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질서 보전과 교회의 과제
- 목 차 -
I . 머리말
II. 성경에서 말하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1. 전통적인 기독교 인간 중심적 세계관
2. 생태계 위기의 원인
3. 창조신앙의 바른 세계관
1)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2) 세계의 소유권과 처분권은 하나님께
3)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계
4. 자연과 인간의 관계
1) 자연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매개
2) 인간은 자연의 한 일부
3) 인간은 자연의 위임 관리자
5. 인간은 자연과 공동운명체
II. 창조질서 보전과 교회의 과제
* 참고문헌
I . 머리말
오늘날 지구촌이 당면한 환경문제는 이제 더이상 어느 한 국가, 한 지역의 문
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즉 땅
과 하늘, 그리고 나무 등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자연이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세계적인 환경단체의 하나인 그린 피스(Green Peace)는 그 위험을 지적하
면서 "4시간 전에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났다고 가정할 경우, 1시간 전에 산업혁명
이 시작되었으며, 생물학적으로 60초 동안 현대 인간은 이 지상낙원을 쓰레기장으
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교회는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가? 교회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근본적 가치는 무엇이며, 이 가치가 교회 안에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으며, 이들 가치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인의 신앙형태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하
는 의문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 글은 자연을 인간의 지배대상으로 보아온 기독교의 인간중심 세계관
의 잘못을 극복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자연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가 어떠한가를 밝
힘으로 오늘날 문제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의 길을 모색
하고자 한다.
II. 성경에서 말하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1. 전통적인 기독교 인간중심적 세계관
성경에는 시편 8편과 같이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지지하는 구절이 있다. 그러
나 창조신앙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중심의 세계
관을 말한다. 그럼에도 생태계의 파괴와 위기에 대한 근본원인이 '소위 기독교
의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세계의 탈신화화, 세속화가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접
근과 연구를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이를 통하여 자연세계를 보다 더 자유롭게 변형
시키고 자연파괴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데에 기여{{ )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P.29.}} 하였다고 비판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비판하는 소위인간중심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천지창조에 관한 본문은 창세기 2:4 하반절부터 2:24까지의 기록과 창세기
1:1-2:4 상반절까지의 두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둘 다 똑같이 사람은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할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은 존
재로 나타나며 자연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러한 창조이야기에 근거하여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가르
쳤다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요 정점이다. 세계는 인간 아래에, 인간
의 주변에 있으며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인간은 세계의 '소유자이며, 지배
자'이다. 인간이 '창조의 완성'이요, '만물의 척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 이러한 소위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창조신앙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고 주장한다.{{ ) Ibid., PP.22-23.}}
(1) 창세기 1:26-27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의 창조는 다른 피조물의 창조와 구별
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에서 유래하는 특별한 행위이며, 창조의 정점이다.
(2)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분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보다
우월한 존재,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3) 창세기 1:28의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구절은 하나님이 세
계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정복하다'라는 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소유권의 표시로서
자기의 발을 그 대상 위에 올려 두는 것을 뜻한다. 또한 '다스리다'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소유하다', '자기의 것을 삼다', '짓밟는다'는 것을 뜻한다. 전통
적으로 신학은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인간을 세계의 '지배자와 정복자'로 해석
하였으며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가르쳤다.
(4)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3:19)는 말씀에서 이
름을 정하여 준다는 것은 먼저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뜻한다.
(5) 세계의 모든 것 안에 신성이나 마성이 들어 있다고 믿을때, 자연세계는 인
간의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창조이야기는 이러한 신화적 세계
관, 자연 종교적 자연관을 거부한다. 곧 자연 속에는 아무런 신적인 마력이나
신성이 없다. 자연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 불과하며, 인
간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인간에게 맡긴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은 이것을
다스릴 수 있고 정복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창조신앙은 세계에 대한 '과학
적 사유의 기초'를 마련하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탐구와 분석이 가능하
게 되며, 인간의 편리를 위한 자연의 자유로운 변경과 파괴와 착취가 가능하게 된
다.
2. 생태계 위기의 원인
기독교의 소위 창조신앙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을 우리는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에 대한 원인을 유대교-기독교의 창
조신앙에서만 발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전하여지지
않았고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던 때에도 동물들이 멸절되었고 자연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물리학과 과학기술을 통한 자연의 이용과 파괴는 기독교가 서구에서 지
배적 권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 Ibid., PP.29-30.}}
특히 근대 이후로 자연과학은 연구의 대상 곧 자연을 객관화시키고 분석하며,
개체화시키고 가장 작은 부분으로 환원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대상에 대한 '지배'와 대상의 '이용'을 그 목적으로 가진다.
