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성령론 연구
정보나
1.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특별한 언어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 복음안에는 세상안으로 왔으나 몰이해로 인해 공격받고 하늘로 돌어간 인자 (人子)개념이 형성되어 있다.예수의 낯섬은 이 세상의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예수는 그의 권위로서 세상을 심판했다. 요한복음서에는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요한복음 안에서 예수의 낯섬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 반발을 본 예수는 다시 그 자신을 입증하고자 논쟁했다. 이 논쟁의 바탕에는 예수 자신이 신비였다는 전제가 있었다. 요한공동체는 그들의 복음에 대한 세상의 거부에 직면해 있었고, 요한 복음은 이러한 공동체에 신앙의 근거가 되는 예수 인식과 이 인식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할을 제시했다. 구원의 준거는 예수인식이며 이 인식은 예수의 지상사역 이후에도 성령에 의해 계속된다.
2 장에서는 믿음과 지식의 연관이라는 광의적 문맥을 보이고자 한다. 3장에서는 요한공동체와 요한복음의 독특한 일면을 서술한 뒤, 보혜사 성령의 역할을 요한복음 14 : 15 -17 .26 주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예수 인식은 전적인 낯선 타자로서의 성령이 나라는 주체에 임함으로써, 나의 인식이 성령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예수 인식에 있어서의 주관과 객관은 성령에 의해 전 인격안에서 경험된다. 성령에 의한 예수 인식은 인간의 이성적 한계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절대적 낯섬의 경험이다. 이 경험 은 공동체의 압도당함인 동시에 공동체의 응답이다. 따라서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삶의 정황에서 성령의 역할은 공동체의 구원 확신을 강화시켰다. 요한 복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전승을 그들의 사회적 상황안에서 체험적 신앙으로 변화시켰으며 이 신앙의 기반에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있었다. 즉 예수 인식에 있어서의 성령의 적극적 역할이다.
2. 믿음과 지식의 연관성
2.1 하나님에 대한 믿음
는 믿다'혹은 -에 설득당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단순히 신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에 의존하다'는 의미가 담긴 믿다', -에 확신을 두다' 를 뜻하게 되었다.1)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었으며 1장 50절에서 처음 나타난다 (πιστευεισ). 인간에 대한 믿음과는 달리 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사용된다. 요한 복음에서 -를 믿다'인 라는 구문은 33회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어 he' mind 나 아람어 hemin b 를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2) 개인이 구체적 상황에서 자기로부터 나오는 확신을 버리고, 예수 안에서 도움을 발견하려 했을 때, 믿음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믿음은 현존 (status quo)을 깨뜨리며, 이때의 깨뜨림은 하나님을 지향한 가운데 에서의 믿음이다. 믿다 (he'emin)라는 히브리어는 상대방 앞에서 그가 약속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였다.3) 기적이야기는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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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선포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의미했다. 기적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한다 (요 2:11). 12장 37절에서 요한은 행해진 기적들을 보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열거한다. 20장 30 - 31절에서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적들을 사용했다. 믿는 사람들에게 기적은 그들의 신앙을 강화하는 표징들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적들이 많이 행해져도 신앙이 생기지 않는다(12:37). 기적들은 요한복음에서 (5,6,9,11장)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요한복음의 논쟁구조는 다음과 같은 유형을 따른다.
(a) 지극히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한다(예 3:3; 4:10; 5:17; 6:32; 7:16; 9:39; 10:25; 13:13).
(b) 종종 예수의 말씀을 오해해서 거부하거나 질문이 나왔을 때 뒤따른다(예 3:4; 4:11; 5:18; 6:41-42; 7:20; 9:40; 10:6,31; 13:36).
(c) 오해나 반대를 해명하기 위해서 예수의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예수의 해명이 또 다른 질문이나 반대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다(예 4:4-38; 6:33-58; 15:33-16:33). 다른 경우에는 예수의 자기천명의 긴 문장으로만 차지한다(예 3:11-21; 5:19-47; 10:7-18).
저자 요한은 이러한 긴 문장의 논쟁을 구성하는 정당한 근거로서, 15장 26절과 16장 13- 14절에서도 해명한 바 있거니와, 이러한 논쟁의 배후에 계신 보혜사 (The Paraclete)를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보혜사가 저자 요한을 통해 저자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예수의 말씀을 설명하신다는 것이다.4) 이 논쟁들은 유대인 대부분의 예수에 대한 적의와 불신앙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을 대조시킨다. 긍정적 믿음에는 영생이 주어지며 불신의 응답에는 심판이 결정된다. 예수는 믿는자 모두를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낸다(요 3:17; 12:47).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된다(20:31). 그리스도를 영접함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1:12). 믿음은 인간 실존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했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행위는 이러한 신뢰를 통해 실현되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다.
2.2 하나님에 관한 지식
는 지식을 얻다' 알게 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깨닫다' 이해하다' 또는 완전히이해하다'로 요한복음 13:12, 15:18, 21:17 등에 나온다. 과거시제에서 이 동사는 깨달아 알다 를 뜻하며 부정과거시제, 또는 일정한 때'를 나타내는 시제에서 항상 명확성'을 의미한다(요 19:4). 이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이해에 대한 것이다(요 10:15). 신약에서는 알고 있는 사람'과 알려진 대상'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점에서 알려진 것은 알고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아는 바'는 시인'을 암시하며 승인을 받다'는 의미를 낳는다(요 10:14,27). 지식 뿐만 아니라, 인식에 대한 동일한 사상이 신자 편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말씀의 근거가 된다 (요 8:32; 14:20,31; 17:3). 은 마태에서 20회, 마가에서 13(또는 12)회, 누가에서는 28회, 요한에서는 57(또는 56)개가 쓰인다.5) 는 알고 있는 사람과 알려진 사람 또는 사물간의 능동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는 그 대상이 아는 자의 인식 범위안으로 쉽게 들어왔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절대적 지식 곧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요한 복음에는 6:6,64; 8:14; 11:42; 13:11; 18:4에 나온다. 는 지식에 있어서 시초와 과정을 암시하나, 는 지식의 충만을 암시한다.6) 는 (보다)와 동일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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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현재완료시제로 원래의미로 보았다'또는 이해했다'였으나 후에 알다' -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다'는 뜻이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것이다(17:3). 진리를 아는 것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8:32). 그렇다면 지식은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 자신은 아버지를 안다. 예수라는 구원자가 하늘로부터 와서 땅에 내려와 그의 구원사업을 하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는 유형은 요한복음서에서 계속해서 반복 제시된다. 지식은 인식에 그치지 않으며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8장 55절, 13장 7절, 14장 7절 본문은 지식의 유무를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8:55 -
너희는 알지 못하나 나는 안다
13:7 -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 네가 알게 될 것이다
14:7 +- -+
너희가 알았더라면 | 이제는 알았고 |
+- -----------+그를
보았다
2.3 지식과 신앙의 연관성
지식( )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 나오지는 않지만 과 는 동사에 의해 제시되는 지식 은 요한 복음의 중요 주제이다. 과 는 동사는 동의어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두 언어 모두 단순사실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었다(7:51; 11:57; 9:20; 18:2). 그러나 요한은 신적 인격에 대한 인식을 의도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믿음도 내포한다.
