갖고 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구약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묘사
이사야 2:4을 봅시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종말을 고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약속된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갔을 때 그 나라의 형편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 구약에서는 일단 “전쟁이 없고 패함이 없다”고 묘사합니다. 성경이 천국을 묘사하는 방법 중에는 긍정적인 묘사보다는 부정적인 묘사가 더 많습니다. 즉,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거기에는 전쟁이 없다, 피 흘리는 것이 없다, 죽음이 없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는 부정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자체에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지로서 이런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는 데 가장 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입니다.
이사야 11장에는 하나님 나라가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은 나라인 것입니다. 독사가 물어도 죽지 않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또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살육이 없는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시각에서만 이 나라를 이해한다면 하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사자가 풀을 먹으면 무슨 맛에 사자를 봅니까? 사자가 좀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동물들을 사냥하기도 해야, 그 맹수다운 모습을 보는 맛에 구경을 가는 것이지요. 사자가 풀을 먹는다면 소를 보지, 무엇 때문에 사자를 보러 가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지금 묘사하고 싶은 초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살육이 있고 상함이 있고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메시지가 얼마나 큰 복음이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서는 누가 누구를 해하지 않고 누가 누구를 위협하지 않고 누가 누구를 골탕 먹이지도 않는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이 구약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묘사입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천국복음
다음으로 신약을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4:17을 보면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첫 발언입니다. 주님의 사역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 역시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천국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요, 전파하는 말씀의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마 4:23-24),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9:35)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을 대표적으로 설명할 때만다 늘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고 주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공생애의 시작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결론 부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장과 같은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하셨느냐 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하늘 나라’, 이렇게 표현된 같은 주제, 같은 내용이 예수님께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역의 주제이고 목표였습니다.
지금까지 천국에 대한 여러 성경구절을 찾아본 까닭은 성경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약에서 최고의 메시지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분도 있지 않습니까? “혹시 구원이 더 중심 되는 내용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입니다. 즉, “죄인 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 곧 구속이 더 중심 된 메시지가 아닙니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이나 구원이나 실상은 똑같은 얘기입니다. 구원을 받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천국 백성이라는 말은 이미 구원받았음을 전제로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얘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에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개인의 경험을 기준으로 보면 천국론보다는 구원론이 더 실감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라는 시각에서 보면 구원은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의 시각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런 의미에서 천국은 그 나라 백성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천국을 전파하시고 실제로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만유를 다스리는 통치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해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무엇이 생각납니까? 성경이 말하는 천국에 대해 우리 인간들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많이 오해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나라’는 영어로는 ‘kingdom'이라고 씁니다. 왕국(kingdom)이라는 이 말이 원래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느냐를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라’라고 할 때 맨 처음 들어오는 개념이 어떤 것입니까? 일차적으로 장소적 개념, 즉 공간적인 개념입니다. ‘나라’ 하면 먼저 땅덩어리가 생각납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삼대요소를 말할 때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얘기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이러한 국가 개념은 아마도 자원 경제 사회이기 때문에 생긴 개념일 것입니다. 자원이 없는 나라는 그만큼 가난해지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땅덩어리가 넓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말할 때 우리머리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지 상상해보십시오. 우리는 벌레 같은 사람들과 더러운 데서 살고 있는데 “나라이 임하옵시며”할 때마다 하늘에서 강한 빛과 함께 구름에 떠 있던 황금집이 내려오는 멋진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는 나라의 개념은 ‘주권’(kingship, king's authority, lordship)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루이 14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짐은 곧 국가다”. 그 말은 지금 우리 시대의 감각으로 볼 때는 정신나간 소리지만 그 당시는 당연한 얘기입니다.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국가를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자신이 곧 국가의 전 요소입니다.
