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에게는 비열할 정도로 약한 3류 사무라이 국민성을 이용하였다. 즉 일본을 미국의 충견으로 만들기 위하여 일본왕궁을 폭격하지 않았고, 히로히토에 대하여 전쟁 책임을 묻지도 않았던 것과 같이 야스쿠니신사를 소각하는 대신 정교(政敎)분리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즉 일본 정부에 단순한 종교시설과 순수한 전몰자 추도시설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도록 완화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일본정부는 종교시설로 선택하였다. 연합국사령부는 일본정부가 야스쿠니신사를 종교시설로 선택함에 따라 일반신사로 격하시켰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의 특수한 기능인 전몰자 추도시설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일본정부는 45년 11월 20일 각의(閣議)에서 신사의 국가관리 폐지를 결정함으로써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야스쿠니신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신도를 해체했다. 12월 15일 ‘신도 지령’으로 야스쿠니신사는 국영신사의 특권적 지위를 상실함으로써 국가와의 연결고리가 단절되고 일개 종교법인으로 전락했다. 신도에 대한 국가의 보호와 신도교육이 폐지되고, 공공시설에서 신단(神壇)이 사라졌다.
이듬해 공포된 일본 평화헌법에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일본 평화헌법 20조1항은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된다. 어떤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정치상의 권력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또 3항에는 ‘국가 및 국가기관은 종교교육과 기타 어떤 종교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군사보호 및 핵우산 아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가장 먼저 특혜를 누려 경제 재건에 성공하자 마치 패전국에 대한 면제부를 얻은 것과 같은 비열한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1953년 일본국회는 '일본에는 전범이 없다'라고 정신나간 결의를 한다. 그 후 아시아 침략전쟁 패전 당시 A급 전범자들을 비롯한 전범들이 정계에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 중 A급 전범자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수상까지 역임하게 이른다. 1960년대 말부터는 보수우익들의 마음의 고향과 같은 야스쿠니신사를 꾸준히 재단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까지 제출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74년 참의원에서 폐기되기는 하였지만, 자민당은 국가가 야스쿠니신사를 관리하는 법안을 중의원에서 단독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우익들의 준동이 거세지자 급기야 1978년 10월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일본정부가 앞장서서 비밀리에 합사한 사실이 79년 4월 언론에 보도에 의거 밝혀졌다. 아시아 각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대하여 일본 정치인들은 'A급 전범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등 정신병자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 일본정부 역시 후생성이 중심이 되어 민관합동기구가 결정한 일이라고 발뺌하였다. 이것은 한국.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가슴 깊이 페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14명의 A급 전범 중에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악랄한 자가 있다. 바로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다. 고이소는 창씨개명을 실시했던 악명 높은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했던 자이다. 그는 1942년 5월부터 1944년 7월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며 1944년 7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일본 수상 자리에 있었다. 그는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판정 받아 무기금고형을 선고 받았고 1950년 11월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고이소는 1942년 5월 일제가 한반도에서 인적 수탈을 위하여 징병제가 각의에서 결정될 때 한반도에서 징병제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적임자로 지목되었다. 고이소는 각의의 의도에 충견이 되기 위하여 한반도의 모든 것을 일제를 위해 바친다며 조선총독 재임 기간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했었다. “나는 재작년 취임 이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조선 통치 시책에 관해서는 그 때마다 다양한 형태로 발표를 하였는데 일관된 신념은 조선 민중 2500만 명을 하루빨리 진정한 황국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황국신민화를 향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대중을 기조로 하여, 조선의 모든 것을 전력 증강을 위해 기여 공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이소는 아시아 침략전쟁에서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가장 많이 죽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또 꽃다운 어린 여성들을 성노예(위안부)로 끌고 가는데 전력을 다했던 자이다. 그야말로 아시아 침략전쟁을 위해서라면 한반도의 모든 것을 착취하려 했던 우리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소름 끼치는 착취의 원흉이 되는 자이다. 그리고 고이소는 일본이 패망으로 치닫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쟁 완수를 고집한 자이다. 그리하여 그는 수상 재임 중에 자살특공대 가미가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이유도 모른채 죽음의 나락으로 내몰던 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