6:69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
| 믿고 있습니다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복수
-+--
그리고 우리는 | 그리고:등위접속사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등위접속사 +-
알고 있습니다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복수
은 의 완료로서 우리는 믿게 되었고 또한 아직도 믿는다'는 뜻이다. 도 의 완료로서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한 아직도 안다'이다. 이는 믿음과 인식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음을 보인다. W. E. Vine은 그의 주석에서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구절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성장하고 있다고 해석했다.7) 과 의 완료형을 사용하는 것은 요한의 특징이다. 우리는 믿고 또 아는 상태에 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달았으며 또 그것을 붙잡고 있다 의 뜻이다. 요한복음에서 과 의 실제적 활용은 다음과 같다.
2.3.1 의 사용
3:18 :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6:69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목적격 남성 복수
8:31 : 분사 제1완료 능동태 목적격 남성 복수
11:27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1인칭 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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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2인칭 복수
20:29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2인칭 단수
:동사 분사 제1부정과거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
2.3.2 의 사용
5:42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1인칭 단수
6:69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1인칭 복수
8:52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1인칭 복수
8:55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2인칭 복수 : 분사 현재 능동태
14:7 :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인칭 복수
14:9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2인칭 복수
17:7 : 동사 직설법 제1완료 능동태 3인칭 복수
과 이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8)
6:69
17:3 : 현재 능동태 가정법 (주절) -계속하여 알아야 하는
3:15 :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믿는 이러한 동의어적 병행어구의 예는 다음과 같다.
11:42 「 」 『 』
17:8b 「 」
17:8c 『 』
17:21
『 』
위와 같은 동의어적 병행어구는 17장 3절, 16장 27-30절과 7장 17절, 7장 17절과 11장 27절, 20장 31절과 6장 69절에서도 발견된다. 여러번 이 먼저 나온다 (6:69; 8:31-32; 비교 10:38).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순서로 나오기도 하므로 (16:30; 비교 요일 4:16). 신앙이 그러한 과정의 시작이고 지식이 마지막으로 가정할 수 없다.9) 그러나 예수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며 그 어떠한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안다'는 예수의 독특한 주장이다.
7:29 나는 그를 안다
8:55 그러나 나는 그를 안다
10:15 나는 아버지를 안다
마태복음 11:27 및 그 병행구에 따르면 예수는 자기가 무제한적인 권한 위임과 하나님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전제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0)
요한복음은 하나님과 인간 존재 사이의 쌍방적인 인식형태를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및 인식이 구원의 때를 위해 준비되었음을 언급한다. 요한에게 구약에 관한 인식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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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편에서는 택함이었고, 예수 또는 인간 편에서는 인식과 인정이었다(참조. 요 5:19, 20a). 이 용어들은 본질적인 연합을 표현하기 위해 요한의 기독론에서 사용되었다.11)
3. 요한 공동체의 성령이해
3.1 요한 공동체의 상황
현대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명백히 인정되는 것은 저자인 사랑하는 제자'가 익명의 인물이고, 독특한 전승에 의존하여 그가 요한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그 전승을 수정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12) 요한 복음 11장 48절에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라는 언급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요한 복음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의 저작으로 추정될 수 있다.13) 요한 복음은 긴 담론 형식의 설교가 전승된 자료들이었다. 또한 주후 1 세기 경이 되어서야 현재의 본문을 이루었다. 주후 90년 경의 요한 공동체의 상황에는 유대교회와의 대립이 있었다. 요한 복음 본문에도 회당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3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9:22; 12:42; 16:2). 유대인들은 랍비중심의 회당제도를 건설하는데 기독교가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했다.14) 유대교의 박해와 추방에 대해 요한 공동체도 상당한 반발을 하였다. 유대교에 대한 대립의식은 복음서 곳곳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권위의 상징인 모세의 지위가 격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1:17; 3:13; 5:20; 6:46; 7:16 참조). 요한복음서가 쓰여진 주후 90-100 년경에는 교회가 점차 공교회로서 제도적/교권적으로 일정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제도교회가 자신의 교권을 점차 확립하는 동안,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지고 제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신화화된 예수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었다.15) 요한 복음을 만든 요한 공동체에는 교회의 제도화 과정에서 밀려났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주후 1세기말 교회가 안고 있었던 과제는 재림의 지연을 해명하는 것과 그리스도교적 종말론 문제, 교회의 제도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3.2 요한복음의 독립성
Goppelt는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 전승을 세 가지 점에서 다르게 구별한다. 첫째로 예수의 언어는 공관복음서의 개념과 언어를 사용했다는 확증이 있다. 요한복음의 언어는 팔레스타인의 에세네파로부터 시작되어 사마리아와 수리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펴져간 특수 언어적 발달경로를 따라 그 특성을 획득했다. 둘째로, 예수의 사역에 대한 요한의 전체 구도는 공관복음과 는완전히 다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죽음을 앞둔 유월절 때에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는다. 예수는 두세번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이러한 문학적 구성은 보다 중요한 차이에서 유래한다.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은 예수의 말씀을 강화(講話)형태로 제시한다. 이 강화들은 믿을만한 예수 전승을 해석을 통해 발전시킨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부활절 이후의 공동체의 상황을 지향하는 설교주제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요한의 주목적은 그리스도에 대한 공관복음적인 묘사 옆에 예수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예수의 모습에 대한 더 심화된 이해를 전달하고자 자신의 묘사를 나란히 병치시키는 것이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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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요한복음내의 고별설교
예수의 죽음 전날밤 예수의 생각은 대부분 성령의 사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요한복음서에서만 이 사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17) 요한복음내의 고별설교의 병행구조는 다음과 같다.
