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지서 소선지서 사사

스가랴서 연구

하나님아들 2021. 11. 8. 13:50

스가랴서 연구

 

 

 

  * 이름의 뜻을 통한 주제 / 기억함이 되다(10:9; 13:2)

  * 스가랴서의 주제 / 우리를 시온의 영광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 스가랴서의 주제절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라"(12:10).

 

 

1. 스가랴서의 저자

  슥1:1 말씀에 의해 저자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 5:1, 6:14, 그리고 느 12:4, 16절 등에서 스가랴가 잇도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잇도가 스가랴의 조부였는데 그의 아들 베레갸가 일찍 죽었거나 어떤 다른 이유로서 스가랴가 대를 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느헤미야 12장에서는 잇도가 레위족속이며 제사장이라고 말하였다(12:4). 따라서 스가랴는 선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 스가랴서의 기록 연대 

  스가랴는 BC. 6세기의 선지자에 속한다. 그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북 이스라엘 왕조는 BC. 722년 앗수르에게 함락되었고 남 유다 왕조도 BC.606년부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였다. 따라서 처음 바벨론에 의해서 침범을 받은 BC.606년부터 BC.536년까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 바벨론 왕국은 페르시아(바사) 제국에 의하여 BC.539년에 멸망되었고 고레스 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고레스 대왕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2장에 의하면 약 5만 명이 총독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BC.538-537). 이 당시에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BC.536년(3:8-13)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이 기초는 16년 동안 방치되었다. BC.520년 다리오 왕이 다시 조서를 내려 16년 만에 성전작업이 다시 시작되어 BC.516년에 마침내 완공하였다.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건축을 계속 하도록 격려하는 예언을 한 선지자들이다. 학개는 네 번의 메시지를 BC. 520년에 전하고 사라져버렸고, 스가랴가 같은 해에 나와 성전이 봉헌될 수 있도록 격려하여 마침내 BC. 515년에 성전이 봉헌되었다(6:15-18).

 

 

3. 스가랴서의 기록목적과 주제

  학개에서와 비슷하게 약 5만 명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BC. 538-537에  성전을 지으려는 큰 희망을 가지고 귀환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 어려웠다. 저항에 부딪히자 이들은 포기하고 결국은 기초만 놓고 16년이라는 긴 시간을 허송하게 된다. BC. 520년에 스가랴와 학개의 책망과 동기부여와 격려를 통해서 성전건축이 다시 시작되고 마침내 완공하게 된다. 바로 이 기간동안 이 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서 반드시 성전건축을 마치도록 격려하였다. 이 책은 어느 책보다도 강력하게 메시아가 오실 것과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 왕국이 도래할 것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해주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많은 내용들이 신약에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메시아와 종말에 관한 것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며 마지막까지 손을 떼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4. 내용과 주요 사상

   스가랴는 이스라엘 민족을 격려하는 책임을 다한 예언자이다. 그는 만일 이스라엘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 자기 민족은 영광된 미래를 가지게 되리라고 격려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메시야를 통해서 오는 미래의 축복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북쪽의 사마리아, 서쪽의 아스돗, 남쪽의 이두매 등 여러 족속이 새로이 재건되려고 하는 유다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그 부흥을 방해하였다. 이렇게 안과 밖으로 가난과 역경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격려하며 종교를 부흥시키고 국민을 결속시켜 국가를 재건하려고 노력한 학개와 스가랴는 위해한 예언자들이었다.

 

 

5. 내용 분해

  1. 회개의 권고 1 : 1 - 6

  2. 여덟 가지 환상 1 : 7 - 6 : 8

     1) 첫째 환상(네 사람의 말탄 사자들) 1 : 7 - 17

     2) 둘째 환상(네 뿔과 네 공장) 1 : 18 - 21

     3) 셋째 환상(척량하는 사람) 2 : 1 - 13

     4) 넷째 환상(대제사장 여호수아) 3 : 1 - 10

     5) 다섯째 환상(등대와 두 감람나무) 4 : 1 - 14

     6) 여섯째 환상(날아가는 두루마리) 5 : 1 - 4

     7) 일곱째 환상(에바와 여인) 5 : 1 - 11

     8) 여덟째 환상(네 병거) 6 : 1 - 8

 3. 스룹바벨에게 메시야의 왕관을 씌움 6 : 9 - 15

 4. 벧엘에서 온 대표단 7 : 1 - 8 : 23

    1) 대표단의 질문 7 : 1 - 3

     2) 스가랴의 대답 7 : 4 - 8 : 23

 5. 메시야의 내림 9 : 1 - 12

 6. 원수들에 대한 승리 9 : 13 - 17

 7. 하나님만이 비와 벌을 주심 10 : 1 - 12

 8. 목자와 잡힌 양떼의 비유 11 : 1 - 17

 9. 이스라엘의 승리 12 : 1 - 13 : 6

 10. 민족의 정화(淨化) 13 : 7 - 9

 11. 여호와의 날 14 : 1 - 21 

 

 

 

스가랴

<스가랴서 요약>

 

1. 스가랴는 포로 후기 학개와 함께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남은 자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선지자다. 느헤미아 12장에 소개되는 포로 귀환자 목록 중 레위 지파 족보에 잇도와 스가랴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느 12:16) 그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스가랴는 바사(페르시아) 다리오 왕 2년에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1:1). 다리오는 바사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의 뒤를 이은 아들 캄비세스(주전 530~522년) 사후, 캄비세스의 군대 장교였다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왕이 된 다리우스 1세(주전 522~486)다. 그는 처음 2년 동안은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진압하느라 쉴 틈이 없었고 통치 3년 말이 돼서야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가 스가랴가 예언을 한 시기였고, 스가랴서의 제국적인 시대 배경이다.

