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축도와 축복과 복

하나님아들 2023. 2. 24. 20:07

축도와 축복과 복

 

축도는 ‘축복 기도’인가 아니면 ‘복 선포’인가?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축복 기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많이들 오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마치 복 선포인 양 오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따져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복’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 교회 안에서의 목사의 직분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예민한 문제로 대두된다. 아무튼 이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축복’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하겠다.

 

잘 알다시피, ‘축복(祝福)’이란 ‘내가 누군가를 위해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복을 비는’ 일이다. 보기를 들자면, 이삭이 야곱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계에는 이 말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느낌이 있다. ‘축복하다’라는 말을 마치 ‘복 주다’라는 말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영어 낱말 bless의 악영향인 것 같다. 영어에서는 그 두 경우 모두 bless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어권 사람들의 ‘복’에 대한 이해가 아주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네들은 마치 인간이 하나님처럼 복을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개념이 분명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실 경우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사...(보기: 1:28)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빌 때에는 “누가 누구에게(또는 누구를) 축복하다”(보기: 27:4)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직접 읽고 있는 우리말 성경에도 분명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는 말을 우리 마음대로 그냥 혼동하여 마구 쓰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복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축도와 관련하여서는 목사의 직분에도 오해가 있다.

 

우리는 보통 기도할 때에 “하나님, 우리를 축복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엄청난 잘못이다. 하나님은 결코 축복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수가 없다. 그 분이 최고의 자리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이 그 분 위에 계신 또 다른 어떤 신에게 우리를 위해 복을 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 자체가 완전히 흔들려 버리고 만다. 그러니 그러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십시오.

 

어떤 분들은, 그냥 ‘복’ 또는 ‘복을 주십시오’라고 말을 하면 왠지 미신적인 냄새가 풍긴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이거나 아니면 잘못된 시각이다. 복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고 복을 비는 것은 비는 것이지, 이 둘을 혼동해서는 큰일이 난다.

 

또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축복’이라는 말을 ‘복을 주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렇게 되면 말을 새로 만드는 차원인데, 그러한 태도는 여기서 문제로 삼을 수가 없다. 이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마치 이제부터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자는 것과 같은 차원의 문제이다. 만약에 모든 한국인들이(그리고 이 말이 한자말이므로, 이 경우에는 모든 한자 사용자들이) 이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 ‘축’자의 뜻이 다른 경우에도 다 그런 식으로 쓰이게 된다면, 이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단계에까지 이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알기로는 몇 년 전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축도’의 문제가 장로교 교단에서 논란이 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도 어떤 목사님들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하여 쓰고 있지만, 아직은 많은 분들이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안 하고 있다.

 

축도의 문제는 이렇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그 말씀들이 과연 하나님의 '복 선포권'을 바울이 대신 받아서 행하는 것이냐? 아니면 성도들을 위해 바울이 하나님께 복을 비는(축복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언어적인 지식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이 쪽은 조금 알고 있는 편이다. 우리는 영어의 일방적인 영향으로 서양말의 ‘volitive’나 ‘imperative’를 모두 ‘명령법’이라 번역하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후자는 ‘명령법’이라 옮겨도 좋겠으나, 전자는 제대로 하자면, ‘소망법’(원망법, 희망법)이라 옮겨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말을 하는 사람’이 ‘그 월의 주어’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경우에 쓰는 서법이다. 그러니 일방적인 명령과는 다른 것이다. 영어에서는 2인칭 명령법만 나타나고, 1인칭이나 3인칭의 소망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말들에는 이러한 소망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일방적인 명령은 ‘2인칭’에서나 나타나는 일이다. 1인칭’이나 ‘3인칭’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소망인 것이다.