부분 A (13:1 - 32) 극적 장면의 소개 : 하늘의 만찬과 예수의 섬김 ---------------+
부분 B (13:33 - 14 : 31) 대화 : 그리스도의 가심과 오심 -------------------+ |
부분 C (15:1 - 25) 독백 :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
부분 B'(15:26 - 16:33) 결론적인 대화 : 예수의 가심과 보혜사의 오심 -------+ |
부분 A'(17:1 - 26) 부록 : 교회를 위한 기도 ------------------------------------+
고별설교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보혜사 Paraklet 를 약속한다. 그는 그의 떠나감을 통해서 보혜사가 오심을 가능하게 하고, 그의 자기 포기에서 그것을 간청한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 또는 <성령>이라 불리운다. 그는 진리의 인식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18)
3.2.2 보혜사 성령
요한복음 14-16장에 있는 성령에 대한 특별한 용어는 보혜사이다 (희랍어 parakletos 14:15-17,25-26; 15:26-27; 16:5-11; 12-15).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인지된 현존을 나타내며 믿는 자들은 가르치고 증인이 되며 그리스도를 영화스럽게 하며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예언자이다. 예수에 의해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 - 보혜사는 교회의 구조와 성례전 없이도 이미 부활과 영생을 지금 현재에 경험하는 믿는 자들의 옹호자이며 위로자가 된다. Barrett에 의하면 , 예수가 신자에게로 온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임재를 현실화시키는 보혜사의 개념으로 보완되었다. 예수가 죽음을 통해 떠나감으로써만 예수의 영적인 임재와 성령의 사역은 보장된다. 요한복음내에서 보혜사에 관한 언급은 14:16,17,26; 15:26; 16:7-15에 나온다.19) 요한복음에서 의 의미는 신약의 위로하다 ( )와 다른 용법을 고려할 때 잘 밝혀진다. (예언자적 권면)의 중요한 책임은 예수의 일을 통해 이루어진 (메시야적 구원)에 사람들이 이르도록 하거나 그러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있다. 보혜사(성령)은 기독교적 권면( )의 영이다. 보혜사( ) 라는 명사는 남성명사이다. 따라서 이는 추상적인 힘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인격의 영역에 속한다.
요한은 보혜사에 대해 말할 때 종말론적 언어들을 사용한다. 이는 16장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보혜사는 세상을 정죄할 ( )것이다 (...). 그것은 심판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고발하는 충고의 행위이다. 즉 죄, 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요한은 그는 앞으로 올 일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16장 13절)라는 말을 덧붙인다(...).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26) 그리스도가 이미 유효하게 했던 것을 작용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활동이 작용하는 종말론적인 연속체이다.20) 복음서 저자는 진리의 영'인 보혜사에 대한 언급에서 지식과 진리의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14:16 -17).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은 제자들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15:26 -27)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깨닫게 할 것이다.
3.3 보혜사 성령에 관한 복음서 본문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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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14:15 - 16 다른 보혜사를 구함
14:15 ; εαν αγιπατε με----+---------τηρησετε
1) 너희가 3) 사랑하면 2) 나를 | 5) 지킬것이다:동사직설법미래능동태
:동사가정법현재능동태 τασ εντολασ τασ εμασ
4) 내 계 명 을
14:16 ; καγω----------+--------------------- ερωτησω
1) 그리고 나는 | 4) 구할 것이다:동사직설법미래능동태
τον πατερα και αλλον παρακλητο
2) 아버지께 |3) 다른 보혜사를:명사목적격남성단수
| :형용사목적격 남성단수
|
『δωσει』 υμιν ιναμεθ υμων εισ τον αιωνα『 η』
2) 주실것이다:동사직설법미래능동태 5) 있게 하실것이다:동사가정법현재능동태
1) 그(아버지)는 (다른보혜사를) 3) 그는 4) 영원히 너희와 함께
14: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αγαπατε 는 만일 너희가 계속해서 사랑하면 으로 해석된다. 이 조건절은 15 -17a의 문법과 이어지는 15 -21의 사상을 지배한다.21) 사랑은 감정및 의지의 전체이며 구체적 행동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은 전적인 의무이며 권리이다.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은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계명을 굳게 지킨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본질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역사상 창조적 신인류들로 기록되어 왔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와 천상적 그리스도간의 긴장을 극복하고, 이미 종말론적인 삶에 참여해 있다. 계명 이 하나님 사라오가 이웃 사랑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창조적 신인류들의 사랑은 단순한 집착이나 감정적 도취가 아닌, 윤리적 결단이며 실천임이 분명하다. 사랑은 존재 전반에 파문을 던지고 예수가 제시한 계명의 본질이 사랑임을 스스로 증거한다. 지킬 것이다(τητησετε)가 τηρεω의 미래 능동태임을 주의해야 한다. 이 동사는 지켜보다. 보존하다. 준수하다. 유의하다 는 말이다. 22) 계속적인 사랑은 불순종을 허용하지 않는다.23)
14: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에서 ερωτησω는 기도를 나타내는 ερωταω로서, 16:23,26, 17:9에서도 -를 요청하다'라는 뜻이다. 다른 보혜사'는 παρακλεω에서 유래했다. 지금까지 예수는 저희들을 위하여 거처를 준비하실 일 (14:23)과 자기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여 선사해 주실 것(14:13- 14)을 약속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그러나 보혜사를 보내주심은 더 큰 위로와 더 큰 도움이다.24) παρακλητοσ는 법적인 조력자, 변호자, 대언자, 곧 타인의 소송을 변호하는 자로 나왔고, 신약에는 요한의 기록에만 나온다. 25) 보혜사는 예수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문맥상으로 예수와 보혜사와의 기능은 구별이 없어보인다. 이는 메시야 시대에 기대되는 위로를 말한다. 보혜사는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그의 일을 선포한다. 보혜사 성령은 권면의 영이다. 예수의 약속은 그가 보혜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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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옴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이점에서 보혜사의 인격과 예수의 인격이 분리되는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3.3.2 14:17 진리의 영과 세상안의 제자들
14:17; το πνευμα τησ αληθειασ
그 영은 진리의 영이다
