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의 형성
신약성서도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문서들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인공캡슐에 넣어져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기문서가 아니라(非역사적 문서) 역사 위에 씌여진 즉, 다시 말하면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해석되고 기록된 책들이 오래고 또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집성되어 이루어진 문서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될 상식이있다. 초대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여 나갔다. 그러면 어째서 신약성서가 기록되었으며 언제부터 기독교 경전이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이 글을 살펴보자.
(1) 제 1 세기 교회는 신약 정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그들의 감격과 신뢰감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또 다른 성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
2.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目睹)하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신자들도 많았고, 적어도 그 목격자들의 생생한 보고와 증언을 들으며 거기에 도취하고 감격하여 살았으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에 대한 어떤 기록의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3. 신약성서의 문서화 이전에 '복음 사건'에 대한 해석 시대가 있었다. 이런 해석이 문서화되어 신약성서가 형성되기에 앞서서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구두 증언과 사색의 시기가 얼마동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4. 사도 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 정경이 곧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영구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화 작업은 불필요 하다고 여겼다.
5.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은 후 초대 교회는 실상 구약성서나 어떤 문헌에 의존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6. 인쇄술이 발명되지 못한 그 시대에 있어서는 특수한 사정 이외에는 글을 써서 남겨 둔다는 것이 극히 어렵고 드문 일이었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와 필요성이 없이는 신약 문헌이 생겨날 수 없었다.
(2) 구두 전승의 신빙성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 사화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사"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 :
1. 옛날에는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싶으면 부득불(不得不) 머리 속에 기억해 두는 길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히브리인들 특히 랍비들은 성경을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고대에는 한 번 들은 것을 잊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우리들보다 훨씬 적었다고 볼 수 있다.
2.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은 아주 초기부터 어떤 개인의 기억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공동적 기억에 근거하여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어 거의 변함없이 구전 시대를 통과했다.
(3) 구전 시대의 종결과 신약 문서의 형성 개시
1. 사도들과 예수 사건의 목격자들이 영구히 살아 있을 도리는 없었다. 주후 70년 경에는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죽어버렸고 따라서 그들의 생생한 증언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사도들의 산 음성이 사라지자 그것을 보충, 대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문서화된 복음서들이었다.
2. 기록된 문서의 가치가 문화적 세계로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매우 큰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3. 기독교가 요원의 불길처럼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어 갈 때, 조급한 심정으로 땅 끝까지 가서 증거하려는 선교사와 전도자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에 제일 좋은 방법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글로 적어서 남겨두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 내용의 문서화는 선교 과정에 있어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4. 그리스도의 급박한 재림을 기다리다가 수십 년이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지금까지 급박한 종말신앙 때문에 소홀히 하던 장래의 교회 문제에도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교회를 위하여 문서화된 말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다.
5. 초대 교회는 거짓 복음들과 왜곡된 신학과 비윤리적 윤리를 판단하고 가려내기 위해서 표준적이고도 공적인 문서 복음이 요구되었다.
6. 교회는 호교적인 목적으로도 문서가 필요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였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필요로 하였다. 둘째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우선 로마 정부로 부터 예수가 누구인지를 확신케 하기 위해서 문서화 할 필요가 있었다. 세째로 전도자들이 전혀 사상이 다르고 이해의 영역(사고의 출발점 cf. 일원론과 이원론)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상 전달의 방법으로서 문서를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했다.
7.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하고 표준을 찾기 위해서 문서화된 복음들이 요구되었다.
8. 일단 교회가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발전되었을 때에는 그 사회의 습관을 따라 예수의 고귀한 생애와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기록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과 생애가 무엇보다도 귀중하며 잃어서는 안 될 것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문서화 될 수밖에 없었다.
9.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낡은 계약의 책, 즉 구약 책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새 계약의 책도 필요로 하였다. 그러므로 새 계약 시대에 신약성서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0.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신도들의 예언활동이나 방언활동들을 판단하고 탈선적 행동을 규제하려는 목적으로 불안정한 구두 발언보다는 좀 더 신빙할 만하고 표준된 聖문화된 복음서가 요구되었다.