이 방법은 철저히 주객도식(Subjekt-Objeckt-Schema)에 근거한다. 이것은 인
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사귐과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서
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주체와 대상이 분리될 때 소위 '객관적'인
식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된다. '근
대철학의 시작자'라고 불리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세계를 정신
과 물질, 주체와 객체로 나눔으로 이 원리를 형성하였다.{{ ) Ibid., PP.40-44.}}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이렇게 데카르트
적 이원론 곧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을 그 정신적 배경
으로 삼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생태계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있다고 하겠다. 가능한 한
많이 소유하며 소유를 통하여 자기를 확장하려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생태계의
위기에 대한 가장 근본적 원인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
욕망은 소유와 소비와 향락과 힘의 소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현대인의 가치관으
로 나타난다.{{ ) Ibid., P.49.}}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된 모습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생태계의 파괴와 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창
조신앙의 소위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있지 않다. 사실상 창조신앙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다. 소위 말하는 창조
신앙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창조신앙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였던 근대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적응하고 이를 조
장하기 위하여 교회와 신학이 만들어 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Ibid., P.32.}}
그러면 창조신앙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세계관은 무엇인가?
3. 창조신앙의 바른 세계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말한다.
자연의 세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계의 중심은 인간
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것은 인간의 뜻에 따라 지배되고 정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지되어야 한다. 세계의 소유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세계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
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김용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 [기독교 사상] 제393권(1991.9), p.59.}}
1)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하나님의 창조'로서의 세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그의 존재의 '유래'와 '의
존성'을 창세기 1장은 다음의 세 가지 단어를 통하여 나타낸다.
{{ ) Op.cit.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p.71.}}
첫째, '창조하다', '짓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bara'는 신학적으로 특별
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 김이곤,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0), p.19.}}
그것은 하나님만이 주체인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키며,
'무에서의 창조'이며 그 창조의 대상은 하늘과 땅, 인간, 이스라엘 백성이다.
둘째,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다. 창세기 1장은 일곱
번 "하나님이 가라사대...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1:6,9,11,14,20,24,26)는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가라사대'(dabar) 곧 '말씀'(dabar)이라는 단어는 하
나님의 창조행위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세계는 우연히 있게 된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으로 있게 되었다.
세째, 세계는 하나님의 '복 주심'과 함께 있게 되었다. '창조의 복'은 물속의
생물과 공중의 생물과 인간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 전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의 세계 속에 존재의 세계를 세우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없을
때 그것은 파멸의 위협을 당한다.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인식한다는 것은 세
계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 Op.cit.,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pp.71-73.}}
2) 세계의 소유권과 처분권은 하나님께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다면 세계의 본래 소유자는 인간이 아니
라 하나님이다. 그것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를 인식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함을 말한다. 하나님이 세계의 소유자라면, 자연을 포함한 온 세계
안에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세워져야 한다. 따라서 자연의 세계를 자기 마음
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생각이요 창조신앙에
모순된다. 인간은 자연의 세계를 사용할 수 있는 사용권만을 가질 뿐이며, 이
사용권도 모든 피조물이 '그 종류대로' 평화롭게 사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
라 집행되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생물들의 종을 단절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처분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요 침해이다.{{ ) Ibid., pp.73-75.}}
3)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계
대부분의 자연종교와 종교사상들은 이원론적,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
다. 즉, 눈에 보이는 이 세계 곧 차안의 세계는 허무하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는 영원하고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구원은 차안의 세계를 떠나서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차안의
세계는 인간이 잠시 있다가 떠날 세계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자연종
교들은 '세계의 구원'을 가르치지 않고 '세계로부터의 구원'을 가르친다. 이에
반하여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이 세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계라고 말한다.
