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믿음의 구별
‘신앙'(믿는 것)과‘믿음’은 같은 말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1. 사용빈도 구약성경 전체에서 ‘믿는 것(희브리어-아만)’은 창세기 15:6절에서 시작해서 하바국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에 걸쳐 나옵니다. 반면에 ‘믿음(희브리어-에무나)’은 하바국2:4절에 단 한번만 나오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신앙(헬라어-피스튜오)’과 ‘믿음(헬라어-피스티스)’라는 말로 바뀌면서 ‘믿음’은 ‘믿다’라는 말을 어원으로 하면서 구약에서 단 한차례 사용된 것과 달리 여러 차례에 걸쳐 사용됩니다. 2. 용어의 정의 가. 신앙 이는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신뢰’하다는 뜻으로 비록 헬라어와 희브리어가 다르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같습니다. 나. 믿음 반면에 ‘믿음’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믿다’에서 파생된 명사 정도가 되지만, 구약에서는 ‘믿다’와는 확연히 다른 독립적인 ‘명사’로 단 1회 사용되었습니다. 3. 신앙과 믿음의 차이 구약성경에 있어서 ‘신앙’과 ‘믿음’은 ‘아만’과 ‘에무나’로 확연히 구분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와서는 어원 등을 거슬러 따지면 사실상 ‘신앙과 믿음’은 같은 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신앙’과 ‘믿음’은 절대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몰라 ‘신앙’과 ‘믿음’을 같은 것으로 치부하여 왔던 것 같습니다. 가. 믿음이란? 1) 믿음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성경을 찬찬히 보면 ‘믿음’도 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단계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8절에서 “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15절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그 이유를 “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로마서 1:10 - 12)” 설명합니다. 위의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 좀 이상합니다. 바울은 분명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하나님께 그것으로 인해 감사했다고 합니다. 평소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로마서 15:20)” 이 말씀대로라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평소 자신의 원칙과 달리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거기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줌으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견고케 하여 바울과 로마에 있는 성도 피차 간에 위로를 받기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보면, 분명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있었으나, 그 ‘믿음’은 불안전하여 로마 성도들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나눠주려고 하는 ‘신령한 은사’는 바울 속에 있는 ‘믿음’임을 “신령한 은사를 나눠줌으로써 너희와 나 사이에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니라”라고 말한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로마에 있었던 성도들에게도 분명, 믿음이 있었으나, 그 믿음은 바울 속에 있는 믿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기에 바울은 그들의 불완전한 믿음을 복음을 전함으로 자신의 믿음과 같이 완전한 믿음으로 세우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1:17절에서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말하므로, 믿음은 다 같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단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2) 믿음도 3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 성막을 통해 영적인 단계가 3단계가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영적인 단계가 곧바로 ‘믿음’의 단계입니다. 성막이 성전 뜰, 성소, 지성소로 되어 있는 것처럼 믿음도 성전 뜰에 해당하는 율법을 통해 갖는 초보의 믿음(예수에 대한 믿음), 성소에 해당하는 믿음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지성소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믿음’은 말씀(복음)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23-2:2)“ 바울도 믿음은 말씀(복음)의 단계에 따라 자라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일반적으로 신앙?이라 함은 어떤 대상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때로는 사람의 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뢰하는 상태를 가리켜 ‘믿는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믿는 것’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귀신들로 믿는다고 합니다.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야고보서 2:19) 또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믿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요한복음 2:11) 하지만, 이때 제자들은 구원에 이를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다음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복음 2:22) 분명, 앞에서도 믿었고 뒤에서도 믿었는데 앞에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었고, 뒤에 믿음이 참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믿음과 신앙이 다름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면, 앞서 말씀드린 내용에서 요한복음 2:11절의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었고, 2:22절의 믿음은 참 믿음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신앙의 대상의 차이입니다. 2:11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믿은 것이고, 2:22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특정한 대상을 신뢰함으로 ‘믿음’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참 신앙으로 얻는 참 믿음 이상에서 신앙과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믿음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참 신앙과 참 믿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를 향해서도, 돌이나 나무 등을 향해서도 얼마든지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바가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이 아니면 참 믿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고 해서 ‘참 믿음’이 모두 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집사 빌립이 사마리아 지역에 내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남,녀의 무리가 병고침을 받고 빌립이 전하는 도를 믿습니다. 그 중에 마술사 시몬도 있었습니다. 그도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신앙하여 ‘믿음’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그리스도의 세례가 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돈으로 그 능력을 사고자 함으로 베드로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습니다. 이로 미뤄보면 분명 외모로 보았을 때 마술사 시몬은 바른 신앙을 하여 바른 믿음을 받은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야고보의 말처럼 귀신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바른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바른 신앙을 해야 합니다. 즉,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갈라디아서 2:16절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예수를 믿으면 세상과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와 진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이제 세상에서 율법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다음, 예수를 믿어 이제 율법에 들어 왔다면 율법(몽학선생, 예수)의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전 뜰 단계의 믿음이고 거기서 진리의 지식에 해당되는 돌 항아리 여섯의 말씀을 아구까지 채워 성령의 세례를 받아 주는 그리스도시오, 본질의 죄는 육체임을 알면,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단계로 나아가고, 이후 출산이 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완성단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상에서 ‘신앙’이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얻게 하는 수단이요, ‘믿음’이란 ‘신앙’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에는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말씀을 통한 신앙의 대상을 달리하여 각 단계에 따른 믿음을 갖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주는 믿음은 ‘예수’를 신앙해서 얻는 단계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마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제 세상에서 성전 뜰로 들어와 율법을 듣는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듣고 배우며, 돌 항아리 여섯을 아구까지 채운 후,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성소로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리스도 영(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주, 아들)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다시 돌 항아리 여섯을 아구까지 채운 후, 출산이 되어 지성소로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행전 29장과 같은 말씀을 받아 먹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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