11. 신약 문헌의 대부분은 어떤 개체 교회 혹은 교회의 작은 단체를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교회들은 이 편지들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생활의 여러가지 위기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참 좋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침내는 그 문헌들이 수집되고 또는 널리 반포되어 결국 정경(Canon)에 포함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4) 복음의 형식
구전 시대에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이 단편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근자의 신약학자들은 이렇게 고정된 이야기들과 교훈 자료들을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하여 취급한다.
1. 첫째 형식을 범례(凡例) 혹은 경구(警句), 또는 선언적 이야기라고 한다. 이 형식은 예수의 몇가지 중요한 격언적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토막 교훈들이 복음서에 산재해 있다고 본다.
2. 둘째 형식은 설화 또는 이야기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예수가 하신 말씀 보다도 그가 행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있는 것들이다.
3. 세째는 교설(敎說)이라는 형식이다. 이것들은 어떤 전후 관계가 없이 고립적으로 보존된 예수의 말씀들이다. 그리고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말씀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다.
4. 다음은 성전(聖傳)이라는 형식이다. 이것은 어떤 성인이나 성소와 관련된 비상한 사건들에 대해서 교훈 할 목적으로 기록된 이야기들을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비상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비상한 인물이 언제나 거기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5. 다섯 째는 신화(神話)라는 형식이다.
이와 같이 학자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을 여러 가지의 문학형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으로 초대 교회에 유포되고 고정되어 있던 자료들을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편집되었다고 보고있다.
(5) 신약성서의 실제적 출현
구전 시대가 지나고 문서 운동이 시작되자, 기독교 문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 27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약성서 이외에도 다른 많은 복음서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문서들 중에서 어떤 것은 성서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버림을 받았을까? 어째서 어떤 문서는 아주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또 어떤 것은 사사롭게나마 읽을 수 있도록 용납되거나 추천을 받았을까? 그리고 어째서 어떤 문서들은 마침내 완전히 신약 성서에 끼어 들 수 있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다는 오직 한가지 이유때문이다. 일단 어떤 책이 공중 예배에서 낭독되기 시작하면 그 책이 정경이 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예배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읽지 않아야 할는지 결정짓는 일은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교사들과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령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과 성령 감동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표준으로 하고 책들을 판단하였을까?
그 표준은 그 책이 사도적 권위를 가졌는가 아닌가에 두었다. 다시 말해서 그 책이 어떤 사도의 저술이든지간에 적어도 사도들과 직접 접촉하던 사람들이 쓴 것이라야 했다.
(6) 사도적 권위의 정당성
초대 교회가 사도적 저작권을 정경 선정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몇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1. 히브리 사상에 있어서 보냄을 받은 자는 어떤 의미에서 보낸 자와 동등하다고 생각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도는 예수의 최고 대표자들이요,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최고의 기관인 바 교회에서 사도들의 말은 예수의 말씀처럼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권위가 부여 되었다.
2. 초대 기독교 내에 왜곡된 복음과 이단들이 잠입해 들어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많이 변질되고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들이 참이고 거짓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도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글이 진성정 문제의 시금석이 되었고 그들의 글은 자연스럽게 권위를 가질수 밖에 없었다.
(7) 바울 서신의 집성(集成)
이제 신약 성서가 집성되는 실제적 과정을 상세하게 검토 해 보자.
바울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어떤 지방 교회의 잠정적 형편을 다루어 취급하면서 편지를 썼다. 바울의 편지들은 어떤 서재나 도서관에서 조용히 앉아 연구하여 작성한 신학 논문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특정한 시간에 어떤 특정 교회가 당면한 급박한 정황을 취급하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들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바울은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의 편지들이 수집되고 모든 교회의 공동적 소유가 되고 결국에는 정경화 되었을까? 바울의 편지들이 한 책으로 모아지고 온 교회의 소유물이 되어 마침내 성서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일까?