 

2. 예루살렘은 과거 장엄한 제국의 수도가 아닌 초라하고 볼품없는 멸망의 장소였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의 하부 분할 구역의 하나인 예후드(Yehud)에 속해있었고 스룹바벨이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 사마리아의 행정적 지휘를 받았다. 당시 예루살렘 사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예후드는 경제력으로 자립할 수 없는 경제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변덕스런 기후에도 불구하고 농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전반적으로 경제적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둘째는 사회적 문제로, 귀환한 자들과 포로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자들과의 긴장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 남은 자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북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내려왔던 자들까지 있어서, 이들을 신앙 공동체 안에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또 귀환 후, 예후드가 사마리아 관할에서 벗어나면서 사마리아 당국자들의 불만이 여러 형태로 위협이 되고 있었다(에스라 4장). 마지막으로 신앙적 위기였는데 그것은 혼합주의의 문제였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백성들이 이미 이방 종교에 너무 노출되고 변질되어서 공동체의 신앙적 순결을 잃을 수 있는 위기가 상존했다. 결국 스가랴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던 때는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미래 영광과 현실의 고통 속에서 실망하고 패배주의에 빠져들어가던 그런 상황이었다.

  

3. 스가랴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처럼 많은 묵시를 담고 있기에 해석이 쉽지 않다. 거기에는 메시야 예언의 기독론적 묵시가 많다. 그리스도는 성전 건축의 궁극적 성취자다. 신약 기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스가랴 예언의 성취로 이해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사건 스가랴서 복음서
거절 당하는 메시아 11:4~7 마 27:51~53; 막 12:1~12
배척 당하는 메시아 11:12~13 막 14:10~11; 마 27:3~10
찔림 당하는 메시아 12:10 요 19:37; 계 1:7
버림 당하는 메시아 13:7 막 14:26~31, 50, 66~72
메시아의 죽음 12:10; 13:7 막 15; 요 19:28~37


1장 하나님께 돌아오라. (찬 279)

1. 1:1~6은 스가랴 전체의 서론이자 1~6장의 서론이다. 스가랴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는 뜻이다. 스가랴는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메시지를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2).” 이것은 현세대도 그들의 조상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있다는 경고다. 하지만 아직 그 심판이 이르지 않았으므로 소망이 있다는 것도 암시한다. 그 소망은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 실현될 수 있다(3).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이 스가랴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다. 그들의 열조들도 다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다(5). 하지만 선지자들이 말한 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백성은 알아야 한다(6). 조상들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돌이키지 않아서 망했다(4). 그 악한 길과 악한 행실은 이사야 선지자가 지적한 대로 위선적 예배(사 1:11~14), 공의를 상실함(사 1:15~17), 우상 숭배다(사 1:18~31). 선지자들의 외침이 있었지만 열조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고 돌이키지도 않았다.

 

2. 선지자는 1~6장에 나오는 여덟 개의 환상 중 첫 번째 환상을 본다(7~17). 때는 다리오 왕 2년 11월(바벨론력 스밧월) 24일이었다. 스가랴는 밤에 이 환상을 보는데, 밤은 이방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고통의 밤을, 그리고 회복의 때를 고대하는 파수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선지자는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붉은 말을 탄 자와 그 뒤에 붉은 말, 자줏빛 말과 백마들을 보았다. 각 말을 탄 자들이 붉은 말을 탄 여호와의 사자에게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조용하더이다”라고 보고를 하는 것을 선지자는 듣는다(11). 이들은 여호와의 순찰자들이다(10). 페르시아 왕은 모든 식민지에 순찰자를 보냈고 백성들은 말을 달리는 왕의 순찰자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페르시아 왕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여호와의 순찰자들은 지금 이 때를 통치하시는 분은 페르시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순찰자들의 보고를 들은 여호와의 사자는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70년이 되었나이다”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기도한다(12). 70년은 예루살렘 멸망부터(주전 587년) 스가랴에게 환상이 주어지던 때(주전 520년) 혹은 제2성전이 완공되는 때(주전 516년)를 가리킬 것이다. 이때 스가랴 선지자에게 말하던 천사에게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13). 천사가 선지자에게 전하라고 준 메시지는 첫째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곧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다(14). 질투는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준다. 메시지의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 안일한 여러 나라들을 향해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이다(15). 지금은 열국이 평온하고 조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이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긍휼이 성전의 건축을 보장해줄 것에 대한 약속이다(16).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는 것은 주로 심판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시온의 회복을 의미한다(17).