ο ο κοσμοσ ου δυναται λαβειν
2)그분을 1)세상은 | 6) 맞아 들이지 못한다:동사직설법현재중간태
| +--- ου θεωρει:동사직설법현재능동태
5) +-οτι| 3) 보지도 못하고 αυτο 그분을
왜냐하면+--- ουδε γινωσκει:동사직설법
... 때문에 4) 알지도 못하기 현재능동태
υμεισ γινωσκετε αυτο
1) 너희는 | 3) 알고 있다 2) 그 분을
| +-- παρ υμινμενει:동사직설법현재
7) +-οτι|전치사여격 5) και 4) 너희와 함께 계신다
왜냐하면 +-- εν υμιν εσται:동사직설법미래
...때문이다 전치사여격 6) 너희 안에 계실것이다
<너희와 나란히, 너희와 함
께 집에 >
14:17 ;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4:17 ;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17:27 ; 16:13 ). 진리의 영은 자유케 하는 영이다. 요한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 을 말하고자 했다. 세상'과 너희'는 날카롭게 대조되어 있다. 인식에 있어서 세상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고 너희는 아버지가 아들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믿는 제자들이다. 하나님의 영은 바른 통찰력을 주시며 진리에로 이끄는 주체가 된다. 성령은 충만한 진리에로 인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요한에 있어서의 죄'는 예수의 하나님 됨과 인류를 위한 구원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는 마음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영이 가져다 주는 진리이다. 성령이 가져다 주는 지식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내포한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7:3) 요한은 위로부터 거듭 태어남을 철저히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영으로부터, 그가 선사한 진리로부터 기대한다. 26)
3.3.3 14:26 보혜사 성령의 역할
14:26;+-δε παρακλητοσ------------+ :동사직설법미래능동태3인칭단수
ο--+ 2) 보혜사:남성명사 7) 이 +--ο πεμφει ο πατηρ
그러나+-το πνετυμα το αγιον--+ 5) 보내실 | 3)아버지께서
1) 6) 성 령:남성명사 εν τω ονοματι μου
4) 내 이름으로
+- διδαξει παντα: 동사직설법
εκεινοσ υμασ|4)가르쳐 주실 것이다 5)και 3)모든 것을 미래능동태
1) 그 분이 2)너희에게 +- υπομνησει υμασ παντα: 동사직설법
:남성명사 8)생각나게 하실것이다 | 7)모든 것을 미래능동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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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 ειπον υμιν εγω
6) 내가 너희에게 말한
14:26 ;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가르침의 주체는 성령이고 대상은 너희'이며 가르침의 모든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부활이후, 보혜사가 오신 후에 제자들에게는 사실적으로 예수의 생존시에는 깨닫지 못한 예수의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참고. 2:21 - 22 ; 12 :16 ). 27) 보혜사를 언급한 14장 1-17,26절, 15장 26-27절, 16장 11-14절의 내용을 종합할 때, 보혜사는 예수가 떠나가신 후에야 오신다. 성령의 보냄은 아들의 보냄과 밀접한 병행을 이루고 있다.28) 보혜사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어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보혜사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간격을 메우기 위해 오신다.29) 그러나 보혜사는 단순히 예수의 사역을 계승하는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성령은 원래의 주어진 예수 교훈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진리로 인도한다. 이는 끊임없는 긴장을 야기한다. 성령의 역할은 예수의 말씀을 반복 제시함에 그치지 않는다. 또한 예수의 교훈과 전적으로 단절된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은 재해석과 새로운 계시를 가능하게 하며, 이 역동성의 진정한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보혜사는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조명한다기 보다는 이미 있었던 역사적 예수를 상기시킨다. 모든 가르침과 생각나게 함은 예수와 제자들을 연합하게 한다. 시공간의 분리와 내재적-초월적 분리를 극복하게 하는 연합이다. 제자들과 예수의 하나됨은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 지속적으로 경험된다. 종말론적 삶의 본질은 당시 요한 공동체에서나, 현재의 교회안에서 공유될 수 있다. 그 모든 종말론적 삶의 구현은 초월적 성령의 내주하시는 능력에 있다.
4. 성령에 의한 自我의 예수 인식
4.1 對象과 自我
역사적으로 인간 인식의 문제에서 정형화 되어온 질문이 있다. 인간 의식이 가지고 있는 인식하는 특성이 어떠한 것인가와 의식에 대해 타자인 (낯선) 존재자들을 객관적 실재성과 합치시키려는 인식에 의식활동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의식에 관계하는 물음은 선험적(transzendental)30) 이고, 그의 존재에 있어서 파악되어야 하는 타자는 초월적(transzendent)이다. 31) Husserl이 설명하는 超在와 內在의 양의성은 다음 도표로 설명할 수 있다.
+------------- 內實的 超在 (4) ---------------+
+---------- 現象學的 內在 (3) --------------+ |
+----------------------+-----------------------+--------------------------+
+--- 內實的 內在(1) ---+---- 志向的 內在 (2) --+ |
+----- 純粹超在 (5) -----+
1) 내실적 내재 (realle Immanenz): 구체적인 경험류
2) 지향적 내재 (intentionale Immanenz) : 구성된 지향적 대상들, 구성된 의미, 현상의 세계
3) 현상학적 내재 (phanomenologische Immanenz) : (1) + (2) , 순수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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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실적 초재 (realle Transzendenz) : 내실적 내재에 대립되는 초재, 인식 작용속에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
5) 순수초재 (reine Transzendenz) : 현상학적 내재 또는 순수 내재에 대립되는 초재
주관에의 귀환이라는 현상학적 태도는 (1) 내실적 내재에의 귀환이다. 이 주관은 (3)현상학적 내재로 확대된 것이다. 이는 주관의 생산적인 능력을 표현하는 말이다. 주관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이 된다. Husserl의 판단중지에 의해 일단 배제되었던 의식 초월적 존재 - (4) 내실적 초재 - 의 일부는 이제 noema 로서, 즉 주관에 의한 의미형성체로서 현상학적 의식 속에 되살려진 것이다. 선험적 전환이란 주관이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작용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선험적 (transzendental)이라는 개념의 참다운 의미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적극적이며 생산적인 기능에 있다. 32) 그러므로 성령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한 선험적인 영역에서 의미를 지닌 존재로 이해할 수 있는 인격이 된다. 초월성의 문제는 의식의 선험적 행위와 잠재력이 어떻게 초월적인 것을 그의 객관적 실재성에 있어서 알게하는가를 규정하는 문제이다.