성경에 이런 왕권의 개념이 어떻게 나오는가 봅시다. “아닥사스다 왕이 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보계(譜系)가 이러하니라”(스 8:1).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보를 지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위(位)에 있을 때”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번역을 잘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n the kingdom of Artaxerxes', 즉 아닥사스다 국가 때입니다. ‘아닥사스다 국가 때에’라고 하면 마치 무슨 ‘이씨 조선 때에’하는 기분이 듭니다. 마치 나라의 이름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라 ‘그가 통치하고 있을 때에’라는 뜻입니다. 아닥사스다가 통치할 때에, 우리말로 ‘아닥사스다 왕이 위에 있을 때에’라는 말을 하면서 왕국(kingdom)이란 단어가 ‘통치’의 개념으로 쓰여진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단어도 과연 그런 개념으로 쓰여졌는가를 봅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시편 103:19 말씀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이렇게 앞에서 한 말과 같은 뜻을 얘기하는 데도 동일한 단어를 쓰지 않는 표현법을 ‘평행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난 것을 얘기할 때 “그의 자태는 하늘을 나는 용이요, 그의 모습은 땅 위로 달리는 백호라” 이렇게 말을 하지 않습니까? 같은 얘기를 하는데도 한번은 ‘자태’로, 다음은 ‘모습’으로 교대로 씁니다. 만약 “그의 자태는 청룡이요, 그의 자태는 백호라” 하면 벌써 시로서는 낙제입니다. 동일한 내용을 다른 단어를 써서 강조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설명하는 데에도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두셨다”는 말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의 위엄과 그의 권세가 최고로 높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얘기를 뒤에서는 ‘정권으로 만유를 다스린다’, 즉 ‘그가 다스리는 대상이 어느 한 부분인 것이 아니라 만유(萬有)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정권이란 단어가 바로 왕국(kingdom)입니다. “만유를 통치하시도다”라는 말을 “His kingdom rule's over"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번역은 ‘정권’입니다만 ‘나라’라고 해야 바르게 직역하는 것입니다. ‘나라’라고 하면 당장 장소라는 개념으로 꽉 차 있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렇게 고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03:19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나라는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여기에서 ‘나라’가 통치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때 이 말씀이 어느 정도 올바로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천국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임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이런 개념을 이해하면 우리가 안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가 풀리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장소적으로 가깝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천국을 장소적으로만 이해하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현물적인 얘기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치권으로 해석하면 의미가 달라지며 동시에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복음서에서도 역시 하나님 나라가 통치권을 의미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천국은 주의 통치권이 미치는 데까지
누가복음 19:11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유대를 회복시키실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를 내어쫓고 이방의 나쁜 놈들을 다 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원토록 평안하게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주실, 힘있는 통치자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습니다. 죽으러 오신 일들을 하나씩 이루셨고 마침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때가 왔구나.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시면 적들과 싸워서 이겨내시고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실 거다’라는 기대 속에서 올라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개념을 고쳐주시기 위해 므나 비유(눅 19:12-27)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비유 중에 기억해야 할 대목은 “왕위를 받으러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말로는 “왕위를 받으러 갔다”고 되어 있는데 원문은 “왕국(kingdom)을 받으러 갔다” 즉 “나라를 받으러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라를 어떻게 받으러 갑니까? 나라를 받으러 가면 땅덩어리를 받는다는 것입니까? 나라를 받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이것은 통치권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가 유대인들에게 이해되기 쉬운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라 이스라엘 나라에서 어떤 권세든지 잡으려면 로마 황제의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분봉왕 헤롯이 누구에게서 왕위를 받았습니까? 시저에게서 입니다. 그러므로 왕위를 받기 위해서, 즉 나라가 아니라 통치권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서 이것이 명백해지면 천국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거의 다 된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소련이며 어디까지가 미국입니까? 그 통치권이 미치는 데까지입니다.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소서”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안 하면서 주기도문만 외우면, 구약시대 같으면 당장 문둥병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시는 그 만큼까지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구약에서 전쟁의 중지와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의 폐지라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다음 질문들에 O, X하거나 ( )속에 적절한 단어를 채우시오.
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라는 개념이 일차적이다. ( )
② 하나님의 나라는 “왕의 지위, 특성, 신분 혹은 속성, 왕의 권위, 지배, 통치, 왕위”라는 개념과 밀접하다. ( )
③“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의 구절은 천국이 장소적으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을 바라는 것 외에 다른 의도는 없다. ( )
④천국은 ( ) 개념이 아니라 ( )임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⑤천국은 그 범위가 ( )까지이다.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이제까지 당신이 알고 있었던 천국 개념과 본문에서 공부한 내용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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