 

3. 스가랴는 다시 두 번째 환상을 본다(18~21). 네 뿔과 네 대장장이에 대한 환상이다. 뿔은 보통 힘과 권력 혹은 전투의 승리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제국들의 공격을 가리킨다. 네 뿔이 네 왕국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4’가 의미하는 전체성, 완전함의 관점에서 볼 때 유다와 이스라엘을 괴롭힌 모든 나라를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어서 스가랴는 네 명의 대장장이를 보는데 이들은 뿔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자들이다. 뿔들을 제압하는 대장장이들의 출현은 열방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과 그 임박성을 보여준다. 대장장이들은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의 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이 본질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악의 세력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로 말미암게 될 것을 암시한다.

 

4.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아무리 시대가 암울해도 그렇다. 아무리 악인이 번영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온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질투)을 이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실을 알고 어떤 위기 속에서도 자신들의 악한 길과 악한 행실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전부다.

 

5. “하나님 아버지, 악과 불의와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해도, 악에 자신을 드리지 않고 온 세상을 감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스가랴 서론과 개요

 스가랴-서론과 개요-

 

스가랴 서론

 

 저자: 스가랴는 50,000명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읍과 성전 예배를 재건하기 위하여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어려운 시대에 학개와 더불어 사역하였다. 남은 자들은 주전 536년에 돌아와 535년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발생으로 일을 중단하였다. 주전 520년에 하나님은 학개와 스가랴를 세워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격동하였다. 그리하여, 525년에 이 사역을 성취하였다. 스가랴는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다( 12:4/ 12:16 참조). 스가랴 2 4절에 의하면 그가 젊은이인 것을 보게 된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축복하신다이며,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하나님의 때라는 뜻이다. 이들을 함께 모으면 여호와는 그분의 때에 축복하실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의미가 된다.

 

 주제: 이 책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고 있으며, 구약 중에서 다니엘서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이 스가랴서에 39회 언급되어 있다. 스가랴 1 14-17절은 이 책의 핵심 구절들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에 행한 일들을 벌하실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영광과 평화 중에 이 성을 회복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예루살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1:17/2:12/3:2). 그분은 이 성에 자비를 베푸실 것이며(1:12) 어느날 이 성에 거하실 것이다(8:3/8:8).

 

 해석: 대부분의 구약 예언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스가랴가 하는 말의 가까운 뜻과 먼 뜻을 구별해야만 한다. 한 구절에서는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게 멸망할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는 통치하기 위하여 오시는 메시야를 묘사한다! 스가랴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군대들의 하나님)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평화와 영광 중에 예루살렘을 건설하려고 오시는 여호와를 본다. 이 장엄한 예언들이 오늘날 교회, 곧 영적인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이 책의 의미와 능력을 훔치는 결과가 된다. 물론 모든 시대에 영적으로 적용해야 할 내용들이 있지만, 근본적인 해석은 유대 나라와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스가랴서: 다음 부분에 나오는 해설적인 요약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6장은 이 책의 멧세지를 요약하고 있는 환상들을 묘사하는데, 예루살렘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정결케 되고 평화와 번영 가운데 재건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여호수아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관을 씌움으로 끝을 맺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8-9장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을 추념하는 일에 대하여 질문하기 위해 찾아온 몇몇 유대인들의 방문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금식은 6월에 있었다(왕하 25:8/ 52:12). 결국, 만일 예루살렘이 재건될 것이라면 왜 금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스가랴는 그들의 금식이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지 일람표에 따라 행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응답하며, 영화롭게 된 성에서는 금식이 축제로 변할 것임을 약속한다.

 

마지막 부분은(10-14) 예루살렘에 대한 상세한 묘사이며, 이방 나라들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9-11장에서 우리는 첫번째 을 보며 12-14장에서는 두번째 짐을 본다. 요약에서도 보듯이 스가랴는 알렉산더대제의 침략, 마카비 시대(잠깐 동안이지만 이스라엘을 속박으로부터 구원한 유대인 애국자)와 로마로 말미암은 예루살렘의 멸망까지도 다루고 있다. 스가랴서는 또한 우리에게 아마겟돈 전쟁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돌아오셔서 왕국을 세우시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말세로 도약한다!

 

 그리스도: 스가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면을 보여 준다

 

-: 9 9/ 마태복음 214-5

-: 3 3 /10 4/ 로마서 9 31-33

-30냥에 팔린 노예: 11 12/ 마태복음 27 3-10

-얻어맞은 목자: 13 7/ 마태복음 26 31

-가지: 3 8/ 6 12/ 이사야 4 2/ 이사야 11 1/ 예레미야 23 5/ 예레미야 33 15

-영광스러운 통치자: 14 1-4, 9, 16-17

 

 스가랴개요

 

주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질투하시며 그 성을 회복하실 것이다/1 12-17

 

서론: 회개로의 부르심(주전 520 11)/1 1-6

 

1. 격려의 여덟가지 환상(주전 520 2 24)/1 7- 6 15

 

말탄 사람/1 7-17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으셨다.