Husserl은 의식내의 존재하는' 두가지 방식을 구별하여 제시한다. 초월적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과 내재적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이다. Husserl의 관념론은 의식내재성과 의식초월성을 더불어 고려함으로써 이중적이다. 선험적 ( transzendental) 영역안에서 대상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의식초월적인 존재란 의식의 제형태로 자기를 표명 sich bekunden할 뿐인, 의식에는 간접적으로만 알려지는 존재이고, 의식내재적인 본질이란 있는 그대로 의식 속에 현존 erscheinen 되는, 따라서 의식에서 직각적으로 intuitiv 파악되는 본질을 말한다. 33)
먼저, 내재적 대상을 향한 의식 작용은 그의 지각된 것과 하나의 단일체를 형성한다. 34) 예를 들어서, 강한 분노는 인위적으로 분리해 낼 수 없도록 나의 지각에 속해 있다. 분노와 이에 대한 내적 지각은 단 하나의 사고 작용을 형성한다. 반면에 초월적 대상을 향한 의식 작용은 의식에 대한 초월을 의미한다. 동시에, 여기에서 말하는 초월은 의식을 떠나서는 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내재적 초월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그 모든 것이 선험적35)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Husserl은 對象자체에 관계하는 인식은 그 근원을 의식의 인식작용으로 끌어들여가는 한 모두 선험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구체적인 의식 삶은 내재적 지각에서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다. 초월적 본질에 속하는 것은 비록 지각하는 의식 작용에 주어져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초월적 대상이 인간 의식 밖에 있는 영역에 있는한, 초월적인 것의 타당성은 어디까지나 추정적이다. 그러나 앞서 초월적'이라는 말을 transzendental로 이해하고 현상학적 내재에 속한 존재에 사용한다고 규정했을 때, 판단 중지로 인식이 시작되는 시점을 순화시킨 뒤, 다시 떠오르는 초월적 본질은 우리의 의식안에 들어오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인간 의식에 나타나는 것만을 다루게 된다. 지각 활동이란 주체에 속한 것이므로 대상의 지각 가능성은 주체의 의식 작용에 의존한다. 나의 의식이 능동적으로 인식을 수행하면서, 대상은 나의 의식 안으로 들어와 이해된다. 내재적 지각의 대상은 반드시 현존한다. das es ist da'를 말할 때는 대상의 존재가 아닌, 인식의 가능한 영역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현상학은 첫째 단계에서는 모든 존재를 포기한다. 그러나 이 포기는 처음에 분석적으로 나뉘어진 noema36) 적인 대상들의 층을 좀더 완벽하게 종합한 후에 다시 존재들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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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sserl 후기사상이라는 의식이 자기초월적이라고 할 때, 의식에서부터 의식초월적인 세계에로의 초월을 말한다. 그러나 자기초월적 의식은 의식외적 대상에로 초월해 있어서 대상곁에 있다. Brand는 의식의 이러한 특징을 세계를 경험하면서 있는 생 welterfahrendenes Leben'라고 한다. 선험적 판단중지에 의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생산적인 본질, 즉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선험적 주관성의 영역은 확대된다. 우리의 주관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성령은 이제 인식되어질 수 없는 절대 타자로서의 낯선 영이 아니다. 성령은 인간 의식 현상이 되어 신앙인의 시야에 들어온다. 성령 현상은 이에 상응하는 자아의 의식 작용과 본질적으로 상관관계를 이룬다. 성령 이해에 있어서 대상과 자아의 관계는 절대타자로서의 낯선 영이 자아안에 내주하는 영이라는 관계이다. 성령은 인식가능한 대상이 되고, 인간은 인식가능의 근거가 되는 자아이다. 여기에서의 성령은 신비이면서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것으로서의 성령이다.
4.2 인식가능한 對象- 신비적 타자로서의 성령
대상이 의식의 상관자로서 의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의 의식에서 이미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인식 가능한 대상이라고 해도 기독교적 고백안에서 인간 주관과 분리된 대상으로서의 타자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한 인간이 영으로서의 하나님을 만날때 그는 인식 가능성이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독특한 유일자 (the One)로서 대면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 타자 로서 인식한다. 인간의 의식 외부의 존재는 이미 인간의 관심사가 아니다. 하나님 역시 의식되어진 바'의 존재로 의식 흐름안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제한을 스스로 감수하는 인격은 성령이다. 이러한 제한의 목적은 예수안에서의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위한 것이다. 초대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초대받은 대상은 인간이다. Come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의 자기 인식은 그리스도 밖에서의 인간의 자기 인식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기독교적 신앙 고백을 이미 전제한 언급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타자가 있을 수 없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가장 내면적이고 주권적인 현존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의 분계선(分界線)은 결코 흐려지는 법이 없다. 오히려 더욱 뚜렷해진다. 궁극적인 실재안에서의 신 - 인 사이의 상호관계란 별로 의미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상호관계의 양자(兩者)를 모두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의 활동 안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던 자, 낯선 자, 이론 속에 감금시킬 수 없는 자로서 우리와 만난다. 38)
요한공동체는 신앙안에 있는 구성원들간의 결속을 강화하면서 역사상 있었던 예수에 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현재적 복음은, 과거 예수가 전했던 복음과 일치했다고 이해되었다. 역사적, 공간적 분리를 뛰어넘는 통일성이 전제되어야, 이들의 신앙고백이 반영된 복음서 역시 우리에게 의미있을 수 있다. 이러한 통일성은 지평 지향과 관련되어야 한다. 깨달음'은 이전과 이후를 연결시켜 준다. 과거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회상은 현재의 요한 공동체의 존립기반이 되었다. 요한 공동체 안에 선포된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는 현재의 역사속에 이미 임재한 성령으로 인해 구체화되었다. 공동체의 분파(sect)적 성향은 예수의 선포를 당시 역사속에서 있었던 핍박으로 인해 더욱 강화시켰다. 이들의 분리된 입장은 복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역설성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령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성령의 초월적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과의 관계를 실현시키고, 인간의 삶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실재가 될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관한 결정적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인간의 인식이 지향해 나가는 신앙대상은 역사적 예수와 천상적 그리스도의 합일된 존재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主로 고백하는 자아의 삶속에서 종말론적으로 경험된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그의 복음서 안에서 내려오고/올라가는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표현하면서 오해와 위협속에 방치된 요한 공동체의 상황을 결합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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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했다. 공동체에 알려진 지식은 동시에 신비였다. 39) 성령의 본질은 거룩한 신비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진정한 계약백성은 오직 예수에 관한 지식과 예수를 통하여 얻어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 (요한 1:14)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는 진리이고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14:6). 요한 복음 15 - 17 장은 믿는 자들 상호간에, 그리고 믿는 자들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에 관해 상세하게 말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 17장 25 -26절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40)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고,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또한 나를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자신의 약속에 의해서 自我의 예수 인식의 출발이 되는 신비적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설명한다. 성령은 인간의 자아 의식 안에서 파악가능한 초월적 존재를 스스로를 제한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에 의하지 않은 인식구조 안에서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인격적인 만남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예수 자신이 간구한 바대로,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결정적 전환의 때가 이미 와 있다. 스스로 제한하는 능력에 의해,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서 이해되어 지는 대상이 된다 (참고. 요 14:15 - 17).