그 가능성에 대한 두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자연스럽게 성장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후 80∼90년 사이에 사도행전이 기록, 발표되는 일로 인해서 그 동안 거의 망각 되었던 바울이 초대 교회에 있어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각광을 받게되자 그가 쓴것은 남김없이 되찾아 연구하고 수집하고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8) 바울 서신 집성의 장소와 책임자
바울 서신들이 집성되어 발간된 장소는 주후 90년경에 에베소에서 된 일이라는 보는 견해가 학자들 간의 정설 정설(定說)이다. 그렇다면 이 뜻 있는 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얻을만한 역사적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두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는 '빌레몬서'를 매개로 해서 추리해 본 굿스피이드와 존 녹스의 가설이다. 그들은 빌레몬의 종 이었던 오네시모와 에베소 교회 감독이었던 오네시모를 동일인으로 본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나왔을 때 객지에서 바울을 만나 바울에게서 아주 친근하고 많은 도움을 받게된다. 그 오네시모가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고나서 자기가 사랑하고 또 자기를 사랑해주었던 상전 곧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출판하는 일에 착수했다는 가설이다.
둘째는 미국 침례교 학자 다나의 가설인데 바울의 사망이 그의 서신 수집의 계기가 됬을 것이고, 바울의 사망이 동기가 되어 다시 바울의 글을 읽게되고, 그것을 수집하기에 이르렀다는 가설이다.
(9) 복음서의 형성과 집성
복음은 우선 구두로 전달되었고, 전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직접 선포되었다. 그렇다면 복음서들이 오늘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 어떤 형성과정을 거쳤을까? 아마도 복음서가 형성되기 전까지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학자들이 이름 붙인 'Q자료' 같은 것이 있어서 마태나 누가가 자기들의 복음서를 쓸 때 자료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Q라는 것은 본래 자료라는 뜻을 가진 독일말 Quelle를 줄인 것으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Q외에 '증빙서'라고해서,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모아 놓은 성구집이 있다. 이와 같은 자료 문서들 외에도 누가, 마태가 개별적으로 특별히 참고했던 자료집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복음서가 기록된 이 후에도 많은 복음서들이 교계에 나돌았지만 4 복음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복음서 자체가 지닌 그 진리성과 권위가 독자들을 압도하고 강박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락할 수 밖에 없이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교회가 사도적 증언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에 4 복음서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문서로서의 위치를 견지하여 온 것이다.
(10) 그 밖의 책의 수집
사도행전은 4복음이 따로 수집됨에 따라 외롭게 독립되었다가, 마침내 예수의 생애와 서신이 기록되던 사이에 자연적으로 연결을 지어주는 책으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공동 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것은 상당히 후대 즉, 2세기 말 이 후의 일이었다. 계시록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고 인정되었었다. 그러나 2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묵시록(默示錄)들이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고 요한 계시록만이 교회에 광범위한 수락을 받았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11) 성경으로서의 인정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로 책들이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제 멋대로 판단하거나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사도적 저작인 동시에,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증적(自證的)인 품질이 독자에게 신언(神言)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좀 더 명확하게 어느 책은 성경이고 어느 책은 성경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자인 말시온의 운동때문이었다. 말시온 일당은 다른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담아내는 포장품의 역할로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 말시온은 주후 85년, 부유한 집안의 한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교회 지도자들과 교리싸움을 하고 고향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주후 140년경 로마에 사는 영지주의자 Kerdon을 만나면서 유대교의 창조설화 해석을 배우게 되었다. 말시온은 이러한 해석을 구약에 적용시키면서 구약과 신약의 神을 별개의 神으로 보고 신약 가운데서도 유대교 색채를 삭제시켜 "말시온 성서"를 만들게된다.
말시온은 제 멋대로 자기의 주장을 맞추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왜곡 해석 했으며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르고 붙였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개인이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화 작업을 착수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라는 신약성서 목록이다. 이 목록이야말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라 할 수있다.