나팔과 장인 /1 18-21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측량사/2 1-13

예루살렘은 회복될 것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3 1-10

그 민족은 정결케 될 것이다.

촛대와 나무들/4 1-14

하나님의 능력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로 하여금 어려운 임무를 끝내게 할수 있을 것이다.

날아가는 두루마리 /5 1-4

이 땅에서 죄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여자/5 5-11

사악함은 이 땅에서 바벨론으로 옮겨졌으며 바벨론은 모든 우상 숭배와 종교적인 오류의 근본이다.

전차/6 1-8

하나님이 나라들을 조절하신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제사장이신 왕에게 면류관을 씌움/6 9-15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은 제사장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관식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왕 또는 제사장들은 있었으나, 왕이며 제사장이신 분을 모신 일은 없었다.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상징할 뿐이다.

 

2. 중간기록:금식에 관한 질문들(주전 518 12 4)/7-8

 

속죄일의 금식이 필수적으로 행하는 유일한 금식이었는데 예루살렘의 함락을 추념하여 금식을 하게 되었다. 만일 이 성이 회복된다면 왜 금식을 하겠는가? 스가랴는 금식의 참된 의미를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이 금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와 영광 중에 이 성이 회복될 것을 약속한다.

 

3. 교화를 위한 예언 / 9-14

 

첫번째 예언/9-11

(1)알렉산더 대왕의 정복/9 1-8

메시야의 오심 /9 9

(2)마카비 시대의 승리들/9 11-17

메시야의 오심 /10

(3)로마의 정복/11 1-9

메시야의 오심 /11 10-14

적그리스도의 발흥/11 15-17

두번째 예언/12-14

(1)환란기의 이스라엘/12 1-9

그리스도의 재림 /12 10-13 9

(2)아마겟돈 전쟁 /14 1-3

그리스도의 재림 /14 4-7

(3)왕국의 설립 /14 8-21"

 

 

 9:8

 하나님은 기억하신다-스가랴-

 

예루살렘성은 오늘날도 대단한 화제거리이며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다. “이 고대 도시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 공격을 당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과 다른 많은 것들이 스가랴서에서 발견된다. 이 책에는 예루살렘성이란 말이 39회 언급된다. 1 12-17절에서 하나님은 이 성의 운명을 조절하고 계심을 명백히 밝히신다. “나는 자비롭고... 나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질투하며... 내 집이 건축되리니... 여호와는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며 예루살렘을 택하실 것이다!“

 

스가랴는 예루살렘이 아직 폐허로 있을 때에 예언하였다. 586년에 바벨론 사람들은 이 성을 파괴하고 그 백성을 바벨론으로 데려갔다. 536년에 바벨론이 망하자 고레스는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535년에 이들은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나 그 일은 중단되었다. 유대인이 다시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기 시작한 것은 520년의 일이었다. 이 일은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로 인하여 재개되었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 폐허가 된 성읍에 사는 연약한 민족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십 세기 후를 내다보았으며 그 성의 장래를 보았고, 예루살렘왕 메시야의 오심을 보았다. 그는 성전이 다시 건축될 것을 알고 있었다(1:16/4:9/6:12-14/3:9). 우리는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성과 연관된 큰 사건들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1. 여호와의 보호(9:8)

 

9 1-8절에서 이 선지자는 그리이스의 장군,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을 묘사한다. 역사는 알렉산더가 여러 도시들을 멸망시켰으나 예루살렘은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말해 준다! 그는 이 성을 위협하였지만 그 위협을 결코 현실로 옮기지는 않았다. 이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유대의 대제사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느껴지는 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성 밖에서 알렉산더를 만나라는 말을 들었다. 그와 함께 제사장들이 흰 제사장 복을 입고 같이 갔는데, 이 장면은 알렉산더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사실 그는 그와 똑같은 장면을 꿈 속에서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에 평화롭게 입성하였고 그 백성이나 성에 어떤 식으로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

 

2. 메시야의 방문

 

아마도 스가랴는 알렉산더의 방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성에 오실 것에 대한 미광을 미리 본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절에(9:9)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는 일을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은 종려주일에 예수께서 그 성에 입성하심으로써 성취되었다( 21:4-5/ 12:12-16).

알렉산더 대제는 전쟁을 위하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평화를 목적으로 오셨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였던가? 스가랴 13 7절은 그가 체포되어( 26:31) 얻어 맞았다고 말한다. 그는 노예의 가격으로 팔렸다( 11:12/ 27:3-10). 그 결과, 그는 친구의 집에서 상처를 입고( 13:6) 십자가에서 찔림을 당했다( 12:10). “평화의 성“(예루살렘의 뜻) 평화의 왕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11:1-14

3. 로마에 의한 파괴(11:1-14)

 

이 부분 전체는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들과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최종적으로 파괴될 것에 대한 도표적 상징이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은 이 일이 있기 600년 전에 알려졌었다! 스가랴는 그 땅이 약탈당하는 것을 보았으며, 백성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러한 비극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통치자들(목자들)의 불충성 때문이다. 백성들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진리를 거절하고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방치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의 목장에 있는 양들이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살육자의 떼였으며(4, 7), 로마에 의해 살육당할 것으로 운명지워져 있었다.