4.3 인식가능 근거로서의 自我 - 내재적 인격으로서의 성령
Husserl에 따르면, 自我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내적 의식작용에 대한 안으로 뻗어나가는 반성을 하기에 앞서서 자기를 포함하는 세계와 대상에 지각적, 정신적 지향을 뻗친다. 自我의 지향성은 자아와 대상의 상관관계에서 증명된다. 자아극에서는 나 - 의식작용 - 의식된 것 (Ego - Cogito - Cogitatum) 이라는 도식이 산출된다. 그리고 대상극을 강조할 경우에는 질료 - 自我의 의미형성, 구성작용 - 구성된 의미 (Hyle - Noesis - Noema) 도식이 드러난다. 자아의 지향성은 계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세계경험을 해석한다. 기능하는 지향성의 주체인 자아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다. Husserl은 自我의 수동성과 능동성이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자아의 이성이 지니는 능동성은 수동적 감성을 토대로 한다. 우리는 자아 의식이 이미 주어져 있음'에 의존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Noesis가 Noema를 구성하려면 그 전에 먼저 Hyle가 주어져야 한다. 자아가 경험의 터전이 되는 수동적 이미 주어져 있음'의 영역을 가지고 있고, 촉발적 자극에 의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이상, 거기에는 이미 선험적 자아의 능동성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용성은 최저단계의 능동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아의 수동적 감성과 능동적 이성은 하나의 지향해 나아가는 자아안에서 함께 얽혀져 있다. 自我가 자기 자신에게보다 자아의 의식 흐름과 구별되는 외부 대상에 먼저 지향해 나간다는 것은 자아의 지향성을 특징지운다. 自我는 지향성에 의해 외적 대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아 자신과 자기 의식, 자기 인식으로 되돌아 온다.자아는 자기에게로 육박해 오는 외적 자극 들이나 대상들을 자기의 의식안에서 통합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한다.
자아의 작용은 대상화, 객관화하는 것이다. 자아는 인간 의식의 삶을 논리적 판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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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내며, 논리적 판단 이전의 단계인 선술어적(先述語的)경험인 지각에서도 대상화가 이루어진다. 41) 지향론적 분석은 의식의 전체 흐름안에서 이 대상화 작용을 분리하여 그 과정을 파헤친다.42) 自我의 의식작용, 사유작용은 의식 작용의 대상화된 내용이면서도 그 내용과 구분되는 대상자체를 설정하는 방식을 취한다.43) 실재는 자아의식에 의해서 비로소 의미적 존재가 된다. 선험적 자아는 일체의 초월적 존재들의 구성 원천이 된다. 자아를 매개로하여 일상적 의미의 객관적 세계 내가 아닌 세계'구성이 이루어진다. 순수 자아는 의식체험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일관하여 생동감있게 살아움직인다. 이처럼 순수자아의 내재에 있어서의 초월 이라는 성격 때문에 자아는 대상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을 불어넣으며 하나의 종합으로 이해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의미부여의 의식구성작용은 noesis이다. 질료인 Hyle는 noesis에 의해서 종합되어 연관지워진 의미로 형성된다. 이는 noesis의 지향적 상관자인 동시에 초월적 객체인 noema가 된다. noema역시 자아 의식의 구성을 이루는 이념적 초월의 객체이다.44) 지향성은 noesis의 본질이다. 이는 주관이 대상을 구성해 주는 능력이다.
Noesis는 체험 내용을 현존 (Dasein)을 지닌 것으로서 정립하여 의미 있는 본존 (本存, Sosein)을 지닌 것으로서 구성한다.45) 이는 기능하는 지향성으로서 끊임없이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현상 상호간의 종합 연관을 확립해, 그 것에 「어떤 대상의 현상」이라는 의미를 주는 의미 부여적인 노력, 일체의 경험적 실재의 통일적 연관이라는 의미의 통일체의 형성을 목표삼는 목적론적인 지향이라는 의미를 강화해 가는 것이다. 46) 지향성은 지향해가는 의식으로 의식외적인 대상과 끊임없이 관계하고 있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自我는 구성될 초월적 대상을 그 자체안에 지닌다.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의미는 그 어떤것이나 선험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험성은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그 정당성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성령은 예수에 의해 보내어 진' 대상으로 우리 존재안에 편입된다. 그러나 이에 머무르지 않고 의식의 근거로서, 의식작용의 주체로서 진리에로 지향해 간다. 성령은 모든 세계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원 영역을 이룬다. 자기 자신앞에서 몸소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하나님의 상징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의식하는 것 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한다.47)
요한에 의하면,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의 유일한 과제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회상케 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그들을 충만한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들의 특별하고 새로운 상황 속에서 예수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그들에게 보여주신다. 성령의 사건 속에서 정말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세계 속으로 개입하여 들어오신다는 것이다.48)
자아의 예수 인식을 위해서, 먼저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 (Hyle)이 있어야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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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성령은 아버지에 의해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어 지고 자아의 의식에 의해 의미지워진다 (Noema A). 성령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능력을 발휘하실 것이다 (Noesis) (참고.요 14:26). 예수의 선포는 빈번히 오해받았고 거부당했다. 신앙 공동체는 이제 하나님께 받은 진리로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다 (참고. 요 8:36). 진리의 성령은 예수를 증거할 것이다 (15:26). 진리의 성령은 신앙 공동체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오직 예수에 관한 것49) (Noema A')을 말하실 것이다 (요 16:13). 성령은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근거를 마련해주고, 역사적 예수에 관한 회상을 불러 일으키며, 다시 오실 천상적 그리스도에 관한 소망을 경험하게 한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내재적 인격이다.
5. 맺는말
인간 역사는 영의 자기 현현이다. 성령은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거나 제한한다. 하나님의 영은 자기 자신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거나 주장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포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요한복음에는 하늘과 땅으로 상정되는 대조적 구조가 있다. 이 사이에는 엄연한 단절이 있으며, 땅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알지 못했다. 예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왔고, 진리 인식은 진실한 신앙에 의한 것이라고 약속했다. 진리는 하나님의 사실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인식의 가능성과 긴밀히 연관지워져 있음을 살펴보았다. 지식을 표현하는 헬라어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 승천 이후의 남은 자들로서 격동의 역사 안에 던져져 있었다. 그들은 요한 복음을 통해, 영경험의 관련성 속에서 믿고, 또 아는 상태가 되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요한 공동체를 역사적 예수에 연결시키고 성령에 의해 예수를 천상적 그리스도로 만들었다. 요한 공동체는 영 경험을 통해 하나님 백성으로서 고양된 삶을 살게 되었다. 동시에 역사를 위한 책임적 삶을 요청받았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의 행함과 말씀 선포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신앙인으로서의 나'는 역사적 예수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과 동일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입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오심을 예고 했으며 미래의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도 종말론적 구원잔치를 약속했다. 성령 이해는 언어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실성은 기독교 신앙의 역동성 안에서 전존재에 압도해 오는 경험으로 입증된다.