이것은 주후 17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서 그 당시 교회가 성서로서 받아들인 책들이다. 그 목록에 나타난 책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 고린도 전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전후, 로마, 빌레몬, 디도, 디모데 전후, 유다, 요한1.2, 요한 계시록, 베드로 계시록이다.
2세기 중엽에 들어서 제도화 된 교회 시대가 시작 되었다. 교회는 이미 예언의 영(靈)이 역사화하는 곳이 못되고, 사람들이 교회로 마구 밀려들어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없어지고 말았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이방 사상, 문화, 철학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윤리는 이미 그 숭고성을 잃고 말았다. 이런 때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몬타누스는 스스로 자기를 약속된 보혜사라고 하며, 교회를 위하여 새 환상과 새 메시지를 가지고 왔노라고 주장하였다. 몬타누스는 이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니 성서는 수도없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마침내 성서를 마감하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2세기 말경에 교회는 신약 정경을 한정하고 원칙적으로 성서 산출이 이미 끝났다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서 채택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은 각 책의 사도적 저작권 문제 때문이었다. 그 후 3∼4세기 초에 걸쳐서 문제 된 책들을 체질하여 가려내는 과정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서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교부인데 그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을 실질적으로 모두 정경 목록에 넣었고, 그 이후에 정경 내용의 변화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정경 형성의 마지막 단계를 살펴보자. 주후 367년, 애굽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꼭똑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방에서는 어거스틴도 이 정경 목록을 지지하였고,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동방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교회의 정경과 동일한 정경목록을 가지는데 도달하였는데 수리아 교회는 22권만을 채택하였다. (cf. 베드로 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 제외) 지금도 동방 수리아 교회는 여전히 22권의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12) 신약의 기원
복음(고전 15:3, 4)은 초기에 구전을 통하여 전파되고, 구약 역사와 예언에 비추어 해석되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구전은 글로 기록되어 마침내 A. D 70 년 경에 영감적인 공관복음을 형성하게 되었다.
율법주의나 비 도덕주의와 같은 오류에 반하여 기독교를 정의 할 필요가 강조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교리적인 설명을 요하게 되었다.
바울서신과 그 외 일부 서신들이 이를 위해 기록되었다. 교회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개괄적 설명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다.
요한계시록은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기록되었다.
1) 신약의 정경화
정경화 이전의 초기 신약서들
제 1 클레멘스 로마의 클레멘스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A. D 96 년)로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정경의 권위가 있다고 인정되었으며, A. D 170 년경 고린도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낭독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이집트의 기록자들은 이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포함되어 있다.
제 2 클레멘스 역시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포함되었던 서신이다. 이것은 로마의 클레멘스의 것으로 잘못 간주되었으며 널리 읽혀지지 않았다.
이것과 제 1 클레멘스는 여전히 서방에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2 사도의 교훈집(Didach, 120 년 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일부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서 성경으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널리 회람되었다.
바나바의 편지(130 년 경) 시내 사본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집트에서는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히에로니무스(400 년 경)는 이것을 외경으로 여겼으며, 이것은 점차로 성경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해 갔다.
헤르마스의 목자서(140 년 경) 로마의 주교이자 피우스의 형제인 헤르마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것 역시 시내 사본에 수록되어 있고, 무라토리 정경(Muratorain Canon)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성경으로 인정받은 적은 없다.
베드로의 묵시록(145 년 경) 앞에서 열거한 책들보다는 다소 중요성이 떨어지나 동방에서는 매우 귀중하게 여겼고, 서방에까지 알려졌던 것이다.
이것은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허위 문서로 인정되었다.
바울행전(170 년 경) 널리 회람되었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정경으로 여겨 졌으나, 학자들의 연구 결과 외경적인 성격이 드러나 점차 정경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졌다. 사도들의 이름으로 이후에도 많은 복음서, 행전, 서신과 묵시록 등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명백한 허위문서로, 교회는 이것들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2) 신약 정경화의 원인
정경, 또는 반 정경으로서의 제 1 클레멘스서, 12 사도의 교훈집,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서 등을 인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동방에서는 3 세기 말 명확하게 제정된 정경의 필요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마르키온 이단(140 년 경)의 불 완전한 정경 역시 당시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마르키온은 영지주의자로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가운데 10 편 만을, 그것도 많은 삭제를 한 후 그들의 교리적인 근거로 삼았다.