여기에서 스가랴는 메시야가 목자의 두 가지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을 묘사한다( 23:4). 하나는 은총(아름다움)이며, 다른 하나는 연합(묶음)이다.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팔아 넘기자(12) 하나님의 은혜의 날은 그 민족을 종말로 이끌어 갔다. 더이상 주님 안에서 연합되지 않았으며 이 민족은 깨뜨려져야 했다. 주후 70년에 로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며, 예루살렘은 파괴되었다( 23:37-39 참조)."

 

 11:15-17

4. 적그리스도의 보호(11:15-17)

 

이스라엘의 양떼는 그들의 참된 목자를 거절했을 뿐아니라 그를 쳤다(13:7). 그러나 이들은 거짓 목자, “우상 목자 적그리스도를 용납하였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 43절에서 이 일을 예언하셨다. 다니엘 9 27절은 교회가 휴거된 후에 유럽 연합국의 지도자( 7:7-8 에 나오는 열 왕국)는 유대인들을 7년 동안 보호하겠다고 그들과 언약을 세울 것을 말해 준다. 예루살렘은 3년 반을 평화롭게 보낼 것이며, 이 거짓 평화는 무서운 3년 반 동안의 환란의 서곡이 될 것이다.

전반부 3년 반 동안에 요한계시록 11 1절 이하에 있는 두 증인이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1 4절은 이 증인들을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와 연관시킨다. 스가랴 시대의 두 감람나무라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그러나 최종적인 적용은 말세의 두 증인에게 해당된다."

 

 12:1-8/ 14:1-3

5. 이방인들에 의한 침공(12:1-8/14:1-3)

 

예루살렘은 수 많은 공격을 받아 왔으며 비참함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환란 기간 동안에(후반 3년 반) 민족의 3분의 1만이 생존하여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13:8-3). “그 날에라는 말이 스가랴서 12-14장에 최소한 13회 반복되고 있으며 여호와의 날을 가리키고 있다. 12 1-8절과 14 1-2절에서 우리는 모든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함께 모인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적그리스도는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며 유대인들과의 약속을 깨고 성전을 세계적인 예배를 위한 사령부로 삼는다(살후 2 / 13장 참조). 환란의 후반부에서 이 땅의 왕은 마지막 대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16:12-16/ 19:19-21).

14 1-2절에서는 주께서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하여 돌아오시기 전에 이 전쟁을 통해 혹독하게 고난을 받는 것을 주의해서 살펴보자.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곡과 마곡의 전쟁에 대한 구절로 본다 겔 38-39장 그러나 견실한 의견인 것같지는 않다. 곡과 마곡은 환란 기간의 중간에 있으며 러시아와 그 연맹군이 관계된다. 이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과 같이 모든 이방 나라들을 포함시킬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곡과 마곡의 전쟁이 끝난 후에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하여 돌아오시지는 않는다. 스가랴 14:4- 이하에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돌아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3:2/ 4:3-4/ 31:5/ 24:15-22 참조)."

 12:9/ 12:4-11

 

6.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12:9/4-11)

 

전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14:4). 이것은 사도행전 1 11-12절의 약속을 성취할 것이다. 영광이 감람산에서 떠나갔었으며( 11:22-23) 감람산에서 돌아올 것이었다( 43:2). 지진이 온지역을 변경시켜 놓을 것이다( 1:4/ 1:5/  16:18-19). 이러한 변화는 틀림없이 에스겔의 장엄한 성전에 요구되는 새로운 지경을 확보하게 할 것이다( 40-48). 현재와 같이 배정된 상황에서는 그처럼 큰 구조는 불가능하므로, 새롭게 형성된 골짜기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피난할 길을 만들어 놓게 될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될 것이다( 19:11-21).

 

 12:10-13/ 14:9-21

7. 여호와에 의한 정화와 영화(12:10-13:1/14:9-21)

 

이 민족은 찔림을 당하신 분을 보게 될 것이며(12:10/ 19:37/ 1:7), 죄를 회개하고 통곡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샘을 여시고 그들의 죄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회개할 사람들의 특정한 그룹, 즉 다윗(왕권), 나단(선지자들), 레위족속(제사장들)에 유의하라(12:12-14). 이스라엘의 역사를 훑어볼 때에 백성들을 곁길로 인도했던 사람들은 제사장들, 선지자들, 왕들이었다. 영광스러운 성전은 순에 의해서 창설될 것이며(6:12-13),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그 위엄과 평화 가운데 통치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역사상 처음으로 안전히 거할 것이며“(14:11) 영광스러운 생수가 그 땅을 흘러 치유하게 될 것이다(14:8/ 47:1- 이하).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것이며(14:16- 이하) 스가랴 3 1절에서 더러운 곳이라고 불리웠던 곳이 거룩함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다! 스가랴 3장의 정결함이 현실이 될 것이며 세상에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라!“( 122:6) 예루살렘이 평화로울 동안에 모든 나라들 중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스가랴서 연구  
 


 

서론 

 

1. 스가랴(הירכז,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선지자와 학개 선지자는 동시대 인물로서(1:1, 1:1) 역사적 배경이 비슷하다.