'좋다'(tob)라는 히브리어는 '아름답다'라는 의미도 지닌다. 조화되어 있고
이지러짐이 없는 그러므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이다. 그것은 부
정이 아니라 긍정을 뜻한다. 이 세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이 세계
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과 '기쁨'을 말한다. 현재의 세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계', 하나님이 긍정할 수 있는 세계, 하나님이 기뻐하는 세계로 구원되어
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태초의 창조는 이 세계가 거꾸로 돌아
가야 할 과거라기보다 이 세계가 지향해야 할 미래 곧 종말론적 목표를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에 대한 근본원인은 창조신앙의 세
계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관의 잘못된 해석에 있으며 근본적으로 인
간의 이기적 욕망에 있는 것이다.{{ ) Ibid., pp.75-78.}}
창조질서 보존과 교회의 과제 2
4.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사유에 대하여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켜 우리
는 '자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을 자연에 대칭시킨다. 그러나 창조이야
기에 의하면 인간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에 하나이다. 그는 '자연 위
에' 있는 존재라기보다 '자연 안에' 있는 존재요, '자연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
는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의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특성을 나타내 보여 왔기 때
문에(롬1:20). '자연'은 감추이신 하
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충분한 자기 계시의 매개로서
능히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1) 자연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매개
시편 19:1-6은 '자연'이란 비록 인간의 귀에 들려지고 소통되는 언어를 갖고 있
지 않으나,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알려 주는 신비한 기능을 갖고 있다고 증언한
다. 그런 자연의 언어 또는 자연의 증인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폰 라트
(G. von Rad)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지혜의 전승'에서 찾는다. 즉 창조물인
자연은 창조주를 '찬양하는 지혜'를 갖고 있고 그 지혜를 '인간에게' 가르친다는
것이고, 인간은 그 자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찬양)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물(자연)의 하나님 증언은 하나님에게가 아니
라, 어디까지나 인간에게로 향해진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연의 증거(지혜)를 통하여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특성을
인식하고는 놀라움에 차서 그를 찬양하게 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 자연의 증거
를 통하여 인간의 허약성을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연의 증거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dignity/majesty)을 인식하게 된다고 하겠다. 이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대표적 전거(전거)는 역시 시편8편이다.
2) 인간은 자연의 한 일부
창세기 1-2장에 서술된 창조에 관한 두 이야기는 주석적 관점에서 볼때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요 동시에 자연의 한 일부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하겠다.
창2:4b-25에 의하면, 인간 아담은 땅('adama)의 먼지('apar)로 (히브리원문:개역
성경은 '흙으로') 부터 만들어졌다.(창2:7). 오래 전부터 먼지와 재의 의미는
'미천함'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미천함을 표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반면
'adama는 인간과 흙 사이의 발음상, 그리고 내용상의 연관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흙으로부터 먼지', 즉 흙먼지라는 이중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했다.
고대 히브리인은 오래 전부터 인간을 피조물인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았
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와서 땅으로 돌아가는, '땅에 속한 존재'로서, 결코 자
연과 마주 대하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연의 한 일부로서 존재할 따
름이다. 인간이 땅이고 땅이 곧 인간이며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을 볼 때 인간을 보듯 보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즉 인간
이 병들면 자연도 병들고 자연이 병들면 인간도 병든다. 창세기 3:17의 "땅은
너(아담)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한것은 이러한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이렇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땅은 불가분리적 동일본질성을 가지고 있
는 것이다.
3) 인간은 자연의 위임 관리자
성경의 역설성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면서 동시에 그 인간을 또한 동일본질
의 자연을 하나님의 위임에 따라 관리(통치)하는 자(하나님의 형상)로 본다는 점
이다. 창세기2:15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아바드='섬기
다') 지키는(샤마르)'일을 맡기셨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철저히
'관리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동산을 돌보도록 동산에로 옮겨졌다는
것은 그가 봉사하도록 부름받았으며, 그의 소유가 아닌 한 영역에서 자신을 입증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을 파손시키고 또 공해를 유발하여 생태계
의 변화를 일으키는 자연정복의 행위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는 일, 즉 자
연을 '다스리고 지키는 일'은 결코 아니라 하겠다.
또한 창세기 1:26-28에 나오는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표현도 기독교의 소위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근거로 매우 많은 오해를
받아 온 것이므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1:26)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연을 다스리는 자'로 세웠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스리다'라는 히브리어 'radah'는 구약성
경에 있어서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욥기4:13에서 이 단어는 포도주 압착
기를 누르는 뜻으로 사용되며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적을 쳐 부순다, 적은 제
어한다(느9:28), 강제노동을 통하여 노예를 억압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것
은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무제약적 통치'를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자연세계의 통치자로 창조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스리다'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는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의 행복을 위하여 '돌본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인간이 세계의 통치자로 세움을 받았음은 사실이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는 땅과 그 위에 모
든 것을 다스려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지만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소
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 착취할
수 없다. 이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침해이다.
인간은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고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소유자가 아
니라 하나님의 전권을 수임받은 자 혹은 '하나님의 대리자'에 불과하다. 하나님
의 대리자로서 인간은 자연세계의 질서를 세우고 이 세계를 돌보며 보호해야 한
다. 하나님은 그가 지은 자연의 세계가 착취되고 파괴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이 세계가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원한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
을 통치자로 세우셨다. 따라서 '다스리다'라는 말은 '종으로 삼다', '억압하
다', '파괴하다', '없애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장려하다', '돌보
다', '가꾸다', '보호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다스린다는 것은 '섬김의 한 다른
형식'이다.