하나님 인식은 초월적 성령의 내주하시는 능력에 의해 출발한다. 예수 인식에 있어서의 자아와 성령의 관계는 상호 지향적이다. 성령은 그 자체로 인간 자아의 인식 질료 (Hyle)가 되지만 진리에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식구성 작용 (Noesis)이다. 인간이 성령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는 의미는 성령 자체가 이념적 초월의 객체(Noema A)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자아는 성령을 인식한다. 성령 자신이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사실성 (Noesis A')를 말한다.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인격이다. 이는 자아의 내면에서 희미하게 인식되는 모호한 질료이다. 동시에 자아의 자발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성령은 인간 자아의 내실적 존재를 초월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비내실적이면서도 현상학적인 의식에 내재한다. 판단 중지에 의해서 일단 배제된 의식 초월적 성령은 작용하는 주관성의 상관자로서 의식속에 되살려진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인간 의식 가운데 인식되어지는 현상으로서 다루어지게 된다. 인간은 성령에 사로잡힌 바 되어 성령을 대상화 하고 성령에 의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여 참여한다.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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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 성령은 自我의 자아보다도 자아에게 가까이 있는 자명한 것의 비밀이다.
정리하면서...
「성령에 의한 자아의 예수 인식」은 나에게 93년 1학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령론' 첫 강의 때, 자기 자신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거나 열어 놓을 수 있는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 들었고, 나는 스스로 제약하는 힘으로 관찰 가능한 대상이 된다'고 끄적였다. 두번째 강의에서 전적으로 낯선 분'이라는 성령 이해에 정말 전적으로 낯선 인격일까 ? 인간은 다만 성령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 하고 다시 적었다. 여기에서 인식론과 연결된 인식대상으로서의 성령과 인식작용으로서의 성령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 하는 문장을 낙서했다. 세번째 강의에서는 인식론이 사물의 본질 (물 자체)에 접근하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말씀을 들었었다. 나는 낯선 곳에서 오는 하나님의 영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선천성'이라고 다시 낙서 했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을 인식하고 결단하여 행동한다. 그 때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일종의 환원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세번째 강의 필기에는 선험적 능력 =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이라고 고백함 : 본질을 직관함 = 성령의 빛안에서라고 고백함'이라는 낙서가 덧붙여져 있다. 나는 인간 인식의 자율성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 인식의 자주성을 하나님 영과의 관련성속에서 해명하기 위한 과정이 이 연구 과정이다. 낯선 분'이 나'의 슬픔과 기쁨을 헤아리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을 체험 뿐만이 아닌 언어로도 표현하고 싶었다. 정말 알고 싶었다.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끌린다는 이유로' 특정 철학 사상을 도구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김 희성 교수님께 처음 연구 주제를 들고 갔을 때, 나는 그다지 긍정적인 말씀을 듣지 못했다. 교수님의 연구 방법론과 내가 생각한 방법론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이러한 거리를 절실히 깨닫기까지는 두달이 넘는 거룩한 시간 낭비(?)가 필요했었다. 더구나, Husserl의 언어는 성령과 마찬가지로 낯섬 그 자체였다. 길을 잃은 듯한 절박한 심정에 어지러웠다. 한 시간 정도 정신에 채찍질을 하면서 읽고 나면 넘긴 책장은 채 두장이 되질 않았다. 나는 분명히 사유의 흐름을 분석해 내는 그의 사상을 성령의 인식과도 연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언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분석에 이르려면 얼마나 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지난 학기에는 이 상훈, 김 희성, 노 세영, 조 태연, 이 신건 교수님께 배우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중인지, 죽어가는 중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주요 내용을 구상할 무렵, 현대 신약학의 동향' 강의를 들으면서 성서 신학적 접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방법론은 조직 신학적 접근이었고, 먼 옛날 요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능력이 인간의 어떤 본질과 연관되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성령론'은 분명히 성서신학의 강의였다 ! 그제서야 교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요한 공동체가 말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정신없이 성경 주석을 했다. 결국, 비교적 일찍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론'시험 보기 한 시간전까지 헬라어 인용구에 점을 찍다가 제출했다. 교수님께서 안녕 ? ' 하셨는데, 순간 어... 별로 안녕하지 못해요.'하는 너무 솔직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웃으시면서) 아니 ! 안녕하지 못하다고 ? ' 나는 즉시 뉘우치면서 다시 어...' 하고 재빨리 물러나왔다. 이어서 시험을 보고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쓰면서) 나오는 길에 퇴근하시는 교수님과 마주쳤다. 같은 방향으로 전철을 탔다. 그 논문, 너무 양이 많아.' 저... 아주 고통스러웠어요.' 음. 고통스럽게 쓴 것 같아.' 그래도 나중에 사정없이 비평해 주세요.' 음.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 교수님께서는 연필및 말씀으로 이러저러한 논평을 해주셨다. 그리고 몇주 지난 후에 기억하고 있나 ? '하고 물으셨다. 나는 대답하면서도 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과연 정당하게 Husserl의 사상을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요한 공동체의 상황과 연결지울 수 있는 사상이었는지 다시 물으셨다. 그리고 성서신학적 방법론에서 요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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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보다 엄밀한 주석과 저자 요한이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분석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론의 정당성과 그 창의적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를 성서에서 많이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연구가 아직도, 自我가 보라의 自我인지, 요한 공동체의 自我인지, 복음서 저자의 自我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이 단순히 인식과 지각에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및 행동까지도 포용하신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논지가 과연 정당한가도 거듭 질문해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연구기간 동안, 주위의 귀한 조언을 들으면서 Husserl에 있어서 길 잃는 정도를 조금씩 줄여 나갔다. 손에 잡히지도 않을 진리가 과연 인식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가장 근원적이다. 가끔, 무의미한 짓을 하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한참씩 멍해지고 그랬다. 이러한 무의미성에 대한 도전의식이 지난 학기의 경험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이다. 선택한 방법론에 의해, 한 신학도 안에서 Husserl의 사상은 그 독특성을 변형시켜서 성령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다. 동시에 조직신학과 성서신학의 단절성과 연속성, 철학과 신학의 단절성과 연속성이 날카롭게 안에서 충돌했었다. 전존재로 경험한 그 멍해질 정도'의 충격과 기쁨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론' 강의와 관련하여 좌충우돌 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김 희성 교수님과 함께 이 윤일 교수님을 생각한다. Husserl을 선택하기까지 철학에 대한 감수성을 지키고 가꿀 수 있도록 많은 영향을 주셨다. 나는 그분에게 91, 92년에 걸쳐 논리학'과 현대철학'을 배웠다. 교수님께서는 철학적 사유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언제나 당당하셨다. 그 강의들을 떠올리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 때 처음으로 강의를 통해 날아오르는 법을 배웠다. 행복했다. 이런 만남이 계속되었던 4년 동안,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동시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
1) W. E. Vine. 「신구약 원어 연구 해설」 (서울: 로고스 문서 선교회, 1944). p. 108.