 

문제가 되는 바울의 말씀도 바로 이러한 소망법이다. 그 월의 주어는 2인칭이 아니고 3인칭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님의 보살핌’ 등이 모두 3인칭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일방적인 명령법이 결코 아니다. 말하는 자인 바울이 그 월의 주어로 나타나는 그 세 가지가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밖에도 ‘축도’라는 말 자체에서도 우리는 이것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도’의 ‘도’자는 ‘기도’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분명 기도라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하는 것이다. 마치 이삭이 야곱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하듯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

 

사실 이 문제는 목사의 ‘축복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쉽지 않다. 목사에게 과연 ‘축복권’(?)이 있는가? 당연히 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축복권’은 누구에게나 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해 축복할 수 있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구를 위해 축복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오해하는 대로의 ‘축복권’(사실 이것은 축복권이 아니고, ‘복선포권’이다.)이 과연 목사에게 있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 되시며,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결코 인간이 인간에게 복을 줄 수는 없다. 그러면,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다. 목사가 축도를 할 때에는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그렇다면, 축도라는 용어는 틀렸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는가? 그럴 경우에는 ‘축도’라 하지 말고, ‘복선포’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뜻으로 목사가 ‘복선포’를 한다 하더라도,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 등을 모두 명령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자, 성부, 성신에게 명령하는 목사는 분명히 그 삼위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축도할 때에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축도는 결코 ‘복선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바로 이 말이 사도 바울의 편지들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 주의하여야 할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편지는 어디까지나 편지이다. 그것이 결코 사도 바울의 신학서적도 아니며, 설교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편지의 특성을 동시에 이해하면서 이 글을 읽어야 한다.

 

편지에는, 특히 사도 바울이 성경의 여러 서신서들을 쓸 당시의 편지에는 분명히 어떤 격식이 있었다. 그 격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끝 부분의 인사말이다. 어찌 보면 이 부분은 아주 상투적인 말이다. 사실 이러한 축도로 인용되는 말이 편지마다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에는 아예 동사도 쓰이지 않고 줄여진 상태로 나타난다. 어떤 분들은 이 말이 분명히 명령법으로 쓰였다고 하나, 사실 원문에 보면 동사는 쓰이지 않고 바로 ‘--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meta)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므로 분명히 명령법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 전치사 앞에 무엇이 생략되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있어라’라는 뜻의 동사가 생략되었는지, 아니면 ‘있기를 바란다’라는 뜻의 말이 생략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 같은 분이 ‘복선포’라는 그렇게도 중요한 개념에 대해 함부로 생각할 리는 만무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인정할 것이다. 그런 분이 미리 ‘복선포’에 대한 어떤 분명한 견해를 밝히지도 않고서 편지 같은 글에서 함부로 복선포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도 동사도 쓰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복선포’ 운운하는 것은 억지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것은 그 당시 아주 흔히 관용적으로 쓰이던 인사말이 분명하다.

 

이 문제는 어쩌면 유럽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네들은 당연히 이 부분을 바른 의미에서의 ‘축복 기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실 말의 문제(번역의 문제)이지 교리 상의 문제가 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영어에는 ‘God be with you(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도 명령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명령과 ‘Go right now(지금 당장 가거라) 따위의 명령을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앞의 말은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소망이다. 그러나 형식은 같은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으로 인해 오해해서는 아니 되겠다.

 

마찬가지로 ‘God bless you’라는 말을 명령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복주어라’라든지 ‘하나님아, 이 사람을 복주어라’ 따위로 번역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결코 명령이 아니다. 이것은 소망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복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Bless be with you’라는 말도 ‘복이 당신과 함께 있어라’ 또는 ‘복아, 저 사람과 함께 있어라’라는 명령이 아니다. ‘복’이라는 3인칭 주어는 인간의 명령을 듣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복이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소망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우리말의 ‘--ㄹ지어다’라는 말의 뜻과 쓰임이다. 사실 오늘날에는 이 말이 자주 쓰이지 않는다. 아주 예스런 말투이다. 오늘날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언뜻 보아 명령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소망이다. 이 소망의 느낌은 ‘지’라는 말에서 얻을 수 있는데, 우리말의 ‘천년 만년 살고 지고’라는 말 등에 나타나는 ‘지고’라는 말과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든 명령은 소망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령을 하게 되지, 그렇지 않다면 명령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이 말은 그것이 명령으로 해석되든 소망으로 해석되든 상관없이 결국은 사도 바울이 그 편지를 받아보게 될 사람들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소망을 나타낸 말이 된다. 그런데 이것을 비약하여 목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선포권을 위임받아 행하는 복선포라고 풀이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결국, 이런 결론이 나온다. 예전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을 처음 번역하고, 축도라는 일을 처음 시작하던 때에, 복의 선포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순수한 의미에서 ‘축도’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부터인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우리 나라의 목회자들이 ‘축도’를 ‘복선포’로 바꾸어 버린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