창세기 1:28의 '정복하다'(Kabas)라는 말도 'radah'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인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전쟁을 통하여 나라를 정복하다(민32:22,29, 수
18:1), 백성을 예속시키다(삼하8;11), 주민들을 노예로 삼다(느5:5, 대하28:10,
렘24:11,16), 여자들을 강간하다(에7:8)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땅
을 정복하라'는 구절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제약적인 지배를 허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성경의 창조신앙은 '자연에 대한 정통 기독교적인 교
만'을 초래하였으며 '기독교의 무자비한 결과들'을 유발하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는
구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복 주심이
다. '정복'은 인간이 자연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
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피조물들의 평화로운 공생을 뜻한다. 따라서 이 말은
자연세계를 마음대로 파괴하고 착취해도 좋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의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한다. 어떠한 피조물도 파괴되어서는 안된다.
몰트만은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땅의 통치'로서 가르쳐 온 지배의 명령과는
관계없이 음식물에 대한 명령이라 보았다. 즉 인간은 동물과 함께 땅의 식물과
나무들이 생산하는 열매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평화의
지배를 뜻할 뿐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기능은 평화의 심판자의 기능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통치자, 지배자를 독재자, 폭군으로 생각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고 억압할 수 있으
며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자연 종교들은 이러
한 지배자상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지배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파괴하고 억압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 '함께 고난을 당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
배 형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예수
는 철저히 '섬기는 자'로 나타난다. 그는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
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막10:45).
이러한 하나님의 지배 형식을 고려할 때 우리는 창세기 1장이 말하는 자연에 대
한 인간의 '지배'와 '정복'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파괴와 착취가 아니라
자연을 위한 인간의 '섬김'과 '고난'을 뜻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
동산을 섬기고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당해야 한다. 그는 땀을 흘리며 에덴 동산
을 위하여 노동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십자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고난에 상응해야 한다.
5. 인간은 자연과 공동운명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있는 동일본질적 결속관계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리 책임
은 인간의 범죄 이후 파괴되어, 모든 세계도 인간의 범죄로 인한 저주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다. 그러한 모습은 창세기 3:15-18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뱀과
하와에 대한 심판의 선포 후 아담에 대한 심판은 직접 아담에게 내리지 않고 그
대신 '땅'에 내려졌다. 즉 아담의 범죄가 곧 '아담(인간)과 아다마(땅=자연) 사
이의 소외'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의 고향 (땅의 먼지)으로 돌아
가는 그 순간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비로소 곡식을 얻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다(창3:19).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먼지로부터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자연의 환
순환속에 결부된 '하나의 몸' 안에 있고, 공동운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자연(땅)이 저주를 받았으며 인간의 회복과 더불어 자연도 또
한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친구'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인간이 그 곳에 포함되어 있는 '공세계'이며 인간의 '본향'이다.
또한 자연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보여 준다(로마서1:18-23).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담고 있어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되고 있다.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로 경외하지 않을 때 인간의 생명도 자연의
경외를 받을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증오하고 파괴할 때, 그는 언젠가 그 자신
이 심은 씨앗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인간 자신도 자연에 속하며 자연없이 존재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에 있어서 인간의 특별한 위치'는 지배자의 위
치가 아니라 '섬기는 자', '다른 자들을 위한 존재'(본회퍼), 타자를 책임지고 고
난의 길을 택하는 '대리자'의 위치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II. 창조질서 보전과 교회의 과제
이와같이 인류가 사는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생물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창조된 세계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운동을 교회가 앞장서서 전
개해야 한다.
1) 공기를 살리기 위한 노력 : 공기를 맑게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
의 삶을 맑게 하는 것이다. 맑은 공기를 위해서 나무를 가꾸고,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모든 곳에 푸르고 큰 나무들이 있게 하여야 된다. 모든 빈공간은 잔디나
잡초로 덮이게 하고 가능한 한 보리를 많이 심어야 한다. 소극적으로 공해는 정
책적으로, 시민운동으로서 줄여야 한다.
그뿐 아니라 공기를 오염시킬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폐품은 어디든지 버려서는 안
된다. 차를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매연을 최소화하고, 그 매연을 자신이 마시
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 물을 살리는 길 : 물은 사람들의 방심과 실수들이 묶여져서 의외로 속히 죽
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산업종사자들의 방심으로 비가 변해 산성비가 되
며 일반가정의 무심한 세제들이 모아지고 모아져서 생활폐수의 하천을 이루고, 그
것이 유입되는 강은 죽음의 강이 된다. 물론 공장폐수를 버리는 악덕기업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경비가 들고 더디더라도 정화시설을 의무화하며 물을 살려야
우리의 삶이 보장될 수 있다.