2) C. K. Barrett. 「요한복음 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p. 27.
3) L. Goppelt, 「신약신학I」, 박 문재역(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2),p.214-215.
4) 이 상훈. 「요한복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1993),p. 33.
5) 요한의 어휘들은 그 수가 적으나 자주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 중 많은 것들이 공관복음에서는 비교적 드물다 (예. 진리 「αληθεια」 참된 「αληθησ, αληθινοσ 46회」 , 아버지 「πατηρ: 하나님 118회」, 빛 「 ψωσ 23회」 등). 반대로 공관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표현들이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나오지 않기도 하다 (기도하다:πιοσευχεσθαι, 선포하다:κηρυσσειν, 복음을 전하다: ευαγγελιζεσθαι 등). C. K. Barrett. 「요한복음 I 」 (서울:한국신학연구소,1984), P.21-22참고.
6) V. E. Vine. 「신구약 원어 연구 해설」 (서울:벧엘성서간행사, 1986), p.63.
7) W. E. Vine, 「신구약원어연구해설」(서울: 로고스문서편집부,1986),p.147.
8) B. C. Barrett, [요한복음 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p. 502.
9) Ibid., p.502.
10) L. Goppelt,「신약신학I」, 박 문재역(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2),p.278.
11) Goppelt는 요한 저작에 앞서서는 고전 15:28, 히 1:8에서 바울에 의해, 마 28:19의 세례 정형어구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12) Norman Perrin & Dennis C. Duling 「새로운 신약성서 개론」 박 익수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p.519.
13) Ibid., p.519.
14) 한국신학연구소 성서교재위원회 「함께 읽는 신약성서」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2). p,281.
15) Ibid., p. 285-286.
16) L. Goppelt, 「신약신학」, 박 문재역(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2),pp.45-47.
17) Donald Guthrie, 「신약개론」, 나 용화.박 영호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8), p.243.
18) J. Moltmann ,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 박 봉랑외 4인역(서울:한국신학연구소,1992), p.48.
19) C. K. Barrett ,「요한복음II」 (서울:한국신학연구소,1986), p.283.
20) Barrett, Ibid., p. 142-143.
21) Barrett, Ibid., p.292.
22) 이 승범, 「원어설교」(서울:목회자료사,1984),p.440.
23) W. E. Vine, 「신구약 원어 연구해설」 (서울:로고스문서선교회,1984),p.255.
24) 이 상훈,「요한복음」(서울:대한 기독교 서회,1993),p.456.
25) W. E. Vine은 로마서 8:26 -34에도 이 의미가 나온다고 설명한다.
26) E. Schweizer , 「성령」, 김 균진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3),p.171.
27) 이 상훈, 「요한복음」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3),p.460. (참고 눅 24:25-28 , 44-45)
28) 8:42 ; 13:3 ; 16:27 ; 17:8 참고.
29) Ibid., p .457.
30) transzendental : 초월론적 transzendent : 초월적
31) W. Szilasi, 「현상학 강의」, 이 영호역(서울:종로서적,1987),p.123.
32) 한국현상학회 편,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 심설당, 1983), pp. 91 -93.
33) 한 전숙, 「현상학의 이해」 (서울:민음사,1984),p.68.
34) Werner Marx, 「현상학」, 이 영호역(서울 :서광사,1989),p.69.
35) Husserl은 선험적'이라는 개념을 선천적'이라고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식의 가능근거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36) 인식의 대상은 인식됨'으로 주관과 연결된다.
37) W. Szilasi, 「현상학 강의」 이 영호역 (서울: 종로서적, 1987), p.143.
38) E. Schweizer, 「성령」 김 균진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p. 83.
39) Weyne A. Meeks는 The Man from Heaven in Johanine Sectarianism"에서 예수 이야기가 요한 교회 공동체의 사회적 정체성을 강화했다고 말한다.요한공동체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인식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예수는 처음부터 알았고' 공동체는 이를 믿었다'.
40) H. C. Kee,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서 중석. 김 명수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p. 52 - 53.
41) 오 성현, 후설의 선술어적 경험에 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서울대학교,1990). Husserl의 판단이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선술어적 경험인 지각에서 논리적인 것이 이미 구성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술어적 판단의 본질적 요소인 대상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분석해야 한다. 자아의식 안에서 지향적 대상들이 함께 구성되어 있으며, 시간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지향되어간 대상들 사이에서도 직관적 통일성이 성립한다. 선술어적 경험에서도 대상화는 일어난다. 인간 의식은 자신의 지향성을 스스로 인식하거나 명료히 표현하지 못하는 술어화되기 이전 단계에서도 이미 역동적이다. Husserl의 질료학은 의식의 이러한 선술어적 측면을 분석한다.
42) 한국현상학회편,「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서울:신설당,1983),p.46.
43) 박 상훈, 후설에 있어서의 의식과 지향적 대상의 관계 - 논리연구 II를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서강대학교,1989). 自我에 의해 관념론과 실재론이 매개된다. 그러나 우리가 관념론에 집중할 때는 의식 작용의 전횡이 이루어 질 수 있으며 동시에 실재론에만 집중할 때는 주관성 영역의 축소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아를 이해할 때는 자아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인정해야 한다.
44) 윤 명로,「현상학과 현대철학」 (서울:문학과 지성사, 1987),pp.44 - 51.
45) Werner Marx, 「현상학」 이 길우역 (서울: 서광사, 1989), p. 60.
46) 木田 元, 「현상학의 흐름」 이 수정역 (서울: 이문출판사, 1989), p.42.
47) Paul Tillich, 「새로운 존재」 강 원용역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0), p.211.
48) E. Schweizer, 「성령」 김 균진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p.176.
49) 요 16: 1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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