정경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다른 외경적인 위문서들의 출현으로 정경을 명확히 제정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했다. 또한 후일 모든 성문서를 불사르라는 로마의 박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도 정경의 제정을 독촉했다.
3) 신약 정경성의 표준
그 첫째 표준은 "사도성"이었다.
기록자가 진실로 사도인가? 아니면 마가복음의 기록자나 누가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히브리 서신의 기록자의 경우와 같이 그가 사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둘째 표준은 "내용"이었다.
그 주제나 그 주제의 취급과 영적인 특징이 성경으로서 합당한가? 이러한 기준에 의해 위문서들은 제거되었다.
셋째 표준은 "보편성"이었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그 문서를 받아 들이고 있는가?
그 문서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는가?
넷째 표준은 "영감성"이었다.
그 문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딤후 3:16)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이것은 진실하다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는가? 이것이 마지막 기준이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었더라면 신약 정경은 올바르게 제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4) 정경으로 승인된 초기 문서
이 처럼 인정된 책들을 오리게네스(245 년)는「호모로구메나」("인정된" 또는 "승인된")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영감적인 성경으로서 널리 인정된 신약 문서였다. 오리게네스는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베드로 전서, 요한 1 서,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포함시켰다.
그는 히브리서를「호모로구메나」중에 넣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이나 정경적인 서신으로서 인용했다.
실제로 그가 성경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책들은 유다서와 요한 2 서.요한 3 서 뿐이었다.
교회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300-325 년 경)는「호모로구메나」가운데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 요한 1 서, 베드로 전서와 요한계시록을 넣었다.
그는 부 주의로 히브리서를 빠뜨린 것으로 보인다.
5) 초기에 문제시 된 신약 문서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시 되었던 책들을「안티레고메나」("항변되는" 또는 "논쟁되는")라고 불렀다.
이러한 책들 가운데 그는 히브리서, 베드로 후서, 요한 2. 요한 3 서, 야고보서, 유다서, 바나바의 외경적인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서, 12 사도의 교훈집, 그리고 히브리 복음서 등을 포함시켰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안티레고메나」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첫째 단순히 논쟁되거나 의문시 되는 문서로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 1. 2 서,
둘째 확실히 위조되었거나 영감되지 않은 문서로 바울 행전, 헤르마스의 목자서, 베드로 묵시록, 바나바 서신 그리고 12 사도의 교훈집.
6) 일부 신약 문서를 의심하는 이유
초기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일곱 권의 책들은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히브리서, 요한 2. 3 서, 유다서와 요한 계시록이었다.
몇몇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책들의 인정을 주저한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내적인 증거를 근거로 가지고 있었다.
첫째 야고보서와 유다서의 문체는 자신들을 사도로서가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요한 2. 3 서의 기록자는 자신을 사도가 아닌 "장로"로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히브리서는 기록자가 불명이고, 바울 서신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어휘나 문체가 다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은 기록자 불명은 아니지만 베드로 전서와는 어휘나 문체에 있어서 다르다.
셋째 또한 야고보서는 초기의 유대인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지 이방인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 된 것은 아니다.
넷째 유다서는 에녹(1:9; 5:4; 유 1:14, 15)의 외경적인 책에서 인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13) 서방의 정경 초기 형성
1) 로마의 클레멘스의 증언(A. D 96 년 경)
그가 로마 주교로 있을 당시 고린도 교회에 보낸 매우 정평있는 편지에서(제 1 클레멘스로 알려짐), 그는 마태복음, 로마서, 고린도 전서에 대한 지식을 보여 주며 히브리서에 대하여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다.
2) 마르키온의 증언(140 년 경)
영지주의 이단자로서 그는 다만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중 10 편 만을 인정했다. 다소 잘못된 점은 있으나 그의 증거는 계몽적이며, 교회가 현재의 신약 성경을 수집하고 인정하는 데 중요한 지표를 형성케 하고 있다.