 

B.C.520년에 학개 선지자는 4개월에 걸쳐서 네 번 설교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한지 두 달 후부터 시작했다. 스가랴가 사역을 시작할 때 고레스는 부친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왕 위에 오른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를 자유케 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용했다. 고레스가 바벨론을 지배하기 시작한 해는 B.C.539년이다. 고레스는 그 때에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다(대하36:21-23,1:1-4,6:3-5). 에스라서 2장은 큰 무리(5만 명) B.C.538-537년에 사이에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의 인도 아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고 말해 주고 있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B.C.536년 초에 성전건축의 기초를 다졌다(3:8-13). 그러나 성전건축은 주변의 어려운 환경으로 인하여 지연되었고 결국에는 중단되고 말았다(4:1-5,24). 그 시기 페르샤의 고레스는 전사했고(B.C.529), 일 년 동안 그의 섭정을 받았던 아들 캄비세스 2(Cambyses)가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B.C.530-522). 그러나 정치적인 반역이 일어나 결국 그의 왕좌는 B.C.522년 다리오(Darius Hystaspes)에게 넘어 갔다. 다리오왕은 종교적으로 관용하는 정책을 베풀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정책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고레스의 칙령을 승인했고, 성전 재건을 허용했다(6:6-12,1:1-2)(Kenneth Barker, 스가랴서 주석, Expositor's Bible Commentary P.640).

 

학개와 마찬가지로 스가랴도 귀환한 백성들로 하여금 중단된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하도록 격려하였고 또한 유다에게 장차 모든 대적과 싸워 승리할 날이 올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스가랴의 사역은 선지자 학개 보다 더 광범위 했고 또한 그의 예언의 범위도 다른 소선지자들보다 광범위했다. 스가랴서에는 많은 환상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구약의 계시록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을 다른 소선지서의 저자들보다 훨씬 자세히 말했다(Charles Lee Feinberg, 12소선지서 연구, 은성, P.452). 로빈슨(George L. Robinson)은 스가랴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묘사했다.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스가랴서는 모든 구약 문서들 중에서 가장 메시야적이며 가장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책이다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메시야적인 예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지(3-6, 4:2, 23:5)"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6:13)'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과 장차 받을 영광’9:9,10)' ‘배반당하시는 목자 그리스도(11:12,13)'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12:10)' ‘그리스도의 수난(13:7)' ‘그리스도의 재림(14)' (Merrill F. Unger, 구약개론, 은성, p.402).

 

스가랴서는 크게 나누어서 1-8장과 9-14장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스가랴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는 여덟 가지 예언적 환상이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부분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사건들과 천년왕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스가랴는 B.C.516년에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을 예언했지만 스가랴서의 마지막 장들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스가랴의 예언들을 개괄하면 환상들(1-6)과 질문들(7-8) 그리고 경고들(9-14)로 구성되어 있다. 스가랴서는 포로 귀환으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영적 역사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스가랴의 예언에서 메시아와 예루살렘은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스가랴의 예언에는 세 개의 제국이 등장하는데 바사, 그리스, 그리고 로마가 이들 나라다.

 

 

2. 스가랴서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회개의 메시지와 함께 시작된다. 스가랴는 유다에게 선조들이 회개의 권고를 거부함으로 패망했다는 사실을 회상시키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1:3). 이것은 유다가 죄로 인하여 황폐해 진 곳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회개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회개는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회개라는 은혜의 수단을 주셨다.

 

스가랴는 다리오왕 2 11 24일 밤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덟 개의 환상을 전해 주고 있다(1:7-6). 이 환상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석류 나무 가운데 있는 사람(1:7-17),  네 뿔과 공장(工匠)에 대한 환상(1:18-21),  척량 줄을 가진 사람(2:1-13),  대제사장을 정결케 하는 것에 대한 환상(3:1-10),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4:1-14),  날아가는 두루마리(5:1-4),  에바 속에 앉은 여인(5:5-11),  네 병거에 대한 환상(6:1-8). 이 여덟 개 환상들은 각각 특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내외적인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건축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특별한 격려와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선포된 여덟 개의 메시지는 형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지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있어서 일치한다. 하나는 이스라엘을 황폐케 했던 열국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그곳에 예배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말씀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 받게 하셨고 또한 그들에게 위임해 주신 성전 건축을 지속적으로 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일을 행하고 있을지라도 때로는 낙심 가운데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낙심 가운데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만 회복 되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년 후 스가랴에게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7,8). 이 말씀은 벧엘로부터 올라온 두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지금도 국가적 슬픔을 당한 날을 기념하여 금식해야 하는지 묻는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임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념하는 사월의 금식(4 17), 성읍과 성전의 파괴를 기념하는 오월의 금식(5 9), 그다랴의 암살을 기념하는 칠월의 금식(7 3), 그리고 예루살렘 포위의 시작을 기억하기 위한 시월의 금식(10 10) 등이 있었다. 하나님은 금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금식이 위선임을 말해 주었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금식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 진실과 공의가 행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금하신 것은 금식이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금식이 형식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부터 칠십년 동안이나 오월과 칠월에 금식했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는가라고 물으셨다. 이것은 금식은 금식하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합당한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패망한 원인은 그들 속에 지녀야할 참된 경건을 상실하고 형식적인 종교적 습관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벧엘로부터 파송된 두 사람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고 그들로 하여금 참된 경건을 소유하도록 권고하였다. 공의와 진실을 행하라는 권고야말로 참된 경건을 소유하라는 권고다. 만일 이들이 참된 경건을 소유한다면 금식의 날은 그들에게 흉악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의 날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가랴는 현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관심을 여호와의 날에 집중시키고 있다(9-14). 스가랴가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언이 뒤엉킨 날이다. 이 날은 시간적으로 볼 때 가까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날을 말하고, 멀리는 메시야의 임하심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성취될 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시점에서만 여호와의 날을 바라본다면 그 날이 어떤 날인지 혼돈할 수도 있다. 구약의 대부분의 예언들은 현재의 사건을 예표로 하여 미래에 성취될 일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예언들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만, 후자는 보다 세상의 종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스가랴서를 통해 주신 메시지의 내용은 대부분 메시야의 초림과 배척(9:1-11:17), 그리고 메시야의 재림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12:1-14:21).