물이 귀중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이 아껴쓰는 일은 어린 시절부터 성년에
이르도록 생활화하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3) 토양을 지키는 길 : 메뚜기가 없다는 말은 농약이 주는 무서운 영향중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농토에 투여되는 모든 종류의 화학의 산물은 적어도 장
기적인 안목으로는 농토의 적이다. 인간의 기술이 초현대적으로 발달한다 하여
도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먹이'는 토양과 연관되어서만 얻
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불변의 이치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가 자기 땅을 곡물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도록 지키는 일은 지상과제이며 지혜 중의 지혜이다. 이
사실을 모든 교회가 모든 방법으로 가르치고 구체화하여야 한다
4) 쓰레기로부터 지구를 자유케 : 소비문화의 부산물인 쓰레기 문제는 우리 사
회의 큰 짐이 되고 있다. 특히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습관이 산하를 멍들
게 하고 있다. 쓰레기가 통제되지 않는 한 생활환경이 제대로 되지 못할 것이
다.
천삼백만 신도가 쓰레기문제를 앞서 고쳐가면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사회가 쓰
레기의 짐을 벗고, 지구가 쓰레기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존재케 된 피조물을 그리스도의 은
총으로 회복시키는 사명으로 참여해야 하며 이것은 곧 생명을 사랑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나름의 특색과 장점을 살려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한다. 잘못된 침묵과 우유부단한 행동이 죄를 잉태할 수도 있다는 것
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의 교육및 인재양성의 노력이 매우 중요하고, 생명운동
에 대한 공감대 형성, 교회영역 안에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는 그룹과 시민운동의
위치는 물론 예배에서의 창조의 축제는 머지않아 잠자는 양심들을 일깨워 기독교
적 공헌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중개와 화해'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
며 또한 감당해야 한다. 교회에 기대되는 것은 가장 약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
의 변호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가 '희망'을 전
달하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책임의 인식이 묵시문학적 불안 때문에 저해되지 않
았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을 신뢰하
면서 인간의 창의적 능력을 발견하고 진작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당면과제들을 놓고 실천을 위한 방향성 차원에서 교회가 염두에 두어야
할 측면이 있다.
첫째, 파괴되어 가는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보전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인간성이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가
지 실천적 프로그램과 운동도 필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가치
관과 의식이 변화하지 않을 때,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수고와 노력들은 끝
없는 악순환을 거듭할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인
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이웃과
자연, 이 세계가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임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의 용서와 화해의복음을 전하고 이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
야 한다. 세계의 운명은 인간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하나
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해야 한다면 먼저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은 이 세계에 집착하지 않지만 이 세계를 포기하
지도 않는다. 그는 자연을 단순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로
보며 하늘과 땅과 동물과 식물에 대한 자기 책임을 깨닫는다.
둘째,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한국적 상황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
는데 그것은 경제정의 문제이다. 즉, 창조질서 보전의 범주 안에 정의와 평화의
문제가 포함된다는 말이다. 경제정의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생태계의 문제에 대
해서만 말하는 것은 있는 자를 위한 하나의 사치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는 것
이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깨끗한 환경보다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과 몸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돈일 것이다. 근본
적으로 생태계의 보호는 경제정의의 실현과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며,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자연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생명이 보전되어야 한다.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
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자연의 보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모든 불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가 국제
적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샬롬의 회복 - 인간성 회복과 창조질서 회복 -
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아담과 하와나, 바벨탑을 쌓은 옛사람
들처럼 우리 안에 내제하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에서부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다른 생
명체와 우주를 바라보며 이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 땅에 친절을 베풀며 '더
불어 사는 지구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방향성 속에서 교회는 앞서 언급한 구체적인 실천과제들을 하나씩,
작은 일에서부터 행동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창조질서의 파괴문제는 피할 수
없는 천재가 아니라 인재임을 자각하고 '생각은 범 지구적으로, 실천은 구체적인
작은 일부터'해나가야 한다. 창조신앙의 바른 회복을 위해서, 창조지향적 목회
를 위해서, 생명운동을 실천하는 각각의 교회들이 되기 위해서, 구조적인 문제를
풀기 위하여 제사회단체와의 유대를 위해서, 그리고 늘상의 삶 속에서 생명지향적
인 삶을 살기 위하여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의 자세로 그 실천의 발걸음을 내딛
어야 하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갖고
'지금 여기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눅16:10)해야 한다. 이 땅에서 충실하
게 땅의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만 새 하늘과 새 땅이 맡겨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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