3) 헤르마스의 증언(150 년 경)
그는 매우 정평있는 헤르마스 목자서의 기록자로서 마태복음, 에베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확증하였다.
4) 이레나이우스의 증언(40-203 년 경)
그는 청년 시절에 서머나의 폴리갑과 교분이 있었으며, 후일 고올 지방 리용의 주교로서 사복음서, 사도행전, 베드로 전서, 요한 1 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바울의 모든 편지와 요한계시록을 입증하였다.
5) 무라토리 정경의 증언(172 년 경)
이 단편 문서는 1740 년 밀란의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 이탈리아인 무라토리가 발견했다.
삭제 된 처음 부분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었다. 이것은 베드로 전. 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신약 문서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6) 170 년 이전의 고대 라틴어 역 증언
이것은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그리고 테르톨리아누스 시대 이전에 첨가된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문서들에 대하여 입증하고 있다.
7)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150-222 년 경)
이 카르타고의 다작의 라틴 작가는 사복음서, 13 편의 바울 서신, 사도행전, 베드로 전서, 요한 1 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바나바라고 하면서 이를 넣지 않았다.
8) 키프리아누스의 증언(200-258 년 경)
카르타고 주교로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빌레몬서, 야고보서, 요한 2. 3 서, 유다서는 인용하지 않았다.
(14) 서방의 정경 후기 형성
1) 히에로니무스의 증언(340-420 년 경)
그는 라틴어 불가타 역의 뛰어난 번역자이며, 명성 있는 학자로서, 우리가 소유한 신약 정경 모두를 증언했다.
그는 바울에 의해 히브리서가 기록되었음을 인정하였고, 야고보서와 베드로 후서가 어떻게 인정될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그의 견해는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증언(354-430 년)
히에로니무스와는 달리 그의 견해는 모호했다. 그는 문제시 되었던 일곱 권의 책을 모두 수락하기는 했으나 성경의 권위에 정도의 차이를 두고 대체로 외경을 포함하여 폭넓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약 경전 확립에 기여하였다.
3) 교회 협의회의 활동
신약 정경의 한계를 정하는 문제는 어떠한 협의회에서도 결정 할 일이 아니었다. 개개의 문서가 지닌 영감적인 가치나 내적인 권위가 그 결정 요소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경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문서의 순수함이나 확실성에서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다.
4 세기 말 이전 어떠한 협의회도 이런 주제에 관해서 아무런 공언도 하지 못하였다.
4) 카르타고 제 3 차 교회 회의(397 년)
여기에서 정경에 대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규정 된 사항 중의 하나는 교회내에서는 오로지 "정경으로 인정 된" 책만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후에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 권의 목록이 되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것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었다.
히포 교회회의(419 년)는 제 3 차 카르타고 교회 회의의 목록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처럼 정경의 선정은 개개의 책들이 자체의 가치를 입증 한 후 교회 회의에서 확인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15) 동방 교회의 정경 형성
안디옥 주교 이그나티우스(116 년 경), 서머나 주교 폴리갑(69-155 년 경), 히에라폴리스 주교 파피아스(80-155 년 경)는 마태복음, 요한복음, 바울 서신, 베드로 전서, 요한 1 서, 사도행전에 대해서 증언했다.
12 사도의 교훈집(120 년 경)은 마태복음을 특히 많이 언급하고 대부분 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누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사르디스 주교 멜리투수(170 년 경)는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2. 3 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약 성경을 인용했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115-118 년 경)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입증하였고, 이것들은 구약 정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루키아누스(312 년에 순교)는 자신의 "안디옥 정경"에서 요한계시록, 베드로 후서, 요한 2.3 서를 제외시켰고, 그가 개역한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는 유다서를 제외시켰다.
갑바도기아의 대 바실리우스(329-379 년 경)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30-390 년 경)는 요한을 계시록의 기록자라고는 했으나, 이를 제외한 현재의 정경에 있는 모든 문서를 인정했다.