 

 

.bbs_contents p{margin:0px;}

<xscript type="text/xxxxxxjavascript"></xscript>  
위로의 말씀 
 
1) 스가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다.
 
선지자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 선지자다. 그러므로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다에게 요구 되었던 것은 성전 건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다는 바벨론에서 귀한 한 후 성전 건축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외적 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15년 동안이나 방치해 둔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처럼 성전 건축을 중단한 유다에 대하여 한 편으로는 책망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의 말씀을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성전 건축을 완성하도록 촉구하셨다. 이와 같은 방식은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방식이기도 하다. 낙심한 자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격려와 위로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지도자는 격려와 위로를 할 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회개한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그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회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길인 동시에 그 자체가 위로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3:2,3).
 
7장은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지 말해 준다. 선지자 스가야는 여덟 번의 이상을 받은 후(1:1), 2년이 지난 다리오왕 사년 구월 사일에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7:1), 이 때 임한 말씀은 유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므로 참됨 신앙을 회복 시켜 주기 위한 권고의 말씀이었다. 이 권고의 말씀은 금식의 문제에 대한 물음과 대답을 통하여 주어졌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국가적으로 비운을 맞은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날을 금식일로 정하고 그 날을 지키며 슬퍼했다. 이들이 지킨 4월의 금식(49, 왕하25:3,4; 39:2)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5월의 금식(5 9, 왕하25:8-10)은 하나님의 전이 소화되어 파괴되던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7월의 금식(7 3, 왕하2:25; 41:2)은 아하감의 아들 그달야의 암살을 상기하는 날로 지켰다. 그리고 10월의 금식(10 10, 왕하25:1; 24:2)은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켰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칠십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이와 같은 금식 일을 지키며 국가적인 재난을 슬퍼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예언이 성취되어 포로 되었던 유대인들이 해방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어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이와 같은 때에 벧엘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와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바벨론에서 지켜온 금식 일을 계속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중단해야 하는지 물어왔다. 선지자 스가랴는 이들의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선지자의 물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말하므로 벧엘로부터 온 자들에게 주는 대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하고 있다(7:4). 하나님은 벧엘에서 온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나니냐(7:5,6)" 여기 스가랴에게 임한 말씀은 금식을 계속해야 하느냐 중단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금식을 하는 동기에 대하여 묻는 말씀이다. 즉 유대인들이 바벨론서 칠십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국가적인 재난의 날을 기억하며 금식하고 슬퍼해 왔는데 그렇게 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물은 것이다. 이 물음은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도 중요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물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칠십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금식을 해 왔을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관습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무슨 일을 얼마나 오래 해 왔느냐 또는 앞으로 얼마나 계속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일을 어떤 동기로 또는 어떤 목적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신앙의 전통이나 또는 예배 의식이 중요할지라도 이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면 이것들은 다만 종교적 관습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요점은 금식 일을 지킬 것인지 중단 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진정한 회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날의 금식을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기회로 삼았다면 하나님은 그 금식을 받아 주실 것이고 또한 앞으로도 그런 금식을 받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의 금식이 단순히 신앙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들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부터 온 자들의 물음에 대하여 주신 대답이었다.
 
8-14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의 선조들이 신앙의 전통을 지켰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다. 유다의 역사를 보면 자의적(恣意的)으로 성전 예배를 중단한 적은 없다. 유다가 영적으로 침체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들 가운데 성전 예배는 더욱 장엄하게 드려졌다. 그러므로 성전 예배의 외적 모습은 유다의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판단해 줄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다의 참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시금석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예배 의식을 통해서도 또는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면 그들 가운데 장엄한 예배 의식이 행해졌을지라도 그들의 삶은 세속적일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신앙 가운데 있을 때에는 신앙과 삶의 모습은 일치하지만, 참된 신앙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에는 이들 사이에 불일치를 이룰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신앙은 형식화되고, 이것은 형식적인 예배 의식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유다의 선조들은 신앙의 전통을 지켰고 성전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의 삶은 신앙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가 보호를 받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이런 삶의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대하여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며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 나왔도다(7:10-1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로 인한 심판으로 아름다운 땅 예루살렘은 황무하였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또한 유다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참 된 신앙은 형식(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회개는 형식으로의 돌이킴이 아니고 마음의 돌이킴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인격과 대면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여기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 스스로들 돌아보고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다. 이처럼 그 분의 임재 앞에서 마음을 돌이키는 행위 또는 예배하는 행위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행위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원하시며 또한 이런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로 하실 때 무엇을 통하여 위로하시는지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실 때 말씀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스가랴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 위로의 방식이다. 시편 107편은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107:19,20)”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자신의 종들을 보내심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다. 스가랴서의 여덟 개의 환상을 통해 주시는 말씀과 메시야 예언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은 모두 시련 가운데 있는 유다를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주신 말씀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교훈해 준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말씀을 보내신다. 여기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의미다. 성령님은 시련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소망 가운데 거하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새로운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말씀들 가운데 필요한 말씀을 생각나게도 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에게 주신 여덟 가지 환상은 유다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성전을 계시의 수단으로 하여 주신 말씀들이다. 이 경우는 성령님께서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말씀이 되게 해 주신 예가 될 것이다. 실제로 스가랴가 본 일련의 환상들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그에게 성전이 점점 완성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첫 번째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고, 두 번째 이상을 통하여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열국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 주었고, 세 번째 이상을 통하여 황폐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하여 척량하는 모습을 그리고 네 번째를 통하여 제사장이 세워지는 것을 다섯 번째를 통하여 일곱 촛대에 불이 밝혀지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여섯째 환상에서 하나님은 공의대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유다를 위로 해 주셨고, 일곱째 환상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죄를 제거하실 것과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여덟 번째 환상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세계에 이를 것을 말씀하셨다. 유다는 이와 같은 환상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들의 구원이 점점 온전하게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주신 말씀들은 유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했고, 구원의 소망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이 역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위로가 필요할 때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련 가운데 있는 유다에게 스가랴를 통하여 연속적인 환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구원을 온전히 확신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 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연속성을 갖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 연속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열쇠가 된다. 왜냐하면 이 말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백성 가운데 이루고자 하시는 선하신 목적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필요할 때마다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만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은혜를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할 때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하여 주목하게 되고 또한 그 말씀을 합당한 태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는 중 특별한 깨달음이 있거나 또는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특별히 들리는 말씀이 있을 때 이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시간의 깨달음으로 족할 것이다. 이처럼 말씀이 임했을 때 그 말씀을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과 단순한 깨달음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말씀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자들 가운데서만 역사하신다. 성경은 이런 자들 가운데 임한 말씀의 역사에 대하여 '마음이 뜨거웠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므로 말씀을 통한 역사하심이 그들의 삶 가운데 실제적인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자 하실 때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장래를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보여주신 그들의 장래를 보장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주신 메시지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그들의 대적들이 멸망할 것이며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현재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게 해 주고 장래에 대하여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해 준다. 여기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적들로부터 받고 있는 현재의 고난조차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장래에 그들의 대적을 멸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시기만 하면 대적을 멸하실 수 있는 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적을 멸하지 않으시고 장래에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시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는 고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를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고난은 완고한 마음을 돌이켜 회개에 이르도록 하고(32:1-5),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온전히 의뢰하도록 이끌어 주고(고후1:9), 또한 고난은 고통 받는 형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 진정 형제를 사랑하게 해 주신다(2:18).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고난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알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이 이와 같은 뜻을 알지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소망이 없으면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장차 우리의 대적들을 멸하실 것과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보여주셨다. 하나는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일을 보여주심으로 백성들을 위로해 주셨고, 다른 하나는 보다 먼 장래에 이루어질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말씀하심으로 위로해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도우신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현재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또한 그들이 건축하고 있는 성전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더 나가서 예루살렘성 전체가 평화의 도시로 회복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유다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듣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다에게 메시야를 통하여 임하게 될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전자가 현실로부터의 구원이라면 후자는 그들이 누리게 될 궁극적 축복이요 구원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축복은 상황이 달라지면 변할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뢰했을 때 그들의 환경은 복되었지만, 돌이켜 악을 행할 때 그들의 환경은 다시 황폐해 졌다. 이와 같이 현재의 문제에 약속된 축복은 현재의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메시아를 통하여 받게 될 궁극적인 축복은 어떠한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축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에서 실패할지라도 여전히 그들 앞에는 소망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현재의 시련으로부터 구원의 소망을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이중적인 소망의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소망 가운데 살게 해 주셨다
#스가랴서개론
[출처] 스가랴서 연구, 서론, |작성자 엔젤로테

'대선지서 소선지서 사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가랴 개요  (0) 2021.11.08
스가랴 - 개론  (0) 2021.11.08
거짓 선지지와 참 선지자  (0) 2021.09.08
선지자(先知者)에 대한 이해  (0) 2021.09.08
사사(士師)에 대한 이해  (0) 2021.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