몹스에스티아의 데오도루스(350-428 년)는 카톨릭 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의 이러한 견해는 콘스탄티노플 정경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루키아누스의 "안디옥 정경"에서 발전된 것으로, 요한 2. 3 서, 베드로 후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페쉬타(411-435 년)도 콘스탄티노플 정경과 유사하였다. 필로크세누스(508 년 경)가 이 부인 된 책들을 첨가하여 시리아 페쉬타 성경을 개정하고부터 콘스탄티노플 정경의 그릇된 영향은 사라지게 되었다.
1)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초기 형성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 년 경)는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중대한 증언을 하면서 이것을 사도 요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히브리서를 잘 알고 있었고, "베드로의 회고록"이라는 표제가 붙은 마가복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5-215 년 경)는 현재 신약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문서에 정통하였으며, 유다서, 히브리서, 공동 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모든 문서를 인정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185-253 년 경)는 많은 논쟁이 되었던 책들(히브리서, 베드로 후서, 요한 2. 3 서, 야고보서, 유다서)을 인정 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 인정된 책들(「호모로구메나」) 가운데 요한계시록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후기 형성
프레드릭 케년 경에 의해 1933-37 년에 출판된 3 세기 체스터 비티(The Chester Beatty) 파피루스 사본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 히브리서(로마서 다음에 있음), 요한계시록(9:10∼17:2 부분 만이 보존되고 있다)을 인증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200-265 년 경)는 야고보서, 요한 2. 3 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영감된 성경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임을 증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8-373 년)는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27 권의 신약 성경에 대하여 "정경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15) 신약 정경 형성사의 요약
신약 정경은 교회 협의회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개개의 책들이 지닌 영감성과 내적인 권위가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인정하고, 정경화 하는 결정적인 요소를 이루었다.
A. D 200 년에 이르러서야 신약은 본질적으로 오늘 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서들을 포함하였다. 그 후 이것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오늘 날과 같은 권위와 확실성을 지니게 되었다.
A. D 3 세기에는「안티레고메나」로 논쟁이 벌어졌다. 동방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인정치 아니 하였으며, 서방에서는 히브리서를 부정하였다.
실제적으로 3 세기 말에 가서야 모든 외경서들이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그리고 이집트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이 설정한 명확한 구분으로 실제로 어떠한 문서가 정경의 지위를 갖는가에 대한 논쟁은 그치게 되었다.
제 3 차 카르타고 교회 회의(397 년)는 이 결정을 확증하였으며, 이 때부터는 어느 신약 문서에 대한 논쟁도 그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동방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방과 알렉산드리아 아타나시우스의 경우,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영향은 모든 반론을 일축시켜 버렸다.
페쉬타(시리아 성경)에 요한 2. 3 서, 베드로 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첨가함으로써 정경에 대한 문제는 동방 역시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신약 정경은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맞추어 서방에서는 400 년에, 동방에서는 500 년에 이르러 그 결정을 보았다.
(16) 현재까지의 정경사
몇 가지 근소한 차이점을 제외하고서는 4 세기 초 신약 정경에 대한 결정은 현재까지 내려오는 교회의 결정으로 남아 있다.
종교 개혁 당시 개혁자들은 소위 교회의 절대성이라는 권위에 항변하여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구약 정경에 대하여 로마 교회는 1546 년「사크로산크타 교령」(Decree Sacrosancta)으로 트렌트 공의회 중 14 권의 외경서 중 11 권을 정경으로 공포했다. 이것은 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마카베오 상. 하, 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이었는데 그 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에스델서를 추가했다.
'성경 배경사! 형성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 66권의 순서가 연대기가 아닌 이유 (0) | 2022.01.24 |
---|---|
신약성경의 형성 배경사 (0) | 2022.01.02 |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正體) 박창환 (0) | 2021.10.18 |
성경이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변종길 (0) | 2021.10.18 |
신약과 사본 Manuscript and Printed Editions (0